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카톨릭과 동방 정교회
성경과 교회사
생명강가 2009-09-21 , 조회 (1405) , 추천 (0) , 스크랩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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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원 운동으로 서로마 교회는 수많은 이교도들을 개종하였으며, 그 중에 지금의 프랑스지역인 갈리아에 자리를 잡은 부족인 프랑크족은 통치상의 필요로 서로마와 가까와지고 있었습니다.

 

과거에 로마의 지배를 받았던 라틴화 된 갈리아를 지배하는데에 서로마 교회의 협력은 절대적으로 필요했습니다. 그 프랑크족은 롬바르드족의 침략으로부터 서로마 교회를 지켜주며 그 관계를 긴밀하게 하였습니다. 롬바르드(Lombard)족은 원래 도나우(Donau)강 연안에 살던 게르만족의 일파로서 568년에 이탈리아반도를 침공하여 왕국을 세운 부족입니다.

 

당시 이탈리아반도는 동로마, 즉 비잔틴 제국의 영토였습니다. 그들 롬바르드족이 세운 왕국은 774년 프랑크족에게 정복될 때까지 이탈리아를 지배했습니다.

 

8세기 초 이슬람의 침략을 물리친 비잔틴 제국의 황제 레오3(Leo III)는 심각한 문제에 처했습니다. 하나는 성상 숭배였고, 다른 하나는 대토지 소유에 의한 조세 수입의 격감이었습니다.

 

새로 개종한 이교도 지역일수록 우상 숭배는 심했습니다. 여기서 '성상'이라 함은 성인들을 그린 그림, 조각, 모자이크, 등을 총칭하는 것입니다. 그것들은 문맹인 야만족들을 개종하는데에 제법 짭짤한 효과가 있었지만, 기독교 자체보다는 오히려 그 우상들을 숭배하는 경향이 심해지고 있던 것입니다.

 

우상 숭배에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던 신앙심 깊었던 황제 레오 3세는 이런 폐단을 제거하고자 하였습니다. 다른 문제는 소토지 보유 자유농의 몰락과 대토지 소유자의 증대였습니다

 

 당시 면세특권을 가진 수도원과 교회가 많은 토지를 소유하게 되어 세수입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습니다. 이런 환경에서 토지 개혁이 이뤄지면 소규모 자영농이 증대하고 조세 수입도 증대될 것으로 기대한 레오 3세는 토지 개혁을 달성하고자 했습니다.

 

이런저런 이유와 목적으로 726년에 첫 성상파괴령이 내려졌습니다. 이 파괴령은 로마와 콘스탄티노플을 결정적으로 갈라놓았습니다. 이전까지는 교리상의 논쟁에도 불구하고 로마 교황들은 비잔틴 황제의 충성스런 신하로 자처했으며, 황제를 자신들의 군주로서 존경과 예의를 갖추었습니다.

 

그러나 교황 그레고리우스 2(Gregorius II)는 레오 3세의 성상파괴령을 거부하였고, 황제는 교황을 체포하기 위해 군대를 보냈으나  롬바르드군에 의해 격퇴되었습니다.  분노한 레온 3세는 남이탈리아와 지금의 발칸반도인 일리리쿰(Illiricum)에서의 교황의 권리를 모두 몰수하여 콘스탄티노플 대주교에게 넘겨주었습니다.

 

그 후 이탈리아의 지배자였던 롬바르디 왕국에게 지배를 받는 것을 원치 않았던 교황 자카리아스(Zacharias)가 프랑크왕국의 피핀(Pippin)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결국 피핀의 군대가 이탈리아의 중부와 도시 라벤나를 차지하였고, 그 중 라벤나를 교황에게 주었습니다.

 

그 중의 일부가 지금의 바디칸이 되었습니다. 그 후 774년에 롬바르디왕국은 프랑크 왕국에 의해 망하였고, 이로써 서로마 교회는 프랑크 왕국과 밀접하게 결합되었으며 비잔틴 제국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하여 로마 가톨릭동방 정교회로 기독교 세계는 1차 대분열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를 중심으로 하는 서방교회와 콘스탄티노플 중심의 동방 교회의 분열은 신학적인 논쟁도 있었으나, 정치적인 부분이 분열의 또 다른 원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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