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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막의 체험
Ezra Zion , 2014-07-08 , 조회 (101) , 추천 (0) , 반대 (0), 스크랩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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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막의 체험
성막의 체험
성막의 체험

폴 한 형제님의 교통


[특별교통] [폴한 형제님 특별 교통]성막의 체험1-그리스도를 제물들의 실제로 누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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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사표를 올리다! 4월 13일 새벽
Ezra Zion , 2013-04-13 , 조회 (94) , 추천 (0) , 반대 (0), 스크랩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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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사표를 올리다!

나는 이 땅에서 나에게 남아 있는 할당된 시간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고려해 봅니다.
이제 나는 주님의 이끄심에 반응하여, 인류 역사 안에 펼쳐지는 신성한 역사 안에서 살기를 선택합니다.
나는 나의 온 일생을 바쳐, 왕국시대로 시대를 전환할 시대적인 도구의 일부가 됩니다.
나는 실지로 이것에 참여하기를 원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권익을 위하여 그리고 아버지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하여 그리스도께 헌신합니다.
나는 전쟁을 위해 준비되고 훈련받았습니다. 그리고 나는 나의 남은 일생 동안 전쟁터에서 살게 될 것임을 깨닫습니다.

이제 大山 형제가 움직이려 합니다.
서쪽으로 갈 것입니다. 예루살렘을 향하여 갈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약 경륜에 따라 온 땅이 그리스도의 왕국이 될 때까지 하나님의 왕국 복음을 전파하며
이 두 손으로 천막을 만드는 일을 하여 나와 내 일행에게 필요한 것들을 공급할 것입니다.
기도와 말씀과 믿음으로 그리고 행동함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나는 정말로 꿈꾸는 자이며, 나의 인생은 꿈의 인생입니다. 
매일매일 나는 나의 이상에 관해, 나 꿈에 관해 말합니다.
나는 꿈꾸는 자입니다. 나는 꿈꾸는 자이기 때문에 모든 것을 이상에 따라 합니다.
비록 어떤 것은 아직 통과하지 않았지만, 나는 내가 본 그것에 따라 말하며, 나의 이상이 성취되는 것을 발견합니다.

“주님, 누구십니까?”, “주님, 무엇을 해야합니까?”(사도행전 9:5, 22:10) 
사도 바울의 이 두 가지 위대한 질문이 바로 2010년 전시간훈련에 들어갈 때의 저의 기도였습니다.

2010년 전시간훈련 1년차,
그 해의 여름훈련 메시지, 이사야 결정 연구에서 
주님은,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해 갈꼬』라고 말씀하셨다(사 6:8上). 
저 또한 응답하였습니다. 『내가 여기에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사 6:8下).

그 해의 가을 해외복음 개척훈련 및 섞임 가운데,
저는 중국, 캄보디아, 미얀마, 방글라데시, 인도 등지에서 주님의 움이심을 보고 느낄 수 있었습니다.

2011년 2년차 훈련의 가을 무렵,
주님은 저에게 보다 구체적인 부담을 주셨습니다.
동역자들을 통하여, 주님은 LMA (주님의 아시아에서의 움직임)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고 훈련 졸업이 가까워진 시기에, 
주님은 사업을 통하여 나아가는 것에 대하여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것이 내가 나아가야 할 길이다고 느꼈습니다.

사업을 통한 나아감은 
개인의 부귀를 누리기 위함이 아닌, 그리스도의 몸의 교회들 곧 많은 지체들의 유익을 위한 희생입니다.
여호수아 3장의 제사장들이 언약괘를 메고 강밑바닥에 버티고 서서 모든 민족들이 넘어갈 수 있도록하는 그림과 같다.
나는 왕국복음을 위하여 많은 지체들이 전시간 봉사자로, 섞임으로, 이주함으로 움직일 수 있도록 돕고 싶다.

그러므로, 저는 움직입니다. 우선 움직여 봅니다.
우선 일본과 중국을 거쳐, 베트남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그후에는 계속 서쪽으로 전진해 갈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예루살렘까지.

오직 자기의 하나님을 아는 백성은 힘을 보일 것이고, 행동을 취할 것이다.
But the people who know their God will show strenth and take action.(RCV) - Daniel 11:32

저는 이번 여행을 길을 혼자서 시작합니다. 
그러나 이 몇 년 안에 주님이 저와 함께 할 일 할수 있는 동역자들을 주시고, 이들과 함께 팀(Team)을 이루어 한마음 한뜻 가운데 움직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저를 돕는 배필을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2013년 한국, 일본, 중국의 여행의 목적
①몸 안에서 지체들과의 교통과 기도을 구함
②팀으로 함께 움직일 동역자들을 추가적으로 더 얻고, 기존 멤버들을 강화하기 위하여
③사업을 준비함
④투자자들을 얻음

사업의 행동 지침 Activities 
①하나님의 경륜의 완성을 위한 왕국복음의 전파 - Oikonomia, The gospel of the Kingdom
②그리스도의 몸의 실제를 위한 섞임의 중개 역할 - Bridge 
③물질의 통로 - Chanel 

가치 이념 value 
말씀 기도 믿음 
한마음 한뜻
헌신 희생 
번제의 향기


사업을 왜 하려는가? 분명하고, 명확한 목표 목적 Goals 
①왕국복음 전파(사업 팀의 현지 이주로)
②그리스도의 몸의 실제를 위한 섞임(한국과 일본, 중국 그리고 현지 성도들간의 상호 이주, 왕래, 섞임을 도움)
③이주(지체들의 해외이주를 도움)
④각지 지방를 물질로 도움(집회소 건물, 형제자매집 건물(캠퍼스앞에), 섞임센터, 문서 서역, 현지성도들의 고용, 가난한 성도들을 도움)
⑤전시간자들을 돌봄(한국의 전시간자들의 해외 사역 지역, 현지 전시간자들 지원, 특히 한국과 대만 등 다른 나라에서 오는 전시간자들에게 비자 발급을 도와 줄 수 있고, 물질적인 공급을 더해 줄 수 있습니다. )
⑥재물을 나누어주고, 심고 뿌리는 것에 대한 합당하고 아름다운 간증을 세움
⑦아시아 지역의 복음 확산에 대한 리포트 작성
(간증, 체험, 헌신에 대한 보고서)

 
"무디 형제님, 세상은 하나님께서 완전히 헌신된 한 사람과 함께 무엇을 하실 수 있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 The Man from the West, 1872-1875, "The Unanswered Letter", page 99 


목표 스케줄 진행
2013년 4월부터 
한국, 일본, 중국 지방 교회를 방문하여, 많은 분들과 기도와 교통을 가짐.
3년 2015년 12월까지
바트 경제권(인도차이나반도)에서 사업을 일으킴, 사업 기반 조성
5년 2020년 12월까지
바트 경제권(인도차이나반도)에서 사업의 성숙
10년 2025년 12월까지
인도까지의 완전한 성장
15년 2030
중동 지역과 ...스탄 국가들에서 사업
20년 2035 
이스라엘과 지중해의 지역들(터키, 아프리카 등)
25년 / 2040
주님의 다시 오심을 준비함
휴거 되든지 아니면, 이스라엘과 지중해 지역의 나라들에서 순교함.

제2집 제33권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 제6장 성장하는 길-자신을 하나님께 드림
Ezra Zion , 2013-04-11 , 조회 (93) , 추천 (0) , 반대 (0), 스크랩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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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치만 니 전집 제2집 제33권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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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이 책에 수록된 메시지들은 1938년과 1939년에 영국 런던 및 유럽 대륙에서 전하신 주님의 종 워치만 니 형제님의 설교 기록이다. 나중에 영국의 앵구스 키니어 형제(Angus Kinnear)가 정리하여 책으로 만들었다. 그러므로 원본이 영어이다. 출판된 지 몇 년이 채 안 되어서 세계 각지에서 판매량이 오륙만 부에 달하였고 또한 이십여 가지에 달하는 언어로 이미 번역되었다. 이 메시지들 속의 생명의 방면은 그리스도인에게 상상을 초월하는 도움을 주었다. 특히 미국 각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의 메시지들로 인해 생명의 전환점을 갖게 되었다. 심지어 어떤 그리스도인 단체는 이 책을 읽음으로써 단체 전체가 생명의 전환을 갖게 되었다. 오늘 형제들이 중국어로 번역하여 대만복음서원을 통해 출판하게 되었는 데, 이것이 중국어를 아는 형제자매에게 주는 도움이 영어판보다 적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 주님께서 배나 축복하사 이 책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생명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실제적인 인식과 더 진보된 체험을 가짐으로써 ‘그리스도의 몸’이 각지에서 더 자라고 확장되기를 바라는 바이다.
1963년 3월 25일
뉴욕에서 위트니스 리



제6장
성장하는 길-자신을 하나님께 드림

 

 

 

 


앞 장들에 이어서 이제 우리는 헌신의 참된 성질을 살펴보기로 하자. 우리 앞에는 로마서 6장 후반부, 곧 12절부터 마지막 절까지가 있다. 6장 12, 13절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이 두 구절 말씀 안에 어떤 동작을 나타내는 단어는 ‘드림’이다. 13절, 16절, 19절에서 도합 다섯 번 사용되었다.
많은 사람들은 ‘드리다’라는 단어를 헌신의 의미로만 생각하고 그 내용을 자세히 연구해 보지 않는다. 물론 ‘드림’에는 헌신의 의미가 들어 있다. 그러나 이것은 보통 우리가 이해하는 것과는 다르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우리 ‘옛사람’과 그 기능과 지혜-천연적인 지혜-와 힘과 기타 재능을 주님이 사용하시도록 그분께 드리라는 뜻이 아니다.
13절을 읽을 때 이 점이 즉시 분명해질 것이다.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라는 용어를 주의하라. 바울은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라고 말한다. 이 말씀은 헌신의 기점을 우리에게 설명해 준다. 왜냐하면 여기서 헌신은 옛 창조 안의 어떤 것에도 속하지 않은, 죽음과 부활을 거친 것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드림’은 우리의 옛사람이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을 안 결과이다. 하나님이 정하신 순서는 ‘알고’, ‘여기고’, ‘하나님께 드리는 ’이다.
내가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을 참으로 알았을 때, 나는 자연히 내 자신을 죽은 자로 여기게 된다(6, 11절). 또 내가 죽음에서 그와 함께 부활한 것을 알 때, 나는 자연히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기게 된다”(11절). 이것은 십자가의 두 방면―죽음과 부활―이 모두 믿음으로 영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 도달할 때 뒤따라오는 것은 바로 그분께 드리는 것이다. 부활 안에서 그분은 나의 생명의 근원이시다. 실지로 그분은 나의 생명이시다. 나의 모든 것은 내 소유가 아니라 그분의 것이기 때문에 내가 모든 소유를 그분께 드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내가 죽음을 거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 드릴 만한 것이 없게 되고 또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만한 것이 없게 된다. 이것은 그분이 이미 십자가 위에서 옛 창조에 속한 모든 것을 정죄하셨기 때문이다. 그분께 드릴 수 없는 모든 것들을 죽음이 다 제하였으며, 오직 부활만이 하나님께 무언가를 드리게 한다. 자신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말은 오늘 이후로 나의 온 생명을 주님에게 속한 것으로 생각한다는 뜻이다.


셋째 단계 : ‘자신을 드림’

우리는 이 ‘드림’이 우리 몸의 지체들과 관계된다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 앞에서 우리는 이미 우리 몸을 더 이상 죄에게 드리지 말아야 함을 보았다. 바울은 “너희 자신을 …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 하나님께 드리라”(롬 6:13, 19)고 말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지체와 능력이 완전히 그분께 속한다는 것을 알려 주고자 하신다.
내가 내 자신에게 속하지 않고 그분께 속함을 발견하는 것은 매우 큰일이다. 만일 호주머니 속에 내 소유로 십 실링이 있다면 나는 그 돈을 처리할 권리가 있다. 그런데 만일 그 돈이 다른 사람의 것이거나 다른 사람이 나에게 보관한 것이라면, 나는 그것으로 내가 사고 싶은 것을 살 수 없고 감히 잃어버리지도 못한다. 참된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바로 이것을 아는 데서 시작된다. 오늘날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자신에 대하여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하여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얼마나 되는가? 또 우리의 시간과 금전 혹은 재간이 우리의 것이 아니라 주의 것임을 알기 때문에 그것들을 함부로 자기 뜻대로 쓰지 않는 사람은 얼마나 되는가? 우리 가운데 우리가 그분께 속하기 때문에 돈 한 푼, 한 시간 혹은 우리의 지혜와 체력을 다른 데 함부로 쓰지 말아야 한다는 느낌을 가진 사람은 얼마나 되는가?
한번은 한 중국인 형제가 기차를 타고 여행을 하고 있었다. 그가 있는 객실 내에서 믿지 않는 사람 셋이 카드 놀이를 즐기려고 하고 있었다. 한 사람이 부족해서 그들은 그 형제에게 같이 하자고 요청했다. 그는 “여러분들을 실망시킬 생각은 없지만 저는 함께 동참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내가 내 손을 가지고 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놀라며 그에게, “당신의 말은 무슨 뜻입니까?”라고 물었다. 그는 “내 이 두 손은 내 것이 아닙니다.”라고 말했다. 이어서 그는 그들에게, 생명 안에서 그의 주권이 양도된 것을 설명해 주었다. 이 형제는 그의 모든 지체가 완전히 주님께 속한다는 것을 알았다. 이것이 참된 거룩함이다.
바울은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롬 6:19)고 말한다. 실제적인 활동에서 우리는 “자신을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거룩히 분별되어 주님께 드림

거룩함이란 무엇인가? 많은 사람들은 그들 안에 있는 악한 것들을 제해 버리면 거룩게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우리는 하나님께 분별되는 것을 통하여 거룩게 된다.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의 택함을 받고 하나님께 완전히 돌아간 사람만이 기름 부음을 받고 거룩게 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이 하나님께 분별된 사람으로 여겨졌다. 심지어 생물이나 물질적인 것들, 예컨대 어린양이나 성전 안의 금까지도 같은 방법으로 거룩게 될 수 있었다. 그러므로 거룩게 되는 것은 그들 속에 있는 악한 것을 제함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도록 완전히 그분을 위해 예비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다. 히브리어에서 거룩함은 분별된 것을 가리킨다. 참다운 거룩은 ‘여호와께’ 거룩인 것이다(출 28:36). 내가 내 자신을 전적으로 주님께 드리는 이것이 바로 거룩이다.


자신을 주님께 드리는 것은 바로 자신이 완전히 그분의 소유임을 시인하는 것이다. 이렇게 자신을 주님께 드리는 것은 여김과 같이 확실한 것이다. 우리 일생 중에서 우리 자신을 자신의 손에서 그분의 손으로 넘기는 날이 필요하다. 그날 이후 우리는 그분께 속하고 우리 자신에게 속하지 않게 된다. 그러므로 자신을 헌신하는 것은 전도사나 선교사가 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이 선교사가 된 것은 그들이 참으로 그들 자신을 하나님께 드렸기 때문이 아니다. 그들은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지 않았다. 그들이 ‘드린 것’(그들이 말하는 헌신)은 다른 어떤 것, 곧 십자가를 거치지 않은 천연적인 능력이다. 이것으로 그들은 주님의 일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참된 헌신이 아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슨 목적으로 자신을 그분께 드리는가? 기독교의 일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그분이 우리에게 요구하신 일을 하기 위해서이다.

다윗에게는 많은 용사들이 있었다. 왕이 그들에게 지시한 직책에 따라 장군 된 자도 있었고 문지기 된 자도 있었다.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이 지시하신 대로 우리의 분깃의 일을 해야 한다. 장군이든 문지기이든 우리 스스로 택하지 말아야 한다. 만일 당신이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정한 길이 있는 것이다. 곧, 디모데후서 4장 7절에서 바울이 말한 달려가야 할 길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다만 바울을 위하여 그가 달려갈 길을 정하셨을 뿐 아니라 또한 모든 그리스도인이 가야 할 길을 정해 놓으셨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정하신 길을 알아야 하고 또한 그 가운데서 행해야 한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우리는 응당 주님께 “주여, 당신이 나를 위해 정하신 길을 알고, 그 안에서 행하고자 하는 갈망을 위하여 내 자신을 당신께 드립니다.”라고 말해야 한다. 이것이 참된 헌신이다.


만일 우리 일생의 종착지에서 바울과 같이 “달려갈 길을 다 마쳤다”고 말할 수 있다면, 우리는 얼마나 축복을 받은 사람인가! 나는 일생의 종착지에 이르러 우리가 걸어온 길이 잘못된 길임을 발견하는 것보다 더 비참한 일은 없다고 생각한다. 이 땅 위에서 우리의 생명은 오직 하나이며 우리가 기뻐하는 대로 행할 수 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자신의 기쁨을 구한다면 우리의 생활은 결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없다. 나는 어떤 경건한 그리스도인으로부터 “나 자신을 위하여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을 위하여는 모든 것을 원한다.”고 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당신은 하나님 외의 어떤 것을 원하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뜻을 중심 삼는 것이 당신의 갈망인가? 당신은 진심으로 하나님의 뜻이 당신에게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시다”(롬 12:2)고 말할 수 있는가?
여기의 문제는 우리의 의지이다. 우리의 강인하고 고집 센 의지는 반드시 십자가로 보내야 하고 우리 자신은 주님께 온전히 드려져야 한다. 만일 우리가 천을 재봉사에게 주지 않았다면, 우리는 결코 그가 우리를 위하여 옷을 만들어 주기를 바랄 수 없다. 만일 우리가 건축 재료를 건축자에게 주지 않았다면, 결코 그가 우리를 위하여 집을 지어주기를 바랄 수 없다. 같은 원칙으로 만일 우리가 우리 생명을 하나님께 드려서 그분이 우리 안에 사시도록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그분이 우리 안에서 그분의 생명을 살아 나타내시기를 바랄 수 없다. 우리는 아무런 보류나 다툼이 없이 그분께 자신을 드려 그분의 인도를 따라야 한다. 내가 다시 말하거니와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라”(롬 6:13).

 

종인가 노예인가

만일 우리가 아무런 보류함 없이 자신을 하나님께 드린다면, 가정에서나 일에서나 교회 안에서의 관계에 있어서나 우리 개인의 견해에 있어서 많은 조절이 있게 된다.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어떤 것을 보류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신다. 그분의 손가락은 한 가지 한 가지 그분의 것이 아닌 것들을 지적하시면서, “이것들을 제해 버리라.”고 말씀하실 것이다. 기꺼이 이렇게 하겠는가? 하나님께 대항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그분께 순복하는 자가 지혜롭다.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하나님과 다투고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분이 어떤 것을 원하실 때 우리는 종종 다른 것을 원한다. 많은 일에서 우리는 우리의 평강을 잃어버릴까봐 무엇을 연구하고 기도하고 생각할 담력을 갖지 못한다. 비록 우리가 이런 문제에서 탈피할 수 있을지라도 우리가 이렇게 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멀리하게 된다. 쉽게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난다. 그러나 다만 우리 자신을 그분께 맡기고, 그분의 뜻에 따라 그분이 우리를 다루시도록 하는 것이 복된 일임을 기억하라.
만일 우리가 종종 자신이 하나님에게 속하고 우리 자신에게 속하지 않는다는 느낌을 갖는다면, 이것은 너무나 좋은 것이다! 세상에서 이것보다 더 귀중한 것은 없다! 이런 느낌이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끊임없는 임재를 느끼게 하며 그 이유가 매우 분명하다. 만일 내가 그분의 임재를 느끼려 한다면, 나는 반드시 그분께 점유되었다는 느낌을 가져야 한다. 내 몸에서 그분의 주권이 일단 세워지면, 나는 나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무엇을 할 담력을 갖지 못하게 되는데 이는 내가 그분의 전적인 소유이기 때문이다.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롬 6:16).


여기서 말한 종은 사실상 노예이다. 6장 후반부에서 이 단어가 수차 언급되었다. 종과 노예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종은 다른 사람을 섬길지라도 그가 섬기는 사람에게 자기의 주권을 양도하지 않은 사람이다. 만일 그가 자기 주인을 좋아하면 그를 섬길 수 있고 싫어하면 다른 주인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노예는 그렇지 않다. 노예는 다른 사람의 종일 뿐 아니라 또한 다른 사람의 소유물이기 때문이다. 나는 어떻게 해서 주님의 노예가 되었는가? 그분 편에서는 그분이 나를 사신 것으로 말미암고 내 편에서는 나 자신을 그분께 드린 것으로 말미암는다. 하나님께서 나를 구속하셨으므로 나는 그분의 소유이다. 그러나 만일 내가 그분의 노예가 되려고 한다면, 반드시 자신을 그분께 기꺼이 드려야 한다. 왜냐하면 그분은 강요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의 문제는 바로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바에 대한 충분한 관념이 결여되어 있는 데 있다. 그들은 쉽게 “주여, 무엇이든 당신께 드리기 원합니다.”라고 말한다. 당신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생명을 원하신다는 것을 아는가? 당신이 언제나 좋아했던 이상(理想)과 강한 의지와 소중한 관계와 좋은 일들을 모두 버려야 한다. 그러므로 당신이 이렇게 하기로 뜻을 세우지 않았다면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지 말라. 당신이 헌신을 엄숙한 것으로 보지 않을지라도 당신에 대해 하나님은 진지하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갈릴리의 소년이 주님께 떡을 드렸을 때 주님은 그 떡을 어떻게 처리하셨는가? 그분은 그것을 떼셨다. 하나님은 그분에게 드린 것을 항상 파쇄하신다. 그분이 받으신 것들에 대해 그분은 파쇄하신다. 그러나 그분은 그것을 파쇄하신 후에 축복하시고 그것으로 사람의 필요를 만족시키신다. 당신이 자신을 주님께 드린 후에 그분은 당신이 그분에게 드린 것을 파쇄하기 원하신다. 이때에 모든 것이 뜻에 맞지 않은 것 같고 결국 당신은 하나님의 방법에 대해 따지고 원망하게 된다. 만일 당신이 여기 머문다면 당신은 파괴된 그릇이 된다. 즉 세상에 대해 당신은 무용지물이 된다. 이는 당신이 이미 너무 멀리 왔고 세상은 당신을 쓸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께 대하여도 당신은 무용지물이 된다. 이는 당신이 미치지 못함으로 하나님께서 당신을 쓰실 수 없기 때문이다. 당신은 세상에서는 이탈되고 하나님과는 다툼이 있게 된다. 이것이 많은 그리스도인의 비극이다.
우리는 한 차례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데 이것이 초기의 기본적인 행동이다. 그런 다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사용하시든지 그분을 찬미하고 받아들이며 육체와 상반된 인도에 대하여도 원망하지 않도록 매일 매일 헌신해야 한다.
나는 주님께 속하므로 더 이상 나를 내 소유로 여기지 않고 도리어 범사에 그분의 권리와 주권을 시인한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태도이고 이러한 태도를 유지하는 것이 참된 헌신이다. 나는 선교사나 전도인이 되기 위해 자신을 헌신하지 않는다. 도리어 나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하여 내 자신을 그분께 드린다. 내가 학교에 있든 사무실에 있든 혹은 주방에 있든 나는 그분이 정하신 모든 것을 가장 좋은 것으로 여긴다. 이는 그분에게 완전히 속한 사람에게만 가장 좋은 것이 임하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더 이상 우리 자신에게 속하지 않는다는 것을 끊임없이 느낄 수 있기를!






 


2013. 04. 출사표를 올리다! 축약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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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04. 출사표를 올리다!


우리는 이 땅에서 우리에게 남아 있는 할당된 시간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고려해 보아야 한다. ...
믿는 이들로서 우리는 주님의 이끄심에 반응하여, 인류 역사 안에 펼쳐지는 신성한 역사 안에서 살기를 선택할 수 있는 특권이 있다.
“여호와여, 주의 용사로 그리로 내려오게 하옵소서”(요엘3:11)
용사들, 성숙한 이들, 그리스도의 몸의 실재 안에 살았던 건축된 믿는 이들, 그리스도의 만족을 위해 그분의 신부가 된 이들이 있을 것이다.
그들은 전쟁에 있어서 노련할 것이고, 심지어 전쟁의 전문가들일 것이며, 용사들, 곧 주님께는 아름답지만 원수에게는 두렵게 하는 이들일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이들 가운데 포함되기를 선택해야 한다.
- 2012년 여름 훈련 소신언서 결정-연구 6번 中에서


"... 나는 나의 온 일생을 바쳐, 왕국시대로 시대를 전환할 시대적인 도구의 일부가 되는 것을 더 좋아합니다."
"나는 내가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 압니다. 나는 내 인생의 의미를 압니다.
나는 하늘들의 다스림 아래, 그리고 하나님의 경륜의 영역 안에 살기를 원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두 번째 문제에 대한 그리스도의 해결책의 한 부분이 되고 싶습니다.
나는 실지로 이것에 참여하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권익을 위하여 그리고 아버지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하여 그리스도께 헌신한다.
우리는 전쟁을 위해 준비되고 훈련받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남은 인생 동안 전쟁터에서 살게 될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 2012년 겨울 훈련, 다니엘서 스가랴서 결정-연구, 메시지1

요셉은 정말로 꿈꾸는 자였으며, 그의 인생은 꿈의 인생이었다. 승리하며 이기는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꿈꾸는 자들일 것이다. 당신은 꿈을 가질 필요가 있으며, 다른이들의 꿈을 해석할 필요도 있다. 매일매일 우리는 모두 우리의 이상에 관해, 우리의 꿈에 관해 말해야 한다. 더욱이 우리는 다른이들의 이상을 해석해야 하며, 우리의 이상에 따라 살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느낌에 따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이상에 따라 말해야 한다. 우리는 꿈꾸는 자들이다. 우리는 꿈꾸는 자들이기 때문에 모든 것을 이상에 따라 한다. 비록 어떤 것은 아직 통과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우리가 본 그것에 따라 말하며, 우리의 이상이 성취되는 것을 발견한다.

 요셉을 창세기에서 두드러진 다른이들과 비교해 볼 때, 그만이 유일하게 꿈과 고난 안에 있었음을 본다. 다른 위대한 일곱 명 가운데서 요셉만큼 꿈을 많이 꾼 사람은 없었다. 요셉은 언제나 꿈과 관계 있었다. 그의 인생은 또한 유일하게 고난과 관계를 맺고 있다.

 꿈은 해석을 필요로 하고, 해석은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요셉은 끊임없이 말을 했다. 그가 말함으로 인해 모든 꿈들이 성취되었다. 먼저 요셉은 자신을 곤란에 빠뜨리는 말을 했다. 만일 그가 그의 꿈들에 관해 말하지 않았다면, 그는 곤란에 빠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형제들이 그를 미워하고 그를 노예로 판 이유는 바로 그가 그의 꿈에 관해 말했기 때문이다. 만일 이러한 꿈들을 꾼 후에 요셉이 침묵했다면, 아무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그의 고난들은 그의 말함으로부터 왔다.
<창세기 LS 메시지 114 - 요셉의 해방됨과 높여짐의 비밀>

"Who are You, Lord?", "What shall I do, Lord?"
“주님, 누구십니까?”, “주님, 무엇을 해야합니까?”(사도행전 9:5, 22:10)
사도 바울의 이 두 가지 위대한 질문이 바로 2010년 전시간훈련에 들어갈 때의 저의 기도였습니다.

2010년 전시간훈련 1년차,
그 해의 여름훈련 메시지, 이사야 결정 연구에서
주님은,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해 갈꼬, Whom shall I send? Who will go for Us?』라고 말씀하셨다(사 6:8上).
저 또한 응답하였습니다. 『내가 여기에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Here am I; send me.』(사 6:8下).

그 해의 가을 해외 복음 및 섞임 가운데,
저는 중국, 캄보디아, 미얀마, 방글라데시, 인도 등지에서 주님의 움이심을 보고 느낄 수 있었습니다.

2011년 2년차 훈련의 가을 무렵,
주님은 저에게 보다 구체적인 부담을 주셨습니다.
동역자들을 통하여, 주님은 LMA (The Lord’s Move to Aisa)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고 훈련 졸업이 가까워진 시기에,
주님은 사업을 통하여 나아가는 것에 대하여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것이 내가 나아가야 할 길이다고 느꼈습니다.



오늘 영적인 필요가 있는 만큼 물질의 공급도 그만큼 있어야 한다. 지금 모두가 여전히 경영하러 가야 하지만 지금 가서 경영하려면 반드시 먼저 개인주의를 내려 놓아야 한다. 혹 어떤 형제들은 함께하는 것을 찬성하지 않지만 한 사람이 조금의 자산(資産)으로 무슨 일을 경영해 낼 수 있단 말인가? 복음의 움직임은 반드시 시대의 필요를 따라가야 한다. 시대를 따라갈 수 있으려면 동역이 필요하다. 사업하는 사람들은 비행기를 타고 다니며 대규모적이다. 우리는 도리어 시간을 들이지 않았고 복음전파에 복음광고(廣告)를 내지 않으며 신문에도 우리의 몫이 없다. 원인은 돈이 없는 것이다. 만약 직업이 있는 형제들이 복음의 필요가 얼마나 큰지를 볼 수 있다면 마땅히 적극적으로 일어나야 한다. 형제들은 다만 조금만 남겨서 자신의 생활을 유지할 수 있을 정도면 된다. 그 나머지는 모두 다 사역에 바치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이렇게 드리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의 앞 길은 여전히 소망이 없다. ...오늘날 사역의 어려움은 사람이 부족하고 돈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 오늘 당신은 당신의 목숨을 팔아서라도 돈을 써가며 다른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당신이 얻은 유익을 얻을 수 있게 해야 한다. 이 세대가 만약 모든 것을 버린다면 다음 세대를 위하여 길을 예비할 수 있게 된다. 복음의 길은 이와 같이 닦아 둔 것이다.
<사역 재개 메시지, 제29장 자본을 가지고 사업을 경영하는, 자신을 내맡긴 사람들과의 대화 , W.N.>

 여기서 우리에게는 두 무리의 사람이 필요하다. 한 무리는 복음을 위해 몸과 시간을 드리는 사람들이요 또 한 무리는 복음을 위해 재물을 드리는 사람들이다. ... 동역자들이여, 다가올 날들이 쉽지 않음을 나는 인정한다. 또 거기에 고통도 있을 것임을 인정한다. 직업을 가진 형제자매들이여,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서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물어야 한다.
<사역 재개 메시지, 제16장 재물을 처리함과 하나님을 섬김 , W.N.>

오늘 이 이백 명을 보충하려면 반드시 돈을 버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 이전에는 내가 감히 이 말을 하지 않았지만, 오늘은 감히 말하겠다. 어떤 사람들은 돈을 벌어서 돈으로 주님을 섬겨야 하며, 자신을 헌신하여 주님을 섬기기 위해 돈을 벌어야 한다. 이러한 사람이 백만 원을 벌 수 있다면, 그는 자신이 생활할 수 있을 만큼만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교회를 위해 내놓을 것이다. 만일 당신이 단지 방관자일 뿐이라면 아무 일도 발생하지 않겠지만, 만일 당신이 동역자를 위하여 내놓기를 원한다면 이것은 당신의 생명을 요구한다.
<사역 재개 메시지, 제7장 하나님의 회복 역사(2) / 드림의 원칙, W.N.>



 돌아가서 성도들에게,『세상으로부터 의로운 방식으로 돈을 벌라. 보다 많은 돈을 벌라. 즉 많이 벌수록 더욱 좋다.』고 말하라. 그러나 부를 얻을 때, 일 페니도 보류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라. 만일 당신이 일 페니도 보류하지 않으려 한다면, 반드시 마귀에게 이렇게 말해야 할 것이다. 『나는 나의 주님께 진실하다. 나는 나와 나의 가족이 적당하게 생활하기 위해 다만 적은 부분을 사용할 뿐이다.』 <장로훈련 8권. 9장, 203~213p.,W.L.>


그러므로 왕국, 곧 하나님의 경륜의 확장을 위해 밖으로 나가는 이런 사람들을 공급하기 위해서 사업을 하고 금을 만들고 부를 얻고 돈을 버는 많은 신실한 전시간자들이 우리에게 있어야 한다. ... 당신은 반드시 그들이 계속하여 일하도록 도와야 한다. 그들은 왕국을 확장하기 위해 여행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그 여행과 및 그들의 생활을 위해 당신의 공급을 필요로 한다.
 나는 여러분이 훈련시키는 데 있어서 어느 정도의 시간을 들여 성도들에게 이 모든 구절들을 읽어 주고 말해 줌으로써 그들의 눈이 열려서 세계정세, 그들의 사업, 그들의 돈 버는 것 등에 대해 하나님의 신약 경륜에 따른 이상을 얻게 하기 바란다. 그럴 때 그들은 10원도 낭비해서는 안 되고 모든 푼돈을 저축하여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왕국을 증진시키기 위해 드려야 한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crucial 단계들.="" words="" of="" leading="" in="" the="" lord's="" recovery,="" book="" 1="" 새길의="" 실행을="" 위한="" 이상과="" 분명한="">


사업을 통한 나아감은 
개인의 부귀를 누리기 위함이 아닌, 그리스도의 몸의 교회들 곧 많은 지체들의 유익을 위한 희생입니다.
여호수아 3장의 제사장들이 언약괘를 메고 강밑바닥에 버티고 서서 모든 민족들이 넘어갈 수 있도록하는 그림과 같다.
나는 왕국복음을 위하여 많은 지체들이 전시간 봉사자로, 섞임으로, 이주함으로 움직일 수 있도록 돕고 싶다.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은, 온 이스라엘이 마른 땅을 건너는 동안, 온 백성이 요단을 완전히 건너기까지 요단 가운데 마른 땅에 굳게 서 있었다(3:17, 4:10-11).
오늘날 주의 회복의 확장은 짊어지는 제사장들과 함께하시는 그리스도의 움직이심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우리와 그분은 한 단체적인 사람으로서 함께 걷는다. .
<여호수아 LS4>



동역에 있어서, 어떤 사람은 돈을 벌어야 하는데, 누가 돈을 벌러 가야 하는가?
완전히 헌신한 사람은 돈을 벌러 나갈 수 있다. 오직 이렇게 돈을 버는 것만이 유용하다.
<사역 재개 메시지, 제6장 하나님의 회복의 역사(1), W.N.>



저에게 구체적인 사업의 구상이, 계획이 있느냐고 저에게 물으신다면,
저는 이렇게 대답하겠습니다.

[에스겔서 1장 15절부터 21절까지는 높고 두려운 바퀴를 묘사한다. … 바퀴는 눈들로 가득하다. 바퀴는 가면서 보고, 달리면서 본다. 바퀴가 달리기를 멈추면, 보는 것도 멈춘다. 교회는 반드시 이와 같아야 한다. 우리는 계속 가면서 본다. 더 나아갈수록, 더 많이 보게 된다. 오늘은 이만큼만 볼 수 있지만, 내일은 더 나아가서 더 많이 볼 것이다. …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반드시 움직이고 있는 사람들이어야 한다. 교회는 보기 위해서 반드시 움직여야 한다. <에스겔 LS 6>]


그러므로, 저는 움직입니다. 우선 움직여 봅니다.
우선 일본과 중국을 거쳐, 베트남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그후에는 계속 서쪽으로 전진해 갈 것입니다.
예루살렘까지.


[나는 주님이 다시 오실 때, 예루살렘 안에 주 예수님을 기다리는 교회가 있기를 간절히 원한다.... 예루살렘 시(市) 안에 하나의 교회가 있게 될 것이다. 아마도 그 집회소는 감람산에서 멀지 않을 것이다. 그 감람산은 그분이 승천하셨던 곳이며, 또 그분은 재림 시에 그곳으로 내려오실 것이다. 그분을 위하여 예비된 예루살렘 교회가 없이 다시 오시는 것은 주 예수님께 부끄러움이 될 것이다. 주님은 그러한 수치를 당하지 않으실 것이다. 이런 까닭에 그분은 자신의 회복이 유럽으로, 궁극적으로는 예루살렘으로 확장되기를 고대하신다.
주께서 그분의 회복 안에 있는 자신의 움직이심에 관해 우리를 감동시키시기 바란다. 그분께서 교회 생활을 유럽과 중동 전체에 그리고 예루살렘까지 확장하시길 바란다. 아마도 언젠가 우리는 감람산 기슭에 위치해 있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집회를 열고 그분의 다시 오심을 위해 열렬히 기도할 것이다!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를 누리고 그분을 교회를 사랑하시는 그리스도로 체험할 필요가 있다. 우리도 역시 교회를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의 회복이 전세계에 걸쳐서 확산되기 위해, 그리고 다시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가기 위해 그분과 하나이다. 오, 그리스도께서 얼마나 교회를 사랑하시는지! 그분은 교회를 사랑하시는 그리스도로서 우리 안에 계신다. 그분의 교회를 위한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교회 생활의 회복을 위해 기꺼이 우리의 모든 것을 드리게 한다. <에베소서 LS 79>]



‘형제님, 형제님은 좀 더 기다리십시오. 더 기다리면서, 기도하고 많은 준비들을 하셔야 합니다.
주님이 먼저 움직이시고 환경이 열리기를 기다려야 합니다. 아직 나아갈 때가 아닙니다.’ 라고 말씀하십니까?
오! 아닙니다.

< 네 생물이 바퀴를 뒤따르는 것이 아니라, 바퀴가 네 생물을 뒤쫓는다는 것을 보는 것은 의미심장하다(1:19). 이것은 주님이 움직이실 때까지 기다렸다가 움직여야 한다고 사람들에게 말하는 기독교의 관념과는 대조적이다. 나는 주님의 자녀들에게, 그들은 주님이 움직이시기를 기다릴 필요가 없다는 것을 말해주어야 한다는 부담을 주님께 받았다. 주님은 이천 년 동안이나 당신을 기다리셨다. 당신은 준비되었는가? 만일 당신이 나아간다면, 주님이 당신을 뒤따르실 것이다. 생물들이 바퀴를 좇는 것이 아니고, 바퀴가 생물들을 뒤쫓는다. 생물들이 움직일 때 바퀴도 움직인다. 생물들이 멈출 때 바퀴도 멈춘다. 생물들이 높이 올려질 때 바퀴도 들어올려진다. 만일 우리가 활동하지 않으면 바퀴가 없게 되겠지만, 『할렐루야, 자, 나아가자!』라고 말한다면, 바퀴가 우리를 뒤따를 것이다. 우리는 응당 확신과 자신과 믿음을 가지고 담대하게 나아가야 한다. 우리가 담대하게 나아간다면, 바퀴가 우리를 뒤따를 것이다. 주님이 움직이시기를 기다리지 말라. 주님은 우리가 움직이기를 기다려 오셨다. 우리가 나아간다면 주님이 뒤따르실 것이다. 자, 우리는 가서 땅을 차지하자! 자, 우리는 가서 나라를 취하자! 자, 우리는 가서 온 땅을 차지하자! (에스겔 LS 6)>



하나님은 구걸하시는 분이 아니다. 그분을 그러한 분으로 대우하지 말라. 당신은 그분을 당신에게 모든 풍성을 주시는 매우 풍부하신 공급자로 존중해야 한다. 당신의 모든 부요함은 그분으로부터 온다. 당신이 부요해질 것인지의 여부는 과거는 물론 지금도 여전히 그분께 달려 있는 것이다. 그것은 당신이 무엇을 하여 얻겠다고 계획하는 것에 달린 것이 아니다. 당신은 단순히 밤낮으로 일하면 된다. 그럴 때 그분이 당신의 수고를 따라 축복하실 것인데 그 축복은 당신의 기업을 위한 것이 아니고 그분의 왕국의 확장을 위한 것이다.
장로 훈련 8권 : 주님의 현재의 움직이심의 생명 맥박. 9장.





저에게 두렵지 않냐고, 무섭지 않냐고, 걱정되지 않냐고 말씀하십니까?

자신에게 발생할지 모르는 일 때문에 두려워하고, 이쪽저쪽에서 오는 것들을 두려워하고, 이것저것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시대를 전환하기 위해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없다. ... 하나님께서 시대를 전환하기 위해 사용하시는 모든 사람은 ... 오직 한 가지, 바로 하나님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그분의 임재를 잃어버리는 것만을 두려워한다.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숨거나 물러나거나 위축되거나 생각을 바꾸는 사람은 하나님의 손에 그다지 유용하지 못하다. 하나님은 겁쟁이를 사용하실 수 없다. 하나님께서 시대를 전환하기 위해 사용하시는 사람은 모두 담대한 사람이다. 그들은 거칠거나 타고난 방식으로 담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과 어려움에 맞서는 용기를 가졌기 때문에 담대한 것이다.(시대를 전환하는 사람들, 42-44쪽)

오직 자기의 하나님을 아는 백성은 힘을 보일 것이고, 행동을 취할 것이다.
But the people who know their God will show strenth and take action.(RCV) - Daniel 11:32

내가 네게 명한 것이 아니냐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 여호수아 1:9
Have I not commanded you? Be Strong and take courage; do not be afraid or dismayed. For Jehovah your God is with you wherever you go.



우리는 얼마의 사람들이 주님을 위하여 티벳으로 가서 죽을 수 있기를 바란다. 우리가 <올 때>에는 땅을 떨쳐버리고 <갈 때>에는 하늘을 가져가는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길이다. ... 오늘 우리에게는 한 무리의 선봉대가 필요하다. 사람은 나갈 때 비로소 모든 것을 실지로 내려놓게 된다.
- 사역 재개 메시지 기록 (上), 제34장 이주 - 대화기록(10)


그리스도의 애정 어린 사랑은 우리를 강권하여 그분을 향하여 살고 죽게 한다(고후 5:14-15, 롬 14:7-9). ... 그리스도의 사랑은 믿는 이들을 그분을 위해 순교자가 되게 한다(계 2:10, 12:11, 롬 8:35-37).




우리가 다른 곳으로 이주하기를 준비할 때 우리는 반드시 몇 가지 원칙들을 알아야 한다.
첫째,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할지에 관해서 분명해야 한다.
둘째, 우리는 혼자서 이주해서는 안 된다. 원칙적으로 우리는 적어도 한 명 이상의 성도들과 함께 이주해야 한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지방 교회 안에서 우리는 교회의 인도를 따라야 하며 다른 성도들과 분리되어 독립적으로 섬겨서는 안 된다. 이와 같이 우리는 이주할 때 적어도 두 명씩 가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누구와 함께 이주할 것인가에 대하여 주님의 생각을 구해야 한다.
셋째, 우리는 언제 이주할 것 인가에 대해 분명해야 한다.
우리는 반드시 이러한 세 가지, 즉 장소와 동반자와 시기에 대해 기도하고 고려해야 한다. 주님께서 우리를 함께 모으신 이유는 우리에게 목적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함께 모일 때 이 나라 안에서의 주님의 움직임에 대한 조망을 갖기 위해 서로 교통해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주님의 인도를 알 수 있도록 도울 것이다.
우리는 개인적으로 또한 단체적으로 더욱더 기도해야 한다.
(이주에 관한 교통,1964, W.L.)

이렇게 짝을 이루는 원칙은 오늘날에도 적용된다. 여러분이 주님이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라면 여러분은 자신과 짝을 이룰 누군가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 주님을 섬길 때 개인주의적으로 행동하는 것은 신성한 원칙에 따른 것이 아니다. 오늘날 신약 경륜 안에서 개인주의적으로 되는 것은 몸의 원칙을 범하는 것이다. 우리는 개인적으로 행하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우리는 단체의 원칙을 따라 움직이고 행하여, 항상 우리와 짝을 이룰 다른 지체를 최소한 한 명은 가져야 한다. 우리와 짝을 이룰 지체들이 더 많을수록 더 좋은 것이다. 몸은 개인적이로 대표될 수 없다. 신성한 원칙에 따르면, 몸을 합당하게 대표하는 것은 항상 다른 이들과 짝이 되는 이들에 의해서 이루어진다.<출애굽기 LS 9>

저는 이번 여행을 길을 혼자서 시작합니다.
그러나 이 몇 년 안에 주님이 저와 함께 할 일 할수 있는 동역자들을 주시고, 이들과 함께 팀(Team)을 이루어 한마음 한뜻 가운데 움직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저를 돕는 배필을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여기에서 한 사람은 천을 산출할 수 있지만 두 사람은 만을 산출할 수 있다.
형제들이 만일 직업에 있어서 주님께 신실하고 또 함께 동역을 한다면 결과적으로 축복이 있을 것이다.
 이러한 목적과 중심과 입장과 목표가 있을 때 주님의 축복을 가져올 수 있다.
<사역 재개 메시지, 재물과 직업, W.N.>









2013년 한국, 일본, 중국의 여행의 목적
①몸 안에서 지체들과의 교통과 기도을 구함
②팀으로 함께 움직일 동역자들을 추가적으로 더 얻고, 기존 멤버들을 강화하기 위하여
③사업을 준비함
④투자자들을 얻음

사업의 행동 지침 Activities
①하나님의 경륜의 완성을 위한 왕국복음의 전파 - Oikonomia, The gospel of the Kingdom
②그리스도의 몸의 실제를 위한 섞임의 중개 역할 - Bridge
③물질의 통로 - Chanel

가치 이념 value
말씀 기도 믿음
한마음 한뜻
헌신 희생
번제의 향기



사업을 왜 하려는가?
분명하고, 명확한 목표 목적
Goals
①왕국복음 전파(사업 팀의 현지 이주로)
②그리스도의 몸의 실제를 위한 섞임(한국과 일본, 중국 그리고 현지 성도들간의 상호 이주, 왕래, 섞임을 도움)
③이주 Migration (지체들의 해외이주를 도움)
④각지 지방를 물질로 도움(집회소 건물, 형제자매집 건물(캠퍼스앞에), 섞임센터, 문서 서역, 현지성도들의 고용, 가난한 성도들을 도움)
⑤전시간자들을 돌봄(한국의 전시간자들의 해외 사역 지역, 현지 전시간자들 지원, 특히 한국과 대만 등 다른 나라에서 오는 전시간자들에게 비자 발급을 도와 줄 수 있고, 물질적인 공급을 더해 줄 수 있습니다. )
⑥재물을 나누어주고, 심고 뿌리는 것에 대한 합당하고 아름다운 간증을 세움
⑦아시아 지역의 복음 확산에 대한 리포트 작성
(간증, 체험, 헌신에 대한 보고서)

 오늘날 많은 대륙과 나라들이 주의 회복에 대해 열려 있다. 한나와 같이 서원할 몇몇 사람들이 필요하다. 나는 많은 젊은이들이 그러한 서원을 하기 바란다. 여러분은, 『주여, 저는 주님의 것입니다. 저는 다만 자신을 주님께 빌려드립니다.』라고 말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마음을 받으실 것이며, 여러분이 그분께 서원한 것을 성취하시기 위해 무언가를 이루실 것이다.
-사무엘 상 LS 1

"무디 형제님, 세상은 하나님께서 완전히 헌신된 한 사람과 함께 무엇을 하실 수 있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 The Man from the West, 1872-1875, "The Unanswered Letter", page 99

리빙스톤(Livingstone)은 “노예 매매를 위해 아프리카에 가는 사람도 있는데 그리스도의 사랑이 한 사람을 강권하여 아프리카로 가게 하지 못하겠는가”라고 말하고 아프리카로 갔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강권하므로 그는 자기의 생명을 버렸다. 이것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생명을 얻게 했는지 모른다.
- 제1집 제17권 주제별 진리연구 기록(1), 제 23 장 그리스도의 사랑



목표 스케줄 진행
3년 2015년 12월까지
--- 사업 기반 조성
바트 경제권에서 사업을 일으킴
5년 2020년 12월까지
--- 인도까지 완전한 성장
10년 2025년 12월까지
중동 지역과 ...스탄 국가들에서 사업
15년 2030
이스라엘, 터키, 아프리카
20년 2035
이스라엘과 지중해의 지역들
25년 / 2040
주님의 다시 오심을 준비함
휴거 아니면, 이스라엘과 지중해 지역의 나라들에서 순교함.


</crucial>


제3집 제48권 초신자를 온전케 하는 공과 제16장 찬미
Ezra Zion , 2013-04-11 , 조회 (104) , 추천 (0) , 반대 (0), 스크랩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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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장
찬미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거하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시 22:3).
“나의 생전에 여호와를 찬양하며 나의 평생에 내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시 146:2).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히 13:15).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여 우리를 구원하사 열방 중에서 모으시고 우리로 주의 성호를 감사하며 주의 영예를 찬양하게 하소서”(시 106:47).
“이에 저희가 그 말씀을 믿고 그 찬송을 불렀도다”(시 106:12).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시 50:23).

찬미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는 일들 중에서 가장 높은 일이다. 성도들의 영적인 생명에서 그 최고의 표현은 하나님에 대한 찬미라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의 보좌는 우주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계신 가장 높은 곳이고 또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찬미를 ‘보좌’(시 22:3, 원문 참조)로 삼으신다. 하나님의 이름과 그분 자신은 찬미로 인하여 높여진다.
다윗은 하루에 세 번 하나님께 기도하라는 시를 썼고(시 55:17), 또 하루에 일곱 번 하나님을 찬미하라고 말했다(시 119:164). 다윗은 성령의 감동을 받아 찬미가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를 시인했다. 기도는 하루 세 번에 지나지 않지만 찬미는 일곱 번이나 했다. 그뿐 아니라 그는 레위인을 세워 하나님의 언약궤 앞에서 비파와 수금을 타며 하나님을 칭송하고 감사하며 찬미하게 하였다(대상 16:4-6). 솔로몬이 여호와의 전 건축의 모든 일을 마치고 제사장이 언약궤를 들어 지성소에 들여놓고 다시 나올 때에 또 한 무리의 레위인들은 단 옆에 서서 나팔을 불고 노래하며 모든 악기를 울려 일제히 하나님을 찬미하였다. 그때 여호와의 영광이 하나님의 전에 충만하였다(대하 5:12-14). 다윗과 솔로몬 두 사람은 다 하나님의 뜻을 만졌기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찬미를 그분께 드렸다.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찬미를 보좌로 삼으시기 때문에 우리는 마땅히 평생 여호와를 찬미하고 우리 하나님을 칭송해야 할 것이다.



Ⅰ. 찬미의 제사

성경은 찬미를 매우 중요시하였고 또한 많이 언급하였다. 특히 시편은 찬미의 말씀으로 충만하다. 시편은 구약에 있는 찬미의 책이다. 많은 사람의 찬미는 시편에서 발췌되었다.
그러나 시편에는 찬미의 시만 있지 않고 고통의 시도 있음을 주의하라. 여기에서 우리는 찬미를 발한 사람들에게서, 그들이 이전에 하나님께 이끌리어 감정에 상처 받도록 곤고한 경지를 거쳤음을 볼 수 있다. 우리는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에 의해 어두움에 이끌리고 사람들에게서 버림과 비방과 핍박을 받을지라도―“파도와 물결이 나를 엄몰하도소이다”(시 42:7)―하나님은 그들에게서 찬미를 얻으신 것을 본다. 찬미의 말은 순조로운 사람의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징계와 연단을 받은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다. 시편에서는 가장 깊이 상처 받은 감정을 만질 수 있고 또한 가장 크고도 높은 찬미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들이 많은 고난과 어려움과 비방을 받을 그때에 그들에게서 찬미를 만들어 내시고, 그들이 그런 처지에서 하나님 앞에서 그분을 찬미하는 사람이 되게 하신다.
그러므로 가장 기쁘다고 느끼는 사람의 찬미 소리가 가장 높은 것은 아니다. 가장 높은 찬미 소리는 많은 경우에 하나님 앞에서 어려움을 거친 사람에게서 나온다. 또한 이런 찬미가 가장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높은 산에 서서 얼굴을 가나안으로 향하고 약속의 땅을 볼 때에만 찬미하라고 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더욱 우리가 ‘죽음의 골짜기’를 지날 때에도 시편을 쓰며 찬미할 수 있기를 바라신다. 이것이 참된 찬미이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의 찬미의 성질이 어떤지 우리에게 보여 준다. 찬미의 성질은 하나의 제사요 희생이다. 바꾸어 말해서 찬미는 곤고와 곤란 중에 나온 것이다. 히브리서 13장 15절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제사란 무엇인가? 곧 희생이다. 제사는 죽음과 손실이 있다는 것이다. 제사를 드리는 사람은 반드시 잃은 것이 있어야만 제사를 드릴 수 있다. 제사를 드리고 희생을 드리는 그 자체가 일종의 손실이다. 본래 여러분의 것이었던 소나 양을 가져다가 제사로 드린다면 여러분은 한 마리 소나 양을 잃은 것이다. 제사를 드림은 무언가를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잃는 것이다. 성도가 찬미를 드릴 때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위하여 무언가를 잃게 된다.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은 여러분이 그분 앞에 나아가서 찬미하도록 여러분에게 상처를 주시고 여러분을 부서뜨리시며 깊이 깎아 내리신다. 이렇게 자신이 상처를 입음으로써 하나님께 찬미를 드리는 행위가 바로 제사이다. 하나님은 사람이 이렇게 찬미하는 것을 좋아하신다. 하나님은 이런 찬미를 그분의 보좌로 삼기를 좋아하신다. 하나님은 어떻게 찬미를 얻으시는가? 하나님은 그분의 자녀들이 그들 자신이 손실 당함으로써 그분을 찬미하기를 원하신다. 따라서 무언가를 얻을 때에만 찬미하는 것이 아니다. 무언가를 얻을 때 드리는 찬미는 찬미가 될 수 있을지언정 제사는 아니다. 제사의 원칙은 손실에 근거한다. 제사에는 손실의 성질이 없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우리가 손실을 당하고도 여전히 찬미할 수 있게 하신다. 이것이 참된 제사이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기도해야 할 뿐 아니라 또한 하나님 앞에서 찬미하는 사람이 되기를 배워야 한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이 될 때부터 찬미의 중요성을 알아야 한다. 여러분은 끊임없이 항상 하나님을 찬미해야 한다.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하루에 일곱 번 하나님을 찬미하였다. 날마다 찬미하는 것은 아주 좋은 배움이자 공과요 아주 좋은 영적인 훈련이다. 여러분은 아침 일찍 일어날 때나 일을 할 때나 집회에서나 홀로 있을 때 하나님을 찬미하기를 배워야 한다. 적어도 하루에 일곱 번 하나님을 찬미해야 한다. 결코 다윗보다 적어서는 안 된다. 만일 여러분이 매일 하나님을 찬미하는 것을 배우지 않는다면 히브리서 13장에서 말한 찬미의 제사를 드리기란 어렵다.
여러분이 주님 앞에서 찬미를 배울 때에 어느 날엔가 여러분은 자신이 찬미할 수 없음을 보게 될 것이다. 아마 여러분은 오늘 일곱 번, 내일 일곱 번 하나님을 찬미하고 전날에도 하나님을 일곱 번 찬미하였으며 지난주에도 하나님을 찬미할 수 있었고 지난달에도 하나님을 찬미할 수 있었겠지만, 어느 날에는 하나님을 찬미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날은 여러분이 고통을 느낀 날이거나 빛이 조금도 없는 날이거나 큰 재난을 만난 날이거나 여러분이 많은 원망과 비방을 받은 날이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자신을 위하여 눈물을 흘려도 부족한데 어찌 하나님을 찬미할 수 있겠느냐고 느낄 것이다. 그날에 여러분은 손실과 고통과 어려움으로 찬미하지 못할 것이다. 여러분은 자연적으로 찬미가 아닌 원망을 표현할 것이고 하나님 앞에서 감사가 아닌 불평을 표현할 것이다. 여러분은 찬미해야 한다는 느낌이 없을 뿐더러 찬미할 뜻도 없을 것이다. 여러분은 그런 상황과 심경에서 찬미하는 것은 완전히 합당하지 않으며 이치에 맞지 않다고 느낄 것이다. 그러나 여러분은 여호와의 보좌와 그분의 이름과 영광이 변하지 않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분은 찬미받기에 합당한 분이시기 때문에 여러분은 마땅히 그분을 찬미해야 하고, 그분은 칭송받기에 합당한 분이시기 때문에 마땅히 그분을 칭송해야 한다. 여러분이 어려움을 당할지라도 그분은 여전히 찬양받기에 합당하시다. 여러분에게 궁핍함이 있다 하더라도 여러분은 여전히 찬양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럴 때 여러분의 찬미는 찬미의 제사로 변한다. 여러분의 찬미는 여러분이 가장 살진 송아지를 끌고 가서 그것을 잡은 것과 같다. 또한 여러분의 사랑하는 이삭을 제단 위에 묶은 것과 같다. 여러분은 눈물을 흘려 가면서 찬미한다. 이것이 찬미의 제사이다. 제사란 무엇인가? 제사란 곧 상처받음이요 죽음이요 손실이요 희생이다.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서 상처를 입고 죽으며 하나님 앞에서 손실을 당하고 희생될 때, 여러분은 하나님의 보좌가 하늘 위에 좌정하고 하나님의 보좌가 영원히 요동하지 않음을 보고서 그분을 찬미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것이 바로 찬미의 제사이다. 하나님은 그분의 자녀들이 모든 일과 모든 상황에서 그분을 찬미하기를 기뻐하신다.



Ⅱ. 찬미와 승리

찬미가 하나의 제사인 것을 본 후에 우리는 또한 찬미가 영적인 싸움에서 이기는 방법임을 보아야 한다. 우리는 종종 사람들에게서 사탄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기도라고 들어 왔다. 언제든지 하나님의 자녀들이 무릎을 꿇고 기도할 때마다 사탄은 도망가기 때문에 사탄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기도하지 못하도록 그들을 공격한다. 이것은 아주 보편적인 공격이다. 이에 대해 한마디 더하겠다. 사탄이 가장 많이 공격하는 것은 우리의 기도가 아니라 우리의 찬미이다. 이것은 사탄이 기도를 공격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이 기도할 때마다 사탄은 그들을 공격한다. 그러므로 사람이 대화하기는 쉬워도 기도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때때로 사탄이 여러분에게 어려움을 주어 여러분이 기도하기 어렵다고 느끼게 하는 것은 확실한 사실이다. 그러나 사탄은 기도를 공격할 뿐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의 자녀들의 찬미도 공격한다. 사탄의 바람은 최선을 다하여 찬미를 막아 버리는 것이다. 많은 경우에 기도는 전쟁이지만 찬미는 승리이다. 기도는 영적인 전쟁이고 찬미는 영적인 승리이다. 언제든지 우리가 찬미할 수 있을 그때가 바로 사탄이 도망갈 때이다. 그러므로 찬미는 사탄이 가장 두려워하는 일이다. 사탄은 최선을 다하여 우리가 찬미하지 못하게 할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가 자신의 처지와 느낌을 주목함으로써 찬미를 멈춘다면 이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하나님을 아는 하나님의 자녀일수록 빌립보의 감옥도 찬송하는 장소임을 볼 것이다(행 16:25). 바울과 실라가 그 속에서 하나님을 찬미했기 때문에 결국 감옥의 문이 열렸다.
사도행전에서는 두 차례나 감옥의 문이 열렸다. 한 번은 베드로의 경우이고 또 한 번은 바울의 경우이다. 베드로에게 일어난 일은 교회가 그를 위하여 간절히 기도함으로써 천사들이 문을 열어 주어 그를 이끌어 낸 것이다(행 12:3-12). 또 한 번은 바울과 실라가 찬송하며 하나님을 찬미할 때 감옥이 열리고 사슬이 풀어졌다. 바로 그날에 간수가 주님을 믿고 그의 온 집이 구원을 받았으며 기쁨으로 충만했다(행 16:19-34). 그 감옥에서 찬미의 제사를 드린 사람이 있었다. 몸의 상처가 아직 낫지 않았고 통증이 아직 가시지 않았으며 두 발에 사슬이 채워진 상태에서 로마의 감옥에 갇혀 있는데 기뻐할 만한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찬송할 만한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그러나 거기에 있는 두 사람의 영은 높이 치솟았고 모든 것을 초월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하늘 위에 변함없이 앉아 계신 것을 보았다. 그들과 그들이 처한 환경과 느낌이 변하고 그들의 몸이 고통을 당하고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여전히 보좌 위에 계시며 그들의 칭송받기에 합당하시다. 거기에서 우리의 형제, 바울과 실라는 기도하고 찬송하며 하나님을 찬미했다. 이러한 찬미는 그들의 고통과 손실 가운데 발해진 것이므로 제사인 것이다. 이런 찬미는 또한 승리이기도 하다.
여러분이 기도할 때에 여러분은 여전히 그 상황 안에 머물게 되지만, 여러분이 찬미할 때에 여러분은 그 상황 위로 올라가게 된다. 우리가 아직 기도하며 간구하고 있을 때, 우리는 그 일에서 나오지 못하고 여전히 그 일 안에 남아 있게 된다.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서 가련하게 간구할수록 여러분이 그 일에 묶임을 당하고 그 일이 여러분 위에 있음을 볼 것이다.

그러나 여러분이 감옥과 사슬과 몸의 상처와 그 고통과 수치를 초월하도록 하나님에 의해 인도된다면 여러분은 소리를 발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칭송할 것이다. 바울과 실라가 찬송을 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 찬미의 말을 한 것이다. 그들에게는 감옥이 문제되지 않았으며 수치와 고통도 문제되지 않았다. 여전히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찬미할 수 있을 정도로 이끌렸다. 그들이 감옥에서 찬미할 때 문이 열리고 사슬이 풀리며 간수도 구원을 얻게 되었다.
많은 경우 기도는 통하지 않지만 찬미는 통한다. 이것은 하나의 기본적인 원칙이다. 여러분이 기도할 수 없을 때 왜 찬미하지 않는가? 주님은 우리가 승리하고 그 승리를 자랑할 수 있도록 다른 것을 우리 손에 두셨다. 여러분에게 기도할 힘이 없고 여러분의 영이 너무 심히 억눌려 있어서 상처를 입고 숨을 쉴 수 없다고 느낄 때에는 언제든지 그분을 찬미해 보라. 기도할 수 있을 때 기도하고 기도하지 못할 때에는 찬미하라. 우리는 언제나 짐이 무거울 때 기도하고 짐이 없어질 때 찬미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많은 경우 더 이상 기도할 수 없을 정도로 짐이 무거울지라도 여전히 찬미해야 함을 기억하라. 짐이 없어질 때에야 찬미할 것이 아니라 짐이 가장 무거울 때 찬미해야 한다. 만일 여러분이 특별한 일을 당하고 어려움이 많을 때, 여러분의 전 존재가 녹초가 되어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를 때 “왜 찬미하지 않는가?”라는 한마디를 기억하라. 이때가 아주 좋은 기회이다. 만일 여러분이 이때 찬미한다면 하나님의 영은 모든 문을 여실 것이고 여러분이 모든 사슬이 풀어지는 단계에 이끌리도록 운행하실 것이다.
우리는 모든 공격을 뛰어넘는 초월의 영을 가져야 한다. 모든 기도가 우리에게 보좌를 만지게 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찬미는 언제든지 우리에게 보좌를 만지게 한다. 기도는 항상 우리를 이기게 하지는 못하지만 찬미는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가 실패하지 않도록 한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마땅히 입을 벌려 찬미해야 한다. 일이 없고 느낌이 없고 상처가 없고 어려움이 없을 때에만 찬미할 것이 아니라, 특히 어려움과 상처가 있을 때 특별히 찬미해야 할 것이다. 그때 여러분은 고개를 들어 “주여! 당신을 찬미합니다!”라고 말하며 눈물을 흘리겠지만, 여전히 그분을 찬미할 수 있다. 마음은 상처로 인해 아프지만 영은 여전히 찬미할 수 있다. 여러분의 영은 여러분의 찬미와 같이 높이 오르게 되고 위로 올라갈 수 있다. 가장 어리석은 사람은 원망하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원망할수록 그 원망 속에 묻히고 불평할수록 그 속에 빠진다. 곤란 때문에 억눌릴수록 그는 숨이 막히게 된다. 많은 사람들은 비교적 진보하여 어려움을 만날 때 기도한다. 그들은 거기에서 나오려고 분투하며 발버둥 치고 애쓴다. 환경이 그들을 묻어 버리고 감정이 그들을 묻어 버리려고 하지만, 그들은 묻히기가 싫어서 기도로 나오려고 한다. 물론 많은 경우에 기도함으로써 거기에서 나오게 된다. 그러나 또 많은 경우에 기도는 그들을 나오게 할 수 없고, 그들이 찬미할 때 비로소 벗어나게 된다. 여러분은 찬미를 제사로 삼아 찬미의 제사를 드려야 한다. 여러분이 자신을 승리의 위치에 둔다면 여러분은 즉시 모든 것을 초월하게 되고, 어떤 것도 여러분을 묻을 수 없게 된다. 때때로 어떤 것이 여러분을 억누르고 있는 것 같다가도 여러분이 찬미할 때 곧 여러분은 거기서 나오게 된다.
역대하 20장 20절부터 22절까지를 보자. “이에 백성들이 일찍이 일어나서 드고아 들로 나가니라 나갈 때에 여호사밧이 서서 가로되 유다와 예루살렘 거민들아 내 말을 들을지어다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견고히 서리라 그 선지자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형통하리라 하고 백성으로 더불어 의논하고 노래하는 자를 택하여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군대 앞에서 행하며 여호와를 찬송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 자비하심이 영원하도다 하게 하였더니 그 노래와 찬송이 시작될 때에 여호와께서 복병을 두어 유다를 치러 온 암몬 자손과 모압과 세일 산 사람을 치게 하시므로 저희가 패하였으니.” 여기에 한 싸움이 있다. 여호사밧이 유다 왕으로 있을 때는 쇠망할 즈음이라서 나라가 아주 약하며 모든 면에서 좋지 않았다. 그래서 모압 자손과 암몬 자손과 세일 산 사람들이 일어나 유다를 쳤다. 유다 사람들은 완전히 실망하여 패배하고 멸망할 것만 같았다. 여호사밧은 부흥된 왕이자 하나님을 경외한 사람이었다. 물론 마지막 때에 유다 왕들은 그리 온전하지 않았지만 여호사밧은 여전히 하나님을 추구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유다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신뢰하라고 말했다. 그는 어떻게 하였는가? 그는 노래하는 자를 세워서 여호와를 찬양하게 했다. 그리고 여호와를 칭송하는 사람들에게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서 군대 앞에 행하여 여호와를 찬송하기를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 자비하심이 영원하도다”라고 하게 하였다. 다음 구절의 ‘시작될 때에’를 주의하라. 이것은 매우 귀한 것이다. “그 노래와 찬송이 시작될 때에 여호와께서 복병을 두어 유다를 치러 온 암몬 자손과 모압과 세일 산 사람을 치게 하셨다.” 모든 사람이 노래하고 여호와를 찬미할 때 여호와께서는 일어나 암몬 자손과 모압 자손과 세일 산 사람들을 치셨다. 우리는 찬미만큼 주님의 손을 움직이게 하는 것이 없다고 말할 수 있다. 가장 빨리 주님의 손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기도가 아니라 찬미이다. 기도할 필요가 없는 것으로 오해하지 말라. 매일 우리는 기도해야 하고 좋은 기도를 가져야 한다. 그러나 많은 일에 있어서 찬미로 이겨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영적인 승리가 씨름이 아닌 찬미로 얻는 것임을 볼 수 있다. 우리는 찬미로 사탄을 이기는 것을 배워야 한다. 기도만이 아니라 또한 찬미로 사탄을 이겨야 한다. 많은 사람들은 사탄의 흉악함과 자신의 연약함을 보고서 분투하며 기도하려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영적 승리가 씨름으로가 아닌 찬미로 얻어진다는 한 가지 특별한 원칙을 발견한다. 하나님의 자녀는 종종 어려움이 너무 크기 때문에 무슨 방법을 써서 처리해야겠다는 시험에 든다. 그들은 방법을 주의하지만, 방법을 주의할수록 승리하기가 더 어렵다. 그들이 이렇게 하는 것은 그들의 대적인 사탄과 같은 위치에 서 있는 것이고, 전쟁터에서 사탄이 한 쪽에 서 있고 그들은 다른 쪽에 서 있는 것이기 때문에 승리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역대하 20장은 다르다. 그쪽에는 군대가 있고 이쪽에는 찬송이 있다. 이 사람들이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미친 사람일 것이다. 우리가 미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임을 하나님께 감사한다.
하나님의 자녀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심한 시험을 받고 또 자주 시험을 받는다. 시험이 심하고 싸움이 맹렬할 때 여호사밧과 같이 갈 길이 없는 것 같다. 그쪽은 강하고 이쪽은 약하므로 비교가 안 된다. 태풍에 휘말리듯 그들의 곤란은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크다. 그때 그들의 생각은 고난을 주목하기 쉽고, 그들의 눈은 특별히 그들 자신의 어려움을 보려고 할 것이다. 사람은 시험받을수록 자신이 어떠한 곤경에 처해 있는가를 생각한다. 이때가 가장 큰 시험이다. 자신을 보고 환경을 볼 때가 가장 큰 시험이다. 사람은 시험받을수록 자신과 환경을 바라본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시험을 받을수록 주님을 바라보고 찬미하기를 배운다. 그러므로 우리의 눈은 자신을 보지 않고 주님 보기를 배워야 한다. 고개를 들고 주님께 “주여! 당신은 모든 것을 초월하신 분임을 찬양합니다!”라고 말하라. 큰소리로 하는 찬양, 마음에서 우러나는 찬미, 상처 입음을 느끼는 데에서 흘러나오는 찬미가 곧 하나님께서 돌아보시고 기뻐하시는 찬미의 제사이다. 찬미의 제사가 하나님께 갈 때에 대적 사탄은 여러분의 찬미에 의해 패배 당한다. 하나님 앞에서 찬미의 제사는 효능이 있다. 만일 여러분이 속에서부터 가장 좋은 느낌을 갖고 하나님을 찬미할 수 있다면 여러분은 능히 서며 승리하게 된다. 여러분은 능히 찬미할 수 있다. 여러분은 승리의 길이 이같이 위대하다는 것을 보아야 한다!
새로 믿은 형제자매들은 몇 년이 지나야 찬미의 공과를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 찬미의 공과는 처음부터 배울 수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여러분이 어려움을 당할 때마다 찬미의 공과를 배우며, 여러분이 수단과 계략을 세우지 않도록 하나님의 긍휼을 구해야 한다. 많은 싸움은 찬미로 능히 이길 수 있다. 그러나 찬미가 부족하기 때문에 승리하지 못하는 것이다. 만일 여러분이 하나님을 신뢰한다면 곤란 중에 있을지라도 여러분은 능히 주님께 “모든 것보다 높고 강하신 당신의 이름을 찬미합니다. 당신의 인자함은 영원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을 찬미하는 사람은 모든 것을 초월하고 능히 찬미로 항상 이길 수 있다. 이것은 원칙이요 사실이다.

 

 

Ⅲ. 믿음은 찬미를 산출함

시편 106편 12절의 말씀은 매우 귀하다. “이에 저희가 그 말씀을 믿고 그 찬송을 불렀도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 있을 때의 상태이다. 그들은 믿음으로 노래를 불렀고 믿음으로 찬미하였다. 찬미의 기본적인 내용은 믿음이다. 여러분은 빈말로 찬미할 수 없고 함부로 “주님께 감사하고 주님을 찬미합니다!”라고 말할 수 없다. 반드시 믿을 수 있어야만 찬미할 수 있다. 여러분에게 곤란과 근심이 있을 때 여러분은 기도할 것이다. 여러분이 마음속에서 믿을 수 있을 정도로 기도했을 때 여러분은 즉시 입을 열어 찬미할 수 있다. 이것은 살아 있는 길이지 멋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일이 생길 때 항상 주님께 간구한다. 언제든지 속에 약간의 믿음이 있어서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위대함과 능력과 인자함과 영광을 믿으며 하나님께서 그분의 영광을 나타내실 것을 믿을 때에 찬미하기 시작해야 한다. 만일 사람 속에 믿음이 있는데도 찬미하지 않는다면 그 믿음은 언젠가 사라지게 된다. 이것은 우리의 체험에 근거해 말한 것이다. 우리는 여러분 속에 믿음이 있다면 반드시 찬미해야 한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만일 여러분이 찬미하지 않는다면 얼마 못 가서 믿음을 잃게 될 것이다. 좀 전에는 믿을 수 있었더라도 이제는 그 믿음을 찾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찬미를 배우되 찬미의 말을 말해 내고 입을 열어 찬미하기를 배워야 한다. 찬미할 생각만을 가지라는 것이 아니라 소리 내어 찬미의 말을 해내라는 것이다. 여러분은 굳게 서서 곤란과 사탄에 맞서서 하나님을 찬미하며 “주여! 당신을 찬양합니다.”라고 말해야 한다. 느낌이 없다면 느낌이 있을 때까지 말하고 느낌이 적으면 많을 때까지 말하며 적은 믿음에서 믿음이 충만할 때까지 말하라.

만일 하나님의 영광이 여러분의 눈에 충만하다면 여러분은 능히 믿을 수 있게 된다. 만일 하나님의 영광이 여러분의 영에 충만하다면 여러분은 능히 찬미할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초월하시고 여러분의 찬미를 얻기에 합당하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여러분이 찬미할 때 사탄은 도망할 것이다. 때로 여러분은 기도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여러분 속에 믿음이 있고 주님께서 여러분의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확신이 있을 정도로 기도했을 때 여러분은 다음과 같이 찬미해야 한다. “주여! 당신께 감사하고 찬양합니다! 이 일은 이미 지나갔습니다.” 일이 성취된 후에 찬미하지 말라. 여러분이 믿을 때에 찬미하라. 대적이 달아난 후에야 노래할 것이 아니라 노래함으로써 사탄을 쫓아내야 한다. 우리는 믿음으로 먼저 찬미하기를 배워야 한다. 여러분이 믿음으로 그분을 찬미할 때 대적이 완전히 패배당하는 것을 보게 된다. 믿어야만 찬미할 수 있다. 믿고 찬미한 다음에야 승리가 있다.

Ⅳ. 순종은 찬미를 산출함

우리의 문제는 대체적으로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여호사밧과 같은 환경과 사건의 문제이다. 이것은 찬미로 말미암아 이겨야 한다. 또 한 가지는 내적인 문제로서 남이 우리를 해치는 말을 하거나 우리에게 잘못을 범하거나 우리를 욕되게 하거나 무례히 대우하거나 무례히 대적하거나 이유 없이 미워하거나 근거 없이 비방할 때 우리 속에서 이것을 견디지 못하고 통과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개인적인 승리의 문제이다. 한 형제가 여러분에 대해 부당한 말을 하거나 한 자매가 무례하게 대했을 경우, 여러분이 이것을 이기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아마 온몸으로 발버둥 치고 불평하며 원망할 것이다. 여러분은 용서하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승리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느낄 것이다. 여러분이 억울함과 비방과 핍박을 당하므로 속에서 통과되지 않을 때 여러분의 기도는 별 소용이 없다. 여러분은 대항하려 해도 대항하지 못하고 발버둥 쳐도 벗어나지 못한다. 거절해도 압력은 줄지 않는다. 여러분은 이것이 너무 어려운 일이고 이기기 쉽지 않다고 느낄 것이다. 여러분이 개인적으로 크게 어려움을 당하고 심한 억울함을 당할 그때는 여러분이 기도할 때가 아니라 찬미할 때임을 기억하라. 여러분은 머리 숙여 주님께 “주여! 당신께 감사합니다. 당신이 하신 것은 틀리지 않습니다. 당신 손에서 이것을 받습니다. 당신께 감사합니다. 당신 손에서 이것을 받습니다. 당신을 찬양합니다.”라고 말하라. 만일 여러분이 이렇게 한다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 승리는 육체 안에서 분투하는 것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자신의 힘으로 계속 남을 용서하려고 시도하거나 노력하는 것이 아니다. 승리란 머리 숙여 주님을 찬미하면서 “주여! 당신의 길을 찬양합니다. 당신이 나를 위해 안배하신 것은 틀리지 않습니다. 당신이 행하신 것은 모두 옳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여러분이 이렇게 하나님을 향해 찬미할 때 여러분의 영은 문제를 초월하게 되고 속에서 상처 받은 감정을 뛰어넘게 된다. 상처 받았다고 느끼는 사람은 찬미가 부족한 사람이다. 만일 여러분이 찬미할 수 있다면 여러분의 상처 받은 감정은 찬미의 감정으로 변할 것이다. 여러분의 영은 높이 올라 하나님 앞에서 “당신께 감사하고 찬미합니다. 당신이 행하신 것은 틀리지 않습니다.”라고 말할 것이다. 여러분은 주님 앞에서 이런 길을 가야 한다. 모든 것을 등 뒤로 던져 버리라. 이것은 어떠한 영광인가? 이것이 참된 제사이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찬미에서 시작된다. 찬미는 모든 것을 초월함으로 주님을 만지는 것이다. 이 땅에서 주 예수님은 바로 이런 길을 가셨다. 여러분도 능히 이 길에 들어설 수 있다. 하늘을 바라보고 탄식하며 시험받을 것이 아니라 시험 그 위로 올라가라. 여러분이 찬양할 때 여러분은 시험 위에 있게 된다. 누가 여러분을 억누를수록 여러분은 주님 앞에 일어나서 “주여, 당신께 감사하고 찬미합니다!”라고 말하라. 그분이 하나님이심을 알고 그 일은 하나님께서 하신 것임을 인하여 그분에게서 그 일을 받기를 배우라. 찬미의 제사보다 사람을 달콤하게 하고 성숙하게 하는 것이 없다. 우리는 성령의 징계를 받을 뿐 아니라 성령의 징계를 찬미하는 것도 배워야 한다. 주님의 손을 받을 뿐 아니라 주님의 손을 칭송하기를 배워야 한다. 주님의 책망을 받을 뿐 아니라 다만 마음으로 즐거이 이 책망을 받기를 배우라. 이렇게 할 때에 우리를 위하여 분명하고 영광스런 문이 열리게 된다.

Ⅴ. 깨닫기 전에 먼저 찬미함

마지막으로 시편 50편을 읽어보기 바란다. 하나님은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에서 ‘감사’는 ‘찬미’로 되어 있다. 주님은 우리의 찬미를 기다리고 계신다. 찬미보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없다. 언젠가 모든 기도는 지나가고 모든 일과 모든 예언과 모든 수고가 다 지나가되 오직 찬미는 현재보다 더욱 증가할 것이다. 찬미는 영원히 지속될 것이요 영영 그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하늘에 이르러 우리의 궁극적인 집에 도착할 때 우리의 찬미는 더욱 높아질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 하나님을 찬미하기를 배우라. 이것이 우리에게 가장 좋은 공과이다.

오늘 우리는 거울로 바라보기 때문에 모든 것이 희미하게 보일 것이다(고전 13:12). 많은 일에 있어서 우리는 조금밖에 보지 못하고 그 속의 의미를 깨닫지 못한다. 우리는 우리가 당한 조우나 거친 일들이 내적인 감정의 상처이든 외적인 환경의 어려움이든 우리는 고통스럽다고만 느낄 뿐, 그 속의 의미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찬미하지 않는다. 우리는 하늘 위에 많은 찬미가 있을 것이라고 믿는데, 그 이유는 하늘 위에 완전한 지식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식이 완전할수록 찬미가 완전하다. 우리가 주님 앞에 가는 그날에는 모든 것이 분명해진다. 그날 우리는 모든 단계에서의 성령의 징계에 주님의 선하신 뜻이 있었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만일 성령의 징계가 없었다면 우리는 어디에 떨어졌을지 모른다. 만일 성령께서 날 대신해 어떤 단계를 막아 주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어디에 떨어졌을지 모른다! 그날에 우리는 오늘 보이지 않는 수천 가지의 일들을 보게 될 것이다. 이것을 볼 때에 여러분은 머리를 숙여 “주여, 당신은 틀리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할 것이다. 모든 단계에서의 성령의 징계는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일하신 것이다. 만일 그때 우리가 병들지 않았다면 우리는 어떻게 되었을지 모르고 그때 실패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어떻게 되었을지 모른다. 우리가 당한 것은 곤란이었지만 그것으로 인하여 더 큰 곤란을 피했는지도 모른다. 그날에 우리는 주님께서 왜 이런 조우를 주셨는지 보게 될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걷는 모든 걸음은 다 그분의 인도하심이다. 그날에 우리는 머리 숙여 이렇게 말할 것이다. “주여, 당신께 찬미하지 않은 내가 어리석은 사람이었습니다. 당시에 당신 안에서 감사하지 않은 내가 어리석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날 우리가 보고 깨달은 후에, 우리가 원망했던 것을 생각할 때 얼마나 부끄러운가를 알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하기를 배워야 한다. “주여, 당신이 하신 일에 대해 내가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당신이 하신 일은 틀리지 않다는 것을 내가 압니다.” 믿고 찬미하기를 배우라. 그렇게 할 때 그날에 여러분은 이렇게 말할 수 있게 된다. “주여, 불필요한 불평과 원망에서 구원해 주신 당신의 은혜에 감사합니다. 주여! 당시 많은 원망의 말을 하지 않게 하신 은혜에 감사합니다.” 많은 일을 여러분이 알 수 있다면 여러분은 더욱 크게 찬미할 것이다. 우리가 찬미해야 하는 이유는 그분께서 선하시기 때문이다(시 25:8, 100:5). 여러분은 계속 “주님은 선하십니다.”라고 말해야 한다. 오늘날 우리는 주님께서 선하시며 우리가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그분은 틀리지 않으신다는 것을 믿기를 배워야 한다. 우리가 믿을 수 있다면 찬미할 수 있게 된다. 우리의 찬미는 그분께 영광이 된다. 찬미는 곧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영광 받기에 합당하신 분이시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자녀들에게서 많은 찬미를 얻으시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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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집 제48권 초신자를 온전케 하는 공과 제10장 기도
Ezra Zion , 2013-04-11 , 조회 (107) , 추천 (0) , 반대 (0), 스크랩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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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치만 니 전집 제3집 제48권

초신자를 온전케 하는 공과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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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

 

1948년 니 형제님의 사역이 회복된 후 그는 여러 차례 형제들과 믿는 이들의 영적인 교육의 중요성을 교통했다. 그는 교회 안의 형제 자매들 모두가 기본적인 가르침을 받고 견고한 기초가 세워지므로 동일한 간증이 산출되기를 원했다. 이 책은 바로 니 형제님이 고령에서 한무리의 사역자들을 훈련시키던 그 해에 초신자들을 온전케 하기 위하여 전한 메시지로써 모두 50편이며 또한 70개의 제목이 있다. 그 내용은 상당히 풍성하며 포괄적이고 기본적이지만 중요하다. 그의 의도는 모든 지방 교회가 다 일년 동안 매주 한 번 이 메시지로 초신자들을 온전케 하고 매년 계속 사용하기를 원했다.
이 오십 편의 메시지는 모두 상, 중, 하 세 권의 책으로 나누었으며, 상권 첫 부분에 한편의 온전케 하는 집회의 메시지를 실었다. 이것은 1950년 7월에 니 형제님이 동역자 집회의 담화기록에서 초신자들을 온전케 하는 중요성과 훈련 때의 요점, 그리고 실행상의 세부적인 항목을 말씀하신 것이다.

1972년 8월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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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신자를
온전케 함에 관한
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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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신자를 온전케 함에 관한 집회


Ⅰ. 초신자를 온전케 함의 중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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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을 갓 믿은 모든 형제들은 가장 먼저 자신에 대하여 큰 의문을 품어야 한다. 예를 들어 어떤 형제는 올해 사십 세가 되어 구원을 받았다. 과거 그는 사십 년 동안 세상에서 세월을 보냈고, 죄악 가운데서 세월을 보냈으며, 세상의 풍속을 따라 세월을 보냈고, 사단의 권세 아래서 세월을 보냈다. 그의 과거 사십 년은 날마다 그 자신의 성질을 따라 행하고 자신의 관점과 자신의 느낌, 그 자신의 주관에 따라 행했었다. 오늘 그가 구원받았다면 마땅히 자신을 믿지 않아야만 한다. 그는 가장먼저 자신에 대하여 큰 의문을 품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에는 표준이 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 그리스도인의 관점. 그리스도인의 의견에는 다 표준이 있다. 이 표준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어떤 종류의 사람이 되어야 완전한 사람이 되는지를 알지 못한다. 이 표준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쉽게 자신을 자랑하고 쉽게 자신에 대하여 만족하며 쉽게 자신을 믿는다. 이 표준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그가 틀렸다고 보는 것이 반드시 틀린 것이 아니며 그가 옳다고 여기는 것도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다. 주님 앞에서 배움이 있고 이 표준을 아는 사람만이 절대로 그렇게 할 수 없고 그렇게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며 비로소 무엇을 가리켜 잘못된 것이라고 하며 무엇을 가리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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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되지 않았다고 하는지를 찾을 수 있다. 초신자를 온전케 하는 것은 바로 초신자로 하여금 그리스도인의 표준을 알도록 인도하는 것이요 그들로 이 표준에 따른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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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신자들에 대한 첫번째 단계는 충분하고도 철저하게 허물어뜨리는 것이다. 주님은 왜, “너희가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는가? 그것은 바로 그가 과거에 잘못 살고 헛되이 산 나날들을 인정하지 않고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하라는 의미이다. 요한복음 3장의 ‘거듭남’은 우리에게 생명의 필요를 보여 준다. 마태복음 18장에서 “어린아이와 같이 된다”는 것은 우리에게 과거의 날들이 소멸되어야 참을 보여 준다. 과거의 모든 것들은 다 깨끗이 허물어져야 한다. 초신자를 온전케 하는 것은 그들의 과거를 하나하나 허무는 것이다. 만일 어떤 초신자가 사십 세에 구원을 받았다면 그를 온전케 한다는 것은 그의 과거 사십 년 동안의 모든 것을 허물어뜨리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죄에 대하여 후회하지만 자신에 대하여는 후회하지 않는다. 우리가 죽고 부활하는 것은 삶을 죽음에 더하는 것이 아니다. 초신자를 온전케 한다는 것은 제거할 것과 더해야할 것을 하나하나 지적해 내는 것이다. 만일 모든 일들을 성경을 따라 결정하지 않고 여전히 과거의 체험, 과거의 습관. 과거의 관점을 따라 말하고 행한다면 이것은 지극히 큰 잘못이다. 사람이 일단 주님을 믿은 후 적은 관념조차도 과거의 것을 따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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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으로 하여금 새로운 생명을 얻게 하는 것 곧 거듭남은 사람의 과거를 허물어뜨리고 어린아이가 되도록 “돌이키케 하는” 것이다. 초신자를 온전케 하는 것은 소극적인 방면에서 그의 과거의 모든 것을 허물어뜨리는 것이고 적극적인 방면에서는 그에게 새로운 시작을 갖게 하는 것이다.
만일 초신자가 그의 과거의 모든 것을 허물어뜨리지 않으면 그리스도인으로써 어려움을 당하게 된다. 이는 과거 그가 가지고 있던 것을 다 갖고 있고 주님이 그에게 주신 것들은 다만 그에게 더하여진 것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주님의 생명을 그의 과거의 모든 것들과 협력하게 한다. 그는 자신에 대하여 여전히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며 입만 열면 자신이 얼마나 성실한 사람이었는지. 자신이 얼마나 인내하고 고난을 견딜 수 있는 사람이었는지를 말한다. 교만으로 가득하지만 동시에 지극히 겸손한 것 같다. 없어질 영광을 탐하고 땅 위의 재물을 쌓으면서도 여전히 자신이 명리(名利)에 흥미가 없는 사람이라고 여긴다. 많은 자매들은 성질을 내는 데 있어서 아주 특별하여 다른 사람과 함께 있는 것이 쉽지 않다. 많은 부모들이 아이들에 관한 관념이 아주 특별하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된 지 십 년 이십 년이 되어도 그 낡은 모습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초신자들은 일단 시작하면 반드시 자신에 대하여, 이전에 갖고 있던 모든 것에 대하여 크고 엄중한 의문을 품어야 한다. 오늘 이후로 낡은 관념들과 낡은 방법들. 낡은 의견들 그리고 낡은 모든 것들을 다 제거해야 한다. 어린아이와 같은 모습으로 되돌아와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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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례는 바로 과거의 모든 것을 무덤 안으로 가져가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올해 오십 세이다. 그가 구원받고 침례를 받으러 왔는데 침례는 주님이 그의 생명을 요구하는 것일 뿐 아니라 그의 오십 년 된 생명을 요구하며 그의 매년의 생명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전에 죄는 사람의 모든 조직 안에 미쳤으며 사람은 갖가지 질병이 있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갖가지 질병을 다 물 속에 두어야 한다. 사람이 무덤을 떠날 때는 무덤에서 입었던 의복으로부터도 떠나야 한다. 침례는 이처럼 엄격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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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이 구원받고 난 뒤에는 가치관의 문제에 대하여 기본적인 변화가 있어야 한다. 과거의 모든 가치에 대한 편가는 모두 무가치한 것이며 정확한 것이 아니다. 초신자를 온전케 하는 것은 그에게 과거의 가치관이 틀린 것이며 과거의 가치에 대한 평가가 정확하지 않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에게 새로 본 것이 있게 하고 새로운 평가가 있게 해야 한다. 이전에 귀하게 여겼던 것을 오늘은 분토처럼 여겨야 하고 이전에 유익하게 여기던 것을 오늘은 해로 여겨야 한다. 성질과 언어가 지금 이후부터는 과거와 같지 않아야 한다. 의복과 음식 또한 오늘 이후에는 과거와 같을 수 없다. 혼인과 성욕의 관념에 대하여 역시 과거와 달라야 한다. 어떻게 부모가 되며 어떻게 친구와 왕래하는지에 대하여 새로운 방법과 새로운 관점이 있어야 한다. 오락과 직업에 대한 태도와 선택 역시 과거와 달라야 한다. 모든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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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워야 하며 새로운 시작이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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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갓 믿은 사람이 한 주제 한 주제를 통해서 온전케 되고, 허물어져야 할 것이 허물어지고 더해져야 할 것이 더해졌다면 그는 표준에 가까워질 것이고 표준적인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랄 수 있다.

Ⅱ. 훈련 시에 주의해야 할 몇 가지 요점

초신자를 온전케 하는 것을 강화시키기 위하여 먼저 한 무리 형제 자매들을 훈련시키고 그런 후에 그들을 나누어 초신자를 온전케 하는 일을 책임지게 해야 한다. 온전케 함을 받지 못한 초신자가 한 명도 없기를 바란다. 그러나 훈련을 받고 초신자를 온전케 하는 책임을 진 형제 자매들은 아래 몇 가지를 주의해야 한다
(1) 계속 말하는 것에 중점을 두지 말고 묻는 것을 격려해야 한다. 고린도전서 14장 37절은 ‘묻는 것’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이로 볼 때 초대 교회는 묻는 것에 있어서 상당히 자유로웠음을 알 수 있다. 질문할 수 없는 집회는 틀림없이 너무 형식적일 것이다. 인도하는 사람은 듣는 사람들을 일깨워서 그들이 질문을 할 수 있게 하고 그들이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물어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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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답변을 할 때는 체면을 살리기 위하여 진리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아는 것은 안다고 말하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말하라.
(3) 인도하는 사람은 자신이 자신을 대표하고 있는지, 아니면 진리를 대표하고 있는지를 물어야 한다. 모든 사람이 진리를 대표해야 하며 자기의 느낌과 자기의 성질을 대표해 서는 안 된다. 반드시 진리를 유지해야 하며 자기의 느낌을 유지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든지 자기의 의견을 가져올 수 없다. 예를 들어 머리 덮는 것에 대해서 인도하는 사람이 이해가 부족할지라도 머리를 덮어도 좋고 덮지 않아도 좋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진리는 절대적이며 우리는 진리와 같은 말을 해야 한다. 만일 정함이 없는 나팔을 분다면 모두가 정함이 없는 싸움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개인의 의견이 있을 매 오직 건설적인 발표만을 할 수 있을 뿐 결코 무너뜨리는 식의 발표는 할 수 없다.
(4) 모든 인도하는 사람은 처음부터 자신의 신분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통로임을 분명히 알아야 하며 사범이 되지 말고 선생이 되지 않아야 한다.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 낮은 사람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낮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 낮은 사람에게 전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도 선생의 지위에 설 수 없으며 개개인이 다 말을 전달하는 위치에 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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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실행 방면

초신자를 온전케 하는 것이 기본적인 온전케 함이기 때문에 각지 교회마다 다 이러한 집회―초신자를 온전케 하는 집회―가 있기를 바란다. 나는 이제 실행 방면에 관한 것을 약간 말하겠다.

1. 누가 초신자인가

죄인이 주님을 믿고 침례를 받았다면 그가 바로 초신자이다. 침례받은 그 주일부터 그는 마땅히 초신자를 온전케 하는 집회에 참가해야 한다. 일년을 참석했다면 그가 알아야 할 것과 배워야 할 것을 대부분 배웠을 것이다. 이것은 그가 기본적인 온전케 함을 받은 그리스도인이 되었음을 말하며 이후에 더 깊은 온전케 함을 받기를 바랄 수 있다. 여러분이 알아야 할 것은 죄인이 주님을 믿은 후에 나이나 학문이나 지위가 얼마나 높은지 세상 경력이 얼마나 깊은지에 상관이 없이 그는 반드시 온전케 됨이 필요한 초신자이다. 만일 그가 과거에 허물어지지 않았다면 그는 좋은 그리스도인이 되기가 어렵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님을 믿고 침례를 받으면 우리는 그를 다만 초신자로 간주할 뿐이며 그로 하여금 초신자를 온전케 하는 집회에 참가하도록 요청해야 한다. 이미 주님을 믿은 지 오래 되었지만 이러한 기본적인 온전케 함을 받지 못한 형제 자매들이 초신자를 온전케 하고자 하는 집회에 참가하려 한다면 역시 참가할 수 있다. 왜냐하면 초신자를 온전케 하는 목적은 옛 것을 허물어뜨리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것을 건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주님을 믿은 연수가 얼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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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되었는가에 있지 않고 주님을 믿은 후에 과거의 것이 얼마나 허물어졌는가에 달려 있다. 나는 전에 어떤 형제가 일생 동안 한 번도 잘못을 자백한 적이 없이 뜻밖에 책임 형제가 되는 것을 보았다. 영적인 체험에 따라 말한다면 이러한 형제는 주님을 믿은 기간이 오래되었어도 여전히 초신자의 과정부터 시작해야 한다.

2. 초신자를 온전케 하는 집회의 기간

각지 교회에서 초신자를 온전케 하는 집회를 안배할 때는 수요일이나 목요일이 가장 좋다. 사람이 많든 적든 전체이거나 작은 반이거나 다 수요일 혹은 목요일에 계속 순환하여 전해야 한다. 이렇게 할 때 갓 믿은 형제 자매들이 교회가 있는 지방에 오기만 하면 과정을 빠뜨리지 않고 계속 이어갈 수 있다.

3. 훈련 집회

(1) 분기 집중 훈련 : 이러한 훈련은 총 책임을 맡은 형제(동역자 중의 하나)가 책임을 져야 하며, 그가 있는 그 구역이 함께 모이거나 혹은 그 일대에서 말씀을 공급할 수 있는 형제들이 단기간의 훈련을 더할 수 있다. 매 번의 단기간의 집회는 적어도 열 가지 제목 혹은 스무 가지 제목을 말해야 한다. 대략 3, 4기 정도면 모든 제목들을 다 전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훈련을 받은 형제들은 그들의 지방으로 돌아간 후에 초신자를 온전케 하는 집회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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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할 수 있다.
(2) 매주 현지 훈련 : 상해와 같은 곳은 초신자들이 상당히 많다. 만일 그들을 몇 십 개의 반으로 나눈다면 인도하는 사람만도 백여 명이 넘을 것이다. 총 책임을 맡은 형제는 매주 이들 인도하는 사람들에게 한 차례의 훈련을 실시할 수 있다. 한면으로 과거 일주일 동안 가르친 것들 가운데서 부족한 점과 어려움들을 함께 교통하고 다른 한면으로는 다음주에 말할 제목들을 연구할 수 있다. 시간은 매주 금요일이 가장 좋으며 늦어도 매주 월요일에는 실행해야 한다. 왜냐하면 일주일 혹은 적어도 삼 일의 예비가 있어야만 인도할 때 막연하게 말하지 않는다.
(3) 교재와 필기 : 훈련할 때 배우는 사람들에게 교재가 없다면 반드시 하나하나 필기를 해야 한다. 만일 교재가 있다면 하나하나 자세히 읽어야 한다. 분명치 않은 부분은 물어 볼 수 있으며 모든 사람이 함께 연구할 수 있다. 이 주제의 중심 사상이 무엇인가? 몇 개의 단락이 있는가? 매 단락의 중요한 의미는 무엇인가? 이 단락에 어떤 중요한 단어가 있는가? 이 단락 안에는 어떠한 중요한 말이 있는가? 이 단락을 통해서 허물어야 할 것이 무엇이며 건축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보아야 한다. 한 단락 한 단락을 읽고서 한면으로는 전하고 한면으로는 물어야 하며, 한면으로 듣고 또 한면으로 물어야 한다. 두번째 주 목요일은 그들로 하여금 반을 나누어 초신자 집회를 인도하게 하라.
(4) 도달해야 할 목표 : 매번 한 가지 주제를 말할 때 초신자들에게 더 많은 진리를 알게 하려고 하지 말고 어떻게 그들 안에 새길 것인가를 주의하라. 어떤 부분에서는 어떻게 새겨 주고 어떤 것을 제거해야하며 어떤 것을 더해야 할지를 다 주의해야 한다. 이러한 제목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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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구를 삼아 사람들을 온전케 할 때 한 무리의 새로운 모습의 사람들이 산출되는 것이다. 그러나 목적을 도달하기 위해서는 인도하는 사람이 반드시 하나님 앞에서 먼저 깊은 다루심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말할 때 자연스럽지 않고 공허한 말을 전할 것이며 역량이 없게 된다. 이것이 초신자들을 온전케 하는 집회를 인도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주의해야 하는 것이다.

4. 초신자를 온전케 하기 위한 분반집회

만일 어떤 교회에 초신자들이 아주 적거나 말씀이 출구가 될 사람들이 많지 않다면 반을 나눌 필요가 없다. 다만 매주간에 한 번 어떤 사람이 한 주제 한 주제 순서대로 그들에게 전해 주고 또한 동시에 그들에게 질문하면 된다. 만일 한 교회에 초신자들이 상당히 많다면 몇 개의 작은 반으로 나누어서 따로 초신자를 온전케 해야 한다. 반을 나누는 것은 장소의 멀고 가까움을 따라 나누거나 혹은 수준의 깊고 얕음에 따라 나누어야 하지만 반드시 적합하고 실제적인 상황을 따라야 한다. 만일 인도하는 사람이 충분하다면 적게는 초신자를 오륙 명 정도 많으면 열 명 남짓으로 분반할 수 있다. 분반집회를 안배할 때도 몇 가지 주의할 것이 있다.
(1) 대상을 주의해야 함 : 예를 들어 어떤 반의 교육 수준이 비교적 높다면 이 반은 비교적 강한 인도를 안배해 주어야 한다. 어떤 반은 글자를 읽을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다. 그러한 반의 사람을 인도할 때는 간단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사람들을 가르쳐야 한다. 대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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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당할 때 자연히 인도하는 사람은 곤란을 느끼지 않게 되며 듣는 사람들 역시 온전케 된다.
(2) 교재를 사용하지 못하는 경우 : 어떤 곳에 인도하는 사람에게만 교재가 있다면 듣는 사람은 노트를 준비하여 중요한 내용과 때 주제의 큰 단락을 기록해야 한다. 어떤 반은 초신자들이 글자를 알지 못하거나 혹은 글자를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아 교본을 나누어주지 않는다. 이 때 인도하는 사람은 적어도 한 구절 중요한 성경을 거듭하여 그들에게 들려주고 또한 그들로 하여금 함께 귀에 익도록 읽고서 그런 후에 대의를 그들에게 말해 준다. 그들이 이해했는지를 물어 보아야 하며 또한 그들로 하여금 질문하게 해야 한다.
(3) 교재를 사용하는 사람 : 어떤 곳에서는 교재가 있어서 집회를 할 때 각 사람에게 한 권씩 나누어준다. 인도하는 사람이 초신자를 인도할 때 한 단락 한 단락을 그들과 함께 읽거나 돌아가며 읽는다. 인도하는 사람은 한면으로 말하고 한면으로 질문해야 한다. 듣는 사람 역시 한면으로 들으면서 한면으로 질문해야 한다. 어떤 때는 듣는 사람들에게 약간의 뜻을 발표하도록 요청할 수도 있다. 다만 발표하는 말은 간단 명료해야 하며 길게 할 수 없다. 이렇게 할 때 비교적 생기가 있게 된다. 할 수 있는 대로 설교하는 식이나 설교를 듣는 식을 피해야 한다. 필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은 노트를 준비하여 중요한 부분을 수시로 기록할 수 있다면 역시 가장 좋다.
(4) 시간 : 매번 집회를 할 때마다 시간은 한 시간 반 정도로 제한하고 너무 길게 하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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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말씀을 전하는 것과 질문하고 답하는 데 있어서 마땅히 주의해야 할 것들

(1) 말씀을 전하는 것 : 목소리는 반 전체가 다 알아들을 수 있어야하며 주제를 벗어나지 말아야 한다. 비유나 이야기를 막론하고 반드시 주제에 부합되어야 한다. 가장 좋은 근거는 교재 안에 포함된 것이며 요점을 제시하고 분명하게 그들에게 말해 주어야 한다. 자기가 좋아하는 말을 하지 말아야 하며 말을 할 때 주제에서 벗어나서는 안 된다. 설교하듯 말하지 말고. 말하기도 하고 묻기도 해야 한다.
(2) 질문 : 질문을 하는 것은 주제에 적합해야 하며 교재 안의 내용에 제한을 받아야 한다. 의외의 질문을 하여 질문할수록 주제에서 벗어나게 해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침례라는 주제를 다루면서 믿고 침례를 받는 사람이 구원을 받는다는 단락을 말할 때 오직 이곳의 구원이 어떤 구원을 가르치는 것인지만을 질문해야 한다. 이곳의 구원에서 더 나아가 무엇을 가리켜 혼의 구원이며 혼의 구원으로부터 무엇이 왕국이며 또 왕국에서 더 나아가 왕국에 들어가는 것과 천당에 가는 것에는 어떤 차이가 있느냐는 식으로 나아가지 않아야 한다. 원은 돌면 돌수록 커지며 질문은 하면 할수록 멀어져서 오히려 본 주제에 소홀해져서 아무런 유익이 없어진다.
(3) 답변 : 답변은 분명해야 한다. 엉뚱한 질문으로 주제로부터 너무 멀어졌을 때 먼저 본 주제를 분명히 한 다음에 답하고 나머지는 다른 때에 말해야 한다. 예를 들어 침례라는 주제를 다를 때 어떤 사람은 구원이 은혜에 있는 것인지, 혹은 혼의 구원 등에 대하여 질문할 때 다만 구원에는 여러 방면이 있으며 오늘은 이곳의 구원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만을 주의해야 한다고 답변해 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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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실행의 여부를 주의해야 함

말씀이 중복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사람은 올해 들어도 내년에 잊어버릴 수 있고 그 다음해에도 여전히 실행하지 않을 수 있다. 우리는 단지 그들에게 들려줄 뿐 아니라 그들이 실행하고 있는지를 추궁해야 한다. 말을 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실행 여부를 물어 보아야 한다. 예를 들어 ‘일찍 일어남’에 대하여 말했다면 그들이 일찍 일어나는지를 보아야 하고. ‘성경 읽기’에 대하여 말했다면 그들이 성경을 읽는지를 보아야 하며, ‘기도’에 대하여 말했다면 그들이 기도를 하고 있는지를 보아야 한다. 그들이 성실하게 실행하고 성실하게 처리할 때까지 계속하여 그들을 밀어내고 추궁해야만 한다.

7. 보충 수업

매 과정에 얼마의 시간을 들이며 얼마나 연장할 것인지에 대하여는 인도하는 사람이 결정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반드시 각 반의 차이가 크게 나지 않아야 한다. 만일 빠뜨린 것이 있어서 따라가지 못한다면 달리 보충 수업을 생각해야 한다. 보충 수업을 시작할 때 성실하게 보충해 주어야 한다. 자신이 빠뜨린 것이 얼마나 되든지 다 잘 보충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사람들에게 줄 것이 없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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Ⅳ. 반드시 신선한 영을 만져야 함

이러한 말씀들은 해마다 계속하여 전해야 한다. 그러므로 전하는 사람은 반드시 신선한 영을 만져야 한다. 말씀은 십 년 전의 말씀일 수 있지만 영은 십 년 전의 영일 수 없다. 만일 인도하는 사람이 어떻게 영을 사용하는지를 배우고 그의 영이 신선하다면 그는 십 년, 이십 년 전의 말씀도 전할 수 있다. 만일 사람들에게 당신의 말을 만지게 하고자 한다면 당신은 먼저 당신의 영을 만져야 한다. 당신은 반드시 새롭게 신선한 영을 만져야 한다. 만일 당신의 영이 낡았다면 다만 그 말씀을 전할 수 있지만 사람들에게 약간의 교리상의 도움만을 줄 수 있을 뿐 그 교리는 즉시 ‘공식 기도문’과 같은 것으로 변해 버린다. 만일 당신이 영을 사용하여 이러한 말들을 만진다면 문제가 없다.

Ⅴ. 주님의 축복이 필요함

그리스도인의 운명은 주님의 축복에 달려 있다. 주님의 축복이 있으면 안배가 좋지 않아도 잘못되지 않고 갈 곳으로 간다. 그러나 주님의 축복이 없으면 모든 안배가 좋아도 잘못가게 된다. 마치 어떤 사람이 그다지 좋지 않아도 주님은 여전히 축복하시지만 어떤 사람은 한 번만 잘못하면 주님이 즉시 축복하지 않으시는 것과 같다. 그리스도인은 옳은 길을 가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바로 주님이 축복하실 수 있는 길을 가는 것이다.

1950년 7월 12일 동역자 집회 대화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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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신자를
온전케 하는 공과
(상)







제10장
기도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요 16:24).
“너희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나니 너희가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약 4:2-3).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눅 11:9-10).
“내가 내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시 66:18).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 11:24).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저희에게 비유로 하여 가라사대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관이 있는데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나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주께서 또 가라사대 불의한 재판관의 말한 것을 들으라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눅 18:1-8).




Ⅰ. 기도는 그리스도인의 기본 권리임

이 땅에 사는 그리스도인의 한 가지 기본 권리는 바로 기도에 대한 응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여러분이 일단 거듭나면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간구하고 응답받는 기본 권리를 주신다. 요한복음 16장은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구할 때 하나님께서 응답하시고 우리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신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 준다. 만일 우리가 항상 기도한다면 우리는 이 땅에서 기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
여러분이 항상 기도했는데도 하나님께서 듣지 않으셨거나,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 된 지 수년이 지났는데도 여러분의 기도에 대해 하나님의 응답이 한 번도 없었거나,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기도를 한 번도 들어주지 않으셨다면 이것은 여러분에게 큰 문제가 있음을 증명한다. 만일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 된 지 삼사 년이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한 번도 기도의 응답을 받은 적이 없다면 이것은 여러분이 형편없는 그리스도인임을 증명한다. 약간이 아니라 철저히 형편없는 사람인 것이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인데도 불구하고 기도의 응답을 받지 못했다면 이것은 여러분에게 있어서는 안 될 상태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게 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모든 그리스도인에게는 자주 하나님에게서 기도의 응답을 얻는 체험이 있어야 한다. 이것은 기본적인 체험이다. 만일 한동안 여러분이 기도할 때 하나님의 응답을 얻지 못했다면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에게는 문제가 있다. 기도의 응답을 얻는 일에서는 자신을 속일 방도가 없다. 체험이 있으면 있고 없으면 없는 것이고, 이루어지면 이루어진 것이고 이루어지지 않으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다.
우리는 주님을 믿는 모든 사람에게 기도하기를 배웠는지,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어주셨는지를 물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셨다면 여러분에게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기도는 허공에 대고 말하는 것이 아니며 기도의 목적은 응답을 받는 데 있기 때문이다. 응답이 없는 기도는 헛된 기도이다. 그리스도인은 기도에 응답받기를 배워야 한다. 여러분이 이미 주님을 믿었으므로 여러분의 기도가 하나님께 들으신바 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듣지 않으시는 기도는 소용이 없다. 여러분은 응답받을 때까지 기도해야 한다. 기도는 다만 영적인 수양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더욱 하나님의 응답을 얻기 위한 것이다.
기도는 상당히 배우기 쉽지 않은 일이다. 아마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된 지 삼사십 년이 되었어도 이 공과를 철저히 배우지 못했을 것이다. 기도는 참으로 간단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다른 면에서 사람이 주님을 믿은 즉시 기도할 수 있을 정도로 기도는 쉽다. 기도의 문제는 가장 심오하고도 가장 단순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 심오함의 깊이가 사람이 일생토록 배워도 다 배우지 못할 만큼 깊다고 느끼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많다. 그러나 그 단순함은 주님을 믿는 즉시 기도할 수 있고 하나님의 응답을 받을 수 있을 정도로 단순하다. 만일 새 신자들이 기도에서 좋은 시작을 갖는다면 자주 기도의 응답을 얻게 될 것이다.

만일 시작을 잘못하면 삼사 년이 지나도 기도의 응답을 조금도 받지 못할 수 있다. 만일 이 기초가 견고하지 않으면 나중에 되돌아와서 더 큰 힘을 들여야 한다. 그러므로 사람은 주님을 믿은 즉시 하나님에게서 기도의 응답을 받는 것을 배워야 한다. 주님을 믿는 모든 사람은 이것을 주의하기 바란다.


Ⅱ. 기도에 응답을 얻는 조건들

우리가 성경 안에서 기도에 응답을 얻는 많은 조건들을 찾아낼 수 있지만 그것들 중 기본적인 조건은 오직 다섯 가지뿐이다. 우리는 만일 여러분이 이 몇 가지 조건대로 행한다면 기도에 대한 응답을 얻을 것이라고 믿는다. 또한 우리는 이 몇 가지 조건들이 수년 간 기도해 온 사람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고 믿는다. 이것들은 기본적인 조건이므로 우리가 주의하지 않을 수 없다.


