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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의 역사


수원교회사 2021-04-12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cafe.chch.kr/suwonch/98048.html

한국교회의 역사

(왕중생형제님은 한국인으로 대전 대덕이 고향이며.한국이름은 권익원이다. 일제시대 때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로 건너 가셨고 . 대만에서 회심후 왕중생으로 개명하셨다. 1966년 위트니스리에 의해 한국의 복음을 위하여 보내어졌으며.이때 왕중생형제님께서는 대만 정부로 부터 연금을 받고 있었는데. 한국의 정책이 이중국적자들은 하나의 국적을 같도록 하여서 대만의 국적을 포기함으로. 왕중생에서 한국이름인 권익원으로 바뀜과 동시에 대만 정부로보터 받던 연금은 상실되었다. )

이희득 형제님의 간증

왕형제님은 19세때 그의 부친을 따라 중국대륙으로 가서 군인이 되었다. 이후에 대만에 와서 심각한 폐병에 걸려 희망이 없다고 느끼고 자살을 시도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다행이도 그는 복음을 들어 구원을 받게 되었다. 그런 후에 왕형제님는 교회 안에서 봉사를 하게 되었는데. 주로 타이난에서 하였다. 1965년에 이상수 형제님이 타이베이에서 특별집회를 할때 한국에는 주의 회복이 없다는 말씀을 듣고 주님으로 부터 무거운 부담을 받게 되었다. 왕중생 형제님은 30여년간 한국을 떠나 있었기 때문에 한국어을 잘할수없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주님의 음성을 거절하였으나 내적 부담은 오히려 더욱 무거워져 이상수 형제님을 찾아가 교통하게 되었다. 이상수 형제님은 그때서야 비로서 그가 한국인 임을 알게 되었다.

1966년 초에 왕형제님는 한국에 있는 친척들에게 편지를 써서 연락하게 되었고. 그해 9월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가 한국을 떠난지 30여년의 시간이 지났기 때문에 그 당시 왕형제님은 한국어를 한마디도 이해 할수 없었다. 그리고 그의 친척은 그가 많은재산를 가지고 돌아오리라 기대 했으나. 그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이 돌아오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의 아내는 한국에서 30년 동안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재혼하지 않고 삯바느질을 하면서 생계를 꾸려오고 있었다.

왕형제님은 귀국 후 집을 열어 하숙집을 운영하였고. 몇명의 학사장교들이 그집에 묵게 되었고. 또한 간단한 완구를 제작하여 생계를 이어갔습니다. 1968년까지 단지 그들 일가 네명만이 구원을 얻었을 뿐이었다. 그해 저는 대학을 졸업하고 군에 입대 하였는데 학사 장교 생활을 대전에서 하게 되어 왕 형제님의 집에 거하게 되었다. 저는 왕형제님이 한국에서 처음얻은 사람이었다.

대전은 한국에서 주의 회복이 시작된 곳이다. 처음 왕형제님을 뵈었을때 그는 한국어를 능숙하게 하지는 못했으나 그의 생활이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는 것을 알수있었다. 저는 그의 집에 2년간 거하면서 마치 한 집안 식구처럼 되었다. 제가 그의 집에 머물기 전에도 많은 학사 장교들이 거기에 거하였고. 이후에도 많은 사람들이 거했으나 주님은 단지 저 한사람 만을 얻으셨다.

후에 왕형제님은 대전에서 덴마크 선교사가 설립한 한 선교단체을 접촉하게 되었는데. 그들이 복음에 대한 인식를 갖고 있었기에 함께 집회를 시작할수 있었다. 1970년 제가 서울로 올라 왔을때 몇명의 중국 형제자매들이 쉬 자매님의 집에서 집회를 하고 있었다. 쉬 자매님의 님펴은 중구 영사관에서 일을하고 있었다. 저는 서울의 집회에 참가한 첫번째 한국인이었으며. 이후에 저의 여동생도 집회에 참석하였고. 그다음 한국의 형제 자매들이 교회안으로 인도 되었디.

1972년 첫번째 전국 특별집회를 가졌는데 육칠십명의 형제자매들이 함께 모였다. 이때 왕 형제님은 그리스도와 십자가와 교회를 전 하셨다. 왕형제님은 한국어가 능숙하지는 못하였으나 능력으로 충만 하였다. 그 집회는 실로 성령의 능력과 말씀이 충만하였다. 마치 천만의 천사들이 우리를 둘러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덴마크에서 온 선교사들 조차 눈물을 흘리며 “할렐루야”를 외치고 있었다. 저는 그 집회에서 나의 생명이 완전히 바뀌었다.

그 특별집회 후 한국에 교회들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광주에서 한 자유 단체가 연결되었고 그 단체가 주의 회복으로 둘어왔다. 또한 수원에서 새로운 사람들이 얻어졌는데 목사들도 있었고. 그들은 목사직을 내려놓고 주의 회복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들은 힘든 막노동을 하면서 생계를 꾸려 나갔다. 그들은 매우 큰 댓가를 지불하고 주님을 따른 것이었다.

그후 대전의 한형제가 대구로 이주하여 대구 와 부산에서 주님의 간증이 일어났다. 1972년 지금은 한국에서 30여곳의 교회가 있으며 약 2000여명의 형제자매들이 있다.

1982년 1월 제20회 전국 특별집회를 가졌으며 후에 10일간의 청년 특별집회가 있었다. 이 특별집회를 통해 왕 형제님의 전 존재는 거의 소진 되었다. 왕 형제님은 그의 모든 피와 땀을 형제자매 들에게 쏟았는데 특별히 청년들에게 그러했다. 청년 특별집회가 끝난 후 왕형제님은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왕형제님의 심장과 하나 남은 폐에 병이 있었는데. 그가 그렇게 오래 살수있었던 것은 참으로 기적과 같았다. 그리고 1982년 2월 1일 병원에 2주동안 있으면서 그는 자신이 주님을 뵐때가 되었음을 알았다.그리고 주님의 품으로 안식하셨다.

*장오신 형제님의 간증*

왕중생형제님은 한국인으로 대전 대덕이 고향이며.한국이름은 권익원이다.한국에서의 회복은 왕중생형제님에 의해 시작되었다. 일본이 한국을 억압하자 한국에서는 애국지사들이 일어났는 데 그중에 왕중생 형제님의 가정이 있었다.왕중생형제님의 가정은 항일가정이었다. 형제님은 결혼하자마자 독립운동을 위해 아버지를 따라 만주로 건너갔다.그리고 왕성화로 개명하고 중국인이 되어 항일전쟁에 참가하였다.전쟁이 끝난후 국민당을 따라 대만에 와서 심각한 폐병으로 베이터우에 있는 병원에 입원하였는데 장상택형제님 과 홍친청형제님이 왕중생형제님을 인도하여 주님을 알게 되었다.

구원받은후 왕중생형제님은 주님을 사랑하였고 전시간으로 주님을 섬기기 원했다. 그러나 아무도 그가 한국인 인줄 알지못했다. 1965년에 이르러서 위트니스리형제님이 특별집회에서 한국에 아직 주의 간증이 없다는 말씀을 하셨고. 하나님은 왕 형제님안에서 역사하기 시작하셨다. 1966년 왕형제님은 장오신, 장상택 형제님과 교통하면서 자신은 한국인이고 한국에 친척이 있다는 사실을 밝히고 한국에 갈 부담이 있다고 말하였다.

장상택 형제님의 간증

한국에 간증이 처음 시작될 때는 매우 어려웠으며 왕 형제님이 한국에 돌아가 1년이 지나도 단지 4명의 가족만이 구원받았을 뿐이었다.1955년 부터 나는 왕형제님과 베이터우에서 함께 교통하고 동역하였다. 비록 나중에 그가 남부로 내려가서 일을 하였지만 우리는 여전히 봉사에 있어서 항상 교통을 하였다. 그리고 그가 한국에 간 후에도 우리는 여전히 항상 교통하고 중보기도 하였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길을 열어놓으셨을때 나는 한국에 가서 그를 보고자 하는 부담이 있었다.

대전에 갔을때 이희득형제님이 그의 집에서 하숙하고 있었는데. 그 당시 우리가 할수 있덨던 것은 기도 밖에 없었다. 한국의 기독교는 매우 흥황하여 눈을 들어 보는 곳마다 십자가가 있는 뾰족한 건물이 이었고. 서울에 많은 곳에 예배당이 있었으나 영적인 상황은 너무나 황량하였다. 우리는 길을 얻기가 매우 어려워서 다만 기도하였다. 그 후 조금씩 왕 형제님의 친척과 친구사이에서 구원받는사람들이 있게 되었다.

