신경쓸 건 오로지 그 씨가 잘 자라게 하는 일밖에 없다면
참 좋겠지만,
가라지가 섞여 있을 수 있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가라지는 악한 아들들의 발현을 가져옵니다.
즉 거짓믿는 이들입니다.
오늘날의 기독교안의 어떤 거짓 믿는 이들을 보십시오
어떻게 사람이 그것도 믿는 사람이 저럴 수가 있는가..라는 의문이 들지만
그들은 차라리 믿음이 없는 이들 세상사람들보다 더 못한 인격의 소유자들입니다.
어쩌면 마지막 때가 가까워지는 지금
그런 가라지들의 악한 행태가 보다 더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는 건
추수할 때가 가까워져 오고 있다는 증거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세상의 끝이 오고 있다는 건 한면 슬픈 일이지만
우리가 만약 참된 곡물들이라면 그 추수는 기쁜 날들일 것입니다.
신언을 할 때 예를 들기도 하고 비유를 들기도 합니다.
주님 자신의 말씀도 주로 비유를 사용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비유는 그 시대의 문화와 생활상의 영향을 받습니다.
윗트니스 리 형제님도 많은 비유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분이 청중을 휘어잡은 뛰어난 전파자였다는 것을 부인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사실 회복의 여름겨울의 훈련메시지에서 지금까지도 뇌리에 남아있는 것은
주로 비유로 말씀하신 것들 혹은 이형제님의 생활중에 일어난 일들을 예로 들어 말씀하신 것등 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것중
주님이 말씀하신 많은 비유들 중에 가장 뛰어난 것중의 하나는
씨뿌리는 자의 비유입니다.
비유는 그 시대의 문화와 생활상의 영향을 받기에
즉 주님시대는 농사가 그 시대의 주 산업이었기 때문에
주님은 씨뿌리는 비유를 드셨을 것입니다.
씨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우리가 주목해야하는 건 무엇일까요?
아래 그림은 빈센트 반 고흐가 그린 씨뿌리는 자라는 그림입니다.
아마도 그 모티브는 성경에 나오는 주님의 비유의 말씀이지만
모델은 아마도 19세기말 당시의 농부들이 들판에서 씨를 뿌리는 모습으로 표현되었을 ..........
그런데 여기서도 화가의 눈길과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씨를 뿌리는 농부가 석양을 배경으로 열심히
뿌리는 모습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말씀안의 뜻을 제대로 파악을 하였다면
우리가 주의해야할 것은
씨와 그 씨를 뿌리는 자가 아닌
그씨가 심기워지는 땅의 각각의 상태입니다.
땅의 상태에 따라 뿌려진 씨의 수확때의 결과가 각각 다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에 나타난 예로 볼 때는
말씀을 잘 깨달을 것과
환란이나 박해에도 넘어지지 않고
세상의 염려나 재물의 유혹으로 인해 말씀이 막히지 않도록 하는 것이
좋은 땅같은 마음의 상태임을 보이고 있습니다.
내 세대의 사람들은 어렸을 때 학교에서 매년 정기적으로 반공포스터를 그렸습니다.
그릴 때마다 북한 사람들은 빨갛고 징그럽고 뿔달린 동물로 표현되곤 했죠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라고
총칼을 들이댄 공비에게 극한 두려움가운데서도 토로한 한 어린이의 비참한 죽음은
한때 꽤 오랫동안 국민의 영웅으로 추앙되기도 했습니다.
사실 그 어린아이가 뭘 알았을까요.
그게 조작된 이야기란 말이 있었지만
정말 사실이었다하더라도 단지 어린이다운 순진함과 단순함으로
주입된 혐오감을 당차게 들이댄 것 뿐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전쟁이란 극심한 공포가운데 던져져 죽음이 언제든 닥칠 수 있는 상황에 있던
윗세대는 북한이란 존재자체가 혐오과 증오의 대상일지 모릅니다.
북한이란 카테고리가 쫌 애매하긴 하지만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그 땅에 사는 사람들까지를 포함하여 미움의 대상이 되는 것이 사실일테죠
하지만
사람을 압제하고 착취하는 북한의 정권은 분명 증오스럽고 혐오할만한 체제이나
그 안에서 살고 그 안에서 태어나고 자라고 살아야하는 사람들까지 몽땅 포함시켜야할까요?
