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 온 탕자
진리의 언덕
생명강가 2009-02-28 , 조회 (430) , 추천 (0) , 스크랩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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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탕자(눅15:11-32)

글/생명강가(2008.7.31)




 어느 날 세리와 죄인들이 모두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그분께 다가오자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이 투덜대며 “이 사람이 죄인들을 영접하고 함께 음식까지 먹는구나.”라고 하니 예수님께서 비유로 이야기보따리를 풀어 놓으셨습니다. 첫째는 백 마리 양 중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는 목자의 이야기이며, 둘째는 열 개의 드라크마 중 잃어버린 한 개의 드라크마를 찾는 여인의 이야기였습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그 세 번째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작은아들이 ‘아버지 재산 중에서 나에게 돌아올 몫을 주십시오.’라고 하니 그 아버지가 살림을 두 아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신명기21장17절에 의하면 유산을 상속시 장남이 2/3를, 둘째는 1/3을 물려받을 수 있었지만 아무리 그렇더라도 아들이 요구한다고 그렇게 쉽게 재산을 분배해주시는 아버지가 의아스러웠습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이야기라는 점에서 그 내용이 예수님의 깊은 속뜻을 적나라하게 표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첫 번째 이야기는 삼일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이야기이고, 두 번째는 그 영의 이야기, 그리고 세 번째는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아버지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시고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창2:16-17)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의 의지를 존중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생명이 풍성한 하나님의 집에 계속 남아있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후 며칠이 못되어, 작은아들이 모든 것을 모아 가지고 먼 나라로 갔는데, 거기서 방탕한 생활을 하여 재산을 탕진해 버렸습니다. 여기서 먼 나라로 갔다는 것은 하나님과 관계없는 사탄적인 세상을 말합니다. 그가 모든 것을 다 써 버렸을 때에 그 나라 전역에 심한 기근이 들었습니다. 그것은 온 이집트 땅에 풍년과 흉년을 내리시므로 요셉으로 하여금 전국을 통치하게 하셨듯이, 인생의 성공과 실패는 자신의 노력여하에 달려있다기보다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있음을 말해 주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궁핍해지자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가서 더부살이를 하게 되었는데 그 사람이 자기 밭으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습니다. 돼지는 부정한 짐승입니다. 즉 그의 신분이 천하고 더러운 이방노예로 전락된 것입니다. 그는 돼지들이 먹는 쥐엄나무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였지만 아무도 주지 않았습니다. 쥐엄나무는 상록수입니다. 쥐엄 콩이라고도 하는 칼 모양의 그 열매는 가축의 사료와 가난한 백성의 양식이었습니다. 한 흥미로운 랍비 속담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쥐엄 열매를 먹을 수밖에 없게 되어야 회개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제야 그는 제정신이 들어 말하였습니다. ‘내 아버지의 많은 품꾼에게는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 나는 여기서 굶어 죽겠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아버지, 내가 하늘을 거슬러 죄를 짓고 아버지 앞에도 죄를 지었습니다. 나는 더 이상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할 자격이 없으니, 나를 품꾼들 중 하나로 삼아주십시오.’라고 말씀드려야겠다.’ 그리고 일어나서 자기 아버지에게로 돌아갔습니다.


여기서 참다운 회개가 무엇인지 예수님은 우리에게 보여 주시는 것 같습니다. 비록 ‘품꾼들 중 하나로..’라는 말 속에는 거저먹지는 않겠다는 남은 자존심이 깃들인 말이었기는 하지만, 회개는 통회 자복하는 것 이상입니다. 다시 말하면 생각을 돌이켜 자신의 삶의 방식을 바꾼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겸손히 자신을 낮추고 죄를 시인하는 것입니다. 회개는 천한 이방노예의 신분에서 다시 귀한 아들의 신분으로 회복하는 기회를 얻는 것입니다.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서 목을 끌어안고 다정하게 입을 맞추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달려가는 아버지’라고 표현하셨습니다. 죄인들을 향한 사랑 많으신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달려오시는 하나님 앞에서 어떤 죄인이라 할지라도 그동안의 모든 시름이 한순간에 사라져버릴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리고 목을 끌어안고 다정하게 입마추시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를 찬양합니다!