1972년 내가 다시 갔을때 평택과 대전 광주등지의 몇몇 교파에서 우리가 가서 말씀 전하는 것을 환영하였다. 이렇게 하여 우리 두사람은 함께 동역하여 말씀을 전파하였다. 약 1년이 지난 뒤에 각 교파를 돌아다니며 간증하고 주님의 말씀을 해방함으로 한 무리의 주님을 원하는 사람들을 얻게 되었다. 점차적으로 그들이 교파에서 나와 지방마다 몇 명밖에 되지는 않지만 주님의 간증이 시작되었다.서울교회도 이와 같았는데 먼저는 쉬 자매님의 집에서 기도를 하였고 그 뒤 교파안에서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들어오게 되었으며 인수는 점진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하였다.

대전도 이와 같이 형제회였던 덴마크 선교사의 단체를 발견하고 그들과 교회의 빛을 교통하고 난 다음에 일부의 사람들이 그 모임에서 나오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대전에서의 모임이 조금씩 견고하게 되었다.

왕중생 형제님께서는 좋은 성격을 갖고 있었기에 어떤 일을 할때 철저하고도 단순하게 처리하였으며 생명과 교회를 매우 강조하였다. 다른 면에서 기도로 말씀먹기와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그들의 길이었다. 한국교회의 찬송은 매우 특별하였는데 두꺼운 찬송가를 모두 외울정도로 찬송을 하였다. 한사람이 찬송을 시작하면 모두 따라서 함께 찬송을 불렀고. 찬송을 부를때 모두가 찬송의 영안으로 들어가 영을 해방하였다.성도들의 온 존재가 찬송 안으로 들어갔기 때문에 집회는 매우 달콤하고 성령이 충만하였다.그래서 기독교에 있는 사람들이 일단 오기만하면 찬송과 집회에 매혹되었다.

그리고 일년에 두차례 8월과 1월에 전국 특별집회를 열어 애나하임에서 열린 라이프 스타디 훈련집회내용을 가지고 성도들에게 공급하였다. 왕형제님이 특별히 우리가 훈련의 메세지를 가지고 갔을때 많은 공급과 빛을 얻었다고 나에게 간증하였다.

이상수형제님의 간증

주님은 기묘하신 분이시다.주님은 어떤 지방을 위하여 어떤 환경하에서 한 사람을 예비하신다. 주님은 중국을 위하여 워치만니 형제님을 예비하셨다. 주님은 한국을 위하여 왕중생 형제님을 예비하셨다. 한국사람들은 매우 진취적이면서도 매우 비밀스럽다. 그래서 중국인이 주의 회복을 한국에 가져간다는 것은 실로 어려웠다. 만일 한국에서 태어났다가 이후에 중국인이 된 왕중생 형제님이 없이 중국어를 하는 중국인이 한국에 가서 주님의 일을 시작하려고 했다면 그 어려움은 너무나도 컸을 것이다.

나는 남쪽에 있던 한 형제의 소개로 처음 왕중생 형제를 처음으로 만났다. 그때 나는 그가 중국인 같지 않다고 느꼈지만 그가 한국인 이라고는 결코 생각하지 못했다. 이것은 한국인이 비밀스럽다는 것을 증명한다. 1965년에 내가 해외에서 돌아왔는데 그가 나에게 한국에 갈 부담이 있다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그렇다면 주님께서 형제님을 인도 하실 것이니 가십시오. “라고 말했다. 당시 그는 결코 마음을 열어서 자신이 한국인 이라는 것을 말하지 않았다. 시간이 상당히 흐른후에 이 비밀이 드러났다.

왕형제님은 실로 주님께서 한국에서의 주의 회복을 위하여 예비한 사람이었다. 그는 중국에서 거의 30년을 보냈지만 그의 피속에는 여전히 한국의 피. 곧 비밀한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대외적으로 크게 드러나게 일하지 않고 비밀한 방식으로 사역을 하였다. 이것은 옳다.만일 당신이 한국에 대히 조금 알고 그곳에 가서 일하고 싶다면 왕형제님의 방법을 취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어려움이 발생할 것이다. 이러한 비밀한 방법이 없다면 일을 시작할수없고 시작해도 실행할수 없을 것이다. 주님께 감사한다. 그는 그다지 많은 메세지를 전하지 않았고 다만 그리스도가 생명이신 것과 교회를 말하였다.

그리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과 주님의 말씀을 기도로 읽는 것을 실행하였으며 찬송을 불러서 영을 해방 하였다. 찬송을 불러 영을 해방하는 것에 대해 말하자면 나는 한국 교회들이 으뜸간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영이 입으로부터 흘러나올 뿐 아니라 어께 에서도 흘러나왔다. 그들은 온몸으로 찬송을 불렀으며 몸을 흔들어 가며 찬송에 도취해 있었다. 그래서 그들의 집회는 사람들을 정복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100퍼센트 옳은 것이다.

그러나 형제자매들이 알아야 할것은 교회는 한몸이며 몸은 한면으로는 지방적으로 나타나지만 또 한면으로 우주적인 것이어서 비밀스럽게 나갈수 없다는 것이다. 특별히 교회는 우주적인 한 새사람이며 장기적인 안목으로 볼때 혈액순환이 없으면 안된다. 바꾸어 말하면 이 새사람 안에 교통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어떻게 하시는 것이 좋은지 아신다. 주님은 먼저 왕 형제님을 통하여 한국에서의 일을 시작하셨고 합당하게 기초를 놓으셨다.

현재 주님은 왕 형제님을 데려가셨고 다시 이희득형제를 일으키셨다. 왕 형제님은 한국에 돌아간 후에 한국어를 사용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그가 있는 곳에 갔을때 그는 우리를 이해 했지만 우리는 그를 이해 할수없었다.그가 비밀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희득 형제는 영어를 할수 있어서 우리 두사람은 영어로 직접교통할수있었고, 전화든 편지든 통역이 필요치 않았다.다른 몇명의 한국인 형제들도 영문 편지를 써서 나에게 보내 왔다. 모두가 투명하며 열려있다고 느꼈다.

주님께서 하시는 것은 실로 매우 아름답다. 먼저 왕중생형제님을 예비하여 한국에서의 주의 회복을 일으키셨다. 후에 그분의 몸인 새사람을 위하여 이희득 형제를 얻으셨다.

우리는 몇몇 형제들의 간증을 통하여 주님의 역사를 보게 되어 참으로 기쁘다. 주의 회복은 주님 자신이 시작하실 뿐아니라 또한 그분께서 과정 안에서 모든 것을 바른 궤도에 들어가게 하신다. 그분은 어느때에 사람이 필요한지 아시며 시간과 지리적인 것과 상황과 환경에 있어서 합당하게 일하시고 예비하신다. 이로인해 우리는 실로 그분을 경배한다.



수원교회사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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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회사 (신론교회 역사가 추가됨)

나는 주님의 은혜로 2014년 10월20일 2번째 로마여행을 하게 되었다.그리고 로마 기행문을 쓰는 과정에서 2000년 교회사를 연구하게 되었고. 워치만니 형제님은 20대에 2000년교회 역사를 자세하고 정확하게 알고 계셨다는 것도 알게되었다. 그리고 주님은 지나간 과거에 수원교회안에서 어떻게 움직이시고 어떻게 수원교회를 돌보셨는지를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는 느낌도 갖게되었다.

우리는 역사를 통하여 계시의 소중함을 볼수있다.그리고 이러한 계시가 어떻게 확증되었는지를 볼수있는데.이것을 보는것은 우리모두에게 너무나 가치있는 일이다.또 이 일을 재고함으로서 주님께서 수원에서 어떻게 역사하셨는지를 보고 우리의 교회생활의 거울로 삼기를 주님께 기도한다. 그리고 수원교회를 세우신 분들중에는 이미 주님의 품안에 가신분들도 계신다.그래서 이번 겨울에 주님의간증을 지키며 교회생활안에 계신 한분 한분의 형제님들 과 자매님들을 만나야 할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수원교회는 1973년12월에 이윤규목사님(37세).윤명선형제님(38세).이창식형제님(30세).김명찬형제님(36세).박재호형제님(20세).호태구형제님(19세).고재운형제님(22세).이상영형제님(38세) 들에 의해서 간증이 세워졌다.나는 1975년도에 회복되었기 때문에 그자리에는 없었지만 나의 친구 박재호형제를 통해서 지난일을 간접적으로 알았을 뿐 아니라. 형제님들과 오랜 교회생활을 통하여 어는정도는 알고있었다.특별히 이윤규형제님께서 최초 목회를 신론교회에서하셨기 때문에 더욱더 그러하다.왜냐하면 신론은 나의 처가집이 있는곳이고 나의장인 이봉림집사님은 이윤규목사님 과 함께 신론 장로교회를 시작한분 중에 한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수원교회 역사를 쓸수없은 너무나 부족한 사람이지만 약간의 자격을 주신 주님께 감사한다.

