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에 이곳에 신언에 대하여 한번 기록한 적이 있습니다.
신언은 주의 회복의 항목중에 탁월한 것으로 워치만 니 형제님께서 성경을 통해 신언집회를 보셨고, 실행할 부담을 가지고 계셨지만, 당시 교회의 상황과 성도들의 상황은 니 형제님의 부담을 실행에 옮길수 없었습니다.
그후 위트니스 리 형제님께서도 동일한 부담을 가지고 계셨지만 역시 실행에 있어서는 많은 세월이 흐른후 1980년도 말에 비로소 주일날 한두사람이 말씀을 전하는 실행에서 모든 지체들이 신언하는 집회로 전환을 가졌습니다.
막상 메세지를 전하고, 듣는 것에서 모든 지체들이 신언하는 집회로 전환한후 교회는 한차례 배역이 발생했고, 초창기의 신언집회는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그 어려움은 바로 어떤 것을 말해야 할 것이냐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각자 성경을 추구하는 것도 다르고, 메세지를 추구하는 것도 다르고, 빛비춤받은 것도 다르고, 받은 느낌이나 부담도 다른데, 어디에 촛점을 두고 말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초창기의 신언은 말 그대로 모든것을 포함한 신언집회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창세기, 어떤 사람은 계시록, 어떤 사람은 체험, 어떤 사람은 메세지 추구한 내용.......
좋기도 하겠지만, 문제는 처음듣는 사람은 도데체 무슨말을 하는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온것이 바로 '생명의 양식'입니다.
성경을 순서에 따라 라이프스타디를 요약하고, 또 한면에는 예화나 만나등을 연재해서 성도들이 추구해서 한주의 내용을 신언해 낼수 있도록 한것입니다.
그후 1년 7차 사역의 말씀이 한국땅에 들어오기 시작한 이후로 이 사역의 말씀을 '오늘의 양식'으로 만들어 졌습니다.
과도기에는 '생명의 양식'과 '오늘의 양식' 두 가지 다 사용되었습니다.
어떤 교회는 '생명의 양식'을 사용하고, 어떤 교회는 '오늘의 양식'을 사용하였습니다.
이것때문에 사역을 따르니, 안따르니 하는 다툼도 생겼습니다.
그후에 이제는 모든 교회들에서 1년 7차의 특별집회를 기준으로 해서 오늘의 양식을 통해 신언을 해 오고 있습니다.
제가 이렇게 장황하게 신언의 역사를 이야기 하는 것은 신언집회가 이미 우리 가운데 20여년의 역사가 지나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신언은 놀라운것이고, 이것을 교회안에 가져오기 위해 선진들의 수고의 댓가와 희생이 따랐다는 것을 말해 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과연 20년이 지난 신언집회가 우리가운데 어느정도 수준에 올랐는가는 각자 점검해 보고, 재고해 보아야 할 문제입니다.
일전에 제가 신언을 할때 '오늘의 양식'을 보지 말고, 성경을 보거나, 아니면 따로 기록해 와서 하든지, 아니면 외워서 하든지, 아니면 조성해서 하든지 하라고 부탁한 일이 있을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익숙해 져서 알지 못하지만, 새로운 사람들이나 우리를 대적하는 사람들은 우리의 신언이 마치 오늘의 양식 한두군데를 읽는 것으로 오해하고 또 우리가 성경을 보지 않고, 오늘의 양식이나 메세지만 본다고 공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오늘의 양식 중 부딛치는 한두군데를 읽는 수준으로는 이미 20여년을 지난 오늘의 시점에서 부족함을 알아야 합니다.
물론 새신자들을 격려하기 위해 그들에게 한 부분이라도 읽어서 훈련을 하는 문제는 다른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회복안에 오래전부터 있어온 사람들이 지금도 신언할때 오늘의 양식을 읽는다면 그것은 충분히 재고해 볼 여지가 있습니다.
신언은 먼저 말씀이 있어야 하고, 그 말씀이 우리의 존재를 만져야 하고, 만진 말씀의 우리의 입을 통해 선포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말씀을 경작하고 수고하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
우리가 이러한 신언을 해 낸다면 처음참석하는 사람들이라도 우리 가운데 하나님이 계시다고 인정할 것입니다.