심지어는 그 안에서 철저히 쇄뇌되어 남한을 철저히 적대시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사실 시대적인 상황이 북한에 대한 우리의 관념을 바꿔야함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종교적인 관념은 어떨까요
말을 하다보면 교회안에서도 이런 관념을 가진 성도를 보게 됩니다.
회복안에 있지 않은 믿는 이들은 구원을 받지 않았다고 단정하기도 하고
구원을 받았어도 유기적인 구원의 체험을 하지 못했다고 단정하는 것등입니다.
어쩌면 이것이 어느정도 우리가 회복안에서 갖고 있던 관념들중의 하나였을 것입니다.
구원에 대한 진리를 아는 것과
유기적인 구원에 대한 지표도나 원칙을 아는 것이 마치 유기적 구원의 실제인 것으로
혼돈하던 것도 우리의 관념중 하나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정말로 회복안에 있다면 그리고 회복되어 있는 중에 있다면
과거에 가지고 있던
사물과 사람 세상 그리고 진리와 그 실제에 대한
경직된 관념들에서 매번 새로워지고 회복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요
관념의 변화는 사실상 혼의 변화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왜 어쩌다가 우린 이렇게 됐을까
하지만 한가지 아는 것은
우리는 이 모든 것을 극복하게 되리란 믿음입니다
그리고
가을은 생각보다 무척 깁니다.
이제 끝났다 싶은 주일이 몇번이나 지나고 나서야
정말 끝이다 싶은 지난 주 가을
따뜻한 햇볕때문에 봄인줄 알고 튀어나온 얘는
이번 주 한파로 쏙 들어가고 말았을 겁니다.
현란한 색들의 조합은 자칫 촌스럽고 정신사납게 보이는데
가을의 단풍은 예외입니다.
삼청동 카페에서 내다본 거리
어쩌면 다른 나라 어떤 도시에서도
이렇게멋진 거리를 보기가 쉽지 않을 지 모른다고
맘대로 자신하면서..............
보이는 물질세계에 갇혀 사는 사람들은
굶거나 춥거나 병에 걸리는 생존에 위협에 민감할 수 밖에 없고
이런 일에 대해 쉽게 요동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주님도 이런 일에 대하여 긍휼이 여기십니다.
그러나
주님이 조금의 긍휼도 없이 단호한 심판까지 말씀하는 영역은
하나님과 사탄의 대립 즉 보이지 않는 영적 대립에 대해
사람이 함부로 판단하는 죄에 대해서 입니다.
주님은 안식일이던 뭐던 이런 것을 범하였다 정죄받음에 대해
크게 반응하지않으신 것과 달리
귀신들려 장애가 생긴 사람을 고치신 것을 가지고 사람들이 말할 때는
아주 단호하게 성령을 거스르는 죄의 심각성을 설파하셨음을
주의해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즉 우리는 보이는 물질세계 너머에 있는
영적인 세계에 대한 인식을 끊임없이 늘 새롭게 가져야한다는 의미입니다.
물질세계가 옥죄는 것이 더 심해질 수록
우리가 믿음으로 있는 영역인
더욱 영적 영역에 대해 돌이켜야 하며
그럴 때만이
우리의 싸움은
사탄과의 싸움임이
더욱 분명해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우리에 대해 갖는 여러 감정과 느낌중
가장 밑바닥에서 우릴 받치고 있는 건
바로 우리에 대해 불쌍히 여김 입니다.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니며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며
너무나 나약하고 비참한 상황가운데 떨어져 있다고 여겨질 때
그래서 아무 것도 기대할 수 없다고 절망하고 포기할 때
예기치 않았던 하나님의 긍휼이 우릴 덮습니다.
긍휼은 그런 것입니다.
독자를 잃은 나인성의 과부에게 주님이 아들을 살려 돌려보내 주신 것과 같이
그건 단지 그녀의 슬픔 절망에 대한 하나님의 긍휼이었습니다.
주님이 그녀의 아들을 살려줄 때 무엇을 댓가로 기대하였을까요?