1970년12월 이윤규 형제님께서 수원에 오셔서 서문장로 교회를 시작하였다.이윤규형제님께서는 서울 마포구 공덕동 장로교신학교를 졸업하시고 경기도 양평군 청운면 신론리에서 손수 자비로 예배당을 짓고 장로교회 목회를 하셨었다. 형제님께서는 일찍이 출애굽기와 로마서을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빛을 보게 되어 복음적인 목회를 하였다.

1971년 이윤규 형제님께서 수원에 오시게 된것은 수원영화 감리교회(수원시 영화동소재)에 권사님 이셨던 윤명선 형제님의 요청으로 수원으로 이주하시게 되었는데. 이것은 전적으로 주님의 주권과 안배하심 이었다. 윤명선 형제님은 1968년 수원으로 이주하셨다. 그리고 수원영화 감리교회 권사가 되었다.이때 형제님의 나이는 30대 초반이었다. 회계장부를 맡은권사로서 지방회에 참석 하였는데 그곳에서 그들의 회의는 성경적인 모습은 찿아 볼수없고 정치적이고. 세상적이며. 괴상한 상황을 보았고 또 감리교회의 목사님의 합당치 않은 일처리와 성도들간의 모함과 비방. 미움과다툼을 보고 나오게 되었는데. 이때에 주님는 성령에의한 순수하고 깨끗한 성경적인 교회를 세우고자하는 마음을 갖게 하셨다. 그래서 신론에서 목회하시던 이윤규형제님을 찿아가 수원에 오셔서 함께 교회를 개척하는 것이 어떻게는가. 라고 교통하게 되었다. 이렇게 된것은 이윤규형제님이 윤명선형제님의 매제였기 때문이다. 이것이 서문장로교회를 세우게 된동기가 된것이다.

1972년 4월 이창식 형제님께서 30세에 서울에서 이윤규목사님의 교회를 돕기위해 젊은 새댁이었던 이순자 자매님과 함께 수원으로 이주 하셨다.이렇게 된것은 이윤규형제님께서 마포구 공덕동신학교에 다니실때 고종사촌 이었던 이창식형제님을 우연치 않게 만나게 되었는데.그때 이형제님은 공덕동에 살았고 자주 만나서 교제을 통하여 복음을 받아들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창식형제님은 이윤규목사님. 윤명선형제님과 함께 서문장로교회 부흥을 위하여 자주 기도원에 가서 기도하였으며. 함께 복음을 전파하였다. 그리고 이창식형제님께서는1973년1월 주님께서 살기 어려운 시절에 안정된 직장을 주셔서 취직하시게 되었다.

이때 주님은 여러명의 젊은이들을 얻게하셨다. 젊은사람들 중에는 20대의 수원 병무청에 근무하는 젊은 여자 장교자매(최 중위)가 있었는데 주님께 대하여 아주 열심이있고 반듯한 자매였으므로 그녀는 청년회를 부흥시키는데 일조하였다.그녀는 후에 미국으로 시집을가서 목사 사모님이 되었으나 회복안에 는있지 않게되었다.

1972년 10월 수원종로 감리교회에 다니시던 김명찬 형제님께서 종로감리교회에 내분으로 서로 편을 갈라 싸우는 모습을 보고 실망하여 참된교회를 보여달라고 주님앞에 나아가 새벽마다 기도하였다. 이때 집으로 가던중 화서문삼거리 쪽에서 새로 개척을 시작한 서문장로교회를 발견하고 거기서 이윤규목사님을 만나게 되었는데 목사님은 성경대로 하나님은 섬기는 목사님인것을 발견하고 기쁨으로 교통을 나누게 되었다.그리고 매일아침마다 주님앞에 회개하며 교회를 부흥시켜달라고 부르짓으며 기도하였다. 김명찬 집사님은 우리가 다알듯이 내적 생명을 주의하는 형제님이셨다.

1973년9월 새벽에 주님께 눈물을 흘리며 간절히 기도할때에 주님께서 김집사님을 찿아오셨다고 한다.그리고 주님의임재를 체험한후 집사님은 자신을 주님께 모든것을 바치기로 결심하였다. 이후로 김 집사님은 성경에 대한 지식은 많지는 않았으나 성령의 능력이 있었다.그러므로 이윤규목사님은 김명찬 집사님께 수요일저녁 말씀을 전하도록 맡겼다. 1973년 11월에는 신론리 부흥회에도 같이가서 말씀을 전하였는데 그곳에서 성령의역사와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였다 . 아래 찬송가는 부흥회때 형제님들께서 복음을 위하여 부른 찬송가이다.

"내구주 죽으신 십자가 하나님 만족케 하셨네 그피로 내죄를 씻었네 찬송합시다.찬송합시다."

첫번째 찬송가의 원래 가사는 찬송합시다.찬송합시다,였다.그런데 이것을 구경합시다,구경합시다,로 바꾸어서 불렀다고 한다.

그것은 복음을 구경오라는 뜻에서 그렇게 한것이었다.

두번째 찬송가는 패니 크로스비가 부른 찬송가이다.

“예수를나의구주삼고 피와 성령으로 거듭나니 이세상에서 내영혼이 하늘의 영광 누리도다. 이것이 나의 간증이요 이것이 나의 찬송일세 나사는 동안 끊임없이 구주를 찬송하리로다.”

1973년 서문장로교회 근처 서문아파트에 사셨던 이상영형제님은 어린 아들2명을 잃은 슬픔을 격으셨는데.이상영형제님의 두 어린아들은 서문장로교회 교회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이로인해 이윤규목사님 과 고재운 형제님은 이상영 형제님을 찿아가 주님의 위로와 구원을 전하였다.이때 이상영형제님께서는 슬픔을 딪고 일어나 서문 장로교회 생활을 하시게 되었다. 이상영 형제님께서은 복음 전하는 은사를 주님께 받았다. 형제님께서는 어는곳에서나 언제나 주님을 복음으로 전하는 분이셨다.

그 당시 젊은청년이었던 신융식(1971년).박재호(1972년).호태구(1972년).고재운(1972년 8월) 형제님도 연결되어 함께 청년회 봉사를 하였다. 그러므로 이윤규목사님의 목회가 더 한층 강화되어 1973년도에는 교인수가 80여명으로 급속하게 증가되였다. 1972년 8월 영화감리교회 어원영권사의 추전으로 윤명선 형제님은 춘천의 시골 감리교회에 필요가 있어서 서문장로교회를 이윤규형제님께 맡기고 그곳에가서 1년반 정도 전도사로 목회를 하였다.

그러던 중에 수원에서 왕중생(한국인으로 대전 대덕이 고향임.한국이름 권익원. 일제시대때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로 건너 가심.대만에서 회심후 왕중생으로 개명하심 1966년 위트니스리에 의해 한국의 복음을 위하여 보내어짐)형제님을 모시고 특별 복음집회가 있다는 소식을 받고. 복음집회에 참석하여 왕중생형제님을 처음으로 알게되었고 형제님으로 부터 성경적인 교회에 대한 빛을 보게 되었다.그래서 춘천감리교회에 사표를 내고 수원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

1973년 11월 부흥회를 개최하기위해 부흥강사를 알아보고 있었는데 원주에서 목회하셨던 황태일 목사님으로 부터 성경적인 복음을 전하는 분이 계시다는 말을 듣고 그분들과 접촉하게 되었다. 그때 왕중생 형제님께서 보내신 세분의 형제님들께서 오셔서(문병윤.정이모.미국형제인 요한) 왕중생이라는 분을 부흥강사로 초청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때 왕중생형제님(중국어를 매우 잘하셨음)과 윤금석형제님(중국어를 잘하셨음)과 문병윤형제님께서 복음집회를 위하여 수원에 오시게 되었다 . 그런데 마치그분들의 모습은 주님께서 보내신 천사처럼 평화가 가득한 얼굴로 빛나고 있었다.그리고 그날 저녁 왕 형제님께서 말씀은 전하시는데 하늘에서 직접내려와서 말씀을 전하는 분 같았다.

요한 복음 3장16절을 플어서 말씀을 전해주셨는데 이전에 우리모두는 너무 잘 알고있는 말씀이었지만 이것은 너무나 새로운 말씀이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을 이땅에 보내셨는데 이분이 하나님이시다. 문둥병자와 같은 타락한 죄인인 우리을 위하여 주님은 죄인의 모양으로 오셔서 우리가 받아야 할 심판을 우리 대신 십자가에서 피흘려 돌아가셨다.그리고 예수님은 생명주는 영으로 오셨다. 그리고 마지막날에 내주하시는 그리스도를 전하셨는데 이제 그리스도는 영으로 우리와 연합되셔서 우리안에 사시는 분이시다. 라는 말씀에 놀라게 되었는데 이것은 우리가 전에 그리스도가 내주하는 분이라는 것을 듣도.보도 못한 새로운 말씀에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날 집회에참석한 많은이들이 감동되어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고 성령의 충만을 체험하게 되었다. 그때부터 수원교회는 장로교로부터 큰 전환을 하게 되었다.

