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적 견해 다른 이단시비, 정당한 방법론 아니다
기독시보(아폴로기아)
포이멘 2009-11-27 , 조회 (493) , 추천 (0) , 스크랩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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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적 견해 다른 이단시비, 정당한 방법론 아니다"

한국기독교 무엇이 문제인가? 누가 교회연합을 해치는가

기사입력 :2009-11-13 16:57

예장통합 제94회 총회에서 교권을 활용한 이단 만들기로 큰 물의를 빚은 최삼경 목사(빛과소금교회)에 대한 비난 여론이 수그러들지 않고 있는 가운데, 비단 개인만이 아닌 교단과 한국교회 전체의 구조적인 문제를 지적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다음 기사는 여의도순복음교회 홍보국장을 역임한 이건영 장로가 발행인으로 있던 ‘크리스천 한국’(1993. 6. 23.)에 게재된 내용이다. 십 수년 전의 기사이지만, 그 당시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는 한국교회의 현실에 예언자적인 목소리를 발하고 있다. 해당 언론매체는 현재 존재하지 않지만, 본지는 기사의 특수성을 감안해 전문 게재한다.

 

종교가 건전하게 성장하기 위해서는 종교가 근본적으로 지향코자 하는 인간구원 이상을 충실히 수행하는 데 있다. 종교에 있어서 이단이나 사이비라는 말은 인간 구원의 이상보다 현세적인 충족이나 카리스마적 지도자의 허영이나 명예심을 충족시키려는 행위가 심각히 대두될 때 나오는 말이다. 속된 말로 중이 염불보다 잿밥에 마음이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종교의 순수성과 정통성을 지키기 위해서는 이단 및 사이비 신앙의 경계에 대한 강조는 지나침이 없다.

 

그러나 한 종교집단이나 교파교회가 자신들의 교리나 신학 또는 목회적 방법론을 문제 삼아 신학적 견해가 다른 교파교회에 대한 이단, 사이비 시비를 하는 것은 정당한 방법론이 아닐 뿐더러 교회연합과 신학의 발전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특정교리 배제돼야 (1)

한국교회는 언제부터인가 ‘이단’이란 말을 쉽게 사용하는데, 이는 교파의 분열에 따른 기성교회의 자신감 결여에서 생겨나는 보호용으로 이용되기 때문이다. 본래 이단이란 헬라어 ‘하이레시스’에서 온 말로 라틴어에서 그대로 발음해 ‘Haeress’라고 했고 다시 영어에서 ‘heresy’라고 했는데, 그 뜻은 어떤 특정 철학이나 사상을 내세워 공표하고 전통적인 것에서 이탈해 분파를 만드는 집단을 지칭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교회가 한자어 이단(異端)이란 문자만을 해석해 자신이 믿는 바와 끝이 조금만 달라도 남의 신앙을 함부로 이단시하는 행위는 ‘하이레시스’라는 본래 뜻과는 크게 다른 것이다. 즉, 교회가 이단종파라고 부르는 집단은 자신들이 어떤 형태로든 기독교와 유관한 것으로 내세우면서도 성경에 입각한 전통적 기독교 신앙을 임의로 변형, 왜곡시키고 자신들의 독특한 철학과 사상을 교리화한 집단을 가리킨다.

 

이런 이단적 종파들은 초대 사도시대부터 있어 왔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이 점을 주의할 것을 경고하고 있다. (고후11:4, 13~15 참조) 이단종파의 발생원인은 대체로 전통적 종교가 조직화(교권화)되고 세속화(인본주의적)되어 생명력이 약화될 때 나타나는데, 교회의 개혁운동과 이단운동의 차이는 ‘전통의 복구’이냐, ‘새 진리’이냐 따라 갈라진다. 전자는 개혁운동이요, 후자는 이단운동이다.

 

이단운동의 특징은

첫째, 자신들의 경전이나 교리를 하나님의 직접적 계시에 바탕을 둔 ‘새 진리’로 내세운다. 그들의 교리체계는 한결같이 하나님이 자기네에게만 특별히 계시해 준 오래 감추어졌던 비밀이라고 주장한다.

 

둘째, 성경을 편협하게 해석한다. 성경의 난해한 신비와 비밀을 풀 수 있는 특별한 열쇠를 자신들만 가졌다고 주장한다. 즉, 자신들의 해석만이 성경의 진리를 바르게 해석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셋째, 나사렛 예수 외에 다른 예수를 내세운다. (고후11:4 참조) 이단종파들의 공통된 특징은 교회가 2천년 동안 믿어 온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한 성경적 견해와는 다른 교리를 내세운다는 점이다.