그저 그녀의 놀랍고 감사에 넘친 눈물 뿐이었을 것입니다.
사실 시간이 갈 수록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것은
우리의 할 수 없음
우리의 하나님께 되돌릴 수 없는 한계와 나약함뿐입니다.
그럴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성경지식이나 메시지개요나 권면이 아니라
그저 우릴 긍휼히 여기소서라는 토함에서 얻는 그분의 돌봐주심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을 체험하는 경험을 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귀한 체험이며
가장 자랑할만한 체험일 것입니다.
더 나아가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길 참된 힘을 얻게 될 것이고
그건 그날 주님의 심판대에서 하나님의 긍휼을 얻게 해 줄 것입니다.
우리 사람은 외적 내적으로 약하고
스스로를 보호하는 일이 너무나 버겁기 때문에
강력한 힘에 기댈 수 있으면 좋겠다라는 환상을 갖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없는 모든 이방족속들은
강력한 국가와 왕아래 뭉치게 됩니다.
과연 그게 좋은 일이었을까요?
왕이 하는 일들의 대부분은
세금을 거두고 그들위에 압제하고
병사로 징집하여 전쟁을 하는 것입니다.
이게 과연 보호를 받는 일이었을까요?
하나님이 없는 이방인들은 어쩌면 그런 식으로라도
보호책을 마련할 수 밖에 없었노라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왕중왕인 하나님이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보호하셨던 이스라엘 백성은 왜 왕을 요구하였을까?
바로 이것이 그들이 하나님을 믿는 대신
땅에 속한 왕을 믿는 쪽으로 돌아섰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가장 기초적인 것은
우리의 믿음을 오직 하나님에게만 두는 것에 있는 것에 있다는 것이 새롭습니다.
하지만 이것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은
우리의 믿음이 다른 주머니를 차게 되는 것
다른 의지할만한 것을 세우는 순간부터 입니다.
사람이 사람에게 할 수 있는 모욕적 말이 많이 있지만
그중의 하나가 사람이 될려면 아직 멀었어..라는 말일 것입니다.
이 세상에도 사람이라면 이 정도의 인격과 됨됨이는 갖춰야한다는
기준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즘의 우리나라의 위정자들 소위 지도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들의 행태를 보면
사람이 되지 못한 사람들, 사람이 될려면 아직 먼 사람들의 집합체가 아닌가 싶은 생각마저 듭니다.
더하여 기독교계의 지도자들을 보면
2000년전의 주님이 이땅에서 보셨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모습이 저러하지 않았을까하는
그래서 아아도 주님이 오늘날 그들을 향해
회칠한 무덤아~라고 일갈하실 수도 있겠다싶은 생각마저 드는데요
답답하고 어이없는 마음에
왜 이럴까?는 생각만 하다
마음의 평강을 위해
이런 의문에 대한 답을 얻어야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도덕과 윤리가 중시되는 사회적 분위기
더 나아가
법과 처벌이라는 엄격한 틀이 적용되는 사회적 분위기라면
사람안의 무겁고 어두운 죄의 본성이 드러나지 않을 지 모르지만
반대로
그 모든 것이 느슨하게 된다면
2014년 대한민국의 실상과 같이 되게 될 것이란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신음하며 혼란스러워 하는 이즘
우리의 소망과 희망은 어디에 있을까요
그들은 그냥 놔둬라
하지만 너희들은 사람이 되라.
너희를 낳은 아버지가 너희에게 원한 그대로의
참 사람이 되라.
여행이 주는 의미는 다 다릅니다.
제게 있어
궂이 꼭 찾아가 보고 싶게 만드는 곳이 있다면
가능한한 아직 관광개발자들의 발길이 닿지 않은
창조주가 만든 그대로의 광경을 볼 수 있는 곳에 가 있어 보는 것입니다.
갖가지 사전정보가 제공되는 이즘은
사진으로 상상한 것보다 실제로는 실망스런 곳들이 많습니다.
