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세기의 유럽 동향
성경과 교회사
생명강가 2009-11-19 , 조회 (1678) , 추천 (0) , 스크랩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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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의 글에서 살펴본 영국의 존 위클립과 프라하의 존 후스는 14세기 기독교회의 개혁가들이었습니다. 이 글에서는 당시의 유럽과 기독교의 상황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B.C. 1800년경에 켈트인이 북프랑스로 이동해 들어왔습니다. 철기시대에 이르면 프랑스 중부는 거의 켈트계 갈리아인에 의해 점령당하게 됩니다. B.C.58년부터 카이사르의 로마군이 갈리아 지방을 정복하기 시작하였고, 그 결과 로마화 된 갈리아가 이루어 낸 것이 갈로로망 문화입니다. 3세기 중엽, 게르만인의 부족 중 하나인 프랑크족이 갈리아 지방을 침입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프랑크의 살리 지족이 북동부에 침입하여 로마의 동맹군으로서 그 세력을 키웠습니다. 로마와의 연합군은 훈족의 왕인 아틸라의 침략을 격퇴하였으나 서로마는 얼마 안되어 멸망하였습니다. 그리고 프랑크의 살리 지족의 클로비스는 메로빙거왕조의 프랑크 왕국을 건설하였습니다.

 

이후 카롤링거 왕조가 형성되었을때 카를대제의 손자대에 이르러 국토는 3분되었습니다. 나중에 독일이 된 동프랑크왕국, 북이탈리아를 포함하는 중부 프랑크의 로타르 왕국, 그리고 현재의 프랑스 영토를 중심으로한 서 프랑크 왕국이 그것입니다.

 

그 후 서프랑크왕국은 점차 프랑스 왕국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이후 987년 위그 카페는 카페왕조를 창시하고 프랑스 왕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프랑크 왕국이 멸망하고 프랑스 역사가 시작됩니다.

 

동프랑크는 신성로마제국의 이름을 거쳐 독일제국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중부 프랑크가 그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가운데 프랑스와 독일의 세력다툼 가운데서 스위스가 13세기 말에 독립을 하게 되었습니다. 독일과 프랑스는 이탈리아에 대한 지배력을 놓고 분쟁을 하던 중 14세기에 프랑스는 이탈리아에 대한 지배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14세기 초인 1305년에 선출된 프랑스인 교황 클레멘스 5세는 전통적인 교황의 거처인 로마에서 그 거처를 프랑스 영토 내에 있는 아비뇽으로 옮겼습니다.

 

이 후1377년에 교황 그레고리우스11세가 아비뇽에서 로마로 그 거처를 옮기고 죽자 그 이후 로마에 이탈리아 출신의 교황과 아비뇽에는 프랑스 출신의 교황이 세워지고, 그 혼란의 종식을 위해 이탈리아 피사에 새로운 교황이 세워지는 일이 발생합니다. 한 때 세 명의 교황이 존재하는 혼란은 1429년에 종식되었습니다.  

 

그런가하면 영국 왕 에드워드 3세가 왕위계승권을 주장하여 프랑스로 침입하였기 때문에 영국과 프랑스 간에 백년전쟁(1337~1453)이 시작되었습니다. 프랑스의 잔 다르크의 이야기로 유명한 이 전쟁은 그 결과 프랑스의 제후 세력들이 쇠퇴하고 왕권이 강화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흑사병이라고 불리는 페스트로 인해 수 많은 사람이 죽어 유럽에 큰 재앙이 되었던 사건이 이 시기에 있었습니다.  중국과 아시아 내륙에서 유래한 흑사병은 1347년 키르키스 초원과 남러시아의 킵차크 초원지대에 있던 몽골계통의 나라 킵차크의 군대가 흑해의 크림반도지역에서 이탈리아반도의 제노바 상인들이 세운 교역소를 포위하고, 페스트 환자의 시체들을 도시를 향해 쏘아보냄으로써 유럽인들에게 전파되었습니다.

 

흑사병은 지중해 항구들로부터 퍼져나가 북아프리카와 전 유럽에 퍼졌습니다. 그 당시의 문헌 연구에 따르면, 치사율은 지역에 따라 다르지만 프랑스의 연대기 작가 장 프루아사르가 유럽 인구의 1/3 정도가 흑사병으로 사망했다고 한 말은 비교적 정확할 것입니다. 대략적으로 추산해보면, 그당시 유럽에서 2,500만 명이 흑사병으로 사망했습니다.

 

이처럼 존 위클립과 존 후스가 교회의 개혁을 주장하며 죽어가던 시절은 교회와 유럽 사회가 혼란과 격동 가운데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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