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략하게 본 로마 제국사


교회사 2014-09-15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cafe.chch.kr/gwangju/81133.html
간략하게 본 로마 제국사

주 예수님의 성육신과 초기 교회에 대해 이해하기 위해서는 배경이 되는 로마 제국에 대한 역사를 볼 필요가 있다.

로마는 이탈리아의 중부에 있으며 주전 753년에 티베르(Tiber) 강에 연접한 일곱 개의 언덕 위에 세워졌다. 교회사에서 로마는 실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천 년 동안 로마의 수도였던 이 도시의 구석구석에는 초기의 사도들, 믿는 이들 그리고 수많은 순교자들이 복음과 진리의 전파를 위해 흘린 피와 땀으로 얼룩져 있다.

전설에 의하면 로마인의 시조는 전쟁의 신 마르스(mars)와
인간의 공주에게서 태어난 쌍둥이 형제이다.
이 쌍둥이 형제는 정치적 음모로 티베르 강변에 버려졌는데, 어미 늑대의 젖을
먹고 자랐다고 한다. 두 형제는 성장하여 숙부의 손에서 왕위를 되찾아 왔으나
이제 둘이 싸우게 되었다. 로마 성의 이름은 싸움에서 이긴
형 로물로스(Romulus)의 이름에서 비롯되었다.

주전 7세기에 에트루리아인들(Etrurians)이 이탈리아를 침입하여 로마를 점령하고 왕국을 세워 왕정을 실행하였는데, 역사는 이를 “왕정 시대”라고 칭한다. 왕정 시대의 사회는 귀족과 평민, 두 계급으로 나뉘어 있었다. 명의상 왕은 사법과 행정의 절대 권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실권은 귀족으로 구성된 원로원(Senate)이 쥐고 있었다.

주전 509년경에 라틴인들이 에트루리아인들의 통치를 물리치고 왕정을 폐지한 뒤 공화정이 수립되었는데, 역사는 이를 “공화정 시대”라고 칭한다. 주전 264년부터 146년까지 로마는 계속해서 카르타고, 시리아, 마케도니아, 그리스 등을 정복하였고 빠른 속도로 영토를 확장하여 대제국이 되었다. 주전 54년에 줄리우스 카이사르는 갈리아와 브리튼을 평정하고 훗날 제국의 전제 정치의 기초를 닦았다. 줄리우스가 죽은 뒤 양자인 옥타비아누스가 일어나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Marcus Aemilius Lepidus)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Marcus Antonius)를 물리치고 혼란스러운 삼두정치(三頭政治)를 마감하였다. 또한 주전 27년에 원로원에서 명명된 “아우구스투스(Augustus, 존귀한 사람)”라는 칭호 하에 옥타비아누스는 정식으로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가 되었다.

로마 제국의 세 시기

로마 제국 시대는 세 시기, 곧 전반기 로마 제국, 위기의 3세기, 후반기 제국 시대로 나뉜다.

(1) 전반기 로마 제국(주전 30년~주후 193년)

네 명의 성자 성당의 콘스탄티누스 벽화아우구스투스의 원수정(주전 30년~주후 14년), 클라우디우스 왕조(주후 14년~68년), 플라비우스 왕조(주후 69년~96년), 안토니우스 왕조(주후 96년~193년)를 포함한다. 전반기 로마 제국은 상대적으로 안정된 시기였다. 상업이 발달하고 통상 범위도 확대되었다. 노예의 노동력에 의존한 대농장 제도는 후퇴하였고, 대지주의 대농장이 소작인에 의해 경작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자유농의 수가 줄면서 사회계층의 변동이 심하여 사회 불안의 요인이 잠재되어 있었다. 이때 제국의 국경은 동으로는 유프라테스 강으로부터 서로는 스페인, 브리타니아(Britannia)까지 이르렀고 남으로는 북아프리카에 이르렀으며 북으로는 다뉴브 강과 라인 강까지 이르렀다.

(2) 위기의 3세기(주후 193년~284년)

세베루스 왕조(주후 193년~235년) 및 그 후 분열된 시기를 포함한다. 이 당시 제국의 위기는 경제 방면에서 충분히 표출되었는데 농업과 수공업이 쇠락하고 상업과 도시경제가 불황이었다. 정치 방면에 있어서 통치계급 내부에 분열이 있었고 백성들이 봉기하였으며 이민족이 침입하였다. 기독교가 신속하게 발전하였다는 것은 위기가 사람들의 정신세계에까지 깊게 침투하였다는 것을 반영한다.

(3) 후반기 제국 시대(주후 284년~476년) 

콘스탄티누스이러한 제국의 위기는 결국 제국의 멸망으로 이어지게 된다. 이 당시 로마 제국은 원수제(Princeps)에서 군주제(Dominus)로 전환되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Gaius Aurelius Valerius Diocletianus, 약 주후 243년~313년)와 콘스탄티누스(Flavius Valerius Constantinus, 약 주후 280년~337년)의 통치시기에 황제의 권력은 강화되었고 두 사람은 노예제도의 위기를 극복하려는 개혁에 힘을 다했으나, 노예제도의 위기는 날이 갈수록 더하였고 백성들의 봉기는 전국으로 퍼졌다. 395년에 황제 테오도시우스(Theodosius, 주후 346년~395년)가 죽은 뒤 로마 제국은 동서로 분할되었다. 서로마 제국은 로마를, 동로마 제국은 비잔티움(Byzantium)을 각기 수도로 정하였다.

4세기 이후 게르만 민족이 대대적으로 로마를 공격하였고 국내에서는 백성들의 봉기의 물결이 더욱더 높아졌다. 410년에 게르만 민족의 서고트족(Visigoths)이 지도자 알라리크(Alaric)의 인도 하에 이탈리아로 들어와 로마 성을 에워싸고 공격하였다. 성 내부에서 봉기를 일으킨 서고트족의 노예들이 성문을 열어 서고트족이 로마 성을 공격해 들어왔다. 육일 밤낮 동안 서고트족이 로마 성을 약탈하여 즉시 모든 거리가 피로 물들었다. 일찍이 전세계를 장악하였던 이 성이 이제는 오히려 약탈당하였다. 그 후 게르만 민족이 로마의 영토에서 많은 왕국들을 계속해서 세웠다. 이와 동시에 노예를 핵심으로 하는 백성들이 곳곳에서 반란을 일으켜 서로마 제국은 멸망 직전에까지 이르렀다. 476년 서로마 제국의 게르만 출신 용병 대장인 오도아케르(Odoacer)가 로마의 마지막 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Romulus Augustulus)를 축출하여 서로마 제국은 멸망하였고 이후로 서유럽은 봉건사회로 들어가게 되었다. 동로마 제국은 다른 역사적 조건 하에서 1453년까지 존속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