 

이상의 원칙을 놓고 볼 때 한국교회의 이단시비는 지극히 편협하고 감정적인 양상이 개제돼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특히 일부 장로교단은 칼빈주의 신학의 잣대를 내세워 전혀 신학적 견해를 달려 하는 교단의 지도자들을 마구잡이로 이단정죄를 하고 있어 교회연합사업에 큰 갈등과 장애요소가 되고 있다.

 

80년대에 들어 장로교 통합 측에 의해 조다윗, 권신찬, 박윤식, 이초석, 김기동, 이명범, 박영규, 박옥수 목사 등이 이단 정죄된 바 있다. 장로교 통합 측의 경우, 교단의 덩치만 믿고 통합 측 교단의 치리권 밖에 있는 타 교단의 목회자들을 이단으로 정죄함으로써 그들에게 역사적으로 돌이킬 수 없는 신앙적 상처와 인격적 모욕을 끼치고 있다. 그들은 마치 제국주의적 발상으로 한국교회의 경찰역(?)을 톡톡히 감당하고 있는 것이다.

 

교파분열 왜 생기나

이단 발생하는 원인은 기성교회의 조직화된 교권주의적 권위의식에 있다. 교회의 역사에서 언제나 전통적 교회가 조직화되고 그 조직을 유지하기 위해 신앙의 형식이 교권화되어 권위의식이 팽배해질 때, 그 속에서 억압된 신앙의식이 새로운 자유를 찾아 분출해 올라온다. 이 때 교권화되어 권위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교회의 목회자가 도전 받는 가장 큰 문제는 영적 이해의 부족이다. 교인들은 메말라가는 목회자의 설교에 염증을 느껴, 영적 충족을 위해 소위 ‘신령한 말씀’을 찾아 떠나게 된다.

 

이와 같은 교회 내의 복합적인 갈등으로 인해 교회생활에 충실하던 한 교인이 소위 그 ‘신령한 말씀’을 찾아 타 교회로 떠나게 되면 그는 우선 그 교회를 이상한 시각으로 바라보게 되고 그 교회 목회자의 설교 내용 중에 흠잡을 만한 내용을 문제 삼는다. 그리고 조직화되고 교권화된 노회나 총회에 이단시비를 제소한다. 이 때 이단시비를 당한 타 교파 소속 목회자는 단 한 차례의 면담이나 재판도 없이 일방적으로 이단이나 사이비로 정죄되는 사례가 허다하다.

 

1983년 가을, 여의도 순복음교회 조다윗 목사가 장로교 통합 측으로부터 ‘양도둑’으로 몰려 사이비로 매도되었던 사례는 그 대표적 케이스이다. 통합 측은 순전히 소속교회의 목회에 끼치는 영향이 크다는 이유로 즉, 통합 측 장로교인들이 오순절계인 여의도 순복음교회로 많이 옮겨 간다는 이유로 조다윗 목사를 ‘양도둑’으로 몰아 이단 사이비로 매도한 것이다.

 

그러나 그 총회는 조 목사를 사이비로 규정하고서도 증경 총회장이요 통합 측 교단의 신앙인물의 표본이며 상징인 H목사를 비롯 대부분의 소속 목회자들이 조 목사와 친분을 계속 유지해 오고 있다. 그것은 그 총회 밖의 한국교회는 말할 것도 없고 그 교단 소속 목회자들까지도 조다윗 목사를 이단이나 사이비로 보지 않았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말하자면 통합 측은 순전히 자파 교회의 소속 교인들의 이탈을 방지하기 위해 특정인을 사이비로 매도하는 형식을 취했다는 비판을 면키 어렵게 된 것이다.

 

통합 측은 그 후에도 해마다 한 두 명씩의 타 교단 인사들을 이단 및 사이비로 규정해 오고 있는데 그 정당성의 여부가 계속 제기되고 있는 실정이다. 특히 통합 측은 그 교단의 헌법과 정치에는 명백히 타 교파 소속인사에 대해 처리하는 행위를 금지하고 있다.

이단 정죄의 부당성

장로교 헌법 정치 제1장 원리 제1조 양심 자유에는 하나님이 각인에게 준 양심의 자유를 인정하고 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신앙에 대하여 속박을 받지 않고 그 양심대로 할 권리가 있으니 아무도 남의 양심의 자유를 침해 하지 못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또 제2조 교회 자유에는 ‘개인에게 양심의 자유가 있는 것 같이 어떤 교파 또는 어떤 교회든지 교회의 입회규칙, 입교인의 자격, 교회의 정치조직을 예수 그리스도의 정하신 대로 설정할 권한이 있다’고 명시하고 있다.