A.. 요구해야 함

모든 기도에는 마땅히 하나님 앞에서 참된 간구가 있어야 한다. 구원받은 후 매일 기도하는 한 형제가 있었다. 어느 날 한 자매가 와서 그에게 “당신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으셨습니까?”라고 물었다. 그는 ‘기도하기만 하면 되지, 무슨 듣고 안 듣는 문제가 있는가?’ 하며 그런 말을 이상하게 느꼈다. 어쨌든 그때부터 그는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으시도록 요구하기 시작했다. 그러고 나서 그는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얼마나 들어주셨는지를 생각하다가 후에 자신의 기도가 공허하고 아프지도 않으며 가렵지도 않아서 하나님께서 들으실 필요도 없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마치 내일 해가 뜨도록 기도해도 해가 뜨고, 기도하지 않아도 해가 뜨는 것과 같았다. 그가 그리스도인이 된 지 일 년이 되었는데도 그의 기도는 한 가지도 하나님의 응답을 받지 못했다. 그가 무릎을 꿇고 계속 많은 말을 했지만 무엇을 구하는지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실지로는 구하지 않은 것과 다름없었다.
주님은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 만일 여러분이 벽을 두드린다면 주님은 여러분에게 벽을 열어 주지 않으실 것이다. 만일 여러분이 진실로 문을 두드린다면 주님은 참으로 여러분에게 문을 열어 주신다. 여러분이 들어가야 한다고 말한다면 주님은 들어가게 하신다. 주님은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에 한 가지 물건이 있고 저기에 또 다른 물건이 있는데 여러분은 무엇을 원하는가? 여러분은 한 가지만을 찾아야 한다. 여러분은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다고 말할 수 없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대체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구하는지를 아셔야 그것을 주실 수 있다. 그러므로 구한다는 것은 오로지 한 가지를 구한다는 뜻이다. 여러분이 요구한다는 것은 바로 찾는다는 것이요 문을 두드린다는 뜻이다. 예컨대 여러분이 여러분의 아버지에게 무엇을 구한다 하자. 여러분은 반드시 무엇 무엇이 필요하다고 말해야 한다. 여러분이 약을 사러 약국에 갈 때에도 무슨 약을 달라고 말해야 하고 반찬을 사러 시장에 갈 때에도 무슨 반찬을 달라고 말해야 한다. 이상하게도 어떤 사람은 하나님 앞에 나가서 무엇을 원하는지 말하지 않는다. 여기서 주님은 여러분이 무언가 구하는 것이 있어야 하고 또한 전일하게 구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문제는 구하지 않는 데 있다. 방해물은 우리 쪽에 있다. 응답을 원하지 않는 포괄적인 기도를 하지 말고 여러분의 부족한 것과 원하는 것을 말해야 한다.
새로 믿은 사람들은 기도하기를 배우되 전일한 목표를 가지고서 기도의 공과를 배워야 한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많은 사람은 기도의 행위가 있지만 구하는 것이 없다.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서 한두 시간을 들이고 심지어 일주일을 소비했는데도 아무것도 구하지 않았다면 이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 무언가 구하기를 배워야 한다. 여러분이 문을 두드리려고 한다면 실지로 어떤 문을 두드려야 한다. 여러분이 들어갈 문을 정확하게 보았다면 그 문을 두드리라. 여러분이 어떤 것을 찾을 때 아무것이나 다 좋다고 말하지 말고 전일하게 어떤 것을 구해야 한다. 여러분은, 집회 중에 일어나 이삼십 분 간 기도를 했지만 ‘무엇을 얻고자 하는가?’라는 질문에 모른다고 대답하는 어떤 형제와 같지 말아야 한다. 많은 사람은 길게 기도하기를 배우지만 구하는 것이 없다. 이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여러분은 반드시 전일하게 기도하기를 배워야 한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기도를 들으셨는지 듣지 않으셨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기도를 들으시든지 들으시지 않든지 상관없게 된다. 그럴 때 여러분이 어려움을 당하여 기도할지라도 통하지 않을 것이다. 참된 필요가 있을 때 대충하는 기도는 통하지 않는다. 만일 기도가 대충하는 것이고 전일한 기도는 어려운 것이라 생각한다면 여러분은 이 어려움을 절대 해결할 수 없게 된다. 전일한 기도가 있어야 전일한 기도의 어려움을 처리할 수 있다.



 

B. 잘못 구하지 않음

하나님 앞에서 우리에게는, 마땅히 구해야 하지만 또한 잘못 구해서는 안 되는 두 번째 조건이 있다. “(너희가)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 잘못 구함이니라”(약 4:3). 우리는 어떤 필요 때문에 하나님께 구할 수 있을 뿐, 아무 이유 없이 범위를 벗어나서 제멋대로 구할 수 없다. 우리에게 필요하지 않은 것들을 자신의 정욕과 육체에 따라 제멋대로 잘못 구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구하는 것은 헛된 기도가 된다. 물론 때때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엡 3:20) 우리에게 주시지만 이것은 별개의 일이다.
잘못 구함은 곧 자신의 분량과 필요와 자신의 참된 결핍을 벗어나서 구하는 것이다.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이 있을 때 하나님께 구할 수 있다. 여러분에게 필요한 만큼 주시도록 하나님께 구하라. 여러분의 필요를 넘어서 구하는 것은 바로 잘못 구하는 것이다. 여러분에게 큰 필요가 있다면 하나님께 그 필요에 따라 주시도록 구할 수 있다. 만일 필요 이상으로 구한다면 이것은 잘못 구하는 것이다. 제멋대로 이것저것을 구할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분량과 필요와 여러분의 결핍에 따라 구해야 한다. 제멋대로 구하는 것은 잘못 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응답을 얻지 못한다. 하나님 앞에서 잘못 구하는 것은 네 살 된 아이가 아빠에게 “제게 하늘에 있는 달을 가져다주세요.”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하나님은 사람이 잘못 구하는 기도를 듣기 싫어하신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실제의 필요를 넘어서 입을 잘못 크게 벌려 구하지 말고 합당한 범위 안에서 기도하기를 배워야 한다.




C. 죄를 처리해야 함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 요구했고 잘못 구하지도 않았지만 하나님은 아직 그의 기도를 듣지 않으셨다. 이것은 기본적인 방해, 그와 하나님 사이에 죄의 방해가 있기 때문이다. “내가 내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시 66:18). 주님은 마음(‘마음’이라는 단어를 주의하라)에 자기가 알고 있는 뚜렷한 죄를 품고 미련을 두어 남겨 둔 사람의 기도를 듣지 않으신다. 그에게 이런 방해가 있기 때문에 주님은 그의 기도를 들으실 수 없다. “마음에 죄악을 품는다.”라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이것은 여러분이 마음속에서 어떤 죄에 대해 미련을 두고 스스로 알면서도 계속 보류해 둔다는 말이다. 이것은 행위와 겉모양에 악함이 있을 뿐 아니라 마음에 그것을 품는 것이다. 이것은 로마서 7장의 그 사람과 다르다. 그에게 실패가 있었지만 그의 행위는 그가 미워하는 바였다. 그러나 여기서 말한 사람은 마음에 그 죄를 품고 남겨 두며 그것에 미련을 두고 버리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는 죄의 행위를 버리지 못할 뿐 아니라 죄를 마음속에서 버리지 못한다. 주님은 이런 사람의 기도를 듣지 않으신다. 여러분에게 한 가지 죄만 있어도 그것은 여러분의 기도에서 하나님께서 들으시는 것을 방해하기에 충분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이상 버리기 아까워하는 죄를 마음에 남겨 두지 말고, 모든 죄를 죄로 인정하여 그것들을 피 아래 두어야 한다. 주님은 우리의 약함을 체휼하실 수는 있지만 우리 마음에 죄악을 품는 것을 내버려 두실 수는 없다. 여러분이 겉으로 모든 죄에서 벗어났다 하더라도 마음에 죄악을 품고 그것에 미련을 두고서 버리지 못한다면 여러분은 기도해도 소용이 없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이 될 때부터 하나님께, 여러분이 실족하지 않고 행위에서 거룩해지도록 지켜 달라고 은혜를 구해야 한다. 동시에 마음속에서 모든 죄를 미워하고 마음에 어떤 죄악도 품지 말고 남겨 두지도 말아야 한다. 만일 죄가 여러분 안에 있다면 여러분은 기도해도 소용이 없을 것이고, 주님은 여러분의 기도를 듣지도 않으실 것이다.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치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잠 28:13) 여러분의 죄를 자복하고 주님께 이렇게 말하라. “내 마음에 품고 버리지 못하는 한 가지 죄가 있사오니 이제 나를 용서하여 주소서. 내가 이 죄에서 벗어나고자 하오니 이 죄에서 나를 해방하사 이 죄가 내게 있지 않게 하옵소서. 나는 이 죄를 버리고 거절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복할 때 여러분은 용서를 받게 되고, 주님은 여러분을 통과시키실 것이다. 이렇게 할 때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기도를 들으신다. 이 일을 결코 함부로 풀어놓지 말아야 한다. 구하지 않으면 얻지 못하고 잘못 구하여도 얻지 못한다. 하나님께 구하기도 했고 잘못 구하지도 않았다 하더라도 마음에 사랑하고 중히 여기는 죄를 남겨 둘 때 여러분은 주님께서 여러분의 기도를 들으시도록 하지 못한다.

D. 믿어야 함

또 한 가지 조건은 적극적인 면에서 믿는 것이다. 이것도 부족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결핍될 때 기도는 소용없게 된다. 마가복음 11장의 이야기는 기도할 때 믿어야 함을 상당히 분명히 말한다. 주 예수님은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라고 말씀하셨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구한 것을 ‘받은 줄’로 믿으면 그대로 된다. 우리는 사람이 주님을 믿은 첫 주 안에 믿음이 무엇인지를 알기 바란다. 여기서 주님은 받은 줄로 믿으면 그대로 되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대로 되리라”라고 믿는 것이 아니라 ‘받은 줄로’ 믿는 것이다. 여기서 주 예수님은 두 번의 받음, 곧 ‘이미 받았음’(개역 성경: ‘받은 줄’)과 ‘받을 것이요’(개역 성경: ‘그대로 되리라’)를 언급하셨다(중국어 성경 참조). 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믿음’은 ‘받은 줄’에 기초를 둔다. 믿음이란 무엇인가? 곧 ‘받은 줄로’ 믿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종종 ‘믿음’이라는 단어를 ‘받은 줄’에서 잡아내려 ‘그대로 되리라’ 위에 걸어 놓는 과오를 범한다. 그들은 주님께 기도할 때 ‘받을 것이라고 믿는다’를 큰 믿음으로 생각한다. 그들은 이 산을 바다에 던지라고 기도할 때 산이 바다에 던져질 것이라고 믿으면 스스로 이 믿음을 크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믿음을 ‘받은 줄’에서 잡아내려 ‘그대로 되리라’ 위에 걸어 놓는 것이다. 성경의 이 말씀은, 우리의 믿음이 ‘그대로 되리라’고 믿는 것이 아니라 ‘받은 줄’로 믿는 것임을 말한다. 이 두 가지는 전혀 다른 것이다. 이것은 새 신자들이 필수적으로 배워야 할 뿐 아니라 주님을 믿은 지 오래된 사람도 배워야 한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무엇인가? 믿음은 곧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기도를 들어주실 것이라는 느낌이 아닌,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기도를 이미 들으셨다는 느낌을 갖는 것이다. 여러분이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서 나의 기도를 들으심을 감사드립니다. 이 일은 문제가 없음을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라고 한순간 기도하는 것이 바로 믿음이다. 이것이 바로 ‘받은 줄’로 믿는 것이다. 혹 여러분은 무릎을 꿇고 기도하다가 일어나서 “하나님께서 반드시 나의 기도를 들으실 것을 믿습니다.”라고 말할 것이다. ‘반드시’가 있을 때 그것은 안 통한다. 여러분이 몇 번 더 ‘믿는다’ 하더라도 효력이 없다. 예를 들어, 여러분이 한 병자를 위하여 기도하는데 그가 “나는 치료되었음을 하나님께 감사드린다.”라고 말했다 하자. 열이 여전히 높고 조금도 변화가 없다 할지라도 그의 속에서 분명하므로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다. 만일 그가 “오, 나는 주님께서 나의 병을 치료하실 것을 믿습니다.”라고 말한다면 그다음에는 많은 ‘믿음’이 있어야 한다. 주 예수님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그대로 되리라”라고 말씀하셨다. 그분은 그대로 되리라고 믿으면 받는다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순서가 뒤바뀌어서는 안 된다. 형제자매는 이 비결을 보았는가? 참된 믿음은 ‘이미 이루어진 것’이요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으셨음에 대한 감사이다.
믿음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조금 더 살펴보기로 하자. 마가복음에 나타난 질병의 치유와 같은 구체적인 사례들을 통해 무엇을 가리켜 믿음이라고 하는지를 설명할 수 있다. 마가복음 안에는 특별히 기도에 대하여 유용한 세 마디가 있는데, 첫 번째는 주님의 능력의 문제이고, 두 번째는 주님의 뜻의 문제이며, 세 번째는 주님의 행함의 문제이다.


(1) 주님의 능력의 문제―하나님은 하실 수 있음
먼저 마가복음 9장을 보기로 하자.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22절). 우리는 ‘할 수 있거든’이라는 말을 강조할 수 있다. 중국어 성경에는 23절의 ‘믿음’이란 단어에 드러냄표가 찍혀 있는데, 그 의미는 이 단어가 원문에는 없다는 뜻이다. 우리는 다시 23절의 ‘할 수 있거든’에 인용 부호를 더하고 또한 감탄 부호를 더해야 한다. 이제 21절부터 23절까지를 읽어보자. “예수께서 그 아비에게 물으시되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느냐 하시니 가로되 어릴 때부터니이다 귀신이 저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그 아이의 아비는 주 예수님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우리를 도와 주옵소서”라고 말했다. 그러자 주님은 즉시 그에게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라고 말씀하셨다. 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할 수 있거든’은 바로 그 아이의 아비가 말한 ‘하실 수 있거든’이다. 주 예수님은 그 아이의 아비가 한 말을 반복하셨다. 그 아이의 아비는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우리를 도와 주옵소서”라고 말했고, 주 예수님은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는 ‘할 수 있거든’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이 있는가, 없는가의 문제이다.
첫 번째 해결해야 할 문제는, 바로 사람이 어려움을 당할 때 의심으로 가득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않는 것이다. 마치 어려움의 능력이 하나님의 능력보다 더 큰 것 같다. 그러나 그 아이의 아비가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할 때 주 예수님은 그를 책망하셨다. 성경 안에서 주 예수님께서 이렇게 사람의 말을 끊으시는 예는 상당히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다. 주님께서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라고 하신 말씀은 분노하여 하신 말씀 같다. 그 아이의 아비가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우리를 도와 주옵소서”라고 말할 때 주 예수님은 그를 책망하셨는데, 이것은 “어찌 ‘무엇을 할 수 있거든’이라고 말하는가? ‘할 수 있거든’이라고!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이것은’할 수 있거든’의 문제가 아니라 네가 믿는가, 믿지 않는가의 문제이다. 어떻게 내게 할 수 있는지 없는지를 묻는가!” 라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기도할 때 머리를 들고 주님을 앙망하며, “주여! 당신은 하실 수 있습니다.”라고 말하기를 배워야 한다.
마가복음 2장에는 주님께서 중풍에 걸린 한 사람을 치료하신 일이 기록되어 있다. 주님은 그 중풍병자에게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5절)라고 말씀하셨다. 몇몇 서기관들은 마음에 의논하기를,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참람하도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7절)라고 했다. 그들은 마음속으로, “오직 하나님만 죄를 사하실 수 있지 어찌 이 같은 사람이 할 수 있는가?”라고 생각했다. 그들이 생각하기에 죄 사함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에게 “어찌하여 이것을 마음에 의논하느냐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8-9절)라고 말씀하셨다. 주님은 그들에게, 이 일에 있어서 사람의 문제는 할 수 있는지 없는지 이지만 그분에게는 할 수 있고 없고의 문제가 없으며 어느 것이 더 쉬운가의 문제만 있음을 보여 주고자 하셨다. 사람이 보기에는 죄를 사하는 것과 중풍병자에게 일어나 걸으라고 하는 것이 다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에게, 그분께서 죄를 사하실 수도 있고 또한 중풍병자를 일으켜 걷게 하실 수도 있음을 보여주고자 하셨다. 죄 사함이나 중풍병자를 일으켜 걷게 하는 것은 다 주님께는 쉬운 일이다. 여기에서 주님께서 행하신 것은 우리에게 ‘하나님은 하실 수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에 있어서 반드시 알아야 할 한 가지는 바로 ‘하나님은 하실 수 있으심’이며 주님께는 ‘어려운’ 일이 결코 없다는 것이다.


(2) 주님의 뜻의 문제―하나님은 원하심
주님께서 능하시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분께서 치료하시기를 원하신다는 것은 어떻게 아는가? 나는 그분의 뜻을 알지 못하는데, 주님께서 나를 치료하시기를 원하지 않으시면 어떻게 하는가? 여기서 또 다른 하나의 사례를 보기로 하자. 마가복음 1장 41절은 “예수께서 민망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라고 말한다.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하실 수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지 원하시지 않는지의 문제가 있다. 그분의 능력이 아무리 클지라도 그분께서 원하시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만일 그분께서 우리의 병을 치료하기를 원하시지 않는다면 그분의 능력이 아무리 클지라도 그것은 우리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첫 번째 문제의 해결은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는 것이며, 두 번째 문제의 해결은 바로 하나님께서 원하신다는 것이다. 주 예수님은 문둥병 든 사람에게 “내가 원하노니”라고 말씀하셨다. 구약은 문둥병이 매우 불결한 병임을 말해 준다(레 13-14장). 누구든지 문둥병 든 사람과 접촉하면 그 더러움에 오염된다. 그러나 주님의 사랑은 너무나 크시다. 그러므로 그분께서 “내가 원하노니”라고 말씀하시고 주님의 손을 내밀어 그를 만지시자, 그가 깨끗해졌다. 문둥병 든 사람이 주님께 간구했을 때, 주님께서 기꺼이 그를 깨끗하게 하셨을진대 주님께서 우리의 병을 치료하기를 원하시지 않겠는가? 또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려 하시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은 하실 수 있으시며’, ‘하나님은 원하신다’라고 말할 수 있다.

 


(3) 주님의 행하심의 문제―하나님은 이미 하셨음
우리가 ‘하나님은 하실 수 있으시며’, ‘하나님은 원하신다’라는 것을 알지만, 이것만으로는 여전히 부족하다. 우리는 한 가지를 더 알아야 하는데, 이것은 ‘하나님은 하셨다’라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앞에서 언급했던 마가복음 11장 24절로 되돌아가야 한다.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하셨다’라는 것을 다루고 있다.
무엇을 믿음이라고 하는가? 믿음은 하나님께서 능하시며 또한 하나님께서 원하심을 믿을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미 하셨고 이미 성취하셨음을 믿는 것이다. 만일 여러분이 받은 줄로 믿는다면 틀림없이 받을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말씀을 주셔서 하나님께서 하실 수 있고 또한 하나님께서 원하신다는 것을 믿고 확신을 가졌다면, 여러분은 하나님께 감사하며 ‘하나님은 이미 하셨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점에 있어서 분명하지 않기 때문에 기도의 응답을 얻지 못한다. 그들은 줄곧 얻기를 바라고 있다. 그러나 바라는 것은 장래의 일이고, 믿음은 과거의 일이다. 모든 참된 믿음은 다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당신은 이미 나의 병을 치료하셨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나는 이미 얻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나는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나는 치유되었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이 온전하게 될 때, ‘하나님은 하실 수 있으시며’, ‘하나님은 원하신다’라고 말할 뿐 아니라 또한 ‘하나님은 하셨다’라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은 이미 기도를 들으셨다! 하나님은 이미 성취하셨다. 누구든지 얻은 것으로 믿는 사람은 반드시 얻을 것이다. 많은 때 우리의 믿음은 다 ‘얻을 것이다’라는 믿음이다. 따라서 결코 얻지 못한다. 우리는 반드시 ‘얻었다’라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믿음은 다 ‘이루어졌다’


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 ‘이루어질 것이다’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복음을 들었다고 하자. 여러분이 그에게 “당신은 주 예수님을 믿었습니까?”라고 물을 때에는 그가 “믿었습니다.”라고 대답했지만, “당신은 구원을 받았습니까?”라고 물을 때에는 “나는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라고 대답한다면 여러분은 이것이 틀렸음을 안다. 다시 그에게 “당신은 구원을 받았습니까?”라고 물었는데 그가 “나는 틀림없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라고 대답한다면, 여러분은 이것도 틀렸다는 것을 안다. 다시 그에게 “당신은 틀림없이 구원을 받을 것을 확신합니까?”라고 되묻자 그가 “나는 구원받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대답한다면, 아무리 생각해도 그 풍기는 냄새가 옳지 않다. 그가 “나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나는 틀림없이 구원받을 것이다”, “나는 반드시 구원받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하는 것은 아무래도 그 풍기는 냄새가 옳지 않다. 만일 그가 “나는 구원받았다!”라고 말한다면, 그 풍기는 냄새가 옳은 것이다. 사람은 믿으면 구원받는다. 마찬가지로 모든 믿음은 다 ‘이미’ 이루어진 것을 믿는 것이며 다 구원받는 믿음과 같은 것이다. 일단 믿었다면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나는 이미 얻었습니다.”라고 말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은 할 수 있으시다’, ‘하나님은 원하신다’, ‘하나님은 하셨다’라는 이 세 마디를 견고하게 붙잡아야 한다.
믿음은 결코 심리 작용이 아니다. 믿음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얻은 것이요 하나님께서 하실 수 있음과 하나님께서 원하심과 하나님께서 하셨음을 확신 있게 믿는 것이다. 만일 하나님의 말씀을 얻지 못했다면 결코 영적인 모험으로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아야 한다. 심리 작용은 믿음이 아니다. 질병을 예로 들어, 만일 누구든지 참된 믿음으로 하나님의 치유를 받았다면 의사에게 가서 검진을 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막 1:44). 확실히 하나님의 치료를 받은 사람이 의사에게 가서 검진을 받는다면 틀림없이 심리 작용이 아니라 실제로 이미 치료되었음이 증명될 것이다.






또한 갓 구원받은 형제자매들은 배우기 시작할 때 기도에 두 단계가 있음을 보아야 한다. 첫 번째 단계는 약속이 없는 상태에서 약속을 얻기까지 기도하며,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상태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얻기까지 기도하는 것이다. 모든 기도는 처음 시작할 때 대부분이 하나님께 구하는 기도이다. 계속하여 구하고 또 구하여 설령 삼 년, 오 년을 기도하더라도 여전히 구하게 된다. 어떤 기도는 일 년만 지나도 하나님께서 들으시지만, 어떤 기도는 기도한 지 수년이 지났는데도 하나님은 여전히 듣지 않으신다. 이 단계는 간구하는 기간이다. 두 번째 단계는 약속을 얻고 약속이 실현되기까지 기도하는 것이며, 말씀을 얻고서 말씀이 성취되기까지 기도하는 것이다. 이 단계는 찬미의 기간이다. 이 단계 안에서는 마땅히 간구하는 것이 아니라 찬미해야 한다. 첫 번째 단계 안에서는 간구요, 두 번째 단계에서는 찬미이다. 첫 번째 단계 안에서는 말씀이 없었다가 말씀을 얻기까지 기도하는 것이고, 두 번째 단계 안에서는 말씀을 얻고서 주님을 찬미하며 기도의 응답이 있기까지 찬미하는 것이다. 이것이 기도의 비결이다.


어떤 사람들은 기도가 단지 자기에게 어떤 것이 없을 때 무릎 꿇고 하는 것이고 그 결과 하나님께서 주시기 때문에 갖게 되는 것이라고 이해한다. 내가 주님께 시계를 구한 뒤 며칠이 지나서 주님께서 내게 시계를 주셨다고 가정해 보자. 이것은 곧 빈손이었다가 무언가를 소유하는 것으로서 앞에서 말한 그 두 가지를 말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그 사이에 또 한 가지, 곧 우리의 믿음이 있음을 알지 못한다. 여기에 두 가지 경우가 있다. 하나는 내가 시계를 구했는데 어느 날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들어주셔서 그분께 감사하는 것이다. 또 하나는 현재 두 손이 비어 있어도 며칠 후에 시계를 갖게 된다는 확신이 있는 것이다. 우리는 시계가 있고 없는 두 가지가 아니라 세 가지가 있다는 것을 보아야 한다. 시계가 있는 것과 없는 것 사이에는 또 한 가지, 곧 하나님께서 내게 말씀과 약속을 주시는 것과 내가 그것을 믿고 기뻐하는 것이 있다. 간구한 지 삼 일째 되는 날에야 시계가 내 손에 들어올지라도 영 안에서는 삼 일 전에 이미 얻은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마땅히 영 안에서 이런 얻음을 소유해야 한다. 그러므로 영 안에서 얻었다는 이런 느낌이 없다면 그것은 믿음이 없는 것이다.

 새로 믿은 사람들은 믿음이 무엇인지를 알고 또 어떻게 기도하는지를 배우기 바란다. 어쩌면 여러분이 삼사 일, 일 개월, 일 년 간 계속 기도하였는데도 아직 두 손이 비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일이 성취되었다는 확신이 약간이라도 있을 때에는 손에 물건을 소유할 때까지 하나님을 계속 찬미해야 한다. 간단히 말해서, 첫 단락은 물건이 없는 데에서 믿음이 있을 때까지 기도하는 것이고 둘째 단락은 믿음이 있는 데에서 물건을 소유할 때까지 찬미하는 것이다.

왜 두 단락으로 나누어야 하는가? 왜냐하면 사람이 물건 없는 데에서 믿음이 있을 때까지 기도한 후 또 여전히 기도할 때, 오히려 믿음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믿음이 생긴 후에는 찬미해야 한다. 그러나 믿음이 생긴 후에도 간구한다면 믿음 있는 데에서 믿음 없는 데로 떨어지고 구하는 바를 얻지 못한다. ‘그대로 되리라’는 손으로 얻는 것이고 ‘얻은 줄로 믿는 것’은 영 안에서 얻는 것이다. 믿음은 있으나 아직 구하는 바를 얻지 못했을 때에는 간구가 아니라 찬미로 그분을 재촉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다고 하셨는데 우리가 또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여러분 속에 ‘얻은 줄로 믿는다’라는 확신이 있는데 또 무엇을 구하는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이 생길 때까지 구한 후에는 더 이상 구할 수 없다는 체험을 갖는다. 여러분은 오직 “주여, 당신을 찬미합니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여러분은 믿음을 지키면서 “주여, 당신이 나의 기도를 들으심을 찬양합니다.", "주여, 지난날에 이미 내 기도를 응답하신 것을 찬미합니다.”라고 말하라. 이럴 때 여러분은 그것을 얻게 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어떤 사람들은 지식이 부족해서 하나님께서 이미 약속하셨는데도 간구하고 여전히 간구함으로써 오히려 믿음을 잃게 된다. 이것은 매우 큰 손실이다. 마가복음 11장 24절 말씀은 얼마나 귀한지! 신약 전체에서 이곳보다 더 정확하게 무엇이 믿음인지를 나타낸 곳이 없다.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만일 여러분이 이것을 보았다면 참된 기도가 무엇인지를 알게 될 것이고 기도는 여러분의 실재가 될 것이다.

E. 계속 구해야 함

기도에 있어서 또한 계속적이고 끊이지 않기를 주의해야 한다. 누가복음 18장 1절은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라”라고 말한다. 어떤 것은 주님께서 번거롭게 느끼셔서 들어주지 않으시면 안 될 정도로 계속 구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또 다른 종류의 믿음이다. 주님은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볼 수 있겠느냐”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말한 믿음은 앞에서 말한 것과 다르나 상충되지는 않는다. 마가복음은 믿음을 소유할 때까지 구해야 함을 말하고 여기서는 끊임없이 구할 것을 말한다. 나는 내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기도할 때 언젠가 하나님께서 들어주신다고 믿는다. 나는 들어주시는가의 여부를 상관하지 않고 다만 하나님께서 들어주실 때까지 기도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의 기도는 믿을 만하지 못하다. 그들은 하루, 이틀, 석 달을 기도하고 나서 그들이 기도한 것을 잊어버린다. 어떤 사람은 한 번 기도하고 그만두는데 이것은 그의 간청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러분의 기도 중에 두 번째, 세 번째, 다섯 번째, 열 번째로 하는 기도가 얼마나 되는지 계산해 보라. 여러분은 자신도 잊어버린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어주시기를 바라고 있는가? 어찌 여러분이 무심한 기도를 하나님께서 유심히 들어주시기를 바랄 수 있는가? 어찌 여러분도 잊어버린 기도를 하나님께서 기억하고 들어주시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 사실상 여러분은 근본적으로 그것을 구한 것이 아니다. 여러분이 참으로 원하는 것은 계속 구하게 되고 원하지 않는 것은 계속 구하지 않기 마련이다. 어쩌면 여러분은 핍박받는 어떤 환경 안에서나 무언가 필요한 상태 안에서 어떤 감동을 받아야만 끊임없이 기도하게 될 것이다. 그런 기도는 십 년이 지나도 잊어버리지 않을 것이고, 또한 “주여! 당신이 일하시지 않으면 계속 구하겠습니다.”라고 말하게 될 것이다.
여러분이 어떤 것을 구할 때 하나님을 번거롭게 할 수 있다. 만일 여러분이 참으로 그것을 원한다면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때까지 구하라. 여러분이 하나님께서 듣지 않으시면 안 될 정도로 구할 때 하나님은 들어주실 것이다.




 

Ⅲ. 기도의 실행 방법

그리스도인은 장부를 적듯이 기도 항목을 적기 위해 매년 기도 노트를 한 권씩 준비할 수 있으면 좋다. 각 면을 네 칸으로 나누고 첫 칸은 기도를 시작한 날짜를, 둘째 칸에는 기도 항목을, 셋째 칸에는 응답받은 날짜를, 넷째 칸에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기도에 응답하셨는지를 기록하라 이렇게 할 때 일 년 동안 여러분이 하나님께 얼마나 구했고, 하나님께서 얼마나 여러분의 기도를 들어주셨으며, 무엇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는지를 알게 된다. 새로 믿은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기도 노트를 구비해야 한다. 주님을 믿은 지 몇 년 된 형제자매들도 기도 노트를 갖추는 것이 좋다.
기도 노트를 기록하는 가장 큰 목적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기도를 들어주셨는지를 알기 위해서이다. 하나님의 응답이 없을 때에는 필히 여러분에게 문제가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열심히 주님을 섬기는 것은 매우 좋은 것이지만 기도의 응답이 없다면 열심도 소용없다. 왜냐하면 하나님 편으로 가는 길이 막히면 사람 편으로 가는 길도 막히고, 하나님 앞에서 능력이 없으면 사람 앞에서도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능력 있는 사람이 되기를 구할 때 비로소 사람 앞에서 유용하게 된다. 백사십사 명의 이름을 기록하고 그들의 구원을 위해 기도한 한 형제가 있었다. 어떤 사람의 이름은 오전에 기록했는데 그 사람이 오후에 구원을 받았다. 결국 십팔 개월이 지난 후 두 사람을 제외하고는 다 구원을 받았다. 이것은 아주 좋은 본이다. 하나님께서, 기도 노트를 사용하는 그리스도인들을 많이 얻으시기 바란다. 여러분도 이 방법을 실행하기 바란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기도한 건수와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어주신 건수를 하나하나 기입해야 한다. 기도 노트에 기록된 항목 중에 하나님의 응답을 받지 않은 것은 계속 기도해야 한다. 오직 하나님의 뜻이 아님을 보여 준 항목에 한해서만 기도를 멈출 수 있다. 그 외에는 응답받을 때까지 풀어놓지 말고 계속 기도해야 한다. 여러분은 처음부터 엄한 훈련을 거쳐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이 얻을 때까지 기도할 수 있도록 진지하게 기도하라.
기도 노트를 사용할 때, 여러분은 매일 기도해야 할 일과 돌아가면서 매주에 한 번씩 기도해야 할 일도 있음을 주의하라. 이것은 여러분이 기도하는 양에 따라 결정해야 한다. 만일 여러분이 구할 것이 적다면 여러분은 노트에 적은 일들을 위해 매일 기도할 수 있다. 만일 기도 항목이 많다면 월요일은 몇 번에서 몇 번까지, 화요일은 몇 번에서 몇 번까지 기도하도록 안배할 수 있다. 우리가 다른 일을 하기 위해 시간을 안배하듯이 기도를 위해서도 전일한 시간을 가져야 한다. 전일한 기도가 없으면 기도 노트를 사용하지 않게 된다. 만일 여러분의 기도가 다 전일한 것이라면 여러분은 기도 노트를 준비하여 그것을 성경 찬송가와 함께 두고 매일 응용할 것이다. 날짜가 오래될 때 여러분은 어떤 기도가 이미 응답되었고 어떤 기도가 아직 응답받지 않았는지를 계산할 수 있다. 항상 기도 노트에 따라 전일한 기도를 할 수 있는 것은 하나의 축복이다.
마태복음 6장에서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와 디모데전서 2장에서 말한 기도 및 하나님께서 교회에게 빛과 생명과 은혜와 은사를 주시도록 구하는 기도는 큰 항목이므로 일반 기도 항목에 나열하지 말고 매일 그것들을 위해 하나님 앞에 간구하라.
기도에는 기도하는 쪽과 기도를 듣는 쪽이 있다. 많은 경우 기도를 듣는 쪽에 변화가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기도하는 쪽이 먼저 변해야 한다. 하나님 쪽의 상태가 변하지 않았다면 반드시 우리 쪽에서 그분께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한다. “주여! 제게서 무엇이 변해야 합니까? 제게 아직 처리되지 않은 어떤 죄가 있습니까? 제가 버려야 할 어떤 애호가 있습니까? 제가 참으로 믿음을 배우고 있습니까? 아니면 제가 배워야 할 다른 어떤 것이 있습니까?” 만일 우리 쪽에 변해야 할 것이 있다면 먼저 그것이 변해야 한다. 우리는 결코 자신이 변하지 않으면서 기도를 듣는 쪽만 변하기를 바랄 수 없다. 사람은 주님을 믿는 즉시 기도의 공과를 진지하게 배워야 한다. 기도의 공과를 철저히 배워야만 하나님을 더 깊이 알 수 있고 풍성한 장래를 갖게 된다.












 


W.N. 제3집 제62권 주의 회복 안의 성숙된 인도 (2) 제43장 익양으로 이주한 복음 전파의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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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3장
익양으로 이주한 복음 전파의 보고

 

 

 

 


시간 : 1950년 3월 10일
장소 : 홍콩 구룡 좌돈도

익양으로 이주한 복음 전파에 관한 보고

1948년 말 절강 숙산 일대에 홍수가 발생하여 그 지방의 몇몇 형제자매들은 이것이 그들의 이주를 재촉하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손길이라고 여기고 강서 익양으로 이주를 하기 시작했다. 1949년 초 처음으로 한 무리 형제자매들이 익양에 거주하기 시작했다. 익양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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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자매들은 단체 생활을 하면서 서로 사랑하는 공과와 철저하게 육체를 처리하는 것을 배웠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그분은 그분의 명령에 순복하는 자녀들을 축복하셔서 익양으로 이주하는 형제들이 갈수록 많아지게 하셨다는 것이다. 현재 익양의 형제자매들은 다시 일부분의 사람이 부근의 두세 곳의 지방으로 갔는데, 그 지방의 논밭과 생산력은 익양보다 두 배에서 세 배까지 되었다. 익양으로 이주해 간 형제자매들은 손수 일을 했으며 그들은 두 손으로 기회를 붙잡았다.
남창은 강서의 중요한 도시이며 익양과 매우 가깝다. 현재 수십 명의 형제자매들이 상해에서 남창으로 이주를 했다.
각지의 대도시들은 바로 부근 일대의 복음의 기지이다. 이들 대도시는 우리가 반드시 할 수 있는 한 빨리 ‘점령’해야 할 땅이다.
익양으로 이주한 우리 형제자매들은 좋은 본을 세웠는데, 현재 남창의 방송국에서는 여러 차례 각지에 광고하여 각지의 사람들이 익양, 주계, 음당, 초빈, 용호산 등지로 가서 그곳의 방법을 배우기를 요청했다.

이주하여 복음 전파의 길을 감

현재의 복음 전파의 길은 더 이상 한두 명의 선교사를 어떤 지방에 보내어 복음을 전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이주하여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낙하산 부대와 같이 온 교회에 파송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주를 위하여 형제자매들은 반드시 직업을 가져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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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다. 누구든지 이주를 준비하는 사람은 적어도 두 손으로 일할 수 있기를 배워야 한다. 이발이나 재단사, 기술자가 되는 것도 좋다.
이주는 우리로 많은 것을 배우게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도시에서는 유무상통을 실행하는 것이 쉽지 않다. 그러나 익양, 주계 등지에서는 아주 쉬우며 어려움이 없다.
새로운 정부 당국은 새로운 주의를 사용한다. 그들의 근본 원칙은 평균 주의를 실행하는 것이다. 그러나 평균 주의로 인하여 사람을 게으르게 할까 염려되기 때문에 엄격하게 사람을 감시해야 했다. 당국으로 말하자면 평균 주의의 실행은 특별히 어려움이 있지만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어려움이 없는데, 이는 우리가 서로 사랑하며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기 때문이다. 익양에서는 오히려 노인과 병든 자가 특별히 더 잘 먹는다.
현재의 긴급한 필요는 바로 복음 전파이다. 강서 북부 일대의 인구는 이백여 만 명인데, 우리 형제자매들은 이백여 명뿐이다. 비교해 볼 때 참으로 ‘만분의 일’이라고 말할 수 있다. 머지않아 복음이 이곳에서 신속히 흘러 나갈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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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집 제62권 주의 회복 안의 성숙된 인도 (2) 제39장 심방과 교통 / 접대, 애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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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9장
심방과 교통

 

 

 

 


시간 : 1950년 3월 4일
장소 : 홍콩 구룡 좌돈도
설교자 : 니토셍, 이상수 형제님


기도

위광희 형제님 : 당신은 참 포도나무요 우리가 당신의 포도나무의 가지임을 인하여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는 실로 당신과 연결될 자격이 없는 자라고 느끼지만 그러나 당신이 피를 흘려 구속을 이루심으로 우리는 이미 당신과 연결되었음을 인하여 당신께 감사와 찬미를 드립니다. 당신의 선한 뜻이 이와 같음을 인하여 당신께 감사를 드립니다. 주여, 우리로 당신의 이 포도나무에서 공급되는 모든 풍성한 성분을 의지하고 앙망하며 받는 것을 배우게 하사 참으로 포도나무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게 하소서.

주여, 당신이 우리를 위하여 당신의 가장 귀한 생명을 버리사 우리로 오늘 당신을 우리의 생명으로 얻게 하심을 인하여 당신께 감사를 드립니다. 과거 여러 달 동안 당신의 종을 통하여 우리에게 당신의 말씀과 빛 비춤을 주셨을 뿐 아니라 영적인 길도 주셨습니다. 당신의 은혜는 실로 여러 달 동안 우리가 기도 가운데서 생각하고 바라던 것보다 훨씬 초과했습니다. 실로 주님의 긍휼입니다. 오늘 이후 만일 주님이 원하신다면 계속해서 우리에게 평안한 시간을 주사 당신 앞에서 모이게 해 주시며, 계속적으로 우리에게 더 투명한 말씀을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원컨대 우리 형제를 더욱 강하게 하시고 더욱 풍성한 말씀을 주사 우리의 헌신과 봉사가 다 강해지게 하소서. 빛 비춤을 당신의 종에게 주사 우리의 봉사가 더욱 철저하도록 하소서. 비록 지난 수일 동안 사단의 방해하는 일이 있었지만 어떤 것은 이미 지나갔습니다. 얼마나 당신께 감사하며 찬미해야 하는지. 당신은 이미 사단의 모든 역사를 패배시키셨습니다. 사단에게서 나온 모든 역사에 대하여 우리는 당신과 한마음으로 반대합니다. 사단이 우리가 당신을 섬기는 것을 저지하지 못하며 우리가 당신 앞에서 은혜를 얻는 것을 가로막지 못함을 인하여 당신께 감사와 찬미를 드립니다. 당신의 긍휼과 은혜를 이전보다 더 많이 주사 오늘이 어제보다 더 뛰어나게 하소서. 종은 지금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구합니다. 아멘.


“수일 후에 바울이 바나바더러 말하되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 하니”(행 15:36).



심방의 실행

1. 먼저 주님과 교통이 있어야 함

이상수 형제님 : 심방은 가장 영적인 일 중의 한 가지이다. 그것은 복음 전파, 집사실의 봉사, 단장 등의 일보다 더욱 영적인 것이다. 심방은 교통 가운데 하나이며 주님과 교통이며 심방하는 형제자매와 교통을 갖는 것이다. 당신이 사람을 심방하면서 만일 주님과 교통을 잃어버린다면, 당신은 형제자매들과 교통을 갖기가 매우 어려울 것이다. 당신이 심방하는 형제자매와 함께 교통을 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먼저 영 안에서 주님과 교통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겉 사람으로는 형제자매와 교통을 하고 속 사람으로는 주님과 교통 안에 남아 있어야 한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심방하는 사람을 합당하게 주님 앞으로 인도할 수 있다. 그러므로 심방하는 사람은 반드시 자신이 먼저 주님 앞에서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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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반드시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배움이 있어야 함

다음으로, 우리에게는 반드시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배움이 있어야 한다. 철저한 죄의 자복 같은 것을 반드시 배워야 한다. 만일 당신이 철저한 죄의 자복을 배우지 않았고 당신에게 이 일이 결핍되었다면, 설령 당신이 다른 면에서 아무것도 부족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당신에게는 여전히 부족한 것이 있는 것이다. 만일 주님 앞에서 철저한 죄의 자복이 부족하다면 당신은 이 일에서 심방하는 형제자매들을 철저하고 구체적으로 도와줄 수 없다. 오직 당신 자신이 이것을 배웠을 때라야 당신은 비로소 사람을 구체적으로 도와줄 수 있다. 예를 들어, 당신의 영어 실력이 아주 좋다면, 당신은 상대방의 영어 수준이 어떠한지 테스트하고자 할 때 영어에 대하여 몇 가지만 질문해 보면 즉시 그의 수준이 어떠한지를 알 수 있다. 당신이 영어를 잘 배웠다면 당신은 다른 사람의 수준과 어려움이 어디에 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동일하게 영적인 일에 있어서도 우리는 깊은 배움이 있어야만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다. 다시 헌신을 예로 들어보면, 우리가 만일 다시 한번 철저한 헌신을 하는 것을 배웠다면 나중에 당신과 다른 사람이 교통할 때 당신은 상대방의 헌신이 과연 어느 정도인지를 알 수 있다. 나머지 영적인 지각과 생각의 새롭게 됨도 역시 이와 같다. 각 방면에서 우리는 다 먼저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배움과 영적인 체험이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형제자매들을 돌볼 때 합당하게 그들을 도울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대북에 있을 때 매주 월요일 아침 여섯 시 반부터 매일 아침 전부의 시간을 사용하여 약간의 봉사하는 형제자매들을 한데 모아 형제자매들을 돌본 것을 그들과 교통한다. 그들은 교통하는 상황을 내놓고 그런 다음 나는 그들에게 심방하는 형제자매들에 대하여 여러분은 어떻게 느끼느냐고 묻는다. 많은 사람들이 언제나 ‘나쁘지 않다’, ‘아주 좋다’, ‘좋지 않다’라는 등의 말을 한다. 나는 즉시 틈을 주지 않고 어떻게 ‘나쁘지 않은가’, 어떻게 ‘아주 좋은가’, 어떻게 ‘좋지 않은가’, 무엇을 가리켜 ‘나쁘지 않다’고 하는가, 무엇이 ‘아주 좋은가’, 무엇을 ‘좋지 않다’고 하는 것인 가라고 질문한다. 그가 늘 집회에 오며, 기도를 하고 성경을 읽으며, 열심이 있다고 해서 아주 좋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당신은 반드시 구체적으로 사람이 어떻게 좋으며 어떻게 좋지 않은지를 말해야 한다. 예를 들어, 성경을 읽는 것에 대하여 당신은 그가 어떻게 읽는지를 알아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창세기를 읽은 적이 있고 로마서 6장부터 8장까지를 여러 차례 읽었지만 열왕기, 역대 상하, 혹은 마태복음 1장 1절부터 18절까지의 족보를 읽는 것은 소홀히 한다. 이것이 바로 대충 생활하는 그리스도인이다. 그러므로 당신이 형제자매들을 돌볼 때 그의 외적인 상황만을 볼 것이 아니라 그의 영적인 실제를 만져야 한다. 이것은 반드시 우리가 먼저 영적인 배움이 있어야 하며 영적인 실제를 요한다.
만일 당신에게 참으로 영적인 체험이 있다면, 자신이 고통 가운데서 대가를 지불하는 것을 통하여 영적인 공과를 배웠다면, 당신은 함부로 경솔하게 이러한 공과를 사람들에게 말해 주지 않을 것이다. 당신 자신이 먼저 구체적인 실행을 한다면, 심방을 할 때 당신은 구체적인 실행의 한계를 제쳐놓고 기도, 죄의 자복, 성경 읽기, 헌신 등을 모호하게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각각의 항목의 영적인 공과에 대하여는 대가를 지불해야 할 뿐 아니라 서로 공급받기를 배워야 한다. 그러므로 형제자매들은 주일마다 최소한 한번은 모여서 심방하고 있는 형제자매들의 상황을 교통하는 것 외에 각종 영적인 공과들을 교통하여 한 가지 일도 경솔하게 흘러보내지 말아야 한다. 각 사람의 말은 다 구체적이어야 한다. 어떤 점에서 ‘좋지 않은지’, 어떤 점에서 ‘아주 좋은지’ 각 사람은 다 구체적으로 각 사람의 상황을 교통해야 한다. 여러분 모두가 만난 적이 있는 각종의 어려움들을 다 내놓고 형제자매들의 의견이 어떠한지를 물어야 한다. 만일 그 지방에서 해결할 수 없다면, 다른 지방의 연장한 형제자매들 혹은 교회에 편지를 써서 그들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 있다. 이러한 심방은 상당히 어렵다. 그러므로 나는 가장 영적인 배움은 바로 심방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 가운데서 실제로 많은 공과들을 배울 수 있다.


심방에서의 주의사항

형제자매들이 심방할 때
몇 가지 사항을 반드시 주의해야 한다.


1. 사람을 가르치려고 하지 말라

먼저, 우리는 사람을 돌볼 때 사람을 가르치려고 해서는 안 된다. 당신이 다른 사람보다 아는 것이 많다고 여기지 말아야 한다. 가르치려는 영은 교만한 영이며 그 결과는 사람으로 하여금 영을 소모하게 하고 사람을 온전케 할 수 없고 공급을 얻게 할 수 없다. 이사야 50장은 우리가 반드시 먼저 가르침을 받는 자의 혀를 가져야 비로소 말로써 곤핍한 자를 도와줄 수 있다고 말한다(4절). 우리는 먼저 사람의 말을 듣기를 배워야 하며 영 안에서 주님과 교통하며 주님께서 빛을 주시기를 앙망해야 합당한 말로 사람을 도와줄 수 있다.

2. 말에 있어서 반드시 정확해야 하고 공급이 있어야 함

우리가 돌볼 때 말에 있어서 신중해야 하며, 말은 반드시 정확하게 해야 한다. 우리가 하지 말아야 할 많은 말들이 있으며 우리는 함부로 말하지 말아야 한다. 사람의 말은 종종 정확하지 못한데, 이는 우리의 혀가 너무 거칠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생각만 거칠다고 알지만 사실은 말에 있어서도 역시 거칠다. 만일 우리가 기꺼이 배우고자 한다면, 혀와 생각이 동일하게 굴레를 씌우기가 어렵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1935년 하나님은 나에게 말에 있어서 정확한 것을 배우라고 요구하셨다. 그때 나는 매우 어렵다고 느꼈으며 하루 중에 나는 늘 여러 차례 사람을 향하여 죄를 자복해야 했다. 한번은 나의 아이가 세숫물을 담아 오다가 조금 흔들려 몇 방울을 땅에 떨어뜨렸는데 대략 여덟에서 열 방울이었다. 나는 이것을 보고 즉시 그를 꾸짖으면서 어떻게 바닥에 온통 물이냐고 말했다. 내가 말을 다하고 나자 속에서 즉시 바닥에 물이 보이지도 않는데 어떻게 온통 물이냐고 말했는가 하는 느낌이 있었다. 나는 즉시 아들에게 사과를 했다.
많은 때 성령은 우리의 말을 통해 흘러나온다. 그러나 많은 때 사망 역시 우리의 말을 통해 흘러나온다. 그러므로 사람을 돌볼 때 결코 봉사에 관한 일을 말하지 말아야 한다. 만일 상대방이 당신에게 “○○ 장로가 어떻습니까?”라고 묻는다면, 당신은 즉시 어떠어떠하다고 대답하지 말아야 한다. 늘 이런 대화는 시비와 판단과 비평으로 변하여 사망을 가져온다. 다른 사람과 교통할 때 우리의 말은 반드시 정확하기를 훈련해야 하며 또한 생명의 일만을 말해야 할 뿐 시비를 만지지 말아야 하며 비평하지 말고 정죄하지 말아야 한다.

3. 변론을 일으키지 말아야 함

형제자매들을 돌볼 때 또한 변론을 일으키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교회와 개인, 진리, 사역 등에 대하여 형제자매들이 질문을 하면 우리는 일절 변론을 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심방하는 것은 형제자매들을 관심하기 때문이지 그들과 옳고 그름의 문제를 토론하기 위하여 가는 것은 아니다. 심방 가운데서 변론이 일어나면 당신과 그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고 오히려 쌍방이 다 생각의 흑암 안에 떨어진다. 그러므로 돌볼 때 반드시 변론이 일어나는 것을 피해야 한다. 만일 우리의 영이 충분히 강하다면 할 수 있는 대로 사람을 영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을 만나게 해야 한다. 이렇게 할 때 소극적인 방면의 많은 어려움들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심방과 돌봄의 안배

심방의 안배에 있어서 각 가정은 명단에 따라 하면 된다. 심방은 초신자의 심방과 초신 과정의 보충에 더 많은 중점을 두어야 한다. 각 가정의 심방의 안배 역시 서로 조정을 해야 한다. 만일 심방하는 사람이 부족하다면, 교회가 다른 지역의 형제자매들이 도움을 줄 수 있도록 안배를 할 수 있다. 교회의 심방은 바로 지역이 심방하지 못한 사람들을 보충하는 것일 뿐이다. 교회의 심방과 돌봄에는 및 가지의 항목이 있다.


1. 사고 심방

사고가 포함하는 범위는 매우 넓은데 장례, 결혼, 이사, 직업을 바꿈, 취업, 실업, 질병 등과 같은 것이 다 그것이다. 이것은 누구든지 어떤 일을 당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어떤 환경이 바뀌어진 것을 사고라고 말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다른 환경으로 바뀌었을 때가 바로 가장 위험한 전환점이므로, 교회는 반드시 심방을 통해 그를 견고케 해 주어야 한다. 새로이 홍콩이나 원방에서 온 사람이 있으면 여러분은 반드시 접대를 안배해야 한다. 형제자매들의 변동 가운데 있는 각종 필요들을 반드시 교회가 주의해야 한다. 이런 부류의 심방을 많이 할 수 있다면 교회는 강해질 것이다. 만일 교회가 하지 않는다면 아무 일도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2. 접대

형제자매들을 접대하는 것도 심방하고 돌보는 것의 일종이다. 이 일에 대하여 교회는 반드시 인내를 가지고 해야 한다. 방문해 온 형제자매들을 접대할 뿐 아니라 원방에서 온 형제자매들도 숙소를 안배해 주어야 한다. 십 년 전에 동북에서 시골 교회가 접대하는 일에 있어서 매우 좋았다. 비록 그들이 당신을 알지 못하더라도 당신이 형제자매이기만 하면 그들은 한결같이 접대를 하며 당신에게 돈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상해의 교회는 화북과 동북의 형제자매들에 대하여 그다지 접대가 부족하지만, 동북의 형제자매들은 사람에 대하여 언제나 열렬히 접대한다. 대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접대의 일에 대하여 미흡하며 마음도 없다. 홍콩 교회에 혹시 원함이 있다면 어려움은 없는 것 같다. 성경에는 접대의 일로 가득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일에 있어서 성실하게 해야 한다. 어떤 그리스도인의 집이 손님을 접대하기 위하여 열리지 않았다면, 그들에게 사랑이 없거나 가정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접대는 빛을 집으로 영접하는 것인데 당신의 가정에 문제가 없다면 왜 빛을 두려워하겠는가? 만일 당신이 당신의 집이 누추하다면, 이것은 정상 참작을 할 수 있으며 교회가 접대할 수 있다. 다만 교회 접대소의 분위기는 마치 여관과 같기 때문에 아무래도 가정의 분위기처럼 특별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맛볼 수 없으며 하늘의 축복을 미리 누리게 하지 못한다. 할 수만 있다면 가장 좋은 것은 우리가 발을 씻어 주는 것이다. 만일 세상을 사랑하는 한 형제가 홍콩에 왔는데 어떤 가정이 그를 접대해서 그의 발을 씻겨 주라는 주님의 인도를 따른다면 나는 이 형제가 발에 있는 더러움이 씻겨졌을 뿐 아니라 온 몸에 있는 더러운 것들이 다 씻겨졌으리라고 믿는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앞서서 선결 조건은 서로 사랑함이다. 오늘날 형제자매라고 부르기는 하나 그 실제는 부족하다. 초대 교회처럼 그렇게 친밀하지 않은데 그 기본적인 원인은 아마 손님을 접대하는 일에서 소홀하기 때문이다. 교회의 접대는 반드시 잘해야 한다. 한 면으로 손님으로 하여금 주님을 사랑하도록 도울 수 있으며, 다른 한 면으로 자신이 친구에게 끌려가며 세상으로 가는 것에서 보호받을 수 있다.
복음 전파에 있어서 한 가지 기본적으로 은밀하게 해야 하는 것이 있는데, 바로 외지에서 온 손님을 접대하는 일이다. 1939년 어떤 자매의 남편과 딸이 외국에서 돌아왔다. 그때 그녀의 남편과 아들은 아직 구원을 받지 않았다. 그러나 교회의 접대 봉사를 통해 그쪽에서는 전송을 하여 남편이 감동을 받았고 이곳으로 돌아와서는 교회가 접대를 함으로 아들이 감동을 받아 결국 두 사람이 다 구원을 받았다. 많은 형제자매들이 접대로 인하여 구원을 받았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접대의 일은 반드시 성실하게 해야 한다.

3. 서신 심방

세 번째 종류의 심방은 서신의 심방으로, 형제자매들이 외지로 가거나 이사를 갔을 때 교회는 소개 편지를 통해 그곳의 교회에 알려 주어야 할 뿐 아니라 사람을 안배하여 그와 서신 교통을 하게 해야 한다. 특별히 그를 보낸 사람은 통신의 책임을 지고 직접적으로 그와 그곳의 교회와 교통을 갖게 하여 견고하게 된 후에야 이 쪽의 책임을 다했다고 할 수 있다. 만일 형제자매들이 간 지방에 교회가 없다 해도 그와 서신 교통을 통해서 교회의 교통을 그에게 전해 주어 그의 영적인 상태를 유지하게 할 수 있다.



4. 애찬

네번째 종류의 심방은 애찬을 통해서 돌보는 것이다. 믿는 이들이 늘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은 성경에 부합되는 것이다. 또한 믿는 이들이 함께 음식을 먹을 때 마음속에서 불타오를 수 있고 영 안에서도 서로 교통을 가질 수 있다. 예를 들어, 사도행전 2장에서 교회가 새로 시작되었을 때 믿는 이들은 늘 함께 모여 음식을 먹으며 교통했다. 십팔 년 전에 나는 북부에서 이러한 체험을 했다. 형제자매들이 함께 있을 때 기뻐하며 즐거워하고 교통을 누리는 것은 아주 유익한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형제자매들이 늘 애찬을 하기를 격려한다.
여러분 장로들과 책임 형제들 또한 늘 형제자매들에게 애찬을 하도록 권할 수 있다. 그들에게 오늘 누구를 청하여 애찬을 할 것인지를 물어야 한다. 만일 그들이 아무도 청하지 않았다면 다시 그들에게 누구를 청하여 애찬을 할 마음이 없느냐고 물어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들에게 마음이 있다면 다시 그들에게 언제 청하겠느냐고 물어야 하며, 날짜를 정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다시 언제쯤 할 것인지를 물어야 한다. 만일 그들이 며칠 지나서 할거라고 하면 당신은 다시 그들에게 내일 할 수 없느냐고 물어야 하며, 만일 가능하다고 하면 그들에게 누구를 청할 것인지를 물어야 한다. 그들이 잘 아는 형제자매를 청할 거라고 할 때 당신이 그다지 좋지 않다고 느껴진다면 즉시 그에게, 내가 당신을 대신하여 더 많은 교통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어떤 집회에서 팔십 명이 와서 복음을 듣고 침례를 받았다면, 그 후에 많은 형제자매들이 자동적으로 침례를 받은 형제자매들과 애찬을 가져야 하며 침례를 받은 모든 사람들은 대여섯 명씩 함께 애찬을 할 수 있다. 나는 애찬에 초청받은 형제자매들이 주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고, 다음번 집회에 오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고 믿는다. 애찬의 기회는 반드시 형제자매들이 가서 만들어야 하며 주일 집회 후에 약속할 수 있으며 평상시에는 가정에서 약간의 자리를 예비할 수 있다. 만일 당신이 늘 가정을 연다면 형제자매들을 초청하여 애찬을 할 때 당신의 집안 사람들이 주님을 믿기가 아주 쉬울 것이다. 물론 여러분 책임 형제들은 단지 제창(提唱)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반드시 자신이 구체적으로 실행해야 한다.
대북 교회에서는 집사실에서 인쇄된 초청장을 가지고 전적으로 초청한 사람을 위하여 애찬을 한다. 필요할 때 집사실에서 형제자매들에게 애찬을 안배하여 형제자매들로 하여금 음식을 먹으면서 서로 알고 기도하고 간증하며 교통하도록 한다. 가정에서 음식을 먹는 것은 아무래도 음식점에서 먹는 것보다 친밀하고 격식이 없다. 애찬 중에는 동석한 형제자매들로 하여금 간증을 하게 할 수 있다.  아마 어떤 사람은, “외람 됩니다만 오늘 저녁 주인께서 나를 초대하여 음식을 대접하고 또 여러 사람들 앞에서 교통하라고 했으므로 먼저 교통을 좀 하겠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고, 또 어떤 사람은 “오늘 저녁 여러분의 사랑을 받고 여러 형제자매들의 성의를 존경합니다. 그러나 내가 음식만 먹는 것은 조금 미안하므로 간증을 좀 하겠습니다.”라고 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나는 작은 지방에서 왔기 때문에 이런 큰 장소에 습관이 되지 않았습니다. 좋은 교통이 아닐지라도 형제자매들이 너그러이 들어주십시오.”라고 말할 수 있다. 그가 어떻게 말하든지를 막론하고 반드시 그의 마음을 온화하게 해 주어야 하며 모든 사람이 즐거워야 한다.
애찬에서는 영양을 주의해야 하며 비용을 너무 들여서도 안 된다. 만일 비용을 너무 많이 들였다면, 늘 그렇게 할 수 없고 또한 어떤 사람은 감히 오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은 당신의 애찬이 너무 좋고 비용을 너무 많이 들이는 것을 보고서 그들 자신은 이렇게 사람을 초청할 수 없기 때문에 자연히 다른 사람의 집에 가서 먹기가 미안해진다. 애찬을 할 때는 될 수 있는 대로 너무 많은 돈을 쓰지 말아야 한다. 많은 부분을 쓰지 않고 절약해 두었다가 더 필요한 다른 곳에 사용될 수 있도록 헌금을 하는 것도 좋다. 각 방면의 돈은 다 절약하여 교회의 중요한 일에 사용할 수 있도록 남겨 두어야 한다. 지난 몇 년 동안 우리의 사역은 하루도 편안할 날이 없었으며 반드시 가능한 한 복음을 위하여 절약해야 한다. 애찬에 대하여 우리는 많이 해야 하고 늘 해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먹는 것은 반드시 일반적이어야 하며 낭비하지 말아야 한다. 모든 사람들이 매일 세 끼를 먹는데, 어떤 때는 당신이 그의 집에 가서 먹을 수 있고 어떤 때는 그가 당신 집에 와서 먹을 수 있다.
애찬의 대상으로는 복음 친구나 잘 알지 못하는 형제자매들을 주로 하는 것이 가장 좋다. 만일 형제자매들 사이에 오늘 당신이 그의 집에 가서 음식을 먹고 다음날 그를 당신의 집으로 오게 하여 음식을 먹게 한다면, 결국에는 애찬에다 쓰는 돈은 서로 상쇄(相殺)된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의 소유는 다 주님이 주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반드시 잘 알지 못하는 형제자매들을 많이 초청해야 한다. 이렇게 한다면 애찬이 깊은 의미를 갖게 될 것이다. 사랑이 있는 접대의 애찬은 쉽게 서로 사랑하는 마음을 불러일으킨다. 만일 형제자매들이 늘 이러한 애찬과 교통을 가진다면, 교회의 교통 가운데 간증이 많아지며 주님을 기념하는 것과 아버지에 대한 경배와 찬미와 감사가 더욱 많아질 것이다. 애찬을 책임진 형제자매들은 반드시 이러한 일을 계속 확인해 주어야 한다.

가정의 교통을 가지기를 배워야 함

여러분 책임 형제자매들은 반드시 유모의 심장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아이를 가진 어머니는 쉽게 마음이 넓어지고 사랑이 커진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의 분량이 더 커져서 사람들에 대하여 더 많은 사랑을 품을 수 있도록 간구해야 한다. 젊은 형제자매들에 대하여 말한다면 여러분들은 자신의 부모 앞에서 교통해야 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부모와도 교통을 갖기를 배우고 책임 형제자매들 앞에서 자신을 열 줄 알아야 한다. 교회는 반드시 가정의 느낌이 있어야 하며 형제자매들은 모두 가정과 같이 많은 교통을 가져야 한다.

심방은 교회의 후방 지원임

니토셍 형제님 : 교회의 부서는 군대의 후방 부대와 같다. 군대에 후방이 없으면 쉽게 패전한다. 교회에도 후방이 필요한데 이 후방의 지원은 바로 심방이다. 심방은 교회의 전면적인 복음 전파의 움직임을 나타낸다. 교회가 전면적으로 복음을 전파하려면 반드시 다방면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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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을 전해야 한다. 이것은 오늘날의 상업이 많은 방법을 가지고 있지만 그들의 목적은 오직 하나, 상품을 판매하는 것과 같다. 어떤 방법을 쓰든지를 막론하고 상품을 판매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복음은 바로 우리가 판매하는 상품이며 죄인은 바로 우리의 고객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전과 같이 하나의 방법, 즉 강단에서만 복음을 전할 수 없다. 오늘 우리의 필요는 각 방면의 복음 전파이다. 어떤 장소, 어떤 방법을 사용하든지 사람이 구원받을 수만 있다면 그것을 취해야 하며 고정된 방법을 사용할 필요는 없다. 이것이 바로 전면적인 복음 전파이다.

교회의 회복은 전체의 봉사임

오늘날 교회는 회복의 길을 가야 한다. 오늘 당신은 십육 세기의 그리스도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 루터 시대의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반드시 오순절의 상황에까지 회복되어야 한다. 오순절 때 교회의 봉사는 모든 사람의 한 달란트를 다 가져오는 전체의 봉사이다. 주님은 누가복음에서, 우리가 복음의 잔치에 참석하도록 요청해야 하며 심지어 강권해서 오라고 해야 한다고 말한다. 사람이 와서 구원(잔치)을 먹어야 하기 때문에 사람이 큰길로 가서 가난한 자, 불구자, 눈먼 자, 저는 자들을 오라고 하여 음식을 먹게 해야 하며 그들이 먹기만 하면 구원받는 것이다(14:16-24). 사람을 청하고 강권하는 종이 많을수록 구원받는 사람은 많아질 것이다.
왜, 교회에 이렇게 많은 교통과 심방이 필요한가? 오늘 교회의 교통과 심방은 기본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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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련이며, 그 목표는 형제자매들이 다 봉사할 수 있도록 예비하는 것이다. ‘초신자를 온전케 하는 쉰두 공과’는 바로 기본적인 과정으로, 그 내용은 그리스도인의 기본적인 행위(그리스도인의 기본적인 신앙이 예비되지 않은 사람에 대해)에 관한 것이며, 여러분으로 하여금 기본적인 훈련을 갖게 하기 위한 것이다. 다만 당신이 구원받기만 하면 당신에게는 한 달란트가 있으며 훈련을 받아야 한다. 당신에게 한 달란트가 있는 것은 이미 정해진 것이고 당신이 유용하다는 것은 이미 정해진 것이다. 그러므로 형제자매들은 다 안배를 받아야 하며 어느 누구도 한 달란트를 매장할 수 없다.

초신자를 온전케 하는 것의 중요성

눈이 근시인 사람에게 있어서는 안경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은 볼 수 있고 볼 수 없는 것과 매우 큰 관계가 있다 우리에게 있어서 초신자를 온전케 하는 공과의 중요성은 마치 근시인 사람에게 안경처럼 요긴하다. 기도, 성경 읽기, 일찍 일어나기 등은 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성격의 배양과 큰 관계가 있다. 내가 심장병을 않기 전에는 수년 동안 다섯 시 반 이전에 일어났으며 때로 늦잠을 자면 다음날 자신을 처벌하고 스스로 보충 수업을 했다. 우리 자신은 어떤 일에서도 조금도 새는 곳이 없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가 어렵고 인도하기가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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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배운 사람이 새로 들어온 사람을 가르침

여러분이 ‘초신자를 온전케 하는 공과 쉰두 공과’를 배운 후에야 우리는 새로운 과정을 가르칠 수 있다. 그러므로 초신자를 온전케 하는 각 과목마다 당신은 반드시 철저하게 배워야만 장래 한 무리 한 무리 새롭게 구원받은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다. 이것은 또한 쉰두 공과를 다 듣고 이 일년 동안 다 배웠어야만 졸업하고 사람을 가르칠 수 있다는 말은 아니다. 단지 일 개월을 배웠다 하더라도 이번 달 새로 들어온 사람을 가르칠 수 있다. 마치 사관 학교에서 상급자가 하급자를 가르칠 수 있는 것과 같다. 나는 젊었을 때 삼일 서원에서 공부를 했었는데 선생님을 대신하여 가르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내가 가르칠 수 있었지만 선생님과 같이 않아서 가르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내가 강단에서 가르칠 때는 감히 선생님처럼 그렇게 앉아서 가르칠 수 없었고 서서 가르쳐야 했었다. 초신자를 온전케 하는 공과에 대하여 지난달 배운 사람은 다음 달 갓 구원받은 사람을 가르칠 수 있다. 그러나 반드시 친구가 친구를 가르치는 것처럼 가르쳐야지 교사의 위치에서 가르쳐서는 안 된다. 언제나 뒤의 물결이 앞의 물결을 밀어 나가게 하며 나중의 영광이 전보다 더욱 영광스러우며 나중 된 자가 먼저 되어야 한다(마 19:30). 그러나 만일 앞선 무리가 잘하지 못한다면 뒤에 오는 사람들도 잘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군대의 방법과 같아야 하며 속성반의 방식으로 스스로 가르칠 수 있도록 사람을 배양해야 한다. 우리는 먼저 자신을 위하여 보충 수업을 해야 하며 이후에 다른 사람을 위하여 보충 수업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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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말을 주의해야 함

심방과 교통의 암초는 바로 우리의 입이다. 야고보는 우리가 입으로 주를 찬송할 뿐 아니라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할 수 있다고 말한다(약 3:9). 사단은 세상에 대하여 정해진 방법이 있다. 사단은 세상에 죄가 아직 충분하지 않으며 그의 필요를 채울 수 없다고 본다. 사단은 더욱 많은 죄가 필요하다. 그는 단지 살인과 도적과 우상 숭배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여기기 때문에 사단은 거짓말을 창조하여 세상의 죄를 증가시켰다. 사단은 세상에 행동하는 죄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여기며 행동 거지의 죄는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그는 사람의 입으로 많은 죄들을 증가시켰다. 세상의 죄들 가운데서 행동 거지의 죄는 사실 사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한다. 나머지 죄의 대부분은 거의 다 거짓말이다. 사단은 바로 사람의 입을 사용하여 말을 더 많이 하게 하고 더 많은 헛소문들과 거짓을 산출한다.
사단은 사람의 입을 통하여 세상의 죄를 증가시킨다. 거짓말이 세상에서 증가되면 죄도 증가된다. 사단은 처음부터 거짓말을 하는 자요 또한 모든 거짓의 아비였다(요 8:44). 그러므로 누가 거짓을 말하는가?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거짓말하는 자마다 다 사단을 따르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야고보는 혀가 바로 불이고 그 사르는 것이 지옥에서 나온 불이며, 불의의 세계라고 말한다(약 3:6). 사람의 입은 세상의 죄를 만들어 낼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말하기를 좋아할 뿐 아니라 불확실한 말, 악한 말, 한담들을 하기를 좋아한다. 이러한 사람은 바로 사단이 죄를 만들도록 도우며 세상에서 사단의 행위를 따르는 사람들이다.
오늘날 세상에서 우리의 입이 깨끗하다면 사단은 할 일이 없다. 죄악의 일이 드물게 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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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은 할 일이 없게 되며 곧 실직하게 된다. 주 예수님은 마태복음 5장에서 우리의 말은 예면 예요 아니면 아니라고 말해야 하고 이에서 지나친 것은 사단에게서 나온 것이라고 했다(37절). 우리의 가정에서 모든 시비, 헛소문, 한담 등은 결코 말하지 말아야 한다. 형제자매들과의 교통에서 우리는 영적인 것과 건축하는 일만을 말해야 하며 입으로 사단이 죄를 증가하게 하는 것을 돕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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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N. 제3집 제62권 주의 회복 안의 성숙된 인도 (2) 제36장 교회 안의 일은 어떻게 결정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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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6장
봉사에 관한 교통(7)
―교회 안의 일은 어떻게 결정하는가

 

 

 

 

시간 : 1950년 3월 1일
장소 : 홍콩 구룡 좌돈도

교회 중의 영적인 원칙

교회 중에는 두 가지의 영적인 원칙이 있다. 첫 번째는 권위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권위의 반대편은 순복이다. 교회에 권위가 없으면 쉽게 육체로 충만해진다. 그러나 만일 권위만 있게 되면 교회는 율법으로 가득해져 법정과 같게 된다. 그러므로 두 번째는 사랑이 있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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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다. 사랑만이 사람을 건축할 수 있다.

봉사의 안배

심방의 일을 질서 있게 진행하기 위하여, 우리는 심방을 몇 개의 세부항목으로 나누어서 여러 형제자매들로 하여금 책임지게 할 수 있다. (1) 외지에서 온 사람의 접대 (2) 사고 심방 (3) 서신 (4) 유모 (5) 애찬[헬라어로 아가페(agape). 원문은 단지 사랑이며 음식을 먹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음].
집사실의 봉사는 교회의 모든 사무의 출구가 되어야 한다. 교회의 사무가 많기 때문에 집사실은 한 사람이 책임지게 하지 않고 열네 명의 집사 형제들로 하여금 교대로 책임을 지게 해야 할 것이다.

교회 안의 일은 어떻게 결정하는가

민주도 아니고 독재도 아님

세상에는 각종 기관들이 일을 처리하는데 질서 있고 편리하게 하기 위하여 다 일을 처리하는 원칙을 세운다. 교회도 영적인 일들을 질서있고 편리하게 처리하는 데에도 ‘일을 처리하는 방법’이 있다. 이전에 형제자매들이 자신을 내맡기지 않았을 때 교회는 전체적인 봉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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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수 없었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교회의 일은 어차피 누군가 하기 때문에 돌아보지 않아도 된다고 여겼었다. 만일 오늘날 교회가 이러하지 않고 형제자매들이 다 자신을 내맡기고 교회에 전체적인 봉사가 있다면, 모든 형제자매들이 다 교회의 일에 대하여 분깃이 있을 것이다. 교회에는 많은 사람들이 봉사하기 때문에 반드시 안배가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쉽게 규모가 없어진다. 어떤 일을 결정하는 데 있어서 세상의 방법은 거수나 투표와 같은 것으로 결정을 하며 소수가 다수를 복종하는 방법을 따른다. 혹은 어떤 곳에서는 독재를 실행하는데 오직 한 사람 혹은 소수의 사람들이 일을 결정한다. 오늘날 세상의 각각의 단체들이 사무를 처리하는 것은 그 나름대로의 방법이 있다. 그러나 교회의 봉사의 방법은 세상의 방식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이 그분의 성경을 통해 계시한 방법을 사용한다. 우리는 반드시 성경 중에서 교회가 일을 결정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만일 교회가 성경에 부합되는 결정 방법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아마 세상의 방법을 가지고 들어올 것이다.
계시록 2, 3장에 언급된 일곱 교회에서 최후의 하나는 바로 라오디게아 교회이며 빌라델비아 교회의 뒤에 이어진다. 주님이 이 마지막 교회에게 하신 말씀은 매우 엄중하다 ‘라오디게아’라는 이 말의 원문은 라오디케이아(Laodikeia)인데 바로 두 개의 단어 골 라오스(Laos)와 디케이아(dikeia)가 합쳐져서 이루어진 것이다. 라오스(Laos)의 의미는 ‘민중’이며 디케이아(dikeia)의 의미는 사전에 따르면 세 개의 뜻이 있는데 (1) 풍속, 습관 (2) 권리 (3) 요구, 판결 그리고 복수이다. 그러므로 라오디게아의 의미는 바로 민속, 민권, 그리고 국민의 결정이며 ‘백성들의 의견’이라고 말하는 것이 가장 좋다. 계시록 2, 3장 안에서 라오스(Laos)라는 이 단어는 세 번 사용되었는데, 나머지 두 번은 ‘니골라’라는 단어 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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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함되어 있다. 니골라의 원문은 니콜라오스(nikolaos)인데 니코스(nikos)의 의미는 ‘정복’이며 라오스(laos)는 ‘백성’의 의미가 있다. 그러므로 ‘니골라’의 의미는 바로 ‘백성의 정복자’의 의미이다. 계시록 2, 3장에서 주님은 특별히 라오디게아(Laodikeia)이든 니골라(Nikolaos)이든 다 그분이 기뻐하지 않으시고 미워하시는 것임을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교회를 봉사하는 방법은 정복하고 압제하는 방식은 옳지 않을 뿐 아니라 다수의 원칙이라 할지라도 옳지 않다. 다수의 의견에 따라 그리스도는 정죄받았고 십자가에 못 박혔다(마 27:21-23). 교회의 일이 한 사람 혹은 소수의 사람들에 의해 결정되는 것도 옳지 않다. 천주교는 교황 한 사람이 바티칸에서 모든 것을 결정하는데, 이러한 제도는 바로 니골라당의 행위이다.

사도행전 15장의 본

그렇다면 교회의 봉사는 마땅히 어떻게 해야 하는가? 교회에서 일을 결정하는 방식에 관하여 주님은 우리가 결정하도록 남겨 두지 않으셨다. 그러나 주님은 성경 가운데 한 장의 본을 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사도행전 15장의 회의이다. 사도행전 안에 있는 회의는 바로 영에 속한 것이며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 독재도 아니며 민주도 아니다. 사도행전 15장에서 교회는 영적인 방법으로 일을 상의하고 결정한다. 만일 이 회의가 기록되지 않았다면 우리는 일을 처리하거나 봉사할 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먼저 사도행전 15장에 있는 이 회의의 배경을 보아야 한다. 예루살렘 교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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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들 가운데 가장 큰형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이곳에서 사역을 했었고 또한 열두 사도가 이곳에서 오랫동안 사역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복음도 예루살렘의 그리스도인들이 사방으로 흩어지면서 나온 것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루살렘에서 나왔다. 후에 바울과 바나바가 첫 번째 전도 여행에서 돌아와 안디옥에 있을 때 그들은 큰 어려움을 만났는데, 그것은 예루살렘 교회의 사람들이 안디옥에 내려와 가르치기를 믿는 이들이 반드시 모세의 규례에 따라 할례를 받아야 하며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바울과 바나바는 그들과 크게 논쟁하였다. 바울과 바나바는 매우 분명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고서 의롭다 하심을 받지 못하고 여전히 죄인이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은 것이다”라고 말했다(갈 2:17-21). 그러므로 교회는 결코 유대교의 갖가지의 배경 할례와 안식일을 지키고 음식을 먹는 규례와 같은 것 등을 구원과 함께 혼합할 수 없다. 그렇지 않으면 장래에는 아마 학위가 없거나 채식 등이 없으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가르침이 나올 것이다. 만일 중국에 공자의 가르침을 끌어다가 가져온다면 어떤 사람은 효도와 인애 등이 없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복음은 그렇지 않다. 복음은 누구든지 주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고 말한다. 율법을 지켜야 구원받을 수 있다는 가르침이 예루살렘에서 전래되었기 때문에 바울과 바나바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교통했는데 그들뿐 아니라 안디옥 교회의 다른 형제들도 함께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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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모든 형제들이 다 말할 수 있음

바울과 바나바가 예루살렘에 이르렀을 때 즉시 베드로에게 묻지 않고, ‘사도와 장로들에게’(행 15:2) 갔으며 ‘교회와 사도와 장로들의 영접’(4절)을 받았다. 그런 후에 사도와 장로들은 형제들에게 회의를 열기를 요청했다 문제가 생겼을 때 전체 교회가 함께 모여 교통하고 개개인들이 다. 말할 자격이 있다. 책임 형제들은 반드시 형제자매들의 말을 들어야 한다. 일은 연장한 형제들이 결정하지만 연장한 형제들은 형제자매들의 말을 들어야 하는데, 이는 형제자매들의 말 속에 성령의 음성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연장한 형제들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다루심을 받았기 때문에 형제자매들의 말을 들은 이후에 하나님 앞에서 일을 결정할 수 있다. 이 회의 중에 전에 바리새인이었던 한 무리 믿는 이들이 먼저 일어나, “이방인에게 할례 주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5절)고 말했다. 그러자 이로 인하여 많은 변론이 일어났는데, 이것은 많은 형제들이 다 말을 하고 다 자신의 견해를 발표했음을 나타낸다.

2. 베드로가 말함

‘많은 변론이 …’(7상) 있었으며 각종 이유를 다 말했을 때 베드로가 일어나 고넬료의 집에서 일어난 일을 서술했다. 베드로는 바울이 먼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앞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 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7하)라고 말했다. 그 뒤에 베드로는 마치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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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들은 종교적 배경이 있어서 할례를 받고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아주 쉬운 일이지만 이방인들로 말하자면 지기 어려운 멍에이다(10절). 우리는 이렇게 감당하기 어려운 짐을 이방인에게 더하지 말아야 한다.” 고넬료의 집에서는 바로 그들이 먼저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그런 후에 베드로가 그에게 침례를 준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이 먼저 역사하시고 성령을 증거로 주신 것이다. 베드로는 그가 비로소 입을 열어 제자들에게 내린 것과 같은 성령이 그들에게 강림했다고 간증했다(11:15). 그러나 오순절 때와는 상반되는데 오순절 때에는 베드로가 복음을 전하고 나서 제자들이 침례를 받았고 비로소 ‘성령을 받았다’(2:38). 만일 고넬료의 집에서 마치 오순절 때와 마찬가지로 먼저 침례를 받고 성령을 받았다면 그것은 이상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고넬료의 집은 베드로가 입을 열자 성령이 부어졌다. 그러므로 이것은 성령이 기꺼이 이렇게 하셨다는 것을 증명한다. 바리새파 유대 믿는 이들은 죽은 교리를 말했고 베드로는 성령의 역사를 말했다.

3. 바울과 바나바가 말함

베드로가 말을 마치자 회의에 참가했던 사람들은 다 조용해졌다. 이때 바울과 바나바가 이어서, “하나님이 자기들로 말미암아 이방인 중에서 행하신 표적과 기사”(15:12)를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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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마지막으로 야고보가 결정을 내림

마지막으로 야고보가 일어나 말을 했다. “말을 마치매 야고보가 대답하여 가로되 형제들아 내 말을 들으라”(13절). 19절에서 야고보는 이 회의의 최후 결정을 내렸다. 이 회의에서 첫 번째 말한 사람들은 하나의 기초로서 유대의 형제들이고, 다음으로 말한 것은 베드로였으며, 세 번째는 바울과 바나바였고. 네 번째로는 야고보가 마지막 결정을 내렸다.

사도행전 15장의 적용

오늘 우리는 이러한 본을 응용할 수 있다. 다수 사람들의 의견을 따라 결정하지 않고 교회의 회의를 시작할 때 형제자매들은 할 수 있는 한 말을 하거나 변론할 수 있으며 마지막으로 장로가 결정할 수 있다. 마지막 결정이 있기 전에 모든 형제들은 다 말할 수 있으며 베드로가 말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바울과 바나바도 말할 수 있었다. 그런 후에 야고보가 말할 때 마지막의 결정을 내렸다.

영적인 인도자의 산출

오늘날 우리의 문제는 누가 야고보인가 하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오늘 누가 인도자의 지위에서 결정을 내릴 자격이 있는가이다. 우리는 먼저 야고보가 어떻게 인도자가 되었는지 본다면 영적인 인도자가 어떻게 산출되는지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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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서 모두 여섯 명의 야고보가 나온다. 사도행전 15장에 있는 이 회의의 야고보는 바로 주 예수님의 육신의 형제이며 그는 신약에서 여러 번 말을 하는데 신약 성경에서 그의 이름은 열 번 언급된다. 교회가 막 시작되었을 때 인도자는 베드로였으며 그는 복음 전파에 있어서 인도자였다. 후에 사마리아로 내려갈 때는 베드로가 요한과 함께 갔으며(8:14), 고넬료의 집에 간 것도 베드로였다. 그러나 그때 이후로 베드로는 점점 교회 중에서 그의 인도자의 지위를 잃어버리는 것 같다. 사도행전 12장에 와서 교회가 큰 핍박을 받을 때 열두 사도 중의 야고보가 피살되고 베드로는 감옥에 갇혔다. 이때 야고보가 짊어졌고 베드로는 그의 인도하는 위치를 잃어버렸다. 여기서 우리는 영적 인도자는 경력의 문제가 아니며 세상에 속한 선거로 한번 총통으로 선출되면 육 년 동안 하는 그러한 것과 같지 않고 누구든지 주님 앞에서 배움과 진보가 있으면 바로 그가 인도자의 위치에 서는 것을 볼 수 있다.
고린도전서 15장 5절부터 7절은 바울이 여러 사람을 언급하지만 오직 야고보와 베드로의 이름만 언급하고 나머지는 단지 ‘오백여 형제’, ‘열두 사도’, ‘사도들’이라고만 말하며 요한의 이름조차도 언급되지 않는다. 이것으로 볼 때 야고보는 틀림없이 그 특징이 있었을 것이기 때문에 바울이 그를 언급했을 것이다. 이곳에서 뿐 아니라 갈라디아서 1장 18절부터 19절에서도 바울은 두 사도의 이름만을 언급하는데 베드로와 주의 형제 야고보이다. 2장 9절에 이르러 바울은 다시 야고보, 베드로와 요한이 예루살렘 교회의 세 개의 기둥이라고 말하면서 야고보를 베드로 앞에 두었다. 2장 12절에서 바울은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안디옥으로 왔다고 말하며, ‘예루살렘에서 온’ 혹은 ‘베드로에게서 온’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사도행전 12장 17절에서 베드로는 자신의 입으로 일어난 일을 야고보에게 알려야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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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했다. 그때 예루살렘에는 적어도 몇 십 명의 동역자들이 있었고 몇 만의 형제자매들이 있었지만 베드로는 특별히 야고보에게 알리는 것을 강조했다.
이상의 성경의 몇 구절을 통하여 우리는 예루살렘 교회가 막 일어났을 때 베드로는 첫 번째 인도자였으며 베드로가 감옥에 갇힌 이후부터 야고보가 일어났으며 심지어 베드로보다 앞에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행전 15장에서 야고보가 가장 마지막에 일어나 말을 하는 이유를 알 수 있다. 이 회의에서 가장 마지막에 결정을 내린 사람은 야고보였는데, 이것은 그때 그가 영적인 인도자였기 때문이다.

영적인 인도자의 결정은 성령의 결정임

19절에서 야고보는 결정을 내리면서, ‘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라고 말한다. 뒤에 28절에서는 ‘성령과 우리는 …’이라고 말한다. 이 의견은 사실상 야고보의 결정이지만 결과는 전체 교회와 성령의 결정이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적인 인도자의 결정이 바로 성령의 결정임을 알 수 있다.

오직 성령께만 권위가 있음

그러므로 전체 교회가 교통할 때 형제자매들은 할 수 있는 한 의견을 제기할 수 있다. 그러나 기억해야 할 것은 당신이 의견을 제기했다고 해서 곧 당신의 의견대로 해야 한다는 말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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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다. 형제자매들이 말을 할 때 장로들은 반드시 들어야 한다. 장로들은 형제자매들의 말을 듣고서 그 가운데 성령의 음성이 있는지 없는지를 보는 것을 배워야 한다. 마치 누가복음에서 말한 것처럼 엘리사벳이 주의 모친 마리아의 음성을 듣자마자 아이가 그의 복중에서 기쁨으로 뛰었다고 하는 것과 같다(1 :41). 누가 입을 열고 말을 하든지를 막론하고 장로들은 반드시 성령이 형제자매들을 통해 말하는 말씀을 듣는 것을 배워야 한다. 많은 때 형제자매들이 말함에 있어서 말은 옳지만 영은 옳지 않다. 그러므로 장로들은 듣는 것을 배워야 하고 또한 분변하기를 배워야 한다.
본래 변론은 반드시 목소리가 커야 하고 말이 많아야 하지만, 교회 안에서의 변론은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소리가 없어야 한다. 최후에 일을 결정하는 사람은 바로 책임 형제이다. 그들은 영을 사용하여 교회 가운데 있는 성령의 권위를 만져야 하며 마지막 결정을 내려야 한다. 교회에서 일을 처리하는 것은 장로들의 의견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형제자매들이 말한 것과 신언자들의 영에 근거해야 한다. 야고보가 사도행전 15장에서 결정을 내린 것은 그의 개인적인 의견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먼저 형제들의 말과 베드로의 말, 바울과 바나바의 말을 듣고서 선지자 모세의 말에 근거하여 마지막으로 결정을 내린 것이다(14-18절).
그러므로 교회에서 일을 처리하는 방법은 독재나 위원회가 아니며 민주 제도 아니다. 교회가 결정을 내리는 것은 투표에 넘기거나 소수 사람들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책임 형제가 결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책임 형제는 반드시 영적인 일에 있어서 영적인 인도의 선후가 있음을 보아야 한다. 교회 중에는 민주도 없고 독재도 없으며 집사들 가운데서도 이와 같다. 영적으로 많이 배운 사람은 자연히 앞에 서게 되며 배움이 적은 사람은 당연히 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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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러나게 된다. 어떤 형제는 비교적 배움이 많아서 인도자의 지위에 서는데, 이것은 그들 자신에게 권위가 있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성령으로부터 권위를 얻는 것을 배워야 한다. 마치 버스를 탈 때 밀듯이 그렇게 밀어서 권위가 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권위가 되는 것이다. 요한은 언제나 베드로의 뒤에 있었고, 야고보는 본래 베드로의 뒤에 있었지만 나중에는 베드로를 추월했다. 복음서에서 야고보는 주님을 믿지 않았지만, 그는 나중에 영적으로 높이 올라갔으며 마치 바울이 이방인 믿는 이들 중에서 높았던 것과 같이 예루살렘의 유대 믿는 이들 가운데서 비교적 높았다.
그러므로 교회가 회의를 열어 교통하고 일을 결정하는 것은 전체 투표와 같은 그런 것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사실 많은 때 대부분의 형제자매들의 느낌은 정확하지 않다. 여러분 열일곱 명의 집사 중에 틀림없이 인도자가 있을 것이며, 다섯 명의 장로 중에도 역시 한 명이 책임을 지고 성령의 권위를 만져서 마지막 결정을 내려야 한다. 만일 보통의 형제 혹은 자매가 말한 것이 많은 사람들과는 다르지만 책임 형제가 하나님의 뜻이라고 느꼈다면 교회는 반드시 그 형제 혹은 자매의 의견을 따라 결정해야 한다. 사도행전 15장에서는 이른 바 상의(相議)라는 것이 없으며 사람의 의견이 없고 영적이지 않은 사람에게 남겨 줄 여지가 없다. 그러므로 형제자매들은 겸손하게 주님 앞에 사는 것을 배워야 한다. 장로들은 반드시 영 안에서 밝아야 한다. 이 점에 있어서 앞선 형제들의 책임은 매우 크다. 만일 당신이 교만하고 스스로 권위라고 여기며 영적으로 잘 배우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일은 당신의 손에서 손상을 받게 될 것이다. 이 일에 있어서 여러분 책임 형제들은 배움이 있어야 한다. 책임 형제들은 한 면으로 하나님 앞에서 다루심을 받고 많은 배움이 있어야 하며 다른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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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으로 실행에 있어서 사도행전 15장의 본을 따라 형제자매들의 말을 듣고, 성령의 권위를 만지며 하나님 앞에서 일을 결정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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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N. 제3집 제6(52)권 주님의 사역자의 성격 제10장 그 밖의 몇 가지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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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장
그 밖의 몇 가지 일

 

 

 

 


여기서 우리는 그 밖의 몇 가지 일을 살펴보아야 한다. 첫째로는 진리에 대하여 절대성을 유지하는 문제다. 둘째로는 몸의 건강을 돌보는 문제이다. 셋째로는 생활 습관에 관한 문제며, 넷째로는 독신과 결혼 등에 관한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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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일을 하는 사람은 모두 항상 진리의 절대성을 유지해야 한다. 이것은 사람이 자신에서 구원받는 것을 요구한다. 그래야만이 진리에 절대적일 수 있다. 그러나 많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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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자매들은 진리에 대하여 절대적이지 못하며, 사람이나 일의 영향을 받고 또한 감정의 영향을 받는다. 진리에 절대적이지 못한 사람은 일에 있어서 하나님의 진리를 희생시키면서 사람을 위하고 자신을 위할 수 있고, 하나님의 진리를 희생시키면서 자기 자신의 갈망을 위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섬기는 데 있어서의 기본적인 요구는, 진리는 절대적인 것으로서 결코 희생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 자신은 희생할 수 있으나 진리는 결코 희생시킬 수 없으며, 우리의 감정은 희생시킬 수 있지만 진리는 희생시킬 수 없다. 친구들 사이 혹은 잘 아는 사람들 가운데서 문제가 발생하는 주의 일꾼들이 많다. 또한 많은 책임 형제들이 그들의 가정에서 곤란을 겪는다. 그들은 가정이나 친구 혹은 친속들로 인하여 진리에 영향을 끼친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람들을 쓰실 수 없다. 진리는 절대적인 것이기 때문에, 나의 형제이든 나의 친척이든 나와 친밀한 관계가 있는 사람이든 그 누구를 막론하고 결코 진리에 영향을 끼칠 수 없다. 한 가지 예를 들어 보자. 어느 사역자의 아들이 침례받을 의사를 표했다고 하자. 만일 이 사역자가 이 일을 진리에 관계된 일로 보고 참으로 진리를 고수(固守)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그의 아들이 침례받는 일을 책임 형제의 손에 맡겨 자신의 아들이 침례받기에 합당한가의 여부를 결정하도록 그에게 일임할 것이다. 그러나 어려움은, 그 사역하는 형제가 그의 아들이 그렇게 나쁘지 않으며 항상 침례받을 수 있는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데 있다. 이것은 그가 진리에 대해 절대적이지 않음을 입증한다. 그는 부자(父子)관계를 이 진리 안으로 가져옴으로 진리에 절대적이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가 진리에 대하여 절대적이라면, 교회 안의 많은 일은 개인적인 관계를 따를 것이 아니라 진리를 따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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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예를 들어 보자. 가령, 어느 지방에서 교리상의 분쟁이 일어났는데 한 무리의 성도들은 그들과 친숙하게 왕래하던 몇몇의 형제를 좇아 나갔고, 다른 한 무리의 성도들은 그들과 친분이 두터운 형제들의 편에 서서 그들을 좇아 나갔다고 하자. 그렇다면 이것은 그들 어느 쪽도 진리에 전적으로 절대적이지 못한 것이며, 그들이 나간 것은 진리에 근거한 것이기보다는 그들의 사적인 감정에 근거한 것이다. 이것은 그들이 입을 다물고 진리를 제시하지 않았다는 말이 아니라 그들이 진리에 대하여 절대적이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들 중 많은 사람이 진리를 돌아보기는 했지만 진리에 대하여 절대적이지는 못했다. 진리에 대하여 절대적이면 영적인 일에 있어서 사적인 감정의 영향을 조금도 받지 않는다. 자신의 친형제나 친자매 역시 진리에 영향을 미칠 수 없다. 영적인 일에서 인간관계를 개입시키는 사람은 진리에 절대적일 수 없다. 인간관계가 영적인 일에 개입되면 그로 인해 하나님의 말씀이나 명령이 감소된다. 이것이 바로 진리에 대하여 절대적이지 않은 것이다.
하나님의 종들은 하나님께서 성경에 규정하시고 명령하신 많은 것들을 널리 전파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들이 우리의 부족함과 우리의 무능함을 낱낱이 드러내는 것을 싫어한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의 종 자신이 할 수 없고 지킬 수 없다고 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 않는다면, 그는 하나님의 종이 될 수 없다. 왜 그런가? 진리는 절대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의 표준을 우리의 표준과 조화(調和)시키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낮출 수는 없다. 사람은 결코 사람이 할 수 없다는 이유로 하나님의 말씀을 변개시킬 수 없다. 이것이 진리의 절대성이다. 당신은 당신 자신과 개인적인 감정을 초월하고, 당신의 인간관계를 초월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종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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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소이다. 하나님의 표준을 아내나 남편이나 자녀들에게 적용시킬 때 당신은 결코 완화시켜 적용하려 하고 다른 형제자매들에게만 그 표준을 지키라고 해서는 안 된다.
진리는 절대적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분의 진리의 절대성을 유지할 것을 요구하신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렇게 절대적인 것이므로 그가 누구이든지 상관하지 않고 진리의 절대성을 지켜서 적용해야 한다. 그가 나와 특별한 관계가 있다고 해서 진리의 표준을 낮추어서 적용해서는 안 된다. 만일 당신이 어떤 특별한 관계를 고려하여 그에게 진리를 적용시킨다면, 당신은 하나님의 진리를 낮추게 된다. 이것은 당신이 말한 것이 모두 진리가 아니라는 말이 아니라 당신이 진리에 대해 절대적이지 못하다는 말이다. 우리는 진리의 절대성을 유지하기를 배워야 한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우리의 친척이라고 해서 진리의 절대성에 영향을 줄 수 없다. 우리는 사람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따르는 것이고, 진리의 절대성을 유지하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에서 많은 어려운 문제가 발생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진리를 희생시키기 때문이다. 어느 지방 교회에는 이러한 분열이 있었다. 어떤 한 형제가, “나는 본래 당신들과 나뉠 뜻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어제 저녁의 일을 당신들이 내게 알리지 않았으므로 오늘 나는 당신들과 함께 있을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진리는 절대적인 것이다. 만일 나누어져야 할 것이라면 어제 저녁에 연락이 왔더라도 나누어질 것이고, 만일 나누어질 것이 아니라면 어제 저녁에 연락이 오지 않았어도 나누어지지 않는다. 만일 그가 진리에 대해 절대적이라면, 그는 어제 저녁에 연락이 왔는가의 여부를 상관하지 않을 것이다. 만일 나누어지는 여부를 통보가 왔는가에 근거를 둔다면, 이것은 사람을 진리 위에 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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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지방의 한 형제는 따로 떡을 떼고 주님의 상을 세웠는데, 그 이유는 그가 집회 가운데 어떤 형제에게 질문을 하였는데 그가 답변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만일 당신이 떠나는 것이 옳다면, 당신은 좀더 일찍 나가서 따로 떡을 떼야 한다. 만약 떠나는 것이 옳지 않다면, 한 형제가 당신의 질문에 답변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떠날 수는 없다. 이것이 진리에 대하여 절대적인 것이다. 만일 따로 떡을 떼는 것이 진리라면, 당신을 머물게 하고 나 또한 따로 떡을 떼야 한다. 만일 따로 떡을 떼는 것이 진리가 아니라면, 당신이 나에게 잘못을 범했을지라도 나는 따로 떡을 떼서는 안 된다. 형제자매여, 당신은 보았는가? 이러한 자아의 뿌리가 뽑혀야만 비로소 하나님을 위해 봉사할 수 있다. 당신이 교만하고 이기적이어서 마땅히 다른 사람에게서 어떠한 대우를 받아야만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수 있다고 여긴다면, 당신 자신이 하나님의 진리보다도 더욱 크고 중요하다는 말이 된다.
이렇다면 당신은 하나님을 섬길 수 없다. 하나님을 섬기는 길에 있어서 우리는 절대적으로 우리 자신을 버려야 한다. 우리 자신이 기쁘거나 기쁘지 않거나, 우리 자신이 상처를 받거나 받지 않거나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사람들이 우리를 대하는 태도가 어떠할지라도 우리는 진리에 대하여 절대적이어야 하며, 심히 큰 고통을 느낄지라도 진리에 견고히 서야 한다. 사람들이 우리를 극히 나쁘게 대하고 경시하여도, 우리를 한 푼어치의 값어치도 없는 사람으로 볼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진리에 견고해야 한다. 당신은 하나님의 진리가 당신의 감정을 좇아가게 해서는 안 된다. 사람은 실제로 너무도 담대해져서 항상 하나님의 진리가 자신을 좇아가게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의 영광을 보아야 하며, 이 안에 자신의 감정을 끌어들여서는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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된다. 나 자신을 하나님의 진리와 비교할 때, ‘나’라는 존재는 진리보다 작은 것이 아니라 아예 ‘나’라는 존재는 없는 것이다. 당신이 자신을 진리 속에 조금만 개입시켜도 즉시 문제가 생기게 된다.
다시 하나의 예를 들어 보자. 한 형제가 밖에서 많은 말을 듣고 교회 안으로 들어온 뒤 매우 좋다고 표명했지만, 그는 하나님 앞에서 결코 어떤 진리도 만져 보지 못했으며 교회 가운데 몇몇 형제를 접촉했을 뿐이었다. 그는 행실에 있어서도 상당히 산만하였다. 교회 안의 한 형제가 그의 영적 상태를 알고서 그를 도와주고 싶은 마음에 그에게, “형제여, 당신의 요즈음의 행실은 너무나 풀어졌습니다.”라고 말했다. 그 형제는 많은 예를 들면서 진실로 사랑 안에서 참된 말을 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 말을 듣고서 밖으로 나가 많은 사람들이 이 모임을 반대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라며 그 또한 반대해야 한다고 비방했다. 그는 진리에 대하여 절대적이지 않았다. 만일 그가 진리에 대하여 절대적이라면, 어떤 사람이 그를 책망한다 하여도 그는 여전히 그러한 훈계를 받아들이며 교회 생활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진리에 대하여 절대적이지 못하였기 때문에 책망을 받자마자 태도가 바뀌었던 것이다.
진리에 대해 절대적이란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감정을 돌아보지 않는 것이며, 인간관계를 고려하지 않는 것이며,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는 것이다. 진리는 절대적인 것이다. 그 안에는 개인의 감정이나 인간적인 관계나 개인의 체험이나 당한 환경이 존재하지 않는다. 진리는 절대적이어서 옳으면 옳고 틀리면 틀린 것이다. 예전에 많은 사람을 이끌어 본 경험이 있는 한 형제가 교회의 간증의 길을 걸어가게 되었다. 이 길이 옳은 것은 이 형제가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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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문에 옳은 것이 아니다. 만일 이 길이 옳지 않은 길이라면 이 형제가 간다고 해도 길이 올바르게 되지는 않는다. 길의 옳고 틀림은 이 형제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 이 형제가 훗날 실족할지라도 그가 택한 이 길은 옳은 것이다. 왜 그런가? 진리는 절대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의 눈은 오직 이 형제만을 바라볼 뿐이어서 이 형제가 옳다고 생각되면 그가 가는 길 또한 옳은 것이며, 이 형제가 옳지 않다면 그가 택한 길 또한 잘못된 것으로 여긴다. 이렇다면 그들은 진리를 보는 것인가, 아니면 사람을 보는 것인가? 이것은 사람이 결코 무책임할 수 없으며 반드시 하나님의 간증이 사실이라는 것을 지켜야 함을 말하고 있다. 한 면에서 볼 때, 이 길이 옳은지 그른지의 판단 근거는 진리에 있는 것이지 결코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몇몇의 다른 그리스도인이 범죄한다고 해서 우리도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할 수 있는가? 다른 하나님의 자녀가 실족한다고 해서 우리도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할 수 있는가? 많은 하나님의 자녀가 좋지 않다고 해서 우리가 주님을 믿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는가? 분명하게 말하건대, 그렇지 않다. 형제자매여, 진리는 절대적인 것이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실족할지라도 주님을 믿어야 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여전히 믿어야 한다. 많은 하나님의 자녀가 범죄할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죄를 지어도 되며 그리스도인이 실족하여도 된다는 말이 아니라, 진리가 절대적인 것임을 말하는 것이다. 주님을 믿어야 한다면, 다른 사람이 모두 믿지 않을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믿어야 한다. 다른 그리스도인이 모두 실족할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문제는 다른 사람이 어떠한가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진리인가 아닌가에 달려 있다. 교회 안에 분쟁과 사역상의 어려움과 사역의 많은 다툼들에 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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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인간적인 관계나 개인적인 감정 혹은 개인적인 문제가 다 제거된다면, 이러한 것들은 멈추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진리에 대하여 절대적인 것은 작은 문제가 아니며 대충 넘어갈 문제가 아니다. 당신이 이 문제를 느슨하게 풀어 놓는다면, 무슨 일이나 다 느슨하게 할 것이다. 진리를 고수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완전히 내려놓아야 한다. 당신이 하나님 앞에서 이러한 마음과 습관이 없다면 조만간 당신은 문제에 봉착하게 될 것이다. 어떤 형제는, “나를 교회로 인도하신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나는 여기에서 많은 도움을 얻었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말이 결코 그가 진리에 대하여 절대적이며 문제가 없다는 뜻이 아니다. 그는 그 지방에 대해 애착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일단 그의 마음에 맞지 않는 일이 닥치면, 아마 그는 이곳이 옳지 않다고 느낄지도 모른다. 진리는 절대적이어서 옳으면 옳고 틀리면 틀린 것이다. 나에게 잘 대해 주면 옳고 나에게 잘 대해 주지 않으면 틀리다고 해서는 안 된다. 만약 그가 다른 사람이 그를 어떻게 대우해 주는가에 따라서 이곳 교회가 옳은지 그른지를 단정한다면, 그는 아마도 전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 아니겠는가! 그에게는 진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신만이 가장 중요하다. 그는 진리에 대하여 절대적이지 않다. 많은 때에 어려움은 여기에서 발생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일에 있어서나 자신을 한쪽에 제쳐 놓고 자신을 상관하지 않을 정도로 자신을 처리하기를 바라신다. 우리 개인의 감정과 선호, 우리가 상처를 받고 받지 않는 것 등은 문제되지 않는다. 우리 앞에 놓인 길은 결코 개인의 감정에 의해 영향을 받을 수 없다. 하나님께서 이것이 옳다고 말씀하시면 옳은 것이며 틀린 것이라고 말씀하시면 틀린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이 길이 옳다고 말씀하시면 다른 모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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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걸어가지 않는다 해도 나는 걸어가야 한다. 이 길이 아주 많은 사람들로 붐비기 때문에 가는 것이 아니요, 어떤 형제가 이 길을 걸어가기 때문에 걸어가는 것도 아니다. 만일 이 길이 옳은 길이라면, 어떤 형제가 가지 않는다 해도 나는 여전히 걸어가야 한다. 진리는 절대적인 것이어서 어떤 사람도 우리에게 영향을 미칠 수가 없다. 만일 당신이 사람의 영향을 받는다면, 당신은 사람을 진리보다 더 크게 보는 것이다.
심판은 우리 개인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에 근거한 것이다. 심판의 근거가 우리 개인으로 바뀐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길과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시키게 된다. 심판의 근거는 하나님의 말씀이며, 진리이다. 사람이 당신에게 잘 대해 준다고 해서 이렇게 하고 잘못 대해 준다고 해서 저렇게 해서는 안 된다. 어떤 일에 대하여 우리는 이것이 하나님의 진리인지 아닌지를 보아야 하며, 우리 개인의 감정이 어떤지를 보아서는 안 된다. 개인적인 일이나 감정이 사역 안에 개입되어서는 안 된다. 만일 진리가 우리에게 교제를 끊어야 한다고 말한다면, 우리에게 좋은 친구일지라도 교제를 끊어야 한다. 비록 함께 음식을 먹고 생활하는 사이라 할지라도 진리가 절대적이어서 교제를 끊어야 한다고 하면, 여기에 사람의 사사로운 정이 개입되어서는 안 된다. 만일 진리가 우리에게 교제를 끊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면, 우리는 비록 매일 다투고 마찰하는 사이일지라도 교제를 단절해서는 안 된다. 만일 우리의 인간적인 관계로만 교제한다면, 우리는 근본적으로 진리가 무엇인지를 모르는 것이며, 우리 앞에 놓인 사역의 길을 잘 갈 수 없다.
형제자매여, 이것은 기본적인 문제이다. 당신 앞에 놓인 사역의 길은 당신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다루심을 받은 것과 큰 관계가 있다. 만일 당신이 자신을 아주 크고 아주 중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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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로 여긴다면, 진리는 당신 때문에 손실을 입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진리를 유지하고자 한다면, 당신은 자신을 비우고 내려놓아야 한다. 모든 사람은 저마다의 기질을 가지고 있으며 저마다의 느낌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결코 자신의 기질이나 감정에 의지하여 하나님의 진리에 영향을 미칠 수 없다. 어떤 사역자도 하나님의 진리를 희생시킬 수 없고, 자신의 감정의 편안함을 위하여 진리를 왜곡시킬 수 없다. 만일 당신이 하나님의 진리를 그렇게 낮게 본다면, 당신은 하나님 앞에서 영적인 길을 갈 수 없다. 세상 법정에서도 법관의 재판은 법률에 대하여 절대적이다. 죄가 있으면 있는 것이고 없으면 없는 것이다. 누가 내 형제이기 때문에, 혹은 내 친구이기 때문에 범한 죄를 없이할 수 없다. 만일 사적인 감정을 법정 판결에 적용시킨다면, 그것은 참으로 큰 문제다. 법률은 절대적이어서 개인의 감정이 결코 그 안에 개입될 수 없다. 판사의 원수가 재판을 받고 있다 하더라도, 법으로 무죄이면 판사는 무죄 선고를 해야지 결코 사적인 감정으로 유죄 판결을 내릴 수는 없다. 판사는 법률을 지켜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섬긴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를 견지해야 한다. 개인의 감정은 결코 진리 안에 개입될 수 없다. 우리는 이 일을 명심해야 하며 모든 사람의 감정은 진리 속에서 배제되어야 한다. 우리는 모두 처리받아야 하며 주님께 이렇게 말해야 한다. “주여,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당신의 진리만이 절대적인 것입니다.” 이렇게 된다면, 사역에 있어서의 어떤 분쟁이나 어려움도 없게 된다. 함께 사역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진리의 절대성을 유지할 때, 사역자들 사이에 서로 말하기가 쉬워지고 함께 일을 하기도 쉬워지는 장점이 있다. 만일 어떤 일을 이렇게 처리해야 한다면 그대로 실행하면 되고, 인도하는 형제의 심중이 어떨 것인지 고려할 필요가 없다. 만일 우리 모두가 진리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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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성을 본다면, 오직 주의할 한 가지 일은 이것이 하나님의 뜻인가 아닌가 또 하나님께서 이렇게 규정하셨는가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규정하신 것이고 하나님의 뜻이라면 꺼릴 필요가 없다. 만일 우리가 진리의 절대성을 보지 못한다면, 우리의 길은 그리 좋지 못할 것이다. 어떤 일이 발생했을 때 만일 우리가 거기서, ‘왕 형제는 어떻게 생각할까, 주 형제는 어떻게 생각할까, 또 유 형제는 어떻게 생각할까? 그들 세 사람은 서로 다른 기질을 가지고 있는데 어떻게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가?’를 곰곰이 생각한다면, 그것은 크게 잘못된 것이며 진리는 우리 때문에 큰 손실을 입게 된다. 만일 그렇게 한다면, 다른 사람의 비난을 두려워하여 감히 할 말을 하지 못하고 많은 일을 규정할 수도 없게 된다. 이렇게 한다면, 우리 가운데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만일 한 단체 안에 하나님의 진리만이 있고 사람의 수단이 없다면, 그 단체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단체이다. 만일 한 단체가 수단과 수완을 쓰지 않고 사람의 방법으로 타협하여 조화를 이루려고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바라보며 어떤 일을 행한다면, 그 단체는 실로 축복을 받은 단체이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진리의 절대성을 지키며 사역의 길을 걸어갈 때에는 마땅히 동역자들 사이에 해야 할 말을 할 수 있고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할 수 있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거리낌이 있게 되고 수단을 쓰게 되며 배반이 있게 된다. 그러면 그것은 교회가 아니다.
이것은 아주 큰 문제이고 상당히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러한 일들을 하나님 앞에서 잘 처리해야 한다. 개인적인 느낌이나 감정이 결코 사역 안으로 들어와서는 안 된다. 당신 개인의 감정은 다른 사람이 진리를 받아들이는 데에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에 절대로 사역 안으로 가져와서는 안 된다. 오늘 당신이 손님을 초대하였는데 당신의 감정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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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하여 그가 진리를 받아들이는 데에 영향을 주었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진리는 절대적인 것이다. 당신이 진리를 돕고자 한다면, 이 마음은 아주 훌륭한 것이다. 그러나 진리는 사람의 손으로 붙들 필요가 없는 것임을 우리는 안다. 왜냐하면 진리는 그 자체가 지위와 권위와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진리가 거절당할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진리를 존중하기를 배워야 하며, 진리의 길에서 하나님의 진리를 조금이라도 낮추지 않고 이 길을 걸어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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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일을 하는 사람이 주의해야 할 또 다른 한 가지는 자신의 몸을 돌보는 일이다.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바울은 매우 큰 은사를 받은 형제였으며 항상 기도로 다른 사람의 병을 치료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가 치료할 수 없는 병을 가진 세 사람을 말하고 있는데 첫 번째 사람은 드로비모이고, 또 한 사람은 디모데이며, 세 번째 사람은 그 자신이다. 드로비모가 병이 났을 때 바울은 기도나 은사로 그를 치료하지 않았다. 바울은 도리어, “드로비모는 병듦으로 밀레도에 두었노니”(딤후 4:20)라고 말하였다. 그는 디모데에게, “이제부터는 물만 마시지 말고 네 비위와 자주 나는 병을 인하여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딤전 5:23)고 말하였다. 바울은 은사와 기도로 하나님께 간구하여 그를 치료한 것이 아니다. 바울은 다른 사람의 병은 모두 고쳤는데 왜 디모데는 치료할 수 없었는가? 디모데는 바울의 사역을 이어받았으며 사역에서 크게 쓰임받았다. 그러나 바울은 디모데의 병을 치료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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않았다. 이 일은 하나님의 손에 달린 것이었지 바울의 손에 있지 않았다. 바울은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이제부터는 물만 마시지 말고 …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딤전 5:23). 바꾸어 말하면, 디모데는 스스로 자기 자신을 돌보아야 했다. 그는 자기에게 도움이 되는 것을 먹어야 했고, 유익이 없는 것은 먹지 말아야 했으며, 위에 심한 고통을 주는 것은 먹지 말고 위의 고통을 줄일 수 있는 것을 먹어야 했다. 이것은 바울이 디모데에게 한 말이다. 바울은 자신에 대해서도 스스로 말하고 있다. 그는 육체에 가시가 있어 일찍이 이 일로 세 번 주님께 간구한 적이 있다. 그러나 주님은 그를 치료하지 않으시고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고후 12:9)라고 말씀하셨다. 드로비모의 병과 디모데의 병은 그대로 있었으며 바울 자신도 자기 몸에 가시가 여전히 있었지만 그는 자기의 병을 치료하지 않았다. 바울의 몸에 물론 암초 같은 가시가 있었지만 그 배는 여전히 항해해 나아갔다. 암초가 비록 제거되지 않고 병이 여전히 그 안에 있었지만, 하나님은 물을 불어나게 하셔서 배가 암초 위를 항해하여 지나가게 하셨으며 암초는 더 이상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이것이 바로 바울 자신이다.
형제자매여!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훈련을 받아 유용하게 쓰이려면 10년이나 20년은 필요하다. 참되게 이 길을 잘 가고 하나님 앞에 매우 노련한 자가 되고자 한다면 당신에게 10년이나 20년이 필요하다. 그러나 자기의 건강을 돌볼 줄 모르는 사람은 때가 되기도 전에 세상을 떠날지 모른다. 이것은 정말로 애석한 일이다. 어떤 사람이 진정으로 주님의 사역의 길을 걸어가고자 한다면, 아마도 하나님 앞에서 20년이나 30년이란 세월이 지나야 이 길을 진실로 만질 수 있고, 그에게 가장 유용한 때가 될 것이다.
교회 안에는 아이들과 청년들만 있어서는 안 되며 아비들도 있어야 한다. 이러한 까닭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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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섬기기를 배우는 사람들은 언제나 이러한 점을 생각해야 한다. 형제나 자매는 상당한 시일 동안 노력해야 하나님께 유용한 그릇이 될 수 있는데, 만일 나이가 들기도 전에 죽어 버린다면, 그것은 얼마나 애석한 일인가! 많은 사람들이 사역의 노정에서 반쯤 가다 망가지고 쓰러지게 되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것은 예레미야가 도공(陶工)의 손에서 부서진다고 말한 것처럼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도자기를 만들 때 도공이 만든 도자기라서 다 흠이 없이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그래서 도공이 만들어 낸 질그릇 중에 어떤 것은 불을 통과하기도 전에 깨뜨려지는데 이것은 하나의 손실이다. 시련이 닥쳤을 때 좌절하고 시험이 임할 때 쓰러진다면 교회는 많은 사람들을 잃게 된다. 우리가 만일 긍휼을 입는다면 무너지지 않고 중도에 쓰러지지 않을 것이다. 주님은 우리가 십자가를 거치게 하심으로 우리를 더 유용한 그릇으로 만들고자 하실 것이다. 주님이 우리에게 첫 번째 연단을 거치게 하실 때 많은 시간들이 요구된다. 어떤 시련은 일 년을 통과해야 하고 또 어떤 시련은 몇 년이 지나야 비로소 공과를 배울 수 있다.
하나님의 자녀가 일생 동안 거칠 수 있는 시련은 그렇게 많지 않다. 우리 가운데에는 시련을 통과하는 사람이 별로 많지 않다. 많은 사람들이 시련을 받자마자 부서져 버린다. 이렇게 되면 그에게 닥친 시련들은 그에게 효과를 줄 수가 없게 되니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그것은 정말 큰 손실이다. 1년이 지나고 또 1년이 지나고 5년이나 10년을 보내면서 이러한 시련들을 통과하여 하나님의 사역의 길로 계속 인도되는 하나님의 자녀는 얼마나 되는가? 많지 않다. 이 문제를 간단하다고 생각지 말라. 노정에서 반쯤 달리다가 쓰러지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60만 명 중 오직 두 사람만이 살아서 가나안에 들어갔다. 또한 두 사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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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서 가나안으로 들어갔다. 너무나 소수의 사람만이 쓰러지지 않고 사역의 길로 인도될 수 있다. 시련이 닥치면 대부분 죽어 버리니 얼마나 가련한가! 시련이 닥치면 대부분이 세상을 떠나 버리다니! 만일 주님께서 우리에게 조금 일찍 세상을 떠나라고 하신다면, 우리에게는 할 말이 없다. 만일 우리가 자신의 건강을 잃어버린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사역에 큰 손실이 있다.
교회가 풍성해지려면 우리 중에 70세나 80세 혹은 90세의 형제가 있어야 한다. 만일 주님께서 한두 사람을 예외적으로 좀더 일찍 그분 곁으로 오도록 정하셨다면, 우리는 할 말이 없다. 그러나 우리가 사역에 있어서 유용하게 되려면 좀더 노력을 기울여 자기 몸을 돌보아야 하며, 결코 이 일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사역에 있어서 큰 문제점은, 주님께 훈련을 거의 다 받은 후에 오히려 건강 때문에 세상을 떠나게 된다는 것이다. 훈련을 거의 다 통과한 사람이 쓰러진다는 것은 정말 슬픈 일이다. 만일 주님의 사역자가 이렇다면 사역을 할 길이 없다. 사역에 이르기도 전에 몸의 건강이 이미 나빠졌다면, 사역에 있어 유용하게 쓰이기 시작할 때에 오히려 세상을 떠나야 한다면,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그러므로 몸에 대해 소홀히 해도 괜찮다고 생각지 말라. 우리에게는 고난 받을 마음가짐이 있어야 하며, 우리 몸을 쳐서 자신에게 복종케 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또한 자신의 건강을 돌보아야 한다. 몸을 느슨하게 풀어 놓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몸을 돌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몸에 유익한 많은 음식을 먹기를 배워야 하며, 자신의 건강을 돌볼 방법을 생각하기를 배워야 한다. 많은 경우 주님께서 명령하시고 사역에 있어 필요할 때에 목숨 걸고 달려 나가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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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알고 있는 방법으로 자신의 몸을 돌보기를 배워야 한다. 한 사람을 잃는 것은 주님 편에서 10년이나 20년의 시간을 잃어버리는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명심해야 한다. 일생 중에 10년이나 20년이 여러 번 있는 것이 아니다. 많은 사람이 주님을 섬기기 시작할 때에는 비록 은사적인 면에서는 유용함이 좀 있을지 모르지만 실제적으로 사역적인 면에서 유용하기란 실로 어렵다. 사역 방면에서 유용해지는 것은 10년이나 20년이 지난 후의 일이다. 아마도 10년 후에야 진정으로 가치 있게 되고 유용하게 될 것이다. 사실, 유용한 그릇으로 쓰이는 것은 10년이나 20년 후의 일이다. 이것은 또한 딴 길로 가지 않고 길을 똑바로 가는 사람에게 해당되는 말이다. 길을 똑바로 가지 않는다면, 10년이나 20년이 지나도 할 수가 없다. 20년 동안 한 사람을 키운다는 것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20년 동안 그를 깎고 다듬으셔야 비로소 그가 유용하게 쓰일 수 있다. 단지 1년이나 2년이 아니라 아주 오랜 시간을 통과해야 한다. 20년의 고통을 이기며, 20년의 십자가를 지고, 20년의 처리받음과 매맞음을 통과하며 하나님의 손 안에서 다듬어져야 비로소 진실로 유용한 그릇이 될 수 있다. 이것은 정말로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만일 건강에 대해 조심하지 않으면 진실로 유용하게 쓰여야 할 때 정작 쓸 수 없게 된다. 이것은 너무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어떤 사람이 나이 드신 한 형제님에게 다음과 같이 질문했다. “당신은 일생 중에 가장 유용하게 쓰임받은 때가 언제였다고 회상하십니까?” 그 형제님은 잠시 생각하고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70세에서 80세 때이지.” 정말로 영적인 유용성은 나이가 들면 들수록 더 많아지게 된다. 당신이 하나님을 섬기는 길에 있어서 오래 되면 오래 될수록 더 유용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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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역의 길에서 어떤 사람은 끝나고, 어떤 사람은 쓰러지고, 어떤 사람은 부서졌으며, 어떤 사람은 유익성이 극히 제한적이다. 소수의 열매 있는 사람들은 20년이나 30년이 지난 후에 유용하게 쓰이게 되었지만 그때에 또 세상을 떠나버린다. 유용하게 쓰임받게 될 때에 죽는 것은 얼마나 애석한 일인지!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배움의 기간이 길면 길수록 더 유용하다. 만일 이렇게 유용하게 된 사람이 세상을 떠난다면, 그것은 얼마나 애석한 일인가! 그러므로 몸의 건강에 대해 우리는 마땅히 예방할 것을 예방하고 주의할 것을 주의해야 한다. 우리는 고난 받을 마음가짐이 꼭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며 그렇게 무장되어야 한다. 그래서 많은 때에 가장 큰 어려움이 닥쳐도 우리는 그 가운데에서 전진하며 사역을 수행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가능한 환경에 있을 때에 우리는 또한 자신의 몸을 돌보기를 배워야 하며, 이 일에 결코 느슨하거나 소홀히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사역자는 음식을 먹을 때에 맛이 좋은가의 여부를 주의할 것이 아니라 영양이 충분한지 어떤지를 주의해야 한다. 영양가에 따라 섭취량을 조절해야 한다. 휴식할 때는 반드시 쉬기를 배워야 한다. 만일 긴장할 때가 아주 많다면 어떻게 쉬어야 할지 몰라서 침대에 그냥 누워 있게 되는데 이것은 좋지 않다. 침대에 누워 있으면서 여전히 긴장하고 있다면 이러한 수면이 도움이 되겠는가? 전혀 도움이 안 된다. 때때로 우리는 거기서 쉬며 앉아 있어야 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심하게 긴장하면 쉴 수가 없기 때문에 앉아 있어도 휴식이 되지 않는다. 주의 일을 하는 사람은 긴장해야 할 때에는 긴장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때에 따라 불타오르는 것보다 더 심하게 긴장해야 한다. 그러나 몇 분 정도는 여유를 가지고 자기 자신의 긴장을 풀 줄도 알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일생이 긴장의 연속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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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어서 지탱해 나갈 수 없게 된다. 우리는 쉬는 것도 배워야 한다.
형제자매여, 좀 한가할 때에 당신은 긴장을 풀어 놓기도 해야 한다. 당신이 잠잘 때에는 손발을 편하게 해야 한다. 우리가 조여 맬 필요가 있을 때에는 가장 강한 사람보다도 더 조여 매어 우리 몸이 말을 듣게 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 일생이 온통 긴장의 연속일 수는 없다. 많은 때에 근육이나 신경을 풀어 놓아 휴식을 취하게 해야 한다. 많은 때에 기회를 찾아 휴식을 취해야만 균형 잡힌 생활을 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지나치게 많은 일을 하게 되어 극단에 치우치게 된다. 우리는 극단적으로 일을 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형제자매여, 당신은 육신의 몸에 있어서 하나님을 앙망하고, 천연적인 면에 있어서 휴식하기를 배워야 한다. 이것은 기본적인 공과이다. 우리는 어떻게 휴식할지를 배워야 한다. 당신이 긴장을 풀 수 있다면 쉽게 휴식을 취하고 잠을 자게 될 것이다. 어떤 사람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호흡의 횟수를 세는 것은 잠자는 데에 도움을 줄 수 있다. 잠잘 때의 호흡은 아주 깊다. 우리가 잠자는 것을 관리하기는 쉽지 않지만 호흡은 다스릴 수 있다. 우리는 호흡을 셀 수 있다. 이것은 빠른 호흡이 아니라 긴 호흡으로서 잠잘 때와 같이 그런 깊은 호흡을 먼저 해야 한다. 잠자는 것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호흡을 생각하는 것이며 호흡을 세는 것이다. 먼저, 잠잘 때와 같은 그런 긴 호흡을 하고 나면 잠이 든다. 많은 사람들은 이 방법으로 잠이 든다. 본래 잠잘 때의 호흡은 느리며 깊다. 당신이 먼저 느리고 깊게 호흡한 후에는 쉽게 잠이 든다. 호흡을 센다는 말은 숨을 이백 번이나 삼백 번 반드시 세고 나서야 잠을 잘 수 있다는 말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람이 잠을 잘 수 있도록 만드셨다는 것을 믿는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율을 또한 믿는다. 하나님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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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머리를 잠잘 수 있는 머리로 만드셨으므로 우리는 반드시 자야 한다. 당신이 거기에 누워서 당신의 온몸을 편안하게 풀어 놓고서 휴식을 취할 수 있는지를 시험해 보라. 만일 당신이 쉴 수 없다면, 당신은 긴장할 수밖에 없다. 밤낮으로 항상 긴장해 있다면 당신은 많은 일을 할 수가 없다. 비록 우리에게 병이 있다 해도 우리가 조금만 자기의 몸을 돌보기를 배운다면, 많은 번거로움을 제할 수 있다.
무엇을 먹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과식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그러나 편식을 하지 말고 각종 음식을 먹을 수 있기를 배워야 한다. 어떤 형제나 자매는 이것도 못 먹고 저것도 못 먹고 하여 먹지 못하는 것이 너무나 많다. 이러한 습관은 유익이 전혀 없다. 우리는 음식을 가리지 않고 먹기를 배워야 한다. 많은 것들이 우리에게 영양을 공급하는데 당신이 단지 몇 종류의 것만을 먹는다면, 그것은 아주 곤란하다. 그 당시에는 영양분의 결핍을 느낄 수 없을지 모르지만 30세나 40세가 되면 많은 영양의 결핍이 드러나게 되며, 이것은 신체의 건강에도 영향을 미쳐서 수명을 단축시킬 수도 있다. 우리의 수명은 먹는 것의 영향을 받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음식을 가리지 말고 골고루 먹기를 배워야 한다. 음식을 가리지 않고 먹는 것은 사역하러 나갔을 때 아주 큰 도움이 된다. 당신이 음식을 가려먹게 되면 사역하러 나갈 때 음식을 가지고 가면 먹을 수 있지만 가지고 가지 않으면 먹을 수가 없게 된다. 어떤 것은 너무 차서 못 먹고 또 어떤 것은 너무 뜨거워서 먹을 수가 없다면, 이것은 참으로 곤란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병이 있다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보통 상황에서 많은 종류의 음식 먹기를 배워야 한다. 주님께서는 “너희 앞에 차려 놓는 것을 먹고”(눅 10:8)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이 아주 좋은 원칙이다. 한번은 배 위에서 한 믿는 이가 다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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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는 이에게 물었다. “왜, 주님은 떡과 물고기를 가지고 이적을 행하셨습니까?” 그러자 그 믿는 이는, “그것은 바다 속의 풍성함과 육지 위의 풍성함을 더한 것입니다.”라고 답변했다. 이 답변은 아주 좋다. 하나님의 자녀는 바다 속의 풍성과 땅 위의 풍성을 다 먹을 수 있기를 배워야 한다. 우리가 먹는 것은 범위도 없어야 하며 종류도 다양해야 좋다. 형제자매여, 당신은 이 일이 중요치 않다고 생각지 말라. 만일 당신이 이 일에 있어서 몸을 제한하지 않고 처리하지 않는다면, 당신의 몸은 손실을 입게 된다. 당신은 자신의 몸이 말을 듣도록 복종시켜야 한다. 비록 처음에는 어려움이 있고 어떤 것을 먹기 싫어하겠지만 당신은 그것을 처리해야 하며 반드시 먹기를 배워야 한다. 한편으로 당신은 고난 받을 마음가짐을 가져야 하지만, 또 다른 면에 있어서 자기의 몸을 돌보기를 배워야 한다. 우리는 고난을 받을 수 있으며 그 고난을 받을 때에 우리의 온 존재는 필사적으로 그것을 헤쳐 나갈 수 있어야 한다. 어떤 형제는 이러한 고통 저러한 고통을 받을 수 없어 두려워한다. 이러한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별로 쓸모가 없다. 그러나 한 면에서 우리는 자기 몸을 돌보지 않는 형제에게 어떤 동정도 표할 수 없다. 형제자매여, 위생적이 되는 것이 쉽지 않다. 그러므로 위생을 말하는 것이 간단한 일이라고 여기지 말라. 자신의 몸을 돌보기 위해서는 스스로 자기 자신을 관리하기를 배워야 한다. 자기 자신을 제한할 수 있어야만 위생적일 수 있다. 우리는 유익한 것을 먹기를 배워야 한다. 어떤 것을 먹는 것은 당신의 입맛에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당신 몸의 필요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 자기 몸을 돌보기를 배우려면, 우리는 먹는 것을 잘 이용해야 한다. 우리는 결코 우리의 몸이 쉽게 편식주의에 빠지게 해서는 안 된다. 주님이 당신을 훈련시키시는 데에 여러 해를 소비하셨으므로 이 몸을 제멋대로 다루어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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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코 안 된다. 질병을 예방하는 많은 위생적인 일들에 대해서도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주님께서 신체에 유익한 것들을 우리 주위 환경에 잘 안배해 놓으셨기 때문에 우리는 힘을 다해서 위생적일 필요가 있다. 제멋대로 모험을 하는 것은 좋지 않다. 디모데는 당시에 유익함이 있었기 때문에 포도주를 조금씩 마셨다. 해로운 것은 마셔서는 안 되었으며 유익한 것은 마셔야만 했다. 이것은 원칙의 문제이다. 한 면으로 우리는 자신을 사랑하지 않고 죽기까지 충성하기를 배워야 한다. 그러나 또 한 면으로 주님께서 명령하지 않은 때에는 언제나 자신의 몸을 지켜야 한다. 당신이 어느 지방에 갔을 때에 힘을 다하여 자신의 위생 관리를 돌볼 수는 있지만 그러나 결코 그곳의 형제자매들에게 무거운 부담을 주어서는 안 된다. 위생 조건이 갖추어지지 않은 환경에서도 당신은 하나님을 신뢰하기를 배워야 한다. 그러나 환경 중에 좋은 안배가 있을 때에는 가능한 한 위생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당신의 몸이 말할 수 없는 손실을 입지 않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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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사역자가 주의해야 할 또 한 가지 방면은 생활 습관에 있어서 자기 견해를 고집하지 않기를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종은 스스로 주관적인 표준을 규정할 수 없으며 자기 자신의 견해를 견지해 나가서도 안 되며 자신의 습관대로 일을 처리해서도 안 된다. 만일 우리가 주님을 잘 섬기고자 한다면, 성경의 교훈에 부합해야 하며 사람을 실족시키지 않는 원칙 아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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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고전 9:19-22). 바울은 복음을 위하여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이 될 수 있었다. 이것은 주님을 섬기는 사람이 마땅히 가져야 할 성품이다.
바울은 또한 빌립보서 4장에서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12절)고 말했다. 사람은 편향적이기 쉽고 극단에 빠지기가 쉽다.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 반드시 풍부해야 하고 배불러야만 된다고 생각한다. 이와는 정반대로 또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비천해야 하고 배고프며 궁핍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풍부에 처하여도 일을 할 수 있으며, 비천에 처하여도 할 수 있는 비결을 배웠다. 풍부이든 결핍이든 어떤 환경에서도 나는 일을 할 수 있다. 배부르거나 굶주릴 때에도 나는 일을 할 수 있다.” 바울은 이러한 모든 일에 있어서 비결을 배웠다. 그는 이어서,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13절)고 말한다. 바울은 생활 습관의 외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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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에 있어서 모든 것을 다 수용할 수 있었다.
애석하게도, 많은 형제자매들이 고집이 세며 일상생활에서 그들의 습관이 너무도 견고하여 깨뜨릴 수 없으며 조금도 고칠 수가 없다. 어떤 사람은 매일 매일 물을 데워서 세수하지 않으면 안 되고, 어떤 사람은 매일 매일 면도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만일 그들의 생활 방식을 따를 수 없는 환경에 부딪히면 그들은 참을 수 없다. 이러한 것들은 비록 아주 작은 일들이지만 오히려 주님의 일을 하는 데 있어서는 방해가 된다. 이러한 상태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종이 될 수 없다. 주님의 일을 하는 사람은 결코 한쪽으로 치우쳐서는 안 된다. 더운 물이 있어도 세수를 할 수 있으며 또한 더운 물이 없어도 세수를 할 수 있어야 한다. 매일 매일 면도를 해도 괜찮고 며칠씩 면도를 하지 않아도 견딜 수 있어야 한다. 매일 매일 셔츠를 갈아 입어도 괜찮고 며칠 동안 갈아입을 수 없다 하더라도 견딜 수 있어야 한다. 부드러운 침대에서도 잘 수 있어야 하고 딱딱한 마룻바닥에서도 잘 수 있어야 한다. 각종 생활 환경 속에서 자연스럽게 그 환경에 적응할 수 있을 때라야 비로소 주의 일을 할 수 있다.
생활 습관뿐만 아니라 개성이나 연령이 주의 일을 하는 사람의 제한이 되어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어떤 지방의 사람은 상당히 열정적이다. 또 어떤 지방의 사람들은 상당히 냉정하다. 하나님의 종은 이 두 종류의 서로 다른 사람들 속에서도 마땅히 똑같이 사역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만일 그 자신의 성격이 냉정하여 그가 냉정한 사람 속에서는 사역을 잘할 수 있는데 열렬한 사람들을 만났을 때에 사역을 할 수 없다면, 그것은 옳지 않다. 어떠한 사람은 열렬한 사람에 대해서는 사역을 잘할 수 있는데 냉정한 사람에게는 사역을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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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은 정중한 사람에게는 사역을 잘하는 데 경솔한 사람을 만나면 사역을 할 수가 없다. 그들은 이러한 것들에 의해 하나님의 사역을 제한받는다. 또 만일 어떤 형제가 나이 많은 형제들 사이에서는 말을 아주 잘할 수 있는데 어린아이나 청년들 속에서는 말을 할 수 없다면, 이러한 편향적인 성격 역시 하나님의 사역을 제한시킨다. 우리 주님은 연로한 사람들을 받아들이셨으며 또한 어린아이에게도 축복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주님과 똑같이 나이 든 사람을 받아들일 수 있고 아이들에게도 축복할 수 있기를 요구하신다. 귀용 여사가 말한 것처럼, 사람이 완전히 하나님과 연합되었을 때라야 비로소 연장자의 모사(謀士)가 될 수 있으며 또한 어린아이의 친구가 될 수 있다. 이것이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이다.
형제자매여, 이것은 우리 자아가 처리받아야 할 문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떠한 환경에 처하게 하시더라도, 그곳에 적응할 수 있을 때까지 우리의 자아는 깎여야 한다. 이렇게 될 때 우리는 자연히 고집 세지 않고 편협적이지 않게 된다.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 다룸을 받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의 사람이 될 수 있었다. 우리의 생활 습관이나 개성에 있어서 자기주장을 내세우지 않고 극단에 빠지지 않도록 하나님 앞에서 잘 배우고 다룸받음으로써 주님의 사역이 방해받지 않게 되기를 원한다.