하와이의 오하우섬하면 그저 와이키키 해변을 떠올리지만
그섬의 북쪽 끄트머리에는 길조차 닦여있지 않은
원래 그대로의 해변이 펼쳐져 있는 곳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확실히 이땅에서의 자신의 입지 부귀영화 이득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땅의 임금이 주도하는 세상에서 득세하는 것과
하나님의 왕국에 충성하는 것과는 병립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미 세상과 영합한 타락한 기독교는 이에 해당되지 않지만
적어도 대쪽같이 하나님의 경륜을 쫓는 주의 회복안에서는
이런 간증을 가진 지체들이 많을 거라 봅니다.
그러나 이미 이 세상에서는 별로 얻을 것도 도달할 것도 없는 사람은
희생이란 말에 좀은 머쓱해질 수도 있을지 모릅니다.
어찌보면 저도 그와같은 부류의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저의 소싯적 꿈은 이미 세상과 등을 지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어떤 굴레 어떤 관습 어떤 규례와 상관없이
배낭에 스케치북과 연필하나 꼽고 한 마을에서 다른 마을로 자유롭게
떠돌아다니는 삶이었기 때문이죠.......
자유...그러나 이 세상은 참다운 자유를 줄 수 없는 거대한 감옥이란 것.
그럼 어찌해야겠습니까
어떻게 이 감옥을 벗어날 수 있을까요?
어느 정도 회복안에서 세월을 보내고 난 후의 결론은
오로지 하나님의 왕국안에서 신성한 생명의 다스림안에 참여하는 수준에 이르렀을 때 입니다.
즉 오로지 참되게 이기는 자만 참된 자유를 얻게 될 것이란 것이지요....
자신만 자유로울 뿐 아니라
다른 사람도 자유롭게 하는 것이 그의 일이기 때문에
주님과 함께 공동왕으로서 다스리는 것은
결코 다른 사람을 압제하거나 명령하거나 겁주거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왕으로 다스리는 것은
사람들을 신성한 생명의 공급으로 소생시키며 풍요하게 하고
하늘에 속한 내적인 빛으로 어두움과 두려움을 내어 쫓으며
더이상 슬픔과 억울함과 헤어짐과 부당함이 없도록
의와 공의로 판결하게 될 것입니다.
새삼....
나의 소식적 꿈과 주님의 뜻은 같은 것이었단 발견을 하게 됩니다.
우리 나이 사람들은 많은 내적 외적 변화가 있게 됩니다.
타고난 올빼미과인 저도 예외없이 새벽에 일찍 눈이 떠지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흑^^
또 하나는 퇴직이라는 큰 변화를 겪게 된다는 것.
그럼으로 인해 본인과 같이 사는 가족이
퇴직전과는 다른 형태의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퇴직후 어떻게 살 것인가를 미리 미리 준비해야할듯 위기감을 조성합니다
그럼 믿는 우리는 어떨까요?
아침을 먹다가 우연히
목사로 교회에 헌신하다가 은퇴하게 된 전직가수가 다시 가수로 복귀한다는
인사를 하는 티비프로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걸 보면서 첫번째로 느낀 건 엉? 교파에는 목사가 퇴직하는 제도가 있네?
그런데 회복은 왜 그런게 없지?라는 지극히 천연적인 반응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정말 회복에는 명문화된 제도가 없다는 걸 확인하게 됩니다.
소위 책임형제님들의 봉사에의 연한은 언제까지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외적인 답은 없다는 거죠
단지 거슬러올라가 보면 그런 예는 있습니다.
1980년대 윗트니스 리 형제님은 미국에서 대만으로 건너가셔서
새길에의 실행을 권유하셨는데,
대집회가 아닌 소그룹으로 모이는 것
그리고 집회소에서 부흥회를 하는 것보다
한집한집 찾아가서 복음을 전하고
침례를 주는 주님이 보이신 길을 따라가는등의 실행을 실험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랫동안 책임형제의 위치를 가져왔던 나이든 봉사자들이 보다 젊은
동역자들에게 봉사를 물려주도록 권유하였습니다
그 결과 대만의 교회들은 신선해지고 새로운 간증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지금와서 생각해보니 참 대단한 일이었다는 생각입니다.
