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못할 때
말콤 니그렌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손가락이 잘려 나가거나
살점이 불에 타 숯이 되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양심에 있어서
전혀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것도 위험합니다.
양심의 고통은 우리를 위험으로부터 보호해 주는
경보기의 기능을 합니다.
예민한 양심은 화재 경보만큼이나
절대적으로 필요하며 더 자주 울려야 합니다.”
너무나 오랫동안 양심에 반한 죄를 지어와서
이제는 더 이상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하게 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얼마나 위험한 일입니까!
이에 반하여 “하나님과 사람을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노라.”라고 말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얼마나 현명한 그리스도인 입니까?
사람이 짐승과 다른 가장 큰 차이점은 바로 그 존재안에 '양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양심은 사람 속에 하나님께서 창조한 영의 한 부분입니다. 양심이 살아있다는 것은 그 사람이 살아있는 것입니다. 양심이 죽어있다는 것은 그 사람이 죽은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에베소서 2장 1절에서는 '그런데 여러분은 허물과 죄들 가운데서 죽어 있었습니다.'(엡2:1) 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죽어 있었다는 것은 우리 영의 죽음을 가리키며, 이러한 죽음이 우리 온 존재에 퍼졌고, 이로인해 우리가 하나님을 접촉할 수 있는 기능을 잃어버리도록 했다는 것을 말합니다(회복역 각주 참조)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성을 입으시고 성육신되셔서, 모든 죄인들을 위해 그들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 우리들의 허물들과 죄들을 짊어지시고 죽으심을 찬양합니다! 그분의 보배로운 피로 말미암아 우리들의 허물들과 죄들을 깨끗하게 씻으심을 찬양합니다.
요한복음 8장에서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를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이 끌고 와서 돌로 쳐야 할 지 어떻게 해야 할 지를 갖고 주님을 시험할 때에, 주님께서는 "여러분 중에 죄 없는 사람이 먼저 그 여인에게 돌을 던지십시오."라고 말씀하심으로써 거기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양심에 가책을 받아 간음한 여인을 두고 떠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10절과 11절에서 "예수님께서 몸을 일으키시고 그 여인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이여, 그들이 어디 있습니까? 그대를 유죄 판결한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까? (11) 그 여인이 "주님, 아무도 없습니다."라고 하니,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도 그대를 유죄 판결하지 않으니, 가서 이제부터 더 이상 죄를 짓지 마십시오. (12) 예수님께서 다시 사람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사람은 결코 어둠 속에 다니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입니다."
주님을 구속자와 구주로 영접한 이후로 우리의 양심이 구원받기 이전보다 훨씬 더 예민해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깨끗한 양심, 순수한 양심을 가짐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이러한 양심을 계속해서 지닐 때에 폭풍우가 치는 그리스도인의 노정에서 파선하지 않고 앞으로계속 항해하며, 전진할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