복음집회가 이틀이 지난후에 왕중생형제님께서는 성경에 나타난 교회는 건물이 아니고 구원받은 믿는이들의 연합체일뿐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에 성경적이지 않은 간판은 내려야하고 내리지 않으면 나는 더 이상 집회를 할수없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4분의 형제님들께서는 왕중생 형제님의 말씀이 성경적인 올바른교회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성경적이지 않은 교회 간판을 내리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그때 형제님들의 회의를 통해 서문장로교회 간판을 내리게 되었으며. 정식으로 수원교회 집회소 간판을 달고 떡을 떼기시작하였다.이것이 1973년 12월 수원교회 간증의 시작 이다.

그후 어떤 집사는 간판이 내려진 것을 보고 누가 간판을 떼었는가 라고 하며 화를 내며 안절부절하였다. 진리에 대하여 깨달음이 없던 사람들은 스스로 안나오게 되었다. 그러므로 교인의 수가 점점 감소하여 주님께 분별된 40여명(남은사람들은 주로 젊은이들이었다.) 의 성도들이 수원교회의 시작인수가 되었다. 그리고 얼마지나지 않아 집주인이 간판이 바뀐것을 보고 집을 빼달라고 하였다.

이렇게 된것은 악한 자가 수원교회 집회소를 빼앗기 위해 주인을 매수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장소에 이름을 바꾸어 서문 밖 장로 교회라는 간판을 달았다. 그러므로 형제님들께서는 서문근처 영화동 김명찬 형제님집 마당으로 옮겨 천막집회소를 짓고 그곳에서 수원교회생활을 지속하게 되었다.

1974년 수원교회가 회복된후 신론에가서 부흥집회를 하였다. 이때 신론리와 갈운리의 믿는이들이 주의 회복안으로 회복되었다.이때 고재운형제님은 신론교회 부흥집회에 참석하였는데 그곳에서 전도사로 주님을 섬기는 김영분자매님께 매혹되었다.그것은 김영분자매님의 신앙이 주님께 사로잡힌 분이시고 주님을 사랑하는 매우 강한 영을 가진 분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비천한 장소인 수원 천막집회소에서 왕중생형제님의 주례로 결혼식을 하였다.장소는 초라했지만 그 곳은 마치 주님이 태어나신 말 구유 처럼 하나님의 은헤가 있고.주님의 임재가 있는 영광스러운 곳 이었다.

그리고 수원교회는 이윤규목사님께 월급을 공급해줄수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윤규 목사님께서는 김명찬 형제님의 집 작은 방으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뻥튀기 기계를 사서 뻥튀기를 만들어 판매하며 생활을 하셨으며. 시멘트 브럭을 만드는 작은 공장에서 힘들게 일을 하며 생활 하였다. 고되고 힘든생활을 사셨지만 형제님께서는 주님을 위하여 사시는 분이셨다.이를 본 성도들은 너무 안타까워 눈물을 흘리기도 하였다. 만약 형제님께서목사의 길을 계속 가셨다면 성공할수있었던 목회였을 것이다.그러나 형제님께서는 땅에 속한 부귀와 영광을 취하지 않으셨다. 주님의 목적을 위하여 고난의 길를 택하였고. 수원교회 간증을 세우신 분이셨다. 그런데 안타갑게도 형제님께서는 1993년에 일찍히주님의 품안으로가셨다.

이윤규형제님은 경기도 양평군 청운면 갈운리에서 태어나셨다.1964년 말경에 이윤규형제님께서 복음을 위해 신론리에 정착하였다. 이렇게 된것은 양평군 청운면 갈운리에서 일어났던 성령의 부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1960초에 양평군 청운면 갈운리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의 시작이있었다. 이윤규형제님의 큰형님께서 술에 빠져 지네는 분이셨다.그래서 “우리는 저형님때문에 집안이 망한다라고 둘째 형님이 말하는 것을 들었다.” 그러므로 집안을 구하기위해서 예수를 믿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갈운초등학교에 예수를 믿는 여선생이 있어서 만나 예수믿는것을 의논하는 과정에서 예수믿기로 작정하고. 갈운리에다 예배당을 짓고 목사님을 초빙해서 집회를 한후 큰 형님께서 교회 개척을 시작하였다.

그래서 온식구가 다 예수를 믿기 시작하였는데 시골에 대 종가집이었기 때문에 집안과 친척과 동네 사람들로 부터 엄청난 핍박을 받았다. 어느해에 부흥회를 하게 되엇었는데 그곳에 모인 무리가 회개하며 하나님게 부르짓을 때에 그곳에 있던사람들이 모두 오순절 성령의 체험을 하게 되었다. 그후 각 곳에서 심지어 서울에서도 각색 병든자와 귀신들린 사람들이 밤낯으로 모이게 되어 치료를 받고 하는 등 야단이 났었다. 말씀의 진리도 없이 성령의 능령과 역사만 충만 했었다.그러므로 그곳은 통제도 안되고 제제도 안되는 과정에서 아마 사탄의 역사도 있었던것 같다.

이때 갈운리 교회는 목사와 여러명의 장로가 있을 정도로 있을정도로 규모가 큰 교회로 세워젔다. 이인규형제님도 갈운교회 장로였다.그 황태일 목사님이 성령의 체험을 한 많은 젊은사람들(7-8명)을 신약에 기록된 대로 둘씩 각 고을로 보내어 복음을 전파하게 하였다.그때 이윤규형제님과 어떤 젊은이도 함께 신론리로 보내졌다. 후에 이윤규형제님만 남아서 신론리에서 교회를 개척하게 되었다.

이윤규형제님이 이봉림 형제님의 가정과 이원순자매님 가정 봉화 자매가정과 최길순자매님 얻어 신론리에서 신론 장로 교회가 시작되었다. 이때 이원순자매님은 이전 강원도에 살때부터 주님을 믿었으므로 신론리에 교회가 세워지는 것을 보고 너무 기뻐하였다.그리고 공회당에서 모이기도 하고 추운 겨울에는 방에서도 모였다. 영림서 땅의 전나무를 허락받아 많치 않은 식구들이지만 온 식구들이 함께 예배당을 짓기 시작하였고. 이원순자매님가정은 큰 미루나무를 기증하여 예배당 대들보로 썼다고 한다.이윤규형제님은 부모로 부터 물려받은 땅을 팔았다. 이렇게 하여 신론장로교회가시작 되었다. 그후에 사탄은 동네 사람들을 사용하여 예배당 앞에다 상여를 두는 집을 짇고 교회 다니는 사람들을 핍박하였다. 그렀게 하였던 사람들은 후에 오래 살지못하고 병들어 죽었다고 한다.그시절 의 생활은 너무나 어려웠다. 재력가 믿는이였던 미원회사의 형인사람은 각지 교회를 다니면서 선교를 위해서 재정적인 지원을 해주었다.그때 4000원을 받았는데 얼마나 고마웠던지 지금도 잊어지지 않는다. 그분은 장로회 계통의 연결로 시골의 어려운 교회들을 도운 분이었다.

1965년 이윤규형제님께서 서울 마포구 공덕동에있는 장로교 신학대학에 입학하여 목회를 하시면서 신학공부를하였다.그러므로 주중에 이윤규 형제님께서 안계시므로 성도들이 돌아 가면선 설교를 하며 교회생활를 하였다.1968년경 이윤규형제님께서는 서울에 있는 장로교 신학대학을 졸업하시고 신론리에서 목회를 계속 하였다. 1971년에 윤명선형제님께서 신론을 방문하였다. 그리고 이윤규형제님은 이인규 장로님께 교회를 맡기고 수원으로 이주하였다. 이인규장로님께서 갈운리에서 오셔서 신론장로교회을 돌보셨다. 71년 말에 김영분자매님께서 전도사로 신론에 오셨다.이때 김영분자매님은 하나님께 기도를 많이하여 성령의능력이 충만한 전도사 였다.

1975년에 영화동 거북시장 근처 평화 목욕탕 2층에 새로운 집회소를 마련하여 그곳에 모이기 시작하였다.이때 나는 워치만의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책의 도움으로 로마서의 구원에 대한 빛을 통하여 수원교회생활을 하게 되었다.이때 수원교회 성도들은 모두가 천사처럼 밝게 빛나고있었다. 성도들이 서로 사랑하고 신언하며 그리스도를 누리는 빌라델피아 교회생활을 실행 하였다.

그러나 기쁨의 찬 누림의 교회생활은 2-3년이 지난후 형제님들 가운데 서로 하나되지못하는 상황이 싹트게 되었는데 그것은 성경 지식이 증가 하게 되었으므로 각자의 의견과 주장이 나왔기 때문이었다.그때 집회상황은 각자가 머리가되는 상황이었다. 한지체가 영이라고하면 다른 지체는 육이라고 말하고.서로의 주장을 내세우며 심지어 성경책을 집어던지며 서로 다투기 까지하였다.