왜 리형제님은 미국이 아닌 대만으로 가서 이런 본과 이런 실험을 세우셨을까는
소위 대만교회들의 책임형제들이 리형제님의 권유에 따라
선선히 책임형제라는 직함?을 내려놓았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대만교회와 리형제님과의 관계는
마치 사도바울과 디모데의 관계처럼
아비가 아들에게 꺼림없이 이런 저런 권유를 하고
아들은 아비를 존경하며 그 뜻을 순종을 하는 관계처럼
친밀하고 절대적인 신뢰관계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책임형제들이 은퇴?를 한다고 해서
마치 교파의 전직 목사가 다시 가수질을 하는
전격적인 변화의 삶을 갖게 된다는 것은 아니고
또 아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전직목사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그분이 목사로서 어떤 삶과 어떤 헌신을 하였는지 모르지만
그분의 목사직은 그저 직업에 불과하였다는 한계를 드러낸 것입니다.
그러나 회복안에서는 어쩌면 책임형제의 존재감은 시간이 갈 수록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생명에의 무게와 간증에 있는 것이고 그런 것이어야한다는 사실입니다.
결론적으로 현재 누군가가 책임형제인지 아닌지는 그다지 의미가 없는 일이겠죠
따라서 교회안에 어떤 답답한 고인물이 느껴져도
교파처럼 책임봉사의 연한을 정한다면 회복은 종교로 타락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보다는 보다 선명한 생명에의 단계가 보이는 간증이 더 드러나길 갈망합니다
이 세상의 가장 큰 빽은 한시적인 권력보다는 돈 즉 물질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돈이 많이 벌려고 애쓰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왜 상상도 안갈만큼의 부를 쌓은 재벌들은 족하게 여길줄 모르고
더 많은 돈을 끌어모르려 혈안이 될까 의문이 듭니다.
옛말에 부자가 3대를 못간다라는 말이 있는데요,
3대쯤 되면 부하게 자란 손자녀석이 뭘 모르고 온 재산을
다 탕진하기 때문일 겁니다.
하지만 재산이 너무너무 많으면 손자가 한동안 탕진을 할지라도 남은 재산이 여전히 많고
그 다음대에 원상복귀를 할 테니 결코 망하지 않을 거란 계산이 나옵니다.
그래서 앞으로 재벌은 결코 망하지 않고 점점 더 부를 쌓으며 결국 세상을 손아귀에 넣게 될 거라는
가정이 성립됩니다.
그래서 주님이 다시오셔 쓸어버릴 때까지 재력의 고공행진은 계속될 거라는 걸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남은 다른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박탈감을 느끼거나 혹은 점점 더 가난하고 착취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럴 때 믿는 이들은 어떻게 이런 세상사를 헤치고 나가야할지요...
주님이 성육신되셨을 때 그는 목수의 아들이셨습니다.
사실 목수라는 직업이 오늘날에는 그다지 고급직업이 아니지만 그 당시는 어쩌면 어느 정도 먹고살만한
직업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함에도 결코 부자였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더하여
주님이 물질에 대해서 특히 부자들의 탐욕에 대해 많이 경계하셨기에
상당히 금욕적으로 사셨을 거란 오해를 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주님의 옷을 군사들이 3쪽으로 나누어 가졌는데 남이 입던 옷을
그것도 로마의 군사들이 쪼개 가질만큼 그들이 월급이 형편없었을까요?
어쩌면 주님을 따르던 귀부인들이 주님에게 쓸 것을 공급하였던 바 최고급의 재질로 된 긴 천, 그 당시의
남자들이 두르던 , 그런 것이었을지 모릅니다.
주님은 사양하지 않고 개의치 않고 최고급의 천으로 된 속옷과 겉옷을 입으셨을 것입니다.
와이키키해변은 단지 해변뿐만이 아니라 해변안쪽의 고급물건을 파는 상가들이 밀집되어 있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딱 눈길한번만으로도 흠 멋있군 무엇보다도 너무나 잘 맷치가 되게 진열한 솜씨에 감탄하게 됩니다.
그래서 모든 여자들이 여길 쇼핑의 천국이라 부르는구나
그럴 재력만 된다면 그냥 콕 집어서 들고 나오고 싶게 할 만큼 유혹적입니다.