4

주님의 일을 하는 사람은 독신과 결혼 등에 대하여 정확한 인식이 있어야 되며 또한 이에 대한 적당한 해답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말하기를 꺼려한다. 그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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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 문제가 주님의 일꾼에게 상당히 중요하다는 것을 느낀다. 그러므로 성경의 교훈에 비추어서 이 문제를 살펴보기로 하자. 바울은 독신에 대한 문제를 고린도전서 7장에서 자세히 말하고 있다. “처녀에 대하여는 내가 주께 받은 계명이 없으되 주의 자비하심을 받아서 충성된 자가 되어 의견을 고하노니 내 생각에는 이것이 좋으니 곧 임박한 환난을 인하여 사람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네가 아내에게 매였느냐 놓이기를 구하지 말며 아내에게서 놓였느냐 아내를 구하지 말라 그러나 장가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요 처녀가 시집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로되 이런 이들은 육신에 고난이 있으리니 나는 너희를 아끼노라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이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같이 하며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같이 하라 이 세상의 형적은 지나감이니라 너희가 염려 없기를 원하노라 장가가지 않은 자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주를 기쁘시게 할까 하되 장가간 자는 세상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아내를 기쁘게 할꼬 하여 마음이 나누이며 시집가지 않은 자와 처녀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몸과 영을 다 거룩하게 하려 하되 시집간 자는 세상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남편을 기쁘게 할꼬 하느니라 내가 이것을 말함은 너희의 유익을 위함이요 너희에게 올무를 놓으려 함이 아니니 오직 너희로 하여금 이치에 합하게 하여 분요함이 없이 주를 섬기게 하려 함이라”(고전 7:25-35). 여기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독신의 좋은 점이 주님을 섬기는 데 있어서 특별히 부지런할 수 있고 사역에 있어서 마음이 나뉘지 않고 전일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가정이 있는 사람이 따라올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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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말씀은 모든 사람이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36절부터 주의하여 읽어 보자. “누가 자기의 처녀 딸에 대한 일이 이치에 합당치 못한 줄로 생각할 때에 혼기도 지나고 그같이 할 필요가 있거든 마음대로 하라 이것은 죄 짓는 것이 아니니 혼인하게 하라 그러나 그 마음을 굳게 하고 또 부득이한 일도 없고 자기 뜻대로 할 권리가 있어서 그 처녀 딸을 머물러 두기로 마음에 작정하여도 잘하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처녀 딸을 시집보내는 자도 잘하거니와 시집보내지 아니하는 자가 더 잘하는 것이니라 아내가 그 남편의 살 동안에 매여 있다가 남편이 죽으면 자유하여 자기 뜻대로 시집갈 것이나 주 안에서만 할 것이니라 그러나 내 뜻에는 그냥 지내는 것이 더욱 복이 있으리로다 나도 또한 하나님의 영을 받은 줄로 생각하노라”(고전 7:36-40). 여기에서 말씀은 아주 분명하다. 만일 어떤 사람이 독신을 지키는 것이 이치에 맞지 않다고 여기고 혼기도 지나고 결혼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면 그는 자기 뜻에 따라 결혼할 수 있다. 독신을 지키는 것과 결혼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 규정해야 하는 것이지 다른 사람이 결정할 수 없는 것이다. 독신을 지키려고 한다면 자기의 마음속에 규정하는 것 외에도 ‘부득이한 일도 없고 자기 뜻대로 할 권리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문제는 자기의 마음이 어떻게 결정하는가에 달려 있다.
우리는 마태복음 19장 10절부터 12절까지의 말씀을 살펴보자. “제자들이 가로되 만일 사람이 아내에게 이같이 할진대 장가들지 않는 것이 좋삽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사람마다 이 말을 받지 못하고 오직 타고난 자라야 할지니라 어미의 태로부터 된 고자도 있고 사람이 만든 고자도 있고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도 있도다 이 말을 받을 만한 자는 받을지어다”. 11절의 마지막 한 구절과 12절의 마지막 한 구절을 연결하여 읽어 보자. “오직 타고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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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라야 할지니라 … 이 말을 받을 만한 자는 받을지어다”. 여기에서 우리는 타고날 때부터 은사로 받은 자만이 독신을 지킬 수 있다는 것을 분명히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만일 마음이 나뉘는 것을 면하고 충분한 시간을 들여 부지런히 주님을 섬길 수 있으려면 독신을 지키는 것이 가장 좋다. 주님의 제자들 중에 요한이 독신이었고 이후에 바울 또한 독신이었다. 그러나 결혼할 필요가 있을 때에는 결혼하는 것도 옳다. 결혼하는 것은 죄를 범하는 것이 아니다. 결혼과 독신의 차이는 죄의 문제가 아니라 시간과 부지런함과 마음의 나뉨의 문제이다.
결혼은 성결한 것이다. 사람의 몸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이며 사람의 신체의 모든 요구 또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이기 때문에 결혼은 성결한 것이다. 그러나 사람에게 결혼 이외의 다른 요구가 있는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죄이다. 그러면, 왜 결혼해야 하는가? 그것은 바로 결혼 이외의 관계를 면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결혼은 죄가 아니며 오히려 죄를 방지할 수 있다. 결혼은 타락이 아니라 도리어 타락을 방지할 수 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7장에서 결혼에 대해 아주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너희의 쓴 말에 대하여는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으나 음행의 연고로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 남편은 그 아내에게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그 남편에게 그렇게 할지라 아내가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이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하나니 서로 분방하지 말라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상 얼마 동안은 하되 다시 합하라 이는 너희의 절제 못함을 인하여 사탄으로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내가 이 말을 함은 권도요 명령은 아니라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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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원하노라 그러나 각각 하나님께 받은 자기의 은사가 있으니 하나는 이러하고 하나는 저러하니라 내가 혼인하지 아니한 자들과 및 과부들에게 이르노니 나와 같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만일 절제할 수 없거든 혼인하라 정욕이 불같이 타는 것보다 혼인하는 것이 나으니라”(고전 7:1-9). 여기에서 결혼의 하나의 목적은 음란을 방지하는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동시에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특별한 은사를 주셨다면 결혼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이러한 은사를 받지 못한 사람은 결혼하는 것이 좋으며 이로써 음란을 면할 수 있다.
우리는 독신의 문제를 그렇게 길게 끌 필요는 없다. 우리가 알다시피 바울은 독신이었다. 그러나 디모데에게 그는 말세 때에 미혹케 하는 영의 교훈이 나와서 사람들로 결혼을 금지케 할 것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마귀의 가르침이다(딤전 4:1-3). 그러므로 우리는 독신을 지키는 것이 옳은 것임을 믿지만 또 한 면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평형을 지켜야 하며 결혼이 성결치 못한 것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결혼은 성결한 것이며 하나님께서 창조 안에서 하신 안배이다. 우리는 결혼을 금지하는 것이 마귀의 가르침임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주님의 일을 하는 사람이 만일 이미 결혼했다면, 가정의 일을 잘 안배하여 마음을 적게 나뉘게 하면 할수록 좋다. 그렇게 할 때 주님의 일을 잘할 수 있게 된다. 또 한 가지 주의해야 할 점은 일과 가정의 한계를 분명히 해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당신의 가족 중에 누가 동역자라면 그것은 별개의 일이다. 그러나 만일 당신의 가족 중에 누가 동역자가 아니라면 결코 그들이 주님의 일을 만지게 해서는 안 된다. 주님의 일은 집안에 전해져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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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일꾼이 하는 일은 결코 가족에 좌우되어서는 안 된다. 어떤 형제는 어떤 지방에 사역하러 가게 된 것은 그의 아내가 승낙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것은 정말 이상한 것이다. 아내가 승낙했기 때문에 주의 일을 하러 가다니! 사실, 집안 식구 중 어느 누구도 그를 대신해 대답을 할 수 없으며 어떤 동역자도 그 사람을 대신해 대답할 수 없다. 가정의 관계는 주님의 일과 반드시 분명하게 분리되어야 한다. 주님의 일을 하는 사람은 형제자매의 영적인 문제를 자기 가족에게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된다. 집안 식구가 어떤 일을 알아야 한다면 다른 형제자매들도 똑같이 알아야만 한다. 주님의 일에서의 많은 문제들이 주님의 일꾼이 집안에서 자기 마음대로 말한 것 때문에 빚어진다.
우리가 좀더 첨가해서 주의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형제가 자매에 대해 혹은 자매가 형제에 대해 왕래할 때 정상적인 관계를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어떤 형제가 전적으로 자매들 가운데 일하기를 좋아하는 성격을 가졌다면, 이러한 형제에게는 사역을 하게 하지 말아야 한다. 만일 젊은 자매가 전적으로 형제들 사이에서 사역을 하기를 좋아한다면, 이러한 자매 역시 사역을 하게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이 원칙을 엄격히 지켜야만 한다. 일반적인 경우에 형제들은 항상 형제들에게 사역을 하고, 자매들은 항상 자매들에게 사역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으로 계실 때 우리에게 좋은 본을 남기신 것을 본다. 요한복음 3장과 4장의 한계는 매우 분명하게 구분되었다. 3장에서 주님은 밤에 니고데모를 맞이하셨고, 4장에서는 주님께서 낮에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셨다. 3장에서는 방 안에서 니고데모를 맞이하셨고, 4장에서는 공동 우물 곁에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셨다. 만약에 3장의 상황과 4장의 상황이 뒤바뀐다면, 그것은 완전히 부적합하게 될 것이다. 주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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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고데모에게 말한 상황과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한 상황은 현저하게 다르다. 이것은 우리에게 아주 좋은 본을 보여 준다.
이것은 우리가 형제와 자매 사이에는 왕래가 있어서는 안 되고 교통이 있어서도 안 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형제나 자매가 이성의 사람들 가운데 가기를 너무나 좋아하는 고질적인 습성이 있다면 그러한 사람은 금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물론 믿는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남녀의 구별이 없다. 하나님의 자녀 중 형제자매 사이에는 담장이 있을 수 없고 오히려 많은 좋은 교통이 있어야만 한다. 그러나 만일 어떤 형제가 전적으로 자매들과 말하기를 좋아하는 습성을 가졌거나 어떤 자매가 형제들과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는 습성을 가졌다면 그들의 습관은 신속히 처리될 필요가 있다. 형제자매가 왕래할 때에 자연스러울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자연스러움 속에는 지나치지 않도록 제한됨이 필요하다. 정상적인 교통의 한계를 넘어선 사람은 엄격하게 처리받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우리가 이러한 일들에 있어서 아름다운 간증을 나타낼 수 있게 하시기를 바란다.



W.N. 제3집 제6(52)권 주님의 사역자의 성격 제9장 금전에 대한 태도
Ezra Zion , 2013-04-05 , 조회 (84) , 추천 (0) , 반대 (0), 스크랩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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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장
금전에 대한 태도

 

 

 

 


주님의 일을 하는 사람과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은 금전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이것은 상당히 중요한 문제이다. 금전에 대한 관문을 통과하지 못하면 결코 주님의 일을 할 수 없다. 금전의 문제가 생긴 사람은 어떤 일도 할 수 없게 된다. 일꾼이 많은 금전을 만진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문제이다.
그리스도인이 금전에 대하여, 재물이 하나님과 대치 관계에 있다는 것을 기본적으로 보아야 한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재물의 유혹을 마땅히 거절해야 한다. 우리는 재물의 세력 하에 떨어져서는 절대로 안 된다. 재물의 세력에서 벗어나지 못한 일꾼은 형제자매들에게 재물의 세력에서 벗어나라고 결코 권할 수 없다. 이런 일은 절대 있을 수 없다. 만일 우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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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물의 지배를 받고 재물에 묶인 바 되었다면, 형제자매들을 재물의 지배와 묶임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일을 하는 사람은 게으름을 증오해야 하며 재물의 세력을 미워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일에서 유용할 수 없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금전을 두고 일어나는 문제가 큰 문제인 만큼, 우리는 여기서 이 문제를 잠시 언급하고자 한다.

1

먼저, 금전이 사역자의 길과 가르침과 어떠한 관계가 있는지를 살펴보기로 하자. 우리가 알 듯이 구약에도 발람이 있고, 신약에서도 여러 차례 발람의 길과 발람의 가르침을 다루고 있다. 베드로서와 유다서와 계시록에서도 발람에 관한 일이 언급되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얼마나 발람의 일을 주의하고 계신지를 우리에게 보여 준다. 발람은 이익을 위하여 달려간 선지자였다. 바꿔 말하면, 그가 선지자 직분을 팔았다는 것이다. 발람은 결코 자기 위치를 모르지 않았으며 하나님의 뜻을 모르는 바도 아니었다. 모압 왕 발락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저주하려고 할 때, 발람은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을 저주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축복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발락이 무엇이든지 요구하는 것을 발람에게 준다고 약속했기 때문에 발람은 거듭 하나님 앞에 나아가 자기가 갈 수 있는지의 여부를 물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갈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많은 사람들은 이것을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으로 착각한다. 만일 발락이 그에게 이러한 약속을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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않았다면, 그는 아예 다시 돌아가서 묻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이것이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을 저주하지 않고 그들을 축복하시며 돌아보신다. 그러나 발람은 발락의 약속 때문에 거듭 하나님께 나아가 물었다. 후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가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다만 발람에게 가도록 허락하셨을 뿐이다. 하나님은 마치 이렇게 말씀하신 듯하다. “발람아, 발락의 보상이 너로 하여금 이렇게 많이 기도하게 하였으니 어서 가라.” 발람이 선지자인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재물 때문에 잘못된 길에 들어섰다.
사람이 금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금전의 능력이 제거되지 않았다면, 그가 있는 곳에는 분명 돈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는 자연히 공급의 문제를 보게 되어서 공급이 있는 곳에는 가고 공급이 없는 곳에는 가지 않게 된다. 그러므로 그는 공급이 있는가에 따라 인도를 받게 된다. 그는 공급이 있는 곳에는 가고자 하지만 궁핍한 곳은 쉽게 가려고 하지 않는다. 어디를 간다 해도 덜 궁핍한 곳으로 갈 것이다. 그는 재정적인 공급이 어떤가에 따라 발걸음을 옮기면서도 하나님께서 그를 인도하신다고 생각한다. 기도하는 것과 주님의 인도를 받는 것이 재정적인 공급에 따르기 때문에 그는 재정적인 공급을 주의하게 된다. 그곳에 이익과 금전이 발람으로 하여금 부단히 하나님께 나아가서 하나님을 귀찮게 하였고, 재차 하나님께 나아가 그가 발락을 따라 함께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묻게 하였다. 십여 년 전에 어떤 연로한 형제가 탄식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돈을 위하는 하나님의 종들이 얼마나 많은지! 많은 궁핍한 지방을 돌보러 갈 사람이 없고 오히려 큰 지방이나 부유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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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으로 많은 사람들이 항상 가니, 인도함에 있어서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가?”이러한 말은 상당히 엄중하다.
금전에 문제가 있는 일꾼이 발람의 길을 좇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들의 길은 공급이 있는가 없는가에 따라 달라지고, 공급이 많고 적음이 그들의 길에 방향이 되었다. 그는 가난한 지방에는 가려고 하지 않는다. 혹 간다 해도 거기서 조금 머무르고는 아주 빨리 떠나 버린다. 만일 어느 지방에 재정적 공급이 많으면 그는 그곳에 자주 가려 하고 또 그곳에 눌러 앉으려고 한다. 이러한 사람은 돈에 따라 인도를 받기 때문에 하나님은 할 수 없이 그에게 가라고 말씀하신다. 금전에 의존하는 주님의 일꾼은 아무 쓸모가 없다. 바울처럼 금전에 있어서 자랑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결코 유용하게 될 수 없다. 만일 일꾼이 금전에 의존하고 금전의 영향을 받는다면, 그는 하나님의 일꾼이 될 수 없다. 그는 반드시 발람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 어떤 사람이 쉽게 돈에 의해 이끌린다면, 그의 길 또한 돈에 의해 영향을 받게 된다. 이것을 발람의 길이라고 한다. 발람의 길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돈의 영향을 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개개인이 돈에서 벗어나고 먹을 것을 구하는 비천한 자가 되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를 바란다. 우리가 일하는 곳이 우리의 먹을 것을 구하는 곳이 되지 않도록 하나님께 구한다. 왜냐하면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돈의 제압을 당하는 자가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종이 돈의 인도를 받고 재물의 지배를 받는다면, 이것은 얼마나 가련하고 부끄러운 일인가!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발 앞에 엎드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길을 인도하시기를 구하면서 돈의 지배를 받는다면, 이것은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인가! 만일 사람이 철저하게 금전에서 벗어나지 않았다면, 그가 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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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인도를 받는다고 말한다 해도 많은 때에 그는 오히려 돈의 묶임을 받는다. 이러한 일은 너무나 수치스럽다. 금전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너무나 외적인 것이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살아 계시는 하나님이시라면 어느 곳이든지 다 갈 수 있다. 만일 그분이 살아 계시는 하나님이 아니시라면, 우리는 빨리 물러나서 하지 않는 편이 낫다. 만일 우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을 전하면서 우리의 길은 도리어 돈의 인도를 받는다면, 그것은 너무도 수치스럽고 부끄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신약에서 베드로도 발람의 길을 말한 바 있다. 그는 발람의 길이 어떠한 것인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음심이 가득한 눈을 가지고 범죄하기를 쉬지 아니하고 굳세지 못한 영혼들을 유혹하며 탐욕에 연단된 마음을 가진 자들이니 저주의 자식이라”(벧후 2:14). 여기서는 습관을 다루고 있다. 탐욕은 마음의 문제이지만 그것은 당신의 습관으로 변할 수 있다. 사람이 탐욕에 사로잡혀 한두 번 탐욕을 품다 보면 그 탐욕은 습관이 된다. “저희가 바른 길을 떠나 미혹하여 브올의 아들 발람의 길을 좇는도다 그는 불의의 삯을 사랑하는”(벧후 2:15) 선지자다. 탐욕이 습관이 되어 버린 사람은 어떻게 되는가? 바른 길을 떠나 미혹하여 브올의 아들 발람의 길을 좇게 된다. 형제자매여, 하나님께는 분명히 그분 자신이 정하신 길이 있는데, 우리는 어떻게 해야 이 길을 갈 수 있는가? 어떤 사람들은 바른 길을 버리고 발람의 길을 따르고 있다. 무엇이 발람의 길인가? 발람은 불의의 삯을 사랑한 선지자였다. 발람의 길은 사람이 자신의 선지자 직분을 삯을 받고 판 길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복음은 매매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선지자의 직분 또한 매매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복음을 팔 수 없고 선지자의 직분 또한 팔 수 없다. 그러나 여기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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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람은 그의 선지자 직분을 팔았으며 그릇된 길을 걸어갔다. 그의 성품은 탐욕으로 연단되어서 유혹이 올 때 즉시 바른 길을 떠나게 되었다. 발람이 발락의 말을 받아들인 것은 그의 마음에 탐심이 처음 생겨서 그런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의 마음이 이미 탐욕에 습관되었기 때문이다. 형제자매여, 당신은 이 중점을 보았는가? 발람은 이미 탐욕으로 마음이 연단되어 있었기 때문에, 발락이 그에게 돈을 주었을 때 즉시 바른 길을 벗어났다. 그러므로 돈의 영향력을 뿌리째 깨끗이 뽑아 버리지 않는다면, 돈의 유혹이 오자마자 당신은 즉시 돈을 좇게 되어 아무 쓸모도 없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바른 길을 가고자 한다면, 돈을 거절하는 일에 철저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외면적으로는 인도를 받을 수 있고 기도할 수 있고 하나님의 뜻을 구할 수 있지만 길을 잘못 들어서게 된다. 발람도 기도하였고 하나님의 뜻을 구했으며 하나님을 기다렸지만 잘못된 길을 걸어갔다. 당신이 명심해야 할 것은, 만일 당신의 마음속에 돈이 어떤 지위를 차지하고 있고 탐욕이 당신의 마음속에 습관으로 자리잡았다면, 당신이 여러 번 하나님 앞에 나가서 기도하며 “주여, 당신은 제가 그곳에 가는 것을 허락하십니까?”라고 묻는다 해도 돈이 당신을 지배하고 있으므로 당신이 바른 길을 걸어갈 수 없다는 것이다.
유다서에서도 발람의 일을 언급하고 있다. 11절은, “삯을 위하여 발람의 어그러진 길로 몰려갔으며”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쓰여진 말들은 상당히 엄중하다. 어떤 사람들이 삯을 위하여 몰려갔다. 여기에서 몰려간다는 것은 슬슬 걸어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아주 빨리 몹시 급하게 발람의 잘못된 길로 달려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하나님의 자녀는 철저히 삯의 유혹에서 탈피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어그러진 길을 갈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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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후서 2장에서는 발람의 일 외에 또 다른 상황을 말해 주고 있다. “저희가 탐심을 인하여 지은 말을 가지고 너희로 이를 삼으니 저희 심판은 옛적부터 지체하지 아니하며 저희 멸망은 자지 아니하느니라”(3절). 베드로후서 2장은 거짓 선지자들의 일을 다루고 있는데, 그러면 이러한 거짓 선지자들은 도대체 어떻게 하고 있는가? 그들은 탐심으로 인하여 지은 말을 가지고 당신들에게서 이득을 취한다. 형제자매여, 거짓 선지자와 거짓 스승들은 탐심으로 인하여 이득을 취하기 원하므로 거짓된 말을 지어낸다는 것을 명심하라. 그들은 탐심이 있고 삯을 얻기 바라기 때문에 말을 지어낸다. 그러므로 만일 어떤 사람의 길이 금전의 지배를 받고 있다면, 그의 교훈 또한 금전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것을 당신은 보게 된다. 이것은 분명하다. 그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교훈을 말할 때와 부유한 사람들에게 교훈을 말할 때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그는 청중이 가난한 사람들일 때에는 주님의 요구가 이러한 것이라고 말하지만 부유한 사람들에게 주님의 요구를 말해 줄 때에는 이와는 또 다르게 말한다. 이러한 사람의 말은 그 내면의 이득을 위한 탐심의 영향을 받게 된다. 바꾸어 말하면, 그가 말하고 있는 교리는 금전을 좇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상당히 직선적이고도 엄중하다. 우리는 사람들이 그런 거짓 선지자나 거짓 교사들을 본받을까 두렵다. 만일 어떤 사람의 길이 돈 때문에 흔들리고 돈 때문에 바뀐다면, 당신은 그들이 거짓 선지자요 거짓 스승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을 섬기는 선지자나 스승이나 교사는 절대로 금전의 영향을 받아서는 안 된다. 만일 돈이 우리를 매수하고 우리에게 영향력을 미칠 수 있으며 바른 길에서 우리를 벗어나게 한다면, 우리는 마땅히 잿더미 위에 엎드려, “주여, 나는 거짓 선지자요, 거짓 스승이요, 거짓 종입니다. 나는 진실로 당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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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기지 않았습니다.”라고 자백해야 한다. 이것은 아주 심각한 문제다. 사람은 반드시 금전의 세력에서 완전히 구출받아야 한다. 주의 길을 가거나 말씀을 전하는 데 있어서 보수를 바라는 사람은 하나님의 일을 밖에 두어야 한다.
베드로와 유다가 이렇게 언급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디모데서를 쓴 바울도 이 일을 특별히 주의하였다. 그는 디모데전서 6장 3절부터 5절까지에서,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에 착념치 아니하면 … ”이라고 말했다. 다른 교훈과 각종 괴이한 교훈을 전하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에 착념치 아니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저는 교만하여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훼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 참으로 기묘한 것은, 교회의 역사를 돌이켜볼 때, 이단을 전하는 사람들 중에는 바울처럼 복음을 위해 자기 자신과 자기 소유를 아낌없이 버린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는 것이다. 이단을 전하는 사람은 그 이단으로부터 이득을 취한다. 그들은 그들이 기대하는 만큼 이득을 얻어 낼 수 있다. 우리는 복음 전하는 사람 중에 단 한 사람도 다른 사람에게서 이득을 취하려 하지 않기를 바란다. 세상에서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삼는 것보다 더 하나님께 득죄하는 일은 없다. 그리스도의 일을 하여 이익을 얻는 것은 가장 천한 일이며, 세상에 이보다 더 천한 일은 없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삼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천한 일이다. 주의 일을 하는 사람은 이것에 있어서 깨끗이 씻겨져야만이 일을 할 수 있다. 형제자매여, 당신이 주님을 위해 일을 하고자 한다면 금전 문제에 있어서 분별되어야 하며, 굶어 죽을지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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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득을 얻기를 바라서는 안 된다. 모든 일꾼은 이 일에 있어서 반드시 강해야 한다. 만일 어떤 사람이 금전적인 일에 있어서 당신의 길을 바르지 못하게 한다면, 당신은 그에게 어떤 여지도 남겨 주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철저하게 주님을 따라야 한다. 형제자매여, 우리는 우리의 옷을 팔 수 있고 우리의 물건을 팔 수 있지만 결코 우리의 가르침과 경건을 팔아서는 안 된다. 우리의 마음이 금전에 대해 죽지 않고 우리의 태도가 분별되지 않았다면, 우리는 여전히 주님의 일을 만지지 않는 편이 더 낫다. “그러나 지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이 큰 이익이 되느니라”(딤전6:6절). 진정한 이익은 바로 여기에 있다. 경건으로 우리가 지족한다면 경건은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고 바라지 않으며 도리어 우리의 모든 만족이 된다. 경건은 이익이 되되 아주 큰 이익이 된다. 경건을 수단으로 삼아 돈을 얻는 것은 가장 수치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경건에 지족을 더하는 것은 훨씬 더 큰 이익이다. 7절부터 10절까지의 말씀은 특별히 사역자가 간직해야 될 말씀이다.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형제자매여, 우리는 결코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삼지 말자. 우리는 금전에 대하여 완전히 독립적인 태도를 취해야 한다. 만일 이 점에 어려움이 있다면, 다른 직업을 갖는 것이 훨씬 낫다. 우리는 결코 금전의 인도를 받아서 말하고 금전의 인도를 받아서 일하는 지경에 떨어질 수 없다. 그렇지 못하다면 차라리 다른 직업을 가지고서 하나님을 잘 섬기는 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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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낫다. 어느 누구도 금전 문제를 소홀할 수 없으며, 이로 인해 주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 수 없다. 주의 일을 하는 사람은 금전 문제에 있어서 반드시 깨끗해야 한다.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금전에 있어서 우리는 마음속에서 철저히 구원받아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비추어 볼 때, 금전에 있어서 깨끗지 못한 것은 정죄함이 크기 때문이다.
유다서 16절은 “이 사람들은 원망하는 자며 불만을 토하는 자며 그 정욕대로 행하는 자라 그 입으로 자랑하는 말을 내며 이를 위하여 아첨하느니라”고 말한다. 많은 사람들의 입에는 자랑하는 말이 가득하다. 그들은 여러 차례 기도하여 하나님께 응답받은 것을 말하고, 그들이 사람을 놀라게 할 만한 하나님의 많은 기적과 기사를 여러 차례 행했다고 말한다. 그가 이러한 말들을 하는 것은 실제로 이득을 위하여 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득을 취하기 위하여 아첨하며 사람들의 귀에 듣기 좋은 말만을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익을 도모하는 마음을 처리해야 한다. 이것이 주님의 일꾼이 갖추어야 할 기본 성격이다. 금전에 있어서 연약한 사람은 어떤 것에 있어서도 항상 연약하다. 우리는 금전 문제에 대해 강경해야 하며 어떠한 영향도 받아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의 일을 하는 우리는 금전에 있어서 깨끗하게 처리받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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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두 번째로, 주님께서 그분의 제자들을 어떻게 가르치셨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누가복음 9장에는 주님이 열두 제자를 파송하시는 것이 기록되어 있고, 그 다음 10장에는 주님이 70인을 파송하시는 것이 기록되어 있다. 사복음서 중 오직 누가복음만이 주님께서 70인을 파송시키신 것을 기록하고 있다. 열두 제자가 파송될 때에 주님은 그들에게, “여행을 위하여 아무것도 가지지 말라 지팡이나 주머니나 양식이나 돈이나 두 벌 옷을 가지지 말며”(눅 9:3)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주님은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지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70인이 파송될 때에 주님이 그들에게, “전대나 주머니나 신을 가지지 말며”(10:4)라고 이르셨다. 열두 제자를 파송할 때와 같이 9장과 10장에서 동일하게 다룬 것이 금전의 문제다. 바꾸어 말하면, 주의 일을 하러 나가는 사람은 돈의 문제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훗날 주님이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를 전대와 주머니와 신도 없이 보내었을 때에 부족한 것이 있더냐”라고 물으셨을 때, 그들은 “없었나이다”(눅 22:35)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주님은, “이제는 전대 있는 자는 가질 것이요 주머니도 그리하고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살지어다”(36절)라고 말씀하셨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시대가 이미 달라졌고 주님이 이미 거절당하셨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사람이 주님을 영접할 때에는 이러한 것들이 필요치 않았다. 지금의 문제는, 주님의 일을 하는 사람이나 주님께서 파송하는 사람이 전대를 주의할 것이 아니라 그의 온 존재를 우리가 전하는 말씀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께서 세우신 주이심을 증거하기 위해 일하러 가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관심을 이러한 메시지에 두어야지 전대에 두지 말아야 한다. 바꾸어 말하면, 일을 하러 나갈 수 있는 사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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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전 문제에 대해서도 능히 초연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주님을 위하여 각지를 두루 다니며 천국 복음을 전한다면, 우리는 결코 낙타와 같지는 않다. 우리는 바늘구멍을 통과할 수 없는 낙타같이 천국에 들어갈 수 없으면서 밖에 서서 천국에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사람들에게 말할 수 없다. 이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가지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이것은 복음의 원칙을 말하는 것으로 전대와 두 벌의 옷의 원칙과는 일치하지 않는 것이다. 사역자가 복음을 전하러 나갈 때에는 이러한 것들을 살필 겨를이 없다. 사람이 문을 나설 때에는 전대가 있어야 돈을 잘 넣을 수 있고 지팡이가 있어야 길을 잘 걸을 수 있으며 두 벌 옷을 가져야 갈아입기에 좋다. 이런 것들은 모두 필요한 것이다. 누가복음 22장에서 주님은 그들에게 가질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9장에서 열두 제자를 파송할 때와 10장에서 70인을 파송할 때에 주님은 왜 가지지 말라고 하셨는가? 그분이 아무것도 가지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은, 복음 전하는 자들은 근본적으로 이러한 일들을 마음에 두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만일 오늘 우리가 파송된다면, 두 벌의 옷이 있어도 가고 한 벌밖에 없어도 가며, 지팡이가 있어도 가고 없어도 가며, 돈이 있어도 가고 없어도 가며, 전대가 있어도 가고 없어도 가야 한다. 이러한 것들은 우리가 복음 전하러 나가는 데에 아무런 장애가 될 수 없다. 이렇게 될 때, 우리는 복음을 전할 수 있다. 이것이 주님께서 열두 제자와 70인을 파송하셨을 때 그들이 받은 훈련이다. 형제자매들은 이 일에 대해 분명해야 한다. 사람이 복음을 전하고자 한다면, 이런 일들은 근본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아야 한다. 이런 일들이 당신에게 문제가 된다면 사역하러 나가지 않는 것이 좋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려 한다면, 이러한 의복이나 전대나 지팡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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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가 되지 않는다. 만일 지팡이가 당신에게 문제가 된다면, 당신은 복음을 전할 수 없다. 또 만일 몇 벌의 의복이 당신에게 문제가 된다면, 당신은 복음을 전할 수 없다.
복음 전파는 당신이 절대적으로 복음에 주의할 것을 요구한다. 복음의 요구는 당신에게 있어서 이러한 물질적인 것들은 문제가 되지 않으며 복음만이 당신 마음에 문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역하러 나갈 때에 사람들의 영접을 받든 받지 못하든 그의 사역을 행하며 하나님 앞에 영광스럽게 서게 될 때에 비로소 주님의 증인이 될 수 있다. 주님은 제자들을 파송하실 때 “여행을 위하여 아무것도 가지지 말라”고 명하셨다. 그분은 제자들이 목적지에 이르러서도 똑같이 명백한 명령을 하셨다.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말하되 이 집이 평안할지어다 하라”(눅 10:5). 이 얼마나 멋진가! 이들은 모든 사람들에게 평안을 주는 자들이다. 주의 일을 하는 사람은 마땅히 하나님 앞에서 그 자신의 위치를 존중해야만 한다. 우리는 빈궁한 사람이 될 수는 있지만 그러나 결코 체통(體統)을 잃어버린 사람이 될 수는 없다. 어떤 일꾼도 그릇 행하여 체통을 잃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지 못하면 어떻게 하는가?
주님은,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지 아니하거든 그 성에서 떠날 때에 너희 발에서 먼지를 떨어버려 저희에게 증거를 삼으라”(눅 9:5)고 말씀하셨다. 당신은 주님의 종들에게서 체통을 보았는가? 그들은 사람들에게 거절당하여도 처참하게 느끼지 않았으며 원망의 말도 하지 않았다. 도리어 그들은 발의 먼지를 떨어버리고 그 성 안의 먼지조차도 떨어버렸다. 그들에게는 부정적이거나 약한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하나님의 종이 비록 빈궁할 수는 있지만 결코 하나님의 종의 체통을 잃어버릴 수는 없다. 이 일을 잘 처리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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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역을 할 수 없다. 일꾼은 반드시 금전 문제를 하나님 앞에서 잘 처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일을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금전의 문제는 매우 엄중하기 때문이다.
이제 주님이 오천 명과 사천 명을 먹이시는 일에서 제자들을 어떻게 훈련시키셨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한번은 주님께서 제자들을 데리고 아주 많은 사람들에게 친히 말씀을 전하셨는데, 마태의 기록에 의하면 부녀나 아이를 제하고도 청중의 수가 오천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해질 무렵에 제자들이 나아와 제안하여 말하기를, “이곳은 빈들이요 때도 이미 저물었으니 무리를 보내어 마을에 들어가 먹을 것을 사 먹게 하소서”라고 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마 14:15-16)고 말씀하셨다. 제자들은 주님께서 무리를 보내시어 그들로 먹을 것을 사 먹게 하시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주님은 오히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말씀하셨다. 제자 중 하나가 듣고서 도저히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해 낼 수가 없어서 주님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요 6:7)라고 말했다. 그들이 거기서 이백 데나리온을 계산하고 있을 때에 주님께서 물으시기를, “너희에게 떡 몇 개가 있느냐 가서 보라”(막 6:38)고 하셨다. 그들이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주님께 가져다 놓은 후에 주님은 기적을 행하여 그 많은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셨다. 형제자매여, 무릇 이백 데나리온을 계산하는 사람은 일할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하라. 당신에게 돈이 아무리 많다 해도 당신은 주의 일을 할 수 없다. 주님이 이곳에서 그들에게 보여 주고 계신 것은 주님의 일을 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만일 당신이 돈에 만진 바 된다면, 당신은 즉시 수지가 맞는지 맞지 않는지를 보려고 할 것이다. 주의 일꾼은 금전의 세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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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받아야 하며, 금전이 세력을 얻게 해서는 안 된다. 3년이 넘는 기간, 주님께서는 열두 제자들과 함께 계셨고 그들에게 그분 자신을 주셨다. 이것이 그분께서 제자들을 훈련시키신 방법이었다. 주님은 돈을 꼭 써야 할 때는 반드시 돈을 써야 한다고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하나님의 일에 있어서 수지가 맞는지 안 맞는지를 따져서는 절대 안 된다. 상업적인 시각으로 하나님의 일을 바라보는 것은 완전히 잘못된 것이다. 항상 돈을 계산하는 사람은 재물의 종이지 결코 하나님의 종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금전으로부터 벗어나기를 배워야 한다.
그러나 이 공과를 배우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제자들도 이 공과를 단번에 배운 것이 아니다. 마태복음 15장에 와서 또 사천 명이 왔는데, 이때에도 여자와 아이들이 포함되지 않았다. 이번에는 사람들이 이미 그곳에 삼 일 동안 머물러 있었다. 이러한 환경에서 제자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주님이 제자들에게,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저희가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길에서 기진할까 하여 굶겨 보내지 못하겠노라”(마 15:32)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제자들은 아직도 이 공과를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가 어디서 이런 무리가 배부를 만큼의 떡을 얻으리이까?”라고 말했다. 사람의 문제는 어디서 떡을 얻어야 하는가였다. 그러나 또다시 주님은 그들에게 떡이 얼마나 있느냐고 단순하게 물으셨다. 그들은, “일곱 개와 작은 생선 두어 마리가 있나이다”라고 대답했다. 그들이 이 일곱 개의 떡덩이와 두어 마리의 생선을 내놓았을 때, 주님은 기적을 행하셔서 사천 명을 배불리 먹이셨다. 주님께서 두 번 이렇게 하신 것은 열두 제자들에게 이 두 번의 훈련이 필요했다는 것을 말해 준다. 만일 주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시지 않고 사천 명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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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이시지 않았다면, 아마도 오순절 때에 제자들은 한 사람도 돌볼 수 없었을 것이다. 만약 사람이 복음서 중의 오천 명 혹은 사천 명을 알지 못한다면, 사도행전 중의 삼천 명과 오천 명을 알 수가 없다. 무릇 사자와 곰을 보고 달아나는 사람은 골리앗을 보았을 때에 반드시 달아나게 된다. 양을 돌볼 줄 모른다면 이스라엘 백성을 결코 돌볼 수 없다. 오천 명과 사천 명에게 먹을 것을 공급하는 공과를 배운 사람들에게 오순절날 가난한 사람을 돌보는 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형제자매여, 당신도 하나님 앞에서 이와 같은 훈련을 받아야 하며, 당신의 마음이 하나님 앞에서 넓혀져야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개인적인 일에 관계되는 곳에서는 근검절약할 수 있으나 기적을 행하는 데에서는 인색해서는 안 된다. 많은 사람이 돈에 대해 지나치게 계산하고 따질 때 당신은, “이것은 하나님의 종이 할 일이 아닌 것 같다. 이것은 하나님께로부터 훈련을 받은 사람이 할 일이 아니다”라고 느끼게 된다. 하나님께로부터 훈련을 받은 사람은 금전이 그 마음속에서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으며, 그의 손에서 그렇게 따지고 계산하지 않는다. 형제자매여, 당신이 따지고 계산하면 할수록 당신은 더욱더 옳지 않게 된다. 계산하면 할수록 당신은 더욱더 가난해진다. 이것은 금전에 대한 하나님의 원칙이 아니다. 우리는 열두 제자가 받은 단련을 받아야 하며 70인이 받은 훈련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이 열두 제자 가운데에도 돈을 훔친 도적이 있었다. 그는 이 공과를 배우지 못해서 돈이 그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되어 버렸다. 결국 그는 마리아가 지극히 비싼 향유를 가져다 옥합을 깨뜨려 주님께 붓는 것을 보고는 그것을 단지 허비하는 것으로 여기며,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요 12:5)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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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했다. 돈을 계산하는 사람은 한 옥합의 귀한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주님은,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마 26:13)고 말씀하셨다. 옥합을 깨뜨려 삼백 데나리온의 가치가 있는 향유를 단번에 주님의 몸에 부은 것은 바로 복음의 결과였다. 바꿔 말해서, 사람이 복음에 대해 분명하다면 주님을 위하여 대가를 바라지 않고 허비인지 허비가 아닌지를 근본적으로 말하지 않는 것이 주님 편에서 볼 때는 옳은 것이다. 너무 많이 소비한다 하여도 주님 몸에 ‘허비’하는 것은 옳은 것이며 마땅히 해야 할 것이다. 복음을 분명하게 모르는 사람은 거기에서 계산하고 있겠지만, 복음에 대해 분명한 사람은 이러한 ‘허비’가 전적으로 옳다는 것을 안다. 주님은 모든 사람의 이 ‘허비’를 얻으셔야만 한다. 삼백 데나리온을 허비라고 말한 자는 누구인가? 그는 유다다. 여기에 공과를 배우지 못한 한 사람이 있는데, 그가 한 말은 상당히 일리가 있고 사람 편에서 볼 때 한 번에 삼백 데나리온을 소비해 버린다는 것은 수지에 맞지 않는 것이다. 그의 눈에는 한 사람을 은 30전으로도 넉넉히 살 수 있었다(그가 주님을 판 대가는 은 30전이었다). 그는 이러한 허비를 보고는 상심(傷心)했다. 그는 여기서 이익을 얻으려 하였으며, 또한 돈을 계산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복음을 얻은 사람은 주님을 위하여 어떤 것도 주님께 드릴 수 있었다. 주를 위하여 모든 것을 다 쏟아 놓은 이것이 주님의 복음을 좇아가는 것이다. 복음이 전파된 곳에서 주님과 값을 흥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주님은,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마 26:11)고 말씀하셨다. 주님의 뜻은 이러하다. “너희들이 가난한 사람을 돌보아야 하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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옳은 일이다. 그러나 내게 행하는 것은 결코 허비가 아니다. 아무리 많이 하여도 아무리 지나치게 하여도 내게 하는 것은 결코 허비가 아니다.” 어떤 형제는, “주님을 믿자마자 중용의 위치에 서 있는 사람은 조금도 영적인 장래가 없다.”라고 말했다. 형제자매여, 우리가 십 년 혹은 이십 년이 지난 후에 중용의 위치에 서도 늦지 않는다. 처음 주님을 믿을 때에 얼마든지 마음놓고 ‘허비’하라. 처음 주님을 믿을 때에 모든 것을 다 주님께 드리고 귀한 참 나드 향유 전체를 주님께 붓고 필사적으로 드린다면 길이 있을 것이다. 사도들이 받은 것은 바로 이러한 교육이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고난이 닥쳐도 이렇게 행하기를 배워야 하며, 주님 몸에 많은 것을 허비하거나 혹은 다른 사람에게 많은 것을 쏟아 부어야 할지라도 이렇게 행하기를 배워야 한다. 금전에 대한 문제가 하나님의 종에게는 이렇게 중요하다. 그러나 돈이 있든 없든 주의 일을 하러 나가야 한다. 돈에 대하여 일일이 따지고 셈하는 사람은 문제가 있는 것이다.
사도행전 3장에서 베드로는 앉은뱅이에게,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6절)라고 말했다. 우리는 여기서 베드로와 요한이 ‘은과 금은 내게 없다’고 말할 정도까지 주님께 인도함 받은 것을 본다. 비록 사도행전 2장에서는 그렇게 돈이 많았었지만, 3장에서는 ‘은과 금이 내게 없다’라고 말하고 있다. 베드로는 그 앉은뱅이에게 어떻게 말했는가? 그는,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고 말했다. 그렇게 많던 돈이 그들의 손을 거쳤지만 그들은 오히려 ‘은과 금은 내게 없다’고 말할 정도까지 인도되었다. 그러므로 형제자매여, 당신이 일을 하지 않는다면 모르겠지만, 일을 하려 한다면 금전에 관하여 철저해야 한다. 금전에 대해 약한 사람은 다른 일에서도 약하다. 사람이 일에 흔들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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않고 강할 수 있는 근본적인 원인은, 돈에 대하여 그가 하나님 앞에서 신뢰할 만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오직 그러한 사람에게 그분의 일을 위탁하실 수 있다.

3

이제 금전에 대한 바울의 태도가 어떤지를 보기로 하자. 이에 대한 바울의 말은 매우 분명하다. 사도행전 20장에서 바울은 에베소 사람들에게,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33절)라고 말했다. 이것은 그의 동기의 문제를 다루는데, 그에게는 탐심이 없었다. 하나님 앞에서 일할 때에, 그는 어떤 사람의 물건도 가지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에 대해 확신이 있었다. 어떤 사람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도 그의 마음에서 근본적으로 탐하지 않았다는 것이 한 방면이다. 계속해서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너희 아는 바에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의 쓸 것을 공급했다”(행 20:34). 이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모든 사람들이 응당 가져야 할 태도이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 앞에서, “나는 어떤 사람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않습니다. 당신의 물건은 당신 것이니 나는 결코 그것을 탐내지 않습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당신의 것은 당신에게 남겨 두고 나는 일을 함으로써 기꺼이 나와 내 동행들의 쓸 것을 공급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주님의 일을 하는 사람이 복음의 권위를 쓸 수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이것은 모든 일꾼은 반드시 하나님 앞에서 복음에 대하여 이렇게 해야 한다는 것을 보아야 함을 말하고 있다. 우리의 책임이 이렇게 중하므로, 우리는 우리 손으로 기꺼이 우리 자신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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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행들의 쓸 것을 공급할 수 있을 정도까지 나아가야 된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언제나 바울과 같은 마음을 가져야 한다. 두 손으로 힘을 다하여 그와 그의 동행들의 쓸 것을 공급한 바울은 우리의 본(本)이다. 물론 바울도 다른 사람의 선물을 받았다. 그러나 그것은 또 다른 것으로서 다른 사람의 책임이다. 잠시 후 이 문제를 살펴보자.
바울이 고린도인들에게 말한 것은 매우 좋다. 바울은 고린도인들에게 편지할 때에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했다. “내가 너희를 높이려고 나를 낮추어 하나님의 복음을 값없이 너희에게 전함으로 죄를 지었느냐”(고후 11:7). 이들과 또 에베소인에 대하여 바울은 자기의 변호를 다음과 같이 하고 있다. “또 내가 너희에게 있어 용도가 부족하되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함은 마게도냐에서 온 형제들이 나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였음이라 내가 모든 일에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하여 스스로 조심하였거니와 또 조심하리라 그리스도의 진리가 내 속에 있으니 아가야 지방에서 나의 이 자랑이 막히지 아니하리라 어떠한 연고뇨 내가 너희를 사랑하지 아니함이냐 하나님이 아시느니라 내가 하는 것을 또 하리니 기회를 찾는 자들의 그 기회를 끊어 저희로 하여금 그 자랑하는 일에 대하여 우리와 같이 되게 하려함이로다”(고후 11:9-12). 바울은 일체 도움이 필요 없다는 독립적인 태도는 취하지 않았다. 단지 아가야 지방 일대가 간증과 관계되고 어떤 사람들이 훼방하고 기회를 틈타서 의도적으로 그들이 특별하다고 자랑하기 때문에, 바울은 그들에게 말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는, “내가 하나님의 복음을 값없이 너희에게 전해 주고 조금이라도 너희에게 누를 끼치지 아니하리라. 용도가 부족하였을 때에도 내가 모든 일에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하여 스스로 조심하였거니와 또 조심하리라. 이것은 내가 너희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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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하면 나는 지금 내가 하는 것을 후에도 또 하려 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이것은 기회를 찾는 자들의 그 기회를 끊어 버려서 그들이 자랑하는 말을 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금전에 대한 일꾼의 태도이다. 우리가 어디에 있든 우리는 조금도 다른 사람에게 기대하는 태도를 갖지 말아야 하며, 이로 인해 사람들에게 말할 기회를 주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 데에는 체통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돈을 사랑하는 사람을 향하여 더욱 값없이 복음을 그들에게 전해 주어야 한다. 돈을 붙잡고 있는 사람일수록 우리는 그들에게서 선물을 적게 받아야 한다. 당신은 하나님의 종된 당신의 위치를 보아야 한다. 만일 당신이 아가야 전역의 사람들처럼 악의로 기회를 찾아 훼방의 말을 하려는 사람들을 만난다면 당신은 마땅히 바울과 같이 말해야 한다. “나는 결코 여러분에게 폐를 끼치지 않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예루살렘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연보를 한다면, 나는 전해 줄 수 있습니다. 디모데가 오면 여러분은 그를 멸시치 말고 그를 평안히 보내어 내게 오게 하십시오. 나 바울은 주님의 일꾼으로서의 체통을 지킬 것입니다.” 만일 어떤 지방에서 연보로 인하여 사람들에게 말할 여지를 주었다면, 당신은 하나님을 섬기는 체통을 완전히 잃게 된다. 당신은 하나님을 섬기는 종으로서 체통을 지켜야 한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금전 때문에 느슨해져서는 안 된다. 당신은 반드시 엄격하게 일꾼의 체통을 지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을 위하여 어떤 일도 할 수 없다.
바울은 여기에서 자신이 어떻게 이러한 체통을 지켰는가를 말했을 뿐 아니라, 그가 친히 그의 손으로 일을 하여 그의 동행의 필요를 공급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주는’원칙이다. 바울은,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의 쓸 것을 공급했다”고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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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모든 일꾼이 줄 줄 모르면 안 된다. 만일 당신이 수입이 아주 많은데 오직 자기 자신만을 위하여 이 많은 수입을 남겨 둔다면, 당신은 아직 일꾼의 일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것이다. 만일 함께 사역하는 중에 항상 받기만을 바라고 바치는 것에 인색하다면, 이것은 우리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공급만 받을 줄 알고 공급할 줄을 모르는 일꾼은 더 이상 영적인 진보를 가질 수 없다. 형제자매여, 영적인 일에 있어서의 당신의 진보 여부는 금전에 대한 당신의 태도에 달려 있다. 일꾼의 가장 나쁜 태도는 받기만 하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레위인과 같아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들의 십분의 일을 우리에게 가져올 것을 기대하지만, 이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레위인에게도 그들의 십분의 일을 엄연히 내야 할 책임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레위인은 각 성(城)에 산업이 없었으며 열두 지파 속에서 기거하였고 제단을 의지하여 생활하였다. 아마도 레위인들은, “우리는 제단을 의지하여 생활하고 있는데 우리에게 무슨 공급할 것이 있습니까?”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레위인이 십분의 일을 하나님 백성에게서 받으며 또한 마땅히 그 중의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바쳐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종이라 불리우는 사람은 모두 이 사실을 알아야 한다. 당신은 “나는 포기한 것이 너무 많고 수입이 너무 적은데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가?”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당신이 줄곧 자신의 필요만을 바라본다면, 당신에게 문제가 생기게 되고 함께 동행하는 사람들을 공급해 줄 수가 없다. 우리가 공급하고자 한다면, 마땅히 모든 형제자매에게까지 이르러야 한다. 만일 당신이 그 액수가 얼마이든지 간에 하나님 앞에서 그 돈을 보류해 놓고 다만 하나님께서 다른 형제자매에게 역사하시기만을 바란다면, 당신은 하나님이 결코 돈을 당신 손에 맡기지 않으신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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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게 될 것이다.
고린도후서에서 바울은,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6:10)라고 말한다. 여기에 이 사람은 자기의 하나님을 참으로 알았다! 그는 가난한 자 같으나 기묘하게도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했다. 형제자매여, 이것이 바로 우리의 길이다. 형제자매여, 각지의 형제자매들이 주님의 일을 하는 당신에 대해 말하고 당신에 대한 태도가 좋지 못하다면, 당신은 마땅히 일꾼의 체통을 지켜야 한다. 당신은 그들의 어떤 선물도 거절하고, 그들에게 이렇게 말해야 한다. “나는 여러분의 돈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으로서 여러분 가운데 어떤 말이 있으므로 나는 여러분의 돈을 쓸 수 없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지켜야 하므로 여러분의 돈을 받을 수 없습니다.” 당신이 빈궁한 데 처해 있을 지라도 주기를 배워야 한다. 더 많은 수입을 원한다면 더 많은 지출을 해야 한다. 주면 줄수록 당신은 더욱 받을 수 있다. 이것이 영적인 원칙이다. 우리가 부족할 때조차도 힘을 다하여 주어야 한다. 왜냐하면 돈이 다른 사람에게 나갈 때 주님의 공급이 오게 되기 때문이다. 형제자매들은 많은 것을 베풀 때에 많은 것이 들어온다는 체험을 충분히 하였을 것이다. 결코 당신 손에 얼마나 남았는가를 보지 말라. 주님은,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눅 6:38)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하나님의 율법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율법을 깨뜨릴 수 없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재물을 관리하는 방법은 세상 사람들의 그것과 완전히 다르다. 그들은 재물을 쌓을수록 많아지지만 우리는 줄수록 많아진다. 이렇게 하여 우리가 빈궁할지라도 오히려 다른 사람을 부유케 한다.
고린도후서 12장에서 바울은 “보라 이제 세 번째 너희에게 가기를 예비하였으나 너희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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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를 끼치지 아니하리라”(14절)고 말한다. 이것이 바울의 태도이다. 얼마나 엄격한 태도인가! 이전에 그에 대해 말하는 사람이 있고 어떤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이제 세 번째 그들에게 갈 때에도 역시 그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는 계속해서, “나의 구하는 것은 너희 재물이 아니요 오직 너희니라”(원문에는 재물이라는 단어가 없음)고 말하고 있다. 그가 이렇게 하는 것이 도량이 좁고 심지가 좁은 것인가? 그렇지 않다. 그는 또, “어린아이가 부모를 위하여 재물을 저축하는 것이 아니요 이에 부모가 어린아이를 위하여 하느니라”고 말한다.
형제자매여, 당신은 하나님 앞에서 바울의 태도가 얼마나 좋은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인들의 자신에 대한 훼방의 말을 많이 들었으므로 그들의 연보를 받지 않았다. 바울은 이런 지경에까지 이르렀지만 금전에 대해 그들을 가르치는 일을 회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고린도후서에서 금전에 대한 일을 가장 많이 제기했다. 만약 바울이 고린도인들에게 금전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면, 그는 자기 사역에 대한 고린도인들의 비난으로 인해 많은 상처를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금전이 바울에게는 그렇게 능력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바울은 상처를 받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재정 문제에 있어서 고린도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었다. 그들이 예루살렘에 마땅히 연보를 보내야 했을 때 바울은 그들에게 보내도록 하였다. 바울은 금전 문제를 초월했기 때문에 그들이 자신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 만진 바 되지 않았다. 비록 바울 개인이 체통을 지키기 위해 그들의 연보를 받지 않았지만, 그는 오히려 마게도냐인들에게 고린도인들이 이미 준비하였음을 자랑하였다. 그는 한 면에서 생각하기를, 마게도냐 사람이 고린도인들 가운데 와서 그들이 연보의 준비가 잘되지 않은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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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게 될 때 고린도인들이 부끄러움을 당할까 두려워 그들에게 미리 준비할 것을 권면하였다(고후 9:2, 4-5). 여기에는 바울 개인의 감정이 없다. 아! 하나님의 종은 실제로 재물의 세력에서 구출받아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고린도인들이 절대로 바울의 이러한 말을 듣지 않았을 것이며, 바울 또한 에베소인들과 빌립보인들에게는 이 말을 할 수 있지만 고린도인들에게는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고린도인들에게 여전히 이러한 말을 하였으며 조금도 이 문제를 느슨하게 풀어 놓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고린도인들에게 금전에 대해 말했다. 그의 뜻은 이러하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돈을 사용하실 수 있으신 분이며, 내가 당신들의 돈을 쓰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나 바울은 어떤 것도 얻고자 하지 않는다. 이 일에 있어 나는 결코 여러분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다. 오직 나는 여러분이 언제나 하나님의 길을 걸어가기만을 바랄 뿐이다.”
형제자매여, 교회 안에서 많은 형제자매와 왕래할 때 당신은 바울처럼 ‘당신 자신’과 ‘당신의 소유물’을 구별할 수 있는가? 당신은 그렇게 많은 형제자매들을 만날 때에 ‘그들’과 ‘그들의 소유물’ 중에 어느 것을 갖기를 원했는가? 만일 그들이 당신에게 문제가 있어 그들의 소유물을 내놓지 않을 경우에도 당신은 한결같이 그들을 보살피고 그들을 방문하며 그들이 진보하기를 바랄 수 있는가? 바울은 고린도인들을 그냥 방치해 둘 충분한 이유가 있었지만 그들을 그냥 버려 두지 않고 세 번째로 방문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바울은 여전히 그들의 소유물을 거절하고 오직 그들 자신만을 원했던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이것은 하나님의 종에게 주어진 가장 큰 시험이다. 우리는 우리 형제 바울이 행한 일을 배워야만 한다.
우리가 앞서 인용한 그다음 계속되는 구절에서도 바울은 같은 말을 하고 있다. “내가 너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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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을 위하여 크게 기뻐함으로 재물을 허비하고 또 내 자신까지 허비하리니 너희를 더욱 사랑할수록 나는 덜 사랑을 받겠느냐 하여간 어떤 이의 말이 내가 너희에게 짐을 지우지는 아니하였을지라도 공교한 자가 되어 궤계로 너희를 취하였다 하니 내가 너희에게 보낸 자 중에 누구로 너희의 이를 취하더냐 내가 디도를 권하고 함께 한 형제를 보내었으니 디도가 너희의 이를 취하더냐 우리가 동일한 성령으로 행하지 아니하더냐 동일한 보조로 하지 아니하더냐”(고후 12:15-18). 형제자매여, 여기 바울의 태도를 보라! 그는 고린도인들을 위해서 얼마나 기꺼이 자기 자신과 자기 소유를 바쳤던가! 복음을 전하는 것은 단지 사람이 나가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며 언제나 자신의 재물과 자신의 모든 소유를 다 쏟아야 가능한 것이다. 복음을 전하면서 재물을 얻으려는 것은, 이유를 막론하고 다 옳지 않은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금전을 기꺼이 내놓을 수 있을 정도로 자신을 예비해야 한다.
만일 당신이 자신의 소유를 내놓을 수 없다면, 당신의 일은 언제나 신뢰할 만하지 못하다. 우리 자신의 금전을 내놓는 것은 아주 합당한 일이며 가치 있는 일이다. 바울은, “내가 재물을 허비하고 내 자신까지 허비하리라. 내가 너희 영혼을 위하여 재물을 허비하고 또 내 자신까지 허비하며 내가 너희 가운데 갈 때에 너희 한 사람에게도 폐를 끼치지 아니하며 디도 또한 너희 중 한 형제라도 폐를 끼치지 아니하리라. 그 형제는 결코 너희 중 어느 한 사람에게도 짐을 지우지 아니하리라. 나는 언제나 어느 누구의 이익도 취하지 아니하였다. 복음이 옳고 분명함으로 나는 내 재물을 허비하면서라도 전하려 한다.”고 말하였다. 우리는 우리 형제 바울과 같이 다른 사람에게 조금이라도 누를 끼쳐서는 안 되며 자기 자신을 허비할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하는 것이 참으로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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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대로 다음의 경우를 보자. 바울은 마게도냐인이 보낸 연보, 곧 빌립보인이 보낸 연보를 받아들였다. 정상적인 상황에서 복음 전파자가 다른 그리스도인이 주는 물질을 받는 것은 합당한 것이다. 바울이 어떤 곳에서는 연보를 받았지만 어떤 곳에서는 받지 않았다. 그가 영적으로 자신에 대해 아무 문제가 없는 마게도냐 사람들의 선물을 받았지만, 아가야나 고린도 지방같이 그를 비평하고 훼방하는 말을 할 기회를 찾는 곳에서는 선물을 거절하고 받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바울의 길이다.
오늘날 우리도 이와 같이 받아들일 것과 마땅히 거절해야 할 것을 구별해야 한다. 마게도냐와 같은 그런 곳에서는 선물을 받는 것이 옳지만 아가야나 고린도같이 사람의 의견이 있는 곳에서는 받지 말아야 한다. 형제자매여, 당신은 하나님 앞에서 이 문제를 견지해 나가야 하며 어떤 것이나 다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만일 뒤에서 비평하거나 비평할 기회를 찾는 사람들이 있다면 당신은 결코 그곳의 선물을 받을 수 없다. 그러나 그 외의 곳에서는 받아도 된다.
우리는 다시 빌립보서로 돌아가서 바울이 그곳의 성도들이 보낸 헌금을 받아들였을 때 어떻게 하였는지 보기로 하자. 다음 구절은 그가 빌립보인에게 쓴 구절이다. “빌립보 사람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시초에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받은 내 일에 참여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너희가 한 번 두 번 나의 쓸 것을 보내었도다 내가 선물을 구함이 아니요 오직 너희에게 유익하도록 과실이 번성하기를 구함이라”(빌 4: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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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바로 바울의 태도다. 복음의 시초에 빌립보인이 그에게 헌금을 보낸 유일한 사람들인 것 같다. 그들은 또한 바울이 고린도와 데살로니가에 있었을 때에도 그를 기억하여 헌금을 보내었다. 그러나 그가 빌립보 사람들에게 한 말을 보자. “나는 결코 어떤 선물도 구함이 아니요 오직 너희에게 유익하도록 과실이 번성하기를 구함이라.” 바울은 그가 빌립보인들의 돈을 사용할 때 하나님께서 그들을 유익하게 하실 것을 알았다. 하나님은 그것이 빌립보인들이 드린 돈임을 기억하실 것이다. 마게도냐 사람은 한 번 헌금하고 후에 재차 헌금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사람들이 우리에게 보내는 헌금에 주의를 기울여서는 안 된다. 사람들이 헌금을 보내 준다 해도 우리가 모두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만일 우리가 헌금을 받게 된다면, 바울이 빌립보 사람들에게 말했던 것처럼 우리도 그들에게 유익하도록 과실이 번성하기를 바라야 한다. 지금까지 말한 것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하나님의 종이 만일 금전에 대한 일에서 구원받지 못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당신은 반드시 금전 문제에서 구원받아야 한다.
바울은 이 구절에 이어서,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18절)고 말한다. 이것은 보통 우리가 표현하는 말과 얼마나 대조적인가! 흔히 우리의 일에 대해 보고할 때 우리는 무언가 부족하다는 것을 나타내어 그들로 돈을 좀더 보내야 한다는 것을 알게 한다. 그러나 우리 형제 바울은 유일하게 그에게 연보를 보낸 교회에게,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고 말했다. 바울의 말에는 이렇게 중복하는 것이 드물다. 형제자매여, 당신은 우리 바울 형제의 이러한 태도를 주의해야 한다. 그는 유일하게 그에게 연보를 보낸 빌립보 교회에게,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풍부하다. 나는 여러분에게 충분히 받았다. 오직 나는 여러분의 연보가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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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란다.”라고 말하였다. 아, 바울은 얼마나 아름답고 순전한 영을 가졌는가! 그는 재물에 대해 조금도 감각이 없는 사람이다. 재물은 그에게 어떠한 느낌도 갖게 하지 않았다.
계속해서 19절을 읽어보자. 이것은 가장 보배로운 구절이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바울은 빌립보의 성도들이 자기에게 보낸 모든 물질적인 도움에 감격하여 감사를 표했지만 그의 체통을 잃지는 않았다. 그들은 연보를 제물로 하나님께 드린 것이지 바울 자신에게 준 것이 아니다. 그것은 바울 자신과는 관계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한 면으로 바울은 그들이 하나님께 바친 연보의 관여자(關與者)였기 때문에 그들에게 아낌없는 축복을 하였다(“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바울은 얼마나 부자였던가! 그는 다른 사람에게 얼마나 많은 부를 나눠 주었던가! 이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능히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게 한다.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께 세세 무궁토록 영광을 돌릴지어다 아멘.”

4

네 번째로, 우리는 교회가 해야 할 것이 무엇이며, 연보가 바울의 손을 거치고 다른 사람에게 전달되었을 때 그가 어떤 태도를 취했는지를 보자. 고린도후서 8장 1절에서 4절은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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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였느니라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라고 말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반드시 지녀야 할 태도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나 하나님을 위해 사역을 하는 사람은 어느 곳에 가서 재물을 만질 때 반드시 이러한 태도를 가져야 한다. 마게도냐 형제들은 예루살렘의 형제에게 기근이 닥쳤다는 소식을 듣고서 연보를 하였다. 바울이 먼저 예루살렘의 기근 소식을 듣고 그들에게 이 어려움을 알려 주었던 것이다. 그들이 이 소식을 들었을 때 사실상 그들도 경제적인 난관에 봉착해 있었지만, 그들은 이 궁핍한 가운데서도 오히려 힘을 다하여 예루살렘 형제들을 돌아보았다. 그들은 어떻게 하였는가? 바울은 그들이 힘에 넘치도록 자원하여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마게도냐에서 연보를 한 형제들 모두의 태도였다. 성도의 어려움을 돌보기 위하여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있어 우리도 힘에 지나도록 자원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궁핍한지 그렇지 아니한지를 고려치 않으며 우리에게 어려움이 있는지 없는지를 상관치 않고 이 일, 즉 성도의 어려움을 돌보는 일에 있어서 분에 넘치게 자원해야 한다. 이 일에 있어 마게도냐 형제들은 바울에게 그들이 예루살렘의 형제들을 돌보는 일에 참여케 해 줄 것을 재삼 요청하였다. 바꾸어 말하면, 바울이 처음에는 그들에게 연보할 것을 허락지 않았는데 이것은 합당한 태도다. 주님을 위하여 사역하는 사람은 비록 자기 자신을 위해 쓰려는 것이 아닐지라도 금전을 보자마자 가져와서는 안 된다. 예루살렘의 형제들이 비록 어려움에 처해 있었지만 연보를 보내기만 해서 되는 것은 아니었다. 특히 마게도냐와 같이 자신들도 환경이 아주 궁핍한 가운데 처해 있을 때에 그들은 연보를 하지 않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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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두 번 세 번 바울에게 와서 그들도 참여케 해 줄 것을 요청했을 때 바울은 그들에게 허락하였다. 이렇게 함으로 양쪽이 다 아름답게 행하였다. 이것이 바로 참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다. 한 면으로 연보를 가져온 사람들은 그들이 궁핍하고 환경이 좋지 않을지라도 더욱더 그의 힘을 다하여 연보하려는 모습을 나타내고 있으며, 또 한 면으로 주의 일을 하는 형제는 그들이 당한 어려움을 알고 있기에 연보하지 않아도 될 것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종과 또 하나님의 종이 섬기는 성도와의 관계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후에 사역하는 형제는 그들에게, 만일 너희가 진정으로 그들을 도와 헌금하기를 원한다면, 금지할 도리가 없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일꾼의 참다운 태도다. 바울은 교회의 일을 처리하는 사람이었으므로 예루살렘의 어려움을 보고 형제들의 필요를 돌보아야 했지만, 그러나 바울의 태도는 오늘날 많은 사역자의 태도와는 다르다. 바울은 마게도냐 교회들이 거듭 그에게 요청했기 때문에 성도 섬기는 이 일에 참여하는 것을 그들에게 허락하였다.
이어서 바울은, “너희를 위하여 같은 간절함을 디도의 마음에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 더욱 간절함으로 자원하여 너희에게 나아갔고 또 저와 함께 한 형제를 보내었으니 이 사람은 복음으로서 모든 교회에서 칭찬을 받는 자요 이뿐 아니라 저는 동일한 주의 영광과 우리의 원을 나타내기 위하여 여러 교회의 택함을 입어 우리의 맡은 은혜의 일로 우리와 동행하는 자라 이것을 조심함은 우리가 맡은 이 거액의 연보로 인하여 아무도 우리를 훼방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 이는 우리가 주 앞에서만 아니라 사람 앞에서도 선한 일에 조심하려 함이라 또 저희와 함께 우리의 한 형제를 보내었노니 …” (고후 8:16-22)라고 말한다. 우리는 여기에서 바울이 한 일을 본다. 그가 사람들 대신에 예루살렘으로 연보를 보낼 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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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절차에 있어서 매우 분명히 하였다. 어떤 일꾼도 금전을 다루는 데 있어서 철저하지 않으면 안 된다. 바울은 어떻게 말했는가? “이것을 조심함은 우리가 맡은 이 거액의 연보로 인하여 아무도 우리를 훼방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 바울은 세 형제를 청하여 돈을 관리하게 하였으며, 바울 자신은 금전에 관여치 않았다. 그 세 형제는 어떻게 했는가? “우리가 주 앞에서만 아니라 사람 앞에서도 선한 일에 조심하려 함이라.” 금전을 관리할 때에는 한 사람에게 일임되지 않고 두세 사람에게 맡겨져야 어려움이 없게 된다.
금전 문제가 이렇게 엄중하였기 때문에 바울은 디모데전서와 디도서에서 특별히 우리에게 주의하여 말하고 있다. 그는 감독의 직분을 맡는 사람은 마땅히 재물을 탐내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딤전 3:3, 딛 1:7). 그리고 디모데전서 3장 8절에서 집사 직분에 대해 말하면서 똑같은 조건을 말했다. 재물을 탐내지 않는 사람만이 집사의 직분을 맡을 수 있다. 만일 어떤 형제가 금전에 대한 문제를 이기지 못하면, 그는 절대로 집사가 될 수 없으며 장로도 될 수 없다. 재물을 탐내지 않는 것이 집사나 장로 직분을 맡을 수 있는 기본 조건이다. 금전 문제는 반드시 해결되어야 하며 느슨하게 다루어져서는 안 된다. 바울이 이렇게 말했을 뿐 아니라 베드로도 이와 같이 말했다. 베드로가 장로 된 사람에게 말한 것을 보자.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무리를 치되 부득이함으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利)를 위하여 하지 말고 오직 즐거운 뜻으로 하며”(벧전 5:2). 탐심이 있는 사람은 결코 하나님의 양무리를 칠 수 없다.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가 재정적인 문제를 완전히 해결할 수 있기를 바란다. 탐심이 처리되지 않으면 조만간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기본적인 금전 문제가 처리되지 않으면,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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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에서 아무 쓸모가 없게 된다. 금전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다른 어떤 것도 해결될 수 없으며 조만간 반드시 결함이 생겨 어려움에 부닥치고 만다. 금전에 대한 당신의 태도는 독립적이어야 한다. 당신에 대해 비난하는 말을 하는 지방에서 당신은 그들의 돈을 거절하기를 배워야 한다. 이 밖에도 항상 다른 사람의 무거운 짐을 짊어지기를 배워야 하며, 자신의 물질적인 필요뿐만 아니라 우리 동료와 형제자매들의 필요를 채워 주기를 배워야 한다. 우리가 만일 금전 문제에 대해 해결할 수 있다면, 한 가지 큰 일을 해낸 것이다. 금전에 대해 이러한 기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사람은 결코 일을 잘 할 수 없다.


W.N. 제3집 제6(52)권 주님의 사역자의 성격 제8장 주관적이지 않아야 한다
Ezra Zion , 2013-04-05 , 조회 (80) , 추천 (0) , 반대 (0), 스크랩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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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장
주관적이지 않아야 한다

 

 

 

 


1

주관적인 것은 하나님의 자녀에게 큰 어려움이다. 특히 그리스도의 일을 하는 사람이 주관적이면 일을 잘해 나갈 수 없다.
그러면, 주관적인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자기의 의견만을 고집하여 다른 사람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듣기도 전에 이미 의견을 가지고 있어서 다른 사람의 생각을 듣고 난 후에도 여전히 자신의 의견만을 고수한다. 바로 이것을 주관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주관적인 것은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고 바뀌기가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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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자신의 의견을 붙잡고서 계속 이 의견을 고수해 나가는 것을 주관적인 것이라고 한다. 주님이 말씀하시기 전에, 사실이 분명히 드러나기 전에, 다른 사람이 이유를 표명하기 전에 주관적인 사람은 이미 선입관을 가지고 있다. 주님이 말씀하신 후에도,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난 후에도, 다른 사람이 이유를 밝힌 후에도 그는 자신의 선입관을 조금도 내려놓으려고 하지 않는다. 이것이 주관적인 것이다. 주관적으로 되는 근본적인 원인은 사람의 자아가 파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에게는 상당히 강경한 주관이 있으며, 이 주관은 버리기가 쉽지 않고 고침받기가 쉽지 않다.

2

주관적인 것이 낳는 어려움은 무엇인가? 주관적인 것이 주는 손실은 무엇인가? 주관적인 사람은 다른 사람의 말을 들을 줄 모른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말을 알아들을 줄 아는 데에서 주관적이지 않기를 배워야 한다. 오직 당신의 내면이 비워져 있어야만 주님의 말씀이 들어갈 수 있고 다른 사람의 말이 들어갈 수 있다. 만일 당신이 주관적인 사람이라면, 당신에게는 많은 어려움이 있게 된다. 주님의 일을 하는 데에 있어서 기본적인 요구 사항은 다른 사람의 말을 듣고 다른 사람의 사정이나 어려움을 알아내는 것이다. 우리가 이미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다른 사람의 말을 들을 수 없는 것은 주님의 일꾼에게 큰 어려움 중 하나이다. 남의 말을 들을 수 없는 가장 주된 원인은 주관적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주관적이기 때문에 당신의 내면에 쌓여 있는 것이 너무 많고, 깨뜨릴 수 없는 의견과 사상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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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당신은 자신의 말만을 계속하게 되며, 자신의 사정으로만 꽉 차있다. 따라서 어떤 형제나 자매가 당신에게 와서 그의 무거운 짐과 그의 사정을 당신 앞에 내려놓으려 할 때에, 당신은 반나절을 들어도 알아들을 수 없고, 아주 오랜 시간을 듣고 있어도 파악해 내지 못하며, 다른 사람의 말을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다. 이것이 주관적인 사람의 어려움이다.

3

주관적인 사람에게 또 하나의 어려움은 어떤 것을 배우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그의 속은 확신에 차 있고 모든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그의 내면에는 자신의 규정이 있어서 어떤 것도 다 그렇게 규정해 버린다. 그의 속에는 모든 것에 의견이 있고, 모든 것에 확신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당신이 그에게 어떤 것을 조금이라도 가르치는 것은 매우 어렵다. 일을 하러 나오고자 하는 젊은이에게 당신이 어떤 일을 조금 가르치는 것은 마치 어린아이에게 약을 먹이는 것처럼 어려워서 그에게 억지로 약을 넣어 주어야 하는 것과 같다. 그는 의견으로 가득 차 있고, 주장과 방법으로 가득 차 있으며,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비록 모든 것을 다할 수 있다고 말할 수는 없어도 마치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것 같다. 이때에 그에게 어떤 것을 가르치는 것은 그에게 약을 먹이는 것보다도 훨씬 어렵다. 만일 사람이 밥을 먹는 것조차도 넣어 주어야 한다면, 그가 일생 동안 밥을 얼마나 먹을 수 있겠는가? 당신은 어떤 형제를 만났을 때 마음속으로 그에게 이렇게 물을지도 모른다. “형제여, 당신 같은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배워야 한다면 일생 동안 얼마나 배울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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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겠는가?” 주관적인 사람의 가장 큰 어려움과 손실은 바로 배울 수 없다는 데 있다. 그에게 배우라고 하는 것은 항상 싸우는 것 같다. 그를 쳐서 엎드러뜨려야 그가 조금 배우게 된다.
그러나 다음 번에도 이와 같이 해야 한다면, 그것은 정말로 큰 손실이다. 주님의 일을 하는 사람의 기본적인 요구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가 다른 이들의 충고를 선뜻 받아들일 수 있기 위해서는 주관적이지 말아야 한다. 형제자매여, 우리가 받은 도움은 각 방면에서 온 것으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이 너무도 많다는 것을 당신은 알아야 한다. 만일 우리가 한 달에 한 가지를 배우고, 육 개월에 한 가지를 배우고, 심지어 일 년에 한 가지를 배운다면 당신은 일생 동안 얼마나 많은 것을 배울 수 있겠는가? 주관적인 사람은 갈수록 배우기가 더 어려우며 갈수록 더 주관적으로 되어 간다. 이 주관적인 것은 실제로 너무도 큰 어려움이다.
주님의 일꾼은 하나님 앞에서 아무 요동함 없이 견고하고 정직한 길을 가야 한다. 다른 면에서, 만일 그의 의견과 견해가 확고하고 그가 결정한 것에 대해 요지부동한다면 그가 배울 수 있는 기회는 너무나 적으며 일생토록 그는 별 쓸모가 없을 것이다. 우리는 한 면으로 주님 앞에서 요동하지 않고 견고해야 하지만, 또 한 면에서는 주관적이어서도 안 된다. 하나님의 자녀는 마땅히 주관적이지 않기를 배워야하며 하나님께서 자유로이 움직이시도록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배우기가 쉽지 않다. 만일 당신이 주관적인지 주관적이지 않은지를 알고 싶다면, 단지 당신이 어떤 것을 배우는 데 있어서 빠른지 느린지, 그것을 배울 수 있는지 없는지, 영에 속한 일에 있어서 항상 배울 수 있는지 없는지, 많이 배울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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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지 없는지를 보기만 하면 된다. 배우는 데 있어서의 방해물은 바로 주관적인 것이다. 주관적인 것은 당신이 참된 배움을 갖지 못하게 한다.
영적인 일에서 진보하는 기본적인 요구는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여 열려 있는 것이다. 우리의 영이 하나님께 열리고,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께 열리고, 우리의 사상이 하나님께 열려야 한다. 하나님을 향하여 연다는 것은 주관적이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하나님께 영을 활짝 여는 것은 주관적이지 않은 것보다 그 의미가 더 깊다. 그러나 첫 단계는 주관적이지 않는 것이다. 주관적이면 하나님을 향해 문이 닫혀 버린다. 주관적이지 않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강경하지 않고 배우고자 하며 하나님께로부터 어떤 인상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쉽게 인상을 받지 못한다. 그들이 어떤 인상을 받게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채찍과 지팡이를 사용하셔야 할 뿐 아니라 심지어는 쇠망치로 그들을 치셔야만 한다. 하나님의 눈동자가 움직이기만 하면 즉시 깨달을 수 있도록 우리는 공과를 배워야 한다.
말과 노새 같이 굴레나 채찍으로 깨닫는 사람은 주관적인 사람이다. 주관적인 사람은 배울 방법이 없다. 하나님께서 그와 다투시며 그를 막다른 길로 인도하시고 큰 장애를 만나게 하셔도, 그는 여전히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하나님 앞에 단번에 복종하여 그가 마땅히 배워야만 할 공과를 배우지 못한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부드럽지 않고 온순하지 않으며 아주 강퍅하고 강경하다. 그들이 일에 있어서 큰 어려움을 당하는 이유는 그들이 일생 동안 배운 공과가 얼마 되지 않아 많은 공급을 줄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큰 어려움일 뿐만 아니라 커다란 손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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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주관적인 사람의 또 하나의 문제점은 하나님의 인도를 받을 줄 모른다는 데 있다. 그는 하나님의 인도를 만질 줄도 모르고 하나님의 인도를 받을 줄도 모른다. 주관적인 사람은 북극과 남극이 멀리 떨어져 있듯이 하나님의 뜻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그는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답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한다. 사람이 인도를 받기 위해서는 매우 부드러워야 하며 말을 잘 들을 수 있어야 하고 부지런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자마자 주관적이 되지 말고 즉시 일을 시작해야 한다. 민수기 22장에 발람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발람의 마음이 재물의 이익에 기울어졌기 때문에 문제가 생겼다. 이것이 그의 속에 반드시 가야 한다는 주관적인 관점을 낳았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 앞에서 한 차례, 두 차례 기도하였고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실 때까지 기도하였다. 사람이 일단 어떤 것을 하기로 정해 버리면 하나님의 뜻을 알기가 쉽지 않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으로 안내되는 길로 가는 것을 배워야 한다. 이 길에서 우리는, 때때로 우리가 발걸음을 멈춰야 하고, 때로는 즉시 출발해야 한다는 것을 보아야 한다. 많은 경우에 당신이 모든 길을 예비하여 가고자 하였는데 주님께서 즉시 멈추라고 하시면 당신은 어떻게 하겠는가? 만일 주의 영이 당신이 가는 것을 허락지 않는다면, 당신은 즉시 정지할 수 있는가? 주관적인 사람은 정지할 수 없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를 배운 사람은 결코 주관적이지 않은 사람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를 배운 사람은 하나님께서 ‘가라’하시면 즉시 갈 수 있고 ‘멈추라’하시면 즉시 멈출 수 있는 정도에까지 이르러야 한다. 이 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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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디를 간단하게 생각지 말라. 주관적인 사람은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시는데도 가기가 쉽지 않으며 멈추라 하시는데도 멈추기가 쉽지 않다. 이것이 바로 어려움이다. 주관적인 사람들은 얼마나 힘을 소모해야 자신을 움직이게 할 수 있는지를 알지 못한다. 일단 그들이 활동하면 누구도 그들을 멈추게 할 수 없다. 하나님 앞에서 배움이 있는 사람은 그렇지 않다. 그들은 하나님이 움직이라 하시면 움직이고 하나님이 움직이지 말라 하시면 움직이지 않을 정도로 하나님의 손에서 부드럽다. 이런 사람만이 하나님의 인도를 받을 수 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심한 채찍이 있어야 움직인다. 일단 그가 한 번 움직이면 일평생 누구도 그를 멈추게 할 수 없다. 그는 언제나 줄곧 이렇게 계속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시 엄한 손으로 그를 쳐서 멈추게 하신다. 그의 주관적인 것은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쉽게 알지 못하게 하며 또한 하나님의 뜻에 따라 행하기도 어렵게 한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드리는 것은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이다. 이것은 그가 결코 주관적이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명하셨을 때, 아브라함이 만일 주관적인 사람이었다면 이삭을 제물로 드리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고 또한 많은 설명이 필요했을 것이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본래 나에게는 아들이 없었습니다. 나는 아들을 얻을 생각도 없었고 이스마엘로 만족했는데, 당신이 내게 아들을 주시고자 하셨습니다. 나와 사라는 조금도 그럴 생각이 없었는데, 모두 당신이 하신 일입니다. 당신이 그렇게 하시고서 어떻게 또 이삭을 드려 번제물로 삼으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형제자매여! 주관적인 상태에 있는 사람이 이같은 도전을 받을 때, 그는 하나님의 요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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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절하기 위해 무슨 이유든 만들어 낼 것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매우 단순했기 때문에 이것은 그에게 아무런 어려움이 되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실 것을 굳게 믿었다. 그가 자기 아들을 제단 위에 놓고 칼을 빼내어 죽이려고 할 때에, 하나님은 그를 위하여 아들 대신 제물로 바칠 수양 한 마리를 예비하셨다(창 22:10, 13). 만일 아브라함이 주관적이었다면, 그는 어려움에 처했을 것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언제는 나에게 이렇게 하라고 하시고서 이번에는 저렇게 하라고 하시니 그 뜻을 참으로 모르겠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결코 주관적이지 않았다.
어떤 사람은 제단에 올라가기가 어려운데 일단 제단에 올라가서는 또한 거기서 내려오기가 어렵다. 제단에 올라가는 데에도 몇 년을 소비해야 했지만 일단 올라가서는 도무지 고집부리며 내려오려고 하지를 않는다. 주관적인 사람은 순종하는 일에 있어서 자신의 뜻을 따르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에게 멈추라고 명령해도 멈출 수 없는 것이다. 주관적인 사람은 결국 마지못해 하나님께 순종하지만 그 순종은 여전히 자신의 힘에 의지한 것이다. 당신이 그를 데리고 오려고 해도 그는 돌아올 수가 없다. 하나님의 뜻은 그가 철회하도록 하려는 것이지만, 그 자신은 그렇게 할 수 없다. 하나님의 명령은 그를 다시 거두어들이게 하는 것이지만, 그 자신은 거두어들일 수 없다.
당신이 자신의 뜻을 하나님의 뜻 안에 둘 때 하나님은 뜻을 변경시킬 수 있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당신의 뜻을 바꿀 수 없다면, 당신은 결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행할 수 없게 된다. 이것은 매우 특별한 일이며 가장 큰 문제다. 어떻게 하면 야생마를 온순한 말이 되게 할 수 있겠는가? 야생마는 누구도 탈 수 없으며, 그리고 야생마를 훈련시킨다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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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야생마를 훈련시키기 위해서는 말을 잘 타는 사람이 말에 껑충 뛰어 올라, 말이 뛰고 발악하게 하여 아주 지칠 정도로 달리게 할 때에야 말을 잡을 방법이 있게 된다. 말 등에 탄 사람의 유일한 방법은 말 등에서 내려오지 않는 것이다. 몇 십 리든 몇 백 리든 계속 달리게 하여 말이 이 주인에게는 어떻게 해볼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될 때에야 순종하게 된다. 이러한 기수는 말들이 아주 정확하게 달리게 될 정도로 야생마를 훈련시킬 수 있다. 가장 작은 원 한가운데에 기둥을 꽂아 놓고 끈으로 말을 기둥에 매어 두면, 말이 조금만 한쪽으로 치우쳐 달리거나 조금만 잡아 당겨도 끈은 끊어진다. 말이 조금만 빗나가도 그 끈은 똑바르게 되지 않는다. 그러나 말들은 꼭 알맞게 달릴 줄 알며, 원을 따라서 몇 백 바퀴도 돌 수 있는데 그 반경은 아주 길다. 이 정도까지 달릴 수 있으면 문제가 없다. 이후로는 어느 때를 막론하고 이 말들이 작은 굴을 지나도록 해야 하며 또 큰 굴을 통과하도록 훈련시켜야 한다. 이렇게 될 때 말은 언제나 당신을 감히 거스르지 않게 된다. 형제자매여, 주님께서 우리 야생마들을 확실하게 훈련시키시는 것은 아주 큰 일이다. 주님은 마치 야생마를 훈련시키듯이 큰 힘을 들여서 우리를 그분께 순복하게 하신다. 훈련을 받은 야생마는 주관적인 것이 사라진다. 잘 훈련된 말은 위에 탄 사람이 조금만 움직여도 얼마를 달려야 할지를 알고 달린다.
시편 32편 8절과 9절은 “내가 너의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 너희는 무지한 말이나 노새같이 되지 말지어다 그것들은 자갈과 굴레로 단속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가까이 오지 아니하리로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아주 의미심장하다. 우리는 말이나 노새 같아서는 안 된다. 무지한 말이나 노새도 어느 단계까지는 훈련될 수 있어서 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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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대로 움직일진대,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 앞에서 인도를 받을 때에 응당 길들인 말보다 훨씬 빨라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훈련된 말이나 노새를 무지하다고 하셨다. 왜냐하면 말이나 노새는 주인이 때리거나 고삐를 잡아 멎게 해 주어야만 주인의 뜻을 알기 때문이다. 우리는 주님의 눈을 바라보기만 해도 무엇을 요구하시는지 알아차릴 수 있지만, 무지한 노새와 말은 이것을 할 수가 없다. 다윗은 시편 32편 8절에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나의 눈으로 너의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원문 참조). 그는 주님의 눈동자가 움직이기만 해도 즉시 알 수 있었다. 주의 손이 움직인 것도 아니고 눈동자만 움직였을 뿐인데 그는 즉시 알 수 있었다.
우리는 여기서 말하는 ‘눈동자’를 주의해야 한다. 주관적인 사람은 이것을 모른다. 형제자매여, 결코 사람 됨됨이와 성격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지 말라. 당신의 됨됨이가 주관적이라면 결코 하나님께 객관적으로 될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하라. 결국 당신은 일생토록 주관적이어서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를 알 수 없다. 아마 우리는 훈련된 말처럼만 될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것은 노새에 불과하고 충분치 않다고 말씀하신다. 주님의 눈이 어디를 바라보면 우리는 즉시 그곳을 주목하는 경지까지 이르러야 한다. 주님이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지 안다면, 우리는 즉시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 주님이 어떤 뜻을 가지고 계신지를 안다면 우리는 즉시 멈추어야 한다. 자기 의견과 견해를 갖고 있는 주관적인 사람에게 주님 앞에서 주의 영을 기다리라고 하는 것, 즉 주님이 움직일 때 따르고 주님이 멈출 때 멈추라는 것은 전혀 불가능한 일이다. 많은 때에 주님이 당신에게 멈추라고 요구하시지만 당신은 멈출 수가 없고 멈출 방법이 없다. 왜냐하면 당신 속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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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려는 사람은 반드시 자아를 바깥에 두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을 준행할 때에도 반드시 자기 자아를 바깥에 두어야 하며, 주님이 가라 명하시면 가고 멈추라 명하시면 멈추어야 한다. 이럴 때 우리의 자아는 언제나 바깥에 있게 된다.
주관적인 사람은 자아를 내면에 두고 있기 때문에 주님이 멈추라고 해도 멈출 수 없다. 많은 사람들에게 두 가지의 어려움이 있다. 하나는 무엇을 시작할 때에 즉시 움직일 수 없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어떤 일을 계속해 나가고 있을 때에 즉시 멈출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히 큰 어려움이다. 가장 큰 문제는 우리가 주관적인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 때문에 하나님의 뜻이 우리 몸에서 쉽게 표현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아는 것은 방법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 됨됨이의 문제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아는 방법을 사람들에게 이야기해 준다고 해서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결코 이런 일은 없다. 오직 옳은 사람만이 옳은 방법으로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다. 사람 됨됨이가 옳지 않으면 방법이 옳다 하더라도 여전히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은 당신이 어떤 유의 사람인가에 달려 있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은 어떤 방법을 사용하는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을 아는 데에 방법이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아는 것은 그 사람이 어떠한가에 달려 있다는 말이다. 만일 사람이 옳지 않다면 하나님의 뜻을 아는 방법에 관하여 모든 것을 배웠을 지라도 여전히 그것을 알 수 없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 앞에서 주관적이지 않은 사람, 하나님의 다루심을 받은 사람, 자신의 주관적인 것이 파쇄된 사람, 자신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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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견이 없는 사람만이 하나님께서 움직이시기만 해도 즉시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다. 만일 당신이 부드럽게 하나님을 따라 움직이고 멈출 수 없다면, 당신은 하나님의 뜻을 알 수도 없고 하나님의 뜻을 아는 종이 될 수도 없다. 하나님의 종은 어떤 환경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다. 외적으로 아무리 심한 요구가 있고 아무리 심한 말을 듣더라도 그는 상관치 않는다. 그런 것들은 그를 방해할 수 없다. 하나님을 따라 쉽게 변화되고, 하나님을 따라 쉽게 멈추며, 하나님을 따라 쉽게 인도되는 것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에 대한 기본적인 요구이다. 오직 이렇게 될 때만이 사람들을 하나님의 길로 가도록 이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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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관적인 것에 관해서 우리가 좀더 말해 두어야 할 점은, 오직 하나님께 다룸을 받아서 주관적이지 않게 된 사람만이 주님에 의해 이끌려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주관적인 사람에게 결코 다른 사람을 돕는 일을 맡기지 않으신다. 주관적인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준행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준행하게 할 수도 없다. 주관적인 사람에게 주님의 일을 맡기어 형제자매들을 인도하게 한다면, 그 결과로 주님의 뜻은 흐려지고 대부분 자신의 뜻만 남게 될 것이다. 주관적인 사람은 다른 사람이 자기의 말을 듣도록 강요한다. 다른 사람에게 자기 말을 듣도록 강요하는 사람은 유용하게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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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다른 사람이 우리의 말을 듣기를 요구하지 않도록 하나님께 파쇄되어야 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간섭하지 않고, 개인의 생활이나 견해를 간섭하지 않는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든 간섭하지 말고 어떤 일이든지 간섭하려 해서도 안 된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 이런 정도에까지 그분께 이끌려질 때 비로소 그는 하나님의 권위를 대표하는 데 쓰임받을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큰 문제거리가 된다. 비록 그에게 하나님의 권위가 있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며,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서 대인과 선생이 되고, 아비가 되려고 한다. 우리 주님은,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 “(마 20:25-26)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는 그분께 파쇄되지 않고 자기 주장과 자기 요구가 있으며 특별히 좋아하는 사사로운 일이 있는 사람을 쓰실 수 없으며 신뢰하실 수 없다. 만일 하나님께서 이런 사람 손에 그분의 양무리를 맡긴다면, 그는 양들을 모으기는커녕 도리어 흩어지게 할 것이다. 하나님은 이러한 사람들에게 그분의 양무리를 맡길 수 없으며 그들 손안에 놓아두실 수 없다. 만일 사람이 자기 뜻대로 가고자 한다면, 그에게는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길로 하나님의 백성을 인도할 방법이 없다.
결혼에 대한 바울의 태도는 매우 부드러웠다. 그 자신이 독신이었으며 하나님 앞에서 독신으로 있는 것이 결혼하는 것보다 낫다는 것을 알았지만 종래 결혼하는 것이 나쁘다고 말하지 않았다. 형제자매여, 우리의 형제 바울이 얼마나 제한을 받았는가를 보라. 만일 바울이 주관적인 사람이고 그의 주관적인 것이 파쇄되지 않았다면, 그는 모든 형제자매가 독신으로 동정을 지켜야 하고 모든 사람이 결혼하지 말아야 하며 결혼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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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장했을 것이다. 주관적인 사람은 이렇게 하기가 쉽다. 그러나 바울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자기 자신이 옳다고 여긴 것을 지켰으며 또한 그가 지킨 것의 가치를 알았다. 그러나 그는 또한 다른 사람들이 그 외의 길을 가는 것을 허용하였다. 그는 다른 사람이 육신의 고난을 면하기를 원하였지만 또한 다른 사람이 결혼하는 것을 찬성하였다.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 강하였지만 한 면에서는 아주 부드러웠다. 어떤 사람이 시집가고 장가드는 것을 금지해야 한다고 말할 때에, 비록 바울은 독신자였지만 그는 시집가고 장가드는 것을 금지하는 것은 마귀의 가르침이라고 말하였다.
형제자매여, 당신은 이러한 위치에 서기를 배워야 한다. 결코 당신 개인의 감정 때문에 어떤 진리를 지나치게 높은 위치에 두거나 입을 다물어서는 안 된다. 당신의 느낌으로 하나님의 진리를 좌지우지 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다른 사람을 인도하는 일을 할 수 있다. 당신의 주관적인 것이 완전히 파쇄되는 것이 주님의 일을 하는 기본적인 조건이다. 주관적인 것이 강한 당신에게 하나님의 일이 맡겨졌다면 그 일이 언제까지 지연될지 아무도 모른다. 그것은 정말 두려운 일이다. 당신이 멋대로 일하고 당신 마음대로 말한다면, 그것은 정말 무서운 일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간섭하지 않기를 배워야 하며 결코 우리의 주관적인 것으로 어떤 사람이나 일을 간섭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이 사람에게 주신 자유 의지를 간섭하지 않으시고 존중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하나님은 에덴 동산에 놓여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화염검을 사용하여 사람이 먹지 못하도록 막지는 않으셨다. 만일 창세기 3장의 화염검이 창세기 2장 안에 있어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지키게 하셨더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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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영원히 범죄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은 쉽게 이렇게 하실 수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렇게 하지 않으시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17)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먹는다면, 그것은 당신의 일이다.
우리는 자기 생각을 다른 사람에게 관철시키지 않기를 배워야 한다. 언제라도 당신은 다른 사람이 당신의 말에 복종하기를 원해서는 안 되며, 당신이 선포한 메시지를 받아들이도록 다른 사람을 강요해서도 안 된다. 하나님 앞에서 받은 부담을 형제자매들에게 말할 때, 그들이 당신의 말을 들으면 감사하고 듣지 않으면 그 말을 철회하면 된다. 절대 당신의 생각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지 않으셨으니 우리도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 만일 사람이 하나님을 배역하려 한다면, 하나님은 그것을 허용하신다. 만일 사람이 당신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그에게 강요해서는 안 된다. 당신은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지 않기를 배워야 하며 억지로 당신 말을 듣도록 요구하지 않기를 배워야 한다. 만일 하나님 앞에서 이 공과를 배웠다면, 당신은 자연스럽게 사람들을 용납할 것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우리의 말을 듣도록 강요하지도 않고 우리의 뜻을 받아들이도록 강요하지도 않으며 우리의 도움을 받아야만 한다고 억지로 요구하지도 않는다. 비록 우리가 우리 자신의 기능이 어떤 것인지를 발견했을지라도 다른 사람에게 그 기능을 받아들이도록 강요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어떤 사람에게도 강요하지 않으셨듯이 우리 역시 어떤 사람에게도 강요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에 있어서 결코 주관적일 수 없으며 결코 어떤 사람에게든지 당신의 말을 듣도록 요구해서는 안 된다. 당신은 하나님 앞에서 조심스럽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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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워야 한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당신의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당신의 책임은 더욱더 커지기 때문이다. 당신이 한번 잘못 말하면 당신의 책임은 실로 막중하다. 다른 사람이 당신의 말을 듣는다고 해서 기뻐하거나 모든 것이 끝났다고 여길 것이 아니다.
이 책임은 너무도 막중하며 이것은 너무도 큰 일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만일 사람들이 당신의 말을 기꺼이 따르려고 하는데 오히려 당신의 길이 바르지 않고 당신이 하나님의 뜻을 아는 데 분명치 않다면, 그것은 정말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것과 같다. 따라가는 소경만 구덩이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두 소경이 모두 구덩이에 빠져 버리게 된다(눅 6:39). 좇아가는 사람만 넘어지고 인도하는 당신은 결코 넘어지지 않는다고 여기지 말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두 소경 모두 다 구덩이에 빠지게 된다. 쉽게 다른 사람에게 말할 수 있고, 쉽게 다른 사람을 가르칠 수 있으며, 쉽게 다른 사람에게 이것은 이렇게 하고 저것은 저렇게 하는 것이라고 말해 줄 수 있다고 생각지 말라. 가르치는 사람이 이렇게 하면 배우는 사람도 이렇게 한다. 당신이 많은 사람의 선생이 되어서 그들에게 이렇게 하고 저렇게 하라고 하면 결과적으로 두 사람 다 구덩이에 빠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배우고 또 배워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 경외하기를 배워야 하고, “다른 사람들이 기꺼이 나의 말을 들으려고 하면 할수록 나는 더욱더 두렵고 떨림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라고 말하기를 배워야 한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백이십 퍼센트의 확신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단지 칠팔십 퍼센트만 말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가 틀릴지도 모른다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엄중한 말을 쉽게 말하는 사람일수록 하나님 앞에서 무게가 없으며, 자신만만한 사람일수록 굳게 설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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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당신의 말을 듣는다고 좋아하지 말고, 그것을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다른 사람이 당신의 말을 들을 때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당신은 사람들을 어디로 인도할 것인가? 당신은 당신의 책임이 참으로 막중하다는 것을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주관적이지 않은 사람이 되기를 배우고 또 배워야 한다.
주관적인 것의 위험성은 다른 사람이 자신의 말에 순종하는 것을 좋아한다는 데 있다. 주관적인 사람은 다른 사람이 자신의 말을 듣는 것을 좋아한다. 당신은 당신의 뜻이 다른 사람의 방향이 되기를 좋아하며, 당신의 의견이 다른 사람의 빛이 되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당신은 당신의 의견이 다른 사람의 빛이 아니며 당신의 뜻이 다른 사람의 방향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사람을 끌어 당신 앞에 오게 하지 않기를 배워야 하며, 다른 사람을 억압해서 하나님께 마지못해 순종하게 하지 않기를 배워야 한다. 형제자매가 기꺼이 당신과 함께 걷고자 한다면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러나 형제자매가 자기의 길을 선택할 때에는 그들이 선택하게 내버려 두라. 우리는 결코 다른 사람을 억지로 붙잡고 우리와 함께 가도록 강요해서는 안 된다. 다른 사람이 자유로이 가고 오게 해야 한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의 특징 중 한 가지는 다른 사람을 자기 말을 듣도록 강요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주관적인 사람은 결코 이렇게 할 수 없다. 주관적인 사람은 다른 사람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고 하나님의 인도를 받지 않으며 그 자신도 어떤 것을 잘 배우지 못한다. 하나님도 일에 있어서 그를 신뢰할 수 없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이미 모든 것을 스스로 정해 놓았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정하심을 찾아낼 수가 없다. 오직 부드러워진 사람만이 하나님의 정하심을 찾아낼 수 있다. 얼마나 많은 것을 내려놓아야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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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관적이지 않기를 배우지 못하고, 자기 의견과 자기 길을 내세우며 자기 생각과 교리를 주장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일이 맡겨졌다면, 교회는 즉시 분열될 것이다. 교회의 분쟁은 모두 사람의 주관적인 것 때문이다.
많은 사람이 개인의 일만을 할 수 있을 뿐 교회의 일은 할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이 오직 개인의 봉사만을 알 수 있을 뿐 무엇이 몸의 봉사인지 알지 못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제껏 하나님의 권위에 순종하기를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결코 하나님의 권위가 될 수가 없다. 많은 사람들이 주의 일을 시작할 때부터 지금까지 다른 사람의 권위 아래 순종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다른 사람을 인도하도록 그들을 권위로 세우실 수 없다. 형제자매여, 당신은 이 일을 특히 주의해야 한다. 젊은 형제가 함께 사역하러 나갈 때에 당신은 언제나 그를 한번 시험해 보아야 한다.
주관적인 사람은 언제나 스스로 머리가 되려 하고, 동시에 다른 사람의 머리도 되고자 하며, 항상 자기 뜻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려고 한다. 하나님의 다루심을 받은 사람은 충성스럽고 많은 말을 하지만, 그는 결코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지 않으며 자기의 생각을 다른 사람에게 주입하지 않는다. 그는 한 면으로 하나님 앞에서 견고하지만, 다른 면으로는 결코 주관적이지 않고 자기의 주관적인 것으로 다른 사람을 강요하지 않는다. 개개인 모두에게 하나님께 순복하거나 순복하지 않을 자유가 있다. 우리는 어떤 사람에게 어떤 일을 하도록 강요할 수 없다. 사람은 저마다 하나님 앞에서 그 자신의 책임이 있다. 그러므로 항상 다른 사람에게 선택할 기회를 주기를 배워야 한다. 당신이 아주 온유하고 부드러운 사람이 되어서 다른 사람에게 선택할 기회를 가질 수 있게 하기를 바란다. 항상 다른 사람에게 이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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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어 보아야 한다. “당신은 무엇을 선택하시렵니까?” 사역을 할 때 우리는 그 길을 사람 앞에 놓고 각자가 길을 선택하게 해야 한다. 선택은 각 사람의 일이다. 어떤 일에 있어서든지 사람이 스스로 선택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대신하여 선택하지 않기를 배우는 데에 힘을 다해야 한다.

