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기종교개혁-얀 후스
성경과 교회사
생명강가 2009-10-28 , 조회 (708) , 추천 (0) , 스크랩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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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후스가 살던 보헤미아>

 

동유럽의 국가들 중에는 체코공화국이 있습니다. 오랜 역사를 가진 그곳의 다른 이름은 보헤미아(Bohemia)입니다. 현재의 체코 공화국을 구성하고 있는 세 지방 중 한 곳의 현지 발음으로 체히(Cechy)인데, 그 곳의 라틴어와 영어식 이름인 보헤미아가 더욱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곳의 도시 프라하는 긴 역사와 함께 아름다운 정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필자가 그곳을 방문하였을 때 종교개혁사에 중요한 인물 요한 후스의 발자취를 보며 많은 생각에 잠기게 되었습니다.  

 

후스는 보헤미아의 후시네츠(Husinec)이란 곳에서 1369년에 소작농 부모 밑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이름은 그 마을 이름에서 유래했습니다. 어릴 적부터 머리가 뛰어나 특출 났습니다. 그가 유망한 청년이었기에 어떤 이들은 그의 지적 능력을 카톨릭 교회를 위해 사용하길 바랬습니다. 그는 프라하 대학(University of Prague)에서 1396년에 석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학위를 받은 후, 후스는 교수로서 대학에 남았습니다. 당시의 유럽은 신성로마제국의 큰 영향력 아래 있었으며 그 제국의 독일인 황제 카를4세는 보헤미아의 왕을 겸직하고 그 이름을 카렐 1세라고 하였습니다. 그 황제에 의해 프라하대학이 1348년에 설립되었습니다.

 

그 후 영국왕 리차드 2세가 체코의 바츨라프(Wencelas) 4세의 여동생과 결혼함으로 인해 영국과 보헤미아 사이에 동맹이 체결되었습니다. 그리고 학생들은 자유로이 옥스포드 대학과 프라하 대학 사이에서 옮겨다닐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옥스포드 대학의 강의 내용이 프라하에 전달되어 후스는 위클리프의 과업을 손에 넣어 그의 가르침을 자신의 것처럼 받아들였습니다. 1400년에 후스는 사제로 안수 받았습니다. 그 다음해는 프라하 대학 철학과 학장이 되었습니다. 1402년에는 대학 전체의 총장이 되었습니다. 그의 영향력은 그 주위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을수록 커져갔습니다.

 

프라하 대학의 새 총장으로서 베들레헴 예배당의 전도자의 책임을 맡았습니다. 1000개 이상의 좌석이 있는 이 예배당은 프라하에서 가장 크고 가장 영향력이 있는 예배당이었습니다. 이 예배당은 특별히 일반적인 라틴어가 아닌 대중의 언어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1391년에 지어졌습니다. 그리하여 요한 후스가 예배당에서 말씀을 전했을 때 그는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말을 했습니다.

 

후스가 살던 그 시대에는 카톨릭 교회에 대한 불만이 확산되고 증가했습니다. 사람들은 이제까지 생각 없이 받아들이던 것들에 관해 의문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초대 교회의 단순함이 되풀이되기 바라는 막연한 단순함이 있었지만 이러한 움직임에 방향을 제시하고 초점을 맞출 사람, 분명한 생각을 하고 강하게 말하고 또한 무엇보다도 확신을 갖고 태도를 취하는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하나님은 요한 후스를 그러한 사람으로 예비하셨습니다. 그리하여 후스가 베들레헴 예배당에서 “성경은 말하기를...”이라고 선포했을 때, 회중의 마음은 그와 함께 했습니다. 후스는 사람들이 막연하게만 느꼈던 것을 분명하게 설명해주었습니다. 후스는 위클리프가 취했던 입장을 취하며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진리를 향해 서 있었습니다.

 

그는 73일간 감옥에 갇힌 후 1415년에 화형에 처해졌습니다. 그일로 인해 1419년에는 일반 대중에 의한 프라하를 점령하는 사건으로 발전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위클리프가 영국에서 했던 것처럼 위클리프에게 영향을 받은 그는 로마 천주교의 오류를 지적하며 위클리프의 노선을 계속하여 동유럽에 말씀을 전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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