그러므로 왕중생형제님께서 오셔서 집회도하시며 공급을 해 주게 되었는데. 그때는 잠시 상황이 좋아지는 듯했으나 여전히 하나가 되지 못하여 교회가 전진하지 못하고 기쁨과 누림을 같지 못하게 되었다.그러므로 교회안에 합당한 질서를 세워야 할필요가 있으므로 왕중생형제님께서 1976년에 수원교회 직분을 안배해주셨는데 윤명선 형제님을 수원교회 대표장로로 임명하였다.

나도 그 자리에 있었으므로 간증할수있다. 그러므로 그때부터 수원교회 인도를 윤명선형제님께서 하시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인도체계를 부인하는 몇몇 형제님들은 함께하지 못하고 수원교회생활을 떠나게 되었다. 그리고 한국교회는 일년에 2차례 전국특별집회가 있었고 대만에서 봉사하시는 워치만니 형제님의 동역자들께서 오셔서 한국교회에 많은 공급을 주었다. 대만의 동역자 형제님들의 말씀은 우리가 이전에 듣지못했던 영적인 새로운말씀이었기 때문에 한국교회에 새로운 생명력을 주었다.

1982 년 왕중생형제님께서 주님품으로 가셨다. 그리고 한국교회는 서울을 비롯하여 여러지방에서 분열되어 교회가 하나되지 못한 길을 가게 되었었다.그러므로 교회는 전진하지 못했고.교회생활의 기쁨은 사라지고 복음이 전파되는데 방해가 되었다. 대만의 동역자들 과 위트니스리형제님의 도움으로 1987년부터 한국교회는 하나의 간증을 회복하였고 1988년 부터 사역을 긴밀히 따라가게 되었다.

1980대를 거치면서 주님께서는 한국교회를 다루셨다.우리의 자아와 천연적인사람을 처리하셨다고 말할수있다.이러한 환경을 거치면서 한국교회는 한단계 생명이 성숙하게 되었다.예를 들면 1991년 어느날 윤명선 형제님께서 나를 찿아 오셔서 목양해 주셨다. 이전에 나는 지기를 싫어하는 자아가 강했던 형제였다.그래서 형제님과 나는 80년대에 감정의 골이 있었다. 그러나 이때 윤형제님은 이전의 윤형제님이 아니셨다. 이때의 형제님은 말년의 야곱처럼 어떤형제도 받을수 있는 마음으로 넓혀지셨다.

1994년에 있었던 사건을 하나 소개 하겠다.수원교회 초기 교회생활에서 함께 교회생활을 하였던 김진영 형제님이 계셨는데. 유명선형제님과의 사이가 좋지 않아서 수원교회 생활를 떠났었다. 나는 두분 형제님께서 화해 하지 못한 것으로인해 마음이 무거웠다. 그리고 이러한 상태로 주님앞에 가서는 안된다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나는 두분 형제님들께서 화해하여야 한다는 부담을 가지고 있었다.

1994년 어느날 두분 형제님들께서는 만나게 되었다. 이때 윤형제님께서는 잘 잘못을 떠나서 김진영형제님께 지난과거의 모든것을 용서해 달라고 말하였다. 그러므로 김진영형제님께서 정자동 선경마그네틱공장앞에있던 수원교회 집회소에 나오신적이 있었다. 그러나 김진영형제님의 수원교회생활은 회복되지는 않았다.그후 10여년이 지난 어느날 김진영형제님께서 주님품으로 가셨다는 연락을 받았다.

1996년 위트니스리 형제님께서는 한국교회 장로 형제님들 60여명을 애너하임으로 초청하여 6개월의 장로훈련을 진행하셨다. 윤명선형제님께서 미국에서의 장로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신 후 정선으로 가시게 되었다.그리고1997년 이창식형제님께서 수원교회를 인도하셨다. 그리고 얼마 안되어 부산에서 안태우형제님께서 수원에 오셨다.그리고 1998년 수원교회는 두개의 집회소로 나뉘어봉사하게 되었다.

이창식형제님께서는 1집회소에는 이창식.황영일 .황장성형제님을 안배하였고.2집회소는 고재운.강성희 안태우.김철배 형제님을 안배하여 봉사하도록 하였다. 2003년 이창식형제님께서는 갑자기 수원교회 인도직분을 내려놓으신다고 선포하셨다.왜 이창식 형제님께서 그렇게 하셨는지 우리는 알수없다.

그리고 수원교회는 1.2집회소로 나뉘어 봉사하면서 성도들 사이에 1.2집회소 관념이 생기게 되었다.그러므로 아이들 조차도 서로 우리집회소관념을 가지고 경쟁하고 시기하고 대립하는 상황이 되었다.

2004년 윤명선 형제님께서는수원교회의 분열된 상황을 보시고 하나로 모이도록 인도해 주셨다.그리고윤 명선형제님과 고재운형제님과 강성희 형제가 수원교회를 인도하도록 하셨고. 1집회소의 모든 봉사를 내려놓고 2집회소의 봉사체계안으로 들어가도록 선포 하게 되었다.이렇게 하신것은 자신을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공과를 배우도록 인도하신것이라고 윤형제님께서 말씀하셨다.

수원교회가 하나로 모이게 된후 2005년 오유성형제님과 임홍형제님의 교통을 통하여 아주대학교 앞쪽에 학생센타와 수원교회 집회소를 구입하고 이주하게 되었다. 2008년 형제들의 야심과 시기와 타툼으로 고재운형제님께서 안타깝게도 수원교회 봉사를 내려놓고 여주로 이주하셨다. 오랜시간동안 나는 고형제님과의 아름다운 동역이 있었지만후에 형제님의 봉사에 누를끼친것을 후회했다.형제님께서 봉사를 지속하지 못하게 된것에 대한 나의 주님앞에 책임도 있었기 때문에 형제님께 용서를 구했으며 수원을 떠나지 마시기를 구했지만 결국 형제님께서는 여주로 이주하지 않으면 안되신것 같다.

지나온 과거 42년 수원교회의 역사를 회고 해 볼때 많은 믿는이들이 수원교회생활을 거쳐 갔지만 교회 안에 남아있는 성도들은 많지 않다. 그때마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께 쓰임은 받았으나. 회복안에 있지 않고 떠나 갔다. 그리고 어려움 과 고난속에서도 간증을 지키신 분들도 계신다. 나는 간증을 지키신 분들을 통하여 많은 생명의 공급을 받고 온전케 되었으며 생명이 자랄수 있었다. 분열되지 않고 하나의 간증을 지킨다는 것이 하나님앞에 얼마나 큰 축복인지 알수 있었다. 이와같이 수원교회의 역사는 헌신의 역사였다. 어떤 고통과 어려움. 고난이 있어도. 자신의 영광과 장래를 위하여 살지않고 모든것을 주님께 다 드린 아름다운 헌신이 수원교회를 건축하게 된것이다.

(위 글은 2015년1월과 2월에 걸쳐 윤명선형제님.김명찬형제님.이창식형제님.고재운형제님,윤영자 자매님,이원순자매님들로 부터듣고 증언해주신것을 토대로 기록하였다.)



수원교회사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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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1월 14일

나는 주님의 은혜로 2014년 10월20일 2번째 로마여행을 하게 되었다.그리고 로마 기행문을 쓰는 과정에서 2000년 교회사를 연구하게 되었고. 워치만니 형제님은 20대에 2000년교회 역사를 자세하고 정확하게 알고 계셨다는 것도 알게되었다. 그리고 주님은 지나간 과거에 수원교회안에서 어떻게 움직이시고 어떻게 수원교회를 돌보셨는지를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는 느낌도 갖게되었다.우리는 역사를 통하여 계시의 소중함을 볼수있다.그리고 이러한 계시가 어떻게 확증되었는지를 볼수있는데.이것을 보는것은 우리모두에게 너무나 가치있는 일이다.또 이 일을 재고함으로서 주님께서 수원에서 어떻게 역사하셨는지를 보고 우리의 교회생활의 거울로 삼기를 주님께 기도한다.

그리고 수원교회를 세우신 분들중에는 이미 주님의 품안에 가신분들도 계신다.그래서 이번 겨울에 주님의간증을 지키며 교회생활안에 계신 한분 한분의 형제님들 과 자매님들을 만나야 할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수원교회는 1973년12월에 간증이 세워졌다.수원교회 간증의 시작은 주님께 부름받고 순수하게 주님의 사랑하는 젊은 두분의 형제님들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이윤규형제님께서는 1968년 서울 마포구 공덕동 장로신학교를 졸업하시고 양평군 청운면 신론리에서 손수 자비로 예배당 을 짓고 장로교회 목회를 하셨었다.