6

주관적인 사람은 아주 사소한 일들에서 알아볼 수 있다. 주관적인 것은 일종의 성격과 습관이다. 만일 당신이 하나님 앞에서 당신의 주관적인 것이 파쇄되는 공과를 배웠다면, 당신은 즉시 일상생활의 크고 작은 많은 일들 속에서도 주관적인 것이 파쇄된 것을 분명히 볼 수가 있다. 주관적인 사람은 모든 일에서 주관적이다. 주관적인 사람은 다른 사람을 지배하기를 좋아하고, 의견을 내기를 좋아하며, 사람들에게 이것을 하라 저것을 하라고 명령하기를 좋아한다. 주관적인 사람은 어떤 일에서든지 어떻게 해야 할지를 안다. 젊은 사람이 주님을 섬기러 나올 때, 당신은 단지 몇 명의 형제를 그와 함께 두기만 해도 즉시 그가 주관적인 사람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다. 그 사람이 혼자 있을 때에는 당신이 그것을 알 수 없지만 다른 사람과 함께 있을 때에는 즉시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주관적인 사람은 다른 사람을 지배하려 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어떤 음식은 좋아하고, 어떤 음식은 싫어하며, 어떤 옷은 입기 좋아하고 어떤 옷은 입기 싫어하며, 어떤 타입의 매트리스가 잠자기에 좋고 또 그렇지 않은지를 아주 부산하게 이야기하며, 이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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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것이 좋고 그렇게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계속 주장한다. 그는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것 같다. 단지 두 자매를 한 방에 같이 유숙시켜 보라. 그러면 어떤 자매가 주관적이고 그렇지 않은지를 알 수 있다. 만일 두 자매가 똑같이 주관적인 기질을 가지고 있다면 머지않아 파탄에 이르고야 말 것이다. 한 자매만 주관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면 그래도 함께 지낼 수 있지만, 두 사람이 똑같이 주관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면 함께 살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것은 지금 이후로 우리가 어떤 말도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 아니다. 사역에 어려움이 있고 어떤 사람에게 사정이 생길 때에 우리는 충성스럽지 않은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만일 다른 사람이 우리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을 때 우리는 억지로 우리의 의견을 그에게 강요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우리의 말을 듣지 않는다고 해도 우리는 상처를 받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아주 귀중한 의견을 다른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쉽게 상처를 받는다. 이것이 주관적인 사람의 감정이다. 충성을 다해야 하기 때문에 나는 많은 말을 여전히 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내가 남의 일에 상관하기를 좋아하거나 말하기를 좋아하기 때문만도 아니며 또한 온종일 일마다 말하겠다는 것도 아니다. 도리어 이 일에 있어서 반드시 말을 해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만일 일에 부딪힐 때마다 가르침을 받지 않고 즉시 말해 버린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을 모든 사람의 선생으로 세우지 않으셨다. 어떤 사람은 습관적으로 말하고 습관적으로 많은 사람들을 가르치는데, 이것은 그가 주관적인 사람임을 여실히 드러낸다. 이 사람의 주관적인 성격이 부서지지 않는다면 결코 사역을 해 나갈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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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관적인 사람은 충성된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 충성된 사람은 다만 말해야 될 필요성이 있기 때문에 말하는 것이다. 충성된 사람이 말하는 것은 말하기를 좋아해서 그런 것이 아니고 말에 대한 욕심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충성된 사람이 말하는 것은 다른 사람이 잘못된 길로 가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지 말에 대한 욕심 때문이 아니다. 충성된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거절당한다 해도 괴로워하지 않고 해야 할 말을 한다. 그러나 주관적인 사람은 이와 완전히 다르다. 주관적인 사람은 말하는 데 욕심이 있어서 말을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다고 느낀다. 그는 어떤 일에 부딪히든지 즉시 말해 버리는 습관이 있다. 그는 말하지 않는 것이 불가능하다. 당신은 주관적인 사람이 말하는 것은 그가 말하기를 좋아하고 의견 내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는가! 그는 자신의 뜻이 많은 사람의 멍에가 되는데도 다른 사람에게 자기 의견에 따라줄 것을 요구한다. 주관적인 사람은 자신의 의견이 다른 사람에게 무시되고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몹시 괴로워한다.
형제자매여! 주관적인 사람과 충성된 사람은 전적으로 다르다. 우리에게는 충성된 사람이 필요 없다는 말은 아니지만, 많은 때에 입을 열지 않고 말을 하지 않는 것은 옳지 않다. 당신은 무엇이 충성이고 무엇이 주관적인 것인지를 반드시 분별해야만 한다. 주관적인 사람은 다른 사람의 일을 주관하길 좋아하고 다른 사람이 자신의 말을 듣기를 좋아한다. 그는 많은 일에서 항상 다른 사람을 지배하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이 사람에게는 이 일을, 그리고 저 사람에게는 저 일을 하도록 명령한다. 그는 자신의 방법이 첫째의 방법이고, 가장 좋은 방법이며 자신의 길이 가장 정확한 길이어서 사람들은 모두 이 길로 가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주관적인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자기와 다른 것을 견디지 못한다. 형제자매여, 세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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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작은 사람은 바로 주관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오직 당신이 하나님 앞에서 다루심을 받고 당신의 주관적인 것을 처리할 때라야 비로소 유용한 사람이 될 수 있다. 유용한 사람만이 자기와 다른 사람을 견딜 수 있다. 주관적인 사람은 융통성이 없고 고지식해서 다른 사람이 그와 다른 것을 참아 낼 방법이 없다. 그러므로 만일 기질이 똑같은 두 사람이 한 방에 있다면 그 방에는 평강이 없을 것이다. 한 사람에게는 이렇게 하려는 의견이 있고 다른 한 사람에게는 또 다른 의견이 있어서 그 방은 다툼으로 가득하게 된다. 두 사람은 그 안에서 저마다의 십자가를 지게 되고 거기에는 어려움만이 있게 된다. 때로 주관적인 사람은 모든 일들을 자기 손에 넣고 스스로 하나님의 백성의 우두머리가 되려고 한다. 그래서 이 일은 이렇게 해야 하고 저 일은 저렇게 해야 된다는 규정이 즉시 생기게 된다. 주관적인 사람들은 아주 사소한 일에도 간섭하기를 좋아하고 참견하기를 좋아하며 지배하기를 좋아한다. 이것이 바로 기본적인 어려움이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이런 사람들에게 그분의 일을 맡기지 않으신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러한 주관적인 사람에게 그분의 일을 위임하시는 것을 보지 못했다. 하나님께서도 이러한 사람을 쓰실 수가 없다. 우리는 주관적인 사람이 가는 길이 그다지 깊지 않은 것을 보아 왔다. 왜냐하면 그의 그러한 성격은 가르침을 받으려 하는 성격이 아니기 때문이다. 가르침을 받으려 하지 않는 성격은 더 이상 무엇을 배울 수가 없으며 또한 유용하지도 못하다.
주관적인 사람은 일을 간섭하고 주장을 내세우길 좋아한다. 사람이 주관적이면 하나님의 일을 하는 데 큰 어려움이 있다. 그는 더 이상 어떠한 것을 배우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도 더 이상 그에게 어떠한 것을 위탁하지 않으신다. 또한 그는 이미 그의 모든 힘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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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주관적인 부분에 다 소모해 버렸기 때문에 더 이상 하나님의 일을 할 힘이 없다. 다른 사람의 일을 간섭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다 잊어버린다. 왜냐하면 그의 힘을 다 써버렸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의 포도원을 지키는 사람은 자기 포도원을 동시에 지킬 수 없다.
형제자매여! 우리에게는 주관적으로 행할 한가한 시간이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손에 많은 사역과 책임과 일들을 맡기셨기 때문에, 우리는 자질구레하고 중요치 않은 일들에 간섭할 틈이 없다. 우리는 마땅히 해야 할 일에 우리의 힘과 시간을 쏟아야 한다.
우리는 너무 바쁘다. 오직 하나님의 일을 버려두고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의 책임을 포기한 사람만이 다른 많은 형제자매의 자질구레한 일들을 처리하러 갈 시간이 많다. 주관적인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규정해 놓으신 일을 저버리는 사람이며, 자기의 일을 제쳐 두고 다른 사람의 일만을 간섭하는 사람이다. 만일 주님의 일을 하는 사람이 자기 일을 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일만 간섭한다면, 그의 일은 반드시 형편없게 될 것이다. 두 말할 나위 없이 주관적인 사람은 주님의 일을 잘할 수 없다. 하나님은 그에게 그분의 사역을 위탁하실 수 없으며, 설령 그에게 위탁하신다 하더라도 그는 해낼 수 없다. 주관적인 사람을 주관적이지 않게 하기란 매우 어렵다.
왜냐하면 그의 주관적인 성질은 이미 양성(養成)된 것이기 때문에 그는 모든 면에 있어서 항상 주관적이다. 그는 하나님의 일에서 주관적일 뿐만 아니라 개인의 삶과 다른 사람의 일을 대하는 데 있어서도 주관적이다. 사실, 주관적인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바쁜 사람이다. 그는 무슨 일이나 다 참견하려 하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바른 길을 갈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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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에 있어서나 그는 자기 의견과 견해가 있으며 자기 방법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영적인 일에서의 아주 큰 고충이며 방해물이다. 우리는 주님께 이렇게 간구해야 한다.
“주여, 우리에게 은혜를 주사 우리로 하여금 당신 앞에서 유순하고 부드러운 사람이 되게 하소서. 당신 앞에서 유순하고 강퍅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형제자매 앞에서도 유순하고 부드러우며 강퍅하지 않게 하소서.” 바울은 바로 이러한 사람이었다. 그의 편지는 무게가 있고 힘이 있었다. 바울이 하나님 앞에서 증거할 때 그의 말은 무게가 있고 힘이 있었다.
그러나 고린도 형제들은 바울을 대할 때 그가 “약하고 말이 시원치 않다”(고후 10:10)고 말했다. 바울은 자신이 견지하고 있는 증거에 대하여 결코 느슨하게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의 말은 무게 있고 힘이 있었다.
그러나 사람을 대할 때에 바울은 유순하고 부드러운 사람이었다. 그는 결코 엄하지 않았다. 형제자매여, 당신은 이것을 분별하기를 배워야 한다. 당신은 사역에 있어서는 엄하고 강해야 하지만 당신 자신은 결코 주관적이어서는 안 된다. 바울은 어떤 사람이 착한 뜻으로 복음을 전파할 때에도 하나님께 감사하였고, 어떤 사람이 시기로 그리스도를 전파할 때에도 하나님께 감사하였는데, 이는 전파되는 것이 그리스도였기 때문이었다(빌 1:15-18).
당신은 균형 잡힌 바울을 보았는가? 우리는 다른 사람이 우리와 한 길을 갈 때에도 하나님께 감사해야 하며, 우리와 다른 길을 갈지라도 그들이 형제자매이므로 마음속에 조금도 어렵게 느끼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그러한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 즉 하나님의 간증에 있어서 충성스러워야 하며 사람 됨됨이에 있어서 조금도 주관적이지 말아야 한다. 충성된 자는 주관적이지 않은 반면에, 주관적인 사람이 반드시 충성된 사람인 것은 아니다. 우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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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두 가지가 다르다는 것을 반드시 보아야 한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주관적인 것은 바로 파쇄되지 않은 자아이다. 그러므로 형제자매여, 주님께서 당신을 파쇄시켜 주시기를 하나님 앞에서 간구해야 한다. 다른 사람의 일에 있어서나 당신 자신의 일에서, 당신이 주관적이지 않도록 주님께 구해야 한다. 주님의 치심을 받고 파쇄되어야만 당신은 부드러운 사람이 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어느 정도는 주관적이게 된다. 사람이 엄하든 엄하지 않든 거기에는 항상 의견이 있고 방법이 있으며 항상 다른 사람을 지배하려는 것이 있게 된다. 그러므로 당신이 더 이상 일어날 수 없을 정도로 다룸을 받고 온전히 파쇄되어야만이 어떤 일을 당하든 간증에 있어서는 충성스러울 수 있고, 다른 사람이 당신의 말을 따르든 따르지 않든 상관하지 않을 수 있다. 당신은 항상 말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고, 많은 사람의 스승이 되려 하지도 말아야 한다.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거나 다른 사람을 대신하여 결정해 주지 말아야 하고, 다른 사람이 할 일을 간섭하거나 다른 사람의 사역을 지배하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형제자매여, 우리는 사역에 있어서는 마땅히 강해야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부드럽고 유순하며 주관적이지 않기를 배워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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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N. 제3집 제6(52)권 주님의 사역자의 성격 제7장 성격이 견고해야 한다
Ezra Zion , 2013-04-05 , 조회 (73) , 추천 (0) , 반대 (0), 스크랩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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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장
성격이 견고해야 한다

 

 

 

 


1

모든 그리스도의 일꾼에게 없어서는 안 될 또 하나의 성격은 견고함이다. 혹은 이것을 감정상의 견고함이라고도 말한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견실(堅實)하고 견고하다. 그러나 또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흐리멍덩하고 견실하지 않으며 주님 보시기에 안정되지 못하고 환경에 따라 이리저리 요동한다. 많은 사람들의 성격이 신뢰할 만하지 못하며 그들 자신조차도 자신의 성격을 의지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의 성격은 의지할 만한 것이 못되어서 어떤 것에 부딪히기만 해도 즉시 요동한다. 그들은 성격에 있어서 충분히 견실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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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하다. 하나님은 그분을 섬기는 사람들이 견고한 성격과 견실한 성품을 가져서 의지할 만하고 요동치 않기를 원하신다.
성경에서 우리는 쉽게 요동하는 한 사람을 찾아볼 수 있는데, 그 사람은 바로 모두가 다 아는 베드로이다. 마태복음 16장 13절부터 16절까지의 말씀을 읽어 보자. “예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가라사대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가로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가라사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요한일서 5장 1절은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니”라고 말하고, 5장 13절에서는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베드로가 여기에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말했다는 것은 그가 적어도 하나님의 생명을 만져서 이것을 알았다는 것을 뜻한다. 마태복음 16장 17절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고 말한다. 형제자매여, 당신이 기억해야 할 것은, 사람들이 주님과 함께 있었고 주님을 좇았으며 주님 곁에 앉아 있었지만 여전히 주님이 누구신지를 알지 못했으며, 하나님께서 계시하실 때라야 비로소 그가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특별히 주의해야 할 것은 18절 말씀이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Petros, 돌)라 내가 이 반석(Petra)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우리가 반드시 보아야 할 것은, 교회는 요동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교회의 기초는 요동하지 않으며 교회 자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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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동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섬기는 모든 사람들은 요동하지 말아야 한다. 주님은, “내가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리니”라고 말씀하셨다. 교회는 반석 위에 세워진다. 우리는 이 반석을 주의해야 한다. 주님은 이 말씀을 하실 때 마태복음 7장에서 말씀하신 산상수훈의 지혜로운 자와 어리석은 자의 집 짓는 비유를 대조적으로 생각하신 것 같다. 지혜로운 자는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세웠으므로 비가 오고 창수가 나도 그 집이 흔들리지 않았지만, 어리석은 자는 모래 위에 집을 세워서 집이 흔들리게 된 것이다. 여기에서 주님은 그분의 교회를 반석 위에 세우셨으며 그분의 교회는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신다. 비가 오고 창수가 나도 교회는 흔들리지 않는다. 물이 차서 넘칠지라도 교회는 흔들리지 않는다. 바람이 아무리 거세게 불어도 교회를 넘어뜨릴 수 없다. 이런 것들은 모두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교회가 어떤 어려움에 처해도 넘어지지 않는 것은 교회가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 위에 건축되어서 견고하고 요동치 않기 때문이다. 이것이 교회의 근본적인 성질이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하나님의 집인 하나님의 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터라고 말하고 있다(딤전 3:15). 교회는 기둥과 같아서 움직일 수 없다. 흔들리는 의자는 견고하지 않다. 집이 동쪽으로 기울었다 서쪽으로 기울었다 한다면, 그것은 큰 문제다. 교회의 기본적인 성질은 견고하고 흔들리지 않는 반석 위에 건축된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는 모두 이 반석 위에 있는 돌(Petra)이다. 베드로는, “너희도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벧전 2:5)라고 말했다. 모든 형제자매는 다 산 돌로서 반석 위에 건축되어야 한다. 이 건축의 기초가 무엇이면 그 위에 건축된 것도 무엇이어야 한다. 아래의 기초가 무엇이면 위의 건축 재료도 무엇이어야 한다. 교회 안에는 벽돌이 없고 오직 돌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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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벨탑은 사람이 돌을 모방하여 만든 벽돌로 지은 것이다. 교회 안에는 사람이 만든 견고함인 벽돌이 없다. 교회는 반석이신 그리스도 위에 건축된 것이다. 우리 개개인은 모두 주님 앞에 산 돌같이 하나씩 쌓아져 신령한 집으로 건축된다. 우리는 교회의 기본적 성질, 즉 주님의 교회는 결코 흔들릴 수 없다는 것을 보아야 한다. 이러한 이유로 주님은 계속해서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계신다.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 16:18). 흔들릴 수 없는 이것이 바로 교회이다. 교회의 기초는 돌이어서 흔들리지 않으며, 교회 자신 또한 돌이어서 결코 흔들리지 않는다. 그렇다면 교회 안의 사역자가 흔들릴 수 있겠는가? 우리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문제는 바로 이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교회의 문제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역자에 관한 문제를 말하려고 한다. 사역자는 산 돌이기 때문에 흔들릴 수 없다. 주님이 베드로에게, “너는 베드로라”고 말씀하신 것은 ‘너는 돌이다’라는 말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베드로는 여기에서 교회 안의 사역자를 대표한다. 사역자 곧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모두 돌이 되어야만 기능을 발휘할 수 있다. 비록 건물을 형성하고 있는 이 돌이 기초를 이루고 있는 반석처럼 넓고 크지는 않지만 본질에 있어서는 기초를 이루는 반석과 똑같아서 결코 요동할 수 없다.
주님은 계속해서,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 16:19)고 말씀하신다. 주님은 교회에게 허락하신 것을 베드로 개인에게도 허락하셨다. 이 허락은 마태복음 18장에 이르러 교회에게 주신 것이다. 여기서 주님이 베드로에게 천국 열쇠를 맡기신 것은, 우리 주님이 베드로를 그리스도의 사역자로 보셨기 때문이라는 것을 우리는 분명히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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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은 천국 열쇠를 그에게 주어서 문을 열게 하셨다. 우리는 오순절 때에 베드로가 천국 문을 열었으며, 고넬료의 집에서도 베드로가 천국 문을 열었다고 믿는다. 그가 유대인의 문을 열었으며 이방인의 문도 열었다. 시몬이 베드로(돌)로 되기 전에는 결코 천국 열쇠를 사용할 수 없었다. 오늘날 이스라엘이라고 불리는 사람이 모두 역량이 있는 것은 아닌 것처럼, 베드로라고 명명된 사람이 모두 베드로는 아니다. 이름은 이스라엘이라 불릴 수 있지만, 그 사람은 여전히 연약한 자일 수 있다. 여기에서 주님이 베드로라 하는 사람의 손에 열쇠를 맡기셨지만, 그가 진정한 베드로 곧 참 돌이 되었을 때에 비로소 자기에게 맡겨진 열쇠를 사용할 수 있었다. 그때 그가 푼 것을 하늘에서도 풀고 그가 맨 것을 하늘에서도 매게 되었다.
그러므로 사역자의 성질은 그의 성격과 성질에 있어서의 견고함에 근거해야 한다. 이것은 사역자에게 있어서의 기본적인 요구이다. 그가 요동할 때에 그는 하나님 앞에서 사역을 감당할 수 없으며 교회 또한 그를 따를 수가 없다. 형제자매들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문제는, 성격에 있어서 견고하지 못하고 우왕좌왕 흔들리며 계속적으로 변화하여 동쪽으로 쓰러졌다가 서쪽으로 쓰러지는 변덕을 부리는 데에 있다. 하나님 앞에서 견실하지 못하고 견고하지 못한 이런 형제자매들은 교회를 섬길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굳건히 서지 못하고 끊임없이 요동하여 음부의 권세가 그들을 패배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께 감사한다! 그분은 베드로를 본으로 삼으셨다. 베드로를 변화시키셨던 것처럼, 그분은 우리의 인격도 변화시키실 수 있다. 그분은 한 사람을 찾기를 갈망하신다. 그분은 교회와 근본적인 성격이 일치하여 교회 건축의 성질과 똑같은 그러한 사람을 찾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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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망하신다. 사역자의 직분을 감당하는 사람은 반드시 견고한 돌이어야 한다. 주님을 찬양하자! 그분께서 베드로를 택하여 본으로 삼으셔서 베드로를 변화시키셨듯이, 우리를 변화시켜 견고함에 이르게 하실 것이다. 여기에 베드로라 이름하는 한 사람이 있다. 그러나 그는 베드로답지 않았다. 이름은 분명히 ‘돌’이었지만 오히려 물과 같아서 신뢰할 수가 없었다. 그는 이랬다저랬다 변덕스러웠으며, 어떤 때는 강해 보였지만 어떤 때는 너무나 연약해 보였다. 베드로, 그는 바로 이런 사람이었다. 주님은 이런 베드로를 통해서, 하나님의 다루심을 받지 않고, 성질(性質)에 있어 흔들리고 아직 돌이 안 된 사람은 여전히 열쇠를 사용할 수 없으며 또한 하나님 앞에서 특별한 쓰임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주신다. 변덕스러운 성품이 변화되지 않는 한, 하나님은 우리를 쓰실 수 없다. 사람의 성격이 변할 수 없는 어떤 것이 아니라 변할 수 있음을 인해 주님께 감사한다. 베드로같이 변덕스럽고 우유부단했던 사람도 견고한 사람으로 변화되었다. 주의 빛이 당신을 비추어 당신의 혀를 태우신다면, 비록 당신이 말 많은 성격의 소유자라도 당신은 말이 없는 사람으로 변할 것이다. 게으른 사람이 주님께 책망받으면 그의 게으름은 사라진다. 주님이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심으로 무화과나무가 말라버렸다. 왜냐하면 주님의 꾸짖음과 저주가 있는 곳에 죽음이 있기 때문이다. 만일 당신이 주님을 만나지 않았다면, 당신의 경박한 성품은 살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주님을 만났다면, 당신의 경박한 성품은 시들어 버리게 된다. 당신이 하나님의 빛을 받기만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는 말할 것도 없고 한 형제에게 책망을 받을 때에도 당신의 그러한 성품은 시들어 버린다. 주님이 당신을 한번 꾸짖으시면 당신은 위축된다. 여기서 우리가 말하는 것은 성격상의 변화이다. 혹자는 이것을 성격상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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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조(改造)라고 할지도 모른다. 남의 말을 잘 들어주지 못하는 성격, 냉담한 성격, 게으른 성격, 혹은 연약한 성격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을 한 번 만나기만 하면 그에게도 빛 비춤이 있으므로 그의 이러한 성품들은 즉시 시들어 죽게 된다. 한 형제가 그에게 지적하여 말해 주기만 해도 이러한 말을 들어주지 못하고 연약한 성격의 소유자였던 그가 견고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이 베드로를 택하신 것은 은혜로운 것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연약하고 쉽게 요동하는 모든 사람은 소망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한 사람을 택하여 그에게 베드로라는 이름을 주셨고, 그를 베드로가 되게 하셨으며, 그런 다음 열쇠를 그의 손에 맡기셨고, 사람들을 교회로 인도하게 하셨다.

2

성경은 베드로가 주님이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았다고 말하고 있다. 주님께서는,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다. 베드로에게 조금도 공로가 없다고 말할 수 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아버지께서 너로 알게 하신 후에야 비로소 너는 내가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보게 된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베드로는 여기서 아버지의 계시, 즉 하나님의 계시를 얻은 것이다. 이 계시는 혈육을 통해 안 것이 아니다. 계속해서 다음 구절을 보기로 하자.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 일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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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마 16:21-23). 우리는 이 구절들의 앞 단락에서 베드로가 계시를 받은 것이, 뒤 단락에서는 그가 사탄에게 이용당하는 것을 보여 준다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혹자는 앞 단락에서 베드로는 아버지 하나님을 만났고 뒤 단락에서는 사탄을 만났다고 말한다. 여기서 베드로는 한순간에는 주님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하고, 또 한순간에는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라고 말할 수 있었다. 영적 체험에서 볼 때, 이 두 가지 말은 너무도 동떨어진 양극(兩極)과 같다. 만일 우리가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한다면, 사복음서의 기록 속에서 베드로가 얻은 계시가 매우 높다는 것만을 볼 것이다. 베드로는 아버지의 계시를 받아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인식할 수 있었다. 이어서 주님은 지체할 새도 없이 즉시 베드로에게 말씀하시기를, 교회를 이러한 인식 곧 반석 위에 건축하시겠다고 하셨다. 베드로가 받은 이 계시는 위대한 것이었으며, 주님을 따르며 주님과 함께하던 보통 사람들은 보지 못한 것이었다. 베드로가 받고 본 것은 지극히 높은 계시였다. 그러나 성경의 이 한 장 안에서 베드로는 어느새 극히 낮은 데로 떨어지고 말았다. 베드로는 육신을 의지하여 말했을 뿐만 아니라 사탄을 의지하여 말했던 것이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아버지를 의지하여 말했던 그가 눈 깜짝할 사이에 바뀌어서 사탄에 의해 말했다. 이것은 참으로 너무나 극단적인 전환이다. 교회가 만일 이러한 사역자 위에 건축된다면, 음부의 권세가 반드시 교회를 패배시킬 것이다. 이렇게 요동하고 불안정한 사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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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건축할 수 없다. 교회는 오직 돌과 같이 견고한 사람에 의해서만 건축될 수 있다. 교회의 사역자는 모두 돌과 같이 견고한 사람이어야 한다. 결코 한순간 하나님에 의해 말했다가 즉시 사탄에 의해 말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아주 엄중한 문제이다.
베드로는 가장 높은 계시를 받고서 곧 가장 낮은 단계로 떨어져 버린 것이다. 그는 십자가에 오르시려는 주님을 저지하였고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았는데, 이것은 그가 사탄에게 이용당했기 때문이다. 사탄의 말이 나타날 때 음부의 문은 이미 열린 것이다. 만일 사탄이 승리한다면, 음부의 권세가 이기고 교회는 패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이 베드로를 변화시켜 견고한 돌이 되게 하지 않으셨다면, 교회는 희망이 없었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돌과 같이 견고한 사역자가 필요하며, 믿음직스럽고 요동치 않는 사역자가 필요하다. 이러한 사역자는 이렇게 생각했다 저렇게 생각했다 하지 않으며, 또 변덕스럽게 말하지 않는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 앞에 그렇게 견실하고 견고하다면 우리는 이것이 바로 교회요, 이 속에 축복이 있고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당신이 만일 연약하고 이리저리 요동한다면, 사탄은 즉시 말을 하게 될 것이고 음부의 문은 열릴 것이다. 베드로의 이 사건은 아주 극단적인 대조이며 너무도 동떨어진 양극의 일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베드로가 본래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알게 해 준다.
주님은 저녁 식사를 하신 후 제자들에게, “오늘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이에 베드로는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마 26:31, 33)라고 했다. 베드로의 성격에 비추어 볼 때, 그가 말한 것은 옳았으며 그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결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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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우리가 헌신하고 부흥될 때 우리가 주님 앞에서 한 많은 말은 우리 자신이 알지 못하는 말임을 기억해야 한다. 특히 베드로처럼 정감 있는 사람은,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라고 말하려고 한다. 사실, 그에게는 이러한 감정이 있었지만, 그 자신이 결코 이러한 사람이 아니었다. 감정이 풍부한 사람은 감정과 그 사람 자신을 분리하기를 배워야 한다. 조만간 그는 그의 감정이 그 자신을 대표할 수 없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어떤 사람은 그 자신의 사상만을 좇아서 생활하며 줄곧 그의 머리만을 의지하여 산다. 그가 기도할 때에 당신이 그에게 “당신은 당신의 머리로만 기도할 뿐 마음은 여기에 없습니다.”라고 말하면, 그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것이 내 마음이 아니라면 무엇입니까?”이런 사람은 마음도 없이 오직 머리만 좇아서 살기 때문에 그의 머리가 곧 그의 마음이라고 생각한다. 어느 날 그가 빛 비춤을 받는다면 그것은 그의 머리이지 마음이 아니라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마음속에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몹시도 뜨겁다고 느껴서, “나는 참으로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한 형제가 그에게 “당신은 비록 자신이 주님을 뜨겁게 사랑한다고 느끼지만 사실 그렇게 대단한 정도는 아닙니다.”라고 지적하여 말한다면, 그는 “아닙니다. 나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누구보다도 더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말할 것이다. 어느 날 그의 감정이 처리받게 될 때에, 그는 그의 마음과 그의 감정이 별개의 것이라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감정 자체가 곧 그 사람은 아니다. 마치 사람 자체와 그의 생각이 큰 차이가 있는 것처럼, 그와 그의 감정 사이에도 큰 차이가 있다. 베드로는 자신의 감정을 따라 말하였고, 이 말이 바로 자신이라고 여겼다. 베드로는 다른 사람이 다 주님을 버릴지라도 자신만은 영원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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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지 않겠다고 말했다. 베드로는 그가 말한 ‘나’가 자신이 아니라 그의 감정이라는 것을 몰랐다. 베드로는 그의 겉 사람이 내면에 얼마나 깊이 감추어져 있는지, 또 그의 겉 사람이 얼마나 깊이 뿌리박고 살고 있는지를 몰랐다. 심지어 그는 자신이 말한 것이 얼마나 분명치 않은지조차도 몰랐다. 계속해서 주님은 베드로에게,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마 26:34)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베드로는 여전히 자신을 인식하지 못하고 주님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마 26:35)라고 말했다. 사실상 이것은 양극단이다. 그는 주님께 영원히 주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말하고서 그분을 세 번이나 부인했다. 한 면에서 그는 주님과 함께 죽더라도 같이 가겠다고 말했었는데, 다른 한 면에서는 주를 위해 죽는 것은 고사하고 사람들에게 그가 주님과 함께 하던 자라는 말을 들었을 때 두려워하였다.
이러한 두 극단은 베드로가 얼마나 요동하는 자였는지를 보여 준다. 베드로의 이름은 비록 돌이었지만, 베드로의 성격은 오히려 물과 같아서 이리저리 흐르는 것이었다. 그는 완전히 환경에 의해 지배당하였다. 그가 부딪히는 환경에 따라 그는 그러한 사람으로 변하였다. 그는 겟세마네 동산에 있었을 때 다른 제자들과 똑같이 졸고 있었다. 그가 큰 소리로 말할 때에 그는 다른 사람이 다 떠나도 자신만은 영원히 떠나지 않겠다고 말할 수 있었지만, 그가 겟세마네 동산에 왔을 때에는 다른 이들과 함께 잠이 들었다.
베드로의 성격은 말을 하는 데 있어서는 아주 확신 있고 견고했으며 그 자신의 감정도 참으로 그러했다. 그러나 실제로 행할 때에는 모든 것이 달랐다. 그는 감정 속에서 산 것이었지 참으로 그 자신 속에서 산 것이 아니었다. 사람이 감정 속에서 너무 오래도록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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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면 그 자신이 어떻게 되는지 알지 못하게 된다. 그는 그의 감정이 곧 그 자신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베드로다. 그는 자신을 의지해 영원히 주님을 떠나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이 결코 영원히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그가 사람을 만나지도 않고 단지 겟세마네 동산에 이르렀을 뿐인데, 그는 잠이 들고 만 것이다. 비록 그의 영은 원했지만 육신은 오히려 연약했던 것이다. 베드로는 주위 환경의 변화에 따라 급변하는 사람이었다. 다시 상황이 달라져 많은 군중들이 예수를 잡으러 몰려오자 베드로의 감정은 흥분했다. 그는 손을 들어 칼을 뽑아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쳤다(마 26:51). 베드로는 감히 이렇게 하기까지 주님을 사랑하였고, 주님을 위하여 개인의 위험을 돌보지 않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얼마 후, 베드로는 또 밑으로 전락했다. 이것이 베드로다.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한 일에 있어서 마가복음 14장은, “베드로가 예수를 멀찍이 좇아 대제사장의 집 뜰 안까지 들어가서 하속들과 함께 앉아 불을 쬐더라”고 말한다(54절). 그 후에 대제사장의 한 계집종이 베드로에게 “너도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67절)라고 말하자, 베드로는 이 일을 부인하며 “나는 네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겠노라”(68절)고 했다. 그가 주님을 좇은 지 삼 년 반이나 되었는데 어떻게 그가 주님이 누구인지를 모른단 말인가? 그날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용감히 자르던 베드로가 이렇게까지 될 수 있단 말인가? 칼을 뽑던 베드로의 용기는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때 주님은 거기서 심판을 받고 계셨고 모든 사람은 주님을 조롱하고 있었다. 이러한 환경 가운데서 베드로의 용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이제는 자신을 너무도 사랑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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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머지 기꺼이 죽으려 하지 않고 무슨 수를 쓰더라도 살아야겠다고 발버둥쳤다. 또 다른 한 비자가 그를 보고 곁에 서 있는 자들에게(마가는 특별히 이것을 베드로에게 말하지 않았음을 기록함) 다시 이르되, “이 사람은 그 당이라”고 했다. 조금 전에 한 계집종이 베드로가 나사렛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다고 말했을 때 그는 그 사실을 부인했다. 이제 바깥뜰로 나오자 다른 한 비자가 그를 보고 곁에 섰던 사람들에게 그도 그 당이라고 말했다. 베드로는 여전히 이 말을 부인했다(69-70절). 마태복음 26장 72절은, “베드로가 맹세하고 또 부인하여 가로되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고 말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옆에 섰던 사람이 또 베드로에게 “너는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 당이라”고 말하자, 그는 저주하며 맹세하되 “나는 너희의 말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막 14:70-71)고 말했다. 베드로는 처음에는 다만 주님을 부인했고, 그 다음에는 맹세하여 주님을 부인했으며, 결국 맹세에 저주까지 하며 주님을 부인하였다. 처음에 비자가 베드로에게 말했을 때, 그는 다만 부인하고 거기에 서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여 앞뜰로 갔다. 거기서 그는 다른 한 비자가 곁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그가 갈릴리 사람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다 하는 말을 듣고서 맹세하고 또 부인하여 말하기를, “나는 그 사람을 모른다”라고 하였다. 곁에 섰던 사람들이 모두 그가 틀림없이 나사렛 예수와 한 당 사람이라고 말했을 때, 그는 다만 맹세한 것이 아니라 저주하며 맹세하여 부인했던 것이다.
여기에 사용된 ‘맹세하다’라는 말은 원문에서 서로 다른 단어이다. 두 번째와 세 번째로 주님을 부인했을 때 그는 각기 다른 단어를 사용했다. 그는 각종 맹세의 방법을 동원했다. 그는 두 번째로 부인했을 때 하나님의 이름과 하늘과 땅을 가리키면서 부인했으며, 세 번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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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했을 때는 성을 내고 저주하며 맹세하였다. 베드로는 하나님을 끌어들여서 그가 주님을 모른다는 것을 증명하려 했을 뿐만 아니라, “만일 내가 이 사람을 안다면 나는 저주를 받을 것이다!”라고 저주하며 말하였다. 여기서 그의 말은 매우 거칠고 심한 것이었다. 우리는 베드로가 이 지경에 이를 정도로 타락했다고 말할 수 있다. 여기에 있는 사람은 돌같이 견고한 사람 베드로가 아니다. 그는 한순간 이런 모양이었다가 또 한순간은 저런 모양이었다. 어떤 때는 하늘에 닿을 듯이 치솟다가 또다시 사정없이 떨어져서 사탄에게 이용당했다. 모든 사람이 다 떠날지라도 그만은 떠나지 않겠다고 뜨거운 열정을 보이던 그가 잠시 후에는 잠에 곯아떨어졌다. 용기 있게 칼을 뽑아 말고의 귀를 베던 그가 어느새 비자의 한마디 말에 무서워 어쩔줄 모르고 주님을 부인했다. 그는 맹세하여 주님을 부인했으며, 더 나아가서 저주하며 맹세하여 주님을 부인했다. 이러한 베드로는 성격에 있어서 큰 결점이 있었던 것이다.

3

사람이 이렇게 요동할 수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일반적인 상황에 비추어 볼 때, 사람이 요동하는 것은 세 가지 기본적인 원인 때문이다. 첫째로는, 사람이 감정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둘째는, 사람이 손실을 두려워하고 십자가나 고통을 무서워하며 자신의 쾌락만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셋째로는, 사람을 두려워하고 사람이 싫어하는 것을 두려워하며 다른 사람의 기쁨을 구하고 환경의 즐거움을 구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사람이 견고하지 못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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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적인 원인이다.
베드로가 바로 이와 같은 사람이다. 그는 온통 감정으로 젖어 있었다. 사람이 만일 하나님 앞에서 감정에 의존하여 생활한다면, 어떤 때는 하늘에 속한 것을 만지지만 잠시 후에는 사탄에게 이용당하는 사람으로 전락해 버린다. 왜냐하면 사람이 가지고 있는 감정이란 것은 본래 신뢰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 사람이 오랜 시간 계속해서 자신의 감정을 유지하는 것을 보지 못한다. 사람이 만일 감정에 따라 생활한다면, 그는 자신의 감정의 자극에 따라 변하는 사람이 되고 시시각각 마음이 차가워졌다 뜨거워졌다 하게 된다. 이러한 사람은 하나님의 긍휼을 입어 계시를 받을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자기 마음속의 감정에 의존하여,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라고 말할 수도 있다.
베드로는 주님보다도 더 분명히 알고 있는 것처럼 주님을 가로막았다. 그래서 베드로는 주님을 붙잡고 그분께 권고했던 것이다. 감정에 치우친 사람들은 쉽게 주님의 참모가 되려 하고 주님께 쉽게 고안을 내며 무슨 일이든지 어떻게 해야 할지를 아는 것 같다. 감정에 의존하는 사람은 순간적인 충동에 따라서 행동하므로 갑자기 변하여 주님을 붙잡고는, “주여 그리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라고 주님께 권고할 수 있다. 그는 감정을 따르는 것이 아주 빠르기 때문에 말하는 것도 아주 빠르고 행동하는 것도 아주 빠르다. 그러나 실상 이것은 무엇인가? 이것은 사탄이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땅히 배워야 하며 기본적인 다룸을 받아야만 한다. 쉽게 충동을 받는 우리 자신이 결코 베드로와 거리가 멀다고 생각지 말라. 우리는 우리와 베드로가 그리 차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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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성격에 있어서의 이러한 연약함은 사역에 있어서의 가장 큰 문제다.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오순절은 올 수 없다. 우리는 자신의 감정에 따라 충동적으로 행동하거나 자극에 의해 생활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반드시 자신의 감정을 거절해야 한다. 당신의 감정은 당신을 좌우로, 위아래로 치우치게 할 수 있다. 이러한 것은 주님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부패한 우리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다. 만일 이러한 것이 우리의 생활 가운데서 큰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일에서 그다지 크게 쓰일 수 없다.
가장 연약한 사람은 자신의 느낌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이다. 자신의 느낌을 좇는 것은 결코 견고함의 표시가 될 수 없다. 자신의 느낌을 좇는다는 것은 오히려 연약한 사람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견고한 사람은 자신을 다스릴 줄 아는 사람이다. 그는 눈이 열려서 자신의 느낌을 믿지 않는다. 자신의 느낌을 믿지 않고 자신의 느낌을 거절하는 사람만이 비로소 느낌에 의존하지 않고 생활하는 것을 배울 수 있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자신의 느낌이 곧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베드로는 매우 직선적인 성격의 소유자여서 자신이 말한 것을 진실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그는 본 것을 충동적으로 즉시 말해 버리고 느낀 것을 그 즉시 말해 버렸다. 사람의 눈으로 볼 때, 그는 정직하고 성실하며 잔재주나 술수를 쓰는 사람이 아니다. 그러나 이렇게 느낌에 의존하여 사는 사람은 영적인 길에서는 쓸모가 없으므로 처리받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우리가 주님을 무척 사랑한다고 느끼지만 실상은 주님을 그렇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으며, 기꺼이 주님을 위하여 살고 싶어하지만 실상은 주님을 위해 살지 않을 수 있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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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을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당신 자신은 당신의 느낌보다 훨씬 더 깊어서 당신 자신은 아직도 느낌의 뒤편에 있기 때문이다. 당신은 주님을 위해 기꺼이 죽기까지라도 하고 싶어하지만, 당신은 당신 자신을 아직 모르고 있으며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자신’이 누구인지 아직 모르고 있다. 또한 당신은 주님을 위해 기꺼이 죽고자 하는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며, 주님을 위해 살고자 하는 ‘자신’이 누구인지 모른다. 느낌보다 더 깊은 내면의 감정 외의 것이 진정한 ‘나’이다. 베드로는 그의 겉 사람을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했지만, 거기서 기꺼이 주님을 위해 죽겠다고 말한 것이 그의 겉 사람의 감정일 줄이야! 잠시 후에야 그의 실제의 상태가 드러났다. 그러므로 당신은 혼적인 부분인 감정에 있어서 주님의 다루심을 받지 않은 사람은 언제나 그의 감정에만 의존하여 살아가며 항상 요동하는 가운데 있게 된다는 것을 보아야 한다. 비록 그 자신은 참으로 진실하다고 여길지라도 사실은 그의 감정이 그를 지배한 것이다. 거짓말이 증오스러운 것임을 알면서도 자신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것은 정말 가련한 일이다. 마찬가지로, 자신의 느낌이 신뢰할 만하지 않다는 것은 미워할 만한 일이지만 자신의 감정이 신뢰할 만하지 않다는 것을 모르는 것은 정말 가련한 일이다. 무릇 자신을 자기가 생각하는 바와 같은 유(類)의 사람이라고 느끼는 사람은 모두 어리석다. 아마도 그는 베드로처럼 넘어지고 깨어지며 패배하게 될 때에야 비로소 그의 감정이 그 자신과 똑같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베드로의 감정은 유월절 저녁 만찬 때의 감정과 같지 않았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나올 때의 그의 감정은 대제사장의 뜰에 있을 때의 감정과 또 달랐다.
자기 자신과 자신의 감정이 다르다는 것을 분별할 수 있는 사람은 복 있는 사람이다. 오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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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매한 사람만이 감정을 곧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 앞에서 가르침받은 사람은 감정이 곧 자기 자신이 아니며 자기 자신과는 별개라는 것을 안다. 형제자매여! 당신은 이것을 보았는가? 당신은 감정의 충동에 따라 변해서는 안 된다. 당신이 만일 충동적으로 말한다면, 베드로가 하늘에 속한 사람이며 영원히 주님을 떠나지 않을 사람이며 주님을 위하여 칼을 뽑아 말고의 오른쪽 귀를 베어 버렸다는 데에 수긍할 것이다. 그러나 영적인 방면에서 볼 때, 베드로의 감정이 결코 베드로 자신인 것은 아니다. 베드로의 감정은 용감했지만, 베드로 자신은 겁이 많았다. 베드로의 감정은 주님을 사랑했지만, 베드로 자신은 주님을 사랑하기보다는 자신의 생명을 더 사랑했다. 베드로의 감정은 자신을 한쪽에 제쳐놓았지만, 베드로 자신은 자기를 보호하려 하였다. 만일 교회의 사역자가 이러한 사람이고, 만일 교회가 이러한 사람을 좇아간다면, 교회는 그와 함께 요동할 것이며 음부의 권세가 교회를 반드시 패배시킬 것이다. 하나님은 이러한 사람을 쓰실 수 없다.
그럴 뿐만 아니라 베드로는 손실도 두려워하였다. 사람이 견고하지 않은 큰 이유는 바로 손실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은 십자가를 지지 않았거나 시련을 만나지 않았거나 고난을 당하지 않았을 때에는 용감하다. 그러나 마땅히 목숨을 버려야 할 때가 되거나 혹은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할 때가 닥치면, 그는 곧 물러난다. 평소에는 개개인이 모두 다 주님을 사랑하고 십자가를 지는 것 같으나, 중요한 상황에 직면하면 오히려 지탱해 나갈 수 없게 된다. 왜 이렇게 될 수 있는가?
그 원인은 바로 손실을 두려워하고 자신을 사랑하는 데에 있다. 베드로의 어려움은 바로 여기에 있었다. 대제사장의 집 뜰에서의 일은, 베드로가 가이사랴 빌립보 경내에서의 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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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 한 일을 표명하는 것에 불과하다. 베드로가 손실을 두려워하고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대제사장 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시작된 것이 아니다. 베드로는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임당하실 것을 예언하셨을 때에 재빨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베드로는 자신이 바로 자기가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그는 주님께 이렇게 권했던 것이다. 그는 손실을 두려워하고 죽음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주님께서 그리하시지 않기를 바랐다. 심지어 그는 주님을 붙잡고 책망할 정도로 이기적이었다. 그러므로 형제자매여! 견고한 사람이란 하나님 앞에서 죽기까지 충성하는 사람이다. 사탄도 손댈 방법이 없는 사람은 바로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않는 사람이며, 가장 연약한 사람은 자기의 생명을 아끼는 사람이다. 자기의 생명을 아끼는 사람은 생명과 관계된 일에 부딪힐 때 즉시 넘어지게 된다. 베드로가 바로 이러한 사람이었다. 그는 주님을 설득하여 말했다.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바꾸어 말하면, “주여! 당신은 결코 십자가에 올라가실 수 없습니다.”라고 말한 것이다. 후에 그는 여러 가지 방법을 써서 자신이 십자가에 이르지 않도록 하였다. 심지어 그는 저주하며 맹세하는 방법까지 동원하였다. 그러므로 고난 받을 마음가짐은 확실히 큰 문제이다.
후에 베드로는 고난 받을 마음가짐에 대해 아주 깊이 말하였다. 그는 그 자신이 옳지 않았음을 깨닫고 이 공과를 배웠다. 그는 고난 받을 마음가짐을 병기로 삼았는데, 이것은 그가 종전에는 갖지 못했던 것이었다. 두려움이 없는 사람은 강하다. 두려움이 없는 경지에 이르도록 배우기 위해서는 능히 주님께, “주여, 저는 정말 기쁜 마음으로 당신의 십자가를 집니다. 아주 기쁜 마음으로 어떠한 손실도 감수하며 자신의 이익을 구치 않고 자신의 기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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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경지에 이를 정도로 굳게 선 사람에 대해 사탄은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다. 만일 당신이 손실을 두려워하지 않고 고통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욥이나 귀용 여사와 같이 주님께, “하나님이 나를 죽게 하실지라도 나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나를 치신다면 나는 오히려 무릎을 꿇고서 나를 때린 그 채찍에 입맞추렵니다.”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절대적인 경지에 이른 굳센 사람이 될 것이다. 십자가도 그를 요동케 할 수 없으며, 그 어떤 것도 그를 요동케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세상에서 십자가보다 더 큰 요구는 없기 때문이다. 만일 당신이 최대의 요구에 응할 수 있다면, 모든 작은 요구들은 당신이 다 응할 수 있다. 당신이 십자가의 요구에 응할 수 없고 따라갈 수 없다면 당신은 단지 어떤 것에 부딪히기만 해도 즉시 쓰러질 것이다. 당신이 충분히 견실하지 않으면, 당신은 항상 쉽게 요동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십자가의 사실을 믿어야 하며 항상 십자가의 체험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하나님이 주시는 시련이나 어려움이나 고통 등은 우리가 항상 하나님 앞에서 달게 받고 복종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될 때, 당신은 세상의 어떤 시험이나 어떤 어려움도 작은 일로 느끼게 된다. 당신이 어렵게 느끼는 까닭은 당신이 십자가를 모르기 때문이다. 큰 일을 겪어 보지 않으면 작은 일이 왔을 때도 쓰러지게 된다. 만일 당신이 큰 일에 부딪혀 보았다면, 작은 일들이 닥쳐올 때에 결코 요동하지 않을 수 있다. 베드로는 손실을 두려워하고 자신을 사랑했기 때문에 요동했다.
베드로가 요동하게 된 또 하나의 원인은 그가 환경에 따라 행하려 하고 환경의 기쁨을 구하며 사람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아! 인정(人情)의 문제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얼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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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심각한지. 다른 사람이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도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하다. 우리가 사람의 기쁨을 구하려 하고 다른 사람이 우리에 대해 불만을 갖는 것에 대해 두려워하면 그 즉시 우리의 길은 정직하지 않게 된다. 사람의 어떠함에 따라 그 사람의 말하는 것도 달라지게 된다. 우리는 너무도 많은 귀로 다른 사람의 말을 듣는다. 베드로는 실제로 그 여종을 두려워했으며 뭇사람을 두려워했다. 그는 분명히 연약함에 사로잡혔다. 형제자매여, 당신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기쁨을 구하는가? 당신이 자신을 드려 하나님을 섬길 때에 이 문제는 반드시 해결되어야 한다. 만일 당신이 하나님의 기쁨을 구하려 한다면, 당신은 괴롭힘을 당하고 어려움을 당하게 된다. 그러나 만일 예전처럼 여전히 사람의 기쁨을 구한다면, 십자가의 고난의 역사는 당신에게 없게 된다. 형제자매여! 사람을 두려워하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당신은 결코 하나님 앞에서 바른 길을 갈 수 없다. 만일 사람이 다른 사람을 두려워한다면, 다른 사람이 그에게 영향을 미치는 대로 그의 길을 가게 된다. 그래서 그는 결코 하나님 앞에서 견고할 수 없고 굳셀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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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자매여! 하나님의 교회의 본질은 돌이며 사역자의 본질 또한 돌이다. 교회의 기초가 돌이며, 교회의 건축 또한 돌이고, 교회의 봉사 또한 돌이며, 모든 것이 돌이어서 결코 요동하지 않고 회전하는 그림자가 있을 수 없다. 경박하고 자주 변하며 요동하는 성격으로는 교회 안에서 하나님을 위한 어떠한 가치 있는 일도 할 수 없다. 견고한 것만이 믿을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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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 견고하지 않다면, 돌 하나 위에 다른 돌을 쌓을 때 그 건축은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이것은 마치 담장 속의 견실치 못한 돌 하나로 인해서 담 전체에 문제가 생길 수 있는 것과 같다. 하나님의 교회에 있어서 당신은 마지막 돌이 아니다. 당신이라는 돌 위에 얼마나 더 많은 돌을 쌓아야 할지 아직 모른다. 교회는 천 개 만 개의 돌들을 어지럽게 흩어 놓은 것이 아니라 도리어 돌을 하나하나 쌓아서 많은 돌로 건축해 가는 신령한 집이다. 돌 위에 다른 돌을 쌓는 것이 아니라면 그곳에는 교회가 없는 것이다. 성전이 무너진다는 뜻은 하나의 돌이 다른 돌 위에 놓여 있지 않다는 것을 말한다. 성전이 건축된다는 뜻은 돌 하나가 다른 돌 위에 차곡차곡 쌓인다는 것을 말한다.
오늘 하나님은 여전히 교회에 많은 사람들을 건축하시며 많은 영적인 일들을 하나하나 건축해 나가고 계신다. 만일 돌 하나가 요동한다면 많은 어려움을 일으키게 되며 많은 사람에게 해를 주게 된다. 또한 그것은 교회를 전진할 수 없게 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성격은 반드시 돌과 같은 성격이어야 하며 주님을 의존하는 성격이어야 한다. 만일 당신의 성격이 요동하여 신뢰할 수 없다면, 당신 위에 쌓은 모든 건축물이 요동할 것이며 조만간 무너질 것이다. 고린도전서 15장 58절은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고 말한다. 요동하지 않고 계속 사역을 해 나갈 때 비로소 길이 있게 된다. 만약 연약한 성격이어서 높아졌다 낮아지고 이리저리 요동한다면 하나님의 일을 그르치게 된다.
많은 형제자매들이 왜 주님의 일을 할 수 없는가? 그것은 그들이 요동하기 때문이다. 일단 요동하면 건축된 만큼 무너지며, 이 붕괴는 시간만 낭비하게 한다. 건축하는 것과 헐어 버리는 것이 아마도 같을지는 모르지만, 시간은 결코 되찾을 수 없다. 만일 사람이 견고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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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동하지 않는다면, 건축되어 가는 것도 견고하게 되며 시간도 낭비하지 않게 된다. 만일 기울어지거나 붕괴되는 일이 발생한다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지만, 오 년이나 십 년 혹은 이십 년의 시간은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이 손실은 구제할 길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가 요동하지 않는 견고한 사람이 될 수 있도록 구해야 한다. 베드로처럼 그렇게 높이까지 올라갔다가 천천히 내려와야 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적어도 요동치 않는 견고한 사람이 되어야 건축되고 또한 무너지지 않을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주님의 일을 할 수 없다.
만일 우리가 견고하여 요동치 않는 사람이라면, 우리에게 책임이 맡겨졌을 때 우리는 그 책임을 짊어지고 나아가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주님께서 당신에게 깨어 있으라고 하셨을 때, 당신은 잠들 것이다. 사람이 만일 견고하지 않아서 한때는 아주 높이 또 어떤 때는 바닥으로 떨어져 이리저리 요동한다면, 주님께서 깨어 있으라고 하실 때에 그는 깨어 있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는 자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그는 피곤하여 잠을 자야 할 때에 그냥 잠이 들어 버릴 뿐 깨어 있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그가 하루에 여덟 시간의 잠을 자야 한다면, 그는 여덟 시간을 자지 않으면 안 된다. 그는 결코 깨어 있는 것을 엄중하게 보지 않는다. 당신은 잠이 들었지만 손실이 얼마나 큰지를 알지 못한다. 주님이 당신에게 깨어 있으라고 하실 때 당신이 잠을 잔다면, 얼마 후 주님이 당신에게 사역하라고 하실 때에 당신은 어떻게 하겠는가? 당신은 책임감이 없다.
사람이 만일 하나님 앞에서 견고하지 않다면, 이 사람은 신뢰할 수가 없다. 믿을 만하지 못한 사람은 책임감이 조금도 없다. 기분 좋을 때 그는 한바탕 일을 하지만 기분이 나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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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낄 때에는 그 자리에 누워 잠잘 것이다. 그는 책임감이 없다. 그러므로 성격에 있어서의 견고함은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조건이다. 오직 견고한 사람만이 주의 일을 할 수 있다. 편안해도 일을 해야 하고 편안하다고 느끼지 않을 때에도 일을 해야 한다. 하늘이 맑아도 일을 해야 하고 비가 와도 일을 해야 한다. 매우 기뻐도 일을 해야 하고 고민스러워도 일을 해야 한다. 이러한 사람이 견고한 사람이다. 성격이 견고하지 않은 사람은 어떤 것에도 영향을 받는다. 심지어 날씨의 영향까지 받는다. 우리의 일이 계속 환경의 영향을 받는 것은 옳지 않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영이 강건해야만 일을 할 수 있다.
형제자매여, 당신은 믿을 만한 사람인가? 당신은 견고한 사람인가? 당신은 요동치 않는 사람인가? 어느 날 하나님께서 당신이 배워야 할 공과를 배우게 하신 후에라야 당신은 당신 손에 천국 열쇠가 있음을 보게 된다. 이 열쇠는 유대인에게 천국 문을 열어 주었으며 이방인에게도 천국 문을 열어 주었다. 그리하여 교회가 세워지기 시작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세우시는 데에 있어서 먼저 사역자들을 찾으신다. 우리는 이 원칙을 기억해야만 한다. 하나님은 각지에서 먼저 사역자들을 찾으신 후에야 교회를 세우신다. 많은 지방의 문이 열리는 데 있어서는 먼저 하나님께서 쓰실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만일 하나님의 종인 사역자들이 믿음직스럽지 않고 견고하지 않으면 이 문은 열릴 수 없다.
하나님께 감사한다. 베드로는 한번 부서짐으로 자신의 약점을 알았다. 그는 한 번 심하게 넘어짐으로, 아주 심하게 실패함으로 통곡하며 자신의 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많은 형제자매들 또한 심히 연약하고 견실하지 못하며 요동한다. 이럴 때에 우리는, “주여, 우리는 할 수 없습니다.”라고 주님께 말해야 한다. 사람들은 빛 비춤을 구하지만 사실 많은 때에 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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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한 실패가 곧 빛 비춤이다. 강한 책망이나 메시지 같은 것이 곧 빛 비춤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 마땅히 엎드러져야 하며 아주 엄한 경책 아래 무릎을 꿇어야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람은 아주 엄한 실패 앞에서도 마땅히 회개하고 돌이켜야 한다. 이 실패가 바로 빛이다. 하나님께서 당신이 이런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 주시는 것이다.
베드로가 통회하며 회개하고, 하나님께서 그를 긍휼히 여기셨을 때에 그는 진정한 베드로가 되었다. 그는 연약하여 요동하는 사람에서 견고하고 아주 견실한 사람으로 변화되어 오순절에 문을 열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내리시어 우리의 성격에 변화를 주시기를 앙망한다. 우리의 성격은 변화되어야 한다. 주님은 우리의 성격을 능히 변화시키실 수 있다. 게으른 사람은 근면한 사람으로 변할 수 있고, 말 많은 사람은 말이 없는 사람으로 변할 수 있으며, 남의 말을 들을 수 없는 사람은 말을 들을 줄 아는 사람으로 변화될 수 있고, 고난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으로 변할 수 있으며, 몸이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은 ‘자신의 몸을 쳐서 복종케 하는’ 사람으로 변할 수 있다. 이처럼 연약하고 요동하는 사람도 능히 굳세고 견고하고 요동하지 않는 사람으로 변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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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N. 제3집 제6(52)권 주님의 사역자의 성격 제6장 말에 제한을 받아야 한다
Ezra Zion , 2013-04-05 , 조회 (82) , 추천 (0) , 반대 (0), 스크랩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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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장
말에 제한을 받아야 한다

 

 

 

 


1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크게 쓰임받고 하나님의 유능한 그릇이 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충분히 쓰임받지 못하며, 설령 쓰임받는다 해도 그리 유능한 그릇이 되지 못하고 있다. 그중에 가장 큰 원인은 바로 그들이 말에 제한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말을 조심하지 않으면 능력을 새어 나가게 하는 구멍을 만들게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혹자는 우리의 말이 하나님의 능력을 흘러 내보내거나 또한 새어 나가게 하는 구멍과 같다고 했다. 당신의 말은 하나님의 능력을 흘러 내보내는 출구가 될 수도 있고 하나님의 능력을 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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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게 하는 구멍이 될 수도 있다. 애석하게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능력을 새어 나가게 하고 있다.
야고보서 3장은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물과 쓴 물을 내겠느뇨?”(11절)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일꾼의 입은 마땅히 단물을 내야 하고 생수를 내야 하며 마땅히 하나님을 위하여 그분의 말씀을 전해야 한다. 물통을 예로 들어보자. 밥 지을 물과 하수도 물을 한 통에 길을 수는 없다. 만일 하수도 물을 긷는 데 쓰이는 통으로 밥 지을 물을 긷는다면, 그것은 사람의 건강을 해치게 되고 심지어는 사람의 목숨까지도 위태롭게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입이 하나님 앞에서 그분의 말씀을 전하기 위한 것이라면 결코 다른 일에는 쓰여질 수 없다. 그 입으로 하나님을 위하지 않는 말을 많이 했다면, 당신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쓰임받을 수 없고 또 쓰임받더라도 아주 제한적으로 쓰임받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들의 샘이 두 가지 물, 즉 단물과 쓴 물을 다 내기 때문이다. 그들의 입이 하나님의 말씀을 이야기하지만 아주 많은 부분이 하나님을 위한 말이 아니다.
형제자매여! 만일 우리의 입이 주님께 드려져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한 것이라면, 우리의 책임은 너무도 크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말씀을 우리 입술에 두셨으므로 주님을 섬기는 데 있어서 입술을 잘 지켜야 할 엄중한 책임이 있다. 민수기 16장은 고라와 그의 동조자들이 어떻게 함께 일어나 모세와 아론을 거역했으며, 또 250인이 어떻게 각자 불이 타는 향로를 하나님께 드렸는가를 말해 주고 있다. 그들은 범죄하였으므로 멸망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향로들이 여전히 거룩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불 가운데서 향로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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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워서 그 향로를 쳐서 제단을 싸는 편철(片鐵)을 만들라고 하셨다(16-17, 33, 36-39절). 그러므로 하나님께 드려져서 한번이라도 하나님께 쓰여진 물건은 영원히 거룩하여 다른 용도로 쓰여서는 안 된다. 어떤 형제자매들은 그들이 잠시 동안은 하나님의 말씀을 할 수 있고 또 한동안은 사탄의 말을 할 수도 있다는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다(거짓말은 사탄에 속한 것이다). 형제자매여! 우리는 이렇게 할 수 없다. 만일 한 형제의 입이 한 번이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말한 적이 있다면, 이 입은 영원히 주님께 속해야 한다. 많은 사람의 능력이 그의 말에서 새어 나간다. 어떤 형제는 본래 하나님 앞에서 아주 유용하게 될 수 있는데, 그의 많은 말이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가 말할 때에 그의 내면의 능력이 새어 나가게 된다. 샘은 오직 한 가지 물만을 낼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만일 당신의 입이 한 번이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말한 적이 있다면, 당신은 “내게는 하나님을 위하지 않는 다른 말을 할 권리가 없다.”라고 말할 줄 알아야 한다. 우리 입은 거룩하게 분별되어야 한다. 어떤 사물을 하나님께 드렸으면, 그것은 영원히 하나님의 것이어서 결코 하나님에게서 도로 찾아올 수 없다. 만일 도로 찾아온다면 그것은 발람의 당나귀이지 하나님의 선지자가 아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주님의 말씀과 당신의 말의 관계를 보아야만 한다. 당신의 입이 분별된 입이자 하나님께 속한 입이기 때문에 당신의 입으로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해야 한다.
애석하게도 하나님 앞에서 본래 쓰임받을 수 있는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입이 하나님의 능력을 새어 나가게 하는 큰 구멍이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쓰임받을 수 없다. 두 종류의 말을 하는 입은 능력을 새어 버리게 한다. 많은 사람의 결점은 말이 많은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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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서 5장 3절은, “말이 많으면 우매자의 소리가 나타나느니라”고 말한다. 많은 사람의 능력이 새어 나가는 원인은 말이 많은 데에 있다. 이것도 말하고 싶고, 저것도 말하고 싶고, 매사에 말하고 싶은 것 투성이다. 자신이 말을 많이 하길 좋아할 뿐 아니라 또한 남의 말을 이리저리로 옮기길 좋아한다. 형제자매여, 우리가 마음을 지켜야 하는 것처럼 우리의 입을 지키는 데 주의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른 사람을 섬기는 이들은 특별히 그러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입을 사용해 그분의 말씀을 전하신다. 우리의 입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분별된 거룩한 그릇이기 때문에 우리가 우리의 마음을 지키는 것처럼 함부로 말하지 않도록 우리의 입을 지켜야 한다.

2

하나님의 종은 말에 있어서 몇 가지 주의할 점이 있다. 첫째로, 우리는 항상 우리가 어떤 종류의 말을 듣고 있는지를 하나님 앞에서 살펴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항상 즐겨 듣는 그런 종류의 말은 우리 자신이 과연 어떤 인격을 가진 사람인지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사정을 당신에게 이야기할 수 없는 것은, 그들이 당신을 신뢰할 수 없고 또 당신에게 이야기한다 해도 당신이 별 도움을 주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서슴지 않고 직접 당신에게 와서 그들이 당한 최근의 이야기를 모두 쏟아 놓는다. 그 이유는 그들 생각에, 당신이 그들과 같은 부류의 사람이고 당신에게 무엇을 말하면 통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이 당신에게 어떤 종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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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하는가에서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가 증명된다.
둘째로, 우리는 어떤 이야기를 가장 안심하고 쉽사리 믿어 주는가를 관찰해 보자. 왜냐하면 그의 기질 역시 그가 쉽게 믿어 버리는 말의 내용을 보면 잘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가 어떤 종류의 사람이면 그는 그러한 유의 말은 덮어놓고 쉽게 믿는다. 잘못 듣고서 쉽게 믿는 것은 눈이 밝지 않기 때문이며 하나님의 빛이 없기 때문이다. 빛이 부족하면 틀리게 된다. 그러므로 많은 경우, 어떤 종류의 말을 듣는가 하는 것은 우리의 상황에 병이 있는지를 드러내 주며, 어떤 종류의 말을 믿는가 하는 것도 우리의 상황에 병이 있는지를 나타낸다. 많은 사람들은 아직 말을 듣기도 전에 마음속에 먼저 믿어 버려서 말을 하면 아주 기뻐한다. 비록 이 말이 도저히 믿지 못할 정도로 기이한 것이라 해도 그는 분명히 그렇다고 맞장구치며 말한다. 그러므로 어떤 종류의 말을 믿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 그가 어떤 사람인가를 드러낸다.
셋째로, 우리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서 바로 그의 면전에서 그 이야기를 믿을 만하다고 인정했을 경우 그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전해 주려는 성향이 있다. 어떤 이야기를 듣고서 믿은 다음에 이 말을 전해 주러 가는 것은 그가 어떤 인격을 가진 사람인지를 말해 주며 또한 그 사람 안에 빛이 없음을 나타낸다. 그는 다른 사람도 자기와 똑같이 또 다른 사람에게 전해 주기를 바라는데, 이것은 그 사람의 어떠함을 잘 드러내 준다. 이야기를 전달하는 과정을 살펴보면, 그는 다른 사람이 그에게 한 말을 듣고서 그 말이 믿을 만하면 그 말에 자신의 뜻을 첨가시켜서 제삼자에게 전해 준다. 많은 사람이 이렇게 말을 많이 하기 좋아하고 말을 전하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능력이 모두 새어 나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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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을 잘할 수가 없다.
넷째로, 정확하지 않은 말을 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자주 부정확하게 말을 해서, 어떤 때는 이렇게 말하고 또 어떤 때는 저렇게 말한다. 한 입으로 서로 다른 말을 하는 사람은 집사가 될 수 없다(딤전 3:8). 이런 사람은 동(東)에서 누가 오면 동쪽 말을 하고, 서(西)에서 누가 오면 서쪽 말을 하며, 앞에서는 이런 말을 하고, 뒤에서는 또 다른 말을 한다. 이러한 사람은 하나님의 일에 아무 쓸모가 없다. 만일 우리가 자기의 혀조차도 다스릴 수 없다면, 어떻게 자기 몸을 속박하여 주님을 섬길 수 있겠는가? 사람이 자기 자신을 속박하고 자기 몸을 쳐야만이 주님을 잘 섬길 수 있다. 항상 우리를 곤경에 빠뜨리는 가장 몹쓸 몸의 지체는 바로 혀이다. 말이 사실과 부합하지 않을 때 사람은 한 입으로 두 말을 하여 여기서는 이 말을 하고 저기서는 저 말을 하게 되는데, 이것은 그의 성격이 얼마나 연약한지를 잘 나타내 주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 앞에 설 도리가 없으며 하나님 앞에 능력도 없다. 그는 아주 흐리멍덩하고 우왕좌왕하기 때문에, 한때는 이 말을 하고 좀 지나면 또 다른 말을 하게 된다. 이것은 성격이 아주 연약한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대하고 반드시 처리해야 할 일이다.
다섯째로, 고의로 한 입으로 두 말을 하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사람이 일구이언하는 것은, 모르고서 일구이언하는 것보다 훨씬 심각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고의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모르고서 한 입으로 두 말을 하여 어떤 때는 이렇게 말하고 또 어떤 때는 저렇게 말하는 경우가 생기는데, 이때에 그는 ‘맞다’ 혹은 ‘틀리다’라고 말하는 것이 별 차이가 없다고 느낀다. 그는 옳고 그름에 있어 분명치 않으며 갈피를 못 잡는다. 당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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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게 “이것이 검습니까?”라고 물으면, 그는 “검습니다.”라고 대답한다. 당신이 그에게 “이것이 하얗습니까?”라고 물으면, 그는 “하얗습니다.”라고 대답한다. 그에게 있어서는 모든 것이 분명치 않고 흑백도 구분되지 않는다. 이러한 사람은 흐리멍덩하며 엉뚱하다. 이러한 종류의 일구이언은 엉뚱한 일구이언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의도적으로 한 입으로 두 종류의 말을 하여, 한때는 이런 말을, 다른 때는 다른 말을 한다. 이것은 성격이 연약한 것만이 아니라 도덕적으로 부패한 것이다. 마태복음 21장 23절부터 27절까지에서 주님이 성전에 들어가 가르치실 때에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주께 나와서 누구의 권세로 이 일을 하느냐고 물었다. 이때에 주님은, “요한의 침례가 어디로서 왔느냐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라고 물으셨다. 그러자 그들은 서로 의논하며, “만일 하늘로서라 하면 어찌하여 저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요 만일 사람에게로서라 하면 모든 사람이 요한을 선지자로 여기니 백성이 무섭다 하여 예수께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고 말했다. 이러한 대답은 사람을 고의적으로 속이는 것이다. 마태복음 5장 37절에서 주님은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옳은 것에 대해서는 ‘옳다’고 말하고, 옳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솔직하고 성실한 것이다. 우리가 만일 ‘내가 이렇게 말하면 다른 사람이 어떻게 말할까? 내가 저렇게 말한다면 다른 사람이 어떻게 말할까?’를 곰곰이 생각한 끝에 입을 연다면, 이것은 그리스도의 일꾼의 마음가짐과 태도가 아니다. 만일 이처럼 궤계를 가지고 말한다면, 그 사람의 말은 속이는 도구가 된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함정에 빠지게 하려고 질문 공세를 퍼부었을 때 그분은 침묵을 지키시며 대꾸하지 않으셨다. 우리는 이러한 주님을 본받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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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다. 말을 할 때 우리는 ‘옳으면 옳고 아니면 아니다’라고 말해야 한다. 이것에서 지나는 것은 다 악에서 좇아 나온 것이다. 이 점에서 총명한 사람은 아무런 길이 없다. 바울은 고린도에 있는 믿는 이들에게 다음과 같이 권면하고 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미련한 자가 되어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고전 3:18). 그리고 바울은, “ … 너희가 선한 데 지혜롭고 악한 데 미련하기를 원하노라”(롬 16:19)고 말했다. 영적 세계에서 세상 지혜는 하나님 앞에 쓰일 수 없으며, 당신이 어떻게 한다 할지라도 쓸모가 없다. 우리의 지혜는 주님의 손에 있다. 우리는 한 입으로 두 말을 할 수 없다. 이것이 많은 사람들의 어려움이다. 말에 신뢰가 없는 사람은 하나님께 쓰임받을 수 없다. 이러한 사람이 사역을 하러 나가면 조만간에 문제를 일으키게 된다. 사람이 만일 한때는 이렇게 말하고 조금 후에는 저렇게 말하고, 어떤 때는 옳다고 말하고 어떤 때는 아니라고 말하고, 이때는 맞다고 말하고 저 때는 틀렸다고 말하고, 처음에는 이렇게 해도 된다고 말하고 또 조금 지나면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말한다면, 이러한 사람은 하나님의 일에 유용하지 않다. 말을 계속 바꾸고 말이 믿을 만하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의 일에서 아무런 쓸모가 없다.
여섯째로, 말을 듣는 데에 있어서 처리받아야 한다. 어떤 사람에게 은사가 있고 많은 장점이 있다 할지라도, 만일 그의 말이 부정확하다면 이것은 족히 그의 능력을 새어 나가게 하는 커다란 구멍이 될 수 있다. 하나님을 위하여 일하는 많은 사람이, 말을 전하는 정보통이 되었다는 것은 얼마나 애석한 일인지. 형제자매여! 다른 사람과 접촉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 주며 자신이 직접 말할 기회도 많은 주님의 일꾼인 우리들이, 만일 말에 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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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제와 제한을 받지 않는다면 아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동시에 우리는 시비(是非)를 부추기게 될 것이다. 말의 제한을 받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동시에 그분의 일을 헐어 버릴 것이다. 그러므로 말을 들을 때에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통제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많은 경우에 형제자매들은 그들 개인의 일을 우리에게 말하려 한다. 그때에 우리는 마땅히 힘을 다하여 그들이 말하는 것을 들어야 하며, 말을 잘 알아들을 줄 아는 사람이 되어서 그 속에서 그들의 어려움을 찾아내고 도와 주어야 한다. 많은 때에 어떤 사람이 당신에게 말을 하는데, 그것이 만일 주님의 일의 필요를 위한 것이거나 개인의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한 것이라면 그것을 계속 들어줄 수 있다. 그러나 당신이 그의 말을 들을 때에 당신 속에서 밝고 분명하게 느껴진다면, 말을 듣는 것을 멈추고 그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됐습니다. 여기서 멈추어도 되겠습니다.” 만일 당신이 옛날 이야기를 듣거나 소설을 읽듯이 호기심으로 상대방의 말을 듣는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우리는 상대방의 어려움을 아는 것으로 족해야 한다. 우리가 속에서 그가 한 말을 알고 어느 정도 확신이 생겼다면, “형제님, 됐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결코 지나치게 듣고자 하는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된다. 우리는 마땅히 알아두어야 할 그 이상의 것을 지나치게 알아내려는 호기심을 갖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사람이 지나치게 어떤 일에 대해 알아보고자 듣는 것은 욕심이다. 이러한 욕심을 가진 사람은 지나치게 들으려고 한다. 그러나 우리가 사정을 아는 것이나 듣는 것은 한계가 있으므로 그 한계까지만 알면 되지 결코 그 이상의 것을 알고자 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형제자매의 말을 듣는 것은 그들을 위해 기도하기 위한 것이고 일을 잘 분별하여 그들의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한 것이므로 이러한 정도까지만 들으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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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째는, 다른 사람의 비밀을 계속 보장해 주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그의 영에 속한 어려움을 당신에게 말한다면, 이것은 그가 당신에게 그 일을 위임한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은 마음대로 비밀을 누설해서는 안 된다. 일의 유익을 위해 필요한 것 외에 당신은 결코 임의로 말을 전해서는 안 된다. 만일 당신이 말에 있어서 제한을 받지 않는다면, 당신은 주님의 일을 할 수가 없다. 하나님의 종은 많은 일에 있어서 위임을 받은 자이다. 그러므로 그는 반드시 그의 위임이 거룩하고 신실한 것임을 보아야 한다. 당신에게 위탁한 말들은 당신 것이 아니다. 이것은 당신의 직무가 하나님을 섬기는 것에 관련된 일이기 때문에 결코 맡겨진 말을 함부로 다른 사람에게 전해서는 안 된다. 영적인 일에 있어서 우리는 형제자매의 영에 속한 어려움들을 마음대로 다른 사람에게 전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물론 책임이나 하나님의 일 혹은 사람을 다루는 데 있어서는 예외적일 수 있다. 말이 많은 것은 큰 손실이다. 많은 말을 하고 또 그것을 남에게 전하는 사람은 결코 하나님의 일에 위임을 받을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함부로 말하거나 입을 열지 않도록 하나님 앞에서 경계(警戒)를 받으며, 우리의 말이 제한을 받도록 그분께 간구해야 한다. 사람이 자신을 통제하는가의 여부는 그가 말에 제한을 받았는가 받지 않았는가를 보면 분명히 알 수 있다. 통제를 받으려면 그 사람의 말이 반드시 제한을 받아야 한다. 우리는 이것을 특별히 주의해야 한다.
여덟째로, 우리는 거짓말을 주의해야 한다. 우리가 앞에서 말한 일구이언 하는 것은 거짓말과 아주 가까운 친척이다. 말로써 사람들을 잘못 믿게 하는 것은 모두 거짓말이다. 고의적으로 사람들이 잘못된 상상(想像)을 갖게 하는 것도 거짓말이다. 때로 거짓말 속에 거짓이 조금도 들어 있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교묘한 말투로 사람들에게 사실과 다른 것을 믿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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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것도 거짓말의 일종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말이 성실한가는 말에만 있지 않고 동기에도 있다는 것이다. 만일 한 형제가 당신에게 질문을 했는데 당신이 그에게 답변을 해 줄 수 없다면, 당신은 차라리 “나는 답변을 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해야지 결코 그를 속여서는 안 된다. 거짓말은 속일 마음으로 하는 모든 말로서 사람들이 잘못 이해하도록 하는 말이다. 우리는 사람들이 진실을 믿기 원한다. 우리는 진실을 말해야지 사람들이 거짓된 일을 믿게 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자녀는 언제나 사실이 ‘예’일 경우에는 ‘예’라고 말하기를 배워야 하고, ‘아니오’일 경우에는 ‘아니오’라고 말하기를 배워야 한다. 이보다 지나친 것은 악에서 나온 것이다. 주님은 유대인에게 매우 강하게 말씀하신 적이 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요 8:44). 거짓말은 마귀에게서 나온 것이며, 마귀는 거짓말의 창조자로서 지금까지 줄곧 거짓말쟁이이다. 마귀는 거짓의 아비다. 그러므로 만일 거짓말이 하나님의 자녀 중에 특히 주님의 일꾼의 입에 있다면, 그것은 참으로 큰 문제다. 거짓말을 하는 것은 형편없는 것이다. 이것은 기본적인 일이며 매우 심각한 문제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을 주의해야 한다. 우리 중 누구도 감히 말에 실수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우리가 말에 조심하려고 하면 할수록 말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주의하지 않으면 더욱 문제가 커진다. 당신이 말에 주의해도 여전히 정확히 하기는 쉽지 않은데, 만일 당신이 주의하지 않고 말을 함부로 느슨하게 풀어 놓는다면 문제는 더 심각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자신을 통제하여 자기 말을 주의하고 조금도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된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을 섬길 수 없다. 하나님은 한 면으로 그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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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위하여 말하면서 다른 한 면으로는 사탄을 위하여 말하는 사람을 쓰실 수 없다.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이러한 사람을 쓰실 수 없다.
아홉째로, 우리가 좀더 특별히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다투지 않고 들레지 않는 것’이다. 성경이 주님에 대해 예언한 것이 있다. “그가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마 12:19). 그리고 바울은 디모데에게 “마땅히 주의 종은 다투지 아니하고”(딤후 2:24)라고 말했다. 이것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종은 다투거나 떠들어댈 수 없다는 것을 말해 준다. 시끄럽게 떠드는 것은 항상 거칠음의 표현이다. 주의 종은 언제나 ‘다투지도 않고 들레지도 않으며’ 다른 사람과 쟁론하지 않을 정도로 자신을 다스려야 한다. 소리가 크다는 것은 능력이 적다는 것을 표시하며 자기를 관리하는 능력이 적다는 것을 표시한다. 옆방에 있는 사람들이 들을 정도로 소리가 크다면, 이는 주의 종이 마땅히 갖추어야 할 인격이 아니다. 아무도 길에서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었다는 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여 주신 본(本)이다. 이 제한은 단지 거짓말을 하지 말라는 정도가 아니다. 많은 말들이 분명히 옳은 말을 하고 사실을 말하지만, 우리는 이 사실을 확인하기 위하여 다투거나 들레지 말아야 한다. “마땅히 주의 종은 다투지 아니하고.” 우리는 어떤 일에 대해 소리내지 않고 잠잠히 있을 수 있어야 한다. 만일 한 형제나 자매가 뜻밖에도 시끌벅적하게 요란한 주장을 낸다면, 이는 그의 내면이 아무 통제가 없고 느슨하게 풀어져 있음을 말해 준다. 그는 너무도 오랫동안 통제받지 않고 느슨하게 풀어져 있어서 이렇게 큰 소리로 싸울 수 있는 것이다. 아무도 길에서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었던 것처럼 우리는 자신을 통제하고 자신의 목소리를 다스릴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제멋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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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지 않고 소리지르지 않으며, 제멋대로 시끄럽게 떠들지 않고 다투지 않도록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입을 통제하기를 배워야 한다. 물론, 이것은 우리가 인위적으로 진지한 체하거나 새 사람이 된 것처럼 가장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자연스럽게 말해야 하며, 우연히 사람을 만나도 여전히 자연스럽게 잘 말해야 한다. 그러나 음성에 있어서 만일 제한을 받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일에 있어서 많은 어려움이 있을 수 있다. 그리스도의 일을 하고자 하는 형제자매는 모두 주님 앞에서 부드럽고 조용한 위엄을 지키면서 행해야 하며, 경솔한 말씨를 사용해서는 안 된다. 우리 주님은 아주 작고 부드럽게 말씀하신 분이어서 다투지도 아니하시고 시끄럽게 소리내지도 아니하셨으므로, 아무도 길에서 그분의 음성을 들을 수가 없었다. 이처럼 하나님의 종은 마땅히 하나님 앞에서 사람들에게 부드럽고 온유한 자로 보여져야 한다.
열째로, 동기와 사실을 주의해야 한다. 말과 그 속에 담긴 의도는 별개의 일이다. 하나님의 자녀는 말의 정확성을 주의해야 할 뿐만 아니라 사실의 정확성도 주의해야 한다. 우리는 지나치게 말을 정확히 하기보다는 오히려 사실을 정확히 말하는 데에 주의를 기울이는 편이 낫다. 많은 사람들은 늘 말을 맞게 했는지 어떤지를 주의하면서도 사실이 맞는지 그렇지 않은지는 주의하지 않는다. 사실, 우리가 말을 아주 조심스럽게 하고 아주 정확하게 한다해도 그것이 신뢰할만 하다고 말할 수 없다. 우리는 주님 앞에서 사실의 정확성에 주의해야 한다. 만일 사실이 정확하지 않으면, 말을 아무리 정확하게 한다 해도 하나님 앞에 아무 소용이 없다. 어떤 형제자매는 말하는 데 매우 주의를 기울이지만, 우리는 그들을 믿을 수가 없다. 비록 우리가 그들의 말 속에서 잘못된 부분을 찾아내지 못한다 해도, 우리는 그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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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의 정확성만을 추구할 뿐 사실의 정확성은 주의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가령, 당신이 마음속으로 한 형제를 무척 싫어한다고 하자. 이것은 하나의 사실이다. 그런 그를 길에서 우연히 만났을 때 당신은 그에게 인사를 하고 손을 흔든다. 그가 당신 집에 왔을 때, 당신은 그에게 점심 식사를 권한다. 그가 병이 났을 때 당신은 그에게 문병 간다. 그가 궁핍할 때에, 당신은 그에게 쓸 돈과 입을 옷 등을 보낸다. 어떤 형제가 당신에게, “당신은 그 사람에 대해 어떻습니까?”라고 물으면, 당신은 마음속으로는 그를 미워해도 이렇게 대답한다. “내가 어찌 그에게 인사하지 않겠습니까? 그가 병이 났을 때 내가 어찌 그를 보러 가지 않겠습니까? 그가 빈궁할 때 내가 어찌 그를 돌보지 않겠습니까?” 물론, 당신에게는 교리도 없고 율법적으로도 틀림이 없으며 당신이 한 말도 틀리지 않다. 그러나 이것은 여전히 거짓말이다. 왜냐하면 사실이 결코 이와 같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떤 형제자매가 형식이나 절차를 매우 중시한다는 것을 안다. 형식에 있어서 당신은 그들에게 조금도 잘못된 점을 찾아낼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은 이와 전혀 다르다. 이것은 옳지 않은 것이다. 말이 전혀 틀리지 않지만 사실이 그렇지 않다면,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과 대화할 때, 당신이 절차의 정확성만을 주의하고 또 자신이 솔직한 말을 했다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하나님 앞에서 당신의 동기를 살펴보아야 한다. 이것은 말의 배후에 도사리고 있는 기본적인 문제이다. 말에만 정확하면 되고, 그를 잘 대해 주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을 근거로 하여 “나는 그를 미워하지 않는다.”라고 말할 수 없다. 우리는 말의 근거보다 사실을 보아야 한다. 우리가 참된 말을 하려면 실재적인 사실에 입각해야 한다. 실재적인 사실이 성립되지 않는다면 아무리 말을 능통하게 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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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많은 사람들이 이런 상태 속에서 생활한다. 말을 할 때에 우리는 말만을 주의할 것이 아니라 더 깊게는 동기와 사실을 주의해야 한다.
열한 번째로, 우리는 한담(閑談)을 하지 말아야 한다. 주님은, “ …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마 12:34-37)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한곳에 모였을 때 한담을 적게 하는 편이 낫다. 물론, 이것은 안부나 날씨 혹은 화초(花草)에 대해 이야기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다. 문안 인사와 같은 말은 처신하는 데 관계가 있으므로 말해도 된다. 그러나 당신과 무관한 이집 저집의 장점과 단점과 같은 한담을 말할 필요가 없다. 우리가 하는 한담에 대해 주 예수님은 “심판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라고 말씀하신다. 사람이 하는 한담은 한 번 말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다시 한 번 말해야 한다. 즉 오늘 말한 것을 심판날에 다시 한 번 말해야 한다. 모든 한담은 심판날에 다시 한 번 반복해야 하며, 이에 대하여 반드시 심판을 받는다. 당신이 많은 한담을 하는데, 당신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그 말로 당신을 의롭다 하고 또한 당신의 그 말로 당신을 정죄한다는 것을 보아야 한다.
우리는 농담이나 경박한 말이나 우스갯소리 등을 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이것은 형제나 자매가 누구에게 재치 있는 말을 한다거나 어린 자녀나 어린 손자들에게 재미나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과는 별개의 일이다. 바울이 에베소서에서 말한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엡 5:4)은 모두 우리가 응당 거절하고 해서는 안 될 경박한 말들이다.
또한 우리는 비웃는 말도 해서는 안 된다. 주님이 십자가에 계셨을 때 사람들은 주님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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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 … 엘리야가 와서 저를 내려 주나 보자”(막 15:36). 이것이 바로 비웃는 말이다. 베드로후서 3장 4절을 보면, 주님이 다시 오실 것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비웃으며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라고 말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어떤 종류의 비웃는 말도 결코 해서는 안 된다.
또한 사람들 배후에서 수군거리는 말이나 판단하는 말들을 해서도 안 된다. 욕설은 엄중한 죄이므로 하나님의 자녀가 절대로 할 수 없는 말이다. 이제까지 말한 말들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조심하며 해서는 안 될 말들이다.

3

주님의 일꾼들은 조금도 흐리멍덩한 말을 하지 말고 정확한 말을 해야 한다. 왜냐하면 오직 이런 상황 안에서만 하나님을 위해 말씀 전하는 사람이 될 수 있고 많은 어려움을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많은 경우 주님의 일꾼들이 말에 제한을 받지 않기 때문에 형제자매들은 그들의 판단이나 한담을 들을 때에는 재미있다고 느끼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에 그를 조금도 존경하지 않을 것이다. 오늘 당신이 형제자매들과 한담한 것이 결코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지 말라. 당신은 분명 떠들며 이야기 했을 뿐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에 그들은 당신이 전파한 것을 좀 전의 한담과 같은 것으로 여긴다. 그 결과 그들은 당신이 한 말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어떤 형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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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디하면 듣지만, 당신이 한마디하면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왜 그의 말은 듣고 당신의 말은 듣지 않는지 한번 생각해 보라. 말이라고 해서 다 같은 것은 아니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은 같은 것이다. 그러나 평소에 그가 했던 다른 말들은 그와 어울리지 않는다. 우리는 이 일에 주의를 기울여 보자. 일상생활에서 다른 말을 하는 사람이 똑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한다 할지라도 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오는 능력은 차이가 있는 법이다. 왜냐하면 당신이 다른 일에서 조심하지 않은 채로 항상 함부로 말해 왔기 때문에, 당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에 듣는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은 아무 제한 없이 느슨하게 풀어 놓고 말을 하던 때의 효과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형제자매여, 하나의 샘은 결코 단물과 쓴 물, 즉 두 가지의 물을 낼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하라. 쓴 물은 언제나 쓴 것이며, 쓴 맛이 엷어질 수 있을지라도 그것은 여전히 쓴 것이다. 오염된 물을 맑은 물과 함께 섞어도 오염된 물이 깨끗한 물로 변하지 않으며 도리어 깨끗한 물이 더러워진다. 많은 형제들의 능력이 새어 버리는 것은 그들이 평소에 잘못 말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에 사람들이 그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강단 위에서의 말은 강단 아래에서 한 말에 계속 이어진다는 것을 우리는 명심해야 한다. 당신이 강단 아래에서 경솔하게 함부로 말하면, 강단 위에서의 말이 전부 희석되어서 당신에 의해 단물이 쓴 물로 되어 버린다. 우리가 강단에 오르기 전에 무엇을 말할 것인지 매일 매일 사전(事前)에 준비하는 것은 불필요할지 모르겠지만, 반드시 필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곧 매일 매일 강단 아래에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를 주의하는 것이다. 우리는 일상생활 가운데서 항상 말을 조심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매일 매일 제한을 받지 않고 제멋대로 말하며, 정확하지 않은 말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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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비(是非)를 논하며, 우습고 경박한 이야기를 일삼고, 심지어 거짓말까지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서 능력이 발휘되기를 바랄 수 없다. 반드시 자신의 입을 제어해야만이 주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정확하게 말을 하는 것과 성경을 읽는 것은 매우 큰 관계가 있다. 왜냐하면 성경은 가장 정확한 책이기 때문이다. 전세계에서 오직 한 가지 말이 가장 정확한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다. 만일 우리에게 정확하게 말하는 습관이 없다면, 우리는 성경을 읽을 수 없고 성경을 전할 수는 더더욱 없다. 많은 형제들은 그들이 하는 말의 상황에 비추어서 성경을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 합당한 성격이 구비되어야 하듯이 성경을 읽는 것에 있어서도 합당한 성격이 구비되어야 한다. 그래야 성경을 읽을 수 있다. 말의 정확성을 모르고 덜렁대는 사람은 근본적으로 성경을 읽을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정확하기 때문이다. 정확하지 않고 건성건성 말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이 모두 새어버려서 근본적으로 잘못 깨닫게 된다.
‘정확하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설명하기 위해 한 가지 예를 들겠다. 마태복음 22장에는 사두개인들이 부활을 믿지 않는 것을 말하고 있다. 어느 날 그들은 주님께 나와 어려운 질문을 했다. “우리 중에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 장가들었다가 죽어 후사가 없으므로 그의 아내를 그 동생에게 끼쳐 두고 그 둘째와 셋째로 일곱째까지 그렇게 하다가 최후에 그 여자도 죽었나이다 그런즉 저희가 다 그를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일곱 중에 뉘 아내가 되리이까”(마 22:25-28). 그들의 뜻은 이러하다. 즉 부활은 믿을 수 없으며 부활이 없는 것이 가장 좋다. 만일 부활이 있다면 매우 번거로워서 부활이 없는 것만 못하다. 그래서 그들은 이치를 따지면서 해결할 방법이 없는 이러한 일을 가지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주님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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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에게,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죽은 자의 부활을 의논할진대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 바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마 22:29-32)고 말씀하셨다. 사두개인은 모두 성경을 읽었지만 주님은 그들이 성경을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셨다. 왜 그런가? 그들은 경솔하게 함부로 말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렇게 정확히 말씀하실 줄 몰랐을 것이다. 주님은 다른 성경 구절들이 아닌 출애굽기 3장 15절의 말씀을 인용하여 부활을 증명하셨다.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다.” 이 성경 구절은 어떻게 부활을 말하고 있는가? 주님은,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고 말씀하셨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이미 죽은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셨는데, 그렇다면 그분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라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시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하는가? 하나님께서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시기 때문에 비록 지금 아브라함은 죽은 자이지만 그는 반드시 죽지 않은 사람으로 변해야 하며, 이삭과 야곱도 비록 지금 죽은 자이지만 그들도 반드시 죽지 않은 사람으로 변해야 한다. 죽은 사람이 어떻게 죽지 않은 사람으로 변할 수 있겠는가?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부활이 있어야 한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반드시 부활해야 한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은 결코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도리어 산 자의 하나님이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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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문이다. 주님은 이러한 말로 사두개인의 질문에 답하셨다. 우리 주님의 말씀은 너무도 정확하였고 사두개인들에게 그들이 얼마나 부정확하게 말하며, 얼마나 성경을 모르고 있는지를 보여 주셨다.
만일 우리가 말에 정확하지 않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볼 수 없다. 정확하지 않은 성격은, 당신을 정확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될 수 없게 하며 정확할 수도 없게 하며 하나님의 말씀이 다 새어 버리게 한다. 성경은 가장 정확하게 말하는 책이다. 성경의 일점일획이 너무나도 정확하다. 주님은, “ …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 5:18)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 쓰신 성경의 일점일획은 모두 중요한 것이고 누구도 임의로 고칠 수 없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이렇듯 정확하니 그분의 종도 또한 정확히 말해야 한다. 형제자매여,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지금까지 애매모호하지 않고 소홀하지 않으며 언제나 확실하다. 일점일획이 모두 확실하며 일점일획이 요동치 않는다. 성경을 더 많이 읽고 하나님의 말씀을 더 이해하게 될 때, 당신은 하나님의 말씀에 한 자(字)도 더하거나 빼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우리는, 함부로 말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종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계속 주의해야 한다. 함부로 말하는 사람은 형제자매에게 능력을 잃을 것이며 그 사람 자신도 하나님의 말씀에 있어서 근본적으로 사람들의 필요를 채울 수 없다. 어떤 형제는 강단에서 말씀을 전할 때 정말 사람들에게 어려움이 된다. 그가 전한 말씀에서 우리는 그가 제멋대로 경솔하게 말하는 사람인 것을 알 수 있다. 경솔한 사람은 분명 경솔한 말을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 앞에 놓여 있어도 그는 하고싶은 대로 경솔한 말을 할 것이다. 강단 아래에서 제멋대로 말한다면 어떻게 그가 강단 위에서 조심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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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있겠는가? 경솔하고 부주의한 사람이 성경을 읽을 수 있는 것을 이제껏 한 사람도 보지 못했고 경솔하고 부주의한 사람이 하나님을 위하여 말하는 것을 이제껏 한 사람도 보지 못했다. 우리는 실제로 하나님이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우리가 말을 정확하게 할 수 있게 하시기를 구해야 한다. 형제자매들이여, 우리는 함부로 말하는 풀어진 사람이 되지 않고, 말에나 다른 면에서 새는 구멍이 있어 간증까지 새어 버리는 사람이 되지 않도록 가르침을 받은 혀를 그분께 구해야 한다. 당신이 제멋대로 경솔하게 말하는 사람이라면, 당신은 결코 성경을 읽을 수 없고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을 수도 없다. 성경을 읽을 때 우리는 성경에서 사실을 찾아내야 한다. 그런데 경솔한 사람은 성경에서 어떤 사실도 찾아내지 못한다. 우리는 조심스럽게 말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그럴 때야 비로소 하나님의 말씀 한 자 한 자를 정확히 볼 수 있다.