요즘 부러우면 지는거다라는 말이 유행어라고 합니다.
흠 멋지네 디자인이 좋구나, 재단이 훌륭하구나 거기에다 나한테 잘 어울리겠는데?라는 수순으로 생각이 미칩니다. 뭐 그다지 나쁜 상상은 아닙니다. 입어서 멋지게 보일 거란 상상은 즐거운거죠.
적어도 그런 걸 볼 줄 아는 안목?과 소화시킬만한 능력이 있다는 확인은 나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걸 가지지 못해 슬프다 비참한 생각이 든다라면 지는 것입니다.
세상에 지는 것이고 사탄에 지는 것이겠죠
주님을 따르는 많은 사람들은 그런 마음으로 세상을 살았을 거란 생각을 해 봅니다.
주님도
사도 바울도
그리고 그후의 많은 선진들도....
공평한 민주주의가 잘 발달한 나라라 할지라도
여전히 빽이란 것이 존재합니다.
사실
2014년 대한민국은 오직 빽있는 자들만이 잘나가는
빽나라라는 걸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혹 이런 빽있는 자들이 부럽다고 생각하십니까?
혹 이런 것이 주어진다면 받아들일 생각이십니까?
사실 이런 유혹을 뿌리치기란 쉽지 않습니다.
믿는 자라 할지라도
내가 혹은 우리 집 가장이 공직?에 나가지 않는 한
그래서 나중에 문제가 되지 않는 한
누군가의 빽으로 내 자신이나 자녀들이 득을 보는 일을
과연 마다할 수 있을까요?
솔직히 저라면 뿌리칠 어떤 명분을 스스로 찾지 못할 거 같습니다.
그것이 불법인 것이 분명하지 않는 한.......
혹은 주님이 안에서 아니다라는 느낌을 주시지 않는 한.....
.
하지만
우리 믿는 이들은 세상의 그 어떤 지위에 있는 사람보다 그 위에 있는 빽이 있다는 사실을
잃어서는 안됩니다.
빽이 있음에도 그 빽을 누릴 줄 모른다면 잃은 것이나 다름 없기 때문입니다
이 빽을 제대로 누리는 방법을 모르기에 빽이 있으나 사용하지 않으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 입니다.
헌데 이 빽은 세상의 빽과는 다릅니다.
때로 아주 미련하게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빽의 위력을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세상 권력도 두렵지 않습니다.
그래서 때로 미련한 길을 가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용감할 수 있는 것은
위에 있는 빽을 믿어서 입니다.
.
이 세상사람이 보기에 가장 큰 어리섞음은 주님을 정직히 따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름뿐인 기독교는 회복의 길을 비웃을지 모릅니다.
당장 걷는 것이 급하고 당장 병나음이 문제이지만
주님은 죄사함이 먼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그것을 취하면 주님이 병나음과 치유를 주시기도 합니다.
그렇지 않을지라도 죄사함이 더 중한 것입니다.
지방교회안에 돈 있고 빽있고 사회적인 지위가 있고 행위도 완벽하고 선한 멋진 사람들 대신에
그저 구원받은 죄인들, 돈없고 빽없는 사람들만 득실거린다면
어떻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의인을 위하여 오지 않으시고 죄인들을 위하여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안에 돈 있고 빽있는 사람들이 오는 것을 너무 좋아하거나 높이는 경향이 있지
않길 바랍니다.
대신에 주님이 절실히 필요한 죄인들 그래서 구원받음을 인해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로 인해
찬양하길 바랍니다.
교회생활중에 어떤 분들은 지극히 종교적인 경향으로 발전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제어하고 다른 사람들을 제한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각각 자신이 가진 잣대로 누구는 너무나 금욕적이다
누구는 너무나 제한이 없다하고 판단을 합니다.
그것이 죄가 아닌이상 그것이 세상이 아닌이상 각각의 잣대를 내려놓고
그 사람이 주님안에서 주님을 기뻐하고 삶을 즐기고 주님을 찬양하는 것에 있어 자유하다면
그를 누가 감히 정죄하겠는지요......