형제님께서는 일찍이 성경을 연구하는 가운데 출애굽기와 로마서을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빛을 보게 되어 분명한 진리를 전하셨으며.복음적인 목회를 하셨었다. 그당시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얻는 것을 전파하는 사역자가 많지않을 때 였었다.그러므로 목사님께서 설교하실때 우리는 “아무것도 할수없고 하나님께서 모든것을 하셨다.”라고 전파하셨는데 교인들 중에는 “왜 우리가 할수없다고 하지. 우리는 할수있는데”라고 말했다고 한다.이것은 이윤규목사님의 설교가 다른 목사님들의 설교와 같지 않았기 때문인데 이 목사님은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서 무었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신일을 구경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은 우리의 노력이나 행함으로 받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하신일을 보고 믿음으로 구원얻는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었다.”출애굽기 14장13절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말고 가만히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이것은 하나님이 어떻게 구원을 행하시는지 구경하라는 것이었다.1970년12월 이윤규 형제님께서 수원으로 이주 하셨는데 이렇게 된것은 수원영화 감리교회에 권사님 이셨던 윤명선 형제님의 요청에 의한 것이었다. 이것은 전적으로 주님의 주권과 안배하심이었다. 윤명선 형제님은 1968년 수원으로 이주하셨다. 그리고 수원영화 감리교회권사가 되었다.이때 형제님의 나이는 30대 초반이었다.

회계장부를 맡은권사로서 지방회에 참석하였는데 그곳에서 그들의 회의는 성경적인 모습은 찿아볼수없고 정치적이고. 세상적이며. 괴상하고 이기적인다툼 을 보았고 또 감리교회의 목사님의 합당치 않은 일처리와 모함과 비방. 미움과다툼을 보고 나오게 되었는데. 이때에 주님는 성령에의한 순수하고 깨끗한 성경적인 교회를 세우고자하는 마음을 갖게 하셨다. 그래서 신론에서 목회하시던 이윤규형제님을 찿아가 “수원에 오셔서 함께 교회를 개척하는 것이 어떻게는가.” 라고 교통하게 되었다. 이렇게 된것은 이윤규형제님이 윤명선형제님의 매제였기 때문이며. 이것이 서문장로교회를 세우게 된동기가 된것이다.윤명선형제님께서는 어려서부터 주님을 믿고 구원을 받았다. 그리고 주님을 위해 살고자하였다.1968년도에 수원으로 이사와서 영화교회 권사가 되었다.그러나 영화교회의 어려움이 발생하여 생명과 말씀이 충만한 교회를 개척해야 한다는 부담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주님께 기도하였다 “주님,나는 혼자서 할수가 없읍니다.” 라고 기도하는 가운데 주님의 음성은 “신론리에 이윤규목사가 있지 않느냐”라는 음성을 들었다.그래서 1970년도에 이윤규목사님께서 수원으로 오시게 되었다.

처음에는 조그마한 집을 얻어 그곳에 간판을 걸고 서문장로교회를 시작하게 되었는데. 신자들이 많지 않았다. 그후 서문로타리에있는 큰 건물 2층에 예배당를 얻어 간판을 걸었더니 많은사람들이 보고 찿아 왔다.이윤규 목사님의설교는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서 무었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신일을 구경하므로서 하나님의 구원을 받을 수있다는 말씀에 많은 사람들이 모이게 되었다.

그리고 2-3년내에 교회가 부흥이되자 (“영화감리교회에 새로부임한 목사가 윤권사가 개척하는 교회가 어떤가를 살펴보고 있을때 교회가 증가한다는 소문을 듣고 그들은 윤명선형제님에게 제안을 하게 되었는데 정남감리교회목사가 수원으로 오고. 수원의 이윤규목사는정남으로 가고 윤형제님는 영화감리교회로 오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형제님께서는 이런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1973년 9월 서문장로교회에서 이정태 형제님이 오셔서 부흥집회를 하였다. 집회가 끝난후 윤명선 형제님께서는 목회를 위하여 춘천으로 되돌아갔다.(윤명선 형제님은 1972년에 춘천감리교회에 목회을 위해 1년간 그곳에가 있었었다.) 얼마지나지 않아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강한 내적 강권이 있어서 집에 돌아왔는데 수원 서문장로교회에서 또 부흥집회를 한다고 하여 부흥회를 한지 얼마 안되었는데 또 무슨집회를 한다는 것인가.

그래서 어찌된일인가하여 집회에 가보았는데 그 집회는 이전과 다른 놀라운 집회였었다. 집회 후에 왕중생형제님께서 나를보시고 이윤규형제님께 누구인가 묻고서 나에게 윤형제는 축복받은사람이라고 말씀하셨다.나는 부흥집회가 있다는것을 알지 못한상태에서 이곳에 오게되었는데. 이것은 주님께서 나를 생각치도 못한집회로 인도하셔서 주님의 회복을 알게 하신 주님의 손길이었다.

거의 같은시기인 1972년 종로 감리교회에 다니시던 김명찬 형제님께서 종로감리교회의 내분으로 서로 편을 갈라 싸우는 모습을 보고 실망하였다.그러한 분열때문에 김명찬형제님은 상처를 입고 낙심이 되어 “이곳에 있으면 안되겠구나”라고 생각하여 다른 교회를 찻게 되었다.그리고 주님앞에 참된교회를 보여달라고 주님앞에 나아가 새벽마다 기도하였다.

이때 집으로 가던중 서문삼거리쪽에서 새로 개척을 시작한 장로교회를 발견하고 거기서 이윤규목사님을 만나게 되었는데. 형제님은 성경대로 하나님은 섬기는 목사님인것을 발견하고 기쁨으로 교통을 나누게 되었다.그리고 매일아침마다 주님앞에 회개하며 교회를 부흥시켜달라고 부르짓으며 기도하였다. 김명찬 집사님은 우리가 다알듯이 내적 생명을 주의하는 형제님이셨고 성령의 능력을 체험한 분이셨다.

김명찬 형제님은 1973년 2월 23일 새벽에 예배당에서 기도 할때에 주님을 만나게 되었다. 5년전에 만난 주님은 밖에서 말씀하셨는데 지금 만난 주님은 인격대 인격으로 만난 주님이었다. 주님께 물으면 주님이 설명해주시고. 내가 눈물을 흘리며 기도할때에 주님도 눈물을 흘리시는 것을 보았다. 이때 형제님는 주님의 놀라운 사랑에 감동되었다. 그리고 죄가 떠올라서 주님께 회개하였다. 그리고 “예수로 나의 구주삼고” 라는 찬송을 부르며.매일 새벽마다 주님께 나아가서 부르짖으며 기도하며 찬송하였다.

“예수를나의구주삼고 피와 성령으로 거듭나니 이세상에서 내영혼이 하늘의 영광 누리도다. 이것이 나의 간증이요. 이것이 나의 찬송일세 나사는 동안 끊임없이 구주를 찬송하리로다.”

이윤규목사님의 설교는 항상 로마서와 출애굽기였다.”너희는 두려워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신 구원을 보라.” 라는 구절을 가지고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을 구경하라는 말씀을 전하셨다. 이것은 그분의 누림이었다.

1973년 신론리 부흥회를 가기위해 1호선 전철을 타고 갈때 이윤규목사님은 나에게 “우리는 설교하러가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어떻게 하시는지 구경하러 가는 것입니다. 라고 말씀하셨다. (이전에 나는 구경합시다. 라는 뜻이무엇인지 알지못했으나 형제님에 대한 기록을 보면서 이것은 그분의 누림이었었구나. 하는 생각를 가지게 되었다. 이윤규형제님을 그러한중심으로 늘 설교를 하셨다.)

내가 지금까지 종로감리교회에서 본것은 싸우는 모습 과 잘 믿으면 축복받는 다는 것이었으나. 이윤규목사님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하신 것을 보라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나는 “내가 지금까지 들어온 설교가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로구나.” 라고 깨닫게 되었다.

1973년 서문장로교회 근처 서문아파트에 사셨던 이상영형제님은 그때 어린 아들2명을 잃은 슬픔을 격으셨는데.이상영형제님의 두 어린아들은 서문장로교회 교회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이로인해 이윤규목사님 과 고재운 형제님은 이상영 형제님을 찿아가 주님의 위로와 구원을 전하였다.이때 이상영형제님께서는 슬픔을 딪고 일어나 서문 장로교회 생활을 하시게 되었다. 이상영 형제님께서은 복음 전하는 은사를 주님께 받았다. 형제님께서는 어는곳에서나 언제나 주님을 복음으로 전하는 분이셨다.

젊은청년이었던 신융식.호태구.박재호.고재운 형제님도 연결되어 함께 청년회 봉사를 하였다. 그러므로 이윤규목사님의 목회가 한층 강화되어 1973년도에는 인수가 80여명으로 급속하게 증가되였다.

