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위클리프와 롤라드파
성경과 교회사
생명강가 2009-09-29 , 조회 (2421) , 추천 (0) , 스크랩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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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 위클리프>

 

14세기의 유럽은 종교개혁의 여명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중 영국의 옥스퍼드대학교(University of Oxford)의 철학자이며 신학자였던 존 위클리프(John Wycliff)가 있습니다. 그는 최초로 성경을 영어로 번역을 추진하였던 중세 종교개혁의 선구자 중에 한 사람입니다. 

 

위클리프는 1370년대 옥스퍼드대학에서 차츰 당시로는 급진적인 종교적 견해를 주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성찬의 빵과 포도주가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한다는화체설 교리를 부인하고, 설교의 중요성을 강조했으며, 성경이 기독교 교리의 가장 중요한 원천이라고 했습니다.

 

또한 교황직은 성경적 정당성이 없으며, 교황을 적그리스도와 같다고 보았는데 14세기 교황권이 분열되자 교황권이 붕괴되는 전조라고 환영했습니다. 결국 그는1378년 옥스퍼드대학에서 쫓겨났습니다.

 

위클리프의 몇몇 옥스퍼드대학의 동료 학자들을 중심으로 헤러퍼드의 니콜라스의 지도 아래 모인 그룹과 운동을 반대자들이 이름을 붙인 것이 롤라드파입니다. 롤라드라는 이름은 '중얼거리는 사람'을 뜻하는 중세 네덜란드어 롤라에르트(lollaert)에서 유래한 경멸어입니다.

 

마찬가지로 종교개혁시대에 개신교를 지칭하기를 프로테스탄트(Protestant), 즉 저항자 혹은 반항자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이 지금도 쓰여지는 이름이 된 것입니다. 롤라드 그룹은  핍박에도 불구하고 옥스퍼드대학 바깥에서도 추종자를 얻었습니다.

 

이 파는 도시민, 상인, 그리고 귀족 다음의 계급인 젠트리(gentry) 심지어 말단 성직자 사이에서 차츰 늘어났으며 소수의 하원의원뿐만 아니라 왕실의 몇몇 기사들도 지지를 보냈습니다.

 

1399년 헨리 4(King Henry IV)가 즉위하자 탄압의 물결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윌리엄 소트레이가 화형당해 롤라드파의 첫번째 순교자가 되었고, 헨리 5(Henry V) 때에는 더 큰 탄압으로 이어졌습니다.

 

그 후 지하로 몰린 이 운동은 소수는 성직자들의 지원을 받으며, 주로 상인과 장인들 사이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1500년경 롤라드파 부흥이 시작되었고, 1530년 이전부터 롤라드파와 새로운 세력인 프로테스탄트가 결합하기 시작했습니다. 롤라드파 전통은 프로테스탄티즘의 확산을 촉진시켰습니다.

 

초기 롤라드파의 가르침은 1395년 의회에 제출하기 위해 작성된 〈12 결론/ Twelve Conclusions〉에서 가장 잘 진술되어 있습니다. 이 문서는 영국 교회가 '계모인 거대한 로마 교회'에 예속되었다는 진술로 시작해서 로마 교회의 서품식은 성경적으로 아무 근거가 없으므로 현재의 성직자들은 그리스도가 임명한 사람이 아니라고 합니다.

 

또한 성직자의 독신생활은 비정상적인 욕망을 불러일으키며, 화체라는 '거짓 기적'은 사람들을 우상숭배로 오도하고 포도주와 빵, 제단, 제사복 등을 신성시하는 것은 마술과 연결된다고 했습니다. 또한 어떤 인간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기 때문에 고위 성직자는 세속의 재판관과 지배자가 되어서는 안 된며, 죽은 사람을 위한 특별기도, 순례, 성상에의 봉헌을 비난했습니다.

 

 그리고 고해성사는 구원에 불필요한 것이라고 선언했습니다. 나아가서 전쟁은 성경과 모순되며, 순결에 대한 맹세 때문에 수녀들은 낙태와 유아살해의 공포에 떨고 있고, 마지막으로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수많은 미술과 공예가 쓸데없이 '낭비와 호기심, 허세'를 부추겼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12 결론〉은 롤라드파의 모든 중요한 교리를 포괄했으나 여기 포함되지 않은 중요한 2가지 교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성직자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설교이고, 모든 사람은 자신들의 언어로 된 성경에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롤라드파는 성경을 영어로 옮기는 일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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