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첸도르프
성경과 교회사
생명강가 2009-08-31 , 조회 (768) , 추천 (0) , 스크랩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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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연구>

친첸도르프(Nicholas Ludwig vonZinzendorf)




 친첸도르프는 1700년 5월 독일 드레스덴(Dresden)에서 태어났고, 그의 부모는 모두 경건한 그리스도인이었다. 오스트리아 귀족인 그의 아버지는 친첸도르프가 태어난 지 6주 만에 세상을 떠났다. 임종 시에 그는 자신의 아들을 주님께 드렸다. 아버지가 죽은 후 어머니가 재가했기 때문에, 친첸도르프는 게르스도르프(Gersdorf)남작 부인과 고모 헨리에타(Henrietta)의 손에 양육되었다.


게르스도르프와 헨리에타는 매우 경건하며 주님을 사랑했다. 그들은 성경을 자주 읽었을 뿐 아니라 가정을 열어서 필립 야콥 슈페너(Philip Jacob Spener), 아우구스트 헤르만 프랑케(August Hermann Franke)와 같은 경건주의자들을 접대하였다. 이러한 환경에서 가르침을 받은 친첸도르프는 어려서부터 자신을 주님께 헌신했고 그리스도 예수의 충성된 노예가 되기를 사모했다. 네 살 때 그는 이렇게 서원했다. “사랑하는 구주여, 당신은 제게 속하고 저는 당신께 속하기 원합니다.”


 열 살 때 친첸도르프는 당시 경건주의 운동의 중심지였던 페타고기움(Paedagogium)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곳에서 친첸도르프는 다른 몇몇 급우들과 함께 ‘겨자씨 선교단(The Order of the Grain of the Mustard Seed)'을 결성하여 서로 사랑하고 도우며 주님의 이름을 증거하고 땅 끝까지 복음을 전파할 것을 약속했다. 단원들은 모두 작은 배지를 가지고 있었는데, 거기에는 ‘보라, 이 사람을!’,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라는 글이 쓰여 있었다. 또한 그들의 반지에는 ‘누구도 자신을 위해 살지 않으리.’라는 글이 헬라어로 새겨져 있었다.


 졸업 후 친첸도르프는 원래 할레(Halle)대학에 진학하려 했지만 정통 루터파에 속해 있던 백부가 강력하게 반대하였다. 백부의 강권으로 친첸도르프는 루터파의 본거지인 비텐베르크(Wittenberg)대학에서 법률을 전공하였다. 그곳에서 그는 많은 영적인 서적들을 읽고 기도집회를 인도했다. 그는 자주 철야로 성경을 읽으며 기도하였다. 기도를 통하여 그는 많은 사람들을 주님께로 인도했고,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십자가의 못 박힘 아래 두었다.


 대학 졸업 후 친첸도르프는 학위 이수의 일환으로 관례에 따라 유럽 각지를 여행 하였다. 그는 독일 뒤셀도르프(Duesseldorf)미술관을 관람할 때 예수의 수난을 그린 ‘보라, 이 사람을!’이라는 그림에 깊이 매료되었다. 그 그림 밑에는 라틴어로 ‘너를 위해 나는 모든 것을 버렸건만 너는 무엇을 버렸느냐?’ 그는 자신을 대신하여 죽으신 그리스도의 사랑에 너무도 깊은 감동을 받아 무어라 말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일생토록 주님을 위해 살 것을 결심하였다.


 1721년 5월에 친첸도르프는 고향 작센에 돌아와 국왕의 변호사 직을 담당하였다. 그는 가정을 열어서 여러 계층의 사람들, 즉 귀족들이나 평민들이 함께 성경을 읽고 기도하며 간증하고 찬송하도록 하였다. 이듬해 4월에 그는 자신의 영지인 베르텔스도르프(Berthelsdorf)에 돌아가 에르트무트 도로테아(Erdmuth Dorothea)와 결혼하였다. 두 사람은 귀족 신분을 버리고 한마음으로 끝까지 충성을 다해 그리스도를 섬기기로 결심하였다.


 1722년 천주교의 대대적인 핍박으로 크리스티안 데이비드(Christian David)의 소개와 인도 아래 200명가량의 모라비안 형제들의 후예들은 작센에 있는 친첸도르프의 영지로 왔다. 그들은 친첸도르프가 안내해 준 새로운 피난처를 ‘헤른후트(Hernhut, 주님의 보호)’라고 이름 짓고 그곳에 정착하였다. 초기에 온 사람들은 대부분이 모라비안 형제들이었고 점차적으로 루터파, 경건파, 칼뱅파, 츠빙글리파, 슈벵크펠트파 등 박해를 받은 사람들이 분분히 이곳에 와서 정착하며 살았다. 그러나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이 날로 증가하자 만찬, 침례, 종파 등 교리상의 분쟁이 갈수록 격해졌다.


