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6번 메세지의 한부분에서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것에 대한 정의를 다섯가지로 제시했습니다.
1. 그리스도를 체험한다는 것은 주님의 임재를 갖는 것이다.
2. 그리스도를 체험한다는 것은 빛을 얻는 것이다.
3. 그리스도를 체험한다는 것은 누림과 공급을 얻는 것이다.
4. 그리스도를 체험한다는 것은 생명이 자라는 것이다.
5. 그리스도를 체험한다는 것은 생명의 활동이다.
저는 이부분의 말씀에서 새롭게 느껴진 것은 생명의 활동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는 대부분 그리스도를 체험하는것에 대한 귀결은 우리의 생명의 자람에 촛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어떤 활동이나 움직임에 대해서는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것과 별개로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움직임에 대해서는 무감각하거나, 아니면 소홀히 하거나 , 아니면 어떤 특정계층의 전유물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번의 메세지에서 제가 도움을 받은것은 그리스도를 체험하는것에 대한 내적인 방면은 우리의 생명이 자라는 것이고, 외적인 방면은 이러한 생명의 정상적인 활동이라는 것입니다.
교회사를 볼때 내적인 생명을 중요시하는 한무리의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른바 속생명파의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잘아는 '오스틴 스팍스' , '바버자매' 워치만 니, 위트니스 리 형제님들도 이 속생명파의 연장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워치만 니 형제님의 책을 통해 바버자매님에 대해 기록한 부분을 보면, 형제님께서 거의 온땅에 영적인 사람들을 접촉해 보았는데, 속생명의 부분에서 바버자매님처럼 깊은 사람을 만나보지 못했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바버자매님을 생각하면 워치만 니 형제님의 고향인 '복주'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일평생을 보냈다고 생각하시겠지만, 실재로는 자매님은 왕성한 활동을 하셨습니다.
단지 알려지지 않은 것은 자매님께서 대부분의 선교사들이 한 것처럼 '상해'나 '남경'등 큰 도시에서 사람들의 관심을 받지 않고 , 작은 도시에 머물렀다는 차이입니다.
지금 남한땅에서도 어떤 지방에서는 시골에 머물면서 아무것도 하지않고 생명만을 관심한다고 하면서, 아무런 활동이나 영적인 움직임이 없이
교회에 대해 소극적인 사람들에 대해 높임을 받는 분들이 있습니다.
제 느낌은 그 소위 영적인 것이나 생명의 자람이 그렇게 깊지 않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제가 직접 만나보지 않았지만, 사역의 말씀과 교회사를 살펴보면서 얻은 결론입니다.
교회사안에서 생명이 성숙하고, 체험이 깊은 사람들은 결코 가만히 은둔생활이나 하고, 활동하지 않은 사람들은 거의 없습니다.
우리가 워치만 니, 위트니스리 형제님들을 '속생명파'에 분류하지 않는 이유는 이분들이 속생명이 깊지 않아서가 아니라, 성경의 진리를 실행하는 부분에서 훨씬 전진해서, 지방교회와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하는
실행의 부분에서 강하게 부각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이글을 통해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요점은
속생명만을 주의하고 강조하는 분들은 움직임을 대할때 항상 소극적으로 본다는 것입니다.
아니면, 한수 아래의 사람들의 활동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누가 뭐래도 움직이지 않습니다.
속생명의 주의하고 생명의 자람을 추구하는 것은 '고상하게' 보이고 젊잖게 보이지요.
그러나 움직임은 전혀 고상하지 않고 땀을 내게 하는 육체의 활동이 동반됩니다.
그리고 조금만 부주의 하면, 운동으로 전락하고, 부작용을 동반하게 됩니다.
실재로 교회는 이러한 어려움이 많이 있었고, 지금도 항상 어려움이 잠재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여기에서 되짚어 보아야 할것은 이러한 어려움은 그 움직임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이러한 움직임을 뒷받침해주는 생명의 성장의 부족과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것에 결핍에서 일어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역은 진리적인 면에서 1년에 여름과 겨울훈련집회를 통해 교회에게 공급합니다.
또한 다른 집회에서 교회의 움직임에 대해 인도해 오고 있습니다.
사역의 인도는 이러한 방면에서 균형잡혀 있으며, 마땅히 사역을 따르는 교회들로서도 이러한 방면에 동일하게 균형잡혀야 합니다.
교회의 움직임과 사역의 인도에 귀 귀울이고, 반응하고, 전진하길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