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생명강가(2009.1.29)
내가 청년시절일 무렵 나에게도 아버지가 계셨고, 또 세월이 흘러
이제 아들이 그 만한 청년이 되어 있었습니다.
나는 아버지의 무책임한 생활력과 목표 없는 인생을 사시던 모습을 보고
나는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노라고 항시 속으로 다짐하곤 했습니다.
아버지는 약주를 좋아하시다 보니 마을 앞 윷놀이 판에서는
아버지의 고함소리가 떠들썩하니 들리는 일이 예사였습니다.
나는 그런 아버지를 감히 가까이 할 수 없었고,
아버지도 나에게 다정스럽게 대해 주신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한 아버지에 대한 특별히 좋은 기억이 없었음에도
어린 내 마음은 아버지에 대한 불평이나 미움은 조금도 없었고,
그냥 큰 바위처럼 옆에 계신 것만으로도 좋았던 것 같고
오히려 내가 커서 어른이 되면 아버지의 그 호탕한 기개를
펼치며 사실 수 있도록 잘 해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께 그러한 기회는 드리지 못하였으나
만성 기관지 천식으로 세상을 떠나실 때, 나는 자식된 도리로서
대신 영원한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그분께 안겨드렸습니다.
반대로 나의 아들은 어려서부터 내가 부둥켜안고 씨름도하며
아빠이면서 친구처럼 친근하게 잘 대해 주었습니다.
그런 아빠를 어릴 적 아들들은 영웅처럼 여기며 잘 따랐습니다.
그 후 아들도 자라서 청년이 되어 대학에 입학하고서는
어느 날 아들이 나에게 서슴없이 말하기를
자기는 커서 아빠처럼 살지 않겠노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아빠는 주님과 교회만 위하고
남들처럼 물질적으로 여유롭게 살 생각을 안 해서 싫답니다.
그날 가만히 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동안 말은 안 해도
친구들처럼 넓은 아파트에서 살아보고 싶었고,
봉고차가 아닌 좋은 승용차를 타는 아빠의 모습도 보고 싶었고,
유명메이커는 아니어도 옷이나 신발도 자기 마음에 드는 것을
골라 사 보고 싶었다고 말합니다.
나는 그런 아들 앞에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언젠가 사역원 청소년집회에서 부산의 J형제님 아들이
청소년 사역자가 되어 집회 중 잠깐 간증하는 내용을 들었습니다.
젊은 J형제는 어릴 적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라고는
아버지는 늘 밥상 펴 놓고 성경보시는 일과 다락에 올라가셔서
기도하시거나 주무시던 아버지의 모습 밖에 없었답니다.
기독교의 목회자였다가 회복되신 후 특별한 직업이 없으셨던 아버지는
아들이 학교에 신고 갈 운동화가 없어 교회 안에서 대물림한
운동화만을 신고 다니기 일쑤였고 언젠가는 신발이 떨어져
성한 것만 골라 아들이 짝짝으로 신고 다니는데도
아버지는 아무 대책 없이 오직 주님만 바라보시더라는 겁니다.
처음엔 정말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왜 우리 아버지처럼
주님만 믿고 의지하시는데 도와주시지 않으시냐며
참 많이도 하나님을 원망했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살아 계셨고, 그 아버지의 기도로 말미암아
방탕하던 자신이 세상으로 흘러 떠내려가지 않고
이 시점 아버지와 같은 봉사자가 되고 보니,
그 어려움 가운데 자식이 신고 다니는 색깔 다른
짝짝의 운동화에도 조금도 요동치 않으시고 여전히
눈물로 주님을 의지하고 신실히 기도하시던 그 아버지께서
지금은 세상에서 가장 존경스럽다고 고백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표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나는 그날 이후 젊은 J형제의 아버지를 전국 사역집회에서 뵐 때마다
고개 숙여 깊이 존경합니다. 아버지로서 그런 아들을 갖는다는 것은
최고의 기쁨이요, 영예일 것입니다.
우리 아들이 부모의 또 다른 결점이 많아서 그런 말을 했으리라
짐작은 합니다만 아들도 그렇게 말하고 미안했던지,
아빠가 먼저 아브라함처럼 축복 받고 웟치만 니 형제님처럼
훌륭한 사람이 된다면 저도 아빠의 하나님을 믿고 기회가 되면
전 시간 훈련도 받겠노라고 했습니다.
나에게도 아직 가망은 있습니다. 아브라함처럼 순종의 길 가고,
웟치만 니 형제님처럼 순교의 길을 가다보면
언젠가 하나님의 영광을 볼 날도 있겠지요?
아멘, 그러므로 나는 잠시도 혼 안에 머뭇거릴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