어제 주일 집회에 인터넷에 연결된 부부가 강원도 춘천에서 회복에 대해 궁금하여 김해까지 와서 집회에 참석했습니다.
오는날이 장날이라 수원에서 중고등부가 와서 중고등부 신언이 시작되었습니다.
분명히 20분간 중고등부 신언을 하겠다고 했는데, 30분이 지나도 계속 진행되었습니다.
저는 문제가 없지만, 회복에 대해 궁금해서 댓가를 지불한 가정을 생각할때 저는 가시방석에 앉아있는 것 같았습니다.
20분 한다고 했으면 20분에 제한을 받아야지 안그래도 우리 집회에 인도자가 없다고 이상하다고 하는데, 제한을 받지 않으면 더 많은 오해를 줄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례적으로 제가 신언마치는 시간을 12시 25분까지라고 두번이나 못박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집회 참석하기 전에 12시 반에 집회를 마친다고 말했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시간을 제한하지 않았다면 어제 집회는 중고등부가 많이 사용했기 때문에 어른 신언까지 마칠려면 언제 마칠지 모르는 상황이었습니다.
중고등부의 신언은 그렇다 치더라도 어른들의 신언은 염려한데로 오늘의 양식을 들고 읽는 수준이었습니다.
분명이 제 안에서는 그분들이 한소리 할 것이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분들이 시간을 주지않아 교통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차후 메일을 통해 교통할 여지를 남겨 놓았지만, 그것도 그들의 선택에 달려있습니다. 저는 메일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식사하면서 자매님이 말했습니다
" 책을 보고 읽는 것이 이곳에서 말하는 신언인가요?"
형제, 자매님들께서 이러한 질문을 받으신다면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저는 얼굴이 화끈했습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에 대화가 안되면 상대방에 대해 '이상이 없다'라고 위안해 버립니다.
새로운 사람들이 이상이 없는것은 당연합니다.
우리의 소극적인 부분때문에 그 이상없는 사람들이 영원히 이상을 보지 못하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부족해서 우리가 본 이상을 신실하게 실행해 나가지 못하는 것은 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나태해서, 우리의 의무를 다하지 못함으로 인해 나타나는 부족은 정당화 할수 없습니다.
이만하고 다시 한번 신언에 대해 원칙을 알려드리고자 합니다.
첫째, 자신이 새신자라고 생각하지 않거든 제발 오늘의 양식을 가지고 읽지 마시길 바랍니다. (소그룹에서 분명히 교통해 주시기 바랍니다.)
오늘의 양식의 내용을 무시하라는 말이 아니라 , 다른곳에 기록해서 읽든지, 옮겨 적기가 귀찮으면 외워서 하시길 바랍니다 .
성경을 들고 성경의 말씀을 읽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둘째, 신언은 밖에 있는 말씀이 내 존재안에서 역사하여 내 존재를 통과하고 나온 말이어야 합니다 . 다른말로 하면 조성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할려면 말씀이 내 안에 머물러 있는 시간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책을 보고 읽는 다면, 밖의 말씀이 내 입을 통해 바로 나온것입니다. 그것은 내 존재의 어떤 부분도 만지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구약의 말씀하는 방식입니다. 신약은 성육신의 원칙으로 객관적인 말씀이 사람이라는 존재를 통과해서 나오는 것입니다.
최소한 외우기라도 하면 밖의 말씀이 우리 뇌(머리)부분은 통과한 것입니다. 읽는것 보다는 훨씬 좋습니다
가장좋은 것은 우리 가슴(존재)를 통과하는 것입니다.(물론 제가 이렇다는 것이 아니라 원칙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
그래도 머리에 기억이라고 하면 언젠가 그 말씀이 가슴으로 내려오게 되어 있습니다.
단지 읽기만 한다면 읽는 순간 수증기 처럼 다 증발해 버려서 남아있는 것이 거의 없게 됩니다.
결론적으로 신언은
자신을 온전케 하고,
다른 사람들을 공급하며,
지체의 기능을 발휘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하는, 주의 회복의 놀라운 실행입니다.
이러한 이상을 한번더 새롭게 함으로써 우리 집회가운데 하나님이 표현되는 수준까지 전진하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