4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은 모두 다 나름대로 각각 특성을 가지고 있으며, 하나님 앞에서 그 사람의 특별한 분깃이 있다. 하나님은 각 사람의 특별한 부분을 사용하신다. 이뿐 아니라 다른 모든 일에서 균형 잡혀야만 새는 구멍이 없게 된다. 만일 한 형제가 그의 특별한 부분 외에 다른 방면에서 문제가 생긴다면, 그의 사역에는 새는 구멍이 있게 된다. 앞의 몇 장에서 우리는, 다른 사람의 말을 들을 줄 알아야 하며, 사람에 대해 흥미를 가져야 하며, 고난 받을 마음가짐이 있어야 하며, 자기 몸을 쳐서 복종케 해야 하며, 부지런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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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르지 말아야 한다는 것들을 다루었다. 이것들은 우리가 가장 일반적으로 갖추어야 할 조건들이다. 하나님의 종에게는 이러한 성격들이 결핍되어서는 안 된다. 지금 우리가 말하고 있는 것은 말을 함에 있어 제한해야 한다는 것인데, 이것 또한 가장 일반적인 조건 중의 하나이다. 제멋대로 경솔하게 말하는 사람은 결코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히 말할 수 없다. 하나님 앞에서 본래 소망이 있고 앞 길이 유망했던 많은 형제들이 경솔하게 말하는 것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의 능력이 새어 버리고 말았다.
하나님 앞에서 당신이 가지고 있는 영적인 가치와 분량 그리고 영적인 용도를 여러 가지 방법으로 지켜나가야 한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택하신 때의 그 특별한 부분을 소모시키지 말라. 결코 그 특별한 부분을 여기에서 조금 저기에서 조금씩 소모시켜서는 안 된다. 각 방면에서 당신이 소모시키고 있는 그 새는 구멍을 다 막아 버려야만 비로소 당신의 사역(ministry)이 지켜질 수 있다. 사역이 보존되는 것은 주님의 일을 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이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다소의 능력을 주셔서 많은 일들을 하게 하시는데 우리가 여기서 좀 새게 하고 저기서 좀 새게 할 때 결국에는 모든 것이 새어 버리게 된다. 우리는 한마디라도 느슨하게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다룸을 받아야 하며 이러한 일들에 있어서 책망받고 심판받아야 한다. 형제자매여, 당신은 단지 적극적인 것들을 얻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여전히 그러한 것들을 보존하며 새어 나가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 만일 당신이 말을 하는 데 있어서 다룸을 받지 않았다면, 당신이 가지고 있는 적극적인 것들이 모두 새어 버리게 된다.
장차 심판대 앞에 설 때, 우리는 우리의 말이 준 피해가 그 어떤 것보다 더 심각하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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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을 발견할 것이다. 왜냐하면 말이 준 피해는 우리 자신에게만 미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까지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한번 한 말은 거기서 끝나지 않고 꼬리에 꼬리를 물고, 가는 곳마다 해를 끼친다. 해서는 안 될 말을 한 형제가 그 말을 다시 주워 담으려고 할지라도 한번 입 밖으로 낸 말은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다. 물론 당신이 뉘우치며 당신의 어리석음을 회개하고 그분께 용서를 구하고 티끌 가운데 엎드려 주님께 “주여! 내가 말을 잘못했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 비록 당신이 주님의 보배로운 피로 정결케 씻겨질 수 있지만, 그 보혈은 결코 당신이 내뱉은 말을 세상에서 없앨 수 없다. 이미 입밖으로 낸 말은 이 땅 위에 계속해서 남아 있게 되는 법이다. 당신이 주님께 잘못을 인정할 수 있고 형제에게도 잘못을 인정할 수 있다. 또한 주님과 형제가 당신을 용서할 수는 있다. 그러나 당신이 한 그 말은 이 땅 위에 여전히 남아 있고 결코 주워 담을 방법이 없다. 아마 어떤 사람은 고난 받을 마음가짐이 없어서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은 남의 말을 들을 줄 몰라서 어려움을 겪기도 하며, 또 어떤 이는 게으르기 때문에 곤란을 당하기도 한다. 그러나 말이 많아서 생기는 어려움은 게을러서 생기는 어려움보다 훨씬 심각하며, 말을 들을 줄 몰라서 생기는 어려움이나 고난 받을 마음가짐이 없어서 겪는 어려움보다도 훨씬 더 심각하다. 왜냐하면 당신이 많은 말로 퍼뜨린 사망은 결코 멈추지 않고 계속 당신 뒤를 따라다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형제자매여, 이 일은 매우 엄숙한 것이다. 우리는 결코 제멋대로 말을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이제까지 우리 입에서 나온 많은 말들이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고 남에게 해를 끼친 것에 대해 주님께 회개해야 한다. 우리 입에서 낸 한담은 이 땅에서 지금까지 쉬지 않고 계속 퍼지고 있다. 당신이 말하고 있을 때는 무익한 한담이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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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아주 바쁘게 움직이며 역사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과거의 모든 것은 정결하게 씻어 주시고, 현재의 것은 숯불같이 다 태워서 처리해 주시도록 그분께 긍휼을 구해야 한다(시 120:2-4). 만일 더 이상 함부로 말하지 않도록 당신의 혀가 태워지고 주님의 다룸을 받는다면, 당신은 되돌릴 수 없는 많은 어려움들을 줄이게 될 것이다. 많은 어려움은 일단 발생하면 돌이킬 수 없다. 롯이 회개하고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올 수는 있었지만 모압과 암몬은 오늘날까지 계속 존재한다. 아브라함이 회개한 후 이삭을 낳을 수 있었지만 이삭에게는 이미 원수가 생겼다. 아브라함이 하갈을 추방하였지만, 여전히 어려움이 남아 있었다. 한번 내뱉은 말은 그치지 않고, 말이 낳은 어려움 또한 멈추지를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혀가 가르침받는 혀가 되도록 불태워지고, 무익한 말을 하지 않고 제멋대로 경솔하게 말하지 않으며, 거짓을 말하지 않도록 주님께 기도하지 않을 수 없다. 주님의 제약(制約)으로 우리의 혀가 함부로 경솔하게 말하지 않을 때 비로소 주님은 우리를 말씀의 출구로 삼으신다. 그렇지 않으면 한 샘에서 두 종류의 물, 곧 단물과 쓴 물을 내게 되는데, 이것은 옳지 않은 것이다. 당신은 단물과 쓴 물을 모두 낼 수 없다. 하나님을 섬기고자 하고 하나님의 일에 자신에게 한몫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결코 입에서 하나님의 말과 마귀의 말을 동시에 낼 수 없다. ‘자유롭게 말하는’ 우리 입의 역사(歷史)가 끝나도록 주님의 은혜를 구하며, 주님께 이렇게 말할 수 있기 바란다. “주여, 우리의 마음과 뜻을 받아 주듯이 우리의 모든 말도 은혜로 받아 주소서.” 주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겨주시길!
주님은 “또 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저희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요 17:19)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으로서 당신이 하나님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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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기기를 배우고자 한다면, 당신이 어떤 위치에 있든 상관없이 반드시 거룩히 분별되기를 배워야 한다. 우리가 그들을 섬기기 때문에 말에 있어서 거룩히 분별되어야 한다. 말의 유혹은 얼마나 큰지! 서너 명 혹은 십여 명이 함께 모여 이야기할 때에 우리는 너무나 쉽게 그 속에 어울려서 말을 하는데, 이러한 유혹은 너무나 크다. 우리는 거룩히 분별되는 것을 배워서 그 속에 섞여서는 안 된다.
우리는 경솔하게 말하지 않도록 자신을 분별시켜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말과 혀가 가르침 받아야 하고, 우리의 혀는 숯불로 태워져야 한다. 당신은 자신을 말의 유혹 가운데 놓지 말아야 한다. 합당치 않은 말을 하는 형제자매들을 만났을 때, 당신이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그 형제자매들에게서 당신 자신을 분별시키는 것이다. 당신이 그들과 섞이면 즉시 말의 유혹 속에 빠지게 된다. 당신은 이런 일과 사람들에게서 당신 자신을 즉시 분별해야 한다. 이런 일들이 발생할 때마다 당신은 시험에 빠지지 말고 언제나 자신을 분별해야 한다. 점차적으로 우리 위에 은혜가 세워지도록 하나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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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N. 제3집 제6(52)권 주님의 사역자의 성격 제5장 게으르지 않고 근면해야 한다
Ezra Zion , 2013-04-05 , 조회 (87) , 추천 (0) , 반대 (0), 스크랩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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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게으르지 않고 근면해야 한다

 

 

 

 


주님의 일을 하는 사람의 개인 생활이 어떠한가에 따라 그가 사역을 할 수 있는지 없는지가 결정된다. 주를 섬기는 길에서 우리는 많은 젊은 형제들이 아주 유용하게 잘 자라는 것을 본다. 그리스도인의 생활 시작부터, 당신은 그들에게서 그들이 좋은 씨앗으로 심겨져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것임을 느낄 수 있다. 이와 반대로 우리는, 상당한 자부심을 갖고 자신을 좋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주의 길에서 얼마 가지 않아 결국 쓰러지고 마는 것을 본다. 그런 사람들은 아무 쓸모가 없을 뿐만 아니라 또한 주님의 이름을 크게 욕되게 한다. 왜냐하면 그의 길은 더 이상 넓힐 수 없을 정도로 넓은 길이기 때문이다. 이외에 우리는, 어떤 사람들이 초기 그리스도인의 생활에서는 주목할 만한 특별한 점이 없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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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앞에서의 그들의 가치가 더 뚜렷해지는 것을 본다. 당신은 이에 대해 의아하게 생각할 것이다. 솔직하게 말해서, 하나님께 쓰임받는 사람들은 모두 기본적으로 조성된 성품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기본적인 성품을 가진 사람은 유용한 사람이 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봉사의 길에서 아무 쓸모가 없게 된다. 많은 면에서 훌륭한 일꾼이 될 자질이 있으나 기본적인 성품이 결여된 사람은, 사역을 하고자 하는 갈망이 있다할지라도 그의 사역은 성공하기가 어렵다. 우리는, 자기 몸을 다스릴 줄 모르는 일꾼이 주의 일을 잘하는 사례를 보지 못했다. 다른 일에서는 어떤지 모르지만,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있어서 그분의 종들 가운데 자기 몸을 쳐 복종케 할 수 없는 사람이 유용하게 되는 사례를 보지 못했다. 또 우리는 고난 받을 마음가짐이 없는 사람이 사역을 잘하는 경우도 보지 못했다. 또한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들을 줄 모르는 사람이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도 본 적이 없다. 하나님을 섬기는 모든 사람에게는 언제나 이러한 기본적인 성품들이 있어야 한다. 바꾸어 말하면, 그들에게는 이러한 자격들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들이 이러한 성품들을 가지고 하나님을 잘 섬길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긍휼을 주셔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겉 사람의 허물어짐과 세워짐이 필요하다. 만일 당신이 바르지 않고 많은 일에서 제멋대로 하고 자신을 느슨하게 풀어 놓는다면, 당신이 나가서 사역을 한다 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잘 섬기지 못하는 것은, 그들의 기술이나 지식이나 교리가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성품과 성격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일을 그르치는 것은 바로 여기에 그 원인이 있다. 그들은 이것 때문에 사역을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형제의 말을 듣기를 배워야 하며, 스스로 하나님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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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손해지기를 배워야 하고, 스스로 하나님 앞에서 구하기를 배워야 하며, 많은 면에서 하나님 앞에 철저하게 다룸을 받아야 한다. 우리는 결코 이러한 성품의 훈련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 만일 당신의 성격이나 성품이 성령의 깊은 다룸을 받지 않았다면, 당신이 한 일들은 그리 많은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다. 이러한 기본적인 성격의 훈련은 하나라도 누락되어서는 안 된다. 당신에게 이러한 훈련이 있다면, 당신은 주님의 일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신에게 이러한 것이 없다면, 당신은 주님의 일을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간을 들여 하나님 앞에서 이러한 것들을 하나씩 처리해야 한다.
이제 우리는 게으르지 말고 근면하는 것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1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더니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저희와 회계할새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가로되 주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두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가로되 주여 내게 두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두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한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가로되 주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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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받으셨나이다 그 주인이 대답하여 가로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마 25:18-30). 이 단락의 성경 구절은 부지런하고 게으르지 않는 것이 주의 일꾼의 기본적인 필요인 것을 보여 준다. 주님은 여기에서 상당히 분명하게 이 종의 근본적인 문제점을 지적하셨는데, 그것은 바로 악(惡)하고 게으른 것이다. 그의 ‘악함’은 감히 우리 주님께,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안다”라고 말함으로 폭로되었다. 또 한 면에서 그 종은 게을렀다. 그가 달란트를 땅에 묻으러 갔을 때 마음에 생각한 것은 악한 것이었으며 그의 손이 한 일은 게으른 것이었다. 그가 마음속으로 주인(主人)을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한 것은 악한 것이며, 그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달란트를 땅에 묻은 행위는 바로 게으름이다. 우리가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이 게으른 성격이 많은 사람들에게 가장 큰 문제라는 것이다.
게으른 사람은 할 일을 찾지 않는다. 오히려 일거리가 생기면 슬쩍 피하며 일이 없어지기만을 기다린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그들은 큰 일을 작은 일로 여기고 작은 일은 아예 없었던 일로 여기는 태도를 취한다). 체험에 비추어 볼 때, 오직 한 종류의 사람만이 유용한데, 바로 부지런한 사람이다. 게으른 사람은 가장 악한 사람이다. 어떤 형제는 말하기를, 사탄까지도 이런 사람은 쓸모없어서 성낸다고 했다. 잠언 19장 24절은 “게으른 자는 그 손을 그릇에 넣고도 입으로 올리기를 괴로워하느니라”고 말한다. 게으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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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아무 일도 하려고 하지 않는다. 왜, 아무것도 하려고 하지 않는가? 피곤해질까 두려워서이다. 게으른 사람은 손을 그릇 안에 넣고서도 들어올리려 하지 않는다. 그는 안 먹을 수는 없으므로 누군가가 그 대신 그릇 속의 음식을 그의 입에 넣어 주기를 바란다. 세상에 아주 쓸모없는 한 부류의 사람은 바로 게으른 사람이다. 하나님께서는 게으른 사람을 쓰지 않으신다. 형제자매여! 하나님께서 쓰시는 종 가운데 게으른 사람을 보았는가? 하나님께 쓰임받을 수 있는 사람은 언제나 고생스럽게 수고하며 바쁘게 일한다. 그들은 그들의 시간이나 정력을 헛되이 낭비하지 않는다. 항상 쉬려고 하고 요양하려는 사람은 주님의 종답지 않다. 주의 종은 게으른 생활에 익숙하지 않다. 그들은 시간을 구속하여 생활한다.
베드로부터 바울에 이르기까지 신약 안의 사도들을 보자! 그들에게서 조금이라도 게으른 면을 찾아낼 수 있는가? 우리는 그들에게서 게으른 면을 조금도 찾을 수 없고 그들이 시간을 헛되이 낭비한 것을 발견할 수 없다. 그들은 부지런히 수고하고 힘을 다해 하나님을 섬길 기회를 찾는 사람들이었다. 바울은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딤후 4:2)고 말한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우리는 항상 복음을 전해야 한다. 때를 얻을 때에 힘써야 하고 때를 얻지 못할 때에도 부지런히 일해야 한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때를 얻어도 사역을 해야 하고 얻지 못해도 사역을 해야 한다. 이것은 부지런함을 요한다. 사도들은 매우 부지런했다. 바울이 평생 이룩했던 굉장한 사업을 생각해 보라. 당신은 80세까지 사역을 한다 해도 그가 한 것의 1/10 밖에 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종이 근면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바울이 한 일만 보아도 우리는 그가 참으로 근면했으며 조금도 게으르지 않았다는 것을 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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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있다. 그는 각처로 다니며 복음을 전하지 않을 때에는 사람들과 변론하거나 말씀을 전하거나 서신을 썼다. 가장 영적인 것들을 다룬 그의 서신서들은 도리어 감옥에 있을 때에 쓰여진 것이다. 비록 그가 갇혀 있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여전히 매이지 않았다. 그는 정말로 근면한 사람이었으며 주님처럼 조금도 게으르지 않았다.
‘게으르다’는 뜻은 본래 해야 할 많은 일들을 하지 않는 것이며, 있던 일도 없애 버리는 것이다. 우스운 얘기가 있다. 예전에 문을 지키는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책임은 누가 초인종을 누르면 문을 열어 주는 것이다. 하루는 어떤 사람이 밖에서 초인종을 누르는데도 그는 나가서 문을 열어 주지 않았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그에게 물었다. “왜, 당신은 나가서 문을 열어 주지 않았습니까?” 그러자 그는 이렇게 답변했다. “난 그가 초인종을 누르지 않길 바랐소.” 사람이 밖에서 문을 두드리고 있는데도 그는 오히려 그 사람이 문을 두드리지 않기를 바랐다는 것이다. 형제자매여! 당신은 이런 사람을 어떻게 보는가? 애석하게도, 많은 형제자매들이 하나님의 일에 있어서 이와 같이 일거리가 없기 바란다. 일거리가 바로 저기에 놓여 있는데도, 그들은 여전히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한다. 그들은 “만일 이런 일거리들이 없다면 하나님께 감사할텐데, 그런 일들은 쓸모가 없어!”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무엇인가? 바로 ‘게으름’이다.
‘게으름’이란 무엇인가? 게으름이란 시간을 끌 수 있는 한 오랫동안 질질 끌면서 한 가지 일을 아주 서서히 하는 것이다. 하루에 할 수 있는 일을 열흘로 끌고, 한 달에 할 수 있는 일을 3개월에 걸쳐 느릿느릿하게 끄는 것이 바로 게으름이다. 어떤 번역본은 게으름이라는 단어를 ‘배회(徘徊)’(마 20:3, 6)로 풀이한다. 배회란 걸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결정할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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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는 것을 말한다. 이 단어가 어떤 곳에서는 ‘곤란함’으로 번역되었다. 바울은 빌립보의 믿는 이들에게 보낸 서신에서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곤란함-중국어 성경)이 없고”(빌 3:1)라고 했다. 어떤 형제자매는 자기에게 일이 맡겨지면 즉시 나태해져 버리고 매우 곤란해하며 탄식한다. 이 일이 그에게는 아주 어려움이 많은 일로 보여져서, 너무나 무거운 짐이 그에게 놓여졌다고 느낀다. 그러나 바울은 결코 이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옥에 갇혀 있었지만 편지를 썼다. 그렇게 어려운 환경에서 편지를 쓴다는 것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바울은 거기에서 편지를 썼으며, 형제들에게 ‘기뻐하라’, ‘주님으로 인하여 항상 기뻐하라’고 권면하였다. 환경으로 말한다면, 그것은 분명 괴롭고 수고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바울은,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라고 말했다. 그는 게으르지 않았으며 어렵다고 느끼지 않고 오히려 쉽다고 여겼다. 그는 게으름을 피우는 것이 어떤 것인지도 몰랐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람의 의욕과 게으르지 않고 어려워하지 않는 모습을 바울에게서 볼 수 있다.
많은 형제자매들은 일을 보고 두려워하고 어려워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있어서 크게 쓰임받지 못한다. 그들은 항상 일이 많아지는 것보다 적어지는 것을 더 좋아하며, 가능하다면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그들에게는 근면한 성격이 없다. 만일 우리가 게으른 사람이라면, 우리는 하나님의 충성된 종이 될 수 없을 뿐더러 사람의 충성된 종이 되는 것도 불가능하다. 많은 형제자매들이 하나님의 종이 될 수 없는 이유는 그들이 게으른 사람이기 때문이다. 소위 ‘하나님의 종’이라고 하는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은 마치 그들 위에 그들을 다스릴 사람이 없는 것 같고, 형제자매도 그들을 상관할 수 없으며,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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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도 그들을 상관할 수 없는 것같이 여긴다. 그런데 스스로 하나님의 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그들의 주인을 바꾸어 세상 직장에 고용된다면 그들의 쓸모 없음이 즉시 드러난다. 왜냐하면 고용주는 그들이 대충대충 일을 처리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을 번거로워 하지 않고 섬기는 것을 좋아하며,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시간과 힘과 물질을 쏟는 것을 기뻐하며, 손으로 일하고 수고하도록 우리의 생활과 성품을 부단히 훈련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종이 될 자격이 없다. 바울은 “너희 아는 바에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의 쓰는 것을 당하여”(행 20:34)라고 말했다. 이 손은 너무나도 좋다. 이 양손은 낮에도 일하고 밤에도 일하는 조금도 게으르지 않은 손이다. 이러한 사람이야말로 하나님의 종이라 할 수 있다.

2

근면은 무엇인가? 근면은 곧 게으르지 않은 것이다. 근면은 일거리가 있는데도 없는 것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일거리가 없는데도 일을 찾아서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일에 있어서 만일 일거리를 찾으러 나가지 않는다면, 분명 하루나 이틀 쉴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에 있어서 우리는 결코 일이 생겨야만 겨우 하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 된다. 만일 그렇다면 그것은 부지런한 것이 아니다. 근면한 사람은 한가할 수 없다. 그는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생각하고 간구하고 앙망하고 고려하며 일을 찾아내서 한다. 이렇지 않으면 할 일이 없게 된다.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발견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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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내기를 힘써야 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많이 간구하고 앙망해야 한다. 우리는 일을 발견하자마자 즉시 실행해야 한다. 그리고 다시 기다리고 앙망하며 일거리를 찾아내고는 또 즉시 가서 일을 해야 한다. 그런 다음 다시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해야 할 일을 발견한 후에 또 일하러 가야 한다. 이렇게 할 때에 비로소 하나님을 섬긴다고 말할 수 있다.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 5:17)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결코 이 구절을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쉬시니 나도 쉰다.”로 고쳐서는 안 된다. 게으름은 우리의 길이 아니다. 우리의 길은 바로,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이렇게 물어야 한다. “주여, 당신은 내가 어떤 일을 하기를 원하십니까?” 주님은 사마리아 여인과 말씀을 나누신 후에 제자들에게 매우 특별한 말씀을 하셨다. “너희가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요 4:35). 제자들의 계획에 따르면, 아직 넉 달을 기다려야 추수할 수 있다. 그러나 주님의 계획에 따르면, 지금이 바로 추수할 때인 것이다. 사람의 계산으로는 아직 넉 달을 기다려야 추수할 수 있다. 그러나 주님은,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할 때가 되었도다”라고 말씀하셨다. 오늘날 눈을 들어 보는 사람이 부족하다. 그래서 일이 더디고 넉 달이 지난 후에야 일을 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집안에 숨어 있고, 하나님의 길을 가지 않으며, 하나님께서 무슨 일을 하고 계신지를 보고 있지 않다. 주님은 또한 제자들에게 그분이 하시는 모든 일은 아버지 하나님께서 위임하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주님은 요한복음 4장 35절에서 제자들에게 항상 눈을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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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아야 할 것을 말씀하고 계신다. 당신이 눈을 들어 보지 않으면 일거리는 없다. 그러므로 주님의 일은 부지런하고 게으르지 않음에 달렸다. 이것은 주어진 만큼 일을 하라는 것이 아니라 눈을 들어 찾아내서 일을 하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많은 일들 가운데서 역사하시기 때문에 당신은 눈을 들어 일거리를 찾아내야 한다. 당신은 눈을 들어서 추수할 곡식이 있는지 혹은 그것이 익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당신이 눈을 들어 본다면 할 일이 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일거리가 없는 것처럼 한가하니, 얼마나 이상한 일인가!
일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언제나 일거리를 찾아서 일을 한다. 일하기를 싫어하는 사람은 일이 생길까 봐 두려워한다. 근면한 사람은 언제나 일거리가 없으면 즉시 하나님 앞에 가서 기다리며 해야 할 일이 있는지를 찾아 본다. 그는 언제나 기회를 잡아 나가서 일을 한다. 한번은 한 형제가 “아무개 형제는 그러면 안 되지요. 다른 지방에서 많은 형제들이 찾아왔는데 어떻게 그들과 조금도 교제할 시간을 갖지 않습니까?.”라고 말했다. 다른 형제가 이 말을 한 형제에게 “당신은 왜 그에게 말하지 않았습니까?”라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이것도 말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까?”라고 했다. 이 말이 옳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마땅히 하나님 앞에서 기다리며 일을 찾아서 해야 한다. 물론 이것은 고의적으로 바쁘게 만들거나 혼란스럽게 만들라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하나님께 나아가 깊이 간구하고 응당 눈을 들어 보아야 하며, 항상 눈을 들어 보는 습관을 가져야 한다. 당신이 바쁠 때 하나님께서는 당신에게 다른 부담을 주지 않으신다. 그러나 조금 한가하면 주님께 이렇게 물어야 한다. “주님, 당신은 제가 무엇을 하기 원하십니까?” 눈을 들기만 해도 당신은 당신의 봉사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발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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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한 연고(緣故)없이 계속 할 일이 없는 사람은 게으른 사람이다. 이렇게 게으른 사람의 손에 한 가지 일이 주어지면, 그는 다른 사람이 하루에 할 수 있는 일을 열흘이나 걸려서 한다. 심지어 그는 도무지 일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형제자매여! 당신은 언제나 적극적으로 일을 찾아서 해야 한다. 만일 당신이 하나님 앞에서 간구하고 기도하여 할 일을 찾아내지 않는다면, 당신은 많은 일을 해낼 수 없는 게으른 사람이다. 5년, 10년이 지난다 해도 당신은 여전히 많은 일을 해낼 수 없다. 이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주님의 일을 하는 한 가지 기본적인 요구는 바로 하나님 앞에서 아주 맑은 눈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일이 생기기만 하면 그는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의 여부를 즉시 안다. 이렇게 민감하지 않고서야 일을 해낼 수 있겠는가? 하나님에게서 온 우리 영의 느낌이 예민하지 않다면 우리는 일을 지연시키고 늦추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눈을 들어 보는 것’이 필요하다. 사람의 말을 따라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고 생각하지 말라. 그보다는,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매일 지나면서도 밭이 희어진 것을 보지 못하고, 오히려 넉 달이 지나야 한다고 하니 참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날마다 그 곳을 지나면서도 거기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다니!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보고서도 할 일을 모른다는 것은 참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형제자매여! 우리는, 이제까지 하나님께 쓰임받은 사람치고 게으른 사람을 한번도 보지 못했다. 하나님께 쓰임받을 수 있는 사람은 느슨한 사람이 아니라 일을 찾아서 힘을 다 쏟는 사람이다. 그는 그 날에 할 수 있는 일을 다음날까지 늘어놓지 않고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다. 무릇 시간을 느슨하게 풀어 놓는 사람은 하나님의 손에 크게 쓰임받을 수 없다. 많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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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마치 시계에 태엽을 감아 주는 것이 필요한 것처럼 다른 사람이 그들을 돌려 줄 것을 필요로 한다. 다른 사람이 그들을 밀면 그때서야 비로소 움직이고 밀지 않으면 가만히 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일에서 합당치 않다. 만일 어떤 형제가 어느 곳에 가든 힘을 다 쏟고 부지런하다면 열매가 있을 것이다. 부지런히 일하는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는 하나님께서 크게 역사하신다. 그 반면에 게으른 사람들이 많아지면 하나님의 역사는 갈수록 시들해진다. 우리는 게으른 사람이 하나님께 쓰임받은 것을 결코 보지 못했다. 주님의 일을 잘 하지 못하는 이유는 많은 경우 사람들의 게으름 때문이다.
‘부지런함’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스푸데(σπουδη)’, ‘스푸닥소(σπουδαξω)’이다. 중국어 성경에서는 ‘부지런함’(롬 12:8, 11, 고후 7:11, 8:16, 히 6:11, 벧후 1:5, 10, 3:14)이란 단어가 어떤 곳에서는 ‘간절함’(고후 7:12, 8:7-8, 갈 2:10, 유 3)으로 번역되었고, 어떤 곳에서는 ‘어서 속히’(딤후 4:9, 21, 딛 3:12)로 번역되었으며, 어떤 곳에서는 ‘힘쓰다’(살전 2:17, 엡 4:3, 딤후 2:15, 히 4:11, 벧후 1:15)로 번역되었다. 또 어떤 곳에서는 ‘급히’(막 6:25, 눅 1:39)로 번역되기도 했다. 이러한 번역에서 우리는 ‘부지런함’안에 어떤 뜻이 포함되어 있는지 알 수 있다. 로마서 12장 11절은 ‘부지런함’과 ‘게으름’을 함께 두었다.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바꾸어 말해, 부지런하지 않은 것은 곧 게으름이다. 어쩌면 영적인 일에서 우리 한 사람이 열 사람 혹은 백 사람의 일을 감당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 계속 나태해진다면 주님의 일을 할 수 없다. 만일 우리가 게으른 사람이어서 열 사람이 한 사람의 일 밖에 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주님의 일의 필요를 채울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형제자매여, 우리는 반드시 부지런한 성격을 가져야만 한다. 일이 바쁜지 그렇지 않은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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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차적인 문제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성격이 부지런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전심전력하여 일거리를 찾아내서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물론 이것은 일부러 일을 바쁘고 복잡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분주하고 번잡한 것은 쓸모가 없다. 우리가 부지런해야 한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 앞에서 일을 두려워하는 사람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며, 열심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어야 하고 영 안에서 불타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일거리를 찾아서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 이것은 반드시 우리의 행동에서만 표현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우리의 인격이나 성격에서 표현되어야 한다. 만일 우리의 성격이 게으르다면, 하루에 12시간을 일한다 해도 쓸모가 없다. 왜냐하면 며칠이 지나면 곧 중단하기 때문이다. 반드시 성격이 근면하고 게으르지 않은 사람만이 유용하다. 게으른 사람이 열두 시간 일을 한다 할지라도 그는 여전히 게으른 사람이다. 그는 하루 종일 기도하면서 큰 일은 작은 일로, 작은 일은 아예 없었던 일로 바뀌기만을 바란다. 그리고는 아무 일도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우리 주님은 이런 분이 아니셨다. 그분은 사람을 찾아서 이 세상에 오셨으며 일거리를 찾아서 일을 하셨다. 주님은,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셨다. 주님은 사람을 우연히 만나신 것이 아니라 사람을 찾으러 오셨다. 우리도 하나님 앞에서 이러한 성격을 가질 때만이 주의 길을 갈 수 있다.
베드로는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부지런하여) …에 …를 …에 …을 공급하라”(벧후 1:5-7)고 말했다. 이것을 부지런함이라고 할 수 있다. 베드로는 여기에서 일곱 번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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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에 무엇을 더하라고 말한다. 이것은 부지런한 사람이란 언제나 이것에 저것을 더하며, 끝없이 무언가가 더해지는 사람인 것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우리는 마땅히 하나님 앞에서 이러한 성격을 양성해야 한다. 하나에 하나를 더하고, 거기에 또 하나를 더하고 계속적으로 더해 나가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이처럼 해나갈 때에야 비로소 어떤 일을 감당할 수 있게 된다. 만일 우리 성격이 빈둥거리며 게으름 피우기만을 좋아한다면 어디를 가도 길이 없다. 어떤 사람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일에 있어서 책임감이 전혀 없어서 조금도 자기 몸에 무거운 부담을 느끼지 못한다. 그에게는 일을 잘해 보겠다는 의식도 전혀 없고 그들의 일을 확장시키려는 생각도 없다. 그는 하나님께서 더 많은 사람을 얻으시도록 하려고 하지도 않으며, 주님의 복음이 땅 끝까지 확산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도 않고 어떤 일이든지 대충 지나가게 한다. 이런 사람을 하나님이 어떻게 쓰실 수 있겠는가? 그는 오늘 한 사람의 영혼도 구원하지 못하면 응당 그런 것이려니 하면서 체념하고 내일은 잘해 보자고 막연한 기대를 건다. 그런데 다음날마저 한 영혼도 구원하지 못하면, 이것은 으레 그런 것이며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해 버린다. 이런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을 위해 일 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이 얻고자 하시는 일꾼들은 바로 그칠 줄 모르는 사람이다. 있는 것에 무엇을 더하려 하고, 거기에 또 무엇을 더하고자 하는 사람만이 주님의 일을 할 수 있는 일꾼들이 될 수 있다. 베드로후서 1장 5절부터 8절까지의 말씀을 다시 한번 보기로 하자.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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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는 우리에게 더욱 힘써 근면할 것을 권하고 있다. 어떻게 근면할 수 있는가? 하나에 둘을 더하고, 둘에 셋을 더하며 계속적으로 이렇게 할 때 게으르지 않게 된다. 바꾸어 말하면, 게으름을 반드시 부지런함으로 대치해야 한다. 부지런함이란 무엇인가? 부지런함이란, 우리가 그리스도의 한 미덕(美德)을 얻는 순간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이미 얻은 그 미덕에 또 다른 미덕을, 그리고 그 위에 또 다른 제삼의 미덕을 더하는 것으로서, 언제나 자족하지 않는 것이다. 또 언제나 무언가를 더하는 행위를 멈추지 않는 것이며, 우리에게 이러한 미덕이 흡족히 있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거듭거듭 ‘…에 …를 공급하라’로 게으름을 대치해야 한다. 우리는 베드로의 말을 주의해야 한다. 만일 우리더러 부지런함에 관한 말씀을 전하라고 하면 아마도 우리는, “여러분은 부지런해야 합니다. 이것에 저것을 더해야 합니다.”라는 말을 한 번 하고 끝낼 것이다. 그러나 베드로는 계속적으로 이것을 말했고, 5절에서 7절까지 줄곧 이것을 말했다. 베드로는 무엇에 무엇을 더하여 그러한 것이 충족될 때만이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을 수 있음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형제자매여! 우리는 기꺼이 일을 하는 사람이 되고 기회를 붙잡아 주님을 섬기며 게으른 사람이 되지 않도록 그분이 우리의 성격을 새롭게 조성해 주시기를 구해야 한다.
베드로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계속해서, “내가 힘써 너희로 하여금 나의 떠난 후에라도 필요할 때는 이런 것을 생각나게 하려 하노라”(15절)고 말했다. 앞에서 우리가 이미 언급했듯이 여기에서 ‘힘써’라는 말은 원문에서 ‘근면’과 같은 단어다. 베드로는 그들에게 이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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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을 기억하라고 했다. 아마도 베드로는 게으른 사람이 너무도 많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이런 것을 기억하라고 했을 것이다. 형제자매여! 우리는 부지런히 하나님 섬기기를 배워야 하고 기회를 찾아 일하기를 배워야 한다. 우리의 본성과 성격은 마땅히 부지런해야 한다. 일을 하고자 하는 사람은 손과 발로만 할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도 일을 해야 한다. 만일 당신에게 근면함이 없다면, 당신은 주님의 일에 있어서 아무 쓸모가 없다. 진리에 있어서 분명할지라도 게으른 사람은 하나님 손에 조금도 쓸모가 없다. 그러므로 일을 두려워하거나, 일을 맡으려 하지 않거나, 일을 하려고 하지 않는 사람은 모두 다 하나님을 섬길 수 없고 그분의 일을 할 수도 없다.
디모데전·후서와 디도서는 모두 주님의 일에 관하여 말한 서신이다. 디모데후서 4장 9절은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고 말하고 있는데, 여기서 ‘속히’라는 말은 헬라어에서 ‘근면’과 같은 단어다. 근면한 사람은 속히 오지만, 게으른 사람은 느릿느릿 온다. 바울은 또한 21절에서, “겨울 전에 너는 어서 오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의 ‘어서’라는 말 또한 원문에서 ‘근면’과 같은 단어이다. 그리고 디도서 3장 12절에서 사용된 ‘급히’라는 단어도 ‘근면’과 같은 단어이다. 일을 논(論)하고 있는 이 서신서들에서 ‘근면’이 의미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바울은 다른 많은 곳에서도 근면할 것을 역설했다. 고린도후서 7장에서 그가 고린도인들의 회개에 대해 말할 때에 그는,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 얼마나 열심(부지런함)있게 하며 … ”(고후 7:11)라고 했다.
형제자매여! 참으로 주님을 섬기기를 배우고자 하는 사람은 반드시 그의 책임이 얼마나 중대한 것인지를 인식해야 한다. 우리의 외적인 필요의 긴박성과 우리의 시간은 화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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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아가 버리며, 우리의 일생의 시간도 제한되어 있다. 만일 우리가 이러한 인식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근면해질 것이며 결코 시간을 느슨하게 풀어 놓지 않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시간이 너무나 빨리 흘러가고 너무도 짧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우리의 외적인 필요의 긴박성을 느끼지 못하며, 우리의 책임이 얼마나 무거운지를 인식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일에 있어서 어떤 것도 해낼 수 없다. 이러한 무거운 짐이 우리의 어깨 위에 놓여졌을 때 식음(食飮)을 전폐하고 잠을 못 자더라도 이 임무를 해내야 할 때가 있다. 이렇게 할 때 당신의 일은 출로를 얻게 된다. 만일 당신이 휴식을 가장 중요한 문제로 여기고 휴식을 당신 생활의 가장 기본적인 요구라고 여긴다면, 당신은 주님의 일에 있어서 어떤 것도 해낼 수 없다. 형제자매여! 우리의 시간은 더 이상 짧아질 수 없을 만큼 짧고, 우리의 책임은 더 이상 중대해질 수 없을 만큼 중대하며, 우리 주위의 외적인 필요는 더 이상 긴박할 수 없을 만큼 긴박하다. 우리는 죽음을 앞둔 사람의 심정으로 주위에 죽어 가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 숨이 곧 끊어질 것처럼 기회는 많지 않다. 우리는 여기에서 전심전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만일 우리가 우물쭈물하면서 외적인 필요도 보지 못하고 우리의 책임의 긴박성이나 우리의 시간의 급박함을 보지 못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일에 있어서 어떤 것도 할 수가 없다.
오늘날 하나님의 종들은 모두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의 심정으로 사람들을 섬겨야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누가 부지런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형제자매여, 오늘 우리는 분발하여 자신을 채찍질하며 부지런한 사람이 되길 배워야 한다. 바울이 말한 것처럼, 우리는 우리의 몸을 쳐 복종케 해야 한다. 다만 하나님을 섬기겠다는 마음만으로는 부족하다. 당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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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르다면, 어떤 일이 주어진다 해도 당신은 그것을 처리하지 못할 것이다. 당신은 게으름을 작은 문제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베드로후서 1장 8절의 ‘게으름’을 중국어 성경에서는 ‘한가하여 게으르다’라고 번역하고 있는데, 우리는 게으를 수 없으며 또한 한가해서도 안 된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목숨을 걸만큼 매일 필사적이지 않고 어떤 것에서도 드리려고 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일을 할 수도 없고 아무 쓸모가 없다는 것을 보도록 자신을 치고 또 쳐야 한다. 우리는 결코 자신을 속일 수 없다. 어떤 사람은 주님께, “나는 기쁘게 주님을 위하여 목숨을 버립니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평소 게으른 사람이어서 어떤 일이나 생략하기 일쑤이다. 그가 이러한 습관과 성격과 기질을 주님의 일 안으로 가져온다면, 심지어 일조차도 생략될 것이다. 만일 바울이 마게도냐 사람이 그를 부르는 이상을 볼 때만 일을 하러 간다면, 사도행전에 기록된 바울의 일은 마게도냐에서의 한 번의 일로 국한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마게도냐로의 부르심은 그 많은 일 중에 한 번이었고, 그 외의 일들은 모두 바울이 하나님 앞에서 부담을 가지고 한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형제들이 찾아와야 비로소 당신이 일을 할 수 있다면, 당신은 평생 아무 쓸모없게 된다. 일은 우리 스스로 부담을 갖는 것이다. 우리는 시간의 긴박성과 외적인 필요가 너무나 많다는 것과 사탄의 공작이 무섭게 만연되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멈출 수 없고 부지런히 일하는 것이다. 태만은 가장 유용한 사람을 가장 쓸모없는 사람으로 만들며, 풍성한 사람을 단지 삼분의 일, 오분의 일, 십분의 일밖에 남지 않은 빈약한 사람으로 만들어 버린다. 하나님을 아는 유용한 사람은 모두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않은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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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마태복음 25장 18절에서 30절로 다시 돌아가 보자. 여기에서는 무엇을 말하는가? 장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때에 우리 앞에는 두 가지 죄가 놓여질 수 있다. 하나는 악한 것이요, 다른 하나는 게으른 것이다. 그 종은 왜 악했는가? 그 종은 주님을 굳은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에게 그러한 악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열 사람이 주님 앞에 섰을 때에 아홉 사람은 게으른 종임을 시인하게 될 것이다. 주님께서는,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고 말씀하셨다. 주님은 게으른 종을 무익한 종으로 보신다. 때로 우리는 어떤 형제에 대해, “무엇 때문에 하나님은 저 형제를 쓰시는가?”라고 물을 것이다. 그것은 그가 목숨을 걸고 필사적으로 일하며 많은 시간을 드려 밤낮으로 애쓰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것을 보아야만 한다. 길은 부지런함에 있으며, 이 길은 게으른 사람이 걸어갈 수 있는 길이 아니다. 모든 것을 견디고 목숨 걸고 나아가야만 한다.
형제자매여! 게으른 성격을 해결하지 않는 한 우리의 일은 성공할 수 없다. 게으른 사람은 일을 반으로, 나중에는 십분의 일로 줄여 버린다. 오늘날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은데다 일까지 느릿느릿하게 하고 꾸물거리며 부지런히 일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일이 출로를 얻겠는가? 우리는 이 일을 중요하지 않게 봐서는 안 된다. 결코 사람이 부지런하지 않은 것을 작은 일로 여겨서는 안 된다.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유용하게 되지 못하고 이 길을 가다가 쓰러지는 이유는 분명 그들이 게으른 사람이기 때문인 것을 보았다. 이러한 것들을 경계(警戒)로 삼아, 우리의 모든 나태한 습관과 성격을 뜯어 고쳐야 한다. 주님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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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이러한 나태함을 제해 주시기를 구한다. 우리는 일하지 않는 게으름뱅이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일은 길이 없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부지런하고 게으르지 않도록 우리 몸을 엄격히 다루어야 한다. 우리의 일에서 게으름의 문제가 가장 보편적인 문제이다. 아마도 열 명 중에 아홉 명은 게으를 것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마땅히 힘써 목적지까지 나아가야 한다. 그래서 성경은 말(馬)로 섬김을 상징한 것이 아니라 소(牛)로 섬김을 상징하고 있다. 왜냐하면 소(牛)가 하는 일은 오늘이나 내일이나 모레나 한결같으며, 항상 느슨하게 몸을 풀어 놓지 않고 꾸준하게 나아가기 때문이다. 기분이 좋거나 날씨가 화창한 날엔 일하고 기분이 나쁘거나 날씨가 흐린 날엔 일하지 않는 사람은 영원히 어떤 결과를 얻지 못한다. 만일 한 걸음 한 걸음씩, 매일 꾸준히 일하며 언제나 제멋대로 자신을 느슨하게 풀어 놓지 않는다면, 반드시 결과가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경박함과 느슨함에서 구원하사, 정말로 우리가 소같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있어서 추호도 자신을 느슨하게 풀어 놓지 않고 줄곧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않게 하시기를 원한다. 이렇게 할 때 우리의 일은 길이 있게 된다.
구약의 잠언은 게으름에 대해 가장 많고도 분명하게 언급한 책이다. 중국어 번역본을 보면 ‘게으름’이란 단어가 잠언에 열일곱 번이나 사용되었다(6:6, 9, 10:26, 12:24, 27, 13:4, 15:19, 19:15, 24, 20:4, 21:25, 22:13, 24:30, 26:13-16). 솔로몬은 게으름에 대해 상당히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형제자매여! 게으른 습관은 오랜 시간에 걸쳐 길러진 것이기 때문에 하루아침에 고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엄격하게 게으름을 처리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평생토록 우리를 떠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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않을 것이다. 한 편의 메시지로 이 습관을 고칠 수 있다고 생각지 말라. 그것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이것이 여러 해를 걸쳐 길러진 고질적인 습관이고, 일종의 성품이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엄격히 다루지 않으면 결코 그것을 고칠 수 없다. 그러므로 평소에 게을렀던 사람은 엄격하게 처리받아야 한다. 만일 엄격하게 처리받지 않으면 주님의 일을 할 수 없다. 하나님의 일에 있어서 그분은 게으른 사람을 쓰시지 않는다. 게으른 사람은 일을 잘할 수 없다. 왜냐하면 게으른 사람은 일을 보자마자 즉시 처리하지 않고 어떻게 하면 일을 줄일 수 있는지를 생각하며, 더 나아가서는 일이 없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게으른 습관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의 일에 별 소망이 없다. 하나님의 종은 일이 많은 사람이며 귀찮은 일까지도 서슴지 않고 즐거운 마음으로 찾아 행하는 사람이다. 그들은 일을 맡으면 필사적으로 해내며, 어려움이 있으면 스스로 해결책을 찾아낸다. 그들은 어려움을 피하는 사람이 아니다. 모든 하나님의 종은 많은 일을 하며, 어려움을 피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형제자매여! 우리는 일을 두려워하고 번거로운 것을 싫어하며 일을 만났을 때 피해 다니는 나쁜 습관을 하나님 앞에서 잘 처리받아야 한다. 우리는 이 일을 엄격하게 다루어야 한다. 게으른 사람은 결코 하나님을 섬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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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N. 제3집 제6(52)권 주님의 사역자의 성격 제4장 자기의 몸을 쳐서 복종케 한다
Ezra Zion , 2013-04-05 , 조회 (80) , 추천 (0) , 반대 (0), 스크랩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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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자기의 몸을 쳐서 복종케 한다

 

 

 

 


1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같이 아니하여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3-27,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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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위 단락의 말씀 중 23절은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우리는 복음을 전파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의 길을 볼 수가 있다. 27절은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종이 자신에 대한 하나의 기본적인 요구이다. 24절에서 26절까지는 바울이 어떻게 자기 몸을 쳐서 복종케 했는지를 보여 준다.
여기서 바울이 ‘자기 몸을 쳐 복종케 한다’는 말은 결코 금욕주의가 아니다. 이것은 금욕주의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육신을 제거해야 할 장애물로 여기고, 육신을 벗는 것이 좋다고 말하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금욕주의자들은 육신을 죄의 근원으로 여기기 때문에, 육신을 엄격하게 다루어야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성경은 육신을 방해물로 여기지 않고 더욱이 육신을 죄의 근원으로 삼지 않았다.
이와 반대로, 성경은 우리의 몸이 성령의 전이라고 말하고(고전 6:19), 우리의 몸이 구속될 것이며, 어느 날 영화로운 몸을 입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내 몸을 쳐 복종케 한다’는 말을 들을 때 결코 금욕주의 사상을 가져오지 말아야 한다. 그런 사상을 가져온다면, 당신은 기독교를 다른 종교로 바꾸어 놓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사상을 전파하지 않는다. 우리는 육신이 방해물이며 죄의 근원이라는 사상을 부인한다. 다만 우리가 인정하는 것은 사람의 몸은 범죄할 수 있으나 육신이 결코 죄의 근원은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이 육신을 철저하게 다룰지라도 여전히 범죄할 수 있다.
고린도전서 9장에서 바울은 우리에게, 주의 일꾼이 해결해야 할 하나의 문제가 육신임을 보여 준다. 23절은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한다”라고 말한다. 이로써 그의 위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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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을 전하는 위치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그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 어떻게 했는가? 24절부터 26절에서 우리는 그가 어떻게 했는지를 알 수 있다. 27절에서 바울은 그가 말한 것을 분명히 나타내었다. 그는 거기서 ‘내 몸을 쳐’라고 말하고 있다. 신약 성경 원문에 따르면, ‘친다’는 것은 얼굴을 검푸르게 멍이 들도록 마구 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자기 몸을 쳐서 복종케 한다”는 것은 아플 정도로 자기 몸을 쳐서 자기의 노예가 되게 하고 복음 전하는 자신에게 순복케 한다는 뜻이다 〔이것은 실지로 손으로 자기 몸을 때린다는 것이 아니며 ‘자기 몸을 학대한다’(골 2:23)는 것도 아니다〕.
자기 몸을 쳐 복종케 할 때, 우리는 “남에게 복음을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을 받는다”는 지경에 이르지 않게 된다. 이것은 ‘자기 몸을 쳐 복종케 하는’ 것이 하나님의 종의 기본적인 생활임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하나님을 섬기는 모든 사람들에게 필요한 기본적인 생활은 바로 자기 몸을 쳐서 복종케 하는 것이다. 육신이 자기에게 복종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섬길 수 없다.
바울은 어떻게 육신의 문제를 해결했는가? 그는, “내 몸을 쳐 복종케 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27절은 그의 제목(題目)이며, 24절에서 26절까지는 그 제목에 대한 설명이다. 24절에서 26절까지는 바울이 어떻게 자기 몸을 쳤는가를 말하고 있으며, 27절에 와서야 그는 주제인 ‘자기 몸을 쳐 복종케 하는 것’을 언급한다. 이제 이것을 하나씩 살펴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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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24절에서 바울은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라고 말한다. 바울이 경주를 예로 든 것은, 그리스도인이 주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종이 주의 일을 하는 것은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것과 같이 모두가 달리기 때문에 당신도 달려야 한다는 것을 시사한다.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상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이지만, 우리가 만일 이렇게 달린다면 개개인 모두가 상을 얻을 수 있다. 이것이 우리의 경주가 세상의 경주와 다른 점이다. 바울은 특별히 운동장에서의 경기를 인용함으로 25절의 말씀을 이끌어 낸다.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한다”(25절). 여기에서 바울의 강조점은,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범사에 절제하도록 자신을 훈련시키고, 함부로 먹거나 먹지 않거나 할 수 없고 함부로 잠을 자거나 자지 않거나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경기에 참가하는 운동 선수가 훈련을 받을 때 매우 엄격한 제약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안다. 먹을 수 있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들이 모두 규정되어 있고, 언제 잠을 자야 하고 언제 잠을 자서는 안 되는 것까지도 규정되어 있다. 경기에 임하기 전에 술을 마셔서는 안 되고 담배를 피워서도 안 되는 등 각종 제한이 있다. 경기에 임할 때에도 많은 엄격한 규칙들을 준수할 것이 요구된다. 그러므로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가 필요하다. 아마 어떤 사람은 술이 꼭 필요하고, 어떤 사람은 노는 것이 꼭 필요하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경주할 때에는 반드시 당신의 몸에 절대적인 통제를 가하지 않으면 안 된다. ‘모든 일에 절제가 있나니’에서 ‘절제’는 무엇을 말하는가? 이것은 육신의 요구를 절제하는 것이고, 육신에게 지나친 요구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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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를 허용하지 않는 것이다. 경기할 때에 몸은 오직 한 가지, 곧 경주만을 위해야 한다. 우리의 몸은 먹기 위한 것이나 입기 위한 것이 아니다. 심지어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시며 잠자기 위한 것도 아니다. 몸은 오직 경주만을 위한 것이다. 경기 참가자들은 달고 전분이 많이 들어 있는 음식을 먹을 수 없다. 그런 것들이 맛이 없거나 우리 몸에 필요 없기 때문이 아니라 경주하는 데 도움이 안 되기 때문이다. 달리기 선수가 되려면 모든 것에 절제가 필요하다. 27절의 “몸을 복종케 하는”것은 몸이 제약을 받고 우리의 말을 잘 듣는 데서 시작된다. 몸의 모든 기능을 다른 데 쓰지 말고 오직 한 가지 일 곧 달리기, 그것도 일등하기 위해 사용해야 한다.
이어지는 25절에서 바울은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고 말한다. 그들은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는 데도 그렇게 자신을 제한하며 엄격한 훈련을 하는데, 하물며 썩지 않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는 우리가 자기 절제를 안해서야 되겠는가? 여기에서 ‘썩을 면류관’이란 당시 헬라인들이 월계수를 이용하여 만든 관으로 길어야 3일 내지 5일이 지나면 시들어 버린다. 그런데도 경기에 참가하는 사람들은 이 썩을 면류관을 얻기 위해 오랜 시간의 훈련을 거쳐야 한다. 우리는 바울이 말한 비교를 주의해야 한다. 그들은 운동장에서 달리고, 우리는 세상에서 달린다. 그들은 몸으로 달리지만, 우리는 하나님을 섬김으로 달린다. 그들은 거기에서 달릴 때에 단지 한 사람만 상을 받을 수 있지만 우리는 달리기만 하면 모두 상을 받을 수 있다. 그들이 얻는 상은 썩을 면류관이지만, 우리가 받는 상은 썩지 않을 면류관이다. 이러한 대조는 서로 다른 점이 있지만 한 가지 같은 것은, 25절에서 말한 ‘모든 일에 절제가 있는 것’과 몸이 제한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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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달리기 선수가 되기 위해 몸의 제약을 받지만 우리는 복음 전하는 자가 되기 위해 몸의 제약을 받는다. 목적은 비록 다르지만 몸의 제약을 받는 것은 결코 다르지 않다. 달리는 일에 있어서 몸은 제약을 받아야 하며, 그리스도인의 생활에서도 또한 몸은 제한을 받아야만 한다.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같이 아니하여”(26절). 여기에서 바울은 그의 달려가는 길에는 목표가 분명히 있으며 또한 어디로 달려야 하는지도 안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내 몸을 친다’고 말하였다. 그러므로 그의 싸움은 허공을 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몸을 치는 것이었다. 우리는 26절과 27절을 연결하여 보아야만 한다. 26절에서 바울은 그의 달려갈 길에 대해 분명하다고 말한다. 사람들이 동쪽을 가리키면 동쪽으로 달리고 서쪽을 가리키면 서쪽으로 달리는 것이 아니라, 그가 달리는 데에는 일정한 방향이 있다. 또한 그의 싸움은 허공을 치는 것이 아니다. 27절에서 그는 즉시 ‘내 몸을 쳐 복종케’ 하여 몸에 타격을 주었다고 말한다.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친다’는 원문의 뜻은 ‘때리다’이다. 그것도 얼굴이 검푸르게 멍이 들 정도로 「맹렬하게 때린다」는 뜻이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때리는 것이 아니라 아주 가혹하게 때린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때려서는 시퍼렇게 멍이 들 수가 없다. 바울이 이처럼 가혹하게 자기 몸을 다룬 목적은 그의 몸이 그에게 복종케 하기 위함이었다. 바울이 말한 ‘몸을 쳐 복종케 하는 것’은 몸을 자기의 노예가 되게 한다는 뜻이다. 즉 몸에게 방종할 기회를 주지 않고 몸을 자기 지배 아래 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몸이 내게 복종케 하는 것’은 목적이고 ‘내 몸을 치는 것’은 절차이다. ‘내 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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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는’ 목적은 몸을 복종되게 하기 위한 것이다. 형제자매여! 만일 당신이 이것을 이겨낼 수 없다면, 차라리 3년이나 5년 더 배운 후 주님의 일을 하는 것이 더 낫다. 하나님을 섬기는 모든 사람은 반드시 몸이 자기 말을 듣게 하는 것을 배워야만 한다. 성경은 우리에게, 주님을 위해 일하는 것이 달리기 경주처럼 설령 당신이 섬기는 것을 좋아한다 할지라도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면 당신은 아무 쓸모가 없다는 것을 보여 준다. 주님의 일을 하는 것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단상에 올라가 설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을 하나님 섬기는 자로 착각하지 말라. 결코 그런 일은 없다. 바울은 이 사실을 알았다. 여기에서 바울의 말은 ‘내 몸을 쳐 복종케 하는’ 사람만이 비로소 하나님을 섬길 수 있음을 보여 준다. 당신의 몸이 여전히 말을 듣지 않는다면, 하나님 앞에서 당신은 더 열심히 배워야 한다. 단지 주님을 위해 일할 생각이 좀 있으면 된다고 생각지 말라. 주님의 일꾼은 자기 몸을 쳐 말을 잘 듣게 해야 한다. 만일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면, 그는 그다지 크게 쓰임을 받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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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몸을 쳐 복종하게 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몸의 요구가 무엇인지 알 필요가 있다. 몸의 요구 사항에 대해 몇 가지 구체적인 예를 들어 본다면 음식, 휴식, 수면, 편안함, 의복, 병이 났을 때의 특별한 보살핌 등이 있다. ‘몸을 복종케 한다’는 것은 주의 일에서 어떤 요구 사항이 있을 때에, 즉 운동장에서 달릴 때 평소에 자기 몸을 친 사람은 몸이 자기 말을 잘 듣는다는 뜻이다. 평소에 몸을 그 욕망대로 느슨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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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어 놓았다면, 달리기 할 때 당신의 손과 발은 말을 잘 듣지 않을 것이다. 폐도 말을 듣지 않고 그 외 많은 지체들이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결국 뛸 수 없게 된다. 몸으로 하여금 말을 듣게 하려면 장기적인 훈련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필요할 때 결코 몸을 잘 쓸 수 없다. 만일 당신이 평소에 이런 훈련을 게을리 하고 자신의 몸을 치지 않으며 자신의 몸을 다룬 적이 없다면, 어떤 사역에 있어서의 요구에 부딪혔을 때 당신의 몸은 당신에게 복종할 수 없다. 사역을 할 때에 당신은 할 수 없다는 것을 보게 된다. 당신이 몸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없기 때문에 자기 몸을 다스릴 수 없게 되는 것이다.
형제자매여! 영적인 생명이 좋다고 해서 사역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당신의 몸이 어떠한지를 물어야 한다. 이것은 바울이 우리에게 보여 준 바이다. 우리는 당신의 몸이 좋은지 나쁜지를 묻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묻는 것은 바로 다음과 같은 것이다. 당신의 몸이 당신의 말을 잘 듣는가? 당신은 몸을 당신에게 복종케 할 수 있는가? 만일 몸이 당신에게 복종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복음 전파에 있어서 하나님을 섬길 수 없다. 이러한 훈련은 단번에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영에 속한 문제들은 단번에 해결할 수도 있다. 그러나 ‘자기 몸을 친다’는 것은 아마도 3년이나 5년 아니면 10년이 걸려야 비로소 해결될 수 있다. 몸을 느슨하게 풀어 놓는 사람은 더 엄격하게 자신을 제한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예를 들면, 인간의 몸은 규칙적인 수면이 필요하다. 잠자는 것은 틀린 것도 아니고 죄도 아니다. 더 나아가서 잠을 자는 것은 몸의 합리적인 요구이다. 하나님은 기이하게도 밤이 되면 우리가 잠자리에 들도록 우리를 지으셨다. 그러므로 이것은 합당한 것이다. 사람이 잠을 자지 않으면 어떻게 일을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만일 우리가 ‘자기 몸을 쳐서 복종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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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다’면, 잠을 자지 말아야 할 때에 잠시 잠을 자지 않을 수 있다. 이것을 우리는 ‘몸으로 복종케 한다’라고 말한다. 우리는 본래 매일 여덟 시간의 수면을 취하도록 안배되었으며, 이렇게 자기 몸을 돌보는 것은 매우 당연하다. 그러나 ‘몸을 쳐서 복종케 하려는’이유로 말을 잘 들을 때까지 우리가 자기 몸을 친다면, 잠을 자지 말아야 할 경우 잠을 자지 않을 수 있다. 주님은 겟세마네 동산에 가셨을 때 밤에 세 제자에게,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제자들이 자고 있는 것을 보시고 주님은 베드로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나와 함께 한시 동안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마 26:38,40)라고 하셨다. 주님은 그들에게 함께 깨어 있으라고 요구하셨지만 그들은 잠이 들었으며 한시 동안도 깨어 있을 수 없었다. 잠자는 것이 잘못되었는가? 그렇지 않다. 수면은 우리에게 당연히 필요하다. 그러나 주님의 요구가 있을 때에 만일 그렇게 ‘당연히’해야 할 것을 극복할 수 없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일을 저지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일을 닫아 버리는 것이다. 잠을 자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섬길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 매일 밤 잠을 자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그는 천사이다. 당신은 천사가 아니기 때문에 매일 잠을 잘 자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당신이 주님을 따르기를 배우려 한다면 자기 몸을 치기를 배워야 하며, 필요한 경우에는 하루나 이틀도 잠자지 않고 견딜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몸으로 복종케 한다’는 말이다.
경주(競走)한다는 뜻은 무엇인가? 사람이 이 땅 위에서 살 때에 매일 순간순간 달리는가? 걷는 것은 평범한 것이지만, 경주하는 것은 평범하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걷는 것은 평상시에 하는 일이다. 보통 우리가 매일 걸을 때는 한 걸음씩 서서히 발을 옮긴다. 그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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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는 매일 있는 것이 아니다. 경주는 우리가 보통 때보다 특별히 더 빨리 달릴 것을 요구한다. 평상시 몸의 기능은 우리를 걷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달릴 때에는 특별히 힘을 써야 하고, 평소 몸의 기능을 특별한 기능으로 바꾸어야 하며, 몸이 말을 잘 듣게 해야 한다. 경주는 몸에게 보통 때의 기능 외에 특별한 기능을 더 요구한다. 경주는 몸에 추가적인 요구가 있다. 보통 걸을 때에는 이렇게 많은 요구가 없지만, 달리는 데에는 많은 요구를 필요로 한다. 마찬가지로 걸을 때에 우리는 여덟 시간을 잘 수 있다. 그러나 만일 우리의 사역이 네 시간 외에 더 자서는 안 될 상황이 발생한다면 우리는 단지 네 시간만 자야 한다. 이것을 경주(競走)라고 부른다. 경주의 의미는 무엇인가? 특별한 요구가 있음을 말한다. 그 세 제자가 한 시도 깨어 있을 수 없었을 때 주님은 그들의 원인이 어디에 있었는지 말씀하셨다. “영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마 26:41). 만일 육신이 약하면 영이 원할지라도 소용이 없다. 영은 원하되 육신이 잠자는 것은, 영의 원함이 없고 육신도 잠자는 것과 똑같아 아무 쓸데없는 것이다. 영이 원하는 것으로는 부족하고 몸 또한 원해야 한다. 만일 육신이 원치 아니하여서 잠을 잔다면, 그것은 ‘몸으로 복종케 함’이 아니다. 그것은 몸이 당신에게 복종하지 않는 것이다. 만일 몸이 복종하려 하지 않는다면, 당신이 ‘영은 원이로되’라고 해도 소용이 없다. 이것은 몸이 죄악의 근원이며 방해물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때때로 우리는 몸에 추가적인 요구를 해야 하고, 몸이 그 요구에 순복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바로 ‘몸을 복종케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몸이 단지 일반적인 요구에만 부응할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서 어느 날 예외적인 특별한 환경에 처했을 때의 요구에도 능히 대처할 수 있도록 훈련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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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이 이 땅에 계셨을 때 니고데모가 밤에 주님을 찾아왔다. 그분은 싫증내지 않으시고 그를 영접하셨다. 주님은 일찍이 아주 여러 번 온 밤을 지새우며 기도하셨다. 이것은 수면에 문제를 야기시킬 수 있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항상 온 밤을 새워서 기도하는 것에 결코 찬성하지 않는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을 섬기기를 배우는 사람이 한번도 온 밤을 새워 기도해 본 적이 없다면 그것은 정말 부끄러운 일이다. 항상 밤을 새워 가며 기도하는 것은 합당치 않다. 만일 당신이 항상 밤을 새워 가며 기도한다면, 당신은 길을 잘못 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10년이나 20년 동안 주님을 섬기기를 배워 온 사람이 한번도 밤을 새워 가며 기도해 보지 못했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우리는 극단적인 길로 가서는 안 되며, 결코 날마다 온 밤을 새워 가며 기도할 것을 제창해서도 안 된다. 만일 사람이 매일 밤마다 자지 않고 기도한다면, 그것은 결과적으로 몸과 정신을 망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코 낮에 기도하지 않는 것을 찬성하지 않는다. 항상 밤에 잠자지 않고 기도하는 것은 비정상적인 것이다. 그러나 만일 주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이 한 번도 밤을 새워 기도해 본 적이 없다면, 그것은 문제가 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싶다.
경주는 매일 매일의 일이 아니지만, 훈련은 일상생활에 있다. 온몸이 배반하지 않고 말을 잘 들을 정도로 훈련해야 한다. 만일 이러한 훈련을 이제껏 해 본 적이 없고 당신의 육신이 이제까지 제한을 받아 본 적이 없다면, 당신의 사역에서는 잠을 자는 것이 제일 중요한 것이 될 것이며 잠이 당신의 주인이 될 것이다. 다른 사람이 당신의 잠을 건드리지 않으면, 아마도 당신은 어떤 일이든지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당신의 잠을 건드리면, 당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몸을 쳐 복종케 하는 것’은 하나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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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에게 반드시 필요한 훈련이다. ‘몸을 복종케 한다’는 말의 의미는, 주님의 어떤 요구나 안배가 있을 때 혹은 환경의 요구가 있을 때, 몸이 요구하는 것을 잠시 제쳐 놓고 추가적인 요구에 부응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몸의 말을 듣지 않고 오히려 몸을 내게 복종하게 하며 내 말을 듣게 하는 것이다. 만일 이렇게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자신만을 아끼는 사람이 되어 사역에 있어서 아무 쓸모가 없게 된다.
다시 먹는 문제를 예로 들어 보자. 우리 주님은 식사할 겨를도 없이 일을 하신 분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주님은 그분 자신의 먹는 문제를 앞에 벌려 놓지 않으셨다. 이것은 주 예수께서 일평생 아무것도 드시지 않으셨다는 말이 아니다. 주님도 평상시에는 잘 드셨다. 그러나 그분 앞에 어떤 필요가 놓일 때에는 식사를 중단하실 수 있으셨다. 이것을 가리켜 몸이 말을 듣는 것이라고 한다. 우리는 결코 먹지 않으면 주의 일을 할 수 없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많은 사람들은 일하러 나갔을 때 먹지 않으면 일을 하지 못한다. 물론 음식은 우리에게 분명히 필요한 것이며 우리는 우리 몸을 돌보아야만 한다. 그러나 특별한 경우에는 음식을 먹지 않고도 지탱할 수 있도록 몸을 훈련시켜야 한다. 우리는 주님과 사마리아 여인의 대화를 잘 알고 있다.
한번은 주님이 야곱의 우물 곁에 앉아 계셨고 때는 정오였다. 제자들은 먹을 것을 사러 성으로 들어갔다. 주님은 한 사마리아 여인이 물을 길으러 오는 것을 보셨다. 주님은 그녀에게 마실 물을 청하셨고 그녀에게 생수에 대해 말씀하셨다. 우리는 그녀가 주님께 마실 물을 드리는 것을 보지 못했다. 주님은 정오 식사를 하셔야 했고 물을 마셔야 할 때에 심령이 목말라 고통받고 있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생수가 무엇인지를 아주 자세히 알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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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셨다(요 4:5-26). 이것은 우리에게, 마땅히 먹어야 할 때에도 여전히 사역을 잘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만일 우리가 한 지방에 도착했는데 배가 고파서 식사하기 전까지는 아무 일도 할 수 없다고 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몸이 쓸모없다는 것을 증명한다. 이것은 극단주의자가 되라는 말이 아니며 평소에 먹지 않는 사람이 되라는 말도 아니다. 그러나 예외적인 특수한 요구가 있을 때에 우리는 먹지 않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떡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어떤 특별한 일로 한 끼를 굶어야 할 경우, 우리가 몸의 주인이기 때문에 우리는 몸이 말을 잘 듣게 해야 한다. 우리의 몸은 우리가 복종하도록 요구할 수 없다. 이것이 바로 ‘몸을 복종케 한다’는 의미이다.
또한 마가복음 3장에서 주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식사할 겨를도 없으셨는데 그분의 친속들은 주님을 무리 가운데서 끌어내어 말하기를, 그분이 미쳤다고 했다(막 3:20-21). 그러나 주님은 오히려 계속해서 일을 하셨다. 이것은 결코 그분이 미쳤기 때문이 아니라 청중들의 절박한 요구가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필요가 있을 때에 주님께서는 식사를 한쪽에 제쳐 놓으실 수 있었다. 우리는 주의 일을 하는 데 있어서 자신을 내려놓을 수 없다면 결코 많은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필요한 경우, 우리는 주의 일에 지나칠 정도로 열광할 필요가 있다. 주의 일에 어떤 필요가 있을 때, 우리는 먹는 일에 지배를 받지 않도록 우리 몸을 제어할 수 있어야 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자녀에게 어떤 필요가 있을 때 금식해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말해 주고 있다. 금식이란 신체의 합당한 요구를 잠시 멈추는 것이다. 우리는 때로 어떤 일을 위하여 하나님 앞에서 금식하며 아주 열심히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매주 세 번 혹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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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번씩 금식하는 것을 찬성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팔 년이나 십 년이 되었어도 금식 한 번 해 본 적이 없다면, 그것은 그리 좋은 일이 아니다. 주님은 산상 수훈 중에 금식을 말씀하셨다. 만일 우리가 금식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하나의 가르침을 놓치는 것이 된다. 금식의 의미는 바로 ‘몸으로 복종케 하는 것’이다.
또 다른 예를 들어 보자. 편하게 지내려고 하는 것 역시 몸의 또 다른 요구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 비교적 편안한 생활을 영위하는 것은 결코 잘못된 것이라고 할 수 없다. 다른 면으로 주님의 일에 어떤 요구가 있을 때, 우리는 환경의 불편함 때문에 몸을 불순종의 상태에 두어서는 안 된다.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면, 당신은 사역을 할 수 없다. 어떤 형제자매는 주님의 명령이 있어서가 아니라 본래 자기가 살고 있는 집이 불편하다고 느끼기 때문에 거처를 옮긴다. 이것은 편안함이 그의 길이 되어 버리고, 그의 앞길을 이끄는 셈이 된다. 이러한 사람은 하나님 손에 별 쓸모가 없다. 주님께서 어떤 환경을 안배하시고, 성령의 통제 하에 비교적 편안한 생활이 당신에게 주어질 때 하나님께 감사하는 생활을 배워야 한다.
그러나 주님께서 편안한 생활을 안배하지 않으실 때에 당신은 자기 몸을 쳐 주의 일을 계속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극단주의자가 아니다. 그러므로 평소에 우리가 비교적 편안한 생활을 하는 것은 가한 것이다. 그러나 주님의 요구가 있을 때 우리는 다른 사람에 비해 편치 못한 길을 갈 수 있어야 한다. 어떤 형제자매들은 평안한 날들을 지낼 수 있지만 생활이 조금 어려워질 때 즉시 넘어진다. 이런 형제자매들은 주님께 유용하지 않다. 달릴 때에 우리는 ‘몸을 쳐 복종케 해야 한다’. 우리는 어디서나 살 수 있어야 한다. ‘몸을 복종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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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것은 주의 일에 어떤 필요가 있을 때 환경의 영향을 받지 않고, 평소 생활보다 열악한 환경에서도 계속 일을 해 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몸을 복종시키지 못하면 평소 자신의 생활 수준보다 좀 못한 환경에 처하게 되었을 때 그는 즉시 물러난다. 그러나 이것은 비교적 생활 수준이 낮은 형제들이, 주의 일에 어떤 요구가 있을 때 그 환경을 견뎌낼 수 있다는 말이 아니다. 생활 수준이 비교적 낮은 형제들도 평소보다 좀더 열악한 환경에 처하면 견디어 내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기를 사랑하고 ‘몸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는’공과를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의복 문제를 예로 들어 보자. 물론, 우리는 마땅히 배불리 먹고 따뜻하게 입어야 한다. 그러나 너무 지나치게 의복에 신경 쓰지 말아야 한다. 침례자 요한은 옷 입는 것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누구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을 보고자 한다면 요한에게는 그런 모습이 없으니 궁전으로 가서 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많은 형제자매들은 지나치게 의복에 신경을 쓴다. 그들은 일정한 수준의 옷을 입지 않고는 살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의 종에게 낡아빠진 옷을 입도록 권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낡은 옷을 입었다고 해서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할 수 있는 한 깨끗하고 단정한 옷을 입어서 몸의 필요를 채워야 한다. 그러나 다른 면에서 설령 바울이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후 11:27)고 고백한 경우가 우리에게 발생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을 잘 섬겨야 한다. 하나님의 종이, 몸이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는 것을 평소에 훈련했다면 그는 옷 때문에 주의 일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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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질병의 문제를 예로 들어 보자. 병들고 허약할 때 우리의 몸은 평소보다 더 많은 것을 요구하는 것 같다. 많은 그리스도의 일꾼들은 몸에 작은 질병이 있어도 일하지 않을 정도로 자기 몸을 사랑한다. 바울이 그들과 같았다면 그는 눈병이 다 나아서야 주의 일을 했을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그는 많은 서신서들을 쓰지 못했을 것이다. 적어도 갈라디아서는 쓰여질 수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갈라디아서는 그의 눈병이 아주 심했을 때 쓰여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갈 6:11). 만일 바울이 눈이 다 나은 후에 일을 했다면 아마 그는 장막 짓는 일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장막을 만드는 일도 눈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는 낮에 사역을 하고 밤에는 장막을 만들었다. 그는 눈병이 있다는 이유로 일을 멈추지 않았다. 만일 디모데가 그의 위장병이 다 나은 후에 일을 했다면, 바울을 이어가는 사역은 중도에 멈춰졌을 것이다. 왜냐하면 디모데의 위장병은 계속 지속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가 몸을 돌보아야 하지만 한 면으로는 일에 어떤 필요가 있을 때 결코 자기 자신을 아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배워야 한다. 주님의 일의 어떤 요구가 있을 때에 우리는 질병의 요구를 제쳐 두고 먼저 주님의 요구에 부응해야 한다. 병이 났을 때 휴식을 취하는 것은 옳다. 그러나 주님의 일에 있어 필요한 경우라면 병든 몸으로도 주께 순종해야 한다. 우리는 언제나 ‘내 몸을 쳐서 복종케 해야’만 한다. 이것이 주의 일을 하는 조건이다. 우리 자신의 몸을 사용할 수 없다면, 우리는 무엇으로 사역을 할 것인가? 주님을 섬기는 사람이 만일 병을 상당히 심하게 앓고 있으며 주님도 그에게 어떤 특별한 요구를 하시지 않는다면, 그는 힘닿는 데까지 몸을 잘 돌볼 수 있으며 교회나 동역하는 형제자매들도 그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할지 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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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다. 그러나 만일 일의 요구가 있거나 주님의 명령이 있다면 우리는 질병의 제한을 받아서는 안 된다. 우리는 잠시 질병을 제쳐 놓을 수 있어야 한다. 이것 또한 우리가 배워야 할 공과이다.
질병뿐만 아니라 통증도 마찬가지이다. 때로 우리는 통증을 느끼는데, 어떤 때는 우리 몸이 참을 수 없는 지경까지 느낀다. 평소에 우리는 몸의 요구에 따라서 적당한 휴식을 취하기도 하고 치료를 받기도 한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분의 일을 위하여 우리에게 어떤 요구와 명령을 하실 때에, 비록 아플지라도 우리는 일을 멈출 수 없다. 우리는 육신의 몸이 우리의 말을 잘 듣도록 해야 한다. 주님께 유용한 사람이 되려면 우리는 자기 몸을 완전히 다스릴 수 있는 자가 되어야 한다. 때로 우리는 머리를 들고 주님께 이렇게 말해야 한다. “주여! 다시 한번 내 몸이 내게 복종할 수 있게 해주소서. 다시 한번 내가 몸의 요구를 거절할 수 있게 하소서!”
이 원리는 육신의 다른 욕구에서와 마찬가지로 성욕(性慾)의 문제에도 해당된다. 우리는 마땅히 주님의 일을 우선으로 취해야 하며 몸에게 성적인 요구를 만족시켜서는 안 된다.
바울의 상황을 살펴보자. 바울은 고린도전서 4장 11절부터 13절까지에서 이렇게 말한다. “바로 이 시간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비방을 당한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같이 되었도다”. 11절의 ‘바로 이 시간까지 우리가 … ’라는 이 몇 마디를 주의해 보면 여기에는 계속의 의미가 내재되어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바울의 몸이 계속적으로 그에게 복종해 왔으며 이러한 어려움들이 그를 막을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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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6장 12절부터 마지막 절까지에서 두 가지 문제를 언급하고 있다. 하나는 음식의 문제요, 다른 하나는 성(性)의 문제이다. 그는 여기서 사람이 육신을 좇아가서는 안 된다는 것을 지적한다. 성(性)의 문제에 있어서는 말할 것도 없고 음식의 문제에 있어서도 육체의 소욕을 좇아서는 안 된다. 그다음 7장에 가서 그는 성(性)의 문제에 관해 상당히 분명하게 말하고 있는데, 사람은 결코 육체의 소욕을 따라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다음 8장에서는 음식의 문제에 대해 다루고 있는데, 역시 강조하는 것은 육신의 소욕을 좇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내 몸을 쳐 복종케 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내가 내 자신의 몸을 쳐서, 즉 때려서 몸을 자기 통제 하에 두는 것이다. 형제자매여! 당신이 사역을 하러 나가고 하나님을 섬기는 길을 가고자 한다면, 많은 때에 육신의 몸이 요구하는 것을 제한해야 한다. 주님의 일에 어떤 필요가 있을 때 당신의 몸이 요구하는 것을 거절할 수 있는가? 물론 인간의 모든 욕구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이며, 또한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우리의 몸은 이에 대해 합리적인 요구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중에 하나님을 잘 섬기지 못하게 하는 것은 없는가?

4

형제자매여! 결코 몸의 요구를 느슨하게 풀어 놓아도 된다고 생각지 말라. 방종과 보호는 별개의 문제이다. 우리는 자신의 몸을 돌볼 줄 알아야 할 뿐 아니라 또한 자기 몸을 다스릴 줄 알아야 한다. ‘몸을 친다’는 것은, 배고플 때 아무 음식도 몸에 공급하지 말라는 뜻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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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라 몸에 음식을 공급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기 몸을 돌볼 수 있다. 만일 당신이 좋은 음식을 먹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이라면 사역 도중에 평소보다 좋지 않은 음식이 제공될 때 당신은 사역을 계속할 수 없다. 우리는 금욕주의를 찬성하지 않는다. 그리고 몸이 죄의 근원이라는 것도 인정하지 않는다. 우리는 신체의 요구가 하나님이 우리 몸에 정하신 것이며, 또한 우리 몸이 성령의 전(殿)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우리는 육신의 소욕을 좇아서 나아갈 수는 없다. 결코 그래서는 안 된다. 이것은 또한 우리가 항상 옷을 입어서는 안 되고, 음식을 먹어서도 안 되며, 잠을 자서도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옷을 입어야 하고, 음식을 먹어야 하고, 잠을 자야 한다. 그러나 몸을 쳐서 먹는 것과 몸을 치지 않고 먹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 몸을 쳐서 잠자는 것과 몸을 치지도 않은 채 잠자러 가는 것은 다르다. 오늘날의 문제는, 많은 형제자매들이 자기 몸을 너무 느슨하게 풀어 놓는 데 있다. 엄격하게 자기 몸을 다스릴 줄 모른다면, 당신은 주님의 일에 약간의 시련이 있어도 불평하고 원망하며 도망갈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참으면서 그분께 이렇게 말해야 한다. “주여! 우리가 겪는 어려움은 당신이 이 땅 위에서 겪으셨던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주여, 당신은 가장 높은 곳에서 내려오셔서 가장 비천한 자가 되셨지만, 지금 우리는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비천하게 되지도 않았습니다. 주여, 우리는 당신을 좇으려면 아직도 멀었습니다.”우리는 육신의 모든 제한을 받아들이길 배워야 한다.
오랫동안 육체를 느슨하게 풀어 놓은 사람이 주의 일을 하려면 많은 시간을 들여 자기 몸을 쳐서 복종케 하길 배워야 한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이것들을 이기지 못한다면 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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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코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다. 몸을 쳐서 복종케 하지 않는 사람은 운동장에 가서도 달릴 수 없다. 우리는, 복음의 역사가 경주와 똑같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평소에 훈련하지 않고 몸을 연단하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의 추가적인 요구에 부응할 수 없고 달릴 수도 없다. 경주(競走)란 당신의 몸에 분량 외 추가된 요구를 가하는 것이다. 우리는 자기 몸을 느슨하게 풀어 놓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께 크게 쓰임받은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자들이요, 또한 자기 몸을 잘 다스릴 줄 아는 자들이다. 자기 몸을 다스릴 수 없다면, 추가적인 요구가 있을 때 우리는 곧 쓰러진다. 특별히 가치가 있는 일들은 다 특별한 요구가 있을 때 이루어진다. 특별한 요구가 있을 때 주의 일을 할 수 없다면, 우리가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 자기 몸을 풀어 놓지 말고 꽉 잡고 있으며 엄하게 다스려야 한다. 잠을 이루지 못하고 먹지 못하며 편히 쉴 수 없을 때에도 여전히 주의 일을 해야 하며, 우리 몸을 복종시켜야 한다. 우리가 오늘 이러한 복종된 몸을 가지고 사역을 한다면 몸에 질병이 있고 통증이 있어도 이러한 몸은 여전히 우리의 말을 잘 들을 수 있다. 바울은,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고 말했다. 그는 그가 할 수 있는 것 이상의 일을 했다. 여기서 우리는 바울 형제가 할 수 없었던 일을 힘겹게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역대로 영에 속한 사람들은 모두 이렇게 배출되었다. 하나님의 종이 만일 평소에는 몸이 건강하고 환경도 순탄하며 수면도 충분하고 영양도 풍부한데, 필요한 경우에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면, 그는 아무 쓸모가 없게 된다. 바울은,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다”라고 말하고 있다. 바꾸어 말하면, 바울 형제도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고 오히려 탈락되어 상을 잃지나 않을까, 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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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로부터 “잘하였도다 나의 충성된 종아!”라는 말씀을 듣지 못하지나 않을까 걱정하였다는 것이다. 우리는,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섬길 수 없으며, 생활이 느슨한 사람도 하나님을 섬길 수 없으며, 자신을 엄격히 다스리지 않는 사람도 하나님을 섬길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너무나도 강함으로 육신이 우리에게 복종하게 해야 하고, 우리의 영이 강함으로 육신이 연약할 수 없으며, 부활의 생명이 우리 안에서 강함으로 죽어야만 할 이 육신도 반드시 살아나야 할 것이다. 우리의 육신이 우리의 말만 듣고 우리를 저지하지 않는 단계로 이끌려져야 한다. 이럴 때 비로소 우리는 주님의 일을 잘 할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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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N. 제3집 제6(52)권 주님의 사역자의 성격 제3장 고난 받을 마음가짐이 있어야 한다
Ezra Zion , 2013-04-05 , 조회 (93) , 추천 (0) , 반대 (0), 스크랩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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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고난 받을 마음가짐이 있어야 한다

 

 

 

 


1

하나님을 섬기는 모든 사람은 고난 받을 마음가짐이 있어야 한다(벧전 4:1). 이것은 상당히 중요한 문제이다. 우리가 이 문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보기 전에, 먼저 그리스도인이 고난 받는 것에 대해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를 살펴보기로 하자.
성경의 가르침은 상당히 분명하다.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이 고난을 받아야만 한다는 생각은 없으시다. 어떤 철학 사상은, 사람의 육체는 고통을 받아야만 하며 행복을 누려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따라서 이러한 사상을 가진 사람은 어떤 누림도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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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종으로서 주님을 대표하는 사람들인 우리는 이러한 철학 사상이 그리스도인에게 합당하지 않다는 점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성경은 하나님께는 그분의 자녀가 고통을 받아야만 한다는 뜻이 없고, 우리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않으신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 준다. 시편 23편 1절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는 우리에게 더 이상 필요한 것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여호와가 나의 목자이시므로 그 무엇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당신이 방금 밥을 먹었는데, 어떤 사람이 당신에게 죽 한 그릇을 준다면, 당신은 분명히 “나는 배불러서 더 이상 필요치 않아요”라고 말할 것이다. 시편 23편 1절의 뜻은, 주님이 우리의 목자이시므로 우리는 아무것도 부족하지 않다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부족하기를 바라지 않으시고 우리가 배부르기를 원하시며 우리에게 어떤 좋은 것도 아낌없이 주신다는 말이다. 구약 성경은 줄곧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을 돌보시고 그들의 어려움과 고통을 덜어 주시며 그들을 이방인들에게서 항상 분별하셨다는 것을 보여 준다. 여하를 막론하고 고센 땅은 애굽과 달랐다. 하나님은 고센 땅을 축복하셨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은 고행을 제창하는 철학 사상을 기독교 안으로 들여와서는 안 된다. 기독교가 아닌 어떤 것을 기독교 안으로 들여온다면 기독교는 즉시 혼란스러워진다. 이것은 우리가 반드시 주의해야 할 일이다.
그런가 하면, 이와는 반대로 하나님은 그분의 자녀들이 시련과 채찍질에서 예외가 되게 하지는 않으신다. 하나님도 시련을 주시고 채찍질을 하신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이 고행을 제창하는 그런 철학 사상과는 다르다는 것을 분별해야 한다. 하나님은 항상 그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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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들에게 은혜를 주시고, 돌보시고, 돕고, 공급하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필요할 때에는 그분의 자녀들에게 채찍질하시고 시련을 주신다. 이것은 그분이 날마다 그들을 시험하신다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자녀들에게 필요가 있을 때에만 채찍질하시지, 결코 매일 매순간 그렇게 채찍질하지는 않으신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그분의 자녀들에게 채찍질을 하시고 시련을 당하게 하시는 것이 아니다. 어떤 때는 그렇게 하시지만, 보통 때는 그렇지 않다. 오히려 보통 때에 그분은 늘 우리를 돌아보시고, 우리를 위해 안배하신다. 만일 우리가 완고하여 굴복치 않는다면, 그분은 우리에게 시련을 계속 주시고 채찍질로 우리를 떠나지 않게 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의 안배하심에 있어서 그분은 늘 평상시에 하고자 하시는 일을 계속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고난 받기를 원치 않으신다. 이 점에 대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분명해야 한다. 하나님은 모든 좋은 것을 그분의 자녀들에게 주고자 하시며, 우리는 그분이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다.
그러면, 성경에서 말하는 고난을 받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그것은 우리가 주님 앞에서 한결같이 택한 길이다. 바로 주님께서 우리가 은혜로 충만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안배하신 것을 말하며,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의 종으로서 그분을 섬기기 위하여 기꺼이 고난 받는 길을 택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난 받는 길은 바로 선택하는 길이다. 그것은 마치 다윗을 좇으며 생활한 세 용사가 다윗이 베들레헴 성문 곁의 물 한 모금을 원한다는 말을 듣고서 자기들의 생명을 초개(草芥)같이 여기고 다윗의 소원을 들어 주기 위해 블레셋 군대를 격파하고 지나갔던 것과 같다(삼하 23:14-17). 그러므로 고난을 받는 것은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지 결코 누가 규정한 것이 아니다. 고난을 받는 것은 우리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선택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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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기꺼이 고난 받기를 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정하심에 따르면 많은 고난들은 받지 않아도 되지만, 하나님을 섬기기 위하여 보통 사람과 다른 길을 기꺼이 선택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고난 받을 마음가짐이다. 고난 받을 마음가짐은 하나님을 섬기는 모든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성격이다. 만일 우리에게 고난 받을 마음가짐이 없다면 어떤 일도 잘할 수 없다. 주님을 섬기는 사람에게 이 점이 부족하다면 그의 일은 매우 얕을 것이다. 주님을 섬기는 사람에게 만일 고난 받을 마음가짐이 없다면, 그는 하나님 앞에서 일을 할 수 없다. 우리는 여기서 몇 가지 점을 약간 더 언급해야 한다.

2

우리는 결코 고난 받을 마음가짐이 곧 고난을 받는다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만 한다. 우리 내면이 하나님 앞에서 갈망을 가지며, 우리 마음이 주님을 위하여 즐거이 고난을 받으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을 우리는 고난을 받으려는 마음가짐이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고난 받을 마음을 가진 사람이 실제로 항상 고난을 받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마음가짐에 있어서는 자신을 드리고 달게 고난을 받으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오늘 주님이 당신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과 좋은 가구로 장식된 비교적 좋은 집을 주신다면, 당신은 그것을 누리고 사용할 수 있다. 주님이 만일 이렇게 안배하셨다면, 당신은 주님 앞에서 그것들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당신에게는 여전히 주님을 위하여 고난을 받으려는 마음가짐이 있어야 한다. 비록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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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육체에 고난은 없지만 당신의 마음가짐은 오히려 주님을 위하여 고난을 받으려 해야 한다. 그러므로 문제는 외적인 환경이 아니라 당신 내면의 마음가짐이다. 모든 것이 좋은 이러한 상황에서 당신에게는 고난 받을 마음가짐이 있는가? 주님은 우리에게 매일 매일 고난을 안배하시지 않지만, 주님의 모든 사역자는 하루라도 고난 받을 마음의 대비를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고난이 매일 매일 당신의 생활에 꼭 있지 않을지라도 고난 받을 마음가짐은 매일 매일 있어야 한다.
문제는 많은 형제자매와 많은 동역자들의 가족이 작은 어려움이 닥쳐도 쉽게 좌절한다는 데 있다. 이것은 그들에게 고난 받을 마음가짐이 없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순탄한 환경을 주시고 물질적으로 부족하지 않게 하시며 건강한 몸을 주실 때, 우리는 순탄하게 주님을 섬기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고난 받을 마음가짐이 없기 때문에 작은 시련이 닥쳐도 우리는 즉시 무너져 버린다. 우리에게 고난 받을 마음가짐이 없다면, 우리는 아주 조그마한 시련도 감당할 수 없다.
고난 받을 마음가짐이 있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고난 받을 것을 잘 예비하는 것이며, 마음에 고난을 받으려 하는 것이고, 이것은 고난 받는 길을 기꺼이 택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고난을 피하게 하시는 것은 주님의 일이다. 우리 편에서는 언제나 고난 받을 것을 예비해야 한다. 그리하여 주님의 안배가 바뀌어서, 시련이 우리에게 닥칠 때에 우리는 그것을 마땅히 감당해야 할 것으로 생각하여 조금도 이상한 것으로 여기지 않게 된다. 만일 당신이 조그마한 시련도 감당할 수 없다면, 주님께서 당신에게 좋은 환경을 안배하실 때에는 받아들이겠지만, 환경이 조금만 변해도 당신은 즉시 물러나거나 사역을 중단할 것이다. 이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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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에게 고난 받을 마음가짐이 없기 때문이다. 일(work)은 당신을 기다릴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하라. 당신에게 먹을 것이 있어도 이렇게 하며 없어도 이렇게 해야 한다. 당신에게 입을 것이 있을 때나 없을 때나, 당신이 건강할 때나 그렇지 않을 때도 당신은 동일해야 한다. 여기에서 당신은 고난을 받으려는 마음가짐이 곧 병기(兵器)라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병기의 위력은 대단하여 사탄이 이길 방법이 없다. 그렇지 않으면, 시련이나 어려움이 닥쳤을 때, 당신은 사역을 할 수 없게 되고 즉시 멈추게 된다.
어떤 형제자매들은 고난을 잘 참고 견뎌 내지만,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그 고난을 조금도 보배롭게 느끼지 않는다. 따라서 주님께 감사하는 마음도 전혀 없다. 때로 그들은 속에서 원망하며, 심지어 원망의 말까지 한다. 그들은 그런 날들이 빨리 지나가지 않을까 봐 두려워한다. 그들은 기도하지만 찬미하지 않는다. 성령의 다스림 아래서 그들에게 닥친 것들을 받아들이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런 날들이 빨리 지나가기만을 갈망한다. 이것은 그들이 조금도 고난 받을 마음가짐이 없다는 것을 보여 준다. 형제자매여, 만일 당신에게 고난 받을 마음가짐이 없다면, 주님이 당신의 길을 순탄케 하실 때는 당신이 전진할 수 있겠지만, 길이 진흙투성이일 때에는 봉사를 그만두게 된다. 이런 것은 옳지 않다. 거듭 말하지만, 고난 받을 마음가짐이 있다고 해서 곧 고난 받는 것은 아니다. 당신에게 고난 받으려는 마음가짐이 있더라도, 주님이 반드시 당신으로 고난 받게 하시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고난을 받게 된다면, 당신의 내면에 이미 고난 받을 마음가짐이 있으므로 당신은 좌절하지 않게 된다. 고난 받는 사람에게 모두 다 고난 받을 마음가짐이 있는 것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은 비록 고난을 받고 있지만, 그들에게는 고난을 받으려는 마음가짐이 조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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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다. 그러므로 고난을 받고 있는 사람들 중에는 고난 받을 마음가짐이 있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많은 형제자매들은 고난을 당하거나 어려움을 만날 때, 거의 매일 그 속에서 구출되기를 외치고 그 괴로움을 부르짖으며 그런 날들이 속히 지나가기만을 간절히 바란다. 이런 사람에게는 고난 받을 마음가짐이 조금도 없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고난이 있을 뿐, 고난 받을 마음가짐이 없다. 그러므로 육체적으로나 경제적으로 혹은 다른 일에서 시련을 받는 형제자매는 주의해야만 한다. 주님 앞에서 계산될 수 있는 것은 당신에게 고난이 있는가 없는가가 아니라, 당신에게 고난 받을 마음가짐이 있는가 없는가이다. 당신이 큰 고난을 당했다고 해서 그것이 곧 주님을 위해 고난을 받는 것이라고 오해하지 말라. 물론, 당신이 만난 것은 큰 고난이다. 그러나 당신에게는 주님을 위하여 즐거이 고난을 받으려는 마음가짐이 얼마나 있는가? 당신이 주님 앞에서 이러한 선택을 할 마음이 얼마나 있는가? 혹 당신은 속에서 원망하고 불평하며 스스로를 연민하고 자신을 참소하지는 않았는가? 어떤 사람에게 아주 많은 괴로움이 있고 실제적인 어려움이 많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그에게 고난 받을 마음가짐이 조금도 없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고난 받을 마음가짐은 고난을 받는 것보다 훨씬 더 심오하다. 고난 받을 마음가짐을 갖는 것은 반드시 외적으로 고난을 받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외적으로 고난을 받는 것 또한 반드시 고난 받을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형제자매여! 당신은 이 차이점을 구분할 수 있는가? 이것은 마치 물질적으로 빈곤한 사람이 영 안에서 빈곤하지 않을 수 있는 것과 같다. 많은 사람들이 물질적으로는 빈곤하지만 영 안에서는 빈곤하지 않다. 마찬가지로 많은 형제자매가 분명히 고난을 받지만 그들에게는 조금도 고난을 받으려는 마음가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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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을 수 있다. 만일 주님께서 그들에게 선택할 기회를 준다면, 그들은 한 달도 고난을 받으려고 하지 않을 것이며, 혹은 1분이라도 고난 받으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고난 받을 마음가짐이 전혀 없다. 고난을 받으려는 마음가짐이 없는 사람은 주님의 일에 있어서 어떤 경지에 이를 수 없다. 외적인 요구가 그의 능력을 초과할 때 그는 즉시 좌절한다. 그에게 조금이라도 드릴 것을 요구하면 그는 견디지 못한다. 그러나 그 자신이 귀중히 여기는 것에 관한 한 그는 포기하지 않는다. 그는 다만 순탄한 날들 속에서 가장 순리적인 일들만을 할 수 있다. 그는 주님께서 그를 위하여 모든 방해 요소를 가져가시고 평안하고 무사히 일할 수 있게 해 주시기를 바란다. 주님을 섬기는 사람이 이처럼 바란다면, 이것은 아주 기이한 일이다. 우리는 고난 받을 마음가짐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아야 한다. 평안한 가운데 있는 형제가 고난 받을 마음가짐에 있어서 시련 중에 있는 형제보다 더욱 강할 수 있다. 그는 주님 앞에서 고난 받을 마음가짐이 있기 때문에 그분을 위해 고난 받도록 자신을 예비한 것이다. 반면에 고난 중에 있는 형제는 결코 주님을 위해 고난 받기를 원치 않는다. 한 형제는 평안 가운데 있고 다른 형제는 시련 가운데 있을 때, 사람의 눈으로 본다면 시련 중에 있는 형제가 분명 고난을 받고 있다. 그러나 주님은 평안 중에 있으면서 고난 받을 마음가짐이 있는 그 형제를 더욱 귀하게 여기신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더욱 귀하게 여기시는 것은 고난 받을 마음가짐이지 고난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주님은 결코 우리가 고난 받기를 원치 않으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을 많이 받아야 된다고 여겨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요구가 있으실 때 우리가 그 요구에 잘 부응하려면, 우리에게 고난 받을 마음가짐이 필요할 뿐 아니라 이것을 병기로 삼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 병기가 없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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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주님을 위하여 싸울 방법이 없다. 당신은 어려움을 만나자마자 후퇴하려고 한다. 주님께서 당신에게 조금만 대가를 요구해도 당신은 견디지 못한다. 주님께서 조금만 고통을 주어도 당신은 즉시 좌절한다. 당신이 고난을 얼마나 받았는가를 묻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당신에게 고난 받을 마음가짐이 얼마나 있는지 묻는 것이다. 우리는 고난을 많이 받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은혜를 더 많이 받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간혹 우리는 고난을 많이 받은 형제에게서 조금도 도움을 얻지 못하며, 그가 본래부터 고난 받을 마음가짐이 없었다는 것과 고난을 달게 받지 않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만약 그에게 선택하라고 했다면 아마 그는 1분도 고난 받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고난을 받았지만 그의 내면에는 조금도 기꺼운 마음이 없다. 고난을 받았지만 그는 하나님 앞에서 어떠한 공과도 배우지 못했으며 그의 내면은 배반하는 마음으로 가득찰 수 있다. 이것은 고난 받을 마음가짐과 고난 받는 것이 다르다는 것을 우리에게 시사한다. 주님께서 귀히 여기시는 것은 고난 받으려는 마음가짐이다(고난 받을 마음을 품지만 고난을 받지 않을 수도 있다). 우리는 고난 받는 것으로 고난 받을 마음가짐을 갖는 것을 대신할 수 없다.

3

여기서 우리는 주님의 일에 있어서의 어려움을 보기로 하자. 예를 들면, 어떤 때에 하나님이 마치 물질적인 면에 있어서 예비하심이 충분치 않은 것처럼 우리를 재정적인 궁핍의 시련 가운데 두실 때에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는 물질적으로 조금만 궁핍해도 사역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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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추고 ‘주님이 우리를 어쩌면 그토록 야속하게 대하시는가’라고 생각한다. 이때 주님은 우리에게, “너희가 무엇을 위해 나를 섬기는가?”라고 물으실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형제자매여! 하나님의 일에 있어서 당신이 잘하느냐 못하느냐는 당신에게 고난 받을 마음가짐이 있는가가 하나의 큰 관건이다. 당신은, “나는 어려움이 조금만 닥쳐도, 시련을 조금만 받아도 즉시 멈추고 일을 하지 않겠다.”라고 말할 수 없다. 어떤 일꾼도 맑은 날에만 일하러 나가고 비가 오면 집에 머무르는 사람이 될 수 없다. 당신에게 고난 받을 마음가짐만 있다면 어려움이 닥치든 고난이 오든 변함없을 것이다. 병이 들어도 죽음이 닥칠지라도 당신은 주의 일을 한다. 고난 받을 마음가짐이 있을 때 당신은 당당히 서서 마귀에게, “어떤 것이 와도 나는 해낸다.”라고 말한다. 만일 당신이 속으로 무엇을 두려워한다면 사탄은 당신에게 미끼를 주어 물러나게 한다. 만일 당신이 “굶주려도 두렵지 않다.”라고 말하며 사탄이 당신에게 굶주림을 주어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사탄은 물러갈 수밖에 없다. 만일 당신이 “추워도 난 겁나지 않는다.”라고 말하며 사탄이 당신에게 추위를 주어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사탄은 물러간다. 만일 당신이 “나는 병(病)이 무섭다.”라고 말한다면, 사탄은 반드시 당신에게 병을 줄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은 병들자마자 실패할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당신이 “나는 병도 무섭지 않다.”라고 말한다면, 사탄은 당신을 어떻게 할 수 없다. 만일 당신이 고난 받을 마음가짐이 없다면, 사탄은 당신이 두려워하는 그 점을 이용해서 당신을 다루고 실패하게 한다. 하나님을 섬기는 모든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 앞에서 잘 예비되어야 하며, 어떤 것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와도 여전히 일을 하며 저것이 닥쳐도 여전히 일을 해야 한다. 가정에 시련이 닥쳐도, 신체의 질병이 생겨도 여전히 해야 한다. 굶주림이 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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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위가 와도 여전히 해야 한다. 이렇게 할 때 사탄은 당신을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 이러한 태도를 가질 때 당신은 고난 받을 마음가짐이 있는 것이다. 고난 받을 마음가짐이 없으면 사탄은 즉시 당신이 두려워하는 것으로 당신을 실패하게 하고 하나님의 일에서 후퇴케 하며 쓸모없게 만들 것이다.
형제자매여! 우리는 다음과 같이 하나님께 말해야 한다. “당신의 사랑의 강권함과 오늘날 당신이 나에게 베푸신 은혜로 인해, 천당이 오든 지옥이 오든 결과가 어찌되든 나는 변함없이 이렇게 행합니다. 나는 내가 좋아도 이렇게 행하고 좋지 않아도 이렇게 행합니다.”만약 우리에게 이러한 마음가짐이 없다면 우리의 약점이 사탄에게 붙잡히게 되어 우리는 즉시 끝나고 쓸모가 없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사 고난 받을 마음가짐이 무엇인지 알게 해 달라고 간구해야 한다. 고난 받을 마음가짐이란 앞길이 어떠하든 내적으로 상관치 않고 어떤 일을 당하든지 주님을 위하는 마음이다. 그러므로 고난 받을 마음가짐을 갖는다고 해서 반드시 고난을 받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꼭 고난을 받지 않는다는 말도 아니다. 그러나 내면의 확신이 견고해야 한다. 내면에 확신과 뜻이 없다면 어려움을 만나자마자 당신은 즉시 무너져 버린다. 내면에 그런 확신이 있다면 어려움을 만나든 만나지 않든 당신은 아무 문제가 없다. 당신은 이것을 보았는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을 섬기는 길은 고난을 받는 것에 있지 않고 도리어 고난 받을 마음가짐에 있다. 즉, 주님께서 당신에게 좋은 음식과 옷을 주셔도 감사하고,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감사하다는 것이다. 이것들은 당신에게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좋은 것도 나쁜 것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은 사서 고생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고난 받을 마음가짐을 갖는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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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은 어려움이 닥쳐도 변함없이 좌절하지 않고 예비되어야 한다. 마음가짐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면 어떤 것도 해결할 수 없다.
예를 들어, 당신이 주님을 위하여 사역을 하러 나갔는데 몸이 약하다면 건강한 사람보다 비교적 좋은 침대에서 잠을 자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내 몸은 건강하지 않아서 침대가 좋아야 한다.”라고 말한다면, 사탄은 즉시 이 점을 공격하여 당신에게 좋지 않은 침대를 준비해 준다. 당신의 침대가 좋든 좋지 않든 상관없이 사역을 계속하는 것이 바로 고난 받을 마음가짐을 갖는 것이다. 주님께서 당신에게 편한 침대를 마련해 주셨다면 당신이 일부러 딱딱한 마룻바닥에서 자려고 할 필요가 없다. 주님께서 주신 좋은 침대에서 자면 된다. 주님께서 좋지 않은 침대를 마련하셨을지라도 당신은 거기서 자야 한다. 침대가 어떠하든 상관없이 당신은 언제나 사역을 수행해야 하며, 침대가 좋지 않다고 해서 물러나거나 위축되어서는 안 된다. 이러한 마음가짐이 성경에서 말하는 고난 받을 마음가짐이다. 물질적으로 생활이 궁핍한 형제라고 해서 반드시 고난 받을 마음가짐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물질적으로 생활이 남보다 어려운 형제가 비교적 좋은 환경에 있는 형제보다 고난 받을 마음가짐이 더 많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오직 참으로 주님께 자신을 드린 형제만이 고난 받을 마음가짐이 있는 것이다. 고난 받을 마음가짐은 한량이 없기 때문에 끝이 없다. 당신이 어떤 곳에 갔을 때는 잠자리가 마룻바닥이었지만 다른 곳에 가 보니 마룻바닥은 고사하고 다만 짚을 깐 땅바닥에서 잘 수밖에 없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겠는가? 어떤 사람은 잠이 들기는 하였지만 마지못해 잠을 청한 것일 수 있다. 그가 비록 고난을 받았지만 그의 고난 받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그가 마룻바닥에서 잘 수는 있지만 그 이상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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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한을 받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것은 마치 평소의 생활 수준이 낮은 사람이 더 힘든 환경에 처할 때 감당할 수 없는 것과 같다. 고난을 받는 것은 사실이지만 여기에는 고난을 받으려는 마음가짐이 없는 것이다. 평소에 비교적 편안한 생활을 즐기던 형제가 좀 열악한 환경에 처한다 해도 전과 같이 생활하고, 마룻바닥에서 잘 수도 있고 짚을 깔은 땅바닥에서 잘 수도 있으며, 아무 불평 없이 기꺼운 마음을 갖는다면 그는 고난을 받으려는 마음가짐이 있는 사람이다. 하나님께서는 고난 받을 마음가짐이 있는 사람을 택하신다.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고난을 받고 안 받고의 문제가 아니라 고난 받을 마음가짐이 있는가 없는가의 문제이다. 당신이 하나님을 섬기고자 한다면 고난 받을 마음가짐이 없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주님께 쓰임받을 수 없다. 왜냐하면 고난 받을 마음가짐이 없는 사람은 조금만 시련을 당해도 금방 무너져 버리기 때문이다. 사탄이 어떤 일을 그에게 일어나게 하기만 해도 그는 즉시 모든 일에서 손을 놓게 된다. 형제자매여! 당신은 이 점을 보았는가? 고난 받을 마음가짐이 있다는 것은 생활의 수준의 제한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문제는 얼마나 고난을 받는가가 아니라 어느 정도로 받을 수 있는가이다. 고난 받는 것은 필수적인 것이 아니지만 고난 받을 마음가짐은 필수적이다. 주님은 의도적으로 우리를 고난 가운데 계속 두시는 것이 아니다. 그분은 우리 내면에 고난 받을 마음가짐을 창출하고자 원하신다. 하나님을 섬기기를 배우는 형제자매들이 고난 받을 마음 없이 일을 한다면 그들은 결코 굳세게 사역을 할 수 없다. 고난 받을 마음가짐이 없다면 당신은 가장 연약한 사람이다. 당신은 조금만 어려워도 자기 자신을 가련하게 여기며 자기 연민에 빠져서 자신을 위해 눈물 흘리고 탄식하며 이렇게 말한다. “나는 결국 이러한 경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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떨어졌다.” 수년 동안 주님을 섬겨 오던 한 자매가 울고 있는 다른 한 자매에게 이렇게 물었다. “당신은 누구를 위하여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까?” 아! 많은 사람이 자신을 위해서 눈물을 흘린다. 그는 사랑스럽고 귀중하게 생각했던 자신이 형편없는 지경에 떨어지는 것을 발견하고 우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가장 약한 사람이다. 일에 부딪히자마자 그는 먼저 쓰러지게 된다.
그러므로 문제는 시련이 닥치고 괴로움이 몰려올 때, 당신이 마음을 어디에 두는가에 있다. 한 면에서 이것은 당신이 겪는 고통의 문제이며, 다른 면에서는 주님의 일의 문제이다. 고난 받을 마음가짐이 없다면 당신은 즉시 주님의 일을 희생시킬 것이다. 당신이 괴로워하고 자신을 귀히 여기느라 시간이 부족한데 어찌 주님의 일을 돌볼 마음이 있겠는가? 형제자매여! 우리는 고난 받을 마음가짐을 갖기를 배워야 한다. 물론 우리가 일을 내려놓으면 고난은 즉시 사라진다. 그러나 주님의 일은 이로 인해 손실을 당한다.
그러므로 문제는 여기에 있다. 고난 받을 마음가짐이 없거나 고난 받을 마음이 결여되었다면, 사탄은 언젠가 우리가 주님의 일을 포기하거나 주님의 일을 희생하도록 역사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지닌 사람이라는 점을 하나님 앞에서 잊지 말아야 한다. 살든지 죽든지 우리는 우리의 책임과 일을 포기할 수 없고 하나님 앞에서 그것을 끝까지 견뎌야 한다. 우리는 결코 형제자매들이 고난 받기 원하는 것이 아니다. 가능한 상황에서 하나님 앞에서 그들의 의식주(衣食住)가 다 해결될 수 있다면 그것은 좋은 것이다. 우리는 형제자매들이 일부러 사서 고생하는 것을 원치 않으며, 결코 그 몸에 고난이 더해지기도 원치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아무런 부족함 없이 우리를 공급해 주시기 바란다. 그러나 고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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받을 마음가짐은 우리에게 꼭 필요하다. 한 면으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좋은 것 주시기를 조금도 아끼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아야 하며, 다른 한 면으로 우리는 고난 받을 마음을 가져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조그마한 어려움을 당할 때 쓰러지고 생활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실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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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어느 정도까지 고난 받을 마음을 가져야 하는가? 성경의 요구는 “죽도록 충성하라”(계 2:10)이다. 즉 어떤 고난이 닥쳐도 죽기까지 변함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극단에 빠져서는 안 된다. 그러나 고난 받을 마음가짐에 대하여 우리는 중용(中庸)의 태도를 취할 수 없다. 만일 중용을 취해야 한다면, 차라리 주님께서 당신을 대신해 중용을 취하시게 하고 교회나 혹은 나이 많은 형제들이 당신을 대신해 중용을 취하게 하라. 그리고 당신은 자신을 주님께 드리라. 만일 당신이 당신 자신을 중용의 위치에 둔다면, 어떻게 주의 일을 할 수 있는가? 중용의 위치를 취할 때 당신은 주의 일을 잘 할 수 없다. 자기 생명을 아끼고 사랑하며 항상 스스로 붙잡고 있는 사람은 아무리 하나님의 일을 잘한다 해도 결코 많은 일을 해내지 못한다. 우리 개개인은 죽기까지 충성하도록 예비해야 한다. 우리는 언제나 이 길을 걸어가야만 한다. 물론 주님은 당신의 충성으로 인하여 당신을 죽으러 가게 하지 않으실 것이다. 그러나 생명을 보호하는 것은 주님의 일이며 우리 자신이 지켜서는 안 된다. 주님이 어떻게 안배하시든지 그것은 주님의 일이며, 우리는 다만 언제든지 자신을 버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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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어떤 고난이든 상관없이 우리는 모두 참고 견뎌야만 한다. 형제자매여! 자신의 생명을 소중히 여긴다면 당신은 죽기까지 충성할 수 없다. 죽기까지 충성하는 사람은 자기 생명을 아껴서는 안 된다. 죽기까지 생명을 아끼지 않는 것이 우리에 대한 주님의 기본적인 요구이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정도로 고난 받을 마음가짐을 강하게 가져야 한다. “주여, 죽으면 죽으리이다. 어떠한 곤고한 상황에 처해 있더라도 상관이 없습니다. 나는 당신을 위하여 내 목숨을 바치기 원합니다.” 형제자매여, 만일 우리에게 이러한 마음가짐이 없다면, 우리는 어려움을 만나자마자 일을 멈추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모든 사역자는 자신을 아끼지 않는 이러한 공과를 배워야 한다. 자기 생명을 아끼는 사람은 무엇을 해도 한계가 있으며 언젠가 하던 일을 멈추게 된다. 하나님은 마음가짐이 대단한 사람이 그분을 섬기기를 원하시고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않고 버릴 수 있는 사람이 그분을 섬기기 원하신다. 그러므로 어떻게 해야만이 극단에 빠지지 않을 수 있는지 염려하지 말라. 그것은 또 다른 문제이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 어떤 것도 안배해서는 안 된다. 우리 개개인은 하나님 앞에서 고난 받을 마음가짐에 있어서 언제나 절대적이어야 한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가 꼭 고난 받지는 않더라도 고난 받을 마음가짐은 항상 있어야 한다. 우리는 어떤 것도 상관하지 않도록 자신을 예비해야 한다. 외적인 어려움뿐 아니라 육신의 어려움까지도 감수할 수 있어야 한다. 만일 우리가 자신을 사랑하여 자신의 목숨을 내걸 수 없다면 우리는 어떤 것도 할 수 없다. 우리는 주님께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한다. “주여! 나는 모든 것을 다 바치기 원합니다. 오늘 이후로 어떤 고난을 만나든지 그 어떤 것도 내가 주님 섬기는 것을 막을 수 없습니다. 죽든지 살든지, 고난이든지 즐거움이든지 언제나 나는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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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택하겠습니다.”
형제자매여! 효과 있는 것은 오직 죽기까지 충성하여 주님을 섬기는 것이다. 이 위치에 서 있으면 있을수록, 당신은 사탄이 당신을 어떻게 할 수 없으며 그에게 어떤 방법이 없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은 조금만 고통을 당해도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탄식하기를 마지않으니, 이 얼마나 자기를 사랑하는 것인지! 우리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눈물도 없고 탄식도 없을 것이다. 이 길을 걸어가는 모든 형제자매는 생명을 바치는 사람이다. 만일 당신이 이 길을 가고자 한다면 당신은 주님께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한다. “주여, 당신이 정하신 길이 내가 고난을 받든 받지 않든 나는 언제나 고난 받을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고난 받는 것은 한계가 있지만 고난 받을 마음가짐은 마땅히 한계가 없어야 한다. 주님께서 실제로 당신이 받도록 한 고난은 한정적이지만 당신이 주님 앞에서 가져야 할 고난 받을 마음가짐은 한계가 없어야 한다. 주님을 위해 고난 받으려는 마음가짐이 제한적이라면 아직 당신에게는 고난 받을 마음가짐이 없는 것이다. 고난 받을 마음이 제한적이라면 그것은 옳지 않다. 비록 이 요구가 대단히 큰 것이지만 주님께서는 바로 이것을 요구하신다. 이 요구보다 작다면 하나님을 섬길 길이 없다. 우리는 기꺼이 고난 받는 것의 한계를 정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옳지 않다. 기꺼이 고난 받는 것은 아무 제한이 없는 경지까지 이르고 심지어 죽기까지 고난 받아야 옳은 것이다. 만일 이 요구보다 작다면, 사탄은 당신을 시험하여 실족하게 할 것이다. “또 여러 형제가 어린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 이기었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계 12:11). 당신이 양심에 아무 거리낌 없이 사탄에게 승리의 간증을 하며 자신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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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을 아끼지 않는다면, 사탄은 당신에게 어떠한 힘도 쓰지 못할 것이다. 사탄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않는 사람을 다룰 방법도 없다. 우리는 욥의 이야기를 알고 있다. 사탄이 욥을 공격한 것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할 수 있다는 것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 … 사람이 그 모든 소유물로 자기의 생명을 바꾸올지라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뼈와 살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욥 2:4-5). 사탄은 욥의 생명을 만지고 욥이 그의 생명을 아끼기만 하면 자기에게 길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것은 사탄이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그러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어떠한 방법도 없음을 우리에게 분명히 보여 준다.
하나님의 일꾼들의 실패는 바로 자기 생명을 아끼는 데에 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물어야만 한다. “일이 더 중요한가, 아니면 자기 생명이 더 중요한가? 우리의 책임이 더 중요한가, 아니면 자기 생명이 더 중요한가? 사람의 영혼이 더 중요한가, 아니면 자기 생명이 더 중요한가? 하나님의 교회가 더 중요한가, 아니면 자기 생명이 더 중요한가? 이 땅 위에서의 하나님의 간증이 더 중요한가, 아니면 자기 생명이 더 중요한가?” 자기 자신을 아끼는 모든 사람은 하나님을 섬길 수 없다. 또한 고난 받는 사람이라고 해서 모두 하나님을 잘 섬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직 고난 받을 마음가짐이 있는 사람, 끝없이 고난 받을 마음을 가진 사람, “비록 죽을지라도 목숨을 아끼지 아니하겠다”는 마음가짐이 있는 사람만이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 오늘 우리는 다시 한번 하나님 앞에 자신을 드려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자신을 드리는 것은 고난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떤 것도 버릴 수 있도록 자신을 예비하기 위한 것이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향해 목숨을 잃게 할 뜻이 없을지라도 우리는 죽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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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성을 다하겠다는 마음가짐을 가져야 한다. 많은 때 형제자매들이 주의 일에서 실패하는 이유는 모두 자기 나태와 자기 보호 및 자기를 아끼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이 눈멀었거나 형제자매들이 눈멀었다고 생각하지 말라. 사역을 하러 갈 때, 사람들은 우리가 모든 것을 드리는지를 알 수 있다. 또한 우리가 자신을 보류하는지, 중용의 길을 고수하는지도 분별해 낼 수 있다. 형제자매여! 주님이 우리를 부르실 때 우리에게 모든 것을 드리라고 하셨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사 우리 중 누구도 자신을 귀히 여기지 않고 생명을 아끼지 않기를 바란다. 우리는 마음에서 자기를 아끼지 않고 자기를 불쌍히 여기지 않기를 배워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갈 길이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의 일은 제한적이다. 고난 받을 마음가짐이 있는 만큼 영적인 일도 있는 것이다. 고난 받을 마음가짐이 제한적이면 영적인 일도 제한적인 것이다. 고난 받으려는 마음가짐이 제한적이라면, 우리가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축복도 제한적이며 일의 결과도 제한적인 것이다. 다른 것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실 축복이 얼마인지 헤아리지 말라. 오직 고난 받으려는 마음가짐으로써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축복을 헤아리라. 고난 받으려는 우리의 마음가짐이 제한적이지 않다면 우리가 받을 축복은 한량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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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N. 제3집 제6(52)권 주님의 사역자의 성격 제2장 사람을 사랑할 줄 알아야 한다
Ezra Zion , 2013-04-05 , 조회 (83) , 추천 (0) , 반대 (0), 스크랩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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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사람을 사랑할 줄 알아야 한다

