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주
새 창조의 실재 안에서 삶
성경 : 사 40:3-5, 28-31
Ⅰ. 구약 서른아홉 권과 일치하는 이사야서의 처음 서른아홉 장은 주로 옛 창조에 초점을 맞추는 반면, 신약 스물일곱 권과 일치하는 이사야서의 후반부 스물일곱 장은 새 창조에 중심을 둔다-고후 5:17, 갈 6:15.
A. 이사야서 40장은 (사복음서와 일치하는) 복음 전파와 (사도행전과 일치하는) 거듭남을 통한 구원과 (서신서들과 일치하는) 변화를 계시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육체 되심을 통해 사람이 되심으로 사람을 거듭남과 변화를 통해 (신격에서는 아니지만 생명과 본성에서) 하나님이 되게 하시는 것에 대한 계시로서,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의 내용이다.
B. 이사야서 40장과 신약은 침례자 요한의 등장으로 시작한다. 침례자 요한은 새 창조의 개시를 위해 예기되신 그리스도를 소개하였다.
C. 옛 창조물은 신성한 생명과 본성을 갖고 있지 않지만, 하나님에게서 태어난 믿는 이들로 구성된 새 창조물은 신성한 생명과 본성을 갖고 있다. 따라서 믿는 이들은 육체의 옛 본성에 따라서가 아니라 신성한 생명의 새로운 본성에 따라서 새 창조물이다.
Ⅱ. 침례자 요한은 엘리야로 예표되고(눅 1:17), 엘리야는 구약경륜을 가진 구약 시대의 예표이다. 주 예수님은 엘리사로 예표되시고, 엘리사는 신약 경륜을 가진 신약 시대의 예표이다(4:27). 열왕기하 2장 15절까지에 따르면, 길갈과 벧엘과 여리고와 요단강이라는 네 곳을 통과함으로 시대는 새 창조로 바뀌었다.
A. 길갈은 하나님의 백성이 그들의 육체를 처리하기 위해 할례 받은 곳이었다.
B. 벧엘은 세상을 버리고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돌이켜 하나님을 모든 것으로 취한 곳이다.
C. 여리고는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이 좋은 땅으로 들어갈 때 패배시켜야 했던 첫 번째 성으로서 하나님의 원수인 사탄을 상징한다.
D. 신약의 침례가 시작된 곳인 요단강은 죽음을 상징한다.
1. 요단강을 건너기 위해 엘리야는 그의 겉옷으로 물을 쳤는데, 그의 옷은 쏟아 부어지신 영, 곧 능력의 영을 상징한다.
2. 능력의 영께서 죽음의 강을 처리하셨고, 그 결과 엘리야와 엘리사가 건널 수 있도록 길이 열렸다.
E. 이 모든 것은 우리가 엘리야처럼 휴거되거나 엘리사처럼 그 영의 능력을 받기 위해서, 그리고 시대가 우리의 체험에서 구약에서 신약으로 바뀌기 위해서 우리는 반드시 생명의 영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육체를 처리해야 하고, 아버지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세상을 버리고 하나님께 돌이켜야 하며, 아들의 말씀을 통해 사탄을 패배시켜야 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위해 부활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죽음을 통과하여 자아에 대해 죽어야 한다는 것을 상징한다.
F. 더욱이 우리는 반드시 ‘우리의 옷을 둘로 찢어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우리의 존재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더 이상 귀하게 보지 않는다는 것을 가리킨다. 이 모든 단계들을 통해 우리는 새 창조의 새 시대로, 곧 은혜 안에 있는 하나님의 신약 경륜의 시대로 들어가는데, 이 은혜는 그분 자신을 우리의 누림으로 우리에게 주심으로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하시는 하나님이다.
Ⅲ. 요한은 제사장으로 태어났지만, 사가랴와 함께 성전에서 봉사하기보다 광야에 머물렀고, 야생의 옷을 입었으며, 야생의 음식을 먹었고, 거친 일을 했다. 그는 구약의 제사장 직분 전체를 부인했지만, 그의 일은 새 창조를 위한 신약에서의 제사장 직분의 시작이었다-막 1:1-4
A. 첫 번째 신약의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은 주 예수님의 선주자인 침례자 요한이었다.
B.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인 죄들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침례를 전파했다. 그의 사역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었다.
C. 그는 황소와 염소를 희생제물로 드리지 않았고, 자신의 복음 전파를 통해 구원받은 죄인들을 희생제물로 드렸다.
D. 신약의 제사장 직분은 구원받아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간 죄인들을 주된 희생제물로 드린다.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와 하나 되어, 새 창조의 일부인 그리스도의 확대 자체로서 하나님께 드려진다.
Ⅲ. 이사야서 40장 28절부터 31절까지는 거듭나고 변화된 한 사람을 계시하는데, 이 사람은 영원하신 하나님과 하나이며 절대적으로 새 창조 안에 있다 -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이는 피곤하지 않으시며 곤비하지 않으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쓰러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은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A. 이사야서 40장은 경건한 사람이었지만 여전히 옛 창조 안에 있었던 히스기야와 새 창조 안에 있는 거듭나고 변화된 한 사람을 대조하여 제시한다. 사도 바울은 이사야서 40장에 묘사된 그러한 종류의 사람의 가장 좋은 대표이다.