 1727년 5월 12일 친첸도르프는 헤른후트의 모든 이들을 불러 모아 성경 진리에 근거한 공약을 세웠다. 그는 한 면으로는 그들을 십자가로 돌이키게 하였고, 다른 면으로는 그들에게 자신을 주님께 드리고 성령의 가르침에 자신을 맡기라고 권면하였다. 친첸도르프의 믿음과 사랑으로 모든 사람들을 영 안에서 자신을 비우고 한마음 한 뜻으로 공동 협약을 지키기 원했다. 공약이 시행된 후 믿는 이들의 기도와 교통이 많아졌고 그들은 자주 모여 기도하고 찬양을 하였다.


2개월 뒤 친첸도르프는 뜻밖에도 슐레지엔 도서관에서 라틴어로 쓰인 오래된 형제단의 공약을 발견하였는데, 내용은 그들이 맺었던 협약과 유사하였다. 헤른후트로 돌아온 후 친첸도르프는 그것을 독일어로 번역하여 8월 4일 모든 사람들이 읽게 하였는데, 읽는 이마다 성령의 확증에 놀라워하였다. 다음날 저녁 친첸도르프는 열네 명의 성도들과 함께 철야 기도를 하였다. 10일 주일집회 때 모든 이들이 하나님의 임재의 기쁨 안에서 깊은 밤까지 기도하고 찬양하였다. 집회를 마치고서 사회자가 13일 집회부터 주님의 만찬을 가질 것이라고 선포하였다. 그것은 그들이 교통을 가진 후에 처음으로 거행한 만찬이었다. 그날 베르텔스도르프 예배당으로 가는 길에서 서로 간격이 있었던 형제자매들은 모두 죄를 자복하였다. 집회 가운데서 성령이 온 회중 위에 부어져 그들은 한 영 안에서 침례를 받았다. 이로써 모라비아 교회는 전무후무한 부흥을 경험하였다. 모든 이들이 자신을 주님께 헌신했고 기꺼이 세계 각처에 복음을 전파하기 원했다.


 약 4년 뒤, 친첸도르프는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4세의 대관식에 초대를 받았다. 그곳에서 그는 서인도제도에서 온 흑인 노예 안토니 울리히(Anthony Ulrich)를 만나게 되었다. 그곳에 복음의 필요가 절박함을 들은 친첸도르프는 안토니를 헤른후트로 초청하여 복음의 부담을 교통하도록 하였다. 그 즉시 두 형제들이 그 부름에 반응하여 성 토머스(St, Thomas) 섬으로 건너갔다. 그 다음해 두 명이 그린란드(Greenland)로 갔고, 또 다음 해에 열여덟 명이 산타크루즈(Santa Cruz) 섬으로 갔고, 또 1년이 지난 후 열두 명 이상이 외지로 나갔다. 30년이란 짧은 기간에 그들이 전파한 복음의 발자취는 유럽, 아메리카, 아시아 심지어 아프리카에까지 미쳤다.


 친첸도르프의 해외 선교는 몇 가지 원칙이 있었다. 첫째, 선교사는 높은 곳에 있어서는 안 되고 세상 사람들 가운데서 낮추어진 생활을 하여야 한다. 둘째, 예수님께서 죄인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고, 그분을 믿는 모든 사람을 거듭나게 하신다는 복음을 직접 전해야 한다. 셋째, 최종 목적은 바로 모든 민족과 모든 나라가 구원을 얻는 것이다. 그들의 해외 선교는 19세기의 선교사 파송 운동보다 반세기 빨랐다. 그들이 20년 동안 파송한 해외 선교사와 믿는 이들의 비율은 기독교가 2백 년 동안 파송한 선교사와 믿는 이들의 비율을 초과했다. 동시에 부흥의 물결은 그들로 말미암아 각지로 확산 되었고 영국 전역에 영향을 주었다.


 1735년 10월 영국 성공회 성직자 존 웨슬리(John Wesley)와 그의 동생 찰스 웨슬리(Charles Wesley)를 비롯하여 ‘근대 선교의 아버지’라 불리는 윌리엄 케리(William Carey) 등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미친 친첸도르프는 그러나 모라비아 교회가 세속 정권과 기타 종파의 인정을 받게 하기 위해 취했던 그의 행동은 상당히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1734년에 그는 루터교의 목사로 안수 받았고 또한 교회 제도를 ‘주교제’로 바꾸었다. 1737년에 그는 주교로 임명되어 영국과 후스파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이로 말미암아 그는 작센과 루터교의 신임을 잃었고 결국 10년 넘게 추방되었다. 그 기간에 그는 서인도제도와 영국과 미국으로 갔다.


 1748년 추방령이 해제되어 돌아온 그는 교회 안에서 믿는 이들을 목양하는 일로 여생을 보냈다. 1760년 5월 9일 그는 주님의 품에 안식했다. 그의 장례식에 각지에서 온 사천여 명이 참석했다. 그의 묘비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쓰여 있다. “여기 쇠하지 아니하는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 잠들어 있노라. …하나님의 은혜와 그의 나태하지 않은 봉사로 인하여 평범한 형제들을 18세기의 새로운 교회가 되게 하였다. …그는 열매를 맺고 그 열매가 항상 남아 있게 하도록 주님의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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