 

 

 

 


1

주님의 모든 일꾼은 형제자매를 사랑해야 할 뿐 아니라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야만 한다. 솔로몬은, “가난한 자를 조롱하는 자는 이를 지으신 주를 멸시하는 자요”(잠 17:5)라고 말했다. 사람은 모두 하나님께서 창조하셨기 때문에 다 사랑스럽다. 주님의 일꾼에게 만일 형제를 사랑하는 마음이 부족하거나 혹은 단지 형제 사랑하는 마음만 있고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면, 이 사람은 하나님을 섬기는 데에 자격이 없고 조건도 부족하다. 사람에 대해 사랑이 있어야 비로소 하나님을 섬기는 데에 분별이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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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사람을 보고서 싫어하거나 번거롭다고 느끼거나 멸시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종이 되기에 합당하지 않다.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셨다는 것을 보아야만 한다. 사람이 비록 타락했지만, 우리 주 예수께서 사람을 구속하셨다. 사람이 비록 매우 강퍅하지만 성령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신다. 주 예수님도 이 땅에 오셔서 친히 사람이 되셨으며 보통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태어나고 성장하여 성인이 되셨다. 하나님은 이 땅에 표준적인 사람, 즉 대표적인 한 사람을 세우시기 위해 그분께서 가지셨던 계획을 이 한 사람 위에 두셨다. 주 예수께서 승천하신 후에 교회가 생겼는데, 교회는 합해진 한 새 사람일 뿐이다. 구속의 계획은 사람을 높이 들어올리는 것이요, 사람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어느 날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참으로 이해하게 될 때, ‘하나님의 자녀들’이란 말보다 ‘사람’이란 말의 비중이 더 크다는 것을 인식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그 속에서 하나님의 계획, 하나님의 선택, 하나님의 예정이 영광스런 한 사람을 얻는 것임을 보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사람의 위치와 사람이 하나님의 계획의 초점이라는 것과 하나님 자신까지도 자신을 낮춰 사람이 되셨다는 것을 보게될 때, 비로소 당신은 사람이 소중하다는 것을 느낄 것이다.
우리 주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셨을 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 주님이 여기에서 말씀하신 것은 매우 분명하다. 인자가 온 것은 사람을 섬기기 위해서이다. 여기의 ‘사람’은 교회나 하나님의 자녀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이 땅 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그분은 또한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을 섬기러 왔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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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하지 않으시고, 도리어 ‘사람의 아들’이 섬기러 왔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을 섬기기 위해 이 땅에 인자로 오셨다는 것은 사람에 대한 주 예수님의 태도를 보여 준다.
많은 하나님의 일꾼들에게 가장 큰 문제점은, 그들에게 근본적으로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고, 사람을 존중할 줄 모르며,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가진 가치가 어떠한 것인지를 잘 인식하지 못하는 데 있다. 오늘 우리는 형제 사랑하기를 조금 배우고는 자신이 놀랍다고 생각한다. 본래 누구도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이 이제 형제를 사랑할 수 있다고 해서 이것을 굉장한 일로 여긴다. 그러나 형제자매여, 이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에 의해 마음이 넓혀져서 사람은 모두 사랑스러우며, 모두 가치가 있다는 것을 보아야만 한다. 앞으로 당신의 일이 잘될 수 있는가 없는가의 최대 관건은 당신이 사람의 가치를 어떻게 보는가에 달려 있다. 당신이 장래에 사역을 할 수 있는가의 여부는 당신이 사람에게 얼마나 흥미가 있는가에 달려 있다. 우리는 당신이 한두 명의 총명한 사람에 대해 흥미가 있는지 없는지를 말하는 것이 아니며, 또한 한두 명의 특별한 사람들에게 흥미가 있는지 없는지를 말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아주 차이가 많다. 우리가 말하는 것은 당신이 ‘사람’에 대해서 흥미를 느끼고 있는 가이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문제이다.
‘인자가 온 것은’이라는 구절이 의미하는 것은, 주님이 사람에게 지대한 흥미가 있으셨고, 이 지대한 흥미로 인해 그분 자신이 친히 사람이 되셨다는 것이다. 주님은 사람에게 이렇게까지 흥미가 있으셨는데, 당신은 어떤가? 당신은 많은 사람들을 조금도 좋게 보려 하지 않고 그들에 대해 어떤 흥미도 없는 사람 같다. 우리는 주님이 이런 사람들을 어떻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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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셨는가를 자문해 보아야 한다. ‘인자의 온 것은’이라고 주님이 말씀하신 뜻은, 그분은 인자이시며 사람의 아들의 위치에서 사람들 가운데 오셨다는 것이다. 주님은 사람에게 흥미가 있으셨고, 사람에 대해 느낌이 있으셨으며, 사람을 중시하셨다. 사람에 대한 주님의 흥미는 너무도 크셔서, 사람과 동일한 위치에까지 서셨고 사람을 섬기기 위해 오시기까지 하셨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많은 형제자매들은 사람에 대해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우리는 이 일에 대해 격노해야 한다. 형제자매여, 당신은 ‘인자의 온 것은’이라는 말의 뜻을 알고 있는가? 주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그분 자신이 사람에게 큰 흥미가 있었다는 것을 나타낸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이것을 보아야 한다. 형제자매여, 만약 당신이 “나는 일반인들에 대해 별 흥미가 없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합당치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주의 일을 하는 사람에 대한 기본적인 요구가 있다면, 그가 사람에 대하여 흥미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많은 사람들 중에서 그가 흥미 있다고 느끼는 사람만 골라서, 사랑스럽게 여겨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사람에 대한 흥미를 가져야 함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반드시 주님께서 사람에 대해 감정과 사랑을 가지셨고, ‘인자의 온 것은’이라고 말씀하실 정도로 사람에게 흥미가 있었다는 사실을 주의해야 한다.
만약 우리가 어느 지방에 가서 사역을 할 때 그 지방 사람들에게 섬김을 받으려 하지 않고, 도리어 그곳 사람을 섬기러 왔다고 말할 수 있다면, 우리의 태도는 옳은 것이요 우리의 그 길과 위치도 옳은 것이다. 하나님의 종이 되려는 사람은 사랑을 남겨 두었다가 형제가 왔을 때 비로소 그 사랑을 꺼내어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주님의 일꾼이 만약 그의 사랑을 형제에게만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주님의 일을 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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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나중 일이며, 별개의 문제이다. 당신은 항상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하고 사람을 사랑스럽게 여겨야 한다. 요한복음 3장 16절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라고 말하는데, 여기서의 이 세상은 누구인가? 이 ‘세상’은 바로 세상에 있는 사람을 말하며, 구원을 얻지 못한 사람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을 포함한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신 것은 바로 세상 사람이다. 하나님은 이 땅 위의 개개인 모두를 사랑하신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하나님은 세상 사람을 사랑하시는데 당신은 이것에 대해 흥미가 없고 그가 형제가 될 때까지 기다린 후에야 그를 사랑한다면 당신의 마음은 주님과 다른 것이다. 그럴 때 당신은 하나님을 섬길 수 없다. 모든 사람을 사랑스럽게 느끼고, 모든 사람에 대해 흥미를 가져야 한다. 그들이 단지 사람이라는 것만으로 그들을 사랑스럽게 느낄 수 있을 정도로까지 당신의 마음은 넓어져야 한다. 그때 비로소 당신은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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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여기서 주님은 사람에게 무언가 취하려는 태도를 갖지 않으셨다. 우리는 마땅히 사람에게 흥미를 가져야 하며, 사람을 사랑스럽게 느껴야 한다. 또한 우리는 사람에게서 어떤 이익을 챙기려고 하지 말아야 하며, 남의 섬김을 받으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그들을 어렵게 하고, 그들에게 해를 주는 일을 조금도 해서는 안 되며, 더욱이 그들의 섬김을 받으려 해서도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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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자매여! 당신은 어쩌면 이미 여러 해 동안 교육을 받아서 “나와 함께 사람이 된 자”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말의 문제가 아니라 느낌의 문제이다. 예를 들어, 많은 사람이 당신과 형제가 되었고, 당신에게 그러한 느낌이 있다. 당신은 어떤 사람이 당신의 형제라고 느끼며, 그와 함께 형제가 되었다는 느낌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살아가고 있는데 당신에게는, “나는 그들과 함께 하는 사람이다.”라는 느낌이 있는가? 당신에게는, “그들은 나와 함께 하는 사람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느낌이 있는가? 만약 당신이 그들에 대해 이러한 느낌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당신은 하나님을 섬길 수 없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아주 역량이 큰 사람이어서 모든 사람을 그의 품에 포용할 수 있는 경지에까지 이르러야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주님의 많은 일꾼에게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이 결핍되어 있다. 만일 형제를 사랑하는 마음도 갖추어지지 않았다면,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에 대해 말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우리는 백 명 중에서 어쩌면 단 한 사람만 선택하여 사랑하거나 만 명 중에서 단 한 사람만 선택하여 사랑할 뿐이다. 만약 우리가 이와 같다면, 우리는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지 않은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은 창조주시요 우리 모두는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사람을 사랑할 정도로 넓혀져야 한다. 우리는 그들에게 조금도 해를 입혀서는 안 되고, 이익을 구해서도 안 되며, 조금이라도 섬김을 받으려는 마음을 가져서도 안 된다. 인자가 온 것은 곧 사람을 섬기기 위함이지 섬김을 받기 위함이 아니다.
형제자매여! 우리는 어떠한 경우라도 사람에게 이익을 취하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 이 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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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그리스도인이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해를 입히는 생활을 한다면 이것은 정말로 부끄러운 일이다. 형제에게 손해를 끼치는 것이 잘못일 뿐 아니라 사람에게 손해를 주는 것도 잘못이다. 소극적인 방면에서 사람에 대한 주님의 기본적인 태도는 언제나 섬김을 받으려 하지 않고, 그분 자신을 위해 사람에게서 어떤 것도 취하려 하지 않으셨다. 당신은 다른 사람에게 희생이나 손해를 요구하면서까지 이기적으로 그들의 섬김을 받거나 공급을 받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
이 땅 위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다른 사람에게서 이익을 취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주님께서 이것을 명하셨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들이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기 때문에 그들에게서 추호의 이익도 탐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모든 사람이 사랑스럽다는 것을 보아야 한다. 형제자매여! 당신이 만약 사람에 대해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면, 당신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일을 하든지 매우 제한적일 것이다. 하나님은 그분의 종들이 넓은 분량을 가지고 사람에 대한 흥미를 갖기를 갈망 하신다. 오직 이렇게 될 때에 비로소 은혜가 넘치고,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

3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 19:10).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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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0하). 그분이 오신 것은 전적으로 사람을 위한 것이다.
마가복음 10장은 그분이 오신 것은 사람을 섬기기 위함이며, 목숨을 버려서 대속하시기 위함이라고 말한다. 바꾸어 말하면, 그분이 오신 목적은 사람을 섬기기 위한 것이다. 우리를 섬기기 위해 그분은 목숨을 버려서 대속하시는 일을 하셔야 했다. 그래서 그분은 목숨을 버리고 많은 사람의 대속물이 되셨다. 대속물이 되는 것은 사람을 섬기는 그분의 가장 높고 최종적인 일이다. 주님은, “인자가 온 것은 사람을 위하여 대속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인자가 온 것은 … 도리어 사람을 섬기려 하고”라고 말씀하셨다. 그분의 목적은 사람을 섬기는 것이다. 그분은 사람에 대해 흥미를 갖고 계시며, 사람을 귀하고 사랑스러우며, 섬길 만한 존재로 여기셨다. 그분은 사람의 구주가 되심으로 그들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그러한 정도까지 사람을 섬기셨다. 그래서 그분은 목숨을 버리시고 많은 사람의 대속물이 되신 것이다. 만약 우리가 주님께서 대속하신 이 복음을 사람에게 전하기만 하고 사람을 섬기려는 마음을 갖지 않는다면, 우리는 주님의 일을 할 자격이 없다. 사람은 정말 사랑스럽다.
그러기에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을 섬기러 왔다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인자’가 사람을 섬기러 왔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주 예수님은 먼저 사람을 섬기시고 사랑하셨다. 그런 다음 사람을 대신하여 목숨을 버리셨다. 사랑이 먼저이고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다음이다. 당신이 사람에 대한 사랑 없이 사람들 가운데 가서 주님이 목숨을 버리신 것을 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당신은 주님께서 사람을 위해 목숨을 잃었다는 것을 먼저 전하고, 그 사람이 주님을 영접한 후에야 그를 사랑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만일 당신이 사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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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해 흥미가 없고, 사람을 귀하게 느끼지도 않으며, 그들과 당신이 모두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다는 것을 느끼지도 못한다면, 당신은 사람에게 주님이 목숨을 잃으셨다는 사실을 전할 수 없다.
형제자매여, 우리는 먼저 사람을 사랑하고, 그런 후에 주님을 영접하도록 그들을 인도해야 한다. 그들이 주님을 영접하고 형제가 된 후에 사랑해서는 안 된다. 애석하게도,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이런 방면에서 인식이 부족하고 문제가 있다. 많은 사람들은 언제나 사랑을 한쪽에 제쳐놓고 사람들이 우리 형제나 자매가 되어야 비로소 그들을 사랑하기 시작한다.
형제자매여! 우리 주님은 이렇게 하지 않으셨다. 우리 주님은 먼저 사람을 사랑하시고, 그런 후에 그들을 대신하여 목숨을 버리셨다. 오늘날 우리는 구원을 전하는 자들이다. 우리도 먼저 사람을 사랑하고, 그러고 나서 그들에게 구속을 전해야 한다. 우리 주님은 먼저 사람을 섬기시고, 먼저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신 후에 사람을 위해 목숨을 버리셨다. 우리도 먼저 사람에 대해 흥미를 가지고 그들을 소중히 여기며, 먼저 그들에게 은혜를 베푼 후에야 주님의 구속을 그들에게 제시해야 한다.
만일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에 의해 열려져서 우리가 많은 사람들과 똑같은 ‘사람’인 것을 볼 수 있다면, 사람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우리는 모든 사람이 다 소중하고 사랑스럽다고 느낄 것이다. 형제자매여! 당신은 반드시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보아야 한다. 이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그분의 형상대로 지으셨기 때문이다. 오늘날 사람들도 원래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것이다. 당신은 반드시 사람을 사랑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런 후에야 당신은 사람들 가운데서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될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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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참으로 사랑스럽고 가치 있다는 것을 보아야 한다. 주님의 일을 하는 데 있어서 사람을 대하는 많은 형제자매들의 태도와 성격과 기질 등은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 만약 당신이 사람을 골칫거리, 귀찮은 존재, 무거운 짐 등으로 느낀다면 이것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당신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셨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녔다는 것을 보아야 한다.
비록 사람이 타락했을지라도 사람의 미래는 여전히 영광스럽다. 당신은 사람을 사랑스럽다고 느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사람을 거추장스럽게 느끼지 말아야 하고, 사람을 무거운 짐이나 귀찮은 존재, 골칫거리로 여기지 말아야 한다. 주님께서 이런 사람들을 위해 십자가에 오르신 것에 비해 우리의 사랑은 얼마나 빈약한지! 누구든지 주님을 만지고 그분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안다면, 그는 즉시 모든 사람을 사랑스럽다고 느낄 것이다. 또한 참으로 주님을 아는 자로서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사람이라는 존재는 정말 사랑스럽다. 어떤 사람의 죄악도 용서될 수 있고, 어떤 사람의 연약함도 납득될 수 있으며, 어떤 사람의 혈기도 이해될 수 있다. 나도 죄인이기 때문에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 안다. 또한 나는 사람이 가치 있다는 것을 안다. 형제자매여! 오해하지 말라. 주 예수님은 이 땅에 많은 사람이 있기 때문에 죽으러 오신 것이 아니다. 주 예수님은 목자가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나선다고 말씀하셨다. 주님은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잃어버려서 그 양들을 찾으러 나선 것이 아니다. 선한 목자이신 주님은 단 한 마리의 양을 잃어버렸어도 찾으러 나서신다. 바꾸어 말하면, 온 세상의 모든 사람이 침륜당하지 않고 단 한 사람이 침륜당했다 해도 그분은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시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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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그분은 역사상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셨다.
그러나 그분 중심에 있는 사랑으로 말한다면, 그분은 한 사람, 그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위해서 오신 것 같다. 성령은 드라크마 열 개를 모두 잃어버려서 찾아 나선 것이 아니라 그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를 찾아 나선 것이다. 아버지께서 돌아온 탕자를 받으신 것은 모든 아들이 탕자가 되었기 때문에 환영한 것이 아니다. 아버지는 한 명의 탕자가 돌아와도 환영하신다. 누가복음 15장은 주님은 많은 사람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단 한 사람이 필요해도 구속의 사역을 이루신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이것은 주님께서 사람에 대해 얼마나 흥미를 가지고 계시는지를 보여 준다.
그러므로 형제자매여! 여러분이 만약 주님을 잘 섬기고자 한다면 반드시 다른 사람에 대해 흥미를 가지는 것을 배워야 한다. 만약 사람에 대해 흥미를 갖지 못한다면 당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설령, 어떤 일을 한다 해도 한계가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은 역량이 너무 적어서 많은 사람을 포용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당신이 하루하루 사람에 대해 흥미를 더 갖고, 하나님 앞에서 사람의 가치를 이해할 정도로 마음이 더 넓어지며,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사람의 가치를 분명히 알게 될 때 비로소 당신은 구속의 참 의미를 분명히 알게 된다.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옹졸한 우리가 큰일을 하려고 생각한다는 것은 완전히 잘못된 것이다. 사람이 어찌 영혼을 사랑치 않으면서 영혼을 구원할 수 있겠는가! 사람이 사람을 사랑치 않고서 어찌 사람을 구원할 수 있겠는가! 이 기본적인 문제가 해결되면, 사람에 관련된 많은 문제가 해결된다. 당신의 빈약한 지식이 당신의 사랑을 막을 수 없고, 당신의 굳은 마음도 당신의 사랑을 막을 수 없다. 사랑이 있다면 사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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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시하는 마음이 사라질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다른 사람과 동일한 위치에 있다는 것을 알게 할 것이다.
도시에서 자란 어떤 형제자매들은 농촌에 가서 농부를 대할 때 일종의 가져서는 안 될 감정을 갖는데, 그것은 그들이 농부보다 좀 높다고 느끼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정말로 합당치 않다. 주님은, “ ‘하나님의 아들’이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요”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요”라고 말씀하셨다.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려면 인자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많은 때에, 사역을 하는 사람은 어느 곳에 가서는 뜻밖에도 자신을 낮추었다고 느낀다. 그러나 자신을 낮추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우리는 어떤 사람들 가운데 가는 것이 자신을 낮추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만약 당신이 지식에 있어서 그들과 같지 않다고 여겨 자신을 낮춘다면, 그것은 결코 낮아진 것이 아니다. 당신의 그런 의식적인 겸손은 자연스럽지 않다. 이 땅에 오셨을 때 우리 주님은 사람들에게 다만 마리아의 아들로 보여지셨다. 사람들은 야고보, 유다, 시몬, 요셉을 그분의 형제로 알았고, 그분의 동생들도 또한 그들 사이에서 그분을 단지 인자로 알았다.
그러므로 형제자매여, 당신은 됨됨이에 있어서 사람다워야 한다. 당신은 사람들에게 마치 당신이 그들보다 높은 체한다는 느낌을 주어서는 안 된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다. 당신이 어떤 사람에게 갈 때에는 마땅히 그 사람과 똑같은 것 같아야 하며, 그 사람에게 당신이 스스로 낮추어서 거기에 갔다는 느낌을 주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사람을 섬길 수 없다. 당신의 그러한 방법은 전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우리는 단지 ‘사람’으로서만 ‘사람’을 섬길 수 있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우리가 줄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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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낮추고 있다는 느낌을 주어서는 안 된다. 당신은 사람들에게, 당신이 그들과 다르다는 느낌을 주어서는 안 된다. 만일 우리가 사람들에게 그러한 느낌을 준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종이 아니다. 주님을 섬기려 한다면, 진실로 자신을 비천한 데까지 낮추지 않으면 안 된다. 당신보다 지식이 없는 사람들과 대화할 때에, 만일 당신이 다른 위치에 서서 그들에게 당신이 특별한 사람이라는 느낌을 주었다면 당신은 그들 중의 한 사람이 아닌 것이다.
만일 비천한 데까지 낮아질 수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섬길 수 없다. 우리가 비천한 데까지 낮추었다면, 우리는 자신을 다른 사람보다 더 높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어떤 형제나 자매도 지식이 적은 사람을 멸시할 수 없다. 지식이 적은 사람도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과 계획 안에서는 모두 소망이 있으며, 우리와 다르지 않다. 여기에서 우리와 그들의 차이점은 바로 우리는 주님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때 형제자매들의 태도는 매우 합당치 못하다. 우리 모두는 반드시 이러한 태도를 버리고,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동등하다는 것을 보아야 한다. 주님은 이런 사람들을 위하여 이 땅에 내려오셨으며 우리도 또한 이런 사람들을 위하여 낮아질 수 있다. 결코 지식이 많고 적음에 따라서 차별을 두어서는 안 된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물을지도 모른다. “지식이 적은 사람에 대해서 나는 그들을 멸시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사기꾼이나 범죄자나 방종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형제자매여, 이런 이들을 대함에 있어서 당신은 자기 자신을 돌이켜 보아야만 한다. 당신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없었을 때 당신은 그들보다 좋았는가? 당신에게서 주님의 은혜를 제해 버린다면, 당신은 그들보다 얼마나 좋은가? 당신이 그들보다 더 성결하다고 누가 말하겠는가? 당신이 은혜 밖에서 자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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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 때에, 당신과 그들의 다른 점을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만약 은혜가 당신에게 그들과 다른 점이 있게 하지 않았다면, 당신은 그들과 무엇이 다른가? 당신은 다만 고개를 숙이고 이렇게 말할 수 있을 뿐이다. “나는 그와 똑같은 죄인입니다.” 오직 은혜가 “주여, 당신이 나를 구원하신 것입니다.”라고 주님께 말하게 한다.
은혜는 당신을 높아지게 하지 않는다. 은혜는 당신이 거짓되고 죄 있는 사람과 똑같다는 것을 보여 준다. 당신을 그들과 다르게 만든 것은 당신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이다. 당신이 가진 것이 받은 것이라면, 당신이 교만할 것은 무엇인가? 당신이 그들과 다른 것이 당신에게 주어진 은혜 때문이라면 당신은 결코 은혜로 인해 자신을 높일 수 없다. 우리는 은혜를 찬미하고 은혜에 감사해야 할 뿐 자신을 높여서는 안 된다. 당신은 하나님 앞에서, 당신과 그들이 똑같은 사람이며 그들도 마땅히 당신이 사랑할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들의 죄는 밉지만 그들의 사람 됨은 응당 사랑스러운 것이다. 이처럼 당신은 넓은 마음으로 그들을 주님 앞으로 인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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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 쓰임을 받는 사람마다 각각 특징을 가지고 있으며 각각 하나님께 쓰임받을 부분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이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쓰실 수 있는 사람은 또한 사람에 대해 흥미를 가지고 있다. 그것도 아주 깊이 흥미를 가지고 있다. 만약 어떤 형제가 마음이 좀더 넓어져서 사람에 대하여 큰 흥미를 가지게 된다면, 그는 더욱 하나님께 쓰임받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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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다. 그러므로 형제자매여! 당신은 사람에 대하여 흥미를 가져야만 한다. 만약 사람에 대하여 냉랭하고 흥미가 없다면, 어떻게 나가서 복음을 전할 수 있겠는가? 당신이 나간 것은 사람을 접촉하고 구원받게 하기 위한 것일진대, 만일 당신이 사람에게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만약 당신이 사람을 귀찮고 번거로운 존재로 느낀다면, 당신이 나가서 무슨 일을 하겠는가? 어떤 의사도 환자 보기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어떤 선생님도 학생 보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만약 복음을 전하는 우리가 사람 보기를 두려워한다면, 어찌 이상한 일이 아니겠는가! 주님의 일을 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사람에 대해 흥미가 있어야 한다. 억지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당신 자신이 흥미가 있어서 사람을 접촉하고 사람과 교통하는 것이다. 남이 권하기 때문에 나가는 것이 아니라 당신 자신이 흥미가 있어서 사람을 만나고, 그와 교통하는 것이어야 한다. 당신 마음속에 사람을 사랑스럽고 소중한 존재로 여기기 때문에 억제할 수 없는 사랑에 떠밀려 나가는 것이어야 한다. 누가 당신에게 가서 사람을 접촉하고 교통하라고 권해서 나가는 것이 아니라, 당신 마음속에서 사람이 사랑스럽고 귀하다고 느껴져서 나가는 것이어야 한다. 형제자매여, 우리는 이것을 알기를 배워야 한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은 모두가 하나님께서 창조하셨으며,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고, 필요로 하시는 자들이다. 하나님은 그분의 독생자를 그들에게 주어서 그들로 주님을 믿게 하여 생명을 주시기를 갈망하신다. 우리와 그들은 조금도 다르지 않다. 다만 우리가 먼저 믿었을 뿐이다. 우리는 그들이 믿도록 인도해야 하며, 그들에 대해 지극한 흥미를 가져야만 한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사람들에게 나아가 끝없이 일할 수 있고, 하나님의 자비를 힘입어 유용한 사람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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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자매여, 당신이 만일 하나님을 잘 섬기려 한다면, 이 길을 바르게 가야 한다. 누구나 하나님 앞에서 영을 가지고 있으며, 그러한 영이 하나님 앞에서 동등하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모든 사람에게 영이 있기 때문에,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다 똑같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혼을 가진 사람을 대할 때, 그를 사랑해야 하며, 섬기기를 갈망해야 한다. 이렇게 되면 당신이 길을 가다 한 사람을 만났을 때, 당신은 이전과는 다른 느낌을 갖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 빛 비춤을 받은 사람은 그와 다른 형제가 한 아버지에게서 난 자라는 것을 보게 되고, 형제에 대한 특별한 느낌을 갖게 될 것이다. 사역을 하는 우리들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동일한 하나님 한 분에 의해 창조된 것을 볼 수 있도록 빛 비춤이 필요하다. 이러한 빛 비춤이 있다면 사람을 만날 때 당신은 특별한 느낌을 갖게 될 것이다. 우리는 형제자매들 사이에서 그들이 나의 형제요 자매라는 특별한 느낌을 갖는다. 모든 사람이 우리와 동일한 사람이며, 개개인 모두가 소중하고 사랑스러우며, 우리의 섬김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음을 볼 수 있도록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빛 비춤이 필요하다. 만일 이렇게 된다면, 이 땅 위에서 우리의 생활은 하나님의 사정을 만질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너무나도 사람을 주의하시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하나님이 창조하셨고, 우리는 능히 이 사람들을 구원해 내어 하나님의 교회 안으로 이끌 수 있다.
하나님의 목적은 교회이다. 그러나 오늘날 하나님은 여전히 사람을 주의하고 계시며, 사람을 얻기 원하신다. 주님의 사역자가 되려는 사람은 영혼을 가진 어느 한 사람도 경시해서는 안 된다. 만일 당신의 태도나 행위에 있어서 어느 한 영혼이라도 경시한다면, 당신은 하나님 앞에서 그분의 종이 될 자격이 없다. 당신이 정말로 하나님을 잘 섬기기 원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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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한 영혼도 멸시해서는 안 되며, 아울러 사람의 종이 되는 것을 배우고, 어떠한 일에 있어서나 기꺼이 즐거운 마음으로 사람을 섬기기를 배워야 한다.
어떤 사람은 종종 자기보다 조금 못한 사람을 경시하고, 자기보다 조금 나은 듯한 사람에게 잘한다. 하나님의 종 가운데서 이런 일이 있다면, 그것은 정말로 부끄러운 일이다. 우리는 우리 아래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을 경시하는 태도를 갖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사람의 지위를 보아야 한다.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결코 하나님을 섬길 수 없다. 우리는 사람의 가치를 보아야 하는데, 이것은 매우 큰일이며 또한 즐거운 일이다. 만일 주님께서 무슨 이유로 그들을 위해 죽으셨는지를 보았다면, 당신은 주님이 죽으러 오신 그 성품을 가질 수 있고, 주님의 그 느낌 안으로 들어갈 수 있으며, 사람이 정말 사랑스럽다고 느낄 수 있게 된다. 또한 당신은 사람에 대해서도 흥미를 가질 수 있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주님의 그러한 느낌을 전혀 이해할 수 없으며 주님의 일도 할 수 없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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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N. 제3집 제6(52)권 주님의 사역자의 성격 제1장 다른 사람의 말을 잘 알아들어야 한다
Ezra Zion , 2013-04-05 , 조회 (75) , 추천 (0) , 반대 (0), 스크랩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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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치만 니 전집 제3집 제52권

주님의 사역자의 성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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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

 

이 책의 내용은 니 형제님의 고령 훈련 과정 가운데 하나로써 주님의 사역자가 성격에 있어서 반드시 배워야 할 공과를 논하고 있으며, 주님을 섬기는 사람이 주님이 쓰시기에 합당한 그릇이 되는가의 여부에 크게 관련된다.

1992년 8월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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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사역자의 성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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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다른 사람의 말을 잘 알아들어야 한다

 

 

 

 


주님의 일을 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그 사람 개인의 생활은 일과 큰 관계가 있다. 성격과 습관과 행위에서 우리가 어떠해야 하나님께 쓰임받을 수 있는지 주의해야 한다. 이것은 우리의 성격의 조성과 습관의 양성(養成)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한번의 체험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한번의 체험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이것은 조성, 즉 주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성격을 조성해 주시는 것이 필요하다. 매우 많은 일에서 우리는 주님 앞에 어떤 습관을 훈련하고 기르는 것이 필요하다. 이러한 일들은 비교적 우리 겉 사람과 관계있는 것으로, 이는 하나님께 쓰임받기에 합당하도록 겉 사람을 처리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이 필요하다. 이것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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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우리에게 충분한 빛과 주님의 말씀이 있다면, 우리 자신에게서 나온 것들과 주님께 쓰임받기에 합당치 않은 것들은 빛 가운데서 시들고 더 이상 자라지 않을 것이다.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긍휼을 주셔서 부활 안에서 새로운 성격을 우리에게 주실 것이다. 우리가 여기에서 다루고자 하는 몇 가지 일들은 모두 여러 해 동안 하나님께 봉사해 온 형제자매들이 체험하고 본 것들이다. 만약 그중 하나라도 결여된다면 그 사람은 사역을 할 수 없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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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다른 사람의 말을 잘 알아듣는 것에 대해 살펴보자. 주님의 일을 하는 사람은 생활 속에서 다른 사람의 말을 잘 알아듣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이것은 순복하여서 말을 듣는 것이 아니라, 앉아서 다른 사람의 말을 듣고 그것을 깨달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주님의 일꾼의 생활에서 중요한 항목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줄곧 자기만 말하고 다른 사람의 말을 들어줄 줄 모른다면, 그는 좋은 사역을 할 수 없다. 만약 주님의 일꾼이 폭죽을 터뜨리듯이 계속 혼자만 말한다면, 그러한 일꾼은 하나님의 손에 별 쓸모가 없다. 어떤 일꾼도 계속 혼자 말할 수 없다. 만약 당신이 항상 혼자만 말하고 다른 사람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당신과 대화하는 사람의 어려움을 알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아무런 쓸모도 없다. 어떤 사람이 당신에게 이야기할 때에 당신은 반드시 하나님 앞에서 그의 말 듣는 것을 배워야 한다. 당신은 세 종류의 말, 즉 그가 하는 말과 그가 하지 않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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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과 그의 영 안에 있는 말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
무엇보다 먼저, 그 사람이 하는 말을 이해할 줄 알아야 한다. 당신은 하나님 앞에서 차분한 사람이 되어 어지럽지 않은 마음과 고요한 영을 가지고 사람을 만나야 한다. 한 장의 백지와 같이 어떤 선입관도 갖지 말고 주관적이지 않으며, 어떤 편견도 갖지 말아야 한다. 당신 안에 어떤 규정이나 판단도 갖지 말아야 한다. 당신은 하나님 앞에 전적으로 안정된 상태에 자신을 두어야 한다. 그럴 때 당신은, 입을 열어 자기 사정을 알리는 사람의 말을 듣기를 배우게 된다. 당신이 안정된 상태에서 말을 들을 때 비로소 이야기하는 사람의 말을 알아 듣게 된다.
다른 사람의 말을 듣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한 형제가 어떤 문제를 이야기할 때에 당신은 그것을 얼마나 알아듣는가? 한 형제가 어떤 문제를 십여 명이 듣는 앞에서 말할 때, 아마 십여 가지 다른 해석이 있을 것이다. 당신이 들은 것은 이러한 모양이고, 다른 사람이 들은 것은 또 다른 모양이다. 결과적으로 십여 가지 다른 견해가 있게 될 것이다. 한 가지 진리에 대해 수십 가지 다른 견해가 생긴다면 그것은 정말 큰 문제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말을 정확히 알아듣기를 배우는 것은 기본적인 훈련이다. 다른 사람의 말을 듣고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이해하는 것을 배우는 것은 주의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기본적인 학습이다.
어떤 사람이 그의 무거운 짐을 당신 앞에 가져와서 어려움을 말한다는 것은 당신에게서 어떤 도움을 얻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당신이 그의 말을 잘못 알아들었다면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만약 당신이 그의 근본적인 어려움이 무엇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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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지도 못한 채 다만 당신이 며칠 동안 생각한 것을 근거로 하여 그에게 답을 준다면,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만일 어떤 사람이 자기가 가지고 있던 생각만으로 병에 걸린 사람, 건강한 사람, 염려하는 사람, 무사태평한 사람 등 상태에 상관없이 똑같은 말을 그들에게 해 준다면 그의 말은 그들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만약 그리스도의 일꾼이 계속해서 말만 하고 잘 들어줄 줄 모른다면, 어떻게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겠는가? 어떤 사람이 당신에게 말할 때 당신은 반드시 그의 말을 주의 깊게 듣고 그의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를 알아야만 한다. 주님의 일꾼이 다른 사람을 돕는 것은 의사가 환자를 진단하고 치료하는 것보다도 더 어렵다. 의사는 간호사가 있어 환자들을 돕지만, 주의 일꾼은 스스로 진단해야 한다. 어떤 형제나 자매가 당신에게 와서 20∼30분 동안 그가 가지고 있던 문제를 내놓는다 해도 당신은 그의 평소의 생활 상태가 어떠한지, 가정 상황이 어떠한지, 하나님 앞에서의 상태가 어떤지를 알지 못한다. 그가 당신 앞에 10분, 20분, 30분 동안 계속 앉아 있다면, 그것은 상당히 긴 시간이다. 그런데 만약 당신이 상대방의 말을 알아 듣지 못한다면, 무슨 방법으로 그를 도울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모든 사역자에게는 하나의 습성과 기량과 능력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바로 함께 앉아서 다른 사람의 말을 들어 주며 그의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를 분별해 내는 것이다. 이 일은 상당히 긴요한 것이고, 우리는 항상 이 일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말하는 것을 듣고서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이해하기를 배워야 하며 일이 어떻게 되어가는지를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다른 사람이 말하는 것을 들을 때 우리 안에 그것에 대한 그림을 그려내고 그 정황에 대하여 분명한 확신을 가져야 우리가 필요를 채울 수 있는지 없는지를 알게 된다. 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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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어느 형제의 일이 당신의 능력이나 당신이 도움을 줄 수 있는 한계 이상의 것임을 안다. 그때에 당신은 즉시 그에게 당신이 도울 수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해야 한다. 당신은 그가 말하는 것을 듣고서 그가 어떤 위치에 있으며 당신 자신 또한 어떤 위치에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이것이 우리가 마땅히 듣고 이해해야 하는 첫 번째 종류의 말이다.
두 번째로는, 다른 사람이 말해 내지 않은 속의 말을 듣고 분별해 내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다른 사람이 아직 말하지 않은 것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그가 하지 않은 다소의 말을 이해할 줄 알아야 한다. 그는 어떤 것에 대해서는 우리에게 말하지만, 어떤 것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이러한 종류의 말을 이해하는 것은 첫 번째 종류의 말을 이해하는 것보다 훨씬 어렵다. 왜냐하면 첫 번째 종류의 말은 그가 하는 말을 듣는 것이지만, 두 번째 종류의 말은 그가 아직 하지 않은 말을 들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당신에게 절반은 말하고 나머지 절반은 여전히 말하지 않는데, 이것이 바로 당신이 주님의 일꾼이 될 수 있는가 없는가를 판정하는 것이다. 만약 당신이 다른 사람이 하지 않은 말을 분별해 낼 수 없다면 당신은 사역자가 될 수 없다. 다른 사람에게 없는 생각을 당신이 그러하다고 단정짓고 자신의 생각을 첨가한다면, 그것은 당신의 생각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그가 입으로 말하지도 않았고 그의 심중에도 없는 것을 당신이 잘못 이해해서 당신의 생각을 억지로 집어넣은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말하지 않았는가를 알고자 한다면, 당신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상당히 분명해야 한다. 때로 사람들은 불필요한 말을 하고 오히려 중요한 말은 하지 않는데, 당신은 어떻게 그가 하지 않은 중요한 말을 알 수 있는가? 이것은 당신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상당한 다룸을 받았다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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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형제가 이야기할 때, 당신은 그가 이미 말한 것을 이해해야 할 뿐 아니라 그가 말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도 분명해야 하고 그것이 대강 무엇을 가리키는지를 알아야 한다. 이렇게 할 때만이 당신이 하나님 앞에서 확신이 있게 되고, 비로소 이 형제에 대하여 도울 방법이 있게 되며, 그를 권면하거나 책망할 방법이 있게 된다. 만약 당신 안이 분명치 않다면, 당신은 다른 사람이 말한 것을 알 수가 없으므로 당신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생각을 근거로 하여 다른 사람에게 말하게 된다. 그리하여 당신은 당신의 말로 그를 도우려 하지만 근본적으로 그의 생각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를 도울 수 없다. 사실을 말하자면, 말을 잘 알아들을 수 없는 사람은 사역에 있어서 쓰임받는 면이 아주 적다. 많은 사람들이 근본적으로 다른 사람의 말을 알아 듣지 못하고, 그가 하지 않은 속의 말 또한 분별하지 못하는 큰 결함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그러한 방면에 별 느낌이 없다. 이러한 사람이 때에 따라 양식을 공급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세 번째로는, 다른 사람의 영 안에 있는 말을 이해할 줄 알아야 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이미 한 말과 하지 않은 말을 알아들어야 할 뿐 아니라 영 안에 있는 말까지도 이해해야 한다. 사람들이 입을 열어 말을 할 때에는 그의 영 또한 말을 한다. 어떤 사람이 기꺼이 당신에게 말하고자 할 때 당신은 그의 영을 만질 기회를 얻게 된다. 어떤 사람이 입을 열지 않으면 그의 영은 안에 갇혀 있기 때문에 당신은 그의 내면의 말을 알기 어렵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입을 열면 그의 영은 즉시 흘러나오며, 그가 어떠하든지 상관없이 그 자신을 지배한다. 어느 곳에 있든지 그의 영은 항상 흘러나온다. 다른 사람의 영 안에 있는 말을 깨달을 수 있는지는 당신이 하나님 앞에서 어떠한 다룸을 받았는가에 달려 있다. 만약 당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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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과를 배웠다면, 당신은 다른 사람이 한 말과 그가 실토하지 않은 말을 알 뿐 아니라, 그의 영이 어떠한지도 알게 된다. 당신은 그가 하는 몇 마디 말이 영으로 하는 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럴 경우, 당신은 그의 생각 속의 문제점과 영 안의 문제점을 알게 되어 즉시 그 형제를 도울 확신을 갖게 된다. 그렇지 않을 때, 어떤 사람이 그의 고충을 30분이나 말했는데도 당신은 그의 내면의 병이 무엇인지 알아내지 못하고 그의 병을 잘 치료할 수 없게 된다.
이러한 일은 주님의 일꾼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들어 주고 잘 알아듣는 형제자매는 극히 드물다. 당신이 어떤 형제자매와 한 시간 동안을 이야기했는데도 그는 당신의 뜻을 알지 못할 수 있다. 우리의 청취력은 정말로 약하다. 만약 당신이 다른 사람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면, 어떻게 하나님이 당신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 수 있겠는가? 다른 사람이 당신 옆에 앉아서 아주 분명하게 말을 하고 있는데도 당신이 그것을 이해할 수 없다면, 하나님께서 당신 내면에서 하시는 말씀을 당신이 알아듣는 데에는 큰 문제가 있게 된다. 당신이 물질 세계에 속한 사람의 말도 알아들을 수 없는데,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 안에서 하시는 말씀을 어찌 이해할 수 있겠는가?
한 형제에게 어려움이 있는데, 그의 병의 원인이 근본적으로 어디에 있으며 상태가 어떠하며 잘못이 어디에 있는지 당신이 알아 내지 못한다면, 어떻게 당신이 그를 도울 수 있겠는가? 아, 형제자매여! 우리는 이것을 작은 문제로 여겨서는 안 된다. 만약 다른 사람의 말을 잘 알아들어야 하는 이 공과에서, 우리 자신이 주님으로부터 다루심을 받아 배운 바가 없다면, 비록 우리가 성경을 많이 읽고 성경 진리를 남에게 가르칠 줄 알며 많은 역사를 이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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낸다 할지라도, 우리는 실제로 사람들을 대하여 그들의 구체적인 필요를 도울 수 있는 사람은 될 수 없다. 우리는 말로써 전도하거나 설교하면서 객관적인 진리만을 제시하는 사람이 될 것이 아니라 각각의 다른 상황에 있는 사람들을 실제로 도와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가 그 사람이 하는 말조차도 알아듣지 못한다면 어떻게 그를 도울 수 있겠는가? 우리는 이 일의 엄중함을 보아야만 한다. 형제자매여,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서 다른 사람의 말을 듣는 데에 얼마나 많은 시간을 들였는가? 여러분은 배우기 위해 시간을 들인 적이 있는가? 우리는 마땅히 다른 사람의 말을 듣는 것을 배워서, 다른 사람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며, 말해 내지 않아 그 마음속에 감추어진 말은 무엇인지, 더욱이 그의 영 안에 있는 말은 또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사람의 입과 영이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 사람의 입은 어떠한 것을 말하지만 그의 영 안에서는 오히려 다른 것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입은 그의 영을 감추게 할 수 없다. 따라서 그의 영은 언젠가는 흘러나온다. 그의 영이 흘러나올 때, 여러분은 그를 알게 된다. 만일 여러분이 그것을 모른다면 사람을 돕는 것은 상당히 어렵다.
내가 우스갯소리를 하나 하겠다. 나이 많은 한 의사가 단지 두 종류의 약만을 가지고 있었는데, 하나는 캐스터 오일(바다에서 떼를 지어 사는 해리(海狸)라는 동물에서 짜낸 약용 기름)이었고 다른 하나는 키니네였다. 그는 환자가 무슨 병이든 상관치 않고 캐스터 오일 아니면 키니네를 주었다. 그리고 그 두 가지 약으로 모든 병에 대해 처방하였다. 마찬가지로 많은 형제자매들도 사람을 상대하여 그를 돕는 데 있어서 그가 어떤 상태인지 고려하지 않은 채 항상 한두 가지의 방법만으로 그의 필요에 대처하려 한다. 이러한 사람들은 다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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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도울 수 없다. 하나님께서 무언가를 위임하시고 그분이 쓰실 수 있는 사람들은 모두 하나의 재능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다른 사람의 말을 듣자마자 즉시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안다는 것이다. 만약 우리에게 이러한 재능이 없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의 병을 치료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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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다른 사람의 말을 듣고 이해할 수 있는가?
첫째, 주관적이어서는 안 된다. 남이 하는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가장 주된 원인은 바로 우리가 주관적이기 때문이다. 주관적인 사람은 남의 말을 잘 알아들을 수 없다. 만약 당신이 어떤 일이나 어떤 사람에 대해 주관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다면, 그가 무슨 말을 하든 간에 당신은 그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게 된다. 당신이 가지고 있는 견해가 너무 확고하기 때문에 그의 견해가 당신 속에 전달 될 수 없다. 아주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주관적이다. 그들은 항상 자신의 의견과 주장과 견해를 붙잡는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그러한 의견과 주장과 견해는 너무나 확고하다. 그들은 다른 사람의 병이 무엇인지 아랑곳하지 않은 채 그에게 캐스터 오일을 주는 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하고 다만 그것을 준다. 이러한 사람이 어떻게 다른 사람의 말을 들을 수 있겠는가? 많은 연약한 형제자매가 오면, 그는 그들의 어려움이 근본적으로 어디에 있는지를 만지지 못하고, 그가 미리 준비해 둔 것만을 말할 뿐 그 외에 다른 어떤 좋은 말도 하지 않는다.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신은 매우 크지만 다른 사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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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움이 무엇인지 모른다. 이러한 사람이 어찌 주님의 일을 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를 주관적인 데에서 구원하시기를 간구해야 한다. 우리는 주님께 이렇게 말해야 한다. “주여! 제가 다른 사람을 만날 때에 조금도 편견을 갖지 않게 하소서. 그가 무슨 병에 걸렸는지 임의로 결론 내리지 않게 하소서. 그가 틀림없이 어떤 병일 것이라고 단정 짓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주여, 당신께 구하건대, 제가 그에게 생긴 병이 무엇인지 정확한 진단을 내릴 수 있게 하소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주관적이지 않기를 배워서, 자세히 듣고 그 가운데서 하나하나를 만져 가며 이해한 후에 그 사람의 어려움이 어디에 있는지를 분별해 내야만 한다.
둘째, 생각이 혼란스러워서는 안 된다. 많은 형제자매들이 생각하는 면에 있어서 잘 훈련되지 않아서 그들의 생각은 주야로 부단히 방황하며 한 곳에 집중할 수 없다. 그들의 머리 속은 이런 저런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생각이 그들에게 전달될 수 없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의 머리 속은 자신의 생각으로 꽉 차 있어서 다른 사람이 생각하고 있는 바를 연상할 수 없고, 다른 사람의 생각이 어떠한지를 알 수도 없다. 그들의 속이 충분히 안정되어 있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은 다른 사람의 생각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다른 사람의 말을 듣기 위해서는 우리의 개인적인 생각을 주님께서 다루셔야 한다. 마치 바퀴가 끊임없이 도는 것처럼 당신의 생각이 그렇게 줄곧 돌기만 한다면, 당신은 어떤 것도 할 수가 없게 된다. 주님의 일꾼이 다른 형제자매의 말을 듣기를 훈련할 때에 생각은 안정된 상태이어야 한다. 견해에 있어서 주관적이지 않아야 할 뿐만 아니라 생각에 있어서도 안정되어야 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생각하고 있는 것을 연상하고, 다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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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말한 것을 알아들어야 하며, 다른 사람이 말한 것 이면의 생각을 이해하기를 배워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크게 쓰임받을 수 없다.
셋째, 다른 사람의 감정에 공감할 줄 알아야 한다. 다른 사람의 말을 듣고 이해하기 위해 또 하나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말하는 사람과 동일한 감정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단지 듣는 것으로 다른 사람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다른 사람의 감정을 느낄 수 있어야만 알아들을 수 있다. 어떤 사람이 상심해 있고 곤경을 당하고 있는데 당신이 그것을 상관하지 않고 희희낙락한다면 당신이 아무리 많은 말을 할지라도 소용이 없다. 당신이 느낀 바가 다른 사람이 느낀 것과 다르다면, 당신은 그가 당한 일을 이해할 수가 없다. 감정에 있어서 다룸을 받아 본 적이 없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느끼는 것을 결코 느낄 수가 없다. 아주 굳은 감정은 다른 사람의 감정 속으로 들어갈 수 없고 또한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들을 수가 없다. 만약 당신이 하나님 앞에서 처리받지 않았다면, 다른 사람이 즐거울 때에 할렐루야를 외칠 수 없으며, 다른 사람이 근심할 때 그의 슬픔을 느낄 수 없다. 당신의 감정은 다른 사람의 감정 속으로 들어갈 수 없고, 다른 사람의 감정도 당신의 감정 속으로 들어오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당신은 다른 사람의 말을 이해할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우리는 다른 사람이 느끼는 것을 느낄 수 있는가? 다른 사람의 감정을 느끼고자 한다면 자기 자신이 감정에 있어서 상당히 객관적이어야 한다. 당신의 감정이 객관적일 때 다른 사람이 느끼는 것을 감지할 수 있다. 만약 당신이 자신의 느낌만을 좇는다면, 당신은 근본적으로 다른 사람의 감정을 알 수가 없다. 주님을 위해 우리는 많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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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들의 종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를 찾아온 사람에게 우리의 시간과 힘을 주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우리의 감정까지도 주어야 한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단지 그의 급한 일만을 돕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감정이 그의 감정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우리의 감정은 다른 사람의 감정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자유로워야 한다. 이것이 바로 주 예수께서 각종 시험을 받으시고 우리를 동정하실 수 있었던 이유이다.
형제자매여! 이것이 바로 우리의 감정이 처리받아야 하는 이유이다. 처리받은 후에야 우리의 감정은 조급하지 않게 된다. 만약 우리가 조급해서 자기의 감정만을 바쁘게 좇는다면 우리는 근본적으로 다른 사람의 감정 속으로 들어갈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시간만을 다른 사람을 위하여 남겨 놓을 것이 아니라 우리의 감정까지도 다른 사람을 위하여 비워 놓아야 한다. 이것은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말할 때에 우리는 우리의 사랑과 기쁨과 근심을 모두 비워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어떤 감정에 점유되어, 내면에 다른 사람의 감정을 받아들이고 다른 사람의 필요를 채울 수 있는 빈 공간이 없게 된다. 하나님 앞에서 당신 자신만의 기쁨이나 근심이 없어지고 당신 내면이 비워지게 된다면, 당신은 능히 다른 사람의 감정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된다. 그렇지 않다면, 자신의 감정만을 좇기에 바쁜 당신이 어떻게 다른 사람의 감정을 느낄 수 있겠는가? 하나님을 섬기기를 배우는 사람에 대한 그분의 요구는 매우 높다. 자기 자신만의 쾌락이나 눈물, 자기 사랑, 자기 원망을 위한 여지가 있다면, 당신 안은 매우 어수선하고 복잡해서 다른 형제자매의 필요를 채울 공간이 없게 된다. 우리는 주님의 일꾼으로서 내면이 비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만약 당신이 줄곧 자기의 기쁨과 눈물만을 위하고, 이것도 못 버리고 저것도 버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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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한다면, 당신에게는 자신 외의 다른 사람을 위할 여지가 없게 된다. 마치 물건으로 꽉 차서 더 이상 다른 물건을 들여놓을 공간이 없는 방과 같다. 많은 형제자매들이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는 까닭은 바로 그들의 사랑이 이미 다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더 이상 다른 사람을 위해 어떤 일을 할 수 없다. 우리는 우리의 혼적인 능력이 육체적인 능력처럼 한계가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만 한다. 우리 감정의 능력은 느낄 수 있는 한계가 있다. 우리의 혼적인 능력은 어떤 면에 있어서는 많이 사용할 수 있지만 또 다른 방면에 있어서는 사용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을 지나치게 사랑하는 사람은 결코 주님의 일을 할 수가 없다. 주님은,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눅 14:26)라고 말씀하셨다. 왜 그런가? 당신이 이런 것들을 사랑함으로 모든 사랑을 다 사용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마음과 정성과 힘과 뜻을 다해서 주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막 12:30). 그래서 우리가 가진 모든 사랑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만약 우리가 어느 날 자기 자신을 시험해 보고서 우리가 제한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안다면, 이것은 아주 좋은 일이다. 우리는 우리의 분량이 한계가 있다는 것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우리의 배(船)는 제한적인데 만약 배가 가득 찼다면, 더 이상 어떤 물건도 실을 수 없다. 우리에게는 한계가 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감정 속으로 들어가려면 우리의 감정을 상당히 비워 놓아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려면 자신을 비워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감정과 애정과 생각들을 비워야만 한다. 이렇게 해야만이 비로소 많은 형제자매의 감정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 우리 양손이 모두 어떤 일을 하고 있다면,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일을 해 주기를 부탁할 때 그들을 대신해서 아무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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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수 없다. 우리 마음속에 아주 많은 것들이 무겁게 내리누르고 있을 때에는, 다른 사람의 것을 더 이상 그 안에 넣을 수 없다. 그러므로 자신을 가장 많이 비운 자만이 가장 많은 것을 품을 수 있다. 어떤 사람이 자기 자신만을 지나치게 사랑하고 자기 가족에게만 애정을 쏟는다면, 그런 사람에게는 형제를 사랑하는 마음이 항상 부족하다. 인간의 사랑은 한계가 있기 때문에 우리가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형제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고, 형제 사랑이 무엇인지도 알게 되며, 주님의 일을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주님의 일꾼에게 요구되는 기본 조건은 십자가를 체험적으로 아는 것이다. 십자가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결코 주님의 일에 유용하게 될 수 없다. 당신이 십자가를 모른다면, 당신은 언제나 주관적인 사람이 될 수밖에 없고 결코 자신의 생각을 멈출 수 없게 된다. 십자가를 모른다면, 당신은 자신의 감정 속에서만 살게 된다. 거듭 말하건대, 우리는 반드시 십자가를 알아야 한다. 우리에게는 편안한 길도 없고, 지름길도 없다.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기본적인 다룸을 받아야만 한다. 이러한 기본적인 다룸이 없다면 당신은 영적으로 아무 쓸모가 없다. 우리가 주관적인 사람이 되지 않고 생각을 멈출 수 없는 사람이 되지 않으며, 다른 사람의 감정을 만질 수 없는 사람이 되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긍휼을 주시고 우리를 다루어 주시기 바란다. 주님의 일꾼은 자신을 열어 다른 사람이 처한 곤경을 받아들여야 한다. 당신이 이렇게 할 수 있다면, 다른 사람이 말을 하자마자 당신은 그가 말한 것이 무엇이고, 그가 하지 않은 말이 무엇이며, 더 나아가 그의 영의 상태가 어떠한지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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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일을 하는 사람이 첫째로 배워야 할 것은 다른 사람의 말을 잘 알아듣는 것이다. 어떤 형제자매 혹은 믿지 않는 자가 우리에게 무언가를 말할 때에, 우리는 그의 말을 객관적으로 듣기를 배워야 하며, 그가 생각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연상하기를 배워야 한다. 또한 그 사람 내면의 감정이 어떠한지를 만지기를 배워야 하며, 그가 하지 않은 말은 무엇이고, 그의 영 안에 있는 말은 어떠한지를 듣기를 배워야만 한다. 당신이 배울 때에 당신의 듣는 능력은 크게 진보할 것이고, 갈수록 더 빨리 다른 사람의 말을 듣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런 후에 당신은 다른 사람이 한마디만 말해도 그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오직 우리 내면이 한 장의 백지와 같을 때만이 그 위에 글자를 써 내려갈 수 있다는 것이다. 당신은 상당히 안정된 상태에 있어야 하고, 내면에 자신의 어떤 생각이나 주관적인 견해, 그리고 자신의 어떤 감정도 갖지 말아야 한다. 당신이 고요하게 다른 사람의 말을 들을 수 있어야 그 말을 이해할 수 있다. 사역하는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많은 지식을 갖는 것이 아니라 실행에 옮기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도구는 바로 우리 자신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측량하는 데에 우리를 사용하신다. 만약 우리가 문제라면 하나님은 우리를 쓸 수 없다. 오늘 우리는 어떤 물질적인 도구를 가지고 사람을 측량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물질적인 것이 있다면 도리어 문제는 간단하다. 체온계로 사람의 체온을 잴 수가 있는 것과 같이 주님의 일에 사용되는 체온계는 바로 우리 자신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사용해서 다른 사람의 상태를 잘 측정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가 매우 중요하다. 만약 우리 자신이 잘못되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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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가 생긴다. 만일 하나님의 그릇인 우리가 잘못되었다면 우리는 결코 다른 사람을 다루는 일에서 그분께 쓰임받을 수 없다. 말을 알아듣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당신이 만약 하나님 앞에서 다른 사람이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 있다면, 당신은 다른 사람의 상태를 파악할 수 있고 그의 생각과 감정 속으로 들어갈 수 있으며 그 사람을 도울 수 있게 된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당신에게 고충을 털어놓을 때, 만일 당신이 하나님 앞에서 처리받은 것이 없다면, 당신은 그에게 교훈을 주길 즐겨할 것이다. 누가 우리에게 무언가를 말할 때, 대개 우리는 그 사람의 질병을 만지지 않을뿐더러 근본적으로 그의 질병을 파악하지도 못한 채 급히 입을 열어 상대방을 훈계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상대방의 말을 끝까지 들을 인내심이 없으며, 상대방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파악하지도 못한 채 자신의 방안을 제시하기에만 급급하다. 다른 사람이 아직 두세 마디도 말하지 않았는데, 그들의 훈계와 지시가 나온다. 이렇게 되면 사람들은 그들에게서 어떤 참된 도움도 받을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가만히 앉아서 서너 시간 동안 다른 사람이 계속 말하게 두어야 한단 말인가? 물론 그렇지는 않다. 아마 어떤 사람은 당신이 서너 시간 동안 그의 말을 가만히 앉아서 듣고 있길 원할 것이다. 이런 사람에 대해, 우리는 그가 계속 말하도록 허락할 수 없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우리는 언제나 다른 사람에게 충분한 시간을 주어야 하며, 상당히 많은 시간 동안 말하는 것을 들어주어야 한다. 이것은 결코 3시간이나 5시간을 들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항상 충분한 시간이 있어야만 비로소 당신이 그 사람의 상태를 만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속에서 투명하고 10년이나 20년 동안 공과를 배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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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듣자마자 상대방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다면, 그가 계속 말하는 것을 저지할 수 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우리의 일은 상당히 어렵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산 사람을 대하는 것이고, 아울러 실제의 어려움을 처리하는 것이며, 하나님 앞에서의 사람의 영에 속한 문제를 다루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이러한 문제를 파악할 수 없다면, 결코 사람들에게 어떤 말도 할 수 없게 된다. 사건의 내막을 분명히 파악하지 않고 단안(斷案)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살아 있는 사람과 실제적인 문제점들과 하나님 앞에서의 사람들의 문제들을 다루는 것이기 때문에, 만일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안정된 상태에 있지 않다면 다른 사람을 돕는 것은 어렵다. 많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없는 첫 번째 원인은, 그들이 다른 사람의 말을 듣는 것조차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사,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말할 때에 우리가 안정되어서 듣고 이해할 수 있기를 구해야 한다. 우리는 듣기를 주의하고 이해해야만이 비로소 도울 수 있다. 우리가 듣고 이해해야 일을 성사시킬 수 있다. 우리는 항상 다른 사람의 말을 듣고 이해하기를 배워야 한다. 말하는 것이 쉽지 않지만, 말을 듣는 것은 더욱 쉽지 않다. 많은 전도인들은 말하는 데 익숙해 있어서 앉아서 말을 들으려고 하면 쉽지 않다는 것을 느낀다. 그러나 우리는 이 일을 반드시 배워야만 한다.
우리는 속이 투명해야 하며, 많은 시간을 들여서 다른 사람의 말을 듣기를 배우고 다른 사람의 느낌을 만지기를 배워야 한다. 만약 배우지 않는다면, 주님을 섬기는 일에 있어서 상당한 어려움이 있게 된다. 우리는 말을 들을 수 있는지 없는지를 시험해 보며 배워야 한다. 누가 말하고 있을 때 당신은 그것을 들을 수 있는가? 당신은 그의 생각을 이해할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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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가? 다른 사람의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단지 외적으로 안정된 상태에 있는 것만으로 부족하고 반드시 내면적으로 하나님 앞에 기본적인 다룸을 받아야 한다. 즉 우리의 주관적임과 우리의 생각과 감정 등이 처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많은 일들이 생략될 수 있지만, 기본적인 다룸은 생략될 수 없다. 기본적인 다룸이 없이는 주님을 잘 섬길 수 없다. 기본적인 다룸을 받지 않으면 성경조차도 잘 읽을 수 없다. 왜냐하면 성경을 읽는 것도 분명한 조건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생각을 사용한다고 해서 성경을 읽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사람의 총명으로 읽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기본적인 다룸은 결코 결여되어서는 안 될 항목이다. 기본적인 다룸이 없을 경우, 설령 당신이 앉아서 듣고 있다 할지라도, 당신의 내면이 투명하지 않기 때문에 결코 당신은 상대방의 말을 이해할 수 없다. 어떤 형제가 한 시간 동안 이야기를 해도, 당신은 근본적으로 그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데 어떻게 당신이 그를 도울 수 있단 말인가? 우리는 하나님의 그릇들이다. 우리는 누가 뜨겁고 누가 뜨겁지 않은지 안다. 우리는 사람이 좋아도 알고 나빠도 알 수 있다. 우리는 그러한 측량계이다. 우리 자신이 영 안에 있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가진 질병을 잘못 진단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은 사역자들만 나가서 말을 할 수 있다는 오해를 하고 있다. 이것은 너무나 빗나간 생각이다. 주님의 일을 하는 것은 말하는 문제만이 아니라 영의 문제이다. 이것은 형제자매들의 영에 속한 많은 어려움을 알아야 하고, 어떻게 그들을 인도해야 하는지를 알아야만 하는 것이다. 만약 우리의 내면이 영적으로 투명(透明)하지 않다면, 형제자매들 안의 형편을 알 수가 없는데 어떻게 그들을 도울 수가 있겠는가? 가령, 죄인이 여기에 있는데 당신이 그에게 복음을 들려주었다 하자. 당신은 그가 구원을 받았는지 그렇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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않은지를 알 수 있는가? 당신은 다만 그가 말한 것을 근거로 아는가? 당신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내면에서 안다. 당신은 어떻게 이 사람이 주님께 속한 자인지를 아는가? 그가, “나는 예수를 믿고 구원받았다.”라고 말하는 것으로 아는 것인가? 그런 공식(公式)을 외우는 사람에게 당신은 침례를 주겠는가? 이것은 옳지 않다. 당신은 내면에서 알 수 있다. 당신은 하나의 측량계이다. 당신이 불신자에 대해 그런 측량계를 근거로 하는 것처럼, 당신은 하나님의 자녀에게도 그런 똑같은 측량계를 의존한다. 당신은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의 영적인 상태가 옳은지를 알 수 있는가? 당신이 하나님 앞에서 투명하다면, 당신은 그가 어떻게 되어가는지 알 수 있다. 그러므로 형제자매들은 하나님의 측량계가 될 정도로 다룸을 받아야 한다. 만약 당신 내면에 문제가 있다면 틀리기 쉽다. 한번 틀리면 일을 그르치게 된다. 그러므로 내적으로 반드시 투명해져야 한다. 많은 형제자매들이 내면이 투명하지 않을 뿐더러 다른 사람의 말을 듣는 것조차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너무나 어려운 것이다. 형제자매여, 우리는 조용히 생각을 가다듬기를 배워야 하며, 다른 사람의 말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듣기를 배워야 한다. 우리의 내면을 열어서, 다른 사람의 형편이 충분히 우리 안에 들어올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다른 사람의 형편이 우리 안에 새겨져야 그의 문제가 무엇인지 알 수 있게 되고, 그때라야 비로소 그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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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협력자들의 입회 원칙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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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헌신서
철저한 헌신이 있어야 함
(2) 재물을 처리함
(3) 동역 가운데 봉사함
지체들을 서로 사랑함
사도행전 2, 4장 안의 생활(모든 것들을 공유하는)을 실천함
주님의 회복 안의 진리들에 대하여 분명해야 함
자신을 십자가에서 끝내는 공과를 배우고, 자신의 생각과 의견을 내려 놓아야 한다.
반드시 거듭난 사람이어야 함.



(1) 헌신서
 이러한 날들은 엄숙한 날들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미 자신을 주님께 내드리고 일어나 주님을 섬기고자 한다. 아마 당신은 처음에는 약간의 갈등이 있었을 것이고 어떤 때는 고통스럽고 괴롭게 느꼈겠지만 일단 자신을 맡긴 후에는 마음속에 기쁨으로 충만하다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 나는 여러분의 느낌을 만질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헌신서를 쓰면서 자신의 모든 것과 장래와 직업과 시간과 몸을 다 주님께 헌신하기 원한다는 것을 표명했다. 그러나 오늘 나는 하나의 질문을 하고 싶다. 여러분은 자신을 드린 그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느낌에 있어서 십여 일, 이십여 일 전과 다른 것이 있는가? 마치 오늘 저녁의 느낌은 며칠 전에 느꼈던 것을 따라가지 못하는 것 같다. 언제든지 우리가 헌신에 있어서 하락한다면 즉시 그리스도의 생활에 있어서 하락한 것이다. 우리는 날마다, 나는 오늘 여전히 신선한지, 또 내 속은 여전히 밝은지를 자문해 보아야 한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구두를 닦는 것과 같아야 한다. 구두는 반드시 늘 닦아야 광택을 유지할 수 있다. 우리 속에서 밝다고 느껴지지 않는다면 반드시 주님께, 나에게 잘못된 부분이 있음을 인하여 하늘에 속한 맛을 잃어버리지 않았는지를 물어보아야 한다. 우리는 반드시 계속하여 헌신의 신선함을 유지하기를 배워야 한다.


사람을 택해 봉사하게 해야 함

교회 중에서 사람을 택하여 일을 하게 하는 데 가장 먼저 필요한 자격은, 이 사람이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며 다음으로는 이 사람으로 하여금 일을 하는 것을 배우게 해야 하며 또한 당신은 그를 데리고서 일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교회 중에서 일하는 자격은 일을 ‘할 줄 아는’ 데 있지 않고 ‘기꺼이 하려는’ 것이 있어야 한다. 할 줄 모르는 것은 상관없지만 ‘기꺼이 하려는’ 사람은 온전케 함을 받을 수 있다. 교회의 봉사는 먼저 반드시 ‘기꺼이 하려는’ 것이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하며 그 다음으로 할 만한 사람을 택해야 한다. - 제3집 제62권 주의 회복 안의 성숙된 인도 (2) 제33장 봉사에 관한 교통(6)


 


제3집 제62권 주의 회복 안의 성숙된 인도 (2) 제32장 참된 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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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집 제62권 주의 회복 안의 성숙된 인도 (2)

제32장
참된 봉사

 

 

 

 


시간 : 1950년 2월 25일, 저녁
장소 : 홍콩 구룡 좌돈도
설교자 : 니토셍, 이상수 형제님



헌신의 신선함을 유지해야 함

니토셍 형제님 : 이러한 날들은 엄숙한 날들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미 자신을 주님께 내드리고 일어나 주님을 섬기고자 한다. 아마 당신은 처음에는 약간의 갈등이 있었을 것이고 어떤 때는 고통스럽고 괴롭게 느꼈겠지만 일단 자신을 맡긴 후에는 마음속에 기쁨으로 충만하다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 나는 여러분의 느낌을 만질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헌신서를 쓰면서 자신의 모든 것과 장래와 직업과 시간과 몸을 다 주님께 헌신하기 원한다는 것을 표명했다. 그러나 오늘 나는 하나의 질문을 하고 싶다. 여러분은 자신을 드린 그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느낌에 있어서 십여 일, 이십여 일 전과 다른 것이 있는가? 마치 오늘 저녁의 느낌은 며칠 전에 느꼈던 것을 따라가지 못하는 것 같다. 언제든지 우리가 헌신에 있어서 하락한다면 즉시 그리스도의 생활에 있어서 하락한 것이다. 우리는 날마다, 나는 오늘 여전히 신선한지, 또 내 속은 여전히 밝은지를 자문해 보아야 한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구두를 닦는 것과 같아야 한다. 구두는 반드시 늘 닦아야 광택을 유지할 수 있다. 우리 속에서 밝다고 느껴지지 않는다면 반드시 주님께, 나에게 잘못된 부분이 있음을 인하여 하늘에 속한 맛을 잃어버리지 않았는지를 물어보아야 한다. 우리는 반드시 계속하여 헌신의 신선함을 유지하기를 배워야 한다.
구약에서 장막의 밖에 있는 제단은 오직 한 번만 불을 켠다. 그런 후에 매일 나무를 더하고 제물을 드려서 제단에 있는 불이 밤낮으로 꺼지지 않게 해야 한다(레 6:12). 불은 오직 한 번 점화할 뿐이며 꺼진 다음에 다시 새로이 불을 붙이는 것이 아니다. 제단 위의 불은 꺼지지 않는 불이다. 제단 위의 불이 꺼지지 않고 유지되기 위해서는 날마다 드려야 할 제물이 있어야 한다. 신약에서 우리는 바로 우리 자신을 산 제물로 드려야 한다(롬 12:1). 그러므로 끊임없이 타오르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자신을 제물로 드려야 한다. 산 제물은 당신이 살아 있을 때 하나님께 제물로 드린다는 것을 나타낸다. 만일 당신에게 죄가 있거나 보류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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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 있거나 신선하지 않고 계속하여 헌신하지 않는다면 제단 위에 있는 하나님의 불은 꺼질 것이다. 만일 당신이 기꺼이 당신의 일에서 손실 당하기를 원치 않고 기꺼이 당신의 느낌, 당신의 사랑, 당신의 의지, 당신의 웅지, 당신의 인생의 요구, 당신의 뜻과 소망을 잃어버리기 원치 않는다면, 당신은 자신을 산 제물로 드리지 않은 것이다. 만일 당신이 한 번도 손상당해 본 적이 없다면 당신이 당신 안에 기쁨이 충만하다고 해도 이것은 믿을 수 없는 것이다. 일단 당신이 모든 것을 제물로 드렸다면 당신은 회생한 것이다. 이것은 당신으로 하여금 손상당케 하고 고통스럽게 하며 손실을 입게 하는 것이지만 하나님으로 하여금 뭔가를 얻으시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이 며칠 동안 당신의 기쁨이 줄어들었다고 느껴진다면, 당신은 다시 당신이 귀하게 여기는 것을 내보내어, ‘사랑하는 것을 포기해’ 보라. 이렇게 내보내는 것은 한 면으로는 고통스럽고 괴롭지만 다른 한 면으로는 기쁨이 들어올 것이다. 당신이 이렇게 하는 것이 당신 자신을 대적하는 것 같지만 오직 이렇게 할 때 당신 안에 있는 기쁨이 감소되지 않게 유지할 수 있다.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용서해 주기 바란다. 나는 어떤 사람의 얼굴에 있는 기쁨은 줄곧 변하지만 어떤 사람은 한번 변한 후에는 다시 변하지 않는 것을 본다. 헌신이 변하지 않았다면 기쁨도 변하지 않는다. 기쁨이 변하는 사람은 바로 헌신이 변한 사람이다. 당신이 항상 기뻐하고자 하고 기쁨이 더욱 깊어지고자 한다면 끊임없이 헌신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얼굴은 바로 그들의 창이며, 여기서 우리는 그들의 헌신의 광경을 볼 수 있다. 당신이 헌신서를 작성하는 것은 한 가지 일이지만 당신 자신이 칼을 뽑아서 죽이는 것은 또 다른 한 가지 일이다. 우리는 우리가 처리하는 것이 너무나 느린 것은 일을 처리하는 형제자매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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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험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을 시인한다. 당신이 헌신한 것은 한 번 주님께 드릴 때 주님께 속한 것이 된다. 당신은 후회하는 마음을 품을 수 없고 되찾아 오려고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반드시 우리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주님으로부터 받아야 할 축복을 잃지 않도록 우리 자신이 토한 것을 먹지 말아야 한다.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자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오직 사랑 안에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엡 4:11-12, 15-16).

합일과 동역은 안에 있는 생명에서 나온 것임

이상수 형제님 : 며칠 전에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요구를 듣는 것이 바로 교회의 참된 봉사라는 것을 교통했다. 우리의 동역과 봉사는 인위적인 것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합일의 교리를 말하는 것을 들을 때, 나는 영 안에서 매우 불편하게 느꼈다. 합일에 대한 많은 사람들의 인식은 충분히 분명하지 못하다. 합일의 원칙과 동역의 원칙은 실제로 동일한 원칙이다. 우리는 먼저 교회의 합일이 인위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예를 들면, 나와 몇 명의 형제가 하나가 아니라면 당신은 교리로 나를 권하여 하나가 되게 할 수 없다. 만일 당신이 나에게 하나 되라고 권할 수 있다면 그것 역시 ‘거짓된’ 것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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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위적인 것이다. 교회 중에 있는 합일은 인위적인 것이 아니다. 설령, 당신이 교리로 합일을 이야기할 수 있다 해도 이것은 여전히 진정한 합일이 아니다. 만일 당신이 교리를 가지고 형제들에게 “우리 모두가 다 이와 같이 주를 위하고, 형제자매를 위하며, 교회를 위하므로 여러분은 응당 의견을 내려놓아야 합니다.”라고 말하고, 설령 형제들이 “좋습니다. 당신이 이렇게 말할 때 내가 감동을 받았습니다. 나는 순복하고 하나가 되기를 원합니다.”라고 말할지라도, 이것은 여전히 인위적인 합일이며 생명에서 나온 합일이 결코 아니다. 그러나 만일 당신 안에서 자연스럽게 이러한 요구가 있고 또한 당신이 단 맘으로 기꺼이 이렇게 한다면 당신 안에서 생명이 흘러나오게 되며 이것이 진정한 합일이다. 교회의 진정한 합일은 바로 나와 당신과 다른 사람 안에 있는 그리스도가 다 나와서 하나로 합해지는 것이다. 이것이 합일이다. 만일 성령이 당신과 내 안에서 요구가 있는데 당신과 내가 아무런 응답이 없다면 이것은 합일이 아닌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성도들 안에서 나올 때 진정한 합일이 있게 된다.
이러한 연고로 교회의 동역은 규합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되며, 우리가 모두 자신을 기꺼이 내맡기고 성령의 안배 하에 함께 봉사하고 사역하는 것이어야 한다. 동역이 만일 서너 명의 형제자매들이 합하여 봉사하는 것이라면, 이것은 조직일 뿐이며 진정한 동역이 아니다. 만일 나에게 은혜가 있어서 각각의 사람들 안에 있는 그리스도를 이끌어 내어 그들로 함께 모여 봉사하게 할 수 있다면, 이것이 동역이다. 만일 당신 안에 죄가 있거나 당신이 세상에 속한 애호나 세상에 속한 것으로부터 아직 벗어나지 않았거나 당신의 자아와 견해와 경향과 관념 등이 성령의 만진 바 된 적은 있으나 기꺼이 성령에게 다루심받기를 원치 않는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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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형제자매들은 비록 외적으로 볼 때는 하나이지만 사실상 당신은 주님을 사랑하는 다른 형제들과 하나로 연합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세상을 버리고 죄를 미워하고 자아를 처리받은 사람들이지만, 당신은 이러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외적으로는 하나 같지만 그것은 인위적인 것이고 거짓된 것이다.
내가 다시 말하건대, 몸의 동역은 조직적인 것이 아니며 내적 생명에서 나온 것이다. 이 며칠 동안 내 안에는 매우 무거운 느낌이 있다. 나는 니 형제님께서 동역에 관해 약간의 말씀을 해 주시기를 바랐지만 니 형제님은 줄곧 나에게 말하라고 하셨으므로 나는 순복할 수밖에 없다. 나는 어떤 것에 대하여 줄곧 말을 하지 못했는데 이는 한두 마디로 말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오늘 주님이 니 형제님을 통해 홍콩에서 역사하신 것은 한 가지 큰일이며 엄청난 일이다. 이것은 바로 주님이 하신 것이지 사람의 권면으로 감동시켜 물건을 내놓고, 세상을 떨쳐버리며, 자신의 장래와 직업, 몸, 시간 등을 드리게 한 것이 아니다. 이를 인하여 나는 깊이 주님께 경배를 드린다. 그러나 나는 또한 사람들이 이렇게 내맡긴 것이 마치 동역의 절차라고 생각할까 염려된다. 사실, 자신을 내맡기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서 흘러나오시도록 하나의 길을 여는 것이다. 동역은 반드시 당신과 내 안에 있는 영이 흘러나오는 것이어야 한다. 동역은 바로 영 안에 있는 이야기이며 당신과 내 안에 있는 영의 생명이 흘러나올 수 있게 하는 것이다. 홍콩에 있는 형제자매들과 책임 형제들이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용서해 주기 바란다. 나는 여러분이 줄곧 일을 주의하고 영은 소홀히―나는 감히 가벼이 본다고 말할 수 없고 적어도 소홀히 여긴다고 말하겠다―여긴다고 느낀다. 여러분 모두는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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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내놓았지만 여러분의 영은 아직 흘러나오지 않았다. 그러므로 아직 동역 안에 있지 않은 것이다. 각각의 그리스도인 안에 내주하는 그리스도를 합할 때 그것이 바로 교회이며, 각 개인 안에 있는 그리스도가 흘러나올 때 비로소 교회의 봉사이다. 그리스도의 생명이 형제자매들 안에서 흘러나올 때 이것이 바로 동역이다.
복주에 있는 이삼십 명의 사역자들은 재물뿐 아니라 사역까지도 다 내맡겼었다. 이렇게 내맡기는 것은 그들로 하여금 동역할 수 있게 했다. 어떤 것을 막론하고 조금이라도 자신이 붙잡고 놓지 않는 것이 있다면 동역을 할 수 없고 하나가 될 수 없으며 동심합의가 될 수 없다. 소위 합일과 동심합의와 동역은 바로 내적인 그리스도가 흘러나오는 것이다. 만일 홍콩에서 믿는 이들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생명이 흘러나올 수 없다면 복음대가 거리를 누비며 나팔을 불고, 심방을 안배하고 사람들을 나누어 봉사하고 사역을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 이 점에서 홍콩의 형제자매들이 특별히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기를 바란다.
대북에 있는 교회는 시국의 사정으로 인하여 정부에 등록을 할 때, ‘그리스도인 집회처’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후에 상해에서 어떤 사람이 대북에 와서 역시 이 명칭을 사용하였으며, 우리를 본받아 복음대를 조직하였을 뿐 아니라 심지어 머리에 수건 쓰는 것까지 본받았다. 비록 뭐든지 동일하게 모방할 수 있지만 성령이 흘러나오는 것은 어떻게 똑같이 할 수 없다. 주님을 섬기는 일은 바로 성령이 우리 안에서 활짝 열린 길을 얻는가 얻지 못하는가에 있다. 외적인 모든 모방은 인위적인 것이며 교회의 진정한 봉사가 아니다. 교회의 봉사와 동역은 성령이 우리 안에서 얼마나 흘러나오는가에 있지 얼마나 비슷하게 모방했는지에 있지 않다. 교회의 어려움과 동역자의 어려움은 다른 곳에서 해결할 수 없고 오직 몸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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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 안에서, 생명 안에서 해결해야 한다. 속에 있는 그리스도가 흘러나오면 생명이 흐르고 어려움이 없게 된다.
형제자매들이 하나가 될 수 있고 화목하며 동역할 수 있다면 교회의 봉사에는 능력이 있게 된다. 어떤 사람이 많은 일을 할지라도 성령이 그 안에서 역사하는 것이 부족하다면, 이것은 사람이 비타민이 없는 식품을 먹는 것과 같다. 우리가 만일 어떤 것을 손에 잡고서 놓지 않고 그 안에서 살고 있다면 그것이 재물이 아니라 사역이나 견해나 느낌 등이라 할지라도 단지 그것을 놓지 않고 다루심을 받기 원치 않는다면, 우리가 능력을 얻고자 하고 다른 사람과 동역하고자 한다 할지라도 불가능한 것이다. 동역은 외적인 행동이 아니다. 이러한 표준은 너무나 낮다. 동역은 완전히 외적인 일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영적인 건축을 위한 것이며 속에 있는 생명이 흘러나오는 이야기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봉사하고 동역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속에 있는 생명이 흘러나올 수 있어야 한다.

동역의 실행

어떻게 해야 동역할 수 있는가? 에베소서 4장에서는 먼저 모든 일에서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연결되어야 한다고 말한다(15하). 이것은 그리스도와의 교통을 포함한다. 우리는 늘 우리가 그리스도와 달콤한 교통 안에 있는지를 자문해 보아야 한다. 양심이 평안한지의 여부만을 물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와 교통할 수 있는지의 여부를 물어야 한다. 양심의 평안은 다만 소극적인 방면일 뿐이고 적극적인 방면에서는 머리와 교통이 있어야 한다. 많은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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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결코 범죄한 적이 없고 양심도 참소가 없지만 속에서 침체되고 그리스도와 교통할 수 없다. 이것은 어떤 가로막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교통은 우리 자신에게 청산과 다루심을 요구한다. 각각의 지체가 다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연결되어야 하고 이어서 온 몸이 그분 안에서 연락하고 상합해야 한다. 이것은 바로 당신이 그리스도의 교통 안에 있을 때, 당신은 또한 자신에게 당신이 형제자매와 연락하고 상합하고 있는지를 물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동역은 한 면으로는 당신과 머리이신 그리스도와의 교통의 어떠함에 달려 있고, 다른 한 면으로는 당신과 형제자매와의 연락함의 어떠함에 달려 있다.
오늘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은 많지만 속에서 그리스도와 교통이 있는 사람은 많지 않으며, 그리스도의 교통 안에서 형제자매와 연락하고 상합하는 사람은 더욱 적다. 어떤 사람은 외적인 행위로는 틀린 것이 적을지 모른다. 그러나 주님과의 교통은 매우 섬세한 일이다. 단지 조금만 가로막는 것이 있어도 중단될 것이다. 사역자는 늘 사역을 붙들고 있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교통이 중단될 수 있다. 이것은 아주 두려운 일이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교통을 잃어버리면 외적인 사무가 여전히 성공할 수 있고 하나님이 여전히 축복하실 지라도 내적으로는 생명의 교통이 없는 것이다. 만일 당신이 이러하다면, 당신이 외적으로 형제자매와 왕래가 있다 해도 인위적인 것에 불과할 뿐이다. 만일 당신 안에 있는 생명이 흘러나와 형제자매들과 교통을 갖는다면 자연히 동역이 산출될 것이다. 동역은 바로 머리와 교통을 갖는 것에 달려 있으며 형제자매와 합당하게 연결되는 것에 달려 있다. 우리 안에 있는 영적인 느낌, 주님과의 교통, 다른 지체와의 연결은 반드시 강하고 또한 지속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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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사의 표준은 영적인 분량에 있음

교회의 봉사는 일의 옳고 그름, 많고 적음 혹은 경중에 상관없이 다 영적인 분량으로 헤아려야 한다. 예를 들어, 바닥이 깨끗지 못하다면(만일 늘 깨끗하지 않다면) 여러분은 단지 바닥을 닦는 사람을 다루어야 할 것이 아니라 영적인 원칙을 다루어야 한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상황을 만나면 두 방법으로 해결해야 하는데, 첫째로 청소를 책임진 형제를 다루어야 한다. 이것이 옳지 않는가? 여러분 형제들은 다 분명히 알고 있겠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하다. 두 번째 방법은 바로 영적인 원칙으로 다루어야 한다. 교회 중에서 영적인 원칙으로 다루는 것은 더욱 중요하다. 그 목적은 그 바닥을 닦는 책임자가 하나님과 대면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있다. 그렇지 않다면 그가 당신의 책망을 듣고 다시 바닥을 닦고 청소를 다 한다 하더라도, 그가 속에서 주님과 영적인 교통이 없고 영적인 공급을 얻지 못한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러므로 형제자매들이 바닥을 닦을 때 만일 한 면으로 일하면서 한 면으로 주님께, “우리가 닦는 바닥을 거룩하게 분별하사 들어오는 사람으로 하여금 위를 밟을 때 주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생기게 하시고 불신자로 하여금 주님을 믿게 하고 그들로 그들이 선 곳이 거룩한 장소임을 깨닫게 하소서.”라고 기도한다면, 이것이 바로 외적인 일을 영적인 분량으로 변케 하는 것이다. 교회의 봉사는 외적인 사무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로 하여금 성령 안에서 우리를 통하여 흘러나오게 하는 것이다. 다만 이 점만 있다면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요구하시는 봉사의 표준이 얼마나 높은지를 볼 것이다.
다시 하나의 예를 들어, 당신이 오전에 머리와 교통하고 오후 두 시에 그리스도께서 당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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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에서 새로운 요구를 하실 때 만일 주님과 다투고 고집을 부림으로 그리스도의 이 새로운 요구에 응하지 못했다면, 당신은 머리와의 친밀한 교통을 잃어버린 것이다. 오후 네 시가 되어 당신이 바닥을 닦으면서도 주님과 아무런 교통이 없다면 당신은 보통 사람과 마찬가지로 바닥을 닦았을 뿐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외적인 사무를 해결하는 것만을 중요시 여기고 영적인 느낌에 대하여 둔하고 밝지 못하며 민감하지 못하다면, 영적인 분량은 거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봉사는 반드시 절대적으로 성령 안에서의 봉사여야 한다. 비록 외적으로 많은 사무가 있을지라도 속에 그리스도의 생명도 흘러나올 수 있어야 한다. 그럴 때 교회는 실제적으로 참되게 세워지며 그리스도의 몸 또한 건축될 수 있다.

인위적인 봉사를 제함

니토셍 형제님 : 지난 며칠간 이 형제는 나에게 말을 하라고 했지만 나는 그의 안에 무슨 생각이 있는지 모르겠다. 오늘 나는 약간의 말을 해야 겠다고 느꼈다. 형제자매들은 내가 바른 말을 하는 것을 용서 해 주기 바란다. 적어도 이 열흘간 내 마음속은 아주 괴로웠다. 문제는 형제자매들이 내맡겼는가의 여부에 있지 않다. 나는 이 안에 하나의 기본적인 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는 것을 느꼈다. 이 기본적인 문제는 내맡긴 우리 각 사람이 다 느낄 수 있으며 다 말해 낼 수 있는 어떤 것이다. 이 기본적인 문제는 바로 우리의 봉사가 많은 곳에서 인위적이며 속에 있는 생명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내가 주님을 위하여 전도한 지 약 삼십여 년이 되었다. 나는 어떤 죄인도 죄를 자복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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않고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동일하게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교회 중에서 인위적인 봉사를 자백하지 않으면 교회의 참된 실체를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이전에 세 형제(한 명은 동역자였고 한 명은 형제였으며 한 명은 책임 형제였음)가 홍콩 교회에 불만을 가지고 내 앞에서 많은 비평을 했었다. 나는 이 비평하는 사람들이 옳다고 말하지 않겠다. 그러나 여러분이 주님 앞에서 보류하고 있는 한두 가지 일을 다루심받기를 원치 않는다면, 여러분의 봉사와 동역 역시 옳지 않은 것이다. 이 기본적인 문제가 처리되지 않으면 이후에 여러분의 동역과 봉사는 외적인 것에 불과하고 거짓된 것일 따름이다.
예를 들어, 내가 밀납으로 한 마리의 꿀벌을 만들어 진짜 꿀벌과 똑같이 모방할지라도 어린아이조차도 그것의 진위를 가려낼 수 있다. 왜냐하면 진짜 꿀벌은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오늘 이후로 우리는 밀납으로 만든 많은 꿀벌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진짜 꿀벌이 되어야 한다. 자신을 내놓았다고 해서 우리가 의롭다 함을 받았다고 여기지 말아야 한다. 물론 우리의 죄는 혐오스러운 것이나 우리 의조차도 하나님 앞에서는 낡은 것이다. 휘트필드(George Whitfield)는 우리의 회개의 눈물조차도 주님의 보혈로 정결케 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우리의 나쁜 것을 정죄하고 처리해야 할 뿐 아니라 우리의 약간의 좋은 것도 허물어질 필요가 있다. 외적으로 별 차이가 없다고 해서 바로 그 물건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나는 여기에 앉아 있는 여러분이 무엇이 인위적인 봉사이며 무엇이 참된 성령에서 나온 봉사인지 분별할 수 있다고 믿는다. 우리는 본래 이러한 말을 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이 몇 개월 동안 우리는 교회 중에 많은 봉사가 인위적인 것에 불과하고 영의 느낌이 없다는 것을 느꼈다. 많은 사람들이 다 사무를 중시하고 봉사에 대하여 기본적인 인식이 없이 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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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사를 한다. 우리 모두는 마치 밀납으로 벌을 만드는 사람과 같다. 나는 우리가 행위상에서 얼마나 많은 문제가 있는가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성질의 문제―사람에게 속했는가, 아니면 영에 속했는가의 문제―이다.
나는 오랜동안 어떤 기도가 나오기를 기다렸지만 줄곧 나오지 않았다. 우리는 다 과거에 전했던 말씀들이 다 밀납으로 만든 것이고, 봉사 또한 밀납으로 만든 것이었으며, 많은 봉사와 동역이 다 거짓된 것이었음을 시인해야 한다. 세상의 어떤 일도 다 거짓된 것일 수 있는데, 그것은 세상은 육체가 존재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회 중에서는 가장하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매우 성실하게 가짜를 만들어 내었다. 이 열흘 동안 나는 매우 괴로웠다. 나는 여러분이 내맡긴 명단을 적어도 열 번 이상을 읽었다. 명단의 가장 위에는 동역자와 책임 형제가 있었고 그 아래로 모든 형제자매들이 있었다. 내가 매번 볼 때마다 물은 것은 참으로 성령의 요구로 인하여 내놓은 것인가, 아니면 단지 외적으로 따라서 이렇게 한 것인가였다. 어떤 죄 사함도 영광스럽지 않듯이 육체에서 나온 것은 어떤 것도 자랑할 수 없다. 내가 다시 말하건대, 이것은 결코 방법의 문제가 아니라 성질의 문제이다. 형제자매들은 더 이상 자신의 체면을 돌아보지 말고 다 주님 앞에 가서 빛 비춤과 다루심을 구하기를 바란다. 한 면에서 나는 형제자매들이 자신을 드린 것에 대해 매우 기쁘다. 그러나 다른 한 면에서 나는 형제자매들이 참된 것과 거짓된 것을 분변하지 못하는 것에 대하여 매우 괴롭다. 형제자매들이 이러한 날들 동안 다 참된 봉사, 곧 속에 있는 성령으로부터 나온 봉사를 배우기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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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위광희 형제님 : 주여, 우리 자신에게는 형제자매들을 인도할 충분한 자격이 없음을 시인합니다. 우리는 형제자매들의 필요에 부응하지 못하고 더욱 당신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했습니다. 과거 많은 것들이 자기의 생각과 관념 안에서 옳고 좋다고 여기던 것에서 나온 것이었음을 인하여 우리는 당신께 용서를 구합니다. 우리는 자신이 많은 형제자매들의 헌신에 미치지 못하고 그들의 다루심에 미치지 못하며 그들의 배움에 미치지 못했음을 시인합니다. 우리에게는 특별히 당신의 긍휼이 필요합니다. 주여, 우리는 자신이 형제자매들보다 낫지 않음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헛되이 이 땅을 차지하고 있었음을 시인합니다. 만일 개인이 주님께 득죄했다면 여전히 작은 일입니다. 그러나 주여, 우리가 득죄한 것은 교회요 주의 몸입니다. 이것은 실로 너무나 큰일입니다. 우리는 책임 형제로 세워졌었고 부담은 실로 무거웠습니다. 우리에게는 실로 당신이 충분한 은혜로 힘을 더해 주심이 필요합니다.
주여, 우리는 어디서부터 자복해야 할지를 모릅니다. 우리가 입을 열어 시인한 것이든 혹은 분명치 않아 입을 열지 못한 것이든 다 주님의 빛 비춤과 용서를 구합니다. 무릇 우리의 봉사 안에서 주님으로부터 나온 것이라면 다 은혜의 주님께서 열납해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과거 풀과 나무와 짚의 봉사에 대하여 우리는 다 허물기를 원하며, 우리는 오늘부터 금과 은과 보석으로 건축하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과거의 봉사에서 영이 흘러나오지 않았으며 생명도 흘러나오지 않았음을 시인합니다. 우리는 일은 했지만 봉사가 바로 은혜이신 주님 자신임을 잊었습니다. 많은 때 일은 했었지만 봉사의 공과는 배우지 못했습니다. 은혜의 주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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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여, 우리는 당신이 이미 이 선한 일을 시작하신 이상 반드시 이루실 것을 믿습니다. 오늘 주님이 기꺼이 두 분의 하나님의 종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은 은혜의 주님이신 당신이 홍콩 교회에 대한, 우리에 대한 크나큰 긍휼입니다. 당신이 오늘 저녁 우리에게 주신 회개의 영 또한 당신의 긍휼과 은혜입니다. 당신의 종은 당신의 교회에 대하여 한마디도 거리낌으로 말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들이 우리를 향하여 입을 닫지 않은 것은 바로 당신의 지극히 크신 은혜입니다. 만일 당신의 종이 교회를 향하여 입을 열지 않았다면, 우리는 죽은 사람과 같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이미 나온 이상 반드시 이루실 것입니다. 오늘 저녁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 속에 계산되기를 바랍니다. 주여, 오늘 저녁 홍콩의 교회에 새로운 전기와 새로운 시작을 주옵소서.
주님께서 우리 안에 새롭게 역사하사 우리 모두가 자신을 새롭게 당신께 산 제물로 드리게 하소서. 주여, 우리가 비록 감독이지만 형제자매들보다 당신의 긍휼이 더 필요합니다. 오늘 당신의 종이 강한 말을 했지만, 이것은 교회를 향한 당신의 사랑을 표명한 것입니다. 주여, 우리의 회개는 여전히 당신의 보혈의 정결케 함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부패함과 천연적임은 실로 당신의 더 많은 빛 비춤과 계시를 필요로 합니다. 오늘 교회의 봉사와 동역이 다 영에서 나오게 하시고 다 생명의 성분이 있게 하시며 은혜의 주님이신 당신께 완전한 만족을 드릴 수 있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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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집 제62권 주의 회복 안의 성숙된 인도 (2) 제30장 교회 전체의 봉사
Ezra Zion , 2013-04-05 , 조회 (73) , 추천 (0) , 반대 (0), 스크랩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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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0장
교회 전체의 봉사

 

 

 

 


시간 : 1950년 2월 24일, 저녁
장소 : 홍콩 구룡 좌돈도
설교자 : 니토셍, 이상수 형제님

찬송 해석

니토셍 형제님 : 찬송이란 무엇인가? 찬송은 바로 개인의 영적인 느낌을 표현한 것이다. 사람이 찬송으로 영적인 느낌을 발표할 때, 생각은 늘 분명치 않지만 영은 매우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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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어, 찬송가 88장(지금의 771장)은 ‘(그는) 한 성 기다리며’(원문 참조)라고 시작되는데 여기서 ‘그’가 누구를 가리키는지 분명치 않다. 주님을 가리키는지, 아브라함을 가리키는지, 아니면 우리를 가리키는지 분명치 않다. 그러나 여하를 막론하고 우리는 다 그 가운데 있는 영을 만져야 한다.


자신을 내맡겨야 비로소
그리스도인의 노정을 달릴 수 있음

사람이 주님을 믿은 이후에는 두 가지 일에서 다루심 받아야 하며 두 가지를 끝내야 한다. 첫 번째는 죄이다. 이전에 죄는 당신을 재촉하고 얽어 매어 당신이 어떻게 하더라도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러나 일단 당신이 주님을 믿고 난 이후 당신의 죄의 행위는 용서를 받았다 그런 후에 죄의 다스림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죄를 처리해야 한다. 두 번째, 과거에 끝내지 못했던 것을 끝내야 한다. 이전에 당신이 세상에서 얻은 것들도 다 깨끗이 정리해야 한다. 어떤 것은 죄와 관련된 것이고 어떤 것은 비록 죄는 아니지만 무거운 짐이며 당신이 그리스도인의 노정을 경주하는 데 방해가 된다. 이런 것들을 다 깨끗이 정리해야 한다. 마치 히브리서 12장 1절과 2절에서 말한 것처럼 그리스도인이 노정을 경주할 때 먼저는 각양의 무거운 짐과 쉽게 얽매는 죄들을 다 내려놓아야 한다. 사람이 경주를 할 때에는 긴 옷을 입거나 구두를 신을 수 없다. 손에 물건을 들고 뛸 수도 없다. 마찬가지로 주님을 믿은 사람은 반드시 모든 것을 팔아야 하며 모든 것을 버려야 하며 모든 얽매는 것을 제하고서 앞에 놓여진 노정을 경주해야 한다.
이제 하나의 문제가 있는데, 우리가 어떻게 우리 손 안에 있는 것들을 끝내는가이다. 당신은 어떤 사람이 침례자 요한에게 와서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라고 물었을 때, 침례자 요한이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눅3:10-11)고 답변한 것을 기억하는가? 사람에게 손실을 입힌 사람에 대하여는 반드시 배상을 하여 청산해야 한다. 당신의 재물이 부당하게 얻어진 것이라면 당신이 그것을 보존하고 있는 것은 잘못된 것이며 당신이 그것을 사용하는 것 또한 잘못된 것이다. 당신은 반드시 깨끗이 처리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들, 집 안에 있는 물건들은 반드시 한 번은 철저하게 깨끗이 처리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이 앞에 있는 길을 달리고자 한다면, 그에게 있는 무거운 짐들은 반드시 즉각 처리해야 한다. 모든 것을 내려놓는 것은 주님을 사랑하는 표시일 뿐 아니라 대부분의 원인은 바로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길에서 잘 달리기 위한 것이다.
우리는 죄가 남아 있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을 뿐 아니라 물건이 남아 있는 사람도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죄는 우리 몸에서 우리로 하여금 기본적으로 그리스도인이 되기 어렵게 한다. 물건이 우리에게 남아 있다면 우리로 하여금 성질상에 있어서 그리스도인이 되기 어렵게 한다. 죄는 우리의 유기적인 면에서 병들게 하며, 물건은 우리의 기능 면에서 병들게 한다.
형제자매들은 특별히 금과 은과 보물과 장식품 등의 물건은 반드시 내맡겨야 한다. 형제자매들이 내맡긴 부동산에 대하여는 합당한 안배와 해결이 있어야 한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과거에 이것을 아주 가볍게 처리했고 또한 대충대충 처리했다. 그러나 오늘날 그와 같이 경홀히 할 수 없다. 이제 형제자매들은 바빠야 하며 엄격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오늘날 교회가 하나님의 최종 단계의 부흥의 길을 시작하는 것과 같다고 믿는다. 우리가 다 이 길을 잘 가기 원한다. 우리를 이 풍성한 시대 가운데 두심을 인하여 주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린다.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엡 4:11-12, 16).


그리스도의 생명의 내적인 요구―전체의 봉사

이상수 형제님 : 에베소서 4장 11절부터 16절의 말씀은 그리스도의 몸의 건축을 말한다. 12절에서는 각각의 은사들이 각기 직분을 사용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하기 위한 것임을 말한다. 16절에 이르러서는 각각의 지체들이 사랑 안에서 스스로 건축하여 몸으로 건축되게 한다고 말한다. 건축에 있어서 먼저는 그리스도께서 주신 은사에 의해 건축되지만 다음으로는 지체들이 각각 함께 기능을 발휘함으로 건축된다. 그리스도인은 바로 그리스도께서 그의 속에 계시고, 거하시며, 살아 계시는 사람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시는 이상, 그분은 우리에 대하여 요구가 있는데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안에 살아 계시기 때문이다. 무엇을 교회라고 하는가? 사람들은 많은 믿는 이들이 모인 곳이 바로 교회라고 한다. 이것은 일반인들이 말하는 교회, 곧 예배당(종탑과 십자가의 첨탑이 있는 건축물)이라고 말하는 것보다는 많이 진보한 것이다. 그러나 더욱 정확하게 말한다면, 교회는 당신 안에 살아 계시는 그리스도와 내 안에 살아 계시는 그리스도, 그리고 그들 안에 살아 계시는 그리스도가 더해진 것이다. 이것이 바로 교회이다. 개별적인 그리스도인은 교회가 아니다. 하나님이 육신 되신 분이 바로 그리스도이며 이 그리스도께서 많은 사람 안에 들어가서 당신과 나 그리고 많은 사람들 안에 있는 그리스도를 합할 때 비로소 교회가 된다. 그들을 합한 것이 교회가 아니라 바로 그들 안에 있는 그리스도를 합한 것이 교회이다. 개별적인 그리스도는 교회가 아니다. 바로 단체적인 그리스도가 교회이다.
내가 다시 한 가지를 질문하겠다. 무엇을 가리켜 교회의 봉사라고 하는가? 대북의 우리와 오랫동안 교통하던 형제가 한 명이 있는데, 한번은 우리에게 어떤 일에 대하여 매우 불만을 표시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교파의 조직적인 장로와 집사의 선거를 반대한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이러한 교파의 조직은 오늘날 우리의 안배와 동역과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다. 오늘날 우리의 동역은 바로 그리스도의 생명의 작용으로 말미암아 자연스럽게 나타난 동역이며, 형제자매들 안에 사신 그리스도의 요구로 말미암아 산출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교회 안에 계시는 것이 봉사이다. 각각의 구원받은 사람들이 속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얻은 생명을 따라 봉사할 수 있다.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서 우리의 생명이 되시고 우리가 그분께 지위를 드릴수록, 한 면으로 우리는 많은 죄들과 세상의 일들에서 벗어나며 한 면으로 우리는 더 많은 봉사가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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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우리 각 사람이 얻은 생명은 바로 그리스들의 몸의 생명이다. 나에게 있어서 어느 한 지체의 혈액의 순환도 온 몸의 혈액 순환에 비해 낫지 않다. 왜냐하면 지체는 몸의 생명을 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당신 안에 있는 생명 역시 교회의 생명이다. 1934년부터 나는 실제적으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생명임을 보았으며, 우리의 봉사의 생명임을 보았다. 만일 젊은 자매가 의복을 주님보다 더 사랑한다면 그는 봉사를 하고자 하는 마음이 감소될 것이다. 어떤 그리스도인들도 그가 실제로 세상과 죄악과 육체를 사랑하지 않지만 사람의 영혼을 사랑하지 않고 다만 천당에 가기만을 기다린다고 간증할 수 없다. 사람이 일단 세상을 내려놓으면 반드시 봉사를 하게 된다.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 안에서 역사할수록 우리는 봉사를 하게 된다.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서 생명이며 교회 안에서는 봉사이다. 이 며칠 동안 내 속에서는 한 가지 조급한 것이 있다. 그것은 홍콩에서 이러한 교통을 받은 사람들과 이미 자신을 내맡긴 형제자매들이 약 이백 명이 되는데 여러분은 왜 즉각적으로 봉사를 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또한 우리는 계속해서 이러한 교통을 들어왔으며 오늘까지 십여 일 동안 들었으며 앞으로도 계속 들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자신을 내맡긴 사람들은 반드시 봉사하라는 생명의 재촉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느낌은 아주 좋고 귀한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에게 장로와 집사가 있는 것은 봉사를 위한 안배를 위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선거를 통하여 산출하는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 안에 봉사하고자 하는 요구가 있어야 한다. 장로가 된 사람은 스스로 장로가 될 수 없고 성령이 세운 사람이어야 한다(행 20:28). 히브리서에서 말한 것처럼 구약의 대제사장도 스스로 대제사장으로 영광을 취할 수 없었고 바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야 했었다(5:4). 그러므로 우리의 안배의 근거와 근원과 성질은 교파의 조직과 다르다. 우리는 인위적인 조직이 아니라 몸의 지체와 같이 각자가 자연적으로 안배하여 동역해야 하지 인위적인 조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상의 말에 관하여 나는 하나의 결론을 내리겠다. 우리 안에 있는 그리스도는 단지 생명일 뿐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생명은 요구가 있다. 당신이 일단 속에 있는 그리스도의 요구에 응한다면 그분은 당신으로 하여금 주님을 섬기도록 인도하실 것이며 또한 당신 개인적으로 섬기게 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 전체 안에서 동역하여 섬기게 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요구를 중히 보고 응해야 할 뿐 아니라, 더욱 이 요구가 우리로 하여금 전체가 동역하여 봉사하는 길로 인도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만일 당신이 그리스도의 요구에 응한다면 형제자매들과 동역이 있게 되고 당신 안에는 더욱 평안이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재물과 직업과 장래를 내려놓고 아직 교회 안에서 동역하여 봉사하지 않는다면, 그의 속에는 아직 평안하지 않을 것이며 기쁨도 없을 것이다.

만일 당신이 이렇게 속에 있는 그리스도의 요구를 주의한다면,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속에서 당신으로 하여금 교회의 봉사의 길로 가도록 인도하실 것이다. 물론 구원받지 않은 사람은 속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없으므로 그에게는 주님을 섬기고자 하는 마음이 조금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면, 설령 그가 몹시 타락하여 세상에 깊이 빠졌다 할지라도 그의 속에는 여전히 하나님을 섬기고자 하는 마음이 조금은 있게 된다. 그러므로 교회의 책임 형제들은 반드시 형제자매의 봉사하고자 하는 이 점을 귀히 여겨야 한다. 교회는 반드시 형제자매들이 봉사하고자 하는 마음을 발견하며 이끌어 주어야 한다. 오늘날 한 가지 어려움은 교회가 형제자매들이 봉사하는 것을 도와주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교회는 바로 문제가 있는 교회이다. 교회는 각각의 형제자매들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생명이 합해진 것이며 또한 그리스도의 몸이기도 하다. 그리스도의 생명은 각각의 사람들 안에 있고 자연히 그가 봉사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교회가 형제자매들이 주님을 섬기도록 인도하고 도와주지 못한다면, 이러한 교회에는 병이 있게 된다. 이것은 마치 생명이 있는 몸이 정상적인 상태일 때는 일을 하고 운동을 하며, 휴식할 때 움직이지 않는 것을 제외하고 나머지 시간에는 많은 활동이 있는 것과 같다. 교회가 줄곧 일을 하지 않고 봉사를 하지 않는다면, 이 교회는 문제가 있는 교회이다.