그러자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씀 드렸습니다. ‘아버지, 내가 하늘을 거슬러 죄를 짓고, 아버지 앞에도 죄를 지었습니다. 나는 더 이상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할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의 노예들에게 ‘어서 그 제일 좋은 겉옷을 내어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겨라. 또 살진 송아지를 끌어내다 잡아라. 우리가 먹고 즐거워하자, 왜냐하면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잃었다가 되찾았기 때문이다.’라고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였습니다.


이 어떠한 사랑과 은혜의 말씀입니까? 그 겉옷은 특별히 예비 된 옷으로, 참회하는 죄인을 덮어서 하나님을 만족시키는 의이신 아들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우리는 이 겉옷을 입지 않고서는 그 누구도 왕국잔치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반지는 하나님께서 믿는 이를 받아 들이셔서 그 믿는 이에게 주시는 도장, 곧 도장을 찍으시는 영을 상징합니다. 그 영의 인 치심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아 점점 변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신은 믿는 이들을 더러운 세상에서 분별시키는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을 상징합니다. 우리는 이 화평에 기초한 복음의 신발을 신고 세상을 이겨야만 합니다.


고대의 반지와 신은 자유인의 표시였습니다. 가련한 탕자는 자신의 몸은 옷으로, 손은 반지로, 발은 신으로 단장함으로써 그의 부유한 아버지와 조화를 이루었고, 아버지의 집에 들어가 아버지와 함께 잔치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을 갖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그 영으로 단장하여 그분의 집의 풍성을 누릴 수 있게 합니다.


누가복음 10장에 기록 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여관’은 교회를 상징합니다. 마찬가지로 15장에 기록 된 돌아온 탕자의 비유에서도 ‘아버지의 집’이 교회를 상징합니다. 교회는 우리의 집이요, 또한 우리 아버지의 집입니다. 예수님의 이 이야기는 죄인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올 때 구원된다는 것과 교회안의 생활이 밀접한 관계가 있고, 중요함을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살진 송아지는 믿는 이들의 누림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풍성하신 그리스도(엡3:8)를 상징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에는 두 방면이 있는데, 그것은 제일 좋은 겉옷으로 상징된 외적이고 객관적인 방면과, 살진 송아지로 상징된 내적이고 주관적인 방면입니다. 우리의 의이신 그리스도는 외적으로 우리의 구원이시고, 우리의 누림을 위한 우리의 생명이신 그리스도는 내적으로 우리의 구원이십니다.


제일 좋은 겉옷은 탕자가 아버지의 요구 조건들을 충족시켜 아버지를 만족시킬 수 있었고, 살진 송아지는 아들의 배고픔을 채울 수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즐거워 할 수 있었습니다. 나는 이 이야기를 듣고 탕자의 생각과 같이 아버지의 집의 품꾼들 중 하나로만 여겨준다 해도 감지덕지 할 판국에 생각지도 못한 놀라운 잔치를 배설하시고 더군다나 그 죄인이 잔치의 주인공이 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지금 밖에서는 이러한 일이 더 이해가 되지 않은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를 대표하는 큰 아들이 그러한 처사에 불만을 품고 그 아버지에게 원망하며 말대꾸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탕자를 변호하며 그를 설득하는 아버지의 모습 속에서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을 우리 마음속 깊이 느낄 수 있었습니다.


희년은 우리의 원함이나 노력으로 임하는 것이 아니고, 그 하나님의 주권으로 팔았던 소유지로 돌아가고, 이방노예 생활의 모든 억압에서 해방되어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 후 큰 아들이 그 잔치에 참여했는지는 예수님께서 더 말씀하지 않으시고 오늘날 우리들의 몫으로 남겨두신 듯 했습니다. 아무튼 희년은 인간적인 체면치레나 종교적인 율법을 지킴이 통하지 않는 이상한 잔치인 것만은 틀림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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