B. 주님은 피곤한 사람에게 능력을 주시고 무력한 사람에게 힘을 더하신다.
C. 영원하신 하나님을 앙망하는 것은 우리가 자신을 끝내는 것, 곧 우리의 생활과 행함과 활동과 함께 우리 자신을 멈추고,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을 우리의 생명과 인격과 대치물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D. 이렇게 앙망하는 사람은 독수리처럼 날개 치며 올라갈 정도로 새롭게 되고 강화될 것이다. 변화된 사람으로서 그는 걸어가고 달리 뿐 아니라, 땅에 속한 모든 장애물을 초월하여 하늘들로 날아오를 것이다.
E. 독수리는 능력 있으시고 초월하신 하나님을 상징하고, 독수리 날개는 그리스도의 부활 능력(우리에게 적용된 하나님의 은혜와 힘과 능력)을 상징한다.
1. 독수리 날개는 네 생물들이 동역하고 하나로 움직이기 위한 수단이다. 이것은 우리의 동역이 우리 자신 안에 있지 않고 하나님 안에 있으며, 신성한 능력과 신성한 힘과 신성한 은혜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상징한다.
2. 독수리 날개는 움직이기 위한 것일 뿐 아니라 보호를 위한 것이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 어떤 사람이 되든 반드시 주님의 은혜와 주님의 능력에 의한 것이어야 한다. 동시에 우리는 드리우고 덮어 주는 주님의 은혜와 주님의 능력 아래 있다.
3. 두 날개를 사용하여 생물들을 덮는 것은, 동역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주님의 은혜 아래 자신을 감추어야 한다는 것을 가리킨다.
F. 우리 모두가 절대적으로 새 창조 안에 있었던 바울과 같이 되기를 바란다. 바울에게 있어서 옛 창조는 끝나고 해고되고 대치되었으며, 이제 여기에 그리스도와 함께 새 창조가 있다.
14주 1일
아침의 누림
사 40:3-5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여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아니한 곳이 평탄하게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여호와의 영광이 계시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이는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
구약에서 주로 다루어진 것은 옛 창조이며…신약에서 주로 계시된 것은 하나님의 새 창조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두 창조는 구약과 신약 사이의 경계를 표시한다. …이사야서의 처음 서른아홉 장에서는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와 이방인들에 대한 그분의 심판을 포함하여 옛 창조가 다루어지고 있는 반면, 마지막 스물일곱 장들에서 이사야의 신언의 중심은 새 창조이다.
새 창조물이 오는 것은 옛 창조물의 즉각적인 종결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도리어 새 창조물이 온 후에도 옛 창조물은 한 동안 남아 있다. 신약에서 새 창조는 침례자 요한이 등장함으로 시작된다. 그 후에도 옛 창조물은 천년왕국 끝에 종결될 때까지 남아 있다. 천년왕국의 끝은 새 하늘과 새 땅에 있는 새 예루살렘으로 상징되는 것처럼, 새 창조의 완성이 완결일 뿐 아니라 옛 창조물의 종결이 될 것이다.
오늘의 읽을 말씀
역사는 이사야가 두세 기간에 걸쳐 이사야서를 썼음을 우리에게 알려 준다. 나는 그의 선지서의 두 번째 부분이 첫 번째 부분과 다른 때에 기록되었다고 믿는다.
두 번째 부분은 예루살렘의 마음에 이른 위로의 말씀으로 시작된다. 이 말씀이 마음에 이른다는 사실은 이 말씀이 겉사람에 관한 것이 아니라 속사람에 관한 것임을 의미한다. 이 장에서 예루살렘의 마음에 위로의 말씀을 하는 것은 사실상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위로’라는 단어가 복음 전파를 의미한다고 이해할 수도 있다. 이사야서 40장이 첫 번째로 전해 주는 것은 침례자 요한의 등장이다. 바로 이후에 여호와의 영광이신 그리스도의 나타남이 나온다. 여호와의 영광은 새 창조를 위한 복음의 중심이다.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이시고, 이 광채는 햇빛이 비치는 것과 같다. 신약은 그리스도의 첫 번째 오심이 해가 솟아오르는 것이었다고 우리에게 말해 준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셨을 때,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남으로 하나님을 추구하는 이들과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이 그 영광을 보았다.
이사야서 40장은 침례자 요한의 등장과 하나님의 영광이신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말한 후에, 들의 풀과 꽃처럼 모든 사람이 마르고 시들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사실상 살아 있다. 육체인 모든 사람들, 시들고 마르는 모든 인간들은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서 사람들에게 오시는 하나님의 영광이신 그리스도를 영접해야 한다. 그리스도를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거듭남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어 영원히 살 것이다.
이사야서 40장 29절부터 31절까지에 따르면, 말씀을 영접하여 거듭난 사람들은 지금 여호와를 앙망하고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은 우리 자신들이 ‘해고되었다는 것’, 즉 우리의 생활과 행함과 활동과 함께 우리 자신을 멈추고 그리스도를 우리의 대치물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이사야서 40장 31절은 그렇게 앙망하는 사람은 독수리처럼 날개를 치며 솟아오를 것이라고 말하는데, 그것은 그리스도의 부활 능력을 나타낸다. 그는 걷고 달릴 뿐 아니라 또한 땅의 모든 좌절을 초월하여 하늘들로 솟아오를 것이다. 이 사람은 변화된 사람이다. 그러므로 이 장에서 우리는 (사복음서와 일치하는) 복음 전파와 (사도행전과 일치하는) 거듭남을 통한 구원과 (서신서들과 일치하는) 변화를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