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10장에서 주님은
<누가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웃이냐>고 묻지 않고
<누가 강도 만나 자의 이웃이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런데 너무 많은 경우 누가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웃인지
그 사마리아사람처럼 이웃을 사랑해야한다는 말씀으로 오해합니다.
중간에 주인공과 조연이 뒤집히는 상황이 되고 마는거지요.
율법사는 주님께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는지 물었고
주님은 이웃을 사랑하면 된다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러자 율법사는 누가 이웃이냐고 다시 묻습니다.
누가 이웃인줄 알아야 사랑할 수 있지않겠습니까 하는 질문이지요.
주님은 직접 이웃이 누구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비유로 말씀해주십니다.
이 비유에서 율법사(사람들)는 자기가 바로 강도만난자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구해준 여행하는 사마리아인이 바로 이웃이며,
그 이웃을 사랑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진리를 잡아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 말씀은 우습게도 끝부분에서 뒤집혀서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사마리아인이라고 대답한 율법사에게 "너도 이와같이 하라!" 는 주님의 말씀을,
이제 이웃이 누구인줄 알았으면, 그 이웃을 사랑하고 영생을 얻으라는 말씀을,
불쌍한 사람들을 도와야한다는 세상의 <이웃돕기>로 바뀌어 버리는 슬픈 상황이 연출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강도만난자들이었습니다.
생명도, 물질도, 시간도, 양심도 ~~모든 것을 강도만난 비참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강도만난자들인 우리는 보좌를 버리고 이 땅으로 여행오신 그분에게 구출을 받았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구출하셨을 뿐만 아니라 주막인 교회 안에 우리를 두셨습니다.
주막은 먹고 마시고 쉬는 곳입니다.
주인은 이 강도만난 자를 위해 돌보아 줍니다.
사마리아인이 다시 올때 그동안 들었던 비용도 다 주겠다고 약속하셨거든요.
틀림없이 사마리아 사람은 이 주막으로 오실 것입니다.
강도만났던 우리는 이 주막에서 그분의 다시오심을 기다려야 합니다.
그분을 다시 만나고 싶다면 말입니다.
주막에서 우리가 할일은 우리의 참 이웃인 그분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다시한번 주님이 하셨던 질문을 상기하고 싶습니다.
누가 강도만난자의 이웃이겠느냐!
아멘. 바로 주예수님이십니다.
우리의 신분은 사마리아 사람이 아니고 강도만난 자임을 잊지 맙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