1973년 11월 원주에서 목회하신던 황태일목사님의 연결로 왕중생 형제님께서 서문장로교회에서 복음집회를 하게되었는데 “하나님께서 거저주시는 선물로서의 구원 과 그리스도가 우리 생명이신것과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전하는 전혀새로운 말씀에 감동되었다. 왕중생 형제님는 부흥집회에서 “하나님는 하늘에만 계신것이 아니고. 우리안에 계시며. 주님은 생명의 떡”으로 오셨기때문에 우리는 “그분을 먹어야 산다” 라고 말씀하셨다. 그 집회는 우리를 놀라게 하였으며 하나님의 영과 임재가 충만한 집회였다.

왕중생형제님는 놀라운 말씀의 사역자이셨다. 복음집회가 이틀이 지난후에 왕중생형제님께서는 성경에 나타난 교회는 건물이 아니고 구원받은 믿는이들의 연합체일뿐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에 성경적이지 않은 간판은 내려야하고 내리지 않으면 나는 더 이상 집회를 할수없다고 말씀하셨다.그러므로 이윤규목사님께서는 집사님들과의 회의을 통하여 왕중생 형제님의 말씀이 성경적인 올바른 교회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성경적이지 않은 교회 간판을 내리는 것이 옳다고 결정하였다. 그러므로 이때부터 형제님들은 한마음 한뜻으로 서문장로교회 간판을 내리게 되었으며. 정식으로 수원교회 집회소 간판을 달고 떡을 떼기시작하였다.이것이 수원교회 간증의 시작 이다.그후 어떤 집사는 간판이 내려진 것을 보고 누가 간판을 바꾸었는가 라고 하며 화를 내며 안절부절하였다. 진리에 대하여 깨달음이 없던 사람들은 스스로 안나오게 되었다.

그러므로 교인의 수가 점점 감소하여 주님께 분별된 40여명 (남은사람들 대부분은 젋은이 였다)의 성도들이 수원교회의 시작인수가 되었다.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집주인이 간판이 바뀐것을 보고 집을 빼달라고 하였다. 이렇게 된것은 간판이 바뀐후 사탄은 어떠 사람 (영락교회 다니는 장로교인으로 추측되는) 을 통하여 집회소 건물을 빼았도록 주인을 매수하여 쫓겨나게 되었다.그리고 그들은 그장소에 이름을 바꾸어 서문 밖 장로 교회라는 간판을 달았다.

그러므로 형제님들께서는 서문근처 화서동 김명찬 형제님집 마당으로 옮겨 천막집회소를 짓고 그곳에서 수원교회생활을 지속하게 되었다. 천막으로된 집회소는 여기 저기 구멍이 있었서 나무와 스레트를 덧댄 초라한 곳이었다.그리고 1974년 이런 초라한 장소에서 고재운형제님과 김영분자매님께서는 왕중생형제님의 주례로 결혼식을 하였다.비록 그장소는 비천 했지만 그 곳은 마치 주님이 태어나신 말 구유 처럼 하나님의 은헤가 있고.주님의 임재가 있는 영광스러운 곳 이었다.

그리고 이윤규목사님에게 교회가 월급을 줄수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목사님은 시멘트 브럭을 만드는 작은 공장에서 고되고 힘든일을 하였으며. 곤란한 가운데 생계를 유지할수 밖에 없었다. 이때 형제님은 4명의 자녀를 두고 있었다. 생활은 어렵고 힘들었지만 형제님께서는 주님을 의지하고 감사하는 생활을 하였으며. 주님을 위하여 사시는 분이셨다.어느날 장안동에 사시는 박진숙자매님이(남편은 삼성전자 과장이었음) 이윤규목사님께서 일하시는 모습을 보고 안타까워 않아서 눈물을 흘렸다.

만약 형제님께서 목사의 길을 계속 가셨다면 성공할수있었던 목회였을 것이다.그러나 형제님께서는 땅에 속한 부귀와 영광을 취하지 않으셨다. 주님의 목적을 위하여 고난의 길를 택하였고. 수원교회 간증을 세우신 분이시다. 이윤규목사님은 교회를 위해서 자신을 주님께 바친 것이다. 이때 이윤규형제님과 한무리의 형제님들은 주님의 길을 택하였는데 그러한 길을 가게 하신분은 주님이셨다.그러므로 수원교회의 간증은 한무리의 형제님들의 동심합의 가운데 주님의 회복이 일어난 것이다.그런데 안타갑게도 이윤규형제님께서는 1993년에 일찍히 주님의 품안으로가셨다.

1975년 수원교회는 영화동 거북시장 근처 평화 목욕탕 2층에 새로운 집회소를 마련하여 그곳에서 모이면서 서로 사랑하고 신언하며 그리스도를 누리고 기쁨에 찬 교회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누림의 교회생활은 3년이 지난후 형제님들 가운데 서로 하나되지못하는 상황이 싹트게 되었는데, 그것은 성경 지식이 증가 하게 되었으므로 각자의 의견과 주장이 나왔기 때문이었다.그때 집회상황은 각자가 머리가되는 상황이었다. 한 지체가 영이라고하면 다른 지체는 육이라고 말하고.서로의 주장를 내세우며 다툼이 시작되었다.

그러므로 왕중생형제님께서 오셔서 집회를 인도 하시며 공급을 해 주었다. 그때는 상황이 좋아지는 듯했으나 여전히 하나가 되지 못하여 교회가 전진하지 못하고 기쁨과 누림을 같지 못하게 되었다.그러므로 교회안에 합당한 질서를 세워야 할필요가 있으므로 왕중생형제님께서 1976년에 수원교회 직분을 안배해주셨는데 윤명선 형제님을 수원교회 대표장로로 임명하였다.

그러므로 그때부터 수원교회 인도를 윤명선형제님께서 하시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인도체계를 부인하는 몇몇 형제님들은 수원교회생활을 떠나게 되었다.1976년 왕중생형제님께서 수원교회 질서를 세우기 위해서 수원교회 직분을 세우실때 윤명선형제님과 이윤규형제님이 인도하도록 선포하셨다.복수의 장로를 세우신것이다.그러나 그때의 성도들은 윤형제님만 세워다고 생각하여 어려움이 발생하게 되었다.

한면으로 성도들의 다툼과 어려움은 그들의 육체가 드러난 것이었지만.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우리의 자아가 폭로되었고 좌절되었다. 그것은 우리를 파쇠시키기 위한 주님의 치료하시는 사랑의 손길이었다.

그리고 한국교회는 매년 일년에 2차례씩 전국특별집회가 있었는데 집회는 주로 세상명절 기간에 있었다. 그당시 전국에서 주님을 사랑하는 많은 성도들이 모였는데. 대만교회에서 봉사하시는 워치만니 형제님의 동역자(장오신.장상택) 형제님들께서 오셔서 한국교회에 많은 공급을 주었다. 대만의 동역자 형제님들의 말씀은 우리가 이전에 듣지못했던 신선하고도 새로운말씀이었기 때문에 한국교회에 새로운 생명력을 주었다.

1982 년 왕중생형제님께서 주님의 품으로 가셨다. 그리고 한국교회는 서울을 비롯하여 여러지방에서 분열되어 교회가 하나되지 못한 길을 가게 되었다.그러므로 교회는 전진하지 못했고.교회생활의 기쁨은 사라지고 복음이 전파되는데 방해가 되었다. 대만의 동역자들 과 위트니스리형제님의 도움으로 1987년부터 한국교회는 하나의 간증을 회복하였고 1988년 부터 사역을 긴밀히 따라가게 되었다.

1980대에 주님께서는 한국교회를 다루셨다.우리의 자아와 천연적인사람을 처리하셨다고 말할수있다.이러한 환경을 거치면서 한국교회는 한단계 생명이 성숙하게 되었다. 1991년 어느날 윤명선 형제님께서 나를 찿아 오셔서 목양해 주셨다. 이전에 나는 옳은 것을 주장하는 자아가 강했던 형제였었다.그래서 윤형제님과 나는 80년대에 감정의 골이 있었다. 그러나 이때 윤형제님은 이전의 윤형제님이 아니셨다. 이때의 형제님은 말년의 야곱처럼 어떤형제도 받을수 있는 마음으로 넓혀지신 분이셨다.

1994년에 있었던 사건을 하나 소개 하겠다.수원교회 초기 교회생활에서 함께 교회생활을 하였던 김진영 형제님이 계셨는데 (그당시 김진영형제님은 1980년초 교회를 떠나 다른 교회에 다니고 있었다.)두분은 가까운 친척 이였다. 그러나 윤명선형제님과 교회생활의 분열로 인해 사이가 좋지 않아서 수원교회 생활를 떠났었다. 나는 두분 형제님께서 화해 하지 못한 것으로인해 마음이 무거웠다. 그리고 이러한 상태로 주님앞에 가서는 안된다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나는 두분 형제님들께서 화해하여야 한다는 부담을 가지고 있었다.

