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이해하기(6)
자료실
생명강가 2010-09-15 , 조회 (563) , 추천 (0) , 스크랩 (0)
출처
원문

 

1-6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원본크기로 보실수 있습니다.


 

 

로마는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고, 예루살렘을 훼파하고 한 것은 있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전성기의 로마가 로마다울 때 사람들을 매혹시킬만한 무언가가 충분히 있었습니다.

 

특히 요즘의 정치인들을 보노라면 더욱 그런 느낌이 듭니다.

 

3세기부터 이민족의 침입이 계속적으로 로마를 위협합니다. 그 당시 유럽에서 안정된 생활을 한곳은 로마가 통치한 영역 외에는 없었으니 당연한 결과입니다.

나중에는 훈족이 직접 침략을 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안보를 최고로 우선시해야 하는 황제는 잠시도 쉴 겨를이 없었습니다.

각지에 침략이 있으면 바로 쫓아가야 하는 상황입니다. 당시 로마의 주 전력은 중무장 보병이었습니다. 또한 방위 전략은 주둔지에 있으면서 일정한 영역을 담당하는 방식입니다.

 

그런데 침략하는 이민족은 기마병이 주 전력입니다. 그래서 모여서 싸우는 것은 로마에게 항상 유리하지만, 보병은 기동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약탈하고 도망하는 이민족을 따라 잡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 주둔지 방식을 포기 할 수밖에 없고, 로마 역시 기동타격대 형식으로 기마병을 운영하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광활한 대 제국을 한명의 황제로는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시도한 것이 동-서 로마로 황제를 임명해서 지역을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동로마에 황제 1명, 부제 1명, 서로마에 황제 1명, 부제 1명, 이렇게 4명의 황제가 동서지역을 나누어서 이민족의 침입을 대처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결국 로마는 동-서로마로 분리된 것입니다.

이러한 시기에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등장합니다.

그는 동로마를 담당했는데 결국 다른 경쟁자를 다 물리치고 단일 황제가 됩니다.

그리고 수도를 콘스탄티노플로 결정합니다.

 

그가 밀라노 칙령을 발표하여 그리스도인에 대한 공식적인 탄압을 종결하게 됩니다.

아직도 의견이 분분한 것은 그가 정말로 그리스도인이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가 기독교를 공인한 것은 그의 정치적인 의도가 상당히 작용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앞에서 기록했지만, 로마의 황제는 원로원과 시민의 승인이 있어야 정식 황제가 됩니다.

다시 말하면 황제는 사람에게 의해 세워진 직책입니다.

그러므로 황제라 할지라도 조금만 잘못하면 암살 등 그 지위가 위태로워집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콘스탄트는 기독교를 인정함으로 왕의 자리가 사람에 의해서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신으로부터 황제는 세워지는 것으로 바뀌게 됩니다.

교황이 왕들의 '대관식'을 거행하였던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사람이 아니라 신에게 왕권을 수여받는 것은 황제의 자리를 견고히 하는 기초가 되었습니다. 그 결과 더 이상 '황제정' 아니라 '동양식 제정정치'가 시작됩니다.

 

황제는 최고 권력자이지만 가까이 있고 항상 만날 수 있는 존재 입니다.

그러나 왕은 쉽게 접근할 수 없는 존재가 됩니다.

그래서 그 간격을 매워주는 제도가 바로 '환관제도, 내시 제도' 입니다.

 

그리하여 로마도 동양식의 제정정치가 시작되었고 그 후 암살이 없어지고 장수하는 왕이 나왔습니다.

그러나 이미 로마는 기울어 가고 있었고, 그 공백을 카톨릭이 매워가고 있었습니다.

 

470년경 동로마 제국이 망하고 서로마 제국도 1300년경 회교도들에게 멸망할 때까지 2000여년의 역사를 마치게 됩니다.

 

그리고 로마주교가 교황이 되어 로마의 영토를 실제적으로 다스리는 종교적인 바벨론이 되는 것입니다.

 


추천 스크랩 전체목록

생명강가
답글

기원전 79년 8월 24일 로마 남서부 항구도시 폼페이가


갑작스런 주변의 화산 폭발로 도시 전체가 화산재에 파묻혔다.


그후 1700년이 지난 후에 이 도시가 화산재 밑에서 발견되었다.


그로 인하여 2000년전의 로마의 번영과 생활상을 볼 수 있었다.


 


 

생명강가
답글

고고학자들이 발굴해낸 수많은 유물들 중에


그 당시 로마의 중소도시였던 폼페이가 지방도시임에도


화산재를 거두어낸 도시의 건물 벽에 쓰인 낙서를


소개함으로 그 당시의 로마의 생활상을 소개하고자 한다.


"우리가 함께 즐겼던 추억을 잊지마세요."

생명강가
답글

당시 폼페이의 중심가를 중심으로 수많은 점포들이 발굴되는데


그 중 어느 술집에서 발견한 로마인들이 사용했던 은재 술잔에


새겨져 있던 글이다.


"쾌락보다 더 소중한 보물은 없다."


"미래는 불투명 한 것 미래가 없는 것처럼 삶을 즐겨라."


 

   비밀번호   비밀글
홈페이지
좌측 상자안의 글자를 입력하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