 

또한 정치 9장 치리회 제62조에는 치리회의 관할 범위를 명시하고 있는데, 거기에는 그 총회의 치리권은 교단 소속 당회, 노회, 총회라는 세 단계의 치리회에 국한되어 있다. 또한 타 교단 교회를 어떻게 인정할 것인가를 묻는 정치 문답조례 제182문에는 ‘예수를 참 하나님이요 우리의 구주로 확인하는 교회와 교파는 어느 파를 불문하고 다 마땅히 친목하여 환영하고 그 신경과 정치와 예식과 예배모범과 권징 하는 법을 다 중히 여기는 것이 합당하되 예수를 믿지 아니하는 유일회(유니테리안)나 그와 같은 교회와는 더불어 친목할 수 없고 그 반대자로 인정할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로 보건대 통합 측의 타 교파 소속 인사에 대한 이단 사이비시비는 불법이고, 자신들의 헌법이나 교회정치에도 어긋나는 행위임이 명백하다. 통합 측 총회의 종교적 치리권은 그 총회 소속 치리회에만 국한된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통합 측 총회는 언제인가는 이단 사이비로 신앙적 인격 모욕을 당한 인사에 의해 법정소송이 제기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총회가 통합 측 헌법에 없는 불법결의를 함으로써 ‘위헌적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대관절 한국교회에 문선명의 통일교, 박태선의 전도관에서 파생한 몇몇 이단집단을 제외하고 통합 측 헌법의 정치문답조례 제182문에서 말하고 있는 ‘예수를 참 하나님이요 우리의 구주’로 확인하지 않는 교회와 교파가 어디에 있는가?

 

특정교리 배제돼야 (2)

근래에 통합 측 총회가 이단으로 매도한 인사들은 모두 신앙적 체험이 통합 측 소속 목회자들의 그것과 약간 다를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들이 ‘예수를 참 하나님이요 우리의 구주’로 믿지 않는 인사는 한 사람도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통합 측은 어떤 법에 의해서 타 교파 소속 목회자들을 치리, 정죄하는가?

 

특정 교단의 교리나 신학을 내세워 상대를 이단시하고 교권의 이름으로 정죄하는 행위는 분열과 갈등만 조장할 뿐 결코 치리회의 근본 목적인 교회의 평화와 질서를 유지하며 성결의 덕을 세우는 일에 이바지 할 수 없다.

특정 교단의 교리는 신앙의 기준을 만들어 주기도 하고, 적을 칠 수 있는 칼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교리는 언제나 나를 지키고 적을 친다는 방어용으로 출발했다는 점을 염두해 둘 필요가 있다. 자기가 배운 신학적 잣대와 자신이 믿는 신앙적 교리와 조금 다르다는 이유로 또는 자기와 목회방법이 다르다는 이유로 배척하면 ‘이단 아닌 사람’이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너는 나를 이단이라 정죄하면 나는 너를 이단으로 정죄할 것’이기 때문이다.

 

교파 교리 다르다고 정죄할 수 없다.

기독교사상의 가장 큰 덕목이 ‘사랑’이라는 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아끼고 위하는 따뜻한 마음’ ‘동정하여 친절히 대하고 너그럽게 베푸는 마음’ ‘육정적, 감각적이 아닌 동정, 긍휼, 구원, 행복의 실현을 지향하는 정념, 박애, 자비’ 사랑의 사전적 의미다.

이처럼 기독교의 중심 사상이 사랑임에도 불구하고 사랑이라는 테마가 오늘을 사는 크리스천의 가슴에 얼마나 진지하게 와 닿는가 하는 점을 자문하지 않을 수 없다. 한 주일에 한 번씩 교회에 다니며 설교를 듣고 마음을 가다듬는다고 성도의 직분을 다했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면 한국 기독교의 발전을 기대한다는 것 자체가 잘못일 것이다.

 

우리나라의 기독교인 수가 1천 2백만 명을 헤아린다는 사실은 어떤 의미에서든 상당히 고무적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처럼 기독인들이 전국민의 1/4이라는 다수임에도 왜 우리 사회의 그늘은 깊어만 왔는가?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자리매김 돼야 하는 성도들이 그만큼 제 역할을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면 지나친 표현일까?