1994년 어느날 두분 형제님들께서 만나게 되었다. 이때 윤명선형제님께서는 잘 잘못을 떠나서 김진영형제님께 지난 과거의 모든것을 용서해 달라고 말하였다. 그러므로 김진영형제님께서 정자동 선경마그네틱 공장앞에 있던 수원교회 집회소에 나오신적이 있었다. 그러나 김진영형제님의 수원교회생활은 회복되지 않았다.그후 10여년이 지난 어느날 김진영형제님께서 주님품으로 가셨다는 연락을 받았다.

1996년 위트니스리 형제님께서는 한국교회 장로 형제님들 60여명을 애너하임으로 초청하여 6개월의 장로훈련을 진행하셨다. 윤명선형제님께서 미국에서의 장로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신 후 정선으로 가시게 되었다.그리고1997년 이창식형제님께서 수원교회를 인도하셨다. 그리고 얼마 안되어 부산에서 안태우형제님께서 수원에 오셨다.그리고 1998년 수원교회는 두개의 집회소로 나뉘어봉사하게 되었다.

이창식형제님께서는 1집회소에는 이창식.황영일 .황장성형제님을 안배하였고.2집회소는 고재운.강성희 안태우.김철배 형제님을 안배하여 봉사하도록 하였다. 2003년 이창식형제님께서는 갑자기 수원교회 인도직분을 내려놓으신다고 선포하셨다.

그리고 수원교회는 1.2집회소로 나뉘어 봉사하면서 성도들 사이에 1.2집회소 관념이 생기게 되었다.그러므로 아이들 조차도 서로 우리집회소 관념을 가지고 경쟁하고 시기하고 대립하는 상황이 되었다.

2004년 윤명선 형제님께서는 수원교회의 분열된 상황을 보시고 하나로 모이도록 인도해 주셨다.그리고 윤 명선형제님과 고재운형제님과 강성희 형제가 수원교회를 인도하도록 하셨고. 1집회소의 모든 봉사를 내려놓고 2집회소의 봉사체계안으로 들어가도록 선포 하게 되었다. 이렇게 하신것은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공과를 배우도록 인도하신것이라고 윤형제님께서 말씀하셨다.

수원교회가 하나로 모이게 된후 2005년 오유성형제님과 임홍형제님의 교통을 통하여 아주대학교 앞쪽에 학생센타와 수원교회 집회소를 구입하고 이주하게 되었다. 2008년 고재운형제님께서 안타깝게도 수원교회 봉사를 내려놓고 여주로 이주하셨다. 오랜시간동안 나는 고형제님과의 아름다운 동역이 있었지만 후에 형제님의 봉사에 누를끼친것을 후회했다.형제님께서 봉사를 지속하지 못하게 된것에 대한 나의 주님앞에 책임도 있었기 때문에 형제님께 용서를 구했으며 수원을 떠나지 마시기를 구했지만 결국 형제님께서는 여주로 이주하지 않으면 안되신것 같다.

지나온 과거 42년 수원교회의 역사를 회고 해 볼때 많은 믿는이들이 수원교회생활을 거쳐 갔지만 교회 안에 남아있는 성도들은 많지 않다. 그때마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께 쓰임은 받았으나. 회복안에 있지 않고 떠나 갔다. 그리고 어려움 과 고난속에서도 간증을 지키신 분들도 계신다. 나는 간증을 지키신 분들을 통하여 많은 생명의 공급을 받고 온전케 되었으며 생명이 자랄수 있었다. 분열되지 않고 하나의 간증을 지킨다는 것이 하나님앞에 얼마나 큰 축복인지 알수 있었다. 이와같이 수원교회의 역사는 헌신의 역사였다. 어떤 고통과 어려움. 고난이 있어도. 자신의 영광과 장래를 위하여 살지않고 모든것을 주님께 다 드린 아름다운 헌신이 수원교회를 건축하게 된것이다.

(위 글은 2015년1월과 2월에 걸쳐 윤명선형제님.김명찬형제님.이창식형제님.고재운형제님,이원순자매님,윤영자자매님들로 부터 듣고 증언해주신것을 토대로 기록하였다.)

(형제님 수원교회 역사를 두개로 만들었읍니다. 공개용과 비공개 용 인데요.비공개용은 너무 자세하고 신론교회 역사도 일부 있어서 비사로 남겨두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읍니다.그리고 윤영자 자매님을 만난후 수정이 불가피 했습니다. 수원교회 역사를 정확하게 알고 계신분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고재운형제님.검토해 보시고 수정하셔서 연락 주시면 좋겠습니다.)

*위 글은 2015년 11월 윤명선형제님과 김명찬형제님의 감수를 받아 완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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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시에 있는 티투스의 개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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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시에 있는 티투스의 개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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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시에 있는 티투스의 개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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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년에 발생한 로마제국의 수도 로마시의 대화재를 계기로

네로황제의 기독교인들에 대한 핍박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같은 해에 네로 황제는 유대지역의 신임 총독으로

플로루스를 파송하였습니다.

 

 67년에 로마군인들에 의한 약탈과 학살이 진행되어

예루살렘의유대인 3,600명이 죽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결국 그 사건으로 말미암아 로마군데 대한 유대인들의 반란이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과 갈릴리의 로마요새를 공격하였고,

로마 황제 네로는 베스파시아누스 장군(Titus Flavius Vespasianus)에게

6만명의 군사를 주어 그 반란을 진압하게 하였습니다.

 

그 군대가 예루살렘을 제외한 지역을 점령한 후

유대인들이 남아있던 예루살렘을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을 무렵

로마시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네로황제가 자살하였습니다.

 

네로의 죽음으로

갈바(Servius Galba Caesar Augustus)가 황제에 올랐으나

그도 반란으로 권력을 잡은지 7개월 만인 69년 초에 살해당하고

로마는 내전에 빠졌습니다.

 

그후 결국 베스파시아누스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황제가 된 이후 그의 공식 이름은 Caesar Vespasianus Augustus 입니다.

그의 황제 취임으로 인해 새로운 폴로비우스 왕조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새황제는 그의 큰 아들 티투스(Titus)에게

유대지방의 반란을 진압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의 아들 티투스가 이끄는 로마군대에 의해

예루살렘은 70년에 함락되고 말았습니다.

그 때에 예루살렘 성전은 불에 타 무너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예언대로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을 정도로

온 도시와 성전은 철저히 파괴되었습니다.

 

무너진 그 성전의 서쪽 벽만 남았는데

그것이 지금도 유명한 소위 '통곡의 벽'입니다.

그리고 살아남은 유대인 군사들은 사해 근처의 산 위의 요새

'마사다(Masada)'로 도망하였으나 결국 모두 자결하고 말았습니다.

그것이 73년의 일입니다.

 

그후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는 79년에 죽게 되고

그의아들 티투스가 황제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티투스가 황제의 자리에 오른 후

같은 해에 발생한 베수비우스(Vesuvius) 화산폭발은

근처의 폼페이를 비롯한 근처의 도시들을 역사에서 사라지게 하였고,

오랜 세월 역사에서 잊혀진 도시가 되었습니다. 

티투스는 과거에 폼페이의 총행정관이었습니다.

 

그 티투스는 예루살렘을 정벌후 로마시에 개선장군으로 돌아왔고,

그것을 기념하여 세워진 그의 개선문이 지금도 로마시에 남아있습니다.

로마시에 남아 있는 로마시대의 유적들 중에는 유명한 콜로세움이 있었습니다.

 

그 건축물은 베스파시아누스가 시작하여

그의 아들 티투스의 때에 완성한 것입니다.

그 티투스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멸망에 대한 예언이 성취될 때의 인물로서

교회사에 그의 이름을 남기게 되었습니다.

 

그가 황제 취임후 2년만인 81년에 갑자기 요절하였다고 합니다 .

 

티투스의 죽음으로 인해

그의 동생 도미티아누스가 황제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그는 자신을 신으로 숭배할 것을 명하였고,

도미누스 에트 데우스 노스테르("우리 주와 하나님"을 의미함)라는

칭호를 취하여 사람들에게 자신을 신으로 부르고 숭배하도록 강요하였습니다.

당시 많은 신들과 황제들을 숭배하던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별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이 일에 참여할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도미티아누스 통치 말엽에 혹독한 박해가

다시 그리스도인들에 닥쳤습니다.

아마도 사도 요한을 밧모섬으로 유배시킨 사람은 도미티아누스였다고 생각합니다.

 

요한 계시록은

이러한 시대적인 배경 가운데서 기록되었습니다. 그

리고 96년에 도미티아누스가 암살당하자.

그를 계승하여 원로원 의원이었던

네르바(Marcus acaocceius Nerva)가 황제가 되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비교적 관대하였는데

아마도 그가 요한을 석방시켰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워치만니의 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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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치만니와 목사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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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폐한 시기의 오늘날 사역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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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세대 집회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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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회복의 주된 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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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교회의 정상적인 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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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땅에서의 교회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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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역의 권위에 순복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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