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라도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진리가 무엇이오?”
빌라도는 이렇게 말하고 나서,
다시 유대인들에게로 나와서 말하였다.(요18:38)
빌라도는 ‘진리가 무엇이오?’라고 묻기만 하고
왜 대답을 듣지 않고 바로 나갔었는지...
오늘 아침에는 이 부분의 말씀이 인상지어졌습니다.
유대인들의 고소로 말미암아 빌라도 앞에 나온
예수님께 빌라도는 여러 말로 질문하였습니다.
사실 그의 입장에서는 판단하기 어렵기도 했을 겁니다.
그런데, 진리를 말하는 예수님의 말씀에
‘진리가 무엇이오?’ 불쑥 말하고는...
예수님의 대답을 들을 생각을 하지 않고
빌라도는 곧바로 다시 유대인들에게 나와 버렸습니다.
‘나는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기 위하여 태어났고
또한 그것을 위하여 세상에 왔습니다. 누구든지
진리에 속한 사람은 내 음성을 듣습니다.’(요18:37)
어떤 경우에는 빌라도의 태도가 우리(저)에게도
적용될 수도 있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늘 진리를 찾고 갈급하는 것 같지만,
막상 우리 앞에 놓인 ‘참’ 진리에 대하여는
질문만 던져 놓고 그냥 지나쳐 버릴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나름대로의 기준,
즉 ‘진리’라는 것을 붙들고 살아갑니다.
(빌라도와 같은) 이방인들도 그러할 뿐 아니라,
주님을 영접하고 구원받은 사람들도
나름대로의 붙잡은 ‘진리’들로 가득합니다.
대표적인 종교인들이 그 당시 유대인들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진리’로 가득하기 때문에
참된 진리 앞에서도 ‘진리가 무엇이오?’ 말하고는
그냥 지나쳐 버립니다. 이방인이든, 믿는 이이든...
요셉의 창고와도 같은 풍성을 가진
주의 회복 안에서도 동일한 일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주의 회복의 초기 세대에서는...
말씀 안의 진리 하나에도 기뻐하였고,
몇 구절의 찬송가 구절에도 눈물을 흘리며
반복하여 입에서 떠나지 않을 정도로
부르고 또 불렀다는 간증이 지금도 넘쳐납니다.
그러나 오히려 너무나 쉽게 접할 수 있는 진리들이
오히려 그때보다 갈급함을 적게 할 수도 있습니다.
오히려 당연하다고 느낄지도 모르지만...
당연하다고 느끼는 그만큼 또한 무감각해질지도 모릅니다
빌라도는 비록 예수님께 약간은 우호적인 모습을
보였을지라도 결국 그분을 십자가에 내주었습니다.
‘진리’에 대하여 빌라도와 같은 태도를 갖는 것은
설령 그 ‘진리’가 앞에 서 있을지라도... ...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늘 필요한 것은 긍휼입니다.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게 보이고
부분적으로 알지만, 그 때에야 우리는 온전히 알 것입니다.
‘진리가 무엇이오?’라는 질문은 여전히 유효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