사실 우리를 정죄하지 않는 주님이 있는 한
그런 주님의 지지와 인정을 받고 있는 한
우리는 가장 큰 든든한 빽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영으로 사는 것이 어떤 것이냐에 대한 답은....
영으로 산다는 것은 영으로 사는 것이다
라는 대답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처럼,
영적 생명의 성숙이란 어떤 상태인가라는 물음은
그 자체가 우문일 수 밖에 없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이를테면
아이가 어른을 보고 어떻게 그렇게 어른이 되었어요?라고 묻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하지만 아이들은 어떻게 성숙한 어른이 되는가에 대한 확실한 답을 얻을 수는 없다하더라도
다 큰 어른들의 어떠함을 보고 흠모하여 소망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안에서 이런 모델로는 파란만장한 삶을 산 야곱과 요셉일 것입니다.
엄마의 태에서부터 형의 발꿈치를 잡는 악바리같은 탐욕과 모사로 똘똘뭉친 야곱이
모든 것을 가진 오직 옥쇄외에는 파라오와 같은 권력을 가진
아들요셉을 만나러 가는 담담한 그의 뒷모습으로 바뀐 것에서
우리는 성숙한 자의 어떠함을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아버지의 특별한 사랑으로 부러울 것이 없이 귀하게 자랄 뿐 아니라
형제와 아비 어미조차 자기에게 엎드려 절하는 꿈까지 하나님으로 부터 하사받은 그래서
기고만장했던 꿈쟁이 요셉이
자기를 노예상한테 팔아먹은 형제들이 자기앞에 조아리고 섰을 때
결코 자신의 권력을 사용해 벌을 주거나 조롱하거나 으스대거나하는 반응을 보이는 대신
그 모든 것뒤에 역사하신 하나님의 주권적인 환경을 이해하고 찬양하는 모습을 보인 것에서
성숙한 자의 하나님의 주권적인 안배에의 이해를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한때 교파에서 회복으로 돌아온 분들이 하는 회복에 대한 평가는
말씀도 너무 좋고 진리도 너무나 높은 반면에
실재는 너무나 부족한게 아니냐?는 것입니다.
맞습니다.
그것이 현재의 대부분의 우리의 실상입니다.
사실
만약 회복의 이상에 대해 우리가 절대적이라면
현재 대부분의 우리가 영위하는 느슨하고도 무기력한 생활을
결코 유지할 수 없을 것임에 대해 동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즉 우리의 학교생활 사회생활 결혼생활을 포함하는 우리의 전 존재는
오직 하나님과 그분의 경륜을 위한 것이어야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로지 교회의 건축 그리스도의 몸의 건축을 위해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감히 예스라고 말할 사람이 얼마나 될는지 모르겠습니다
한때
내 자신에 대해 무지하고 자신의 실재에 대해 스스로 과대평가한데다
모든 것을 주님과 교회에 다 헌신할 것이라고 스스로 믿었을 때는
문제될 것이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했었습니다.
다른 모든 곡식단들이 나를 향해 절하고 해와 달도 내게 절하였도다~ 하면서
감격에 겨워하는 약속된 꿈을 가진 작은 꿈쟁이 요셉처럼 말입니다.
다만 주님이 보여주신 이상이 있고 그것을 보고 따라가는 사람들이 있기에 당장이라도
주님의 몸은 완성되고 주님은 곧 다시 오실 것 같았던 감격에 겨웠던 것은
단지 출발선에 선 것에 불과했을 뿐인데 말입니다.
요셉의 경우
누가 그에게 너는 많은 고난을 당할 것이다라고 말해주었을까요?
혹은 그런 와중에도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실 것이다라고 위로를 했을까요?
아무튼
신기하며 놀라운 것은 여전히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셨다는 것입니다.
그러하므로 감옥에 여전히 갇혀 있는 죄수의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는 특별한 어떤 것이 있다는 것을
간증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비록 우리의 신분과 상황과 처지와 현재의 모양새는 형편없을지 모르지만
다른 사람이 보기에 뭔가 좀 특별한 것이 있음을 감지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그 특별한 것을 담대히 그리고 자신있게 드러낼 수 있을까요?
그래서 우리가 본 이상을 여전히 선포할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