오늘날 하나님이 얻고자 하시는 간증은 전체의 봉사임

우리는 왜 교파를 떠났는가? 그것은 우리 안에 있는 봉사의 요구가 만족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바로 교회 전체가 일어나 그분을 섬기는 것이다. 하나님은 각각의 형제자매들에게 이러한 것을 요구하신다. 그러므로 교회의 책임 형제들은 이에 대하여 반드시 특별히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데, 이는 당신이 형제자매들로 하여금 봉사하지 못하게 하고 저지한다면 당신은 성령에 득죄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엄중한 일이다. 한 지방 교회가 몸의 간증에 있어서 이러할 뿐 아니라 우주적인 교회도 몸의 간증에 있어서 이러해야 한다. 현재 홍콩 교회 전체가 일어나 봉사하지 않는다면, 어느 날 다른 지방 교회에서 전체가 일어나 봉사하는 풍랑이 홍콩을 강타하여 전체가 일어나 봉사하지 않을 수 없게 할 것이다. 무엇이 복음 전파이고 온전케 함이며 돌봄인가? 바로 교회 전체가 봉사하도록 밀어내는 것이다.
교회는 에베소서 4장에서 말한 것처럼 첫 번째 부류의 각종 은사의 봉사가 있을 뿐 아니라 두 번째 부류인 각각의 지체들이 기능을 발휘하는 봉사가 있다. 만일 첫 번째 부류의 건축만 있고 두 번째 부류의 건축이 없다면 몸의 건축은 완전하지 많다. 첫 번째 부류의 은사의 봉사는 바로 시작이며 두 번째 부류의 각 지체의 봉사는 바로 교회 전체의 봉사이다. 만일 교회 가운데 각 지체들이 다 일어나 봉사를 한다면 교회는 매우 달콤하며 하나의 간증을 갖게 될 것이다.
내가 약간 나의 일을 말하는 것을 용서해 주기 바란다. 내 아들이 이십 세가 되었을 때 어느 날 나에게, “왜 아버지는 이렇게 바쁩니까? 다른 전도사나 목사들은 모두 아주 한가한데 왜 아버지만 특별히 바쁩니까? 교회에서 바쁠 뿐 아니라 집으로 돌아와서도 집안 일을 위해 그렇게 바쁩니까?”라고 물었다. 나는 곧 그에게 내적 생명의 요구에 관한 일을 말해 주었다. 내가 크게 선포하거니와 나에게 스무 개의 생명이 있다면 각지 교회로 가서 형제자매들과 동역하며 하나님을 섬기고 싶다. 내 속에서 이것이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일이라고 느껴진다.
내가 하 형제에게 묻겠다. “만일 오늘 당신이 왕이 될 수 있다면 당신은 그것을 원하는가?” 나는 당신이 이것을 매우 영광스럽게 느낄 것이라고 생각한다. 만일 나에게 이 땅에서 왕이 되라고 한다면, 나는 매우 영광스럽고 의미 있는 일로 생각할 것이다. 하물며 오늘 우리의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겠는가? 당신이 교회의 봉사를 만진다면, 당신은 하늘을 만지게 되며,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은 반드시 당신 안에 있는 섬기는 영이 흘러나오게 해야 하며 당신 안의 생명이 출로를 얻어 당신 자신의 제한을 통과하여 나와서 봉사할 수 있게 해야 한다. 교회의 봉사는 바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 나오게 하는 봉사이다. 하나님께서 교회 중에서 역사하셨다면 이것이 바로 봉사이다. 우리가 일단 하나님께서 교회 중에 계시며 형제자매들 안에서 역사하신다는 것을 보았다면, 우리는 전체가 일어나 봉사할 수 있도록 예비해야 한다. 성령이 형제자매들 안에서 운행하실 때 봉사의 일은 마치 바람이 불고 파도가 밀려오는 것과 같이 아무것도 막을 수 없다. 그러므로 만일 당신과 내가 교회 전체가 동역하여 봉사하는 것을 주의하지 않는다면, 당신과 나의 책임은 매우 크다. 동역이 철저하고 깊고 투철할수록 몸의 간증은 나타나며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난다. 우리는 다 이것을 주의해야 한다. 우리는 형제자매들로 봉사하게 해야 하며 다만 감독하고 도와주어야 할 뿐 결코 그들을 저지하며 방해하거나 대체해서는 안 된다. 이같이 할 때 하나님은 통과할 수 있는 길을 얻으실 것이며, 그렇지 않다면 아마 백 명의 영혼의 구원을 가로막게 될 것이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흐름을 따라간다면, 사람이 구원받는 것은 매우 쉬운 일일 것이다. 우리는 형제자매들로 하여금 전진하도록 독촉해야 할뿐 아니라 형제자매들을 데리고서 봉사하기를 배워야 한다. 나 개인이 느끼기에 만일 형제자매들의 봉사의 마음을 다 흘러나오게 할 수 있고 교회 전체가 다 일어나 봉사하게 할 수 있다면, 연말에 일천 명의 영혼이 추가되는 것은 어려울 것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많은 일에서 우리는 소홀히 할 수 있지만 성도들의 봉사의 영에 대하여는 결코 득죄할 수 없다. 만일 내가 지나치게 말했다면, 여러분이 나를 용서해 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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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다시 하나의 간증을 하겠다. 1942년 4월 15일, 나는 연대에서 청도로 가서 집회를 했다. 집회 장소에 도착해서 나는, 교통하는 형제가 몇 명이 있는지를 물었다. 그때 집회에 온 이들은 칠팔십 명 정도였다. 내가 또 온 교회의 형제자매가 얼마나 되는지를 물었더니, 오직 백삼십여 명밖에 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때 우리는 집회를 갖고서 저녁때까지 계속 집회를 했는데 동역자 및 책임 형제들도 전부 동심합의로 교회의 봉사에 대하여 어떤 반대의 영도 갖지 않기로 했다. 그때까지 우리는 한 사람도 침례를 주지 못했는데 6월 15일이 되자 청도 그 지역에서만 이백여 명이 침례를 받았다. 연말에는 인수가 이미 육백여 명으로 증가하였다. 1943년에는 천여 명으로 증가했다. 그때 일본인들의 침략으로 인하여 집회에 어려움이 있어서 형제자매들은 가정에서 집회를 하기 시작했다. 1950년이 되었을 때 이미 삼천 명의 형제자매가 있었다. 후에 제남의 형제자매들이 청도로 와서 비록 이러한 광경을 보았지만, 그들에게 동심합의의 영이 없었기 때문에 자기 안에서 어려움이 있었고, 그로 인해 이러한 봉사의 영을 제남으로 가져가지 못해 오늘에 이르기까지 제남 교회의 인수는 오백 명을 초과하지 못하고 있다. 제남에서 온 형제자매들은 비록 외적으로는 아무것도 표시하지 않았지만, 그들은 이렇게 하는 것을 반대했고 실제상으로 그들 속에 동심합의가 없었다. 이로 인해 교회는 축복을 받지 못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께 득죄하지 말아야 한다. 만일 우리가 봉사를 확장시킬 수 있다면 교회 중의 봉사의 영에 대하여 결코 득죄하지 말아야 한다. 만일 교회 중에 있는 봉사의 영에 득죄했다면, 그것은 곧 그리스도의 몸에 득죄한 것이다. 주님이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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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안에 있는 그리스도께 득죄하지 말아야 함

니토셍 형제님 : 시간이 이미 다 되었기 때문에 나는 간단하게 두 마디만 하고자 한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들 속에 있는 그리스도께 득죄하기보다는 더욱 교회 안에 있는 그리스도께 득죄한다. 그리스도인이 그들 자신 안에 있는 그리스도께 득죄했을 때는 회복하는 것이 쉽다. 그러나 만일 교회 안에 있는 그리스도께 득죄했다면 회복하기가 쉽지 않다. 내가 왜 이렇게 말하는가? 이 두 가지는 기본적으로 차이가 있는데, 자신 안에 있는 그리스도께 득죄하는 것은 그 시대 안에 있는 하나님의 계획을 만지는 것이 아니므로 쉽게 회복될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이 일단 교회 안에 있는 그리스도께 득죄하면, 그는 하나님의 시대적인 행정 안에 있는 계획에 득죄한 것이다. 이것은 매우 중대한 일이며 이로 인해 생겨나는 파괴는 매우 크며, 아마 이로 인하여 많은 영혼들의 구원이 제한을 받게 될 것이다. 나는 여기서 책임 형제들 특별히 장로들에게 말하건대, 우리는 결코 교회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 득죄할 수 없다.
만일 당신이 교회 안에 있는 그리스도께 득죄한다면, 한 면으로는 하나님의 축복의 문이 닫힐 것이고 다른 한 면으로는 하나님께서 크게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을 가로막게 된다. 이렇게 된다면 복음은 당신에 의하여 가로막히게 되고 교회의 은사는 당신으로 인하여 말살된다. 그러므로 교회 중에 계시는 그리스도께 득죄할 수 없다. 이것은 바로 매우 중대한 일이다. 우리는 반드시 경외심이 있어야 하며, 교회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길을 막는 것이 바로 엄청난 일임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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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포 형제님의 기도 : 주여, 우리를 특별히 긍휼히 여기사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게 하시고 다 봉사의 마음을 갖게 하소서. 교회에 봉사가 없으면 그리스도의 생명이 나타날 수 없습니다. 주여, 우리를 매혹시키사 우리로 다시 한번 자신을 당신께 헌신하여 봉사에 있어서 당신께 열린 길을 드리게 하시며 당신으로 교회 안에서 길을 얻게 하소서. 주여, 당신이 교회 역사를 통해서 교회가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기를 바랍니다. 우리를 은혜로 대해 주사 우리 중 어느 누구도 당신을 제한하는 것이 없게 하시기를 원합니다. 홍콩의 교회를 긍휼히 여겨 주시고 우리를 긍휼히 여겨 주옵소서. 우리는 자신이 다만 무용한 종일 뿐이며 오늘날 당신의 흐름을 따르기를 예비할 뿐입니다. 주여, 당신이 완전한 영광을 얻으시옵소서.
니 형제님의 기도 : 주여, 우리는 자신을 당신께 드리오니 참으로 언제든지 우리의 영이 밝지 못할 때 우리로 속에 불안을 느끼게 하소서. 언제든지 잘못이 있을 때 그때 우리로 사망을 만진 것을 느끼게 하옵소서. 다만 우리의 생각과 영과 감정과 의지가 완전히 주님을 향하여 열려 있게 하옵시며, 당신이 우리 안에서 활짝 열린 길을 얻으시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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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집 제62권 주의 회복 안의 성숙된 인도 (2) 제29장 그리스도인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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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9장
그리스도인의 길

 

 

 

 


시간 : 1950년 2월 23일, 저녁
장소 : 홍콩 구룡 좌돈도
설교자 : 니토셍, 이상수 형제님

주님 앞에서 정한 비밀 서약을 실행함

니토셍 형제님 : 우리는 요한 웨슬리가 이십 세에 결혼을 할 때 주님 앞에서 약속을 했는데 오직 그때 한 번 생활의 수준을 바꾸었다는 것을 말한 적이 있다(주님은 그가 결혼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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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그를 불러 사역하게 하셨고 후에 그는 직업을 내려놓고 나와서 주님을 위하여 사역을 했다). 그때부터 죽을 때까지 그는 한 번도 생활의 수준을 바꿔본 적이 없었다. 그가 죽은 후에 사람들이 그의 수입과 지출을 적은 장부를 보았을 때, 그의 만년의 수입은 증가했으며 매년 적어도 일이만 파운드가 있었다(그와 그의 동생 찰리 웨슬리 두 사람 다 찬송을 지었기 때문에 판권 수입이 있었다). 그가 임종한 해의 수입은 어느 해보다 많았는데 이만여 파운드였다. 그러나 그의 생활 수준은 동일했다. 남은 것은 다 복음과 문서의 출판, 복음지 등을 위하여 내놓았으며 또한 주님의 사역을 위하여, 더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위하여 사역할 수 있도록 헌신을 했다.
그러므로 사업을 하거나 직업을 가진 형제자매들과 주부들은 다 하나의 장부를 만들어 주님 앞에서 생활의 수준을 정해 놓는 것이 필요하다. 일단 정해 놓으면 반드시 거리낌없는 양심을 가져야 한다. 당신은 통회하면서 “능력이 없다. 할 수 없다. 믿음이 없다.”고 핑계할 수 없다. 가정을 가진 여러분은 부부 두 사람이 함께 상의해야 할 뿐 아니라 두 사람이 반드시 함께 하나님 앞에 가서 간구하고 약정을 해야 한다. 복건에 있는 어떤 형제는 매월 오직 사 원만 쓰겠다고 정했으며 많은 형제들은 그가 이렇게 한 것이 매우 잘한 것이라고 칭찬을 했다. 그러나 나는 그가 틀렸다고 말하겠다. 자신을 학대하면서 배고픔을 참고 추위에 떨어서는 안 된다. 만일 그가 이렇게 계속해 나간다면 어느 날에는 병이 들어 더 많은 돈이 들게 될 것이다. 많은 형제자매들이 돈에 대하여 매우 총명하고 사고력이 좋지만, 영적인 일에 있어서는 조금도 눈을 뜨지 못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본래 영적인 일에 있어서는 눈멀어 있었지만 자신을 내맡기고 헌신을 한 후에는 영적인 눈이 열렸다. 그러므로 주님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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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스럽게 한 약속을 실행하는 것을 가볍게 보지 말아야 한다.

참된 그리스도인의 표준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요구를 따름

이상수 형제님 : 나는 항상 하나님의 사랑이 늘 사람에게 오해를 받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더욱 오해를 받는 것은 다름 아닌 기독교라고 생각한다. 성경에는 ‘기독교’라는 말이 없다. 성경은 오직 믿는 이들 개인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고 믿는 이들 전체를 교회라고 부를 뿐이다. 한 번도 기독교인이라고 칭한 적이 없다. 그리스도인이란 무엇인가? 바로 주님을 믿고 주님의 생명이 있는 사람들이다. 많은 형제자매들이 그리스도인이 되었지만 그리스도인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알지 못한다. 만일 당신이 어떤 그리스도인에게, “그리스도인은 어떤 사람입니까?”라고 물어본다면 내가 생각건대 많은 사람들의 답변이 매우 이상할 것이다. 그들은 아마 안에 그리스도가 있고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는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이렇게 대답하는 것도 간단하지 않은 것인데 왜냐하면 이것은 당신의 입에서 나온 말일 뿐 당신 자신은 여전히 그러한 사람이 아닐 수 있기 때문이다. 어느 날 하나님이 당신의 눈을 열어 주실 때, 당신은 비로소 그리스도인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 오늘 참으로 그리스도인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은 찾아보기가 힘들다.
그렇다면, 사람의 관점과 생각에 따른다면 그리스도인이란 어떤 사람인가?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은 바로 기독교의 교훈과 신조를 지키며 주일 예배를 참석하고 헌금을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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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라고 여긴다. 솔직히 말한다면,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외적인 것들을 주의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은 교리나 일종의 가르침이 아니며 성경을 규범으로 하여 열심히 성경의 가르침 등을 준행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바로 내적인 것을 주의하는 사람으로서, 그들이 주의하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들이다. 그리스도인은 바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이다. 이러한 어조는 비교적 객관적이고 추상적이며 구체적이지 않다. 오늘 나는 그리스도인은 바로 그리스도가 그들 안에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겠다. 오늘 당신이 그리스도인이라면 과연 어떤 표준으로 그리스도인이 되었는가? 그리스도인이 되는 규칙이 교리나 성경의 말을 지키는 것을 표준으로 삼는가? 우리는 다 그렇지 않다고 대답해야 한다. 니 자매에게 묻겠는데, 당신은 좌돈도 7호 이층의 가르침과 표어와 신조로 그리스도인이 되었는가? (그녀는 머리를 흔들며 아니라고 말함.) 마 형제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위 형제가 답변하기를, 우리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요구에 따른 것이라고 함.) 답변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반드시 성경에 나타난 가르침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며 다른 하나는 속에 있는 성령의 인도를 따르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를 본받아야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본받기가 쉽지 않다. 그리스도께서 앞에서 달리시면 당신도 앞에서 달릴 수 있다는 말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모든 참된 체험은 다 외적인 것들이 아니라 속에서 나온 것들이다. 비록 어떤 때 외적인 행동들이 있지만 근원은 반드시 속에서 나온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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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신은 내적 생명의 요구임

그렇다면 나는 사 형제에게 묻겠다. 당신은 왜 헌신하려고 하는가?(답변 : 속에서 기뻐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마치 어린아이가 초콜릿을 좋아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묻건대 왜 좋아하는가?(답변 : 속에 있는 생명이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 우리의 헌신은 바로 우리 속의 생명이 이렇게 하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렇게 하는 것은 속에 있는 느낌이 기뻐하고 통쾌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1943년 연대에서 내맡기는 일이 있었다. 그 이전 해 연말에 나는 재물의 문제가 형제자매들에게서 분명히 해결되지 않으면 하나님의 복음은 나아갈 길이 없으며 형제자매들 또한 하루도 참된 부흥을 얻을 길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보았다. 그래서 1942년 12월 12일 주님은 연대에서 역사하셔서 그날 저녁에 나는 헌신에 관한 메시지를 전했다. 그때부터 주님은 형제자매들의 속 부분을 만지셨고 형제자매들로 하여금 모든 것을 헌신하게 하셨다. 삼 개월 반을 이렇게 했을 때 육칠백 명이 모든 것을 전부 헌신했으며 어떤 사람은 자신을 내놓고 이주를 준비했다. 이 기간 동안 형제자매들은 다 부흥 안에 있었고 심지어 많은 형제자매들이 집으로 돌아가 의복도 감히 만지지 못했다. 일단 만지면 주님은 그에게 드리라고 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형제자매들이 자신을 드릴 때는 평안이 있었지만 드리지 않을 때는 평안이 없었다. 1948년 복주에서도 동일한 상황이 있었다. 형제자매들이 자기를 드리는 것은 바로 속에 있는 생명의 요구를 응하는 것이다.
나도 자신의 간증을 약간 하겠다. 1928년 곧 23년 전 나는 이십여 세밖에 되지 않은 젊은 사람이었으며 여러 차례 산과 들로 가서 크게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주님께 모든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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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신하기를 원했다. 1933년 주님은 참으로 나를 만지셨으며 내가 그분의 사역을 위해 자신을 헌신하기를 원하셨다. 그때 나는 몹시 발버둥치며 주님께 많은 이유를 댔지만, 주님은 단지 그분의 임재로 내게 답변하셨다. 내가 직업을 내려놓기 원했던 그날, 내 속에서부터 눈물이 쏟아져 나왔으며 주님 앞에 굻어 앉아 그분께 나는 모든 것을 내려놓기를 원하며 모든 것을 주님께 드리겠다고 말했다. 그때 내가 주님의 이름을 부를 때 향기롭고 달콤했으며 또한 속에서는 기쁨으로 가득했음을 느꼈다. 그때 나는 어떤 것을 막론하고 모든 것을 다 주님께 드리기를 원했다. 그때의 기쁨과 해방과 시원함은 하늘에 오른 것 같았으며 지금도 말로 형용할 수 없다. 결론적으로 그때 내 속에는 매우 평안함이 있었다. 그러나 이전에 나는 아직 자신을 드리는 것과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주님을 따라가는 말씀에 대해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내가 속에 있는 요구를 순복할 때 자연히 이렇게 하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만일 당신이 그리스도의 생명 안에 산다면, 자신을 내맡긴다는 이 한마디는 당신으로 하여금 가산을 탕진하게 하는 말이지만 당신 속에서는 평안이 있을 것인데, 이는 당신이 내적인 요구에 응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속이 평안한 정도로 해야 함

내가 여러분에게 다시 묻겠다. 여러분은 왜 그리스도인이 되었는가? 마 형제는 “만일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으면 기쁘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했는데, 나는 “내 속이 평안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말하겠다. 만일 단지 천당에 가고 죄를 사함 받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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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이 되었다면 나는 아직 통쾌하지 않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면 갈수록 통쾌하고, 철저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만일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르지 않는다면 속에 통쾌하고 평안한 느낌이 없을 것이다. 우리가 모든 것을 다 내려놓을 때 우리 속이 얼마나 평안한지. 귀용 여사(Madame Guyon)는 그녀의 속에 있는 주님을 기쁘게 하기 위해 가산을 탕진하고 모든 것을 잃었으며 심지어 그녀의 미모까지도 버리고 모든 것을 주님께 드려 없이하였다. 사람이 볼 때 그녀는 매우 가련했지만 그녀는 평안하기 그지없었다. 진젠도르프(Zinzendorf), 뮬러(Muller), 성 프란시스(St. Francis) 등은 다 이렇게 그리스도인이 되었는데 그들은 그들의 내적 요구를 만족시키고 평안을 얻기 위하여, 달게 모든 것을 주를 위해 버리고 주를 따랐다. ‘버린다는 것’은 원문에서 ‘손을 놓다’라는 의미이다. 여기서 당신은 우리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내적인 요구가 바로 얼마나 철저한 요구인지를 보게 될 것이다.
우리가 다 내적인 생명의 요구에 순복하기를 원한다. 그리스도인은 다만 성경의 가르침과 규례와 품행을 준수하고 혹은 주님을 위하여 열심을 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만일 당신이 주님을 위하여 열심을 내면서도 속에서 평안이 없다면, 당신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옳지 않은 것이다. 만일 당신에게 열심이 있지만 속에서 달콤함을 느끼지 못했다면, 당신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달콤함을 느끼지 못하고 기쁨과 평안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것은 옳지 않은 것이다. 설령,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착하고 도덕적이며 범죄하지 않고 겸손하다 할지라도 신선하지 않고 달콤하지 않으며 기쁘지 않다면, 이는 그에게 죄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속에서 그리스도의 요구를 응할 수 없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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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문이다. 복음을 전하는 능력은 물론 어떤 면에서 성령의 부어지심에서 나온다. 그러나 복음의 더 큰 능력은 바로 당신이 안에서 그리스도의 요구에 응하는 데 있다. 어떤 사람이 복음을 전하는 데 능력이 있다면, 그것은 그가 모든 것을 버린 사람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버린 것이 얼마이면 당신이 얻은 성령의 능력도 얼마이다. 그리스도인이 영적인 일에 대하여 매우 둔한 것은 바로 이러한 원인으로 인한 것이거나 혹은 어떤 것을 붙잡고 놓기를 원치 않기 때문이거나 어떤 일을 포기하기를 아까워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의 영적인 느낌이 둔하고 영적인 느낌이 예리하지 않다면, 틀림없이 버리는 일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당신이 주님을 따르는 것이 참될수록 주님의 내적인 요구를 응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그리스도인은 외적으로 볼 때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 같지만 내적으로 밝지 못하고 민감하지 못하며 기쁨이 없다면, 속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피아노가 외적으로 볼 때 아주 좋은 것 같지만 속에 현에 문제가 있다면 피아노를 연주해 볼 때 음이 맞지 않을 것이다. 만일 어떤 그리스도인이 속에서 민감하지 못하다면, 유일한 원인은 바로 그의 속에 있는 그리스도의 요구에 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당신이 만일 자신이 올라갈 수 없고 형제자매들과도 교통할 수 없으며 형제자매들의 공급이 당신에 대하여 아무런 능력이 없다고 느낀다면, 내가 말하건대 당신은 주님을 위하여 무엇을 하려고 하지 말고 다만 주님께 무엇을 내려놓아야 하는지를 물어야 한다. 그런 다음에 주님의 요구에 응하라. 왜냐하면 당신이 내려놓지 못하는 그것이 바로 당신 자신으로 하여금 올라가지 못하게 만드는 원인이기 때문이다. 어떤 그리스도인이 속에서 흑암과 평안치 않음과 달콤하지 않음과 민감하지 않음을 느낀다면, 그것은 다 속에서 그리스도의 요구에 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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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복음서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것을 사람의 외적인 말로 여기지 말아야 한다. 사실 그것은 우리 안에 있는 그분의 요구이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 5장부터 7장은 다 사람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요구이다. 나는 어떤 사람이 주님을 가까이할 때 그리스도의 요구가 없다고 믿지 않는다. 복음서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은 다 사람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요구이다. 만일 당신이 그리스도의 첫 번째 요구에 응했다면,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뒤에 여전히 하나 하나의 요구가 있다. 마치 그 젊은 관원이 그가 모든 것을 다 준행했다고 했지만 주님은 여전히 그에게 “네게 부족한 한 가지가 있다”(눅 18:18-22)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그리스도의 요구는 또한 그분의 공급임

아마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이같이 사람에게 요구하신다면, 우리는 그분을 상대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려나 당신이 일단 그리스도의 요구를 들어줄 때 당신 안에는 즉시 신선함과 기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어느 때든지 당신 안에서 그리스도의 요구가 느껴질 때 당신이 즉각 이 요구에 응한다면 당신은 평안한 느낌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그분의 요구가 있을 때가 바로 그분의 공급하시는 때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할 때 사람은 비로소 그리스도의 풍성하심과 초월하심과 귀함을 간증하고 교통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피아노와 같이 속에서 나오는 음조가 옳은가 그른가가 중요하다(내가 이 말을 하는 것은 여러분이 외적으로는 함부로 행동하기를 권하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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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형제자매들이 더 일어나 속에 있는 그리스도의 요구를 만지기 원한다. 물론 오늘 어떤 형제자매들은 헌신과 드림에 대한 말을 듣고 또 다른 형제자매들이 열심으로 헌신하고 드리는 것을 보고서 이것을 따라 할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형제자매들을 따라 열심을 내고 헌신하고 자신을 내놓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당신의 헌신과 내맡김은 반드시 당신 속에서 이러한 요구가 있어야 한다. 자신을 내맡기는 것은 당신으로 하여금 주님의 요구에 대해 속에 예민한 느낌을 갖게 하고 또한 당신으로 하여금 귀한 주님을 더 풍성하게 누릴 수 있게 한다.
주님의 요구에 대하여 만일 우리가 절대적으로 응한다면 쉽고 가볍겠지만 만일 일부분만 응한다면 오히려 힘이 들 것이다. 마치 당신이 백분의 육십 혹은 칠십만 응답했다면, 이것은 아주 어렵다. 당신이 백 퍼센트를 응했다면 이것은 쉽다. 왜냐하면 응답하지 않으면 기쁨이 없고 반만 응답하는 것도 더욱 기쁘지 않은데 마지못해 응하는 사람은 몹시 어렵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오로지 완전하게 모든 것을 드린 사람이 얻는 기쁨과 공급이 가장 풍성하다. 오늘 우리는 오직 우리의 응답이 적을 것을 인하여 염려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길은 철저하게 가지 않으면 쉽지 않다. 주님이 우리를 긍휼히 여기사 우리로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길이 완전히 우리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에게 있음을 분명히 보게 하시기를 원한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르고 속에 있는 그리스도의 요구에 응한다면, 이것이 바로 우리가 섬기는 길이며 이것이 바로 생명의 길이다. 내가 다시 말하건대,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반드시 속의 강함과 달콤함과 평안함과 분명함과 투명함의 여부를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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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가 생기는 것은 주님의 요구에 응하지 않았기 때문임

니토셍 형제님 : 오늘 우리는 교회 중에서 동일하지 않은 두 부류의 형제자매들을 볼 수 있는데 많은 형제자매들은 기뻐하는 이들이고 소수의 형제자매들은 근심하는 이들이다. 아마 당신 옆에 앉은 사람은 이 두 부류의 다른 그리스도인일 것이다. 만일 내가 당신에게 누가 가장 즐거운 사람인지 택하여 보라고 한다면 틀림없이 문제가 없는 사람들은 자신이 가장 즐거운 사람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여러분들 가운데 즐거워하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그는 자신에게 의문을 품어야 한다. 그에게는 틀림없이 질병이 있을 것이며 영적인 문제가 있을 것이다. 이 문제의 원인은 바로 주님의 요구에 응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은 교리의 문제일 뿐 아니라 체험의 문제이다. 만일 당신이 “두 분께서 말씀을 전하기 전에는 나는 아주 기뻤는데 지금 두 분이 말씀을 전하고 나자 기쁘지 않게 되었습니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이러한 말씀이 그리스도의 요구가 되었기 때문이다. 만일 그리스도인이이 요구에 응하지 않는다면 자연히 근심하게 될 것이다. 우리의 교리와 말씀과 권면은 기본적으로 아무런 용도가 없다. 우리의 목소리는 마치 확성기와 같이 다만 당신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요구를 분명하게 말해 줄 뿐이다.

오늘날의 길은 바로 속에 있는 음성을 청종하는 것임

만일 형제자매들이 듣고도 아직 주님의 요구에 응하기 원치 않는다면, 나는 오늘 여러분이 이미 너무 늦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만일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았다면 일찍 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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않았어야 한다. 그러나 오늘 여러분은 이미 여러분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지고 있으며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이미 그리스도인이 된 이상 오늘 당신은 반드시 나는 나의 형제를 따른다고 작정해야 한다. 왜, 당신은 주님의 그 큰 사랑의 요구에 응답할 수 없는가? 이 수년 동안 당신은 돈과 세상과 염려 등으로 당신 안에 있는 요구들을 덮고 누르고 제한해 왔다. 여기서의 우리의 모든 가르침들은 새로운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다만 당신 안에서 날마다 들어야 할 말씀을 여러분에게 말해 주는 것일 뿐이다. 우리는 여기서 신선한 말을 전하는 것이 아니며 특별한 말을 하는 데 흥미가 없다. 우리는 사실을 여러분에게 말해 주는데 그리스도인은 손에 잡고 있는 것이 많을수록 고통스럽다. 최후에는 그 젊은 관원과 같이 근심하며 돌아가게 된다. 만일 당신이 손에 잡은 것을 내려놓는다면, 삭개오와 같이 즐겁게 구원을 얻을 것이다(눅 18-19장).
만일 여러분 가운데 어떤 사람이 이방인을 데리고 와서 이러한 말을 들려준다면, 그는 아마 듣고 난 후 나가면서 틀림없이 이렇게 말할 것이다. “모든 것을 다 버리라고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은 분명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다.” 이방인들은 이러한 말을 듣고 나서도 아무런 괴로운 느낌이 없을 수 있고 어떤 사람은 웃을 수도 있다. 오직 참으로 그리스도께서 안에서 생명이 된 사람만이 이 말의 의미를 알 수 있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이와 같이 이치에 맞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이며 이치에 맞지 않는 길을 가는 사람들이다. 주님이 우리를 긍휼히 여기사 우리로 지금 그리스도의 길을 볼 수 있게 하시기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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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집 제62권 주의 회복 안의 성숙된 인도 (2) 제28장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원칙을 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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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장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원칙을 앎

 

 

 

 


시간 : 1950년 2월 22일
장소 : 홍콩 구룡 좌돈도
설교자 : 니토셍, 이상수 형제님

회개의 찬송(제2집에서 편집한 찬송가 309장. 지금의 찬송가에는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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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여 당신이 승리하셨기에 나는 당신께 순종합니다
나의 마음이 은혜의 밀어냄으로 모든 것을 당신께 드립니다
오랫동안 두려운 당신을 거절할 수 있었지만
누가 당신의 큰 사랑에 대항하리요
크신 사랑을 나는 막을 수 없네
2. 당신이 번개와 먹구름으로 내 영혼에 형벌을 내릴지라도
내가 고집하며 회개치 않을 수 있지만
긍휼하심이 내 마음을 정복하니
과거의 모든 대적함은 사라지고 이제 나의 죄를 미워하네
3. 나 홀로 당신께 돌아가기를 사모하니
비천한 이 그릇을 점유하사 당신의 소유 삼으소서
사단의 강포한 손에서 구원됐으니 아무것도 보류하지 않고
내 온 존재로 당신을 영원토록 섬기리

이것은 뉴톤(John Newton)이 지은 회개의 찬송이다. 비록 어떤 사람은 이 찬송을 복음 찬송으로 사용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성도들의 집회에서 극히 유용한 찬송이다.
뉴톤은 1725년 영국 런던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늘 외국에서 살며 항해에 종사했기 때문에 그를 교육하고 양육하는 책임은 전적으로 그의 경건하고 주님을 사랑하는 모친에게 맡겨졌다. 그녀는 늘 뉴톤을 데리고 무릎을 꿇고서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며 헌신했으며 그에게 성경을 읽도록 가르쳤으며 찬송을 기억하게 했다. 그러나 그가 일곱 살 때, 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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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친은 과로로 인한 병으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이 충격은 그로 잘못된 길로 들어서게 했다. 그는 열 살 때부터 부친을 따라 바다 위에서 살았으며, 고향을 떠나 이십여 년 동안을 유랑하는 탕자의 생활을 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선원의 방랑하는 것을 배워 독주와 도박을 익혔다. 여러 차례 복음을 들었고 매번 들을 때마다, 그는 어릴 때 모친의 얼굴과 가르침을 기억하고 마음이 찔렸지만 여전히 죄악 가운데서 나오지 못했다. 후에 그는 아프리카에서 노예 매매에 종사하게 되었다. 그러나 결과는 문제가 생겨서 오히려 노예로 팔려 학대와 고통을 당하게 되었다. 육체와 정신적인 고통은 그로 하여금 수 차례 탈출을 기도하게 했지만, 그에게 돌아오는 것은 옷을 벗기우고 채찍질을 당하는 고통이었다. 몇 년 후에야 그의 부친이 이 사실을 알게 되어 다시 돈을 지불하여 풀려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배를 타고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에 폭풍을 만나게 되었는데, 눈앞에서 그 작은 배는 침몰하려고 했었다. 그러나 주님은 이때 그의 어머니가 어릴 때 그를 헌신한 기도를 들어주셨다. 맹렬한 폭풍의 엄습은 뜻밖에 그의 냉랭한 마음을 뜨겁게 했으며, 격렬한 파도의 요동은 그의 죽어 있던 영을 흔들어 깨웠다. 그는 자신의 과거의 범죄와 죄악을 생각하고 유년 시절 어머니가 그에게 들려주었던 은혜의 주님께서 그를 사랑하신다는 이야기 곧 주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셨지만 그를 위하여 피 흘리고 죽으셨다는 것을 생각했다. 이 은혜는 얼마나 큰가! 그는 자기도 모르게 큰소리로 주님의 이름을 부르고 주를 향하여 기도하며 회개와 자백을 하고 주님을 믿고 주 예수를 그의 구주로 영접했다. 그날 이후로 그는 자신을 완전히 주님께 헌신했으며 죽을 때까지 충성스럽게 주님을 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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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톤은 많은 좋은 찬송들을 지었다. 우리가 선택한 이 찬송은 그의 회개의 찬송이다. 이 찬송은 회개에 관하여 쓰여진 가장 좋은 찬송이다. 여기서 사람은 비록 지옥의 두려움과 하나님의 형벌의 두려움을 말하지만 나는 두려워하지 않는데 당신은 나를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러나 하나님은 그분의 형벌로 사람을 위협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은혜와 크신 사랑으로 말미암아 사람으로 회개하지 않을 수 없게 하신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믿고 돌아온 것은 다만 주님을 믿고 돌아온 것이지만 뉴톤은 순복함으로 돌아왔다. 바울의 회개는 치심을 받아 넘어져 순복하고 돌아온 것이다. 뉴톤 역시 이러했다. 이제 우리가 헌신하기 어려울 때 앞에 있는 찬송을 부르기 바란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그가 가로되 지팡이니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그것을 땅에 던지라 곧 땅에 던지니 그것이 뱀이 된지라 모세가 뱀 앞에서 피하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어 그 꼬리를 잡으라 그가 손을 내밀어 잡으니 그 손에서 지팡이가 된지라 또 가라사대 이는 그들로 그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나타난 줄을 믿게 함이니라 하시고 여호와께서 또 가라사대 네 손을 품에 넣으라 하시매 손을 품에 넣었다가 내어 보니 그 손에 문둥병이 발하여 눈같이 흰지라 가라사대 네 손을 다시 품에 넣으라 하시매 그가 다시 손을 품에 넣었다가 내어 보니 손이 여상하더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그들이 너를 믿지 아니하며 그 처음 이적의 표징을 다 받지 아니하여도 둘째 이적의 표징은 믿으리라 그들이 이 두 이적을 믿지 아니하며 네 말을 듣지 아니하거든 너는 하수를 조금 취하여다가 육지에 부으라 네가 취한 하수가 육지에서 피가 되리라 … 너는 지팡이를 손에 잡고 이것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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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적을 행할지니라”(출 4:2-9, 17).

하나님을 섬기려면
반드시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법칙을 알아야 함

이상수 형제님 : 나는 니 형제님이 여기에 계시기만 하면 나의 영은 아무런 부담이 없으며 내 영은 마치 잠을 자고 안식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니 형제님이 나에게 말을 하라고 하셨으므로 그래도 몇 마디 하고자 한다.
우리는 하나님이 역사하실 때 그분에게는 법칙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가 참으로 기능을 발휘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하나님의 역사하시는 법칙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주님의 수중에서 유용하게 되고자 한다면 반드시 하나님의 역사의 법칙을 알아야 한다. 지금까지 내가 만난 많은 형제자매들 가운데서 나는 그들에게 기도가 없거나 사랑이 없거나 경건이 없거나 은사가 없다고 말할 수 없다. 그들은 이런 것들을 다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형제들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의 역사는 매우 적었다. 그러므로 나는 이러한 일에서 틀림없이 원인이 있다고 느꼈는데 후에 나는 형제자매들이 거의 하나님의 역사하시는 법칙을 알지 못했음을 발견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방 안을 햇빛으로 가득 채우고자 한다면, 북쪽에만 창을 만들어야 할 뿐 아니라 동쪽과 서쪽과 남쪽에도 역시 창문을 더 내야만 비로소 방 안을 빛으로 충만케 할 수 있다. 창문을 많이 만들수록 더 많은 빛이 들어온다. 마찬가지로 만일 당신이 빛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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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오게 하고자 하면서도 창문을 열지 않는다면, 설령 당신이 빛이 들어오기를 기도하고 간구한다 하더라도 조금도 들어오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의 역사에 대하여도 이와 같다.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의 법칙에 따라 일을 해야 하나님의 축복을 얻을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설령 당신이 기도가 많고 경건하다 하더라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 우리가 하나님의 역사하시는 법칙에 대하여 분명한 인식이 있다면, 하나님의 역사에 있어서 비로소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종이 될 수 있다. 형제자매들은 지난 몇 년 동안 인도해 본 체험 가운데서 우리를 사용하셔서 역사하시는 주님의 법칙을 매우 분명하게 볼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몇 가지 점에서 우리는 주의해야 주님을 잘 섬길 수 있다. 물론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법칙을 아는 것은 개인적으로 그러할 뿐 아니라 동역자와 교회 안에서도 다 이와 같다.
칠팔 년 전 어느 날 나는 방에서 이 문제를 묵상했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법칙에 과연 어떤 것들이 있는지를 알고 싶어서였다. 그때 아주 기묘하게도 묵상할 때 뭔가 음성을 들은 것 같았는데, 그것은 가서 출애굽기 3, 4장의 모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하나님께 쓰임받은 일에 관한 것을 읽으라는 것이었다. 나는 즉시 가서 출애굽기 3장을 읽었지만 별로 특별한 느낌이 없었다. 4장까지 읽자 각 구절마다 하나님의 빛 비춤이 있었다. 비록 큰 빛을 얻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나는 내가 대단한 원칙을 보았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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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가 배운 세 가지 공과

구약 안에서 하나님의 대표적인 종은 바로 모세이고, 신약에서 하나님의 대표적인 종은 바로 바울이다. 구약과 신약을 막론하고 모두 다, 모세는 하나님의 온 집에서 종으로 충성하였다(민 12:7, 히 3:2)고 칭찬한다. 영적인 원칙에 있어서 모세는 종이었으며, 신구약의 시대와는 관계없이 그의 원칙은 바로 하나님의 종의 원칙이었다. 우리는 다 모세의 배경을 알고 있으므로 나는 여기서 많이 말하지 않겠다. 그에게는 아주 좋은 환경이 있었다. 그는 바로의 딸의 아들이었으며, 또한 그는 하나님을 섬기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으므로 애굽의 모든 학문으로 자신을 장비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코자 했다. 비록 모세가 하나님이 그분의 백성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좋은 땅으로 인도해 들이도록 정해진 사람이었지만 그의 마음과 학문과 구변 등을 다 더하더라도 하나님을 섬기는 데는 부족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분의 주권 안에서 환경을 일으키셔서 그로 시내 광야로 도망갈 수밖에 없게 하셨다.
모세는 광야로 이끌려졌는데 그 자신이 느끼기에도 하나님에 의해 한쪽으로 제쳐진 것 같았다. 광야의 그러한 해(年)들을 거쳐서 그는 자신에 대한 모든 믿음을 잃어버렸다(출 3:11, 참조 2:11-13). 그 자신도 팔십 세는 바로 사람의 일생에 있어서 최고의 연수라고 시인했다(시 90:10), 그 자신이 볼 때 더 이상 시간도 공간도 없이 광야에서 그의 일생을 마쳐야 할 것 같았다. 그가 자신에게 아무런 쓸모가 없다고 느꼈을 때, 곧 출애굽기 3장과 4장의 때 하나님은 오셔서 그를 부르셨다. 하나님이 불타는 가시떨기에서 모세를 향하여 나타나셔서 하나님의 역사를 위하여 그를 부르셨을 때 그는 자신에게 아무런 자격이 없다고 느끼고 자신이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라고 사양했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를 위하여 아론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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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암을 조력자로 예비하셨다. 그러나 출애굽기 4장에서 모세는 여전히 이스라엘 사람이, “나를 믿지 아니하며 내 말을 듣지 아니하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네게 나타나지 아니하셨다 하리이다”(1절)라고 말했다. 이것은 모세가 여전히 격려와 감동을 받지 못했음을 표명한다. 이로 인해 뒤에서 하나님은 세 가지의 기적을 계시하셨는데, 이러한 기적들은 바로 모세가 참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는 확실한 증거였다. 여기서 하나님은 모세로 하여금 세 가지 일을 하게 하셨는데, 첫째로 지팡이를 뱀으로 변케 하셨고, 두 번째로 손에 문둥병이 들게 했으며, 셋째로 물을 피로 변케 하셨다(출 4:2-9, 17).본래 지팡이와 손(살)과 물 세 가지는 매우 유용한 것이지만 그것이 뱀과 문둥병과 피의 세 가지 해로운 것으로 변한 것이다.

1. 지팡이가 뱀으로 변한 공과

나는 먼저 지팡이가 뱀으로 변한 기적을 말하고자 한다. 모세에게 있어서 원래 지팡이의 주요한 기능은 양을 치는 것이었지만 나중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할 때의 여정에서 사용되었다. 모세는 당시에 팔십 세였으며 지팡이는 그의 의지였으며 그의 생존에 있어서 반드시 있어야 할 의지하는 물건이었다. 우리 육체의 수중에는 비록 지팡이가 없지만 원칙상 우리 모두에게는 생활 가운데 의지하는 것들이 있다. 마치 상인은 매매가 그의 지팡이이고, 학생은 공부하는 책이 그의 지팡이이며, 아내는 그의 남편이 ‘지팡이’인 것과 같다. 지팡이는 바로 우리가 의지하는 것이며 우리를 지탱하는 데 소용되는 것들이다. 우리에게는 많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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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팡이들이 있는데 어쩌면 부모, 학문, 사업, 재물 등이 될 수 있다. 본래 지팡이는 유용한 것이며 심지어 하나님을 섬기는 데 사용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일단 당신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문제가 생긴다면, 당신은 당신이 의지하고 있던 생활의 지팡이를 땅 위에 던져야 한다.
나 자신이 부르심을 받은 일에 있어서나 하나님의 다른 유용한 종들이 부르심을 받은 일에 있어서 사람이 일단 자신을 주님께 드려 사용하시게 할 때에 먼저 반드시 수중에 있는 지팡이를 던져야 한다. 지팡이를 일단 땅에 던지면 그곳에 감취어져 있던 뱀이 폭로되어 나오는 것을 볼 수 있다. 뱀은 이미 지팡이 안에 있었지만 반드시 지팡이를 던져야 뱀으로 변하며 그 원래 모습이 나타나게 된다. 이 기적은 그가 의지하고 있던 지팡이가 하나님의 안목과 하나님의 능력 아래서는 그 진상이 바로 뱀이라고 말한다. 뱀은 첫날부터 분장하여 나타났으며 뱀은 구약에서부터 계시록에 이르기까지 다 어떤 사물 안에서 혹은 뒤에서 혹은 아래에서 분장하여 나타났으며 그것을 통해 하나님이 그분의 목적을 위하여 창조하신 사람을 점유한다. 모세의 눈에 지팡이는 그가 의지하고 있던 것이었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그 지팡이는 바로 사단의 화신이었으며, 그 목적은 사람을 점유하기 위한 것이었다.
모세가 지팡이를 던질 때 그것이 뱀으로 변하자 즉시 그는 두려워하며 물러서서 감히 그것을 집지 못했다. 이때 하나님은 그로 하여금 뱀의 꼬리를 잡게 하셨는데, 그것은 모세의 손에서 지팡이로 변했다. 이일이 있기 전 모세는 수년간 이 지팡이를 잡고 있었으며 그에게 있어서 이 지팡이는 바로 귀하게 여기던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그것을 땅에 던졌을 때 비로소 이 지팡이가 바로 뱀이며 그가 수년 동안 줄곧 그것에 점유되어 있었음을 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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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었다. 이로 인해 그는 과거에 그가 의지하던 것이 실제로는 뱀이며 그를 해롭게 했던 것임을 보게 되었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결코 모세에게 그의 지팡이를 ‘버리라’고 하지 않으시고 그것의 참모습이 폭로되게 하시기 위해 그것을 ‘던지라’고 했음을 주의하라. 그러나 후에 하나님은 모세에게 다시 뱀의 꼬리를 잡으라고 명령하셨다. 남경에 어떤 책임 형제가 있는데, 그는 본래 상인이었지만 후에 상업이 위험하고 두려운 일임을 보고서 감히 다시 붙잡지 못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버리라고 하시지 않으시고 반드시 뒤집어서 꼬리를 잡아야 한다고 하셨다. 지팡이는 여전히 잡아야 한다. 그러나 뒤집어서 꼬리를 잡아야 한다. 이전에는 지팡이가 중심이었지만 이제는 주님을 중심으로 삼는 것이며, 이전에는 생활을 위하여 분투했으나 이제는 복음을 위하여 열심을 내는 것이다.
산동에 있는 어떤 장로 형제는 그의 오랜 동반자인 아내가 늙은 뱀이요 그의 자녀들은 작은 뱀이라고 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오랜 동반자에게 물려 자유롭게 주님을 섬기며 복음을 위해 드리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오늘 뱀을 두려워함으로 인하여 감히 그것을 잡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주님은 그것을 던지고서 더 이상 잡지 말라고 하지 않으셨다. 던지는 것은 매우 쉽다. 다만 동서남북으로 가서 복음을 전하면서 아내와 자녀 등의 크고 작고 늙은 뱀들을 떨쳐 버리는 것은 매우 쉽다. 그러나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았다. 주님은 우리로 다시 손을 뻗어 뱀의 꼬리를 잡으라고 하셨다. 그 감취어진 뱀이 폭로된 후에 당신은 그것의 꼬리를 잡아야 한다. 이것은 뱀을 다루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만일 당신이 뱀의 머리를 잡는다면, 그것은 당신을 물 것이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뒤로 돌아가서 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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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리를 잡는다면, 그것은 즉시 세력을 잃고 무력하게 딸려 올 것이다. 심지어 그것은 최종적으로 당신의 권위가 될 것이며, 더 이상 당신을 압제하지 못할 것이다(출 4:4, 17, 눅10:19). 만일 당신이 꼬리를 잡지 않는다면 당신은 권위가 없다.
복음서에서는 우리가 주님을 따르고자 한다면 부모와 자녀 등을 버려야 한다(마 19:29)고 말한다. 그러나 서신서에서 바울은 부모를 사랑하고 그들에게 효도해야 한다(엡 6:1-3)고 말한다. 복음서에서 버리라는 것은 바로 지팡이를 던지는 것이고, 에베소서에서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은 잡는 것인데 곧 꼬리를 잡는 것이다. 이 지팡이는 바로 권위의 지팡이로서 후에 모세가 애굽에서 기적을 행할 때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출애굽할 때 다 이 지팡이를 의지했다. 현재 홍콩 교회에서 대략 이백여 명의 형제들이 자신을 내맡겼다. 내가 말하건대, 이것은 여러분의 첫 번째 공과이다. 여러분의 모든 것과 의지하는 모든 것들을 던진 후에 다시 그것의 꼬리를 잡아야 한다.

2. 자신을 아는 공과

이어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손을 품속에 넣으라고 하셨다. 그가 손을 품속에 넣었다가 다시 꺼냈을 때 뜻밖에 손에 문둥병이 들어 눈과 같이 희게 되었다. 이것은 두 번째의 공과이다. 우리는 먼저 수중의 지팡이를 던져 뱀의 원래 모습이 나타나게 하고 다시 꼬리를 잡아야 하며, 그런 후에 다시 두 번째 일을 행해야 한다. 우리는 단지 모세와 같이 지팡이를 던지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다시 모세와 같이 손을 품속에 넣었다가 다시 꺼냈을 때 문둥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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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는 두 번째 공과가 있어야 한다. 품은 우리 속의 어떠함을 말하고, 문둥병은 죄를 대표한다(롬 7:17-18). 이것은 우리 속에 선한 것이 없다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반드시 자신에게 아무것도 옳은 것이 없고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음을 보아야 한다. 교회 중에서 나는 늘 어떤 형제자매들이 다른 사람을 비평하고 판단하고 책망하는 것을 본다. 나는 이것을 볼 때 매우 화가 나는데, 왜냐하면 나는 형제자매들이 자신 속에 문둥병이 자라고 있음을 알지 못한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만일 당신이 자기의 육체를 안다면, 당신이 어떤 형제의 어떠함을 비평하려고 할 때 당신은 감히 비평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은 자신이 문둥병자라는 것을 알고 자신에게 나쁜 것은 다 모여 있어서 다른 사람과 다를 바 없이 속에 더러움으로 가득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심지어 우리의 모든 찬미와 사랑 혹은 동정도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라면, 그것은 다 문둥병이다. 뉴톤은 그의 찬송에서 그가 자신의 죄를 미워한다고 말한다. 어떤 사람이 일단 자신을 보고 자신을 알게 되면 감히 임의로 사람을 비평할 수 없다. 이는 자신에게 형제자매들을 비평할 자격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주님이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용서해 주시기 바란다. 내가 매번 형제자매들을 말하려고 할 때, 주님은 나에게 자신의 문둥병과 더러움과 불결함을 보여 주신다. 그때 나는 형제자매들이, 설령 아무리 좋지 않을지라도 내가 아무리 상처를 입을지라도 나는 아무것도 감히 비평할 수 없음을 느낀다. 우리 자신 속에는 주님의 부르심을 받을 만한 아무런 자격이 없고 실제로는 하나님의 은혜가 이루신 것이다(고전 15:10). 만일 우리가 이렇게 자신을 안다면 반항하지 않을 수 있고 겸손할 수 있다. 이렇게 한다면 또한 교회 안에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문둥병도 다 제해질 것이다. 사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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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 불만이 없어지고 오직 자신에 대한 미움만이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자신의 실상을 분명히 본 사람이라면 자신이 다만 한 덩어리의 더럽고 부패되었으며 패괴하고 정결하지 않은 죄악의 화신임을 알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긍휼이 아니면, 실로 하나님의 사역을 하기에 자격이 없다. 이럴 때 우리는 늘 자복이 있을 수 있으며 기도가 있을 수 있다.

3. 세상을 아는 공과

우리가 하나님의 사역을 하고자 한다면, 사단의 점유와 자기 육체의 패괴함에 대한 인식에 대하여 뿐 아니라 세상의 혐오스러움에 대하여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주신 세 번째의 기적은 바로 이러한 것이다. “하수를 조금 취하여다가 육지에 부으라 네가 취한 하수가 육지에서 피가 되리라”. 여기서의 강은 바로 애굽 땅에 물을 공급하는 나일 강이며 세상의 타락한 누림을 말한다. 애굽은 바로 세상을 예표한다. 성경에 근거하면 애굽은 나일 강을 인하여 산출이 부요했고 누림이 풍성했다. 나일 강은 바로 애굽의 생명이요 생활의 근원이었다. 피는 사망의 표시이다. 표면적으로 볼 때 나일 강은 공급과 누림을 가져다주었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사망이었다. 당신이 세상 사람이 풍성한 것과 아름다운 것을 누리는 것을 보고 자기와 비교해 볼 때, 당신은 즉시 자신이 얼마나 가련하고 빈궁하며 아무것도 없는지를 보게 된다. 특별히 당신의 친구가 어떻게 발전했으며 본래 학교에서 당신보다 공부를 못하던 그가 오늘 누리는 것이 당신과 비교할 수 없다면 당신은 더욱 그렇게 느낄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물이 변하여 피가 되는 것을 보았다면 사람들이 양옥을 누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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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를 누리는 것이 피를 먹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당신이 일단 당신이 의지하던 것이 뱀이고 당신 속에 있는 것들이 불결하며 당신의 주위에 있는 것이 피라는 것을 보게 된다면, 당신은 자연히 이런 것들을 싫어할 것이다. 주님은 오직 그분이 사람에게 주는 물만이 사람을 영원토록 목마르지 않게 할 수 있다고 하셨다(요 4:14). 사람들은 목이 마를 때 세상의 물을 마시지만 여전히 만족할 수 없다. 오직 주님이 주시는 물만이 사람의 갈급함을 만족시킬 수 있으며 오직 주님이 주시는 물만이 우리 주님의 사역을 하는 사람들의 모든 필요를 공급할 수 있다. 우리가 다 이 세 가지 원칙을 기억하기 원한다.

계시가 있어야 사역을 할 수 있음

니토셍 형제님 : 이상 세 가지의 기본 공과에는 오직 하나의 기본적인 원칙이 있는데, 바로 본 것과 보지 못한 것이다. 당신이 보았다면 자연히 다른 사람과 분별될 것이다. 하나님의 계시를 보지 못했을 때, 당신이 본 것은 지팡이일 뿐이며 자신의 손이 정결하다고 보았을 뿐이고 애굽을 공급하는 것이 하수라고 보았을 뿐이다. 그러나 당신이 일단 하나님의 계시를 얻었다면, 더 이상 이렇게 느끼지 않을 것이며 당신은 수중에 있는 지팡이가 뱀이고 당신의 손은 불결하고 세상에 충만한 것이 사망이라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출애굽기 4장은 하나님의 계시와 사람의 관점이 대비되는 한 장이다.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어떻게 하나님의 계시를 알 수 있느냐고 묻는다. 문제는 당신이 지팡이를 뱀으로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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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에서 난 것이 문둥병이며 물이 피라는 것을 보았는가에 있다. 젊은 사람들은 야심이 있고 장밋빛 꿈을 꾼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께서 당신을 그 꿈에서 깨어나게 하시기를 원한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렇게 하게 하셨을 뿐 아니라 이렇게 보게 하셨으며 또한 모세로 하여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이렇게 하게 하셔서 그들도 보게 하셨다. 본래 하나님은 그로 이스라엘 사람들을 구원케 하고자 했다. 모세가 볼 때 그것은 매우 큰 어려움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시가 그에게 주어지자 그의 느낌은 달라졌다. 예를 들어, 만일 지렁이 한 마리가 이 컵에 있었는데 오늘 저녁에 목이 말라 이 컵의 물을 마셨다 하자. 다 마실 때쯤에 이 지렁이를 발견했다면 내일 저녁 내가 여기서 다시 마시려고 이 잔을 보았을 때 내게 어떤 느낌이 있겠는가? 아마 날마다 지렁이가 있는 것 같은 느낌이 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계시가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이다. 본래 우리는 느낌이 없었다. 마치 모세와 같이 날마다 지팡이를 잡고 있었지만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뱀으로 변한 과정을 거친 후에는 지팡이에 대한 모세의 느낌은 달라졌을 것이다.
육체에 대한 느낌도 이와 같다. 우리는 죄가 세상 안에 있지 않고 내 안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흉악한 일도 세상 안에 있지 않고 내 안에 있다. 그러나 이전에는 느낌이 없었다. 어느 날 내가 품속에서 손을 꺼냈을 때 문둥병이 난 것을 보았다면 이후에는 나는 손을 만지기만 해도 자연스럽게 문둥병이 생각날 것이다. 어떤 사람은 겸손하고 연약하며 순복하는 것처럼 꾸미지만 조금도 그럴싸하지 못하다. 만일 사람이 계시를 얻지 못했다면 꾸며서 할 때는 겸손한 모양이지만 일단 잊어버리면 겸손하지 않고 매번 일을 할 때마다 경계심이 있어야 한다. 우리가 오늘 형제자매들에게 권고의 말을 하거나 혹은 엄한 말을 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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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드시 느낌이 있을 것이고 당신이 품속에서 손을 꺼낼 때 아마 문둥병을 꺼낼 것이다. 여러분이 기억해 주기를 바라는 것은, 하나님이 당신을 불러 사역하게 하시는 것은 당신이 얼마나 많은 물건을 드렸는가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얻은 계시가 얼마나 되는가에 근거한다는 것이다. 전에 한 형제가 나에게, “나는 아무리 연약해도 저 두 형제보다는 강합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이 사람이 아마 일생 자신의 패괴함과 더러움을 보지 못했을까 염려되었다.
섬기는 사람은 세상의 물에 대하여도 느낌이 있어야 한다. 목마름이 그치려면 우리의 요구를 만족시켜 주어야 한다. 아마 우리 중 어떤 사람은 수년 동안 기도하면서 세상에 속한 지위와 축복을 얻기를 원했을 것이다. 여러분이 오늘 이후로 반드시 꿰뚫어 보기를 원하며 하나님으로부터 철저한 계시를 얻어 세상으로부터 얻은 모든 만족이 실상은 피라는 것을 보기 바란다. 계시를 얻은 사람이 본 것은 물이 실상은 피라는 것이다. 설령 수건이나 양말을 사는 일에 있어서도 물이 피로 바뀔 가능성이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고자 한다면, 애굽에 남아서 나일 강의 물을 마시지 않아야 하며 광야로 가서 반석에서 흘러나오는 물을 마셔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반드시 과거에 보지 못했던 것을 보아야 한다. 계시가 있는 사람들은 누구든지 이것들은 참으로 뭔가 기묘하게도 사람이 볼 때는 지팡이요, 품속의 손이요, 나일 강의 물이지만 일단 당신이 하나님이 주신 계시와 이상을 통해서 보면 그들의 참모습이 뱀이요, 육체요, 피라는 것을 분명히 보게 된다. 그럴 때 당신은 도망갈 것이고 두려워하며 떠나게 될 것이다. 오직 하나님의 계시만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의지하던 것들의 참 모습을 알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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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주며 가장 큰 죄가 바로 자아임을 알게 해 주며, 또한 세상의 두려움을 알게 해 준다. 세상에서 지팡이는 의지할 만한 것이며, 자아에서 나온 것이 좋은 것이고, 물은 마실 만한 것이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이 형제와 함께 여러분에게 요청하건대, 하나님 앞에서 분명한 계시를 구하여 반드시 세상과 자아와 환경의 모든 것의 참모습을 보기 바란다. 이렇게 할 때 당신은 비로소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고 하나님께 열납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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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집 제62권 주의 회복 안의 성숙된 인도 (2) 제23장 장로의 성격과 사역 및 오늘날의 봉사의 길
Ezra Zion , 2013-04-05 , 조회 (86) , 추천 (0) , 반대 (0), 스크랩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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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장
장로의 성격과 사역 및 오늘날의 봉사의 길

 

 

 

 


시간 : 1950년 2월 18일, 토요일 오전
장소 : 홍콩 구룡 좌돈도
설교자 : 니토셍, 이상수 형제님

니토셍 형제님 : 장로들은 하나님 앞에서 그 자신이 장로이며 그들의 일은 바로 감독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장로들은 자신이 손수 많은 일을 할 필요가 없고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뜻을 안 후에 형제자매들을 보내어 하게 해야 하며 더욱이 형제자매들이 할 수 있도록 인도해야 한다. 장로들은 형제자매를 대신하여 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들이 어떻게 하는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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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하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장로들은 먼저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아는지를 배워야 한다. 만일 여러분이 여러분의 손에 너무 많은 일을 가지고 있다면, 여러분은 이미 실패한 장로이다. 여러분의 일은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알아 한 가지 한 가지 일을 내맡기는 것이며, 여러분은 감독하는 데 바빠야 한다.

장로의 성격과 사역

이상수 형제님 : 나는 여기서 체험으로부터 한 가지 장로의 성격과 사역에 관하여 말하고자 한다.

1. 아비와 같은 심장을 지녀야 함

첫째로, 장로들은 반드시 아비와 같은 심장을 지녀야 하며 최소한 맏형과 같은 심장을 지녀야 한다. 아비와 형은 아들과 아우에 상대되며 언제나 많으면 많았지 없을 수는 없다. 장로들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는 가정의 아비와 맏형이 되는 것보다 더욱 높다. 장로들이 일을 처리할 때 단지 잘 처리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설령 많은 일을 잘못하고, 많은 일들을 해내지 못하고 잘하지 못했을지라도 반드시 아비와 같은 심장이 있을 때 주님의 축복이 있게 된다. 장로들에게 아비와 같은 심장이 있을 때 형제자매들을 인도해 많은 난관들을 통과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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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일들을 단지 영적인 안목과 성경의 가르침과 영적인 능력만으로 해결할 수는 없다. 물론 이것은 성경의 빛 비춤이나 영적인 능력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예를 들어, 두 형제 사이에 어려움이 있을 때 만일 여러분에게 영적인 빛 비춤이 있다면, 여러분은 누가 공의를 배워야 하고, 누가 십자가를 져야 하며, 누가 파쇄를 받아들여야 할지 등을 알 것이다. 혹 당신이 그들로 하여금 심판에 이르게 하는 빛을 보게 할지라도 당신은 여전히 아비와 같은 심장을 지녀야만 그들로 당신의 결단 앞에 복종하게 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아마 여러분에게 상당한 능력이 있어서 그들을 부끄럽게 할 수는 있어도 그들을 부드럽게 하지 못할 수 있다. 그들은 아비와 같은 심장 앞에서 부드러워지며 각 사람이 다 눈물을 흘리며 자신이 잘못되었음을 시인할 것이다. 그러므로 장로들이 아비와 같은 심장을 지닌다면 쉽게 형제자매들의 어려움을 처리할 수 있다. 교회는 반드시 하나님의 집이어야 하며, 우리는 아비로서 하나님을 대표해야 한다. 그들은 영성이 깊고 체험이 많아야 하며 또한 돌보는 심장이 있어야 한다. 이것이 형제자매들로 하여금 우리가 아비이자 맏형이며 주 안에서 그들을 돌보는 사람임을 느끼게 한다.
나는 조정회 형제를 안 지 이십여 년이 되었으며 함께 주님의 길을 간지도 십팔 년이 되었다. 그에게는 많은 장점이 있지만, 나에게 가장 깊은 인상을 준 것은 그가 실로 아비와 같은 심장을 지녔다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혼사를 매우 관심하며 심지어 자신의 자녀보다 더 관심한다. 나는 아무도 그와 같이 형제자매들의 혼인 문제를 관심할 수 있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다시 말해, 강단에서 해결해 줄 수 없는 많은 형제자매들의 어려움이 그의 앞에 가면 다 해결된다. 그는 온유하게 돌볼 뿐 아니라 때로 형제자매들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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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거운 책망을 한다. 그러나 그는 그들로 상처받았다고 느끼지 않게 할 수 있으며 오히려 안위를 얻게 한다. 여러분에게 아비와 같은 심장이 있다면, 여러분이 그들을 책망한다 하더라도 그들은 여전히 달콤하게 느낄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앙망해야 한다.
대북의 장로들은 나에게 어떻게 아비와 같은 심장을 지닐 수 있느냐고 물었다. 여기에는 하나님과 사람 두 방면에서 말할 수 있는데, 먼저 하나님은 그분의 사랑과 긍휼을 교회에 주어 장로들에게 아비와 같은 심장을 지니게 하셨다. 만일 여러분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장로의 지위에 두셨다는 것을 본다면, 여러분은 반드시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의 마음을 열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여야 한다. 그런 후에 여러분은 하나님과 같은 그러한 아비의 심장을 훈련해야 한다. 만일 여러분이 늘 아비와 같은 마음을 지닌다면 여러분은 형제를 보자마자 그를 관심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마치 어떤 의사가 말한 것처럼 몸의 어떤 지체를 많이 사용하다 보면 그 지체가 강해지는 것과 같다. 여러분이 권투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어디를 가든지 권투하기를 좋아할 것이다. 만일 여러분이 이렇게 아비와 같은 심장을 지니기를 훈련한다면 형제자매들은 다 여러분 앞에 오기를 좋아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 가운데 영 안에 느낌이 정확하지 않은 사람이 하나도 없음을 알아야한다. 만일 어떤 장로에게 이러한 아비와 같은 심장이 없다면, 그는 아주 쉽게 형제자매들을 향하여 마음을 닫을 것이며 이렇게 한 번 마음을 닫는 것은 교회의 큰 실패이다.
장로가 된 여러분은 많은 형제자매들이 부모나 친구들에게 말할 수 없는 말들을 당신에게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아비와 같은 심장을 지녀야 한다. 그들은 하나님 면전에서 많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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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을 갖고 있으며 또한 여러분 앞에 마음을 열기를 원할 것이다. 여러분은 형제자매들의 마음이 여러분과 서로 교통할 수 있게 해야 하며 그들의 영과 여러분의 영이 서로통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이 점에 있어서 장로들이 해낼 수 없다면, 그것은 교회에게 가장 큰 결점이 될 것이며 가장 큰 실패와 거리낌이 될 것이다.

2. 번거로움을 두려워하지 않음

둘째, 장로들은 또한 번거롭게 될 것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한다. 예를 들어 손님을 접대하는 것은 가장 번거로운 일이다. 그러나 장로들은 번거로움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할 뿐 아니라 또한 이러한 번거로움을 환영해야 한다. 디모데전서는 장로의 자격 중 첫 번째 항목이 오직 한 아내의 남편이어야 한다고 말했는데(3:2상), 이 의미는 많은 부인을 두지 말라는 것이다. 많은 부인을 두지 말라는 것은 정욕을 절제할 수 있고 자신을 제한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장로의 또 다른 항목의 자격은 기꺼이 손을 대접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2중). 많은 부인을 취하지 않는 것은 자신을 절제하는 것이고, 기꺼이 손을 대접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이 번거롭게 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장로들은 한 면으로 자신을 제한해야 하고 다른 한 면으로는 다른 사람이 번거롭게 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한다. 손을 대접하는 것은 하나님의 시험으로서 여러분이 번거로움을 두려워하는지 아닌지를 말해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번거롭게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할 뿐 아니라 번거로움을 환영해야 한다. 여러분은 마땅히 왜 오늘 아무도 나를 번거롭게 하지 않는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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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자문해야 한다. 번거로움을 만나면 당신은 여전히 기쁘게 느껴야 한다. 만일 여러분이 양미간을 찌푸린다면, 그것은 여러분이 형제자매들을 향하여 손 대접하기를 사절한다는 표시이다.
동역은 바로 섞임이다. 마치 석회(石灰)가 서로 섞여야만 벽에 바를 수 있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형제자매들이 섞이면 섞일수록 좋다. 그러나 두 형제가 함께 동역할 때 다투지 않는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피차가 관계를 갖게 되면 틀림없이 다툴 것이다 이렇게 다투는 것은 오히려 그들이 서로 섞여 하나가 될 기회를 준다. 그러나 여기에서 장로들은 이러한 다툼의 일에서 그들이 서로 섞일 수 있는지 없는지를 보아야 한다. 좋은 장로들은 다툼을 섞일 수 있는 좋은 기회로 변케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장로들에게는 반드시 날마다 많은 일들이 있어야 하며, 사람들이 찾아와서 묻고 번거롭게 하는 것을 좋아해야 한다.
상해 남경로에 신대상 비단 가계가 있는데, 여러분이 한번 들어가 본다면 아주 어지럽다고 느낄 것이다. 다른 가게는 다 아주 가지런히 진열되어 있지만 그것은 가게 입구만 그러할 뿐이다. 사실 신대상은 어지럽지 않다. 다만 장사에 바쁘고 할 일이 많은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차례대로 정리할 틈이 없는 것이다. 신대상은 장사가 잘되기 때문에 남경에도 분점을 냈다. 많은 일에서 성공은 반드시 큰 부분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작은 부분에 있다. 홍콩과 같은 이러한 지방에서 장로들은 반드시 매우 바빠야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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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어야 함

장로들은 또한 하나님 앞에서 교회를 대표해야 하고 하나님의 마음의 뜻을 알아야 한다. 장사라는 말은 어떤 구상을 산출해 내는 것이다. 어떤 회사의 사업이 번창하려면 경영자의 생각이 앞서야 하고, 시장의 정세를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하며, 고객의 필요를 알아야 한다. 마찬가지로 장로들 또한 생각으로 가득하여 하나님 앞에 갈 때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야 한다. 만일 장로들이 하나님 앞에 가서 인도를 받을 수 없다면 다른 많은 형제들이 어떻게 일을 해나갈 수 있겠는가? 장로들은 참으로 방법이 없을 때 하나님 앞에서 방법을 찾고 간구해야 한다. 장로들은 하나님의 뜻을 알아 하나님의 인도를 받을 수 있어야 하며, 반드시 먼저 교회의 사무를 하나님 앞에 가져가서 간구해야 하며, 늘 형제자매들을 짊어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하나님을 앙망해야 한다. 오늘날은 사람이 하나님을 기다리는 때가 아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기다리신다. 오직 사람의 마음이 열리기만 하면 하나님은 언제든지 산 위의 식양을 그에게 보여 주신다.
좋은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한다면 반드시 다음의 세 가지를 읽을 수 있어야 한다. 첫째는 그의 안에 있는 성령의 운행하심을 읽을 수 있어야 하며, 두 번째는 성경을 읽을 줄 알아야 하며, 세 번째는 환경―사람, 일, 사물 등을 포함함―을 읽을 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좋은 장로가 되기 위해서는 위에서 언급한 세 가지 외에 반드시 형제자매의 상황, 특별히 그들 안에 있는 상황을 읽어 낼 수 있어야 한다. 마치 구약에서 대제사장이 에봇을 입을 권리를 가졌던 것과 같은데 에봇 위에는 두 가닥의 견대와 하나의 흉패가 있었다. 두 가닥의 견대 위에는 두 개의 홍마노가 있는데 그 위에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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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패는 에봇의 가운데 있었는데 위에 열두 개의 보석이 있었고 그 위에 열두 지파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이름은 하나님의 백성 전체를 대표한다. 대제사장은 매번 하나님 앞에 나올 때마다 반드시 견대에 하나님의 백성 전체를 짊어져야 하며 가슴에도 하나님의 백성 전체를 품고서 하나님 앞에서 묻고 구해야 했다. 하나님은 흉패 위에 있는 우림과 둠밈을 통하여 그들에게 그분의 뜻을 계시해 주셨다. 우림은 히브리어로 빛을 의미하며 바로 일종의 빛을 발하는 물질로서 열두 보석의 아래에 있었다. 둠밈은 히브리어로 완전케 하다(perfect)를 의미하는데, 이는 열두 지파의 이름이 단지 히브리어의 스물두 개 자모 가운데서 열여덟 개만 포함하고 그 나머지 넷은 바로 둠밈 위에 두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흉패는 히브리어 스물 두 개 자모를 전부 포함하며 우림이 빛을 발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었다.
장로들은 늘 형제자매들의 상황을 품고서 하나님 앞에 가서 더듬어 구해야 한다. 그런 후에 하나님 앞에서 분명한 단안을 얻어야 한다. 만일 여러분이 형제자매들의 상황을 조금도 알지 못한다면,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계시를 얻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장로들은 한 면으로 하나님 앞에서 산 위의 식양을 보아야 하고 다른 한 면으로 또한 하나님이 계신 지성소 안에서 빛 비춤을 얻어 형제자매들의 상황을 보아야 한다. 여러분 장로들은 날마다 오늘 홍콩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고 하나님께서 홍콩 교회에서 어떠한 길을 가시며 어떤 일을 하시는지를 알아야 하며 형제자매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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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형제자매 안에 있는 필요를 돌보아야 함

장로들은 교회 가운데의 어떠한 형제 안에 있는 필요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형제자매들 안에 있는 필요에 대하여 교회는 소홀히 할 수 없으며 반드시 즉시 돌아보아야 한다. 하나님이 그분의 종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신 빛 이외에 우리는 또한 형제자매들 안에 있는 영적인 요구들을 중히 보아야 하는데, 이는 그것이 다 그들 안에 있는 하나님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만일 장로가 돌아보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늘의 이상을 소홀히 하는 것과 같은 것이며 하나님의 엄중한 책망을 받을 것이다(암 2:11-12 참조).
장로들은 형제자매들의 의사를 받아들이는 데 다른 사람보다 민감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늘 형제자매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더욱 엄중한 빛을 주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장로들은 자신의 긴박한 필요를 돌아보듯이 형제자매들의 필요를 돌아보아야 한다. 이렇게 할 때 성령에게 득죄하지 않을 수 있다.
장로들은 반드시 늘 마음을 열고 형제자매들을 어깨에 지고 그들을 가슴에 품고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 구해야 한다(가슴은 마음의 문제이며 어깨는 능력의 문제임). 여러분의 마음과 여러분의 어깨의 힘으로 형제자매를 지고서 하나님 앞에 가서 빛을 얻어야 한다. 이렇게 할 때 만일 어떤 형제자매들 안에 성령의 부담이 있다면 여러분은 그것을 도말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장로들은 젊은 사람이 복음이나 기타의 일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들을 때 즉시 그것을 하나님 앞에 가지고 가서 형제자매들이 왜 이렇게 말하는지를 물어야 한다. 오늘날 하나님은 얼마나 우리의 제한을 받으시는지 모른다. 하나님은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며 우리가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장로가 되기를 바라는 사람은 다 하나님의 온 무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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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하여 근신해야 한다(행 20:28).

5. 합당하게 사무를 안배해야 함

장로들은 하나님에 대한 교회의 모든 봉사를 붙들어 주어야 할 뿐 아니라 모든 사무를 붙들어 주어야 하기 때문에 반드시 합당하게 사무를 안배해야 한다. 장로들은 반드시 사무가 한 면으로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가장 큰 근거이며 또 한 면으로는 하나님의 역사에 어려움이 된다는 것을 보아야 한다. 일은 할수록 많아지므로 합당한 안배가 필요하다. 마치 차를 타고 산을 넘고 골짜기를 지나 여행을 하는 것과 같이 산을 하나하나 넘는 것은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한 것이다. 여러분이 타고 있는 차는 일종의 수단이지만 또한 방해 요인이 될 수 있다. 만일 장로가 자동차를 통제할 수 있다면 하나님의 역사는 이것을 통해 신속히 전진하고 목적지에 이를 수 있다.
오늘날 기독교 안의 어떤 단체 안에서는 명단 상에 기록된 사람이 삼천 명이나 일만 명 혹은 이만 명이나 된다. 그러나 활발하게 봉사하는 사람들은 많아야 삼백 명 혹은 오백 명밖에 되지 않으며 실제적으로 봉사하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 설령, 교회의 인수가 더 많을지라도 봉사하는 사람이 증가하지 않으면 그것은 교회의 정해진 분량을 초과하는 것이다. 마치 큰 강의 흐름이 이곳까지 왔는데 우리에게 하나의 물통밖에 없다면, 많아야 일백 갤런밖에 담지 못하고 그 나머지 물은 그냥 흘려 보낼 수밖에 없다.
사무의 안배는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의 분량을 확대하기 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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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들이 사무와 인사에 있어서 안배를 많이 할수록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근거를 더 많이 드리게 된다. 아마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장로들은 많아야 봉사와 영적인 것과 기도 등의 일만을 안배하고 인사는 안배할 필요가 없다고 할 것이다. 사실, 인사의 안배는 사무의 안배보다 더욱 중요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근거는 주로 사람을 통해서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장로들은 반드시 사람을 온전케 해야 하며 그들이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인도해야 한다.

6. 사무 처리에 철저해야 함

장로들은 사무를 안배해야 할 뿐 아니라 사무를 처리하는 데 있어서 철저해야 한다. 여러분이 책임 형제라면 여러분의 생각과 관념은 반드시 분명하고 민감해야 한다. 어떤 사람은 단지 생각만 영적이어서 형제자매들을 위해서는 중보 기도만 해 주면 되고 의자를 잘 배치하고 안 하고는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여긴다. 사실, 이것은 완전히 잘못된 것이다. 장로들의 관념은 속히 전환되어야 한다. 우리는 아직 새 예루살렘에 거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교회 안에는 아직도 많은 일들이 있다. 교회 안에 있는 일들은 여전히 잘해야 하며 철저하고 완전할수록 좋다. 장로들의 생각이 바뀌면 때로 할 일이 없다가도 많은 일이 생기게 된다. 내가 간증할 수 있는 것은, 나는 늘 사람들의 미움을 받고 악한 사람이 되며 일이 없어도 일을 만들어 내며 또한 철저하기를 요구한다는 것이다. 일을 잘하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위하여 사역할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한다. 말을 잘할 수 있다고 해서 하나님의 사역자가 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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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 그것은 너무 낮은 것이다.
일을 할 수 없는 사람은 사역을 할 수 없고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야 비로소 사역을 할 수 있다. 일을 대충대충하는 사람은 성경을 읽는 것도 역시 대충대충하며 정확하지 못하다. 당신이 의자를 배열하는 것에 있어서 간격이 정확하지 못하다면 성경을 해석하는 것도 정확하지 못할 것이다. 장유랑 형제는 늘 많은 사람들을 책망하는데, 그는 사람의 잘못을 찾아내는 데 있어서 전문가이다. 여러분이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다면, 그는 즉시 이렇게 말할 것이다. “만일 당신 한 사람만 섬긴다면 그것은 상관없겠지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뒤에서 당신을 따라오고 있으며 얼마나 많은 형제자매들이 당신을 보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라. 아마 하나의 잘못만 있어도 다음의 오백 명의 영혼이 구원받지 못할 것이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오늘날의 봉사의 길―전체의 봉사

형제자매들은 자신을 내맡겨야 하며 장로들은 안배할 수 있어야 함

이곳 홍콩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하나의 강한 교회가 봉사하는 것이 필요하다. 나는 최근 하나님의 교회가 복음을 전파할 때는 듣는 사람들이 많지 않지만 부근의 극장 안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는 것을 보았다. 하나님의 교회와 극장을 비교해 본다면, 복음집회에 온 사람은 얼마 되지 않는다. 이곳 홍콩의 필요는 강한 복음의 거인이 아니라 강한 교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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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나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며 전체가 일어나 섬기는 것이다. 내가 믿기에, 만일 교회 전체가 일어나 복음을 전한다면, 반년도 지나지 않아 홍콩 형제자매들의 인수는 이천 명이 될 것이다. 전체가 봉사하기 위해서는 형제자매들이 자신을 내맡기는 것이 필요하다. 이뿐 아니라 자신을 내맡기고 또한 여러분을 인도하는 장로들이 어떻게 안배하는지를 보아야 한다. 이것은 마치 건축의 재료들이 다 준비된 상황에서 여러분이 어떻게 각 부분을 안배하여 건축해야 하는지를 보아야 하는 것과 같다.
자신을 내맡긴 사람과 일과 물질에 대하여 장로들은 크고 작은 일들을 다 펼쳐 놓고 사람을 찾아내야 한다. 일을 사람에 맞추어야 하고 사람을 일에 맞추어야 한다. 각각의 일들을 실행할 길을 찾아야 한다. 일이 있고 사람이 있고 길이 있다면 반드시 나가서 실행해야 한다. 일을 할 때 장로들은 반드시 엄격하게 감독해야 하고 기한과 목표를 정해 두어야 하며, 반드시 얼마나 좋은 단계까지 이르러야 하는지 언제 마칠 것인지를 정해야 한다. 장로들이 이 몇 가지를 어떻게 안배하고 실행하는가에 따라서 새어 나가는 부분도 감소된다. 만일 여러분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다면 일단 시도해 보고 다시 다른 길을 찾아볼 수 있다. 길이 통한다면, 여러분은 법칙을 찾아낼 수 있다.
교회의 길은 선교회의 길이 아니라 몸이 봉사하는 길이다. 우리는 다 하나의 살아 있는 몸을 가지고 있으며 갓 태어났을 때부터 임종 때까지 자연스럽게 일하고, 생활하고, 휴식하며, 먹고 마신다. 교회의 봉사는 바로 몸의 봉사이다. 그러므로 사람을 구원하고 온전케 하는 것 역시 일반적이고 자연스러운 것이다. 때가 되면 당신은 교회가 하나의 가족으로서 사람을 부양하는 곳일 뿐 아니라 학교로서 사람을 훈련하고 또한 공장으로서 물건을 생산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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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병원으로서 사람을 치료하는 곳임을 보게 될 것이다. 형제들이 조금 더 많은 시간을 들여 함께 교통하고 기도한다면 아주 좋은 안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안배가 없으면 중간에서 끊어질 수 있으며 다시 부흥하기가 어렵다.

교회는 바로 전체의 봉사임

니토셍 형제님 : 나는 이 형제의 말에 내가 무슨 말을 더하는 것이 그의 말의 부담을 감하는 것이 될까 염려된다.
과거에 나는 각지 교회에서 사역하고 복음을 전하며 온전케 할 수 있도록 큰 은사 있는 사람을 보내어 주기를 요청했다. 내가 묻겠다. 무엇이 교회인가? 교회는 바로 개개인이 다 나와서 봉사하는 것이다. 교회에는 이상수나 니토셍, 왕패진 등의 사람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전체가 다 일어나 봉사를 할 때 비로소 교회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각각이 다 쓸모가 있다. 결코 탁자를 하나 놓고서 떡을 떼기만 하면 교회가 된다고 생각하지 말라. 결코 몇 명의 강한 지체가 오면 교회가 된다고 생각하지 말라. 교회는 바로 이러한 재료 곧 한 달란트 가진 모든 사람들이 다 일어나 봉사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이상수 형제와 같은 재료가 되어야만 재료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교회는 다섯 달란트의 집단도 아니고 두 달란트의 집단도 아니다. 교회는 바로 대부분이 한 달란트를 가진 집단이다. 바로 당신과 나 같은 사람이 함께 모여 섬기는 것이 바로 교회이다. 각각의 한 달란트들이 동역하여야 충분하다. 오직 이러한 봉사만이 하나의 강한 교회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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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코 더 좋은 사람이 오기를 바라지 말라. 지금 여기에 있는 사람들로도 당신이 살고 있는 지방에 편만하게 복음을 전할 수 있다. 하나의 강한 교회 안에 한 사람의 큰 전도자가 있다 할지라도 그는 여전히 형제들 가운데 하나일 따름이다. 예를 들어, 이삼백 명이 모이는 교회에 두 달란트, 다섯 달란트 가진 사람이 없고 다 한 달란트를 가진 사람만이 있을 수 있다. 비록 여러분은 부족하다고 느낄지 모르나 모든 부족한 것을 합할 때 하나님은 길을 얻으실 수 있다. 결코 이것이 수준에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하지 말라. 여러분과 같은 사람일지라도 충분하고 충분하다. 내가 믿건대, 교회 가운데 큰 인물이 있던 시대는 지나갔다. 아마 다음 시대는 이 시대에서 소위 큰 인물이라 불리던 사람들이 다 지나갈 것이다. 오늘날은 큰 인물의 마지막 시대이며 오늘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바로 온 몸이 섬기는 것이다. 오늘날 하나님이 금지하시는 것은 개별적인 지체가 지나치게 강한 것이다. 하나님은 강한 교회를 얻기를 원하신다.
과거 내가 성경을 읽을 때 내 안에는 에베소서 4장은 영원히 이루어질 수 없을 거라는 강한 느낌이 줄곧 있어 왔다. 나는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하나님을 대신하여 생각하고 걱정을 했었다. 최근 이 몇 년 동안 나에게는 에베소서 4장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하나님은 오늘날 몸의 간증을 회복하시는 사역을 하고 계시며, 그분이 주신 은사는 바로 모든 성도들로 하여금 다 사역의 일을 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이제는 더 이상 단지 특별히 은사 있는 사역자가 사역을 하는 것이 아니다. 일반 형제자매들도 복음을 전하고 병을 고칠 수 있으며 사람을 온전케 하고 구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럴 때 교회는 생산을 할 수 있고, 기초가 있으며, 믿을 수 있고, 부흥될 수 있으며, 봉사 등을 할 수 있으며, 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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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과 같이 견고하게 건축될 수 있다.
나는 교회의 전체 봉사에 대하여 한 번도 만족해 본 적이 없다. 교회는 여전히 부족하다. 그러나 어느 날 반드시 영광스러운 것이 나올 것이다. 지금 우리의 길은 갈수록 분명하며, 어려움도 갈수록 많아진다. 1939년부터 우리는 상해의 삼십 명의 집사들을 불러내어 교회에 집사실을 마련해 놓고 봉사의 체계를 세웠다. 이것은 다른 지방에서 해보지 않은 것이다. 그때 각 지방에는 모두 설교자가 한 명씩 있었고 몇 명이 봉사를 했는데, 상해에서 처음으로 삼십 명이 집사실에서 ‘사무’를 시작한 것이다. 후에 상해에 하나의 어려움이 생겨서 1940년 하나님은 연대에서 계속 역사하셨다. 외적으로 나는 비록 잠잠했지만 내 속에는 줄곧 기도가 있었다. 나는 크게 고무되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하심과 하나님의 역사가 동일하다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전체의 봉사임

1949년 내가 본 것은 1939년에 본 것에 비하여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나는 하나님께서 교회가 하나의 결실을 이루고 믿을 만하며 사람을 구원하고 싸움을 할 수 있으며 양육하고 치료할 수 있는 기구가 될 수 있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보았다. 나는 영적 거인의 시대는 지나갔으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바로 교회 전체의 봉사임을 보았다. 오늘 형제자매들이 재료로서 자신을 내맡길 때, 여러분 장로들과 책임 형제들은 일어나 교회가 다방면에서 봉사하는 기구가 되도록 안배하고 인도하며 건축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이렇게 할 때 오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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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이 와도 대처할 수 있으며 만 명이 와도 대처할 수 있다. 주님은 한 지방 교회로 하여금 그 지방의 복음의 필요를 채우게 하시며 그 지방의 형제자매들의 필요를 채우게 하신다.
무엇을 가리켜 영적인 요구라 하는가? 그것은 바로 형제자매들이 일어나 주님을 섬기는 것이다. 어떤 형제에게 하나님 앞에서 어떤 필요가 있는데, 그 교회는 결코 그의 필요를 만족시켜 주지 못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병이 들었다면 당신은 그에게 약을 주어 먹게 해야지 밥을 먹게 해서는 안 된다. 만일 어떤 사람에게 밥 먹을 돈이 없다면 당신은 그를 구제해야지 약을 주어서는 안 된다. 무엇을 가리켜 교회라고 하는가? 교회는 바로 모든 형제자매들의 영 안에 있는 진정한 필요를 채워 주는 것이다. 장로 된 여러분은 쉬지 않고 온 교회를 하나님 앞에 가져가야 하며 형제자매들을 지고서 하나님 앞에 가야 한다.
오늘 우리의 봉사는 전체의 봉사여야 한다. 하나님의 요구는 실로 크다. 그분은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봉사하기를 원하신다. 어떤 모임이 반드시 모든 것을 버리고 팔아야만 회원이 될 수 있다고 하는가? 오직 교회의 가입 회비만이 모든 재산을 요구한다. 이것은 엄중한 요구이다. 만일 당신이 이러한 엄중한 요구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엄중하게 행한다면, 당신은 틀림없이 엄청난 결과가 생기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전체의 봉사에서는 반드시 모든 사람이 다 적극적이어야 한다. 만일 누구든지 소극적인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교회가 아니다. 하나님의 뜻의 성취 여부는 우리 손에 놓여져 있다. 누구든지 보고 들은 사람에게 복이 있다. 만일 당신이 각 방면에서 분명하게 보았다면, 당신이 가장 복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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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집 제62권 주의 회복 안의 성숙된 인도 (2) 제22장 산 위의 식양에 따라 교회 회복의 길을 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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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Nee 제3집 제62권

주의 회복 안의 성숙된 인도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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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1950년 홍콩에서의
집회 및 대화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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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장
산 위의 식양에 따라 교회 회복의 길을 감

 

 

 

 


시간 : 1950년 2월 17일, 금요일 저녁
장소 : 홍콩 구룡 좌돈도
설교자 : 니토셍, 이상수 형제님

니토셍 형제님 : 교회에 대한 주님의 명령은 ‘산 위의 식양’에 따라 건축하는 것이다. 교회는 반드시 산 위의 식양이 어떠한지를 보아야 하며, 하나님의 표준을 표준 삼아야 한다. 그럴 때 과거의 오류를 알 수 있다. 우리가 따라가야 할 교회의 상태는 대체 어떤 모양인가? 우리는 주님이 성경에서 정하신 그러한 영광스런 교회를 볼 때에 우리가 참으로 따라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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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하고 미치지 못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교회가 실패하는 원인

교회가 실패하는 근본적인 원인은 바로 교회가 그 자체의 낳고 기르는 필요를 채우지 못하는 데 있다. 교회의 변화는 단지 형제자매의 여행으로 인해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교회가 강할 때 유동하는 형제자매의 수는 감소되며, 교회가 약할 때 이러한 사람은 증가된다. 사업을 하는 사람은 경제의 동향과 화폐의 유통을 주시한다. 교회 역시 마찬가지로 형제자매들의 유동을 주의해야 한다. 만일 한 지방에 삼사백 명의 형제자매들이 있다면 교회는 잘 돌볼 수 없다. 일 년이 지난 후에 새로운 사람들이 들어오고 오래 된 사람들은 나가게 되는데, 이것은 교회의 손실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반드시 복음을 전함으로 새로운 사람을 얻을 수 있어야 하고 또한 이미 얻은 사람들을 온전케 해야 한다. 교회의 책임은 첫째로 사람을 구원시키는 것이고, 두 번째로는 사람을 온전케 하는 것이다. 만일 몇 개월 사이에 구원받고 새로 들어온 사람이 일백 명이고 나가버린 사람이 일백 명이라면, 이것은 교회의 큰 실패이다. 교회가 실패하는 원인은 아이를 낳고서 양육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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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역사의 법칙

만일 어떤 교회가 강하다면 자유자제로 통제할 수 있다. 즉, 죄인을 얼마나 얻든지 통제할 수 있다. 교회가 강하고자 한다면, 주님이 계시하신 산 위의 식양에 따라야 한다. 만일 주님이 계시하신 식양대로 따르지 않는다면, 사람을 구원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만일 교회가 주님이 주신 식양대로 따른다면, 올해에 오백 명을 증가시키고자 할 때 오백 명을 증가시킬 수 있고 일천 명을 증가시키고자 할 때 일천 명을 증가시킬 수 있다. 우리가 주님의 길을 간다면 삼백 명, 오백 명뿐 아니라 삼천 명, 오천 명을 구원시키는 것도 기이한 일이 아니다. 우리 가운데 있는 형제들이 주님을 부흥의 아들이라고 부를 수 있음을 인하여 주님께 감사한다. 실상, 주님이 우리에게 부흥의 아들이신지 아닌지는 우리가 그분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계시해 주신 법칙에 따라 사역하고 있는가의 여부에 달려 있다. 누구든지 주님의 역사의 법칙을 알고 있는 사람은 내 말에 동의할 것이다. 교회가 복음을 전할 때 성령의 법칙을 알고 성령의 법칙에 따라 사역한다면, 사람을 구원시키는 것은 문제가 아닐 것이다. 교회가 나타날 때 사람들은 구원받지 않을 수 없고 교회는 부흥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의 부흥의 길―전체의 봉사

이곳에 있는 우리는 늘 외국에서 파견된 사람들의 영향 곧 그들이 세운 선교회의 영향을 받아 하나님의 구원이 선교회 설립에 있거나 국외 선교회에 있다고 여긴다. 그러나 성경에는 근본적으로 선교회나 그러한 것을 파송한 예가 없다. 하나님이 발기하신 것은 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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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이다. 선교회는 사람이 발기한 것이며 고든(A. J. Gordon)이 강조한 것으로, 그는 사람들에게 선교회나 파송회 혹은 선교 조직을 시작해야 한다고 하였다. 선교회나 파송회 흑은 선교 조직은 다 특별한 한 무리 사람들로 복음 전하는 일을 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서 하나님은 한 길만을 가시며 오직 한 종류의 사람들 곧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보내어 복음을 전하게 하신다(마 28:19). 하나님이 구원하신 사람들은 다 그리스도인이다. 하나님이 교회에 주신 형제자매들은 다 동일하게 정욕과 죄악과 세상을 떨쳐 버려야 하며 또한 함께 복음을 전해야 한다. 하나님은 교회 안에 특별히 한 무리를 세워 모든 것을 버리고 그분을 따르며 복음을 전하게 하시고 다른 한 무리들은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신 적이 없다. 그러므로 오늘날 교회를 결코 두 종류의 사람들, 곧 완전히 헌신된 사람들과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들로 나눌 수가 없다. 온 교회에는 오직 한 종류의 그리스도인, 곧 절대적으로 헌신된 그리스도인밖에 있을 수 없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부흥의 길이다. 만일 교회가 이렇게 세워진다면, 음부의 문은 결코 대항할 수 없으며 죄인 또한 설자리가 없게 된다.
최근 이 몇 년 동안의 체험은 우리가 말한 것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한다. 각지 교회가 전체적으로 복음을 전한 결과 인수 증가는 모두 배의 단위로 증가했으며, 대북 한 지방의 경우에는 작년과 금년에 삼십 배나 증가가 있었다. 배수로 말할 수 있을 뿐 비율로는 말할 수 없다. 교회 전체의 봉사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크게 나타났지만 오히려 우리의 분량이 수용하기에 부족했다. 북부로부터 남부, 동부로부터 서부에 이르기까지 형제자매들은 스스로 모든 것을 드렸다고 말할 수 있다. 오늘 우리는 여러분에게 누구는 자신을 내맡겨야 하고 누구는 내맡길 필요가 없다고 말할 의사가 조금도 없다. 우리는 하나의 선을 그어 여러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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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무리의 그리스도인으로 나눌 의사가 없다. 주님이 우리에게 어려움이 없으시고 죄인에게서 완전히 통행하시기를 바란다. 주님이 교회 중에서 세상의 방해를 받지 않으시고 죄인에게서 죄악의 방해를 받지 않으시기를 원한다.


전체가 온전케 함을 받도록 내맡길 때 사역의 필요를 채울 수 있음

오늘 교회에는 두 종류의 사역이 있는데, 하나는 낳는 사역이고 하나는 계속 자라게 하는 사역이다. 이것은 한 면으로는 죄인을 얻고 한 면으로는 성도들을 온전케 하는 것이다.
우리는 재물을 내맡길 뿐 아니라 우리 자신을 내맡겨야 한다. 재물을 내놓는 것은 주님으로 우리를 통과하시게 하는 것일 뿐이다. 만일 주님이 올해 우리에게 일천 명을 주신다면 당신은 그들을 이끌어 기도하게 하고 성경을 읽게 하고 그들을 인도하여 떡을 떼게 할 방법이 있는가? 만일 전체의 봉사가 아니라면, 우리는 그들의 필요를 채울 길이 없다. 아마 기도집회는 악화될 것이고, 떡 떼는 집회는 엄숙하지 않을 것이며, 입을 열어야 할 사람은 말하지 않고 말하지 않아야 할 사람은 거듭 말하여 각 사람이 임의로 말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어떻게 봉사할 수 있는가? 우리는 반드시 봉사에 있어서 길을 가져야만 쉽게 새로운 사람을 얻을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재물을 내맡겨야 할 뿐 아니라 우리의 온 존재를 봉사에 드려야 한다. 오직 이렇게 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길을 얻으실 수 있고 죄인에게서 길을 얻으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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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하나의 비유를 들겠다. 교회는 마치 밀가루 반죽을 집어넣으면 익은 빵을 만들어 내는 큰 기계와 같아야 한다. 교회는 반드시 받아들이는 데 있어서 큰 용량―대량의 밀가루를 집어넣을 때 대량의 빵들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용량―을 예비해야 한다. 교회는 사람이 얼마나 오든지 다 수용할 수 있어야 하며 임시로 그들을 도울 사람을 찾아서는 안 된다. 상해의 빵 만드는 기계는 이곳보다 두 배는 커야만 그곳 사람들의 필요를 채울 수 있다. 교회는 또한 전체의 사람들이 봉사하여 필요를 채울 수 있도록 그들을 훈련시켜 온전케 해야 한다.
교회는 사람을 구원시킨 후에 구원받은 사람들을 다시 잃어버려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몇 명을 구원하고서 몇 개월이 지나면 그만큼 잃어버려 인수는 영원히 증가하지 않고 교회도 영원히 흥왕하지 않는다. 대북 교회의 장유랑 형제는 말하기를, 우리는 형제자매들을 훈련시켜 오천 명의 형제자매들이 오면 오천 명을 온전케 할 수 있고 오만 명이 오면 오만 명을 온전케 할 수 있을 정도에까지 이르러야 한다고 했다.
아마 어떤 사람은 우리 가운데 온 지 수 개월이 되었지만 아무것도 알지 못하며 또 우리 중에서도 아무도 그와 접촉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 교통이 있은 후에 우리가 즉시 이것을 할 수 있도록 안배할 수 있기 원한다.
십오륙 년 전에 나는 상해에서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전한 일이 있다. 그때 나는 하나의 예를 들어 말하기를 염려는 마치 집을 지을 때 벽돌들을 하나하나 전달하는 것과 같다고 했는데, 이제 이것을 약간 달리하여 응용해 보자. 예를 들어, 잡일꾼이 벽돌 스무 개를 가져다가 위로 하나하나 올려 주는데 중간에 있는 사람이 이어받아 제일 위에 있는 한 사람이 벽돌을 받게 한다 하자. 중간에 있는 사람에게는 이점이 있는데, 그것은 당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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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게 다섯 개를 주면 그는 다 위로 올려 줄 수 있고 그의 수중에 있는 다섯 개를 다 위로 올려 줄 수 있다는 것이다. 만일 중간에 있는 사람이 아래에서 올려 주는 벽돌을 위로 전달하지 못하거나 가장 위에 있는 사람이 중간에 있는 사람이 그에게 전달하는 것을 받지 못한다면, 중간에 있는 사람은 끊임없이 전달되어 오는 벽돌에 눌려 죽을 것이다. 만일 주님의 역사하심이 없다면, 당신은 여전히 ‘초신자를 온전케 하는 공과’를 그렇게 중요하게 느끼지 않을 것이다. 주님이 역사를 시작하실 때 교회는 계속하여 사람을 얻게 되고, 그때서야 비로소 당신은 초신자를 온전케 하는 것이 이렇게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갓 구원받은 형제자매들이 들어올 때 우리는 그들을 훈련하고 온전케 하여 그들로 어떻게 해야 할지를 알게 해야 한다. 이렇게 할 때 갓 들어와서 한 달밖에 되지 않은 사람도 삼사 개월이 지나게 되면 다음에 들어오는 사람을 대처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교회가 한 단계 한 단계 단계적으로 사람을 돌아본다면, 금년 1월에 구원받은 사람은 2월에 구원받은 사람을 돌볼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할 때 주님은 교회를 축복하셔서 교회로 끊임없이 성장하게 하실 것이며 또한 교회로 하여금 자란 사람을 온전케 할 수 있도록 축복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크게 교회 전체가 나와야 하며 이것은 지연될 수 없다고 소리쳐야 한다. 재물을 내맡기는 것은 다만 당신 자신을 내맡기는 그렇게 많은 일 중의 하나일 뿐이다. 우리는 재물을 내맡기는 일을 그렇게 크게 보지 않는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이것을 크게 보지 말기를 바란다. 나는 우리 전체가 모든 것을 내놓고 온전케 함을 받아 봉사할 수 있기를 원한다.
옛날에는 전쟁을 할 때 일대일로 싸웠는데, 그것은 유격전이다. 오늘날은 다르다. 작전에서는 전체의 기동력이 있는 전투를 강구해야 한다. 마치 오늘날 낙하산 부대가 하늘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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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하나 낙하하지만 그들은 개별적으로 작전을 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 함께 기동 작전을 벌이는 것과 같다. 나는 외국인이 내지에서 사역하는 것이 마치 유격전과 같다고 느껴졌다. 어떤 때는 한 쌍의 부부가 한 곳에서 삼사십 년간 사역을 하여 서너 사람을 얻는다. 그들은 그렇게 수고하지만 낙심하지 않는다. 우리는 기꺼이 고난받고자 하는 그들의 마음가짐을 매우 존중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의 방법대로 복음을 전할 수가 없는데, 이는 그것으로 부족하기 때문이다. 오늘 중국에는 낙하산 부대와 같은 이주가 있어야 한다. 해구(海口)와 같은 지방을 이용하여 우리의 훈련을 받은 형제들을 한 무리 한 무리씩 중국 서부로 보내야 한다. 나는 우리가 하나님의 이러한 움직임을 따라갈 때 복음이 중국 전체에 편만하게 퍼지는 데 어려움이 없을 것이라고 믿는다.



훈련받고 동역함으로 이주를 대비해야 함

이주할 형제자매들에게는 반드시 전문적인 기술이 있어야 한다. 교회의 이주는 사무적으로도 다방면의 안배가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형제자매들 전체가 먼저 직업적인 기술에 있어서와 복음을 전하는 일에 있어서 훈련을 받아야 한다. 마치 서커스단의 큰 코끼리가 원래는 아주 우둔하지만 훈련을 거친 후에는 춤을 추며 묘기를 보일 수 있는 것과 같다.
우리는 형제자매들이 직업 방면에서도 복음 전파를 위하여 동역할 수 있기를 원한다. 또한 사업 방면에서도 동역하여 이주하고 복음을 위하여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기 원한다. 학생 형제자매들 또한 학업 방면에서 동역하여 지금은 복음을 위해 배우고 장래에는 이주하여 스스로 자립할 수 있기 원한다. 이번에 익양으로 이주하기 위해 등록한 형제들과 같이 어떤 이는 학문이 좋고 영성도 좋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들보다는 오히려 시멘트공이 유용하다. 학문이 있어도 자립할 수 없다면 이주에 있어서 어려움이 된다. 그러나 시멘트 공은 자립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이주에 있어서 아주 유용하다.
이주를 위하여 반드시 배워야 할 몇 가지가 있다. 먼저, 복음을 위하여 이주하는 형제자매들은 반드시 전문적인 기술을 배워야 한다. 아마 여러분은 이렇게 배우는 것이 아주 번거롭다고 여길지 모르겠지만, 여러분은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욱 복이 있다”고 한 주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행 20:35). 그러므로 우리는 주는 사람이 되길 배워야 하며 반드시 일을 하여 자신의 생활을 위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을 공급할 수 있어야 한다. 두 번째로, 형제자매들은 반드시 일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여러분이 홍콩에서 일을 할 수 있었다면, 중경에 가서도 일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교회에서 일을 하는 훈련을 받아 복음을 전하는 비결을 배우고 사람을 구원시키는 것을 배워야 한다. 세 번째로, 여러분은 교회 안에서 반드시 성경을 알기를 배워야 한다. 이번에 형제자매들이 자신을 내맡길 때, 우리는 온 교회를 학교로 전환하고 또 병원의 진료소로 전환하여 여러분에게 사람을 진단하는 것을 배우고 실습할 수 있도록 했다. 우리의 길에 대해 이미 들은 적이 있는 사람들은 갈수록 이 길에 대하여 더 분명해지기 바란다. 오직 이렇게 할 때만이 복음을 밖으로 보낼 수 있다.
오늘 이후로 홍콩 교회의 복음과 사무와 성경 연구 등의 각 방면의 훈련은 상수 형제가 인도할 것이다. 여러분은 실로 몸이 연약하여 따라갈 수 없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느슨하고 게으른 생활을 해서는 안 된다. 여러분 개개인은 다 깨어 있어야 하며 적극적으로 긴밀하게 따라가야 한다. 홍콩 교회가 하나님의 군대와 같고 군사적인 움직임이 있는 교회가 되기를 바라며(민 1-2장 참조), 주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기를 구한다.


대만 사역에 관한 교통

이상수 형제님 : 지난 반년의 시간 동안 나는 계속하여 대만에 남아 있었다. 이 반년 동안 구원받은 형제자매들 중에는 구십 퍼센트 이상이 구원받기 전에 한 번도 복음을 들어 보지 못했고 한 번도 기독교와 관계를 맺어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있다. 대북에서는 이미 천이백여 명이 구원을 받았다. 그러나 그곳에 한 가지 문제가 있는데, 그것은 새로 구원받은 사람들이 아직 봉사의 입장과 길을 모른다는 것이다.
고웅에는 현재 삼백여 명의 형제자매들이 있는데, 작년 이맘때에 함께 덕을 떼던 사람은 십여 명밖에 되지 않았다. 고웅에는 소위 사역하는 형제자매들이 전혀 없었으며 형제자매들은 다 직업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시간이 없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자기의 몫을 내놓고 훈련을 받았으며, 그 결과 구원받은 사람들이 마치 조수와 같이 흘러 들어왔다. 이번 신춘 복음 집회 때 구원받고 이름을 기록한 사람은 육백여 명이나 되며 다 젊은 형제자매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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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회복의 길을 감―전체의 봉사

초대 교회의 상태로 돌아감

교회는 이 땅에서 얼마나 되었는가? 거의 이천 년이 되었다. 얼마나 많은 지방에 걸쳐 있는가? 거의 전세계에 편만하다고 말할 수 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지나갔는가? 천천이요 만만이다. 교회가 이렇게 오래되고, 이렇게 확장되고,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여러분은 교회가 처음의 모습에서 바뀌었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우리가 산 물건은 다 원래의 상태를 지닌 것이어야 한다. 여러분은 오늘날의 교회가 이미 모양이 바뀐 것을 알고 있는가? 만일 당신이 어떤 물건을 산다면, 당신은 원래의 모양을 한 것을 사겠는가, 아니면 개조된 것을 사겠는가? 모든 사람이 다 원래의 모양을 한 것을 원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나는 우리가 이미 모습이 바뀌어진 교회가 아닌 초대 교회의 상태를 원한다고 믿는다. 교회는 이 이천 년 동안 이미 하락했고, 오늘 우리가 보고 있는 교회는 초대 교회와 다르다. 오늘 우리의 입장은 회복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하여 느낌이 없을 수 없고 우리의 물음표는 클수록 좋다. 오늘 우리가 각 방면에서 오늘날의 기독교를 볼 때, 이것이 초대 교회인지에 대해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오늘날의 사회 가운데 우리에게 가장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이 바로 기독교이다. 여러분이 듣는 것은 다 기독교에 대한 사람들의 인상이다.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는 사람을 인도하여 구원시킨 후 그들을 기독교에 가입시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만일 단지 기독교에 가입시키는 것이라면 문제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물음표는 크면 클수록 좋다. 만일 우리가 물음표를 갖는다면 우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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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회복의 길을 보게 될 것이다.
우리는 성령뿐 아니라 영 안에서도 느낄 수 있다. 특별히 1940년부터(1939년부터라고 말할 수도 있음) 시작하여 오늘까지 마지막 이십 년 동안 교회 안에서 걸어가셨던 하나님의 회복의 길은 최고점에 이르렀는데, 그것은 마로 교회 전체가 일어나 봉사하는 것이며 전체 형제자매들이 자신을 드려 훈련을 받고 그런 후에 한 무리 한 무리씩 이주해 나가는 것이다 이렇게 할 때,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서 신속하게 길을 가실 수 있다. 이 오륙 년 동안 나에게는 질병을 통한 파쇄가 있었고 약간의 환경적인 어려움이 있었으며 사람들의 반대도 있었다. 이런 것들은 다 나로 하여금 생명에 있어서 좋은 배움을 가져다주었다. 그러므로 영 안에서, 하나님과의 교통 안에서의 느낌에 따르면, 우리는 사람을 훈련시켜야 하며 외적으로는 동역을 해야 하고 내적으로는 생명에 있어서 온전케 됨을 입어야 한다. 안으로는 복음을 전파하고 밖으로는 이주를 위한 움직임을 시작해야 한다. 이것들은 모두 대 원칙들이다.

믿는 이들의 영 안의 요구를 채워야 함

이상에서 말한 것은 모두 대원칙들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시작하는가? 반드시 세밀한 부분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것은 양면에서 말할 수 있다. 한 지방의 한 교회는 형제자매들 안의 요구를 채울 수 있으며 또한 밖에서 온 사람들의 필요를 채울 수 있다. 만일 우리가 형제자매들 안에 있는 필요를 채우지 못한다면, 우리에게는 문제가 있게 된다. 각 형제자매들이 교회 안에 들어올 때 교회는 반드시 그들의 필요를 공급할 수 있어야 한다. 만일 공급할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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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다면 틀림없이 문제가 있게 된다. 우리가 표면적으로는 잘못된 부분이 없을 수 있지만, 그러나 만일 형제자매들의 필요를 채워 주지 못한다면 착오가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전 세대와 다르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 또한 다르다. 우리가 보고 맛보고 들은 것은 모두 전 세대의 사람들이 보고 맛보고 들어 보지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실로 깊은 속에서부터 하나님을 경배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너무나 큰 은혜를 주셔서 우리로 이것을 보게 하졌고 또한 이렇게 많은 사람들 중에서 특별히 우리에게만 보이심으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그분의 길을 갈 수 있도록 격려하셨기 때문이다. 형제자매들 안의 필요는 바로 하나님이 신속하게 회복의 길을 가기 원하신다는 것을 반증한다. 나는 이것들이 바로 귀한 것이라고 느낀다. 현재 청도, 연대, 북경, 상해 등지에서 모두 이러하다.
이러한 연고로 주님을 앙망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아직 전체가 하나님께 얻어진 바 되지 않았고 우리 개인이 아직 그다지 하나님께 길을 내드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교회 가운데 많은 형제자매들 안에 이러한 요구가 있지만 우리는 공급하지 못했다. 우리는 이 한 방면에서 절대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전체의 봉사와 이주는 공허한 말에 그칠 뿐이다.

전체가 내맡기어 하나님의 요구에 부응해야 함

전체 형제자매들 가운데 단 한 명이라도 기꺼이 하나님의 요구에 부응하려 하지 않고 원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이 전체를 사용하실 수 없으며 교회 가운데서 길을 얻으실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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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오늘 이 시대에서 신속하게 회복의 길을 가기 원하시지만, 최소한의 요구는 교회 전체가 다 일어나 섬기고 이주하며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길이 열리는가 열리지 않는가는 바로 여러분에게 달려 있다. 하나님의 종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고 하나님의 빛이 있으며 형제자매들 속에는 이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협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러므로 이 점에서 여러분은 반드시 자신을 내맡겨야 한다. 여러분 자신과 여러분의 모든 것을 내맡김으로 하나님의 요구에 부응해야 한다.
내맡기는 것은 전적으로 재물만을 중히 여겨서 그것을 내맡기라는 것이 아니라 특별히 여러분 자신을 내맡기라는 것이다. 만일 모든 형제자매들이 다 자신을 내맡기고 전체가 협력하고 훈련한다면 문제가 없다. 1940년부터 43년까지만 해도 우리는 동역과 훈련에 대하여 그다지 분명하지 않았다. 오늘 우리는 각 방면에 동역이 있어야 하고 각 방면에서 훈련이 필요함을 본다. 어제 저녁 나는 뒤에 남아서 복음 전파와 헌신에서 동역이 필요할 뿐 아니라 직업에 있어서도 동역이 필요함을 보았다. 그러므로 내맡기는 것은 한 면으로 여러분 자신과 여러분이 소유한 물건들을 다 내맡겨 하나님의 요구에 부응하는 것이며 다른 한 면으로 여러분이 자신을 교회에 내맡겨 교회의 안배와 동역과 훈련을 받는 것이다.

