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안 정복시대


성경과 교회사 2009-05-02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cafe.chch.kr/yeonggwangch/36960.html


 

모세가 애굽의 왕 바로에게 찾아가 이스라엘백성의 해방을 요청하였고, 거절하는 바로와 그 백성들에게 열번의 큰 재앙이 있은 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해방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를 지나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가는 광야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광야생활 40년이 지난 후 이스라엘백성들은 여호수아를 지도자로 가나안 정복전쟁을 시작합니다.

 

당시 가나안지역에는 레바논에서부터 유브라데에 이르는 넓은 지역에 퍼져 살고 있던 헷족속과, 유다 산지와 사해의 서부 산악지대에 살던 아모리족속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요단강 서편에는 기르가스족속, 세겜과 기브온성읍에는 히위족속, 예루살렘과 그 부근의 산지에 거주하던 여부스족속, 그리고 브리스족속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거의 함의 아들 가나안의 후손들이었습니다. 그리고 함의 손자 갑도림(Caphtorim)이 살던 지중해의 섬 ‘갑돌’, 즉 지금의 크레테에서 가나안지역으로 온 블레셋이 있었습니다.

 

가나안의 후손들이 살았던 지역이라는 의미로 ‘가나안’으로 불리던 곳이 블레셋이 살게 됨으로 다른 이름 팔레스틴이라는 이름이 생겨난 것입니다. 두 지명은 사실 같은 지역을 칭하는 것입니다.

 

그 블레셋족속은 가나안 남부 해안지역에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세일산에 거주하던 호리족속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민족이 가나안에 들어간 때는 B.C.1400년대 초입니다. 당시 중국은 중국 최초의 왕조로 알려진 ‘상’나라 때였습니다. 그 나라는 ‘주’나라를 비롯한 다른 나라에서는 ‘은’이라는 이름으로 불렀으므로 ‘은나라’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스스로의 나라 이름을 칭할때는 은나라를 세운 부족 이름인 ‘상’이라는 이름을 더 많이 사용했기 때문에 학계에서는 ‘상나라’라는 이름으로 통일해 부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인도에는 청동기시대의 도시문명이 있었습니다.

 

당시 그들은 이미 넓은 길과 배수구 등 잘 정돈된 도시와 가옥이 있는 도시문명을 갖고 있었으며, 메소포타미아지역과 무역을 통해 문명의 접촉이 있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중앙아시아에서 유목생활을 하던 아리아인들이 인도로 이동해 오게 되었습니다.

 

 그들을 인도 아리아인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아리아인들 중 이란고원에 정착한 사람들을 이란인이라고 부릅니다. 당시 일본이나 한국, 그리고 그리스지역을 제외한 유럽은 국가나 문명 이전시대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여호수아의 지도아래 있던 가나안정복시대는 그의 죽음과 함께 끝이나고 그 이후 시대를 우리는 사사시대라고 부릅니다. 즉 사사들이 활동하던 시대를 의미합니다. 당시 이스라엘민족은 통치하는 왕이 없이 제사장과 장로들이 중심이 된 사회였습니다.

 

그들은 여호수아와 같은 강력한 지도자가 없는 가운데 이웃의 블레셋, 암몬, 모압, 그리고 미디안 등 이방족속들의 공격과 괴롭힘을 당하였습니다. 이웃 족속들은 이미 도시국가 혹은 큰 제국의 형태로 왕이 존재하였습니다.

 

 ‘사사’라는 명칭은 지도자라는 뜻으로서,  그들은 여호수아의 죽음 이후 왕국시대가 시작될 때까지 이방 민족들의 압제로부터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했던 지도자들이었습니다. B.C. 14세기에서 11세기에 이르는약 350년의 사사시대는 철이 발견된 직후로서,  그 발견은 농기구와 무기 등 많은 분야에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철재무기를 처음 사용한 사람들은 소아시아반도를 중심으로 큰 나라를 형성했던 헷족속이었습니다.  이 기간에 헷족속의 제국이 무너지고, 중국의 은나라(상나라)도 멸망하고 ‘주나라’가 등장하였습니다. 그리고 유럽의 그리스에도 철기시대가 시작되었고 미케네문명이 멸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