교회 중심의 신앙생활은 지금까지 신앙이기주의를 키워 왔고 여러 가지 폐단을 일으켜 왔다는 비관적 견해는 충분한 설득력을 갖고 있다. 목회자는 물론 성도들도 내 교파, 내 교회에만 구원이 있다는 식의 집단적 폐쇄주의에 흐른 예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현상은 상대를 인정하지 않는 배타주의를 만연시켰고 결국은 교파가 다르고 신앙노선이 다르다고 해서 이단시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고 말았다. 이 같은 폐해는 교회의 울타리를 넘어 사회 각 계층으로 번져 우리 사회의 고질병인 이기주의와 독단주의를 심화시켰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내 교파, 내 교회, 내 신앙, 내 기도만이 유일한 가치판단의 기준이 되고 다른 교파나 교회는 마치 문제가 있는 듯이 여기는 태도는 시급히 사라져야 한다. 이 같은 병폐는 비 신앙인의 눈에도 큰 흠으로 비쳐지고 있다.

 

교파가 다르고 교리가 다르다고 해서 도대체 누가 누구를 함부로 정죄할 수 있다는 말인가? 정죄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 그것도 심판의 날에 오셔서 정죄하실 것이라고 성경에 기록돼 있다. 그렇기 때문에 지극히 사소한 일부 설교 내용을 문제 삼는다든지 잘못 비쳐진 부분을 억지로 찾아 정죄한다는 것은 하나님에게 불경스러운 행위를 하는 짓과 진배없다 할 것이다. 예수님은 오늘의 이 같은 상황을 예견이라도 하셨듯 이미 여러 차례나 간곡하게 말씀하신 것이 성경에 남아 있다. 참으로 가슴을 치는 말씀이다.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딛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도다.” (마23:11~13)

 

분파주의로 제살 깎기 경쟁

한국기독교에 제2의 종교개혁이 일어나야 한다는 교회 자체 내 목소리가 점점 높아지고 있다. 전래 1백여 년 만에 신자 수 1천만을 거느린 거대종교로 성장한 기독교는 물량위주의 대형교회화, 교권 싸움으로 인한 교파분열, 지상 비방 성명전 등으로 제살 깎기 경쟁을 벌이고 있다.

비교적 짧은 기간에 급성장한 기독교단은 현재 교파만도 1백 20여 개로 추정될 정로도 심한 분열을 거듭해 오고 있는 실정이다. 이것도 모자라 교권다툼을 위한 ‘추악한’ 지상 비방 성명전을 거듭하면서 분파주의에 열을 내고 있는 것이다. 같은 ‘하나님’을 섬긴다는 기독교에서 이처럼 분파주의에 빠져 분열을 거듭하고 있는 모습은 신자는 물론 불신자들에게도 좀처럼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다.

 

구원의 복음을 전하며 이웃 사랑 실천으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할 교회에서 ‘말세’를 주장하면서 이처럼 한가하게 ‘누워서 침 뱉기’ 할 시간적 여유가 있는지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이들이 많다. 지역감정으로 사분오열된 지난 날의 서글픈 우리 현대사 속에서 통곡하며 지역 감정 타파를 외치던 기독교단의 한 목소리는 이제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 자기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남의 눈의 티만 당당하게 지적할 수 있는 것이 기독교계의 현실인지 궁금해 하는 이들이 많다.

 

미국이나 유럽의 경우를 예로 들더라도 우리 나라처럼 특별한 이슈나 신학적 논쟁 없이 그저 교권 장악에 혈안이 돼서 이처럼 무차별 비방전에 나서는 교파들은 드물다는 것이 외국에서 신학공부를 마치고 국내에서 목회활동에 전념하고 있는 목회자들의 한결 같은 주장이다.

 

교회가 특별한 이슈나 신학적 논쟁 없이 주도권 다툼을 위한 교파들의 이전투구의 장이 되는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아질수록 불안감과 배신감에 교회를 떠나는 교인들의 숫자는 점점 늘어날 것이다. 결국 사소한 분파주의로 인해 교회 존립의 근거를 잃게 된다는 것이다.

분파주의에 열을 내고 있는 교회지도자들은 소모적이고 의미 없는 타 교단 비방에 앞서 먼저 자신부터 돌아보고 하나님 앞에 바로 서야 ‘예수 재림’의 순간에 떳떳이 그 분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초교파로 기독교계가 하나로 뭉쳐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해도 아쉬울 시기에 분파주의로 분열을 거듭해 나간다면 그 결과는 자명할 것이다.

크리스천 한국 (1993. 6.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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