교회의 안배와 훈련을 받음

이전에 우리는 성령을 너무 신뢰하고 교회는 신뢰하지 않은 것 같았다. 과거에 우리는 늘 성령만을 강조했었다. 오늘 우리는 결코 사람으로 하여금 성령의 인도를 받지 않게 하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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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 아니라 형제자매들이 몸의 인도를 신뢰하게 하려는 것이다. 이십여 년 동안 많은 사람들이 성령의 인도를 들었지만 사실 그것은 다 문제가 있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몸 안의 인도에 자신을 내맡겨 인도를 받는 것이 보다 안전하다.
우리가 자신을 내맡긴 이후에는 자신의 각 방면에서 다 훈련이 필요하고 기도집회에서조차도 훈련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 기도하지만, 나중에는 모든 사람들이 이 사람은 너무 말이 많아서 싫고, 저 사람은 너무 생각을 사용하며, 또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부르는 것이 정확하지 않다는 등의 판단을 한다. 오늘 여러분이 자신을 내맡겼다면 자아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어떤 사람도 자아를 가지고서 여전히 교회 안에서 동역하고 봉사를 할 수 없다. 만일 자아가 존재한다면 교회 전체의 봉사는 어려워진다. 우리는 다 하나님이 교회를 통하여 자아를 파쇄하는 것을 받아들이기를 배워야 한다. 우리 많은 사람들이 수년간 추구하고 다루심을 받은 것은 바로 자아를 파쇄하기 위한 것이지만 여전히 자아는 파쇄되지 않았다. 그러나 여러분이 일단 자신을 교회 안에 두고 몸의 다룸을 받는다면 아주 쉽게 통과할 수 있으며 쉽게 파쇄될 것이다. 이렇게 할 때 당신은 기술 방면에서 좋은 준비가 있을 뿐 아니라 영성에 있어서도 실제적으로 온전케 됨을 얻을 것이다. 결코 틀릴 것을 두려워함으로 아무것도 감히 하지 못하고 훈련하지 못하는 데 빠지지 않아야 한다. 만일 틀린 것이 있다 해도 사무적인 일에서 약간의 잘못일 뿐이며 여러분의 영 안에서는 온전케 함을 받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기꺼이 훈련을 받고 다루심을 받고 배우기를 원하는 마음을 갖기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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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집 제62권 주의 회복 안의 성숙된 인도 (2) 제22장 산 위의 식양에 따라 교회 회복의 길을 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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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Nee 제3집 제62권

주의 회복 안의 성숙된 인도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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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1950년 홍콩에서의
집회 및 대화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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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장
산 위의 식양에 따라 교회 회복의 길을 감

 

 

 

 


시간 : 1950년 2월 17일, 금요일 저녁
장소 : 홍콩 구룡 좌돈도
설교자 : 니토셍, 이상수 형제님

니토셍 형제님 : 교회에 대한 주님의 명령은 ‘산 위의 식양’에 따라 건축하는 것이다. 교회는 반드시 산 위의 식양이 어떠한지를 보아야 하며, 하나님의 표준을 표준 삼아야 한다. 그럴 때 과거의 오류를 알 수 있다. 우리가 따라가야 할 교회의 상태는 대체 어떤 모양인가? 우리는 주님이 성경에서 정하신 그러한 영광스런 교회를 볼 때에 우리가 참으로 따라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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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하고 미치지 못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교회가 실패하는 원인

교회가 실패하는 근본적인 원인은 바로 교회가 그 자체의 낳고 기르는 필요를 채우지 못하는 데 있다. 교회의 변화는 단지 형제자매의 여행으로 인해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교회가 강할 때 유동하는 형제자매의 수는 감소되며, 교회가 약할 때 이러한 사람은 증가된다. 사업을 하는 사람은 경제의 동향과 화폐의 유통을 주시한다. 교회 역시 마찬가지로 형제자매들의 유동을 주의해야 한다. 만일 한 지방에 삼사백 명의 형제자매들이 있다면 교회는 잘 돌볼 수 없다. 일 년이 지난 후에 새로운 사람들이 들어오고 오래 된 사람들은 나가게 되는데, 이것은 교회의 손실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반드시 복음을 전함으로 새로운 사람을 얻을 수 있어야 하고 또한 이미 얻은 사람들을 온전케 해야 한다. 교회의 책임은 첫째로 사람을 구원시키는 것이고, 두 번째로는 사람을 온전케 하는 것이다. 만일 몇 개월 사이에 구원받고 새로 들어온 사람이 일백 명이고 나가버린 사람이 일백 명이라면, 이것은 교회의 큰 실패이다. 교회가 실패하는 원인은 아이를 낳고서 양육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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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역사의 법칙

만일 어떤 교회가 강하다면 자유자제로 통제할 수 있다. 즉, 죄인을 얼마나 얻든지 통제할 수 있다. 교회가 강하고자 한다면, 주님이 계시하신 산 위의 식양에 따라야 한다. 만일 주님이 계시하신 식양대로 따르지 않는다면, 사람을 구원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만일 교회가 주님이 주신 식양대로 따른다면, 올해에 오백 명을 증가시키고자 할 때 오백 명을 증가시킬 수 있고 일천 명을 증가시키고자 할 때 일천 명을 증가시킬 수 있다. 우리가 주님의 길을 간다면 삼백 명, 오백 명뿐 아니라 삼천 명, 오천 명을 구원시키는 것도 기이한 일이 아니다. 우리 가운데 있는 형제들이 주님을 부흥의 아들이라고 부를 수 있음을 인하여 주님께 감사한다. 실상, 주님이 우리에게 부흥의 아들이신지 아닌지는 우리가 그분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계시해 주신 법칙에 따라 사역하고 있는가의 여부에 달려 있다. 누구든지 주님의 역사의 법칙을 알고 있는 사람은 내 말에 동의할 것이다. 교회가 복음을 전할 때 성령의 법칙을 알고 성령의 법칙에 따라 사역한다면, 사람을 구원시키는 것은 문제가 아닐 것이다. 교회가 나타날 때 사람들은 구원받지 않을 수 없고 교회는 부흥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의 부흥의 길―전체의 봉사

이곳에 있는 우리는 늘 외국에서 파견된 사람들의 영향 곧 그들이 세운 선교회의 영향을 받아 하나님의 구원이 선교회 설립에 있거나 국외 선교회에 있다고 여긴다. 그러나 성경에는 근본적으로 선교회나 그러한 것을 파송한 예가 없다. 하나님이 발기하신 것은 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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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이다. 선교회는 사람이 발기한 것이며 고든(A. J. Gordon)이 강조한 것으로, 그는 사람들에게 선교회나 파송회 혹은 선교 조직을 시작해야 한다고 하였다. 선교회나 파송회 흑은 선교 조직은 다 특별한 한 무리 사람들로 복음 전하는 일을 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서 하나님은 한 길만을 가시며 오직 한 종류의 사람들 곧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보내어 복음을 전하게 하신다(마 28:19). 하나님이 구원하신 사람들은 다 그리스도인이다. 하나님이 교회에 주신 형제자매들은 다 동일하게 정욕과 죄악과 세상을 떨쳐 버려야 하며 또한 함께 복음을 전해야 한다. 하나님은 교회 안에 특별히 한 무리를 세워 모든 것을 버리고 그분을 따르며 복음을 전하게 하시고 다른 한 무리들은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신 적이 없다. 그러므로 오늘날 교회를 결코 두 종류의 사람들, 곧 완전히 헌신된 사람들과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들로 나눌 수가 없다. 온 교회에는 오직 한 종류의 그리스도인, 곧 절대적으로 헌신된 그리스도인밖에 있을 수 없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부흥의 길이다. 만일 교회가 이렇게 세워진다면, 음부의 문은 결코 대항할 수 없으며 죄인 또한 설자리가 없게 된다.
최근 이 몇 년 동안의 체험은 우리가 말한 것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한다. 각지 교회가 전체적으로 복음을 전한 결과 인수 증가는 모두 배의 단위로 증가했으며, 대북 한 지방의 경우에는 작년과 금년에 삼십 배나 증가가 있었다. 배수로 말할 수 있을 뿐 비율로는 말할 수 없다. 교회 전체의 봉사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크게 나타났지만 오히려 우리의 분량이 수용하기에 부족했다. 북부로부터 남부, 동부로부터 서부에 이르기까지 형제자매들은 스스로 모든 것을 드렸다고 말할 수 있다. 오늘 우리는 여러분에게 누구는 자신을 내맡겨야 하고 누구는 내맡길 필요가 없다고 말할 의사가 조금도 없다. 우리는 하나의 선을 그어 여러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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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무리의 그리스도인으로 나눌 의사가 없다. 주님이 우리에게 어려움이 없으시고 죄인에게서 완전히 통행하시기를 바란다. 주님이 교회 중에서 세상의 방해를 받지 않으시고 죄인에게서 죄악의 방해를 받지 않으시기를 원한다.

전체가 온전케 함을 받도록 내맡길 때
사역의 필요를 채울 수 있음

오늘 교회에는 두 종류의 사역이 있는데, 하나는 낳는 사역이고 하나는 계속 자라게 하는 사역이다. 이것은 한 면으로는 죄인을 얻고 한 면으로는 성도들을 온전케 하는 것이다.
우리는 재물을 내맡길 뿐 아니라 우리 자신을 내맡겨야 한다. 재물을 내놓는 것은 주님으로 우리를 통과하시게 하는 것일 뿐이다. 만일 주님이 올해 우리에게 일천 명을 주신다면 당신은 그들을 이끌어 기도하게 하고 성경을 읽게 하고 그들을 인도하여 떡을 떼게 할 방법이 있는가? 만일 전체의 봉사가 아니라면, 우리는 그들의 필요를 채울 길이 없다. 아마 기도집회는 악화될 것이고, 떡 떼는 집회는 엄숙하지 않을 것이며, 입을 열어야 할 사람은 말하지 않고 말하지 않아야 할 사람은 거듭 말하여 각 사람이 임의로 말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어떻게 봉사할 수 있는가? 우리는 반드시 봉사에 있어서 길을 가져야만 쉽게 새로운 사람을 얻을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재물을 내맡겨야 할 뿐 아니라 우리의 온 존재를 봉사에 드려야 한다. 오직 이렇게 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길을 얻으실 수 있고 죄인에게서 길을 얻으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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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하나의 비유를 들겠다. 교회는 마치 밀가루 반죽을 집어넣으면 익은 빵을 만들어 내는 큰 기계와 같아야 한다. 교회는 반드시 받아들이는 데 있어서 큰 용량―대량의 밀가루를 집어넣을 때 대량의 빵들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용량―을 예비해야 한다. 교회는 사람이 얼마나 오든지 다 수용할 수 있어야 하며 임시로 그들을 도울 사람을 찾아서는 안 된다. 상해의 빵 만드는 기계는 이곳보다 두 배는 커야만 그곳 사람들의 필요를 채울 수 있다. 교회는 또한 전체의 사람들이 봉사하여 필요를 채울 수 있도록 그들을 훈련시켜 온전케 해야 한다.
교회는 사람을 구원시킨 후에 구원받은 사람들을 다시 잃어버려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몇 명을 구원하고서 몇 개월이 지나면 그만큼 잃어버려 인수는 영원히 증가하지 않고 교회도 영원히 흥왕하지 않는다. 대북 교회의 장유랑 형제는 말하기를, 우리는 형제자매들을 훈련시켜 오천 명의 형제자매들이 오면 오천 명을 온전케 할 수 있고 오만 명이 오면 오만 명을 온전케 할 수 있을 정도에까지 이르러야 한다고 했다.
아마 어떤 사람은 우리 가운데 온 지 수 개월이 되었지만 아무것도 알지 못하며 또 우리 중에서도 아무도 그와 접촉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 교통이 있은 후에 우리가 즉시 이것을 할 수 있도록 안배할 수 있기 원한다.
십오륙 년 전에 나는 상해에서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전한 일이 있다. 그때 나는 하나의 예를 들어 말하기를 염려는 마치 집을 지을 때 벽돌들을 하나하나 전달하는 것과 같다고 했는데, 이제 이것을 약간 달리하여 응용해 보자. 예를 들어, 잡일꾼이 벽돌 스무 개를 가져다가 위로 하나하나 올려 주는데 중간에 있는 사람이 이어받아 제일 위에 있는 한 사람이 벽돌을 받게 한다 하자. 중간에 있는 사람에게는 이점이 있는데, 그것은 당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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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게 다섯 개를 주면 그는 다 위로 올려 줄 수 있고 그의 수중에 있는 다섯 개를 다 위로 올려 줄 수 있다는 것이다. 만일 중간에 있는 사람이 아래에서 올려 주는 벽돌을 위로 전달하지 못하거나 가장 위에 있는 사람이 중간에 있는 사람이 그에게 전달하는 것을 받지 못한다면, 중간에 있는 사람은 끊임없이 전달되어 오는 벽돌에 눌려 죽을 것이다. 만일 주님의 역사하심이 없다면, 당신은 여전히 ‘초신자를 온전케 하는 공과’를 그렇게 중요하게 느끼지 않을 것이다. 주님이 역사를 시작하실 때 교회는 계속하여 사람을 얻게 되고, 그때서야 비로소 당신은 초신자를 온전케 하는 것이 이렇게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갓 구원받은 형제자매들이 들어올 때 우리는 그들을 훈련하고 온전케 하여 그들로 어떻게 해야 할지를 알게 해야 한다. 이렇게 할 때 갓 들어와서 한 달밖에 되지 않은 사람도 삼사 개월이 지나게 되면 다음에 들어오는 사람을 대처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교회가 한 단계 한 단계 단계적으로 사람을 돌아본다면, 금년 1월에 구원받은 사람은 2월에 구원받은 사람을 돌볼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할 때 주님은 교회를 축복하셔서 교회로 끊임없이 성장하게 하실 것이며 또한 교회로 하여금 자란 사람을 온전케 할 수 있도록 축복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크게 교회 전체가 나와야 하며 이것은 지연될 수 없다고 소리쳐야 한다. 재물을 내맡기는 것은 다만 당신 자신을 내맡기는 그렇게 많은 일 중의 하나일 뿐이다. 우리는 재물을 내맡기는 일을 그렇게 크게 보지 않는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이것을 크게 보지 말기를 바란다. 나는 우리 전체가 모든 것을 내놓고 온전케 함을 받아 봉사할 수 있기를 원한다.
옛날에는 전쟁을 할 때 일대일로 싸웠는데, 그것은 유격전이다. 오늘날은 다르다. 작전에서는 전체의 기동력이 있는 전투를 강구해야 한다. 마치 오늘날 낙하산 부대가 하늘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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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하나 낙하하지만 그들은 개별적으로 작전을 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 함께 기동 작전을 벌이는 것과 같다. 나는 외국인이 내지에서 사역하는 것이 마치 유격전과 같다고 느껴졌다. 어떤 때는 한 쌍의 부부가 한 곳에서 삼사십 년간 사역을 하여 서너 사람을 얻는다. 그들은 그렇게 수고하지만 낙심하지 않는다. 우리는 기꺼이 고난받고자 하는 그들의 마음가짐을 매우 존중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의 방법대로 복음을 전할 수가 없는데, 이는 그것으로 부족하기 때문이다. 오늘 중국에는 낙하산 부대와 같은 이주가 있어야 한다. 해구(海口)와 같은 지방을 이용하여 우리의 훈련을 받은 형제들을 한 무리 한 무리씩 중국 서부로 보내야 한다. 나는 우리가 하나님의 이러한 움직임을 따라갈 때 복음이 중국 전체에 편만하게 퍼지는 데 어려움이 없을 것이라고 믿는다.

훈련받고 동역함으로 이주를 대비해야 함

이주할 형제자매들에게는 반드시 전문적인 기술이 있어야 한다. 교회의 이주는 사무적으로도 다방면의 안배가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형제자매들 전체가 먼저 직업적인 기술에 있어서와 복음을 전하는 일에 있어서 훈련을 받아야 한다. 마치 서커스단의 큰 코끼리가 원래는 아주 우둔하지만 훈련을 거친 후에는 춤을 추며 묘기를 보일 수 있는 것과 같다.
우리는 형제자매들이 직업 방면에서도 복음 전파를 위하여 동역할 수 있기를 원한다. 또한 사업 방면에서도 동역하여 이주하고 복음을 위하여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기 원한다. 학생 형제자매들 또한 학업 방면에서 동역하여 지금은 복음을 위해 배우고 장래에는 이주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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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자립할 수 있기 원한다. 이번에 익양으로 이주하기 위해 등록한 형제들과 같이 어떤 이는 학문이 좋고 영성도 좋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들보다는 오히려 시멘트공이 유용하다. 학문이 있어도 자립할 수 없다면 이주에 있어서 어려움이 된다. 그러나 시멘트 공은 자립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이주에 있어서 아주 유용하다.
이주를 위하여 반드시 배워야 할 몇 가지가 있다. 먼저, 복음을 위하여 이주하는 형제자매들은 반드시 전문적인 기술을 배워야 한다. 아마 여러분은 이렇게 배우는 것이 아주 번거롭다고 여길지 모르겠지만, 여러분은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욱 복이 있다”고 한 주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행 20:35). 그러므로 우리는 주는 사람이 되길 배워야 하며 반드시 일을 하여 자신의 생활을 위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을 공급할 수 있어야 한다. 두 번째로, 형제자매들은 반드시 일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여러분이 홍콩에서 일을 할 수 있었다면, 중경에 가서도 일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교회에서 일을 하는 훈련을 받아 복음을 전하는 비결을 배우고 사람을 구원시키는 것을 배워야 한다. 세 번째로, 여러분은 교회 안에서 반드시 성경을 알기를 배워야 한다. 이번에 형제자매들이 자신을 내맡길 때, 우리는 온 교회를 학교로 전환하고 또 병원의 진료소로 전환하여 여러분에게 사람을 진단하는 것을 배우고 실습할 수 있도록 했다. 우리의 길에 대해 이미 들은 적이 있는 사람들은 갈수록 이 길에 대하여 더 분명해지기 바란다. 오직 이렇게 할 때만이 복음을 밖으로 보낼 수 있다.
오늘 이후로 홍콩 교회의 복음과 사무와 성경 연구 등의 각 방면의 훈련은 상수 형제가 인도할 것이다. 여러분은 실로 몸이 연약하여 따라갈 수 없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느슨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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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른 생활을 해서는 안 된다. 여러분 개개인은 다 깨어 있어야 하며 적극적으로 긴밀하게 따라가야 한다. 홍콩 교회가 하나님의 군대와 같고 군사적인 움직임이 있는 교회가 되기를 바라며(민 1-2장 참조), 주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기를 구한다.

대만 사역에 관한 교통

이상수 형제님 : 지난 반년의 시간 동안 나는 계속하여 대만에 남아 있었다. 이 반년 동안 구원받은 형제자매들 중에는 구십 퍼센트 이상이 구원받기 전에 한 번도 복음을 들어 보지 못했고 한 번도 기독교와 관계를 맺어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있다. 대북에서는 이미 천이백여 명이 구원을 받았다. 그러나 그곳에 한 가지 문제가 있는데, 그것은 새로 구원받은 사람들이 아직 봉사의 입장과 길을 모른다는 것이다.
고웅에는 현재 삼백여 명의 형제자매들이 있는데, 작년 이맘때에 함께 덕을 떼던 사람은 십여 명밖에 되지 않았다. 고웅에는 소위 사역하는 형제자매들이 전혀 없었으며 형제자매들은 다 직업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시간이 없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자기의 몫을 내놓고 훈련을 받았으며, 그 결과 구원받은 사람들이 마치 조수와 같이 흘러 들어왔다. 이번 신춘 복음 집회 때 구원받고 이름을 기록한 사람은 육백여 명이나 되며 다 젊은 형제자매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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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회복의 길을 감―전체의 봉사

초대 교회의 상태로 돌아감

교회는 이 땅에서 얼마나 되었는가? 거의 이천 년이 되었다. 얼마나 많은 지방에 걸쳐 있는가? 거의 전세계에 편만하다고 말할 수 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지나갔는가? 천천이요 만만이다. 교회가 이렇게 오래되고, 이렇게 확장되고,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여러분은 교회가 처음의 모습에서 바뀌었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우리가 산 물건은 다 원래의 상태를 지닌 것이어야 한다. 여러분은 오늘날의 교회가 이미 모양이 바뀐 것을 알고 있는가? 만일 당신이 어떤 물건을 산다면, 당신은 원래의 모양을 한 것을 사겠는가, 아니면 개조된 것을 사겠는가? 모든 사람이 다 원래의 모양을 한 것을 원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나는 우리가 이미 모습이 바뀌어진 교회가 아닌 초대 교회의 상태를 원한다고 믿는다. 교회는 이 이천 년 동안 이미 하락했고, 오늘 우리가 보고 있는 교회는 초대 교회와 다르다. 오늘 우리의 입장은 회복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하여 느낌이 없을 수 없고 우리의 물음표는 클수록 좋다. 오늘 우리가 각 방면에서 오늘날의 기독교를 볼 때, 이것이 초대 교회인지에 대해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오늘날의 사회 가운데 우리에게 가장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이 바로 기독교이다. 여러분이 듣는 것은 다 기독교에 대한 사람들의 인상이다.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는 사람을 인도하여 구원시킨 후 그들을 기독교에 가입시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만일 단지 기독교에 가입시키는 것이라면 문제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물음표는 크면 클수록 좋다. 만일 우리가 물음표를 갖는다면 우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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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회복의 길을 보게 될 것이다.
우리는 성령뿐 아니라 영 안에서도 느낄 수 있다. 특별히 1940년부터(1939년부터라고 말할 수도 있음) 시작하여 오늘까지 마지막 이십 년 동안 교회 안에서 걸어가셨던 하나님의 회복의 길은 최고점에 이르렀는데, 그것은 마로 교회 전체가 일어나 봉사하는 것이며 전체 형제자매들이 자신을 드려 훈련을 받고 그런 후에 한 무리 한 무리씩 이주해 나가는 것이다 이렇게 할 때,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서 신속하게 길을 가실 수 있다. 이 오륙 년 동안 나에게는 질병을 통한 파쇄가 있었고 약간의 환경적인 어려움이 있었으며 사람들의 반대도 있었다. 이런 것들은 다 나로 하여금 생명에 있어서 좋은 배움을 가져다주었다. 그러므로 영 안에서, 하나님과의 교통 안에서의 느낌에 따르면, 우리는 사람을 훈련시켜야 하며 외적으로는 동역을 해야 하고 내적으로는 생명에 있어서 온전케 됨을 입어야 한다. 안으로는 복음을 전파하고 밖으로는 이주를 위한 움직임을 시작해야 한다. 이것들은 모두 대 원칙들이다.

믿는 이들의 영 안의 요구를 채워야 함

이상에서 말한 것은 모두 대원칙들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시작하는가? 반드시 세밀한 부분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것은 양면에서 말할 수 있다. 한 지방의 한 교회는 형제자매들 안의 요구를 채울 수 있으며 또한 밖에서 온 사람들의 필요를 채울 수 있다. 만일 우리가 형제자매들 안에 있는 필요를 채우지 못한다면, 우리에게는 문제가 있게 된다. 각 형제자매들이 교회 안에 들어올 때 교회는 반드시 그들의 필요를 공급할 수 있어야 한다. 만일 공급할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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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다면 틀림없이 문제가 있게 된다. 우리가 표면적으로는 잘못된 부분이 없을 수 있지만, 그러나 만일 형제자매들의 필요를 채워 주지 못한다면 착오가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전 세대와 다르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 또한 다르다. 우리가 보고 맛보고 들은 것은 모두 전 세대의 사람들이 보고 맛보고 들어 보지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실로 깊은 속에서부터 하나님을 경배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너무나 큰 은혜를 주셔서 우리로 이것을 보게 하졌고 또한 이렇게 많은 사람들 중에서 특별히 우리에게만 보이심으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그분의 길을 갈 수 있도록 격려하셨기 때문이다. 형제자매들 안의 필요는 바로 하나님이 신속하게 회복의 길을 가기 원하신다는 것을 반증한다. 나는 이것들이 바로 귀한 것이라고 느낀다. 현재 청도, 연대, 북경, 상해 등지에서 모두 이러하다.
이러한 연고로 주님을 앙망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아직 전체가 하나님께 얻어진 바 되지 않았고 우리 개인이 아직 그다지 하나님께 길을 내드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교회 가운데 많은 형제자매들 안에 이러한 요구가 있지만 우리는 공급하지 못했다. 우리는 이 한 방면에서 절대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전체의 봉사와 이주는 공허한 말에 그칠 뿐이다.

전체가 내맡기어 하나님의 요구에 부응해야 함

전체 형제자매들 가운데 단 한 명이라도 기꺼이 하나님의 요구에 부응하려 하지 않고 원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이 전체를 사용하실 수 없으며 교회 가운데서 길을 얻으실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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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오늘 이 시대에서 신속하게 회복의 길을 가기 원하시지만, 최소한의 요구는 교회 전체가 다 일어나 섬기고 이주하며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길이 열리는가 열리지 않는가는 바로 여러분에게 달려 있다. 하나님의 종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고 하나님의 빛이 있으며 형제자매들 속에는 이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협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러므로 이 점에서 여러분은 반드시 자신을 내맡겨야 한다. 여러분 자신과 여러분의 모든 것을 내맡김으로 하나님의 요구에 부응해야 한다.
내맡기는 것은 전적으로 재물만을 중히 여겨서 그것을 내맡기라는 것이 아니라 특별히 여러분 자신을 내맡기라는 것이다. 만일 모든 형제자매들이 다 자신을 내맡기고 전체가 협력하고 훈련한다면 문제가 없다. 1940년부터 43년까지만 해도 우리는 동역과 훈련에 대하여 그다지 분명하지 않았다. 오늘 우리는 각 방면에 동역이 있어야 하고 각 방면에서 훈련이 필요함을 본다. 어제 저녁 나는 뒤에 남아서 복음 전파와 헌신에서 동역이 필요할 뿐 아니라 직업에 있어서도 동역이 필요함을 보았다. 그러므로 내맡기는 것은 한 면으로 여러분 자신과 여러분이 소유한 물건들을 다 내맡겨 하나님의 요구에 부응하는 것이며 다른 한 면으로 여러분이 자신을 교회에 내맡겨 교회의 안배와 동역과 훈련을 받는 것이다.

교회의 안배와 훈련을 받음

이전에 우리는 성령을 너무 신뢰하고 교회는 신뢰하지 않은 것 같았다. 과거에 우리는 늘 성령만을 강조했었다. 오늘 우리는 결코 사람으로 하여금 성령의 인도를 받지 않게 하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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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 아니라 형제자매들이 몸의 인도를 신뢰하게 하려는 것이다. 이십여 년 동안 많은 사람들이 성령의 인도를 들었지만 사실 그것은 다 문제가 있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몸 안의 인도에 자신을 내맡겨 인도를 받는 것이 보다 안전하다.
우리가 자신을 내맡긴 이후에는 자신의 각 방면에서 다 훈련이 필요하고 기도집회에서조차도 훈련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 기도하지만, 나중에는 모든 사람들이 이 사람은 너무 말이 많아서 싫고, 저 사람은 너무 생각을 사용하며, 또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부르는 것이 정확하지 않다는 등의 판단을 한다. 오늘 여러분이 자신을 내맡겼다면 자아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어떤 사람도 자아를 가지고서 여전히 교회 안에서 동역하고 봉사를 할 수 없다. 만일 자아가 존재한다면 교회 전체의 봉사는 어려워진다. 우리는 다 하나님이 교회를 통하여 자아를 파쇄하는 것을 받아들이기를 배워야 한다. 우리 많은 사람들이 수년간 추구하고 다루심을 받은 것은 바로 자아를 파쇄하기 위한 것이지만 여전히 자아는 파쇄되지 않았다. 그러나 여러분이 일단 자신을 교회 안에 두고 몸의 다룸을 받는다면 아주 쉽게 통과할 수 있으며 쉽게 파쇄될 것이다. 이렇게 할 때 당신은 기술 방면에서 좋은 준비가 있을 뿐 아니라 영성에 있어서도 실제적으로 온전케 됨을 얻을 것이다. 결코 틀릴 것을 두려워함으로 아무것도 감히 하지 못하고 훈련하지 못하는 데 빠지지 않아야 한다. 만일 틀린 것이 있다 해도 사무적인 일에서 약간의 잘못일 뿐이며 여러분의 영 안에서는 온전케 함을 받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기꺼이 훈련을 받고 다루심을 받고 배우기를 원하는 마음을 갖기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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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집 제61권 주의 회복 안의 성숙된 인도 (1) 제21장 봉사에 관한 교통(2)
Ezra Zion , 2013-04-05 , 조회 (80) , 추천 (0) , 반대 (0), 스크랩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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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장
봉사에 관한 교통(2)

 

 

 

 


시간 : 1950년 2월 16일, 목요일 저녁
장소 : 홍콩 구룡 좌돈도

오늘 저녁 우리가 부른 찬송가 149장(한국복음서원 찬송가 333장)은 헌신의 능력이 하나님의 영광의 나타나심에 있다고 말한다. 우리가 다 알듯이 죄는 악한 것이요 세상은 매력적인 것이다. 우리 스스로 세상을 벗어나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주님의 영광은 우리를 세상에서 벗어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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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방에서 주의해야 할 사항들

심방에 관하여 나는 몇 가지를 더 언급하겠다.

1. 한담하지 않음

심방할 때 가장 좋은 것은 영적인 방면의 일만을 이야기하고 함부로 말하지 않는 것이다. 특별히 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더욱 조심해야 한다. 집에서 함부로 말하는 것이 좋지 못할진대, 하물며 교회를 대표하여 나가서 심방하는 것이겠는가! 그러므로 당신은 심방하러 갈 때 반드시 교회의 청결함을 대표해야 한다. 어떠한 트집을 잡는 것이나 비평하는 것이나 훼방하는 것 등이 발견되면 즉시 처리해야 한다. 당신이 심방하는 목적은 남을 헐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온전케 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함부로 이야기하지 말고, 옳고 그름을 말함으로 변론을 일으키지 말라.

2. 교사의 위치에 서지 말라

복음의 심방에 있어서 당신은 여러 종류의 사람을 만나게 될 것이다. 비록 그들이 이름을 적고 복음에 대해 호감을 표했지만, 그러나 그들로 믿게 하는 데에는 많은 어려움이 남아 있다. 심방하러 갈 때 당신은 배우는 태도를 가져야지 교사로서 심방하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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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만일 교사의 태도를 가지고 간다면, 결과가 좋지 않을 것이다. 사람이 구원받기 위해서는 그렇게 많은 교리가 필요치 않다. 한 알의 밀이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지만, 씨앗은 오직 한 알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람을 구원시키는 교리는 그렇게 많이 필요 없고, 뿌린 씨가 생명이라면 싹이 나고 자랄 수 있다. 어떤 사람은 한 구절 혹은 반 구절의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도 계속 사람들을 주님께로 이끌 수 있다. 당신이 복음 전하는 것은 많은 교리를 이해하는 데 있지 않고 사람들에게 생명을 줄 수 있는가에 있다.

3. 먼저 간증할 수 있음

내 제의로는, 처음 심방할 때 당신은 당신의 영적인 나이와 상태를 그에게 알려 줄 수 있다. 당신은 간증하면서, “저는 당신과 별 차이가 없습니다. 비록 제가 주님을 믿은 지 여러 해 되었지만, 갓 믿었을 때에는 당신과 똑같이 어리둥절했고, 지금에서야 봉사를 배웁니다. 제가 다른 것은 잘 알지 못해도 한두 가지 분명히 아는 것은 나의 죄가 사함받았고, 주님을 믿은 후에 기쁨과 평강이 있다는 것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 당신이 이렇게 간증할 때, 그의 속이 편치 않음을 느끼고 당신이 얻은 기쁨을 그도 얻고자 하게 될 것이다. 그가 흑암 가운데 있을 때, 그는 죄를 기뻐하며 귀히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일단 빛 가운데 올 때, 그는 매우 고통스럽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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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머리를 만지지 말고 마음을 만짐

그런 다음 당신은 “교회는 당신이 주님을 믿을 뜻이 있어서 이름을 적고 표시한 것을 알고 즉시 당신을 찾아보도록 저를 보냈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그의 마음을 만질 것이다. 우리는 그를 접촉할 기회를 얻어서 그의 머리를 만질 것이 아니라 그의 마음을 만질 수 있도록 방법을 강구해 내야 한다. 마음이 주님께 돌아설 때, 머리의 문제는 자연히 해결된다. 심방은 교회가 그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고, 그의 영혼에 대해 흥미를 느낀다는 인상을 주어야 한다. 만일 그가 어떤 질문을 할 경우, 당신은 지혜롭게 당신도 많이 모른다고 표명할 수 있다. 어찌하든지 그의 생각의 문제를 중요시하지 말고, 그의 마음과 그의 영의 반응을 주의해야 한다.

5. 도움을 주지 못할 때 합당한 사람이 가도록 청하라

당신은 및 차례 심방한 후에 그를 이끌어 줄 수 있는지를 주의 깊게 지켜 보라. 만일 당신이 할 수 없다면, 책임 형제에게 다른 한두 사람을 보내도록 청할 수 있다. 그래도 안 된다면 책임 형제가 직접 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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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사의 직책

오늘 저녁 나는 집사의 직책과 봉사를 볼 것이다. 집사 형제가 하는 일은 장로 형제들이 하는 일과 정반대이다. 장로들은 일을 하는 데 중점이 있지 않고 눈으로 감독하는 것이며, 집사는 손으로 일을 하고 형제자매들을 데리고 이끌어 주면서 하는 것이다. ‘집사’라는 단어는 헬라어 원문에서 디아코노스(diakonos)로서 섬기는 자라는 뜻이고, 영어에서는 종(servant), 일꾼(minister), 집사(deacon)로 번역하여 종이 되어 시중든다는 뜻이다. 집사 형제는 형제자매들이 일하도록 어떤 구상을 내는 사람이 아니라, 장로들의 안배 하에 형제자매들이 함께 일하도록 많이 이끌어 주는 사람이다. 교회가 강할 때, 장로들은 감독할 줄 알고 집사는 일할 줄 안다. 집사는 다른 형제자매들보다 더 많이 일을 해야 한다. 장로가 주를 섬기는 것의 기본 원칙은 감독하는 것이지만, 집사로서 주님을 섬기는 것의 기본 원칙은 일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집사들은 장로들의 뜻을 이해해야 하는데, 이것은 바로 장로들로부터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의 관점에서 볼 때, 모든 일은 즉각적으로 할 것이 아니라 먼저 좋은 안배가 있어야 한다. 집사는 일을 당할 때 즉시 가서 할 것이 아니라, 주님 앞에서 자세히 생각해 보고 잘 고려해 보아야 한다. 또한 그러한 일을 혼자 할 것이 아니라 형제자매들이 옆에서 배우면서 하도록 해야 한다.
주님이 갈릴리에서 떡을 오천 명에게 나누어 주실 때, 제자들더러 모든 회중을 오십 명, 백 명씩 나누어 앉게 하라고 하셨는데, 당시에는 누구도 왜 그렇게 하라고 했는지 알지 못했다. 오순절 날이 이를 때, 삼천 명이 구원을 받았으며 또한 그들에게 침례를 베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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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제자들이 평소에 주님의 훈련을 받지 않았다면, 이러한 큰 분위기를 당해 보지 못했기 때문에 어떻게 할 줄 몰랐을 것이다. 그들이 백쉰세 마리의 물고기도 감당할 수 없었을진대(요 21:6, 11), 하물며 삼천 명이겠는가? 더욱이 사람은 물고기보다 다루기가 더 어렵다. 그러므로 사람이 주님을 믿은 후에 그냥 그를 집에 돌아가게 하고 아무 일 없었던 것같이 할 수 없다. 복음서에서 주님은 제자들로 하여금 일에 대해 배우게 하셨다. 주님은 두 차례 사람들을 떡으로 먹이셨는데 한 번은 사천 명을 먹이고 한 번은 오천 명을 먹이셨다(막 6:30-44, 8:1-9). 주님은 항상 먼저 회중으로 하여금 앉게 하셨으며 오십 명이나 백 명을 한 무리로 삼으셨다. 만일 서 있었다면 문제가 있었을 것인데, 이는 사람은 살아서 움직이므로 오십 명이 칠십오 명으로 변하고 백 명이 또 칠십오 명으로 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앉으면 움직이기 어렵고 고정되기 때문에 함부로 이동할 수 없다. 아마 제자들은 삼천 명을 삼십 무리로 나누었을 것이다. 그렇게 할 때 한 번에 삼천 명을 먹이기 쉬웠을 것이다. 이렇게 하면 떡을 떼거나 침례를 베풀 때 혼란스럽지 않고 질서가 있을 것이다.

집사의 일하는 방법

1. 실제적인 배움(연습)을 가짐

주님이 제자들을 이끌어 일을 처리하시는 데에서 우리는 일을 하는데 세 가지 기본 단계 혹은 기본 원리가 있음을 볼 수 있다. 첫째는 인도하는 형제자매들이 실지로 연습을 해보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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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다. 주님은 실제적인 연습을 믿었기 때문에 먼저 제자들을 일하도록 이끄셨다. 사도행전에서 우리는 믿는 이들이 모든 것을 공동 소유하여 그들의 필요한 것을 따라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는 것을 본다. 사실 이것은 주 예수님이 먼저 제자들을 이끌어 하신 일이고, 나중에 제자들은 이것을 따라 했던 것이다. 집사는 결코 번거로운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먼저 앞장서서 형제자매들에게 어떻게 하는가를 보여 주어야 한다. 상해 교회가 의자를 배열하는 것에 대해 말한다면, 때로는 사람들이 들어가서 앉을 수 없게 배열했다. 의자를 넓게 많이 배열하는 데에는 비결이 있다. 이것은 한 번에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집사들이 지속적으로 형제자매들을 이끌고 실지로 연습을 해야 한다.
내가 사람들을 위해 결혼 주례를 해 주는 데에는 하나의 조건이 있다. 그것은 바로 결혼 전날 관계된 모든 사람들이 다 와서 잘 될 때까지 미리 예행 연습을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려면 당신은 다른 사람에게 주례를 부탁해야 한다. 나는 오지 않을 것이다. 예행 연습이 있어야만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를 알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결혼 행진곡이 다섯 번 연주되었는데도 신랑은 신부의 손을 잡고 들어오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이방인에게 함부로 행한다는 인상을 주고 우스운 광경을 보여 줄 것이다. 킹스턴 양(Miss Kingston)은 결혼 집회가 이렇게 질서 있는 것을 보고서 나에게, “제 나이가 어리지 않은 것이 다행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나는 반드시 문덕리에 와서 당신에게 주례를 부탁했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렇게 하는 것은 옳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지럽게 되고, 주님을 영화롭게 하지 못하게 됩니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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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방법을 찾아내야 함

일하는 두 번째 단계는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다. 나는 다시 주님이 떡을 나누신 일을 예로 들겠다. 주님은 제자들더러 모든 사람에게 가서 “와서 떡을 먹으라”고 말하라고 명하지 않으셨다. 주님은 사람들이 오기를 기다린 다음에야 방법을 생각해 내지 않으셨다. 또한 한 사람씩 나와서 떡을 가져가라고 하지도 않으셨다. 아마 그렇게 했다면 첫 번째 사람은 삼십 초를 사용하고, 두 번째 사람은 일 분, 세 번째 사람은 일 분 삼십 초, 네 번째 사람은 이 분, 마지막 사람은 그곳에서 네댓 시간을 서 있어야만 떡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주님의 방법은 여러 그룹으로 나누는 것이었으며, 백 명을 한 그룹으로 하여 오천 명을 오십 그룹으로 만들었다. 그분은 떡을 열두 제자에게 나누어 주시고, 다시 열두 제자에 의해 각 그룹의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이것이 바로 방법을 찾아내어 일하는 것이다.

3. 사람에게 일을 안배해 주고 분담하게 함

일을 하는 데에는 방법이 필요하고, 사람에 대하여는 안배가 있어야 하며, 형제자매들 중 한 사람도 노는 사람이 없이 일하도록 분담해야 한다. 주님이 떡을 나누실 때 열두 제자는 다 그분 앞에 나왔다. 주님이 떡을 떼어 열두 사람에게 나누어 주셨을 때, 삼십 그룹과 오십 그룹의 사람들은 다 섬세하게 돌봄을 받을 수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집사도 수중의 일을 분담하여 사람들이 하도록 안배할 줄 알아야 한다. 이 일은 이 사람에게 하도록 맡기고, 저 일은 저 사람에게 하도록 맡길 때, 결국 아주 빨리 일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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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일에 연습과 방법과 안배가 있다면, 교회 안의 일들이 혼란스럽지 않을 것이다. 장로들은 각 지역의 형제들이 이렇게 하도록 도와주어야 하고, 결코 일을 무모하게 하게 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결과가 좋지 않을 것이고, 주님을 영화롭게 하지 못할 것이다. 교회 안에서 집사의 봉사는 언제나 신중해야 한다. 교회는 형제자매들의 실험실이 되어서는 안 되고 하나님의 집이 되어야 한다. 여러분이 이러한 일들을 내가 말한 대로 훈련한다면, 아주 좋은 결과를 얻을 것이다. 만일 여러분이 복음에 대해 좋은 배움을 갖는다면, 이주하는 것이 매우 유용할 것이다. 자기 지방 교회에서 일을 처리하는 데 있어서 유용할 것이다. 나는 홍콩에서 백 명이 중경으로 이주할 것을 매우 희망한다. 중경은 복음의 전략 지대이다. 복음을 반드시 전파하기를 배워야 하고, 반드시 일할 줄을 알아야 한다. 자신이 할 뿐 아니라 더욱 형제자매들이 하도록 이끌어 주어야 하며, 하나님이 하시는 것과 같이 해야 한다.
여러분은 이렇게 자신을 연단시키고 훈련해야 한다. 한때의 열심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매일 인내로써 배워야 한다. 홍콩의 형제자매들이 다른 지방보다 더 잘할 수 있기 바라고, 하루하루를 유용하게 사용하여 하나님 앞에서 새로운 배움과 얻음이 있기 바란다. 우리의 신학은 다른 사람의 신학과 다르다. 우리는 하나님의 학교 안에 있고 교회 안에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라는 것을 배우지만, 그들은 교리와 사무적인 것에서만 온전케 함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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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에 대한 집사의 안배

1. 돈을 관리함

집사의 일은 사도행전 6장에서 처음 언급되었다. 거기에서는 공궤하는 문제가 언급되었기 때문에, 사도들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음식을 관리하는 것이 원래 합당치 않고, 믿는 이들은 마땅히 그들 가운데서 좋은 명성이 있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 일곱을 택하여 이 일을 관리하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1-6절). 거기에는 음식을 관리하는 일곱 집사가 있었고, 사도들로서 일했던 형제들은 기도하고 전도하는 것에만 전무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집사가 사무를 안배하는 책임을 진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음식을 관리하는 것은 곧 재물을 관리하는 것으로, 각 사람에게 부족함이 없도록 각 사람의 쓸 것을 나누어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 안의 집사의 일은 첫 번째로 재물을 관리하는 것이다. 우리는 두 형제로 재정을 관리하게 하였고, 따로 두 형제로 장부를 관리하게 하였다.
재정을 관리하는 것은 여러분 자신의 소견대로 할 수 없고, 장로의 감독 아래 합당하게 처리해야 한다. 특별한 지출에서 여러분은 스스로 주장할 수 없고, 장로들이 결정하게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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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재학중인 형제자매들을 돌봄

젊은 형제자매들의 학업 또한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여러분은 그들의 학업 문제를 돌보는 것을 배워야 한다. 모세가 애굽의 모든 학문을 배웠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산 위에서의 식양’(행 7:20-22, 출 25:8-9)을 계시해 주실 수 있었다. 그러나 만일 그의 모친이 어려서부터 가르치지 않았다면, 아마 그는 자신이 하나님께 속한 백성이요 하나님의 약속을 가진 백성임을 몰랐을 것이다(출 2:1-17). 그러므로 우리는 여섯 집사들에게 특별히 이 책임을 맡도록 안배하고, 또 두 자매로 이 일을 돕게 하였다.
그다음으로, 만일 가능하다면 천주교 학교에서 공부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주님의 명령은 그들 가운데서 나와서 그들과 분별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일에 있어서 구애받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지 말라. 설령 한 학기가 남았을지라도, 힘을 다하여 그가 전학할 수 있도록 도우라.
셋째로, 한 형제나 자매 홀로 공부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최소한 두 명, 가장 좋은 것은 대여섯 명 이상이 함께 있어야 한다. 한 사람을 한 학교에 두는 것은 그의 머리를 사자 입에 넣는 것과 같다. 사자로 하여금 입을 다물게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모든 형제자매들이 다니엘과 같다고 생각지 말라. 당신이 우물에 빠지지 않으려면 우물가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편이 낫다. 결코 우물가에서 맴돌지 말라.
넷째로, 여러분 집사들은 그들이 각 방면에서 온전케 되도록 돌봐 주어야 한다. 그로브스 여사와 같이 그들이 학교에서 어떻게 복음을 전하고 있으며, 어떻게 성경을 읽고 있는지를 물어야 한다. 또한 여러분은 그들이 어떻게 일을 해야 하는지를 훈련시키고 그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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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신하고자 하는 마음을 키워 주어야 한다. 그럴 때 그들이 학교에서 복음을 보편적으로 전파할 수 있다. 설령, 복음을 인해 반년 더 공부한다 해도 무엇이 나쁘겠는가? 공부하는 것은 복음을 전하기 위한 것인데, 반년 일찍 졸업하든 늦게 졸업하든 무슨 관계가 있는가? 여러분은 그들로 하여금 이러한 웅지를 갖게 해야 한다.
여러분 젊은 형제자매들은 또한 성실히 공부해야 한다. 만일 여러분이 공부를 잘하지 않는다면, 부모님들은 말할 것이다. 여러분이 어떤 일을 하든지, 그 목적은 복음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공부하는 것뿐만 아니라 친구를 사귀는 목적도 복음을 위해야 한다. 여러분은 친구와 동급생들의 이름을 기도 수첩에 적고 날마다 그들을 위해 중보 기도해야 한다. 여러분은 특별히 이것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데, 가령 한두 달 동안은 특정한 두 사람만을 주의하고 매일 그들을 위해 기도하며, 기회가 될 때 복음 집회에 참석하도록 그들을 이끌어 주어야 한다. 만일 여러분이 이것에 충실하다면, 학교 하나하나를 빨리 얻을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여러분은 시간을 들여 기도하고 추구해야 한다. 이러한 일에서 결코 함부로 하지 말아야 한다.
여러분 장로 된 형제들은 집사들을 감독해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 교회의 일이 많다고 해서 결코 일에 분주하고 사람들에 대한 온전케 함과 돌봄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범사에 하나님 앞에서 잘 기도해 보고 고려해 보아야 한다. 오늘부터 홍콩 교회가 마음을 같이하여 복음을 전파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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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하는 형제자매들에 관하여

많은 형제자매들이 그들의 모든 소유를 다 내놓았기 때문에, 장래 그들에게 부족함이 있을 때 우리는 또한 그들을 돌보아야 한다. 이들이 내맡긴 것들은 이주하는 데 도움과 유익이 된다. 우리가 한 무리를 익양에 보내는 데에만도 많은 금전이 사용됐다. 물건을 팔면 별로 돈이 되지 않고, 그쪽에 가서 똑같은 물건을 살 때 오히려 많은 돈이 들게 된다. 우리는 알을 취하기 위해 닭을 잡을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형제자매들은 여전히 사업을 잘해야 한다. 그러나 사람은 여전히 남아 있으며 돈은 남아 있지 않을 정도로 일해야 한다. 바꾸어 말하면, 사람은 주님께 얻은 바 되어야 하고, 돈은 밖으로 내보내야 한다. 세계 각지의 통계는 복음에 물질을 드린 만큼 구원받은 사람이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형제자매들이 잘 경영하여 얻은 돈을 헌금함으로써 더 많은 사람을 얻을 수 있기 바란다.
현재 열한 명의 형제들이 사업을 잘하고 있다. 여러분은 계속 잘 경영하여 얻은 수익금을 여러분이 쓸 것 외에는 최선을 다해 내맡기라. 그럴 때, 우리는 장래 사람들이 이주하는 것을 돕는 데 그 돈을 사용할 수 있다. 현재 청도에 이주할 사람은 있지만, 이주하는 데 필요한 충분한 재력이 없다. 우리는 이곳에서 이러한 일을 돕기 바란다. 이번에 내맡긴 직장인 형제들에 대해, 여러분은 합당한 안배를 해 주어야 한다. 우리의 직업은 복음을 위한 것이다.
사업의 목적은 돈을 벌기 위한 것이고, 돈이 있을 때 그것을 복음을 위해 내보낼 수 있다. 수입을 도모하기 위해 직업을 갖고 있는 형제들은 이제 복음의 기회를 도모하기 위해 돈을 벌어야 한다. 학생들이 공부하는 것도 복음을 위한 것이요, 직장을 다니는 것도 생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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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한 것이자 또한 복음을 위한 것이다. 어떤 사업을 하든지 우리는 잘 기도할 필요가 있다. 주님이 우리의 안배 외에 다른 안배를 하시기를 앙망한다. 우리는 단 마음으로 복음을 위해 직업을 가져야 한다.



이주에 유익한 직업을 위해 기술을 배움

이주하는 데에는 훈련이 필요하다. 형제자매들은 성경을 읽을 줄 알고, 일을 처리할 줄 알고, 복음을 전할 줄 알아야 하되, 특별히 젊은 형제들은 네 번째 일을 갖춰야 하는데, 그것은 바로 모든 사람이 다 직업을 위한 기술을 가져야 하고 또한 그 직업은 오늘날 그 지방 정부의 필요에 알맞은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당신은 일반인을 내륙으로 이사오게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가 내륙 정부의 직업 요구에 부합되지 않고 내륙 교회들이 그를 공급할 수도 없다면, 오히려 이것은 어려움이 되기 때문이다. 만일 당신이 특별한 기술을 가지고 있다면, 내륙에 가서 자기가 먹고 살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을 먹여 살려야 한다. 이주하는 사람은 조금이나마 성경 진리를 알아야 하고, 일을 처리할 줄 알아야 하고, 복음 전할 줄도 알아야 하고, 생계를 위해 직업을 가질 줄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이번에 상해에서 또 한 무리가 익양으로 이주하는 데 있어서 이백 명이 등록하였는데, 결국 우리는 삼십 명만 택하여 보냈다. 거기에서는 몇 개월 동안 하루도 용돈이 없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기술을 가지고서 스스로 먹고 살아야 한다.
직업을 택하는 데 있어서, 시대가 달라졌기 때문에 귀천의 구분을 하지 말아야 한다.

특별히 젊은 형제자매들은 여러분의 생각을 바꾸어야 한다. 노동자가 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말고 오히려 여러분 모두가 노동자가 되기를 배워야 한다. 그럴 때 이주의 필요가 있고 당신에게 갈망이 있다면, 교회가 당신을 내보낼 때 당신은 남과 동역하기가 쉬워진다. 만일 가능하다면, 나는 장래에 어떤 사람은 대학에 가서 의학을 공부하기 바란다. 왜냐하면 오늘 각지에 의사와 간호사의 필요가 특별히 큰데, 의사나 간호사가 도시에는 많지만 시골에는 너무 부족하기 때문이다. 남부 각 지방에 다 의사와 간호사가 필요하다. 그럴 때 장래 의사, 간호사, 화학 등의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통솔하기가 쉬울 것이다. 상해에 연료 공장을 차린 형제가 있는데, 거기에는 화학을 아는 기술공이 많이 필요하다. 약사들은 의학에 대해 더 공부할 수 있다. 염색 공장도 전문적인 기술자와 염색공을 배출할 수 있고, 어쩌면 익양에서 네댓 대의 방직기를 사서 형제자매들이 일하도록 할 수 있다.
우리가 이주한 지방들은 거의가 정부의 토지 개혁 시책에 부응하는 대규모 농장이다. 농업 외에 소규모의 목축도 우리가 할 수 있다. 이외에 미장과 목공과 경리 등의 직업도 좋은 것이다. 이러한 직업이나 기술은 이주에 매우 유용하다. 그러므로 결코 오랫동안 쓸 수 없는 기술을 배우지 말라. 이곳의 인도하는 열두 명의 형제들이 시간을 들여 이 일을 주의하기 바란다. 우리 직업의 성질은 항구적인 것이어야 하고, 또한 다른 사람과 동역하여 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연대에는 서북쪽으로 이주한 사람들이 있는데, 이것은 교회의 첫 번째 이주라고 할 수 있다. 익양은 우리의 두 번째 이주라고 말할 수 있다. 앞으로 이주의 일은 갈수록 더 빈번해질 것이다. 이주하는 사람은 두 손으로 벌어먹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손쉬운 일을 택하여 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 전체 형제자매들에게 은혜를 주사 우리 자신을 철저히 드리고 이주의 각 방면을 예비하기 바란다. 이주할 때에야 비로소 자신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발견해서는 안 된다.

각지로 이주하는 사역과 그 중심

앞으로 사역의 거점에 관해서는, 상해가 강소성 전체를 관리하고, 산두는 객가방언(客家方言)을 하는 지역을 담당하며, 동북은 장춘이 주로 담당하고, 예닐곱 명의 동역자들이 중심이 되어 일한다(동북에는 현재 육십여 군데에 모임이 있고, 이삼십 군데에는 매우 사람들이 필요하며 동역자들이 다음 주에 도착할 것임).
하북성과 수원성과 차하성과 산서성, 이 네 성은 부평이 책임지고, 중경은 사천성을 책임지며, 곤명은 운남성을 책임진다(운남성에는 묘족 사람들이 많이 있고, 그들 대부분이 노강 일대에 살고 있으며, 전적으로 누가 책임질 필요가 있음). 현재 귀주에는 사역이 없고, 적극적으로 개척할 필요가 없다. 서북쪽은 난주가 중심이 되어 신강성과 청해를 겸하여 책임진다. 현재 청해에는 세 군데에 모임이 있고, 장래에 난주로 이주할 사람들도 필요하다. 협서성은 현재 난주가 중심이 될 수 없고 서안을 중심으로 해야 할 것 같다. 최근에 세워진 ‘사역의 집’은 전문적으로 젊은 형제자매들의 사경을 훈련하기 위한 것이다. 상해의 이주사역은 상당히 잘 되고 있고, 적지 않은 사람이 남창으로 이주하였기 때문에 지금 남창에서도 한 구역을 일으킬 수 있다.
이상에서 말한 각지의 이주 사역에는 모두 재정적인 협력이 필요하다. 우리는 사역과 내맡긴 금전이 정비례가 되기를 바란다. 지난번에 우리가 여러분에게 통보하여 팔라고 한 물건들에서 얻은 금액의 절반을 홍콩의 집회소를 위해 사용하도록 하라. 재정 장부는 따로 분리해서 관리해야 한다. 먼저 책임 형제들이 금액의 절반을 이상에서 말한 각 지방에 보내 주어 여러분이 내맡긴 돈이 실제적으로 복음을 위해 쓰이도록 해야 한다.

약간의 설명

여기서 내가 설명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 한 가지 있다. 본래 나는 이 말을 할 필요가 없지만 어떤 사람이 분명히 알고자 할까 봐 여기서 덧붙여 언급하겠다. 이것은 최선의 것이 아니고, 또한 여러분 모두가 답변할 수 있는 일이다. 위에서 나열한 사역의 지방들에 고령은 포함되지 않았다. 주님이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용서하시기 바란다. 고령은 첫날부터 지금까지 외부에서 온 어떤 수입이 없었다. 오직 홍콩에서만 적은 액수를 헌금하였고, 산두에서도 한 차례 헌금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돈은 사역을 위해 사용하지 않고 고령에 음식을 공급하는 데 쓰도록 전달해 주었다. 우리는 오직 고령으로 훈련받으러 온 사람들에게서만 헌금을 받았다. 이것은 우리의 마음이 좁은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말할 기회를 주지 않기 위해서이다. 1934년부터 나는 교회의 헌금을 받아본 적이 없다. 지난 이 주 동안에 비로소 오십 원의 헌금을 받았지만, 나는 이미 이것을 먹을 것이 없는 사람에게 전해 주었다.
만일 내가 나의 입장을 풀어 놓는다면 주님의 사역은 제한을 받게 된다. 솔직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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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거니와, 내 설명은 주님의 일꾼 된 내 입장을 지키기 위한 것이다. 내가 교만해서 머리 숙여 헌금을 받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역자의 체통을 지키기 위해서이다.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은 내 입이 사람들에 의해 봉해지지 않기 위해서이다. 내가 이러했고, 고령 훈련이 이러했고, 모든 동역자들이 지난 이 년 동안 사역의 헌금을 한 푼도 사용하지 못하게 되어 있었다. 여기 상수 형제가 있다. 여러분은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용서하기 바란다. 그에 대한 사람들의 공격은 곧 나에 대한 공격이요, 상수 형제가 틀린 것은 내가 틀린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너무 쉽게 비평하지만, 결국 그들은 손가락 하나도 움직이지 않는다. 우리가 돈을 사랑하는 것은 틀린 것이고, 세상을 사랑하는 것도 옳은 것이 아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어리석은 말을 하는 것을 용서하기 바란다. 내가 이 말을 하는 것은 내 안에 그리스도의 진실함이 있음을 사람들에게 보여 주고자 함이요, 나의 이 자랑을 어떠한 것도 막지 못하게 하려 함이다. 내 말은 내 중점을 낮은 것으로 바꾸는 것이 아니다. 홍콩에서뿐 아니라 모든 지방에서 우리 동역자들은 다 이와 같았다. 우리는 우리의 간증이 훼방하는 사람들의 입을 뛰어넘기 바라고, 여러분에게 모든 훼방의 말이 진실되지 않다는 것을 보여 주기 바란다. 비평하는 말이 나오는 것은 돈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때문에 많은 훼방의 말이 나오는 것이다. 여러분은 우리 동역자들이 짐을 짊어지고 일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이것이 방청하러 온 분들에 대한 나의 약간의 설명이다. 주님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긍휼히 여기시기 바란다.










제3집 제61권 주의 회복 안의 성숙된 인도 (1) 제21장 봉사에 관한 교통(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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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장
봉사에 관한 교통(2)

 

 

 

 


시간 : 1950년 2월 16일, 목요일 저녁
장소 : 홍콩 구룡 좌돈도

오늘 저녁 우리가 부른 찬송가 149장(한국복음서원 찬송가 333장)은 헌신의 능력이 하나님의 영광의 나타나심에 있다고 말한다. 우리가 다 알듯이 죄는 악한 것이요 세상은 매력적인 것이다. 우리 스스로 세상을 벗어나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주님의 영광은 우리를 세상에서 벗어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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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방에서 주의해야 할 사항들

심방에 관하여 나는 몇 가지를 더 언급하겠다.

1. 한담하지 않음

심방할 때 가장 좋은 것은 영적인 방면의 일만을 이야기하고 함부로 말하지 않는 것이다. 특별히 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더욱 조심해야 한다. 집에서 함부로 말하는 것이 좋지 못할진대, 하물며 교회를 대표하여 나가서 심방하는 것이겠는가! 그러므로 당신은 심방하러 갈 때 반드시 교회의 청결함을 대표해야 한다. 어떠한 트집을 잡는 것이나 비평하는 것이나 훼방하는 것 등이 발견되면 즉시 처리해야 한다. 당신이 심방하는 목적은 남을 헐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온전케 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함부로 이야기하지 말고, 옳고 그름을 말함으로 변론을 일으키지 말라.

2. 교사의 위치에 서지 말라

복음의 심방에 있어서 당신은 여러 종류의 사람을 만나게 될 것이다. 비록 그들이 이름을 적고 복음에 대해 호감을 표했지만, 그러나 그들로 믿게 하는 데에는 많은 어려움이 남아 있다. 심방하러 갈 때 당신은 배우는 태도를 가져야지 교사로서 심방하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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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만일 교사의 태도를 가지고 간다면, 결과가 좋지 않을 것이다. 사람이 구원받기 위해서는 그렇게 많은 교리가 필요치 않다. 한 알의 밀이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지만, 씨앗은 오직 한 알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람을 구원시키는 교리는 그렇게 많이 필요 없고, 뿌린 씨가 생명이라면 싹이 나고 자랄 수 있다. 어떤 사람은 한 구절 혹은 반 구절의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도 계속 사람들을 주님께로 이끌 수 있다. 당신이 복음 전하는 것은 많은 교리를 이해하는 데 있지 않고 사람들에게 생명을 줄 수 있는가에 있다.

3. 먼저 간증할 수 있음

내 제의로는, 처음 심방할 때 당신은 당신의 영적인 나이와 상태를 그에게 알려 줄 수 있다. 당신은 간증하면서, “저는 당신과 별 차이가 없습니다. 비록 제가 주님을 믿은 지 여러 해 되었지만, 갓 믿었을 때에는 당신과 똑같이 어리둥절했고, 지금에서야 봉사를 배웁니다. 제가 다른 것은 잘 알지 못해도 한두 가지 분명히 아는 것은 나의 죄가 사함받았고, 주님을 믿은 후에 기쁨과 평강이 있다는 것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 당신이 이렇게 간증할 때, 그의 속이 편치 않음을 느끼고 당신이 얻은 기쁨을 그도 얻고자 하게 될 것이다. 그가 흑암 가운데 있을 때, 그는 죄를 기뻐하며 귀히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일단 빛 가운데 올 때, 그는 매우 고통스럽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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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머리를 만지지 말고 마음을 만짐

그런 다음 당신은 “교회는 당신이 주님을 믿을 뜻이 있어서 이름을 적고 표시한 것을 알고 즉시 당신을 찾아보도록 저를 보냈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그의 마음을 만질 것이다. 우리는 그를 접촉할 기회를 얻어서 그의 머리를 만질 것이 아니라 그의 마음을 만질 수 있도록 방법을 강구해 내야 한다. 마음이 주님께 돌아설 때, 머리의 문제는 자연히 해결된다. 심방은 교회가 그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고, 그의 영혼에 대해 흥미를 느낀다는 인상을 주어야 한다. 만일 그가 어떤 질문을 할 경우, 당신은 지혜롭게 당신도 많이 모른다고 표명할 수 있다. 어찌하든지 그의 생각의 문제를 중요시하지 말고, 그의 마음과 그의 영의 반응을 주의해야 한다.

5. 도움을 주지 못할 때 합당한 사람이 가도록 청하라

당신은 및 차례 심방한 후에 그를 이끌어 줄 수 있는지를 주의 깊게 지켜 보라. 만일 당신이 할 수 없다면, 책임 형제에게 다른 한두 사람을 보내도록 청할 수 있다. 그래도 안 된다면 책임 형제가 직접 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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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사의 직책

오늘 저녁 나는 집사의 직책과 봉사를 볼 것이다. 집사 형제가 하는 일은 장로 형제들이 하는 일과 정반대이다. 장로들은 일을 하는 데 중점이 있지 않고 눈으로 감독하는 것이며, 집사는 손으로 일을 하고 형제자매들을 데리고 이끌어 주면서 하는 것이다. ‘집사’라는 단어는 헬라어 원문에서 디아코노스(diakonos)로서 섬기는 자라는 뜻이고, 영어에서는 종(servant), 일꾼(minister), 집사(deacon)로 번역하여 종이 되어 시중든다는 뜻이다. 집사 형제는 형제자매들이 일하도록 어떤 구상을 내는 사람이 아니라, 장로들의 안배 하에 형제자매들이 함께 일하도록 많이 이끌어 주는 사람이다. 교회가 강할 때, 장로들은 감독할 줄 알고 집사는 일할 줄 안다. 집사는 다른 형제자매들보다 더 많이 일을 해야 한다. 장로가 주를 섬기는 것의 기본 원칙은 감독하는 것이지만, 집사로서 주님을 섬기는 것의 기본 원칙은 일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집사들은 장로들의 뜻을 이해해야 하는데, 이것은 바로 장로들로부터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의 관점에서 볼 때, 모든 일은 즉각적으로 할 것이 아니라 먼저 좋은 안배가 있어야 한다. 집사는 일을 당할 때 즉시 가서 할 것이 아니라, 주님 앞에서 자세히 생각해 보고 잘 고려해 보아야 한다. 또한 그러한 일을 혼자 할 것이 아니라 형제자매들이 옆에서 배우면서 하도록 해야 한다.
주님이 갈릴리에서 떡을 오천 명에게 나누어 주실 때, 제자들더러 모든 회중을 오십 명, 백 명씩 나누어 앉게 하라고 하셨는데, 당시에는 누구도 왜 그렇게 하라고 했는지 알지 못했다. 오순절 날이 이를 때, 삼천 명이 구원을 받았으며 또한 그들에게 침례를 베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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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제자들이 평소에 주님의 훈련을 받지 않았다면, 이러한 큰 분위기를 당해 보지 못했기 때문에 어떻게 할 줄 몰랐을 것이다. 그들이 백쉰세 마리의 물고기도 감당할 수 없었을진대(요 21:6, 11), 하물며 삼천 명이겠는가? 더욱이 사람은 물고기보다 다루기가 더 어렵다. 그러므로 사람이 주님을 믿은 후에 그냥 그를 집에 돌아가게 하고 아무 일 없었던 것같이 할 수 없다. 복음서에서 주님은 제자들로 하여금 일에 대해 배우게 하셨다. 주님은 두 차례 사람들을 떡으로 먹이셨는데 한 번은 사천 명을 먹이고 한 번은 오천 명을 먹이셨다(막 6:30-44, 8:1-9). 주님은 항상 먼저 회중으로 하여금 앉게 하셨으며 오십 명이나 백 명을 한 무리로 삼으셨다. 만일 서 있었다면 문제가 있었을 것인데, 이는 사람은 살아서 움직이므로 오십 명이 칠십오 명으로 변하고 백 명이 또 칠십오 명으로 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앉으면 움직이기 어렵고 고정되기 때문에 함부로 이동할 수 없다. 아마 제자들은 삼천 명을 삼십 무리로 나누었을 것이다. 그렇게 할 때 한 번에 삼천 명을 먹이기 쉬웠을 것이다. 이렇게 하면 떡을 떼거나 침례를 베풀 때 혼란스럽지 않고 질서가 있을 것이다.

집사의 일하는 방법

1. 실제적인 배움(연습)을 가짐

주님이 제자들을 이끌어 일을 처리하시는 데에서 우리는 일을 하는데 세 가지 기본 단계 혹은 기본 원리가 있음을 볼 수 있다. 첫째는 인도하는 형제자매들이 실지로 연습을 해보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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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다. 주님은 실제적인 연습을 믿었기 때문에 먼저 제자들을 일하도록 이끄셨다. 사도행전에서 우리는 믿는 이들이 모든 것을 공동 소유하여 그들의 필요한 것을 따라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는 것을 본다. 사실 이것은 주 예수님이 먼저 제자들을 이끌어 하신 일이고, 나중에 제자들은 이것을 따라 했던 것이다. 집사는 결코 번거로운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먼저 앞장서서 형제자매들에게 어떻게 하는가를 보여 주어야 한다. 상해 교회가 의자를 배열하는 것에 대해 말한다면, 때로는 사람들이 들어가서 앉을 수 없게 배열했다. 의자를 넓게 많이 배열하는 데에는 비결이 있다. 이것은 한 번에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집사들이 지속적으로 형제자매들을 이끌고 실지로 연습을 해야 한다.
내가 사람들을 위해 결혼 주례를 해 주는 데에는 하나의 조건이 있다. 그것은 바로 결혼 전날 관계된 모든 사람들이 다 와서 잘 될 때까지 미리 예행 연습을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려면 당신은 다른 사람에게 주례를 부탁해야 한다. 나는 오지 않을 것이다. 예행 연습이 있어야만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를 알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결혼 행진곡이 다섯 번 연주되었는데도 신랑은 신부의 손을 잡고 들어오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이방인에게 함부로 행한다는 인상을 주고 우스운 광경을 보여 줄 것이다. 킹스턴 양(Miss Kingston)은 결혼 집회가 이렇게 질서 있는 것을 보고서 나에게, “제 나이가 어리지 않은 것이 다행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나는 반드시 문덕리에 와서 당신에게 주례를 부탁했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렇게 하는 것은 옳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지럽게 되고, 주님을 영화롭게 하지 못하게 됩니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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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방법을 찾아내야 함

일하는 두 번째 단계는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다. 나는 다시 주님이 떡을 나누신 일을 예로 들겠다. 주님은 제자들더러 모든 사람에게 가서 “와서 떡을 먹으라”고 말하라고 명하지 않으셨다. 주님은 사람들이 오기를 기다린 다음에야 방법을 생각해 내지 않으셨다. 또한 한 사람씩 나와서 떡을 가져가라고 하지도 않으셨다. 아마 그렇게 했다면 첫 번째 사람은 삼십 초를 사용하고, 두 번째 사람은 일 분, 세 번째 사람은 일 분 삼십 초, 네 번째 사람은 이 분, 마지막 사람은 그곳에서 네댓 시간을 서 있어야만 떡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주님의 방법은 여러 그룹으로 나누는 것이었으며, 백 명을 한 그룹으로 하여 오천 명을 오십 그룹으로 만들었다. 그분은 떡을 열두 제자에게 나누어 주시고, 다시 열두 제자에 의해 각 그룹의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이것이 바로 방법을 찾아내어 일하는 것이다.

3. 사람에게 일을 안배해 주고 분담하게 함

일을 하는 데에는 방법이 필요하고, 사람에 대하여는 안배가 있어야 하며, 형제자매들 중 한 사람도 노는 사람이 없이 일하도록 분담해야 한다. 주님이 떡을 나누실 때 열두 제자는 다 그분 앞에 나왔다. 주님이 떡을 떼어 열두 사람에게 나누어 주셨을 때, 삼십 그룹과 오십 그룹의 사람들은 다 섬세하게 돌봄을 받을 수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집사도 수중의 일을 분담하여 사람들이 하도록 안배할 줄 알아야 한다. 이 일은 이 사람에게 하도록 맡기고, 저 일은 저 사람에게 하도록 맡길 때, 결국 아주 빨리 일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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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일에 연습과 방법과 안배가 있다면, 교회 안의 일들이 혼란스럽지 않을 것이다. 장로들은 각 지역의 형제들이 이렇게 하도록 도와주어야 하고, 결코 일을 무모하게 하게 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결과가 좋지 않을 것이고, 주님을 영화롭게 하지 못할 것이다. 교회 안에서 집사의 봉사는 언제나 신중해야 한다. 교회는 형제자매들의 실험실이 되어서는 안 되고 하나님의 집이 되어야 한다. 여러분이 이러한 일들을 내가 말한 대로 훈련한다면, 아주 좋은 결과를 얻을 것이다. 만일 여러분이 복음에 대해 좋은 배움을 갖는다면, 이주하는 것이 매우 유용할 것이다. 자기 지방 교회에서 일을 처리하는 데 있어서 유용할 것이다. 나는 홍콩에서 백 명이 중경으로 이주할 것을 매우 희망한다. 중경은 복음의 전략 지대이다. 복음을 반드시 전파하기를 배워야 하고, 반드시 일할 줄을 알아야 한다. 자신이 할 뿐 아니라 더욱 형제자매들이 하도록 이끌어 주어야 하며, 하나님이 하시는 것과 같이 해야 한다.
여러분은 이렇게 자신을 연단시키고 훈련해야 한다. 한때의 열심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매일 인내로써 배워야 한다. 홍콩의 형제자매들이 다른 지방보다 더 잘할 수 있기 바라고, 하루하루를 유용하게 사용하여 하나님 앞에서 새로운 배움과 얻음이 있기 바란다. 우리의 신학은 다른 사람의 신학과 다르다. 우리는 하나님의 학교 안에 있고 교회 안에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라는 것을 배우지만, 그들은 교리와 사무적인 것에서만 온전케 함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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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에 대한 집사의 안배

1. 돈을 관리함

집사의 일은 사도행전 6장에서 처음 언급되었다. 거기에서는 공궤하는 문제가 언급되었기 때문에, 사도들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음식을 관리하는 것이 원래 합당치 않고, 믿는 이들은 마땅히 그들 가운데서 좋은 명성이 있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 일곱을 택하여 이 일을 관리하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1-6절). 거기에는 음식을 관리하는 일곱 집사가 있었고, 사도들로서 일했던 형제들은 기도하고 전도하는 것에만 전무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집사가 사무를 안배하는 책임을 진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음식을 관리하는 것은 곧 재물을 관리하는 것으로, 각 사람에게 부족함이 없도록 각 사람의 쓸 것을 나누어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 안의 집사의 일은 첫 번째로 재물을 관리하는 것이다. 우리는 두 형제로 재정을 관리하게 하였고, 따로 두 형제로 장부를 관리하게 하였다.
재정을 관리하는 것은 여러분 자신의 소견대로 할 수 없고, 장로의 감독 아래 합당하게 처리해야 한다. 특별한 지출에서 여러분은 스스로 주장할 수 없고, 장로들이 결정하게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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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재학중인 형제자매들을 돌봄

젊은 형제자매들의 학업 또한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여러분은 그들의 학업 문제를 돌보는 것을 배워야 한다. 모세가 애굽의 모든 학문을 배웠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산 위에서의 식양’(행 7:20-22, 출 25:8-9)을 계시해 주실 수 있었다. 그러나 만일 그의 모친이 어려서부터 가르치지 않았다면, 아마 그는 자신이 하나님께 속한 백성이요 하나님의 약속을 가진 백성임을 몰랐을 것이다(출 2:1-17). 그러므로 우리는 여섯 집사들에게 특별히 이 책임을 맡도록 안배하고, 또 두 자매로 이 일을 돕게 하였다.
그다음으로, 만일 가능하다면 천주교 학교에서 공부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주님의 명령은 그들 가운데서 나와서 그들과 분별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일에 있어서 구애받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지 말라. 설령 한 학기가 남았을지라도, 힘을 다하여 그가 전학할 수 있도록 도우라.
셋째로, 한 형제나 자매 홀로 공부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최소한 두 명, 가장 좋은 것은 대여섯 명 이상이 함께 있어야 한다. 한 사람을 한 학교에 두는 것은 그의 머리를 사자 입에 넣는 것과 같다. 사자로 하여금 입을 다물게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모든 형제자매들이 다니엘과 같다고 생각지 말라. 당신이 우물에 빠지지 않으려면 우물가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편이 낫다. 결코 우물가에서 맴돌지 말라.
넷째로, 여러분 집사들은 그들이 각 방면에서 온전케 되도록 돌봐 주어야 한다. 그로브스 여사와 같이 그들이 학교에서 어떻게 복음을 전하고 있으며, 어떻게 성경을 읽고 있는지를 물어야 한다. 또한 여러분은 그들이 어떻게 일을 해야 하는지를 훈련시키고 그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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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신하고자 하는 마음을 키워 주어야 한다. 그럴 때 그들이 학교에서 복음을 보편적으로 전파할 수 있다. 설령, 복음을 인해 반년 더 공부한다 해도 무엇이 나쁘겠는가? 공부하는 것은 복음을 전하기 위한 것인데, 반년 일찍 졸업하든 늦게 졸업하든 무슨 관계가 있는가? 여러분은 그들로 하여금 이러한 웅지를 갖게 해야 한다.
여러분 젊은 형제자매들은 또한 성실히 공부해야 한다. 만일 여러분이 공부를 잘하지 않는다면, 부모님들은 말할 것이다. 여러분이 어떤 일을 하든지, 그 목적은 복음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공부하는 것뿐만 아니라 친구를 사귀는 목적도 복음을 위해야 한다. 여러분은 친구와 동급생들의 이름을 기도 수첩에 적고 날마다 그들을 위해 중보 기도해야 한다. 여러분은 특별히 이것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데, 가령 한두 달 동안은 특정한 두 사람만을 주의하고 매일 그들을 위해 기도하며, 기회가 될 때 복음 집회에 참석하도록 그들을 이끌어 주어야 한다. 만일 여러분이 이것에 충실하다면, 학교 하나하나를 빨리 얻을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여러분은 시간을 들여 기도하고 추구해야 한다. 이러한 일에서 결코 함부로 하지 말아야 한다.
여러분 장로 된 형제들은 집사들을 감독해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 교회의 일이 많다고 해서 결코 일에 분주하고 사람들에 대한 온전케 함과 돌봄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범사에 하나님 앞에서 잘 기도해 보고 고려해 보아야 한다. 오늘부터 홍콩 교회가 마음을 같이하여 복음을 전파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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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하는 형제자매들에 관하여

많은 형제자매들이 그들의 모든 소유를 다 내놓았기 때문에, 장래 그들에게 부족함이 있을 때 우리는 또한 그들을 돌보아야 한다. 이들이 내맡긴 것들은 이주하는 데 도움과 유익이 된다. 우리가 한 무리를 익양에 보내는 데에만도 많은 금전이 사용됐다. 물건을 팔면 별로 돈이 되지 않고, 그쪽에 가서 똑같은 물건을 살 때 오히려 많은 돈이 들게 된다. 우리는 알을 취하기 위해 닭을 잡을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형제자매들은 여전히 사업을 잘해야 한다. 그러나 사람은 여전히 남아 있으며 돈은 남아 있지 않을 정도로 일해야 한다. 바꾸어 말하면, 사람은 주님께 얻은 바 되어야 하고, 돈은 밖으로 내보내야 한다. 세계 각지의 통계는 복음에 물질을 드린 만큼 구원받은 사람이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형제자매들이 잘 경영하여 얻은 돈을 헌금함으로써 더 많은 사람을 얻을 수 있기 바란다.
현재 열한 명의 형제들이 사업을 잘하고 있다. 여러분은 계속 잘 경영하여 얻은 수익금을 여러분이 쓸 것 외에는 최선을 다해 내맡기라. 그럴 때, 우리는 장래 사람들이 이주하는 것을 돕는 데 그 돈을 사용할 수 있다. 현재 청도에 이주할 사람은 있지만, 이주하는 데 필요한 충분한 재력이 없다. 우리는 이곳에서 이러한 일을 돕기 바란다. 이번에 내맡긴 직장인 형제들에 대해, 여러분은 합당한 안배를 해 주어야 한다. 우리의 직업은 복음을 위한 것이다.
사업의 목적은 돈을 벌기 위한 것이고, 돈이 있을 때 그것을 복음을 위해 내보낼 수 있다. 수입을 도모하기 위해 직업을 갖고 있는 형제들은 이제 복음의 기회를 도모하기 위해 돈을 벌어야 한다. 학생들이 공부하는 것도 복음을 위한 것이요, 직장을 다니는 것도 생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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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한 것이자 또한 복음을 위한 것이다. 어떤 사업을 하든지 우리는 잘 기도할 필요가 있다. 주님이 우리의 안배 외에 다른 안배를 하시기를 앙망한다. 우리는 단 마음으로 복음을 위해 직업을 가져야 한다.

이주에 유익한 직업을 위해 기술을 배움

이주하는 데에는 훈련이 필요하다. 형제자매들은 성경을 읽을 줄 알고, 일을 처리할 줄 알고, 복음을 전할 줄 알아야 하되, 특별히 젊은 형제들은 네 번째 일을 갖춰야 하는데, 그것은 바로 모든 사람이 다 직업을 위한 기술을 가져야 하고 또한 그 직업은 오늘날 그 지방 정부의 필요에 알맞은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당신은 일반인을 내륙으로 이사오게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가 내륙 정부의 직업 요구에 부합되지 않고 내륙 교회들이 그를 공급할 수도 없다면, 오히려 이것은 어려움이 되기 때문이다. 만일 당신이 특별한 기술을 가지고 있다면, 내륙에 가서 자기가 먹고 살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을 먹여 살려야 한다. 이주하는 사람은 조금이나마 성경 진리를 알아야 하고, 일을 처리할 줄 알아야 하고, 복음 전할 줄도 알아야 하고, 생계를 위해 직업을 가질 줄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이번에 상해에서 또 한 무리가 익양으로 이주하는 데 있어서 이백 명이 등록하였는데, 결국 우리는 삼십 명만 택하여 보냈다. 거기에서는 몇 개월 동안 하루도 용돈이 없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기술을 가지고서 스스로 먹고 살아야 한다.
직업을 택하는 데 있어서, 시대가 달라졌기 때문에 귀천의 구분을 하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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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히 젊은 형제자매들은 여러분의 생각을 바꾸어야 한다. 노동자가 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말고 오히려 여러분 모두가 노동자가 되기를 배워야 한다. 그럴 때 이주의 필요가 있고 당신에게 갈망이 있다면, 교회가 당신을 내보낼 때 당신은 남과 동역하기가 쉬워진다. 만일 가능하다면, 나는 장래에 어떤 사람은 대학에 가서 의학을 공부하기 바란다. 왜냐하면 오늘 각지에 의사와 간호사의 필요가 특별히 큰데, 의사나 간호사가 도시에는 많지만 시골에는 너무 부족하기 때문이다. 남부 각 지방에 다 의사와 간호사가 필요하다. 그럴 때 장래 의사, 간호사, 화학 등의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통솔하기가 쉬울 것이다. 상해에 연료 공장을 차린 형제가 있는데, 거기에는 화학을 아는 기술공이 많이 필요하다. 약사들은 의학에 대해 더 공부할 수 있다. 염색 공장도 전문적인 기술자와 염색공을 배출할 수 있고, 어쩌면 익양에서 네댓 대의 방직기를 사서 형제자매들이 일하도록 할 수 있다.
우리가 이주한 지방들은 거의가 정부의 토지 개혁 시책에 부응하는 대규모 농장이다. 농업 외에 소규모의 목축도 우리가 할 수 있다. 이외에 미장과 목공과 경리 등의 직업도 좋은 것이다. 이러한 직업이나 기술은 이주에 매우 유용하다. 그러므로 결코 오랫동안 쓸 수 없는 기술을 배우지 말라. 이곳의 인도하는 열두 명의 형제들이 시간을 들여 이 일을 주의하기 바란다. 우리 직업의 성질은 항구적인 것이어야 하고, 또한 다른 사람과 동역하여 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연대에는 서북쪽으로 이주한 사람들이 있는데, 이것은 교회의 첫 번째 이주라고 할 수 있다. 익양은 우리의 두 번째 이주라고 말할 수 있다. 앞으로 이주의 일은 갈수록 더 빈번해질 것이다. 이주하는 사람은 두 손으로 벌어먹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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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쉬운 일을 택하여 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 전체 형제자매들에게 은혜를 주사 우리 자신을 철저히 드리고 이주의 각 방면을 예비하기 바란다. 이주할 때에야 비로소 자신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발견해서는 안 된다.

각지로 이주하는 사역과 그 중심

앞으로 사역의 거점에 관해서는, 상해가 강소성 전체를 관리하고, 산두는 객가방언(客家方言)을 하는 지역을 담당하며, 동북은 장춘이 주로 담당하고, 예닐곱 명의 동역자들이 중심이 되어 일한다(동북에는 현재 육십여 군데에 모임이 있고, 이삼십 군데에는 매우 사람들이 필요하며 동역자들이 다음 주에 도착할 것임).
하북성과 수원성과 차하성과 산서성, 이 네 성은 부평이 책임지고, 중경은 사천성을 책임지며, 곤명은 운남성을 책임진다(운남성에는 묘족 사람들이 많이 있고, 그들 대부분이 노강 일대에 살고 있으며, 전적으로 누가 책임질 필요가 있음). 현재 귀주에는 사역이 없고, 적극적으로 개척할 필요가 없다. 서북쪽은 난주가 중심이 되어 신강성과 청해를 겸하여 책임진다. 현재 청해에는 세 군데에 모임이 있고, 장래에 난주로 이주할 사람들도 필요하다. 협서성은 현재 난주가 중심이 될 수 없고 서안을 중심으로 해야 할 것 같다. 최근에 세워진 ‘사역의 집’은 전문적으로 젊은 형제자매들의 사경을 훈련하기 위한 것이다. 상해의 이주사역은 상당히 잘 되고 있고, 적지 않은 사람이 남창으로 이주하였기 때문에 지금 남창에서도 한 구역을 일으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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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에서 말한 각지의 이주 사역에는 모두 재정적인 협력이 필요하다. 우리는 사역과 내맡긴 금전이 정비례가 되기를 바란다. 지난번에 우리가 여러분에게 통보하여 팔라고 한 물건들에서 얻은 금액의 절반을 홍콩의 집회소를 위해 사용하도록 하라. 재정 장부는 따로 분리해서 관리해야 한다. 먼저 책임 형제들이 금액의 절반을 이상에서 말한 각 지방에 보내 주어 여러분이 내맡긴 돈이 실제적으로 복음을 위해 쓰이도록 해야 한다.

약간의 설명

여기서 내가 설명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 한 가지 있다. 본래 나는 이 말을 할 필요가 없지만 어떤 사람이 분명히 알고자 할까 봐 여기서 덧붙여 언급하겠다. 이것은 최선의 것이 아니고, 또한 여러분 모두가 답변할 수 있는 일이다. 위에서 나열한 사역의 지방들에 고령은 포함되지 않았다. 주님이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용서하시기 바란다. 고령은 첫날부터 지금까지 외부에서 온 어떤 수입이 없었다. 오직 홍콩에서만 적은 액수를 헌금하였고, 산두에서도 한 차례 헌금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돈은 사역을 위해 사용하지 않고 고령에 음식을 공급하는 데 쓰도록 전달해 주었다. 우리는 오직 고령으로 훈련받으러 온 사람들에게서만 헌금을 받았다. 이것은 우리의 마음이 좁은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말할 기회를 주지 않기 위해서이다. 1934년부터 나는 교회의 헌금을 받아본 적이 없다. 지난 이 주 동안에 비로소 오십 원의 헌금을 받았지만, 나는 이미 이것을 먹을 것이 없는 사람에게 전해 주었다.
만일 내가 나의 입장을 풀어 놓는다면 주님의 사역은 제한을 받게 된다. 솔직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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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거니와, 내 설명은 주님의 일꾼 된 내 입장을 지키기 위한 것이다. 내가 교만해서 머리 숙여 헌금을 받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역자의 체통을 지키기 위해서이다.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은 내 입이 사람들에 의해 봉해지지 않기 위해서이다. 내가 이러했고, 고령 훈련이 이러했고, 모든 동역자들이 지난 이 년 동안 사역의 헌금을 한 푼도 사용하지 못하게 되어 있었다. 여기 상수 형제가 있다. 여러분은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용서하기 바란다. 그에 대한 사람들의 공격은 곧 나에 대한 공격이요, 상수 형제가 틀린 것은 내가 틀린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너무 쉽게 비평하지만, 결국 그들은 손가락 하나도 움직이지 않는다. 우리가 돈을 사랑하는 것은 틀린 것이고, 세상을 사랑하는 것도 옳은 것이 아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어리석은 말을 하는 것을 용서하기 바란다. 내가 이 말을 하는 것은 내 안에 그리스도의 진실함이 있음을 사람들에게 보여 주고자 함이요, 나의 이 자랑을 어떠한 것도 막지 못하게 하려 함이다. 내 말은 내 중점을 낮은 것으로 바꾸는 것이 아니다. 홍콩에서뿐 아니라 모든 지방에서 우리 동역자들은 다 이와 같았다. 우리는 우리의 간증이 훼방하는 사람들의 입을 뛰어넘기 바라고, 여러분에게 모든 훼방의 말이 진실되지 않다는 것을 보여 주기 바란다. 비평하는 말이 나오는 것은 돈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때문에 많은 훼방의 말이 나오는 것이다. 여러분은 우리 동역자들이 짐을 짊어지고 일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이것이 방청하러 온 분들에 대한 나의 약간의 설명이다. 주님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긍휼히 여기시기 바란다.










제3집 제61권 주의 회복 안의 성숙된 인도 (1) 제18장 주님이 다시 오시기 전의 하나의 징조
Ezra Zion , 2013-04-05 , 조회 (55) , 추천 (0) , 반대 (0), 스크랩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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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장
주님이 다시 오시기 전의 하나의 징조

 

 

 

 


시간 : 1950년 6월 13일
장소 : 홍콩 구룡 좌돈도

찬송가 161장(한국복음서원 찬송가 345장)

1. 어떻게 내 주 사랑해 주님을 기쁘게 할까
늘 주의 길을 안 떠나 주 가까이함 배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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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 길에 고통 있어도 물러서지는 않으리
주 십자가 짐 기억해 여전히 주 순종하게 하소서
3. 당신이 즐거운 많은 일을 떠난 것을 생각하겠네
당신은 오셔서 근심하며 배고프며 피곤하며 목마르셨네
집이 없는 밤하늘과 안식 없는 나날들을 겪으셨네
4. 나를 위해 근심하며 피곤하고 나를 위해 죽기 위해 오셨네
당신은 자신의 기쁨 구치 않았네
이 땅의 안일함 버리기 어렵지만
내 어찌 이것들을 사랑할 수 있으랴
5. 주님의 기쁨 얻으려 모든 것 해로 여기네
아낌없이 모든 것 다 배설물로 여기네

위의 찬송가 1절은 질문하는 것으로서, 자신이 자신에게 말하고 자신의 마음과 교통하는 것이다. 이렇게 자문해야만 얼마나 많은 때 당신이 밖으로 나갔는지를 알 수 있다. 2절의 ‘여전히’라는 단어는 매우 좋다. 1절은 헌신해야 함을 말하고, 2절은 이어서 그의 헌신이 여전히 변하지 않기를 구하는 것이다. 헌신은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계속되어야 한다. 그는 계속적으로 헌신하기를 갈망하기 때문에, 2절의 강조점은 ‘여전히’에 있다. 3절은 주님이 ‘어떻게 순결하시며, 즐거운 많은 일을 떠나셨는가?’를 생각하는 것이다. 많은 경우 사람들에게 즐거운 일은 언제나 깨끗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주님이 누린 즐거운 일은 깨끗한 일이었고, 그 안에 조금도 죄악이 섞여 있지 않았다. 그러나 이것에 이어서 주님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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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의 ‘오심’(중국어 참조)이 있다고 말한다. 이 찬송은 찬송가 중에서 특별한 찬송이라고 말할 수 있다. 앞에서는 주님이 ‘떠난다’고 말하고, 이제는 주님이 ‘오신다’고 말한다. 여기서 우리는 주님의 영이 그를 만졌고, 특별히 높이 오르도록 만진 것을 느낄 수 있다. 전반절에서는 주님이 ‘즐거운 일을’ 떠나셨다고 말하고, 후반절에서는 주님이 오셔서 얻은 것들은 ‘집 없는 밤하늘과 안식이 없는 나날들’ 뿐이었다고 말한다.
비록 3절이 주님의 행하심을 묘사했지만, 시인 자신에게는 이것이 아직 객관적이다. 그러나 4절에 올 때 주관적이게 되었다. 4절의 시작에서 ‘나를 위해!’라고 말했기 때문에, 이것은 주관적인 것이다. 여기에서는 세 번이나 ‘오셨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앞 절과 약간 차이가 있다. 4절은, 주님이 나를 위해 근심하시며 괴로움을 당하셨을 뿐 아니라, 또한 ‘나를 위해 죽기 위해’ 오셨다고 말한다. 주님의 목적은 자기의 기쁨을 구하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위해 우리를 위해 구속의 큰 사업을 이루시는 것이다. ‘버리다’라는 단어는 한쪽에 제쳐 놓다는 뜻이다. 이 땅의 안일함을 한 쪽에 제쳐 놓기 어렵지만, 주님을 사랑함으로 이것들을 이길 수 있다고 한다. 마지막 문구도 묻는 말이다. 5절에서 그는 스스로 ‘모든 것을 해로 여기네’라고 답변한다. 이것은 매우 강한 선포이다. ‘주님의 기쁨 얻으려’라는 말은 질문이기도 하고 답변이기도 하다.
이 찬송은 세상에서 본래 형통할 수 있고 발전할 수 있는 한 사람이 주를 위해 모든 것을 기꺼이 버린 것을 묘사한다. 우리는 그의 영이 어떠한 정도에까지 올라갔는지를 볼 수 있다.

-- 267 --
1924년에 우리는 이 찬송을 택하여 집회에서 형제자매들에게 부르자고 했다. 찬송을 부르는 영도, 느낌도 그들 모두 좋았고, 목소리도 상당히 컸지만, 나 자신은 그곳에서 다만 묵상했었다. 어떤 찬송은 너무 큰소리로 부르면 그것을 묵상할 수가 없다. 또 묵상해야 할 어떤 찬송을 큰 소리로 불러서도 안 된다. 1923, 24년에 우리 몇몇 사람은 아직 젊은이로서, 주님을 위해 일할 갈망을 가지고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았었다. 그중에 한 부부는 주님을 위해 직업을 내려놓고 주님을 섬길 것을 고려했었다. 그러나 그때 그들은 앞길이 막막하고 사방이 적막함을 느꼈다. 바로 이때 그들은 이 찬송을 불렀는데, 이것으로 인해 그들은 나와서 주님을 섬길 것을 결정했다. 이 찬송은 사람에게 거친 느낌보다도 상당히 강인한 느낌을 준다. 우리가 알듯이, 때로 어떤 찬송은 너무 강하게 부르면 영의 섬세함을 만지지 못한다. 그러나 그들이 부를 때에는 아주 섬세한 것을 만졌다. 만일 당신에게 앞길이 없다고 느낄 때, 이 찬송을 부름으로써 다시 한번 하나님께 자신을 드릴 수 있다.
“오호라 부한 자들아 너희에게 임할 고생을 인하여 울고 통곡하라 너희 재물은 썩었고 너희 옷은 좀먹었으며 너희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이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불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 보라 너희 밭에 추수한 품꾼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 지르며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느니라 너희가 땅에서 사취하고 노략하여 도살의 날에 너희 마음을 살찌게 하였도다”(약 5:1-5, 원문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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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다시 오심의 한 가지 징조―재물

야고보서 5장은 ‘오호라’라는 단어로 시작한다. 이 단어는 탄식의 표현으로서 신약에서 매우 드물게 사용된다. 사도 야고보는 여기에서 서술할 때 한숨을 쉬며 탄식하였다. 그가 탄식할 뿐 글로 쓸 수 없었던 것은, 그다음 단락에 서술된 일들이 완전히 잘못되었고, 그러한 일들은 발생하지도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탄식하면서, “부한 자들아 너희에게 임할 고생을 인하여 울고 통곡하라”고 말한다. 우는 것은 작은 소리로 흐느끼는 것이며 통곡하는 것은 방성 대곡하는 것이다. 무엇 때문에 부한 자들은 다 울어야 하는가? 무엇 때문에 작게 울어야 하고 크게 울어야 하는가? 이는 ‘그들에게 임할 고생’이 있기 때문이다. 즉, 장래 그들에게 임할 하나님이 정하신 고난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기뻐하지 말고 슬퍼해야 한다.
요즘 각지에서 발생한 일들은, 우리 그리스도인이 볼 때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주님이 오시기 전에 하나의 분명한 징조는, 그 기간 동안 많은 사람들이 전에 없이 재산을 쌓아 두리라는 것이다. 바꾸어 말해서, 주님이 다시 오실 때처럼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 재산을 소유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마지막 시대에 세상 사람들은 재산을 쌓아 두는 것을 중요시할 것이다. 오십 년 전이나 백 년 전의 사람들이 돈의 많고 적음을 말한 것은 오늘날 사람들이 돈의 많고 적음을 말하는 것과 그 의미가 다르다. 역대로 시대마다 부자가 있었지만, 오늘날과 같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다. 과거에 사람들은 부자를 호칭할 때 다만 ‘백만 장자’라고 했지만,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초당 천삼백 불의 수입이 있고, 이십 분도 안 되어서 백만 장자가 된다. 과거의 부자를 오늘날과 비교해 볼 때, 그것은 부자라고 말할 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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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과거 이천 년의 세계 역사를 볼 때, 오늘날과 같이 재물이 한곳에 모아진 기관이 없었다. 오늘날 지상의 재물이 한곳에 모아진 것은 역사에도 없는 일이다. 역사상 오늘날의 부자들과 같이 그렇게 많은 돈을 소유한 사람이 없었다. 우리는 역사에도 없었던 재물이 한곳에 모아지고, 부자들도 특별히 많은 것이 주님의 다시 오심의 징조 중 하나임을 보아야 한다. 재물이 한곳에 모아진 것은 말세의 징조이다. 주님이 다시 오실 때 로마 제국이 부흥하고 강성하거나 천주교가 크게 발전하거나 이스라엘 백성이 성전을 짓는 것 등의 일이 있을 뿐 아니라, 재물을 모으는 것 또한 주님의 다시 오심의 또 다른 징조이다.

지나치게 많이 쌓아 둔 것이 하나님의 심판의 근거임

바울은 디모데전서 6장에서 입을 것이 있고 먹을 것이 있는 것으로 족해야 한다고 말했다(8절). 그러나 오늘 사람들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을 뿐 아니라 지나칠 정도로 너무나 많은 것을 갖고 있다. 사람들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을 뿐 아니라 또한 은행에 많은 돈을 저축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야고보는 탄식하면서, 부한 자들의 옷이 좀먹었으며 금과 은은 녹슬었다고 말한다. 여기서는 의복이 있는가 없는가가 문제가 아니라 옷이 좀먹을 정도로 너무 많다는 것이다. 바꾸어 말해서, 사람들에게 입을 것이 있는 것으로 족하게 여기라고 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옷이 있을 뿐 아니라 쓸데없을 정도로 너무 많기 때문이다. 너무 많은 옷이 쓸데없기 때문에 그냥 쌓아 두어서 벌레가 먹는 것이다. 오늘 세상 사람들은 모두 물건을 쌓아 두는데 필사적이다. 옷만 하더라도 이십 년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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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을 옷을 쌓아 두고 있고, 그것들 중에는 쓸데없는 것들이 너무 많다. 이뿐 아니라 금과 은도 너무 많이 쌓아 두어서 녹이 슬었다.
그러므로 여기서 야고보는 당신의 옷이 좀먹고 금과 은이 녹슨 것이 당신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요, 당신이 심판받는 근거임을 지적한다. 장래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것임을 기억하라. 어떤 사람은 자기의 쌓아 두는 행위에 대해 변호하겠지만 당신이 어떻게 말하든 간에 하나님의 손은 옷에 난 구멍과 금과 은이 녹슨 것을 가리키면서 당신에게 “왜 너는 그렇게 쓸데없이 많이 쌓아 두었느냐?”고 물으실 것이다. 금과 은이 녹슨 것은 당신이 옳지 않다는 것을 증거해 줄 뿐 아니라 또한 불같이 당신의 살을 먹을 것이다. 아마 이것은 불 못의 불을 가리킬 것이다. 이 불은 당신을 뜨거울 정도로 고통스럽게 할 것이고, 당신을 바짝 말리며 괴로움 당하게 할 것이다.
사람이 많은 것을 쌓아 둘수록, 더 문제가 발생하고 더 자유롭지 않으며, 죄도 많아진다. 오늘 공산당에 해당된 구역에서는 이미 야고보서 5장에 서술된 것이 사실임을 발견할 수 있다. 하나의 이야기를 해 주겠다. 시골에 사는 한 형제 집에 마호가니로 만든 가구가 있었는데, 한 때 그는 영의 감동을 받아 일찍 팔아 버려야겠다는 생각을 가졌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팔기를 아까워했다. 나중에 시골에 문제가 발생했는데, 그때는 그가 그것을 누구에게 주어도 받으려 하지 않았다. 그는 결국 문제가 될까 봐 두려워 할 수 없이 상해로 도피하였다.
야고보서는 1900여 년 전에 쓰였지만, 그때 벌써 노사 분규에 대한 문제를 언급하였다. 그는 부자가 너무 많은 것을 누리고 노동자는 박탈당하기 때문에 문제가 생긴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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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애석하게도,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그들보다 1800년 전에 성경에 쓰인 말씀을 주의하지 않았다. 야고보서 5장 4절에서 밭의 추수한 품꾼에게 삯을 주지 않은 것이 있다고 말한다. 이 주지 않은 것은 응당 주어야 할 것을 남겨 놓았다는 뜻이다. 오늘 마르크스주의를 조금이라도 주의해 본 사람이라면, 그것 역시 품삯을 박탈하는 것이요 노동자의 ‘여분의 가치’를 남겨 놓은 것임을 알 것이다. 마르크스는 지난 세기의 사람으로서, 그가 쓴 〈자본론〉이라는 책에서 자본가는 자본을 투자하여 공장을 세우고 노동자를 소집하고 고용하여 생산함으로 상품을 판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그들이 번 돈은 자본을 투자하여 번 것인가 아니면 노동자의 노동력으로 번 것인가? 나는 이 일에 대해 어떤 것이 옳고 어떤 것이 그른가를 연구할 흥미가 없다. 나의 흥미는, 그들이 생각하고 있는 ‘노동자의 여분의 가치’를 가져가는 것은 다름 아닌 노동자가 노동력으로 번 돈을 고용주가 가져가는 것이라는 데 있다. 가령, 노동자가 일 원을 벌었다 하자. 사실 그것은 이 원을 벌 수 있는데, 그중에 일 원은 고용주가 남겨 놓은 것이다. 야고보는, 주인이 주지 아니하고 남겨놓은 삯이 소리지른다고 말하고, 또한 그것이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다”고 말한다. 오늘 중국에서의 이러한 환경의 변화에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손이 있다. 결코 이 지상의 오분의 일의 사람들이 우연히 갑작스럽게 이러한 환경을 당한 것이 아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안배하심이 조금도 없다고 말할 수 없다. 나는 거기에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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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락하며 정욕에 빠지고 자기를 살찌게 하여
하나님의 심판받기를 예비함

5절에서 야고보는 부한 자들이 물질과 금과 은을 쌓아 두는 것에 대해 그들을 책망했다. 내가 진실된 말을 하거니와, 이 세상에 지금 이 시대처럼 그렇게 많은 부자가 있은 적이 없었다. 또한 어느 시대에도 노동자의 여분의 가치가 이렇게 많고 부자가 많은 적이 없었다. 또한 그들의 많은 부는 노동자의 임금을 남겨 놓음으로써 많아진 것이다. 이뿐 아니라, 이 부한 자들의 누림 또한 이전에 없었던 것이다. 중세기 때에는 귀족들이 상당한 누림을 갖고 있었다. 중국에서 지난 한두 왕족에서 오직 한두 왕가만이 이러한 누림을 가졌었다. 역사에서 우리는 이렇게 많은 부자가 있는 것을 보지 못했고, 또한 그들이 이렇게 많은 것들과 좋은 것들을 누린 시대를 보지 못했다. 사람들이 물질적인 것을 누릴 뿐 아니라 육체를 방종 가운데 두는 일도 상당히 많다. 여러분이 눈을 반만 뜨고 보더라도 이러한 일들을 볼 수 있다. 부자들이 많고, 부자들의 재물도 많으며, 노동자들의 품삯이 박탈당하는 것도 많다. 이것이 이 시대의 특징이다.
한번은 어느 형제가, 어떤 사람이 끼고 있는 백금 반지는 항상 새것 같다고 말했다. 만일 그의 반지가 녹슬었다면 아마 끼고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은 마치 여기 성경에서 말한 것처럼 금과 은이 녹슨 것과 같다. 사람들이 도모하는 것은 누림이기 때문에, 일단 녹이 슬면 그것을 버린다. 녹이 슬었다면, 그것은 누림직하지 않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물건을 이천 년까지 쓸 수 있을 정도로 쌓아 둔다. 이때문에 풍족한 자들은 중년기가 지나면 장수하기를 구한다. 그에게 끝없이 누릴 수 있는 재물이 있고 이천 년까지 써도 다 누릴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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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더 많이 누릴 수 있도록 장수하기를 구하는 것이다. 야고보는 5절 하반절에서 “도살의 날에 너희 마음을 살찌게 하였도다”라고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뜻은, 마치 가축을 기르는 사람이 가축을 잡기 전에 반드시 그것을 살찌게 하는 것과 같다. 한번은 어느 자매가 시골에서 닭 세 마리를 가지고 와서 복주에 있는 한 형제에게 먹으라고 준 적이 있었다. 이 형제는 닭이 아직 충분히 살찌지 않았다고 느껴 그것을 즉시 잡지 않고 며칠간 더 길러 좀더 살찐 다음에 그것을 잡기로 했다. 이것이 바로 여기서 말하는 것의 의미이다. 오늘 재물을 쌓아 두고 즐기는 것을 탐하는 사람들은 자기 마음을 살찌게 하는 것이다. 이전에 없었던 그들의 연락과 방종은 그들을 살찌게 하는 것이다. 어느 날 살찌도록 키워졌을 때 하나님은 심판하러 오실 것이다. 하나님은 도살하러 오실 것인데 그날이 바로 그들이 멸망당할 날이 될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마땅히 가야 할 길
―모든 것을 버리고 가난하기를 자원함

그리스도인의 소망은 정세의 변화에 있지 않고, 재물로 점유당한 데에서 구원받고 벗어나는 것이다. 야고보서는 1장부터 5장 끝까지, 결코 그리스도인이 부자가 될 수 있거나 부한 자가 될 수 있음을 인정하지 않았다. 먼저 야고보서는 교회 안의 가난한 자가 믿음에서 부요하다고 말하고(2:5), 5장에 와서는 부자들이 어떠한 일을 당할 것인가를 말한다. 세상 조류는 사람들이 다 재물과 물질을 쌓아 두는 데로 기울어지고 있다. 그러나 야고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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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에게 길이 ‘참으라’(5:7)고 말한다. 이것은 당신의 가난한 상황을 바꾸려 하지 말고 세상의 영을 좇지 말라는 뜻이다. 세상의 영은 모든 사람이 재물을 주의하는 것이지만, 우리 그리스도인은 우리의 가난한 상황을 바꾸거나 변개시키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 그리스도인은 주님이 오시는 날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될 것임을 본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나는 여러분 홍콩에 있는 형제자매들이 영적인 진보와 생명에 있어서 내륙에 있는 형제자매들보다 삼사 년 낙후되지 않기를 바란다. 오늘 성령은 다만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르라고 여러분을 부르고 계신다. 그러나 공산당의 해방 구역에서는 주님의 감동하심과 성령의 부르심이 사람에게 모든 것을 버리라고 할 뿐 아니라, 또한 환경이 당신으로 하여금 모든 것을 버리지 않으면 안 되게 만든다. 이 세상은 불과 같이 당신에게 도망가라고 말한다. 이 세상은 당신의 살을 먹는 것 같고, 당신을 살찌게 만든다. 오늘 홍콩에서는 환경의 압박이 없고 다만 주님의 부르심이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형제자매들이 기회를 붙잡아 주님의 성령의 은혜로운 부르심을 따라 모든 것을 버리고 전체가 나와서 주님을 섬기기 바란다. 이번에 내가 복주에서 상해로 돌아갈 때 얼마나 많은 형제자매들이 내 앞에서 울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는지 모른다. “만일 제가 당신의 말을 일찍 들었더라면 형제자매들 뿐 아니라 교회도 무언가를 누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제가 괴로워하는 것은 물건을 잃어서가 아니라 이러한 물건을 잃어버림으로 형제자매들과 교회로 하여금 그것을 조금도 누리지 못하게 하고, 가난한 사람도 그것을 얻지 못하게 하고 복음도 그것을 얻지 못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각지에 편지로 이와 똑같은 보고를 해 준 형제들도 있다. 만일 우리가 기회를 붙잡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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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부르심을 듣지 않는다면, 어느 날 우리 모두는 주님께서 아무것도 얻지 못하시고 교회도 가난한 사람도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는 것이 가장 큰 고통임을 느낄 것이다.
야고보서 5장은 말세의 징조로서 주님이 다시 오시기 전에 반드시 발생할 일이기 때문에, 여기서 야고보는 우리에게 계산을 잘하라고 한다. 우리는 일찍 이러한 것을 잘 계산해 두어야 한다. 신약 성경은 마태복음부터 계시록까지 다 교회가 가난한 사람을 친구로 삼고 부자를 적으로 삼아야 한다고 말했다. 언제나 가난한 사람에게 믿음이 있다고 말하고, 그들에게 복음이 전파되며, 가난한 사람의 기도를 하나님이 들으신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은 부자가 될 준비를 하지 말아야 하고 또한 부자가 될 생각도 하지 말아야 한다. 오늘 홍콩에 있는 여러분들이 모든 것을 버린 것과 해방 구역에 있는 사람들이 모든 것을 버리는 것에는 차이가 있다. 우리는 야고보가 말한, 재물은 불같이 사람을 사르며 사람의 살을 먹는다고 한 것을 이미 보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재물을 얼싸안고 불태워져서는 안 되며 또한 그것이 우리 살을 먹도록 해서도 안 된다. 그러므로 한 면으로는 헌신을 말하고, 다른 면으로는 도피해야 함을 말하는 것이다. 오늘 우리 손에 재물이 있다면, 형제자매들과 가난한 사람을 위해 그것을 내보내고 드릴 수 있기 바란다. 나는 여러분 모두가 “나는 가난하게 되도록 강요당하지 않고 자원하여 가난하게 되는 길을 가기 원합니다. 하루하루 나는 단순한 사람이 되어 하나님의 자녀들과 함께 가난해지기를 원합니다. 모세가 행한 것처럼, 하나님의 백성 중에 왕궁에 거하는 자가 없으므로 나도 거기에 거하지 않기 원합니다.”라는 사상을 갖기 바란다. 여러분이 이렇게 할 때, 교회는 간증이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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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은 기묘한 백성임

익양에 있는 형제자매들이 공산당에게 심문을 받을 때, 그들의 뼛속 살속까지 심문을 받았었다. 그들은 예리한 검보다 더 예리하게 심문을 받았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 형제자매들을 보고 기이함을 느꼈다. 그들은 사람들이 일을 하지 않을까봐 균등하게 하도록 사람들을 강요했다. 그러나 우리들은 능동적으로 이것을 실행했다. 그들은 균등주의가 사람을 게으르게 하므로 성경의 균등주의(고후 8:14-15)는 옳지 않으니, 우리 형제자매들에게 익양현 내에서는 균등주의를 가질 수 없다고 알려 주었다.
우리로 말하면, 우리는 형제들 서로간의 사랑으로 인해 균등하지만 그들의 안목으로 볼 때, 그렇게 하는 것은 사람을 게으르게 하므로 옳지 않다고 했다. 그러나 우리의 균등은 사람을 게으르게 하지 않는데, 이것이 그들로 하여금 이상하다고 느끼게 했다. 세상 사람들에게서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에게서는 이루어질 수 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이다. 세상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 기묘한 무리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기독교 사회주의를 주장한다는 말이 아니다. 우리는 다만 이러한 행위를 가질 뿐이다. 그리스도인의 행위는 기독교의 교리와 교의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속에 얻은 생명을 따르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행위는 전혀 교리나 교의의 문제가 아니라 완전히 생명의 문제이다. 아버지가 아들이 집에 돌아오는 것을 볼 때, 그는 어떤 규정에 따라 그를 껴안고 입맞추는 것이 아니다. 다만 탕자가 돌아오는 것을 볼 때, 자연히 그를 껴안고 입맞추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내적인 생명을 따라 행하기 때문에 세상적인 길을 가려고 해도 갈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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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간증

1925년에 영국에 운송 사업을 하는 한 형제가 있었다. 한번은 그가 팔천여 톤이나 되는 한 척의 큰 화물선이 십 일 후에 도착한다는 전보를 받았다. 바로 그때 한 형제가 그의 집에 있었는데, 그는 이백 파운드의 수표를 그에게 써 주면서 그것을 복음 사역을 위해 쓰도록 그 형제에게 위탁했다. 그 형제가 나가자마자 그는 그 팔천여 톤 되는 화물선이 문제가 생겨 바다에 침몰하게 되어 배의 모든 화물을 전부 잃어버렸다는 전보를 받았다. 그는 즉시 벨을 눌러 그 형제를 다시 들어오게 했다. 그러면서 그에게 화물을 실은 배가 침몰하였으므로 수표를 다시 한 장 써 주어야겠다고 말했다. 그는 원래 수표를 받아서 찢어버리고 오천 파운드짜리 수표로 바꿔 쓰면서, “당신은 빨리 가셔서 이것을 주님이 쓰시게 하십시오.”라고 말했다. 그 형제는 그가 정신 이상이 된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배가 침몰되었다면 응당 조금 적게 고쳐서 이백을 오십으로 해야 옳을 것이다. 그 형제가 그에게 무엇 때문에 이렇게 했느냐고 물으니까, 그는 “화물을 실은 배가 침몰한 것은 하늘로부터 하나님이 보내신 급한 전보로서, 저에게 땅에 재물을 쌓아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재물을 제가 관리하도록 주시지 않았기 때문에, 이 돈이 아직 제 손에 있을 때 속히 주님이 쓰시도록 이것을 내보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그 형제는 눈물을 머금고 그 수표를 받아가면서, “나는 이렇게 일하는 사람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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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이 다시 오실 징조를 봄으로
헌신의 부르심을 좇아감

내가 여기서 이러한 말을 하는 것은 여러분에게 모금하는 것이 아니다. 이 세상에 있는 형제자매들에게 주님이 다시 오실 날이 가까웠음을 알려 주는 것이다. 우리는 재물이 아직 쓸 수 있고, 아직 우리 손에 있을 때를 틈타 그것을 주님께 사용해야 한다. 야고보는 이 단락의 말씀에서 우리에게 노사 분규의 결과가 어떠하다는 것을 알려 주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가 주의하는 바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에게 주님이 다시 오신다는 것을 알려 주는 것이다. 내가 큰소리로 외치거니와 “주님의 오심이 가까웠다!” 우리가 혹 다른 징조는 보지 못할지라도, 여기의 징조는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길이 참으며, 징조가 나타날 이때를 틈타서 재물을 우리 손에서 급히 내보낼 수 있어야 한다. 나는 주님이 두 번째로 오실 때, 우리 중에 그분의 두 번째 오심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이 없기 바란다. 처음 오셨을 때 미치지 못한 것으로 족하고, 첫 번째 기회에 따라가지 못한 것으로 족하다. 두 번째 오심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하고, 두 번째 기회에 따라가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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