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더 대왕
성경과 교회사
생명강가 2009-06-27 , 조회 (1616) , 추천 (0) , 스크랩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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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간 유대인들이 페르시아 시대에 본국으로 돌아오는 귀환시대 이후를 신 구약 중간시대라고 분류합니다.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 말라기에 기록된 말라기서 이후 신약시대의 시작으로보는 예수님이 탄생할 때까지의 기록이 성경 속에는 없습니다.  따라서 이 시대를 침묵시대라고도 말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과 그 주변의 당시의 역사를 공부하는 것이 신약성경을 이해하는데 매우 도움이 됩니다.

 

포로귀환의 시대가 페르시아 시대였음을 우리는 앞서 배웠습니다. 그 페르시아의 마지막 왕 다리오3세 때에 페르시아는 알렉산더가 이끄는 마케도니아와 그리스 연합군과의 전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전쟁의 승자는 알렉산더였습니다. 알렉산더는 B.C. 356년 필립포스 2세의 아들로 태어난 그의 다른 이름은 필립포스 3세입니다. 에페이로스의 왕 네오프톨레모스의 딸이 그의 어머니로 이름은 올림피아스였습니다.

 

그의 아버지 필립포스가 아들을 위해 청해온 당시의 대학자 아리스토텔레스가 그의 스승이 되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리스의 유명한 플라톤의 제자였으며,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에게서 배운 자였습니다.

 

알렉산더는 그의 스승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에 영향을 받아 그리스문화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전쟁은 그의 아버지로 부터 배워 지덕과 용맹을 갖춘 왕이 되었던 것입니다. B.C.336년 아버지 필립포스 왕이 암살 되자 군대의 추대로 20세에 그는 왕이 되었으며, 그리스 대표자 회의에서 헬라의 맹주로 뽑혔습니다.

 

그 알렉산더가 페르시아의 영토였던 지금의 터키가 위치한 소아시아 반도부터 수리아지방과 팔레스틴, 그리고 이집트를 빼앗았습니다.

 

그리고 이집트에서 그는 새 도시를 건설하고 그의 이름을 따서 알렉산드리아라고 이름하였습니다. 이어서 그는 동으로 계속 진군하여 지금의 이라크와 이란 등이 위치한 페르시아의 마지막 영토를 빼앗고,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칸지역과 인디아의 인더스강 지역까지 점령하였습니다.

 

 그곳에서 지친 부하들의 건의레 따라 군사를 되돌린 알렉산더는 바벨론을 수도로 정하고 페르시아의 마지막 왕 다리오3세의 딸과 결혼하지만 모기에게 물려 학질로 B.C. 323년에 죽었습니다. 왕위에 오른지 14년 만에 죽은 것입니다.

 

그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인해 그의 부하들에 의해 나라가 분할통치 되다가 각각의 왕국이 세워졌습니다. 카산더는 마게도냐와 헬라, 리시마쿠스는 그리스 동북부의 트리키아, 프톨레미는 이집트, 그리고 셀류코스는 시리아를 중심으로 하게 되었습니다.

 

 그 와중에 예루살렘이 있는 유대땅은B.C.305년 알렉산더의 부하 프톨레미가 이집트에서 왕조를 열고 지배하다가 B.C.198년에 셀류코스왕조의 지배에 들어갔습니다.

 

알렉산더는 자기가 정복한 영토에 자신 이름의 도시를 70개나 세웠는데 그 중에 제일 유명한 곳이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입니다. 그는 또 곳곳에 헬라문화와 헬라어를 보급하기도 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페르시아의 통치기간 동안 나라를 잃기는 했으나 문화적인 동요는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페르시아인 보다 나은 문화를 가지고 있다고 자부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헬라가 유대를 통치한 때에는 사정이 달라졌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은 가는 곳마다 지혜를 강조하였으며, 그 곳에 헬라주의의 문화를 심으려고 했습니다. 헬라는 교육을 통해 인도주의 문화를 건설했으며, 유대인들에게도 헬라화를 강요했습니다.

 

그러므로 수많은 유대인들은 헬라화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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