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추수 감사절 특별 집회
메시지 3.
우리 자신의 구원을 이루어 냄
우리가 이 시대에 하고 있는 것은 바로 노아가 한 것이다. 예표에서 노아는 우리가 현재 실재 안에서 하고 있는 것을 했다.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것은 바로 방주를 건축하고 있는 것이다. 여러분이 이 의미에 대한 옛 관념을 떨쳐 버리기 바란다. 왜냐하면 아주 신선한 새로운 각도에서 우리가 교통을 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우리의 일상생활에 영향을 줄 것이다.
마태복음 24장에서는 “노아의 때와 같이, 사람의 아들이 오는 것도 그러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홍수가 나기 전에 사람들은 노아가 방주 안으로 들어가던 날까지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갔으며, 홍수가 나서 모든 것을 휩쓸어 갈 때까지 심판이 오고 있는 것을 알지 못했는데, 사람의 아들이 오는 것도 이와 같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때에 두 남자가 밭에 있는데,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남겨둡니다. 또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는데,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남겨둡니다. 그러므로 깨어있도록 하십시오. 왜냐하면 여러분의 주님께서 어느 날에 오실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라고 말한다. 여기서 데려감을 당한 사람과 남겨둔 사람은 모두 믿는 이이다. 또한 ‘여러분의 주님’이라는 표현은 맷돌질을 하고 있는 두 여자가 그분을 주님이라고 불렀기 때문에 그들이 모두 믿는 이이다. 우리가 밭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내가 어떤 형제와 함께 일을 하고 있는데, 저 형제는 들림 받고 나만 혼자 남겨졌다면 나는 정말 빨리 주님께 절대적으로 돌이켜야한다. 우리는 뒤에 남겨진 사람이 되기 원치 않는다.
주님의 파루시아는 그분의 백성에 대한 주님의 임재인데 거기에서 그분이 사내아이를 휴거시키기 시작할 것이다. 또한 마태복음 24장 38절 각주를 보면, 이 절이 주님의 파루시아가 왜, 어떻게 노아의 때와 같을 것인지에 대한 설명이라는 것을 가리킨다. 노아의 때는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에 정신을 빼앗겼고, 홍수가 나서 그들을 휩쓸어 갈 때 까지 심판이 오고 있는 것을 알지 못했다. 주님의 파루시아가 일어나려고 할 때에도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현재 생활에 필요한 것들에 정신을 빼앗길 것이며, (홍수로 상징된) 하나님의 심판이 주님께서 나타나심으로 그들 위에 오는 것을 알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믿는 이들은 마취에서 벗어나 깨어 있음으로 그리스도께서 이 부패한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집행하시기 위해 오고 계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먹고 마시는 것과 결혼하는 것은 원래 사람의 생존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이었다. 그러나 사람의 정욕으로 말미암아 사탄이 인간 생활에 필요한 이러한 것들을 이용함으로써 사람을 점유하고 하나님의 권익을 관심하지 못하게 한다. 이 시대 끝에, 즉 주님의 파루시아가 가까워질 때에 이러한 상황은 더욱 심해질 것이다.
우리는 노아의 때에 살고 있다. 창세기 6장에서는 노아의 때에 대해서 말한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셨다. 이 땅에 폭력이 가득했고, 죄악이 가득했다. 이러한 가운데서 8절을 보면,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고 말한다. 성도들이여, 이러한 상황 가운데 커다란 ‘그러나’가 있다. 우리는 단체적인 노아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여호와 보시기에 이 어두운 세대에서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누림을 갖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은혜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영으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누림이 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누리는 것이다.
주님의 회복 안에 있는 우리에게는 특별한 위임이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이 시대를 바꾸는 생활과 일을 하는 것이다. 교회시대로부터 왕국시대로 바꾸는 생활과 일을 해야 한다. 노아의 삶과 일이 그러했듯이 우리는 우리의 삶과 일을 통해서 이 시대를 바꾸어야 한다. 이 시대를 바꾸기 위해서 우리는 방주를 건축해야 한다. 우리는 신약의 의미에서 방주를 건축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방주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주님의 회복에 대한 신선한 이상이 필요함-M3 E. M 교통 중에서)
특별교통 - 아침부흥
형제자매들은 내게 “이 형제님, 성경에서는 자녀에게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지 않았습니까?”라고 물을 것이다. 그렇다. 그러나 여러분은 거기에 ‘주(主)’라는 말이 있음을 기억하라. 자녀들은 주 안에서 부모를 공경해야 하고, 부모들은 주 안에서 당신의 사랑의 대상이 되어야 옳은 것이다. 만일 부모가 주님을 거치지 않고 당신의 사랑의 대상이 된다면 독이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을 주 안에 둘 때 해독된다. 여러분 모두가 해독의 의미를 알 것이다. 주님 외의 모든 것에는 독이 들어 있다. 오직 주님 자신에게만 독이 없다. 그뿐 아니라 그분은 또한 다른 것들의 독을 없앨 수 있다. 돈을 주 안에서 해독시키면 사랑스럽게 되고, 학문도 주 안에 두면 사랑스럽게 된다. 나는 사람에게 학문이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니다. 주님을 거치지 않은 학문에는 독이 있고 주 안에 둔 학문은 해독된다. 이럴 때 비로소 그 학문을 사랑할 수 있다. 이것이 주 안에서 학문을 사랑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아내도 주님을 거치지 않으면 정말 독이 있다. 아내가 주 안에서 해독될 때 사랑스럽게 된다. 남편도 똑같다. 자매들이여, 만일 당신이 주님을 거치지 않고서 남편을 사랑한다면 당신의 남편이 곧 독 있는 뱀임을 염두에 두라. 여러분은 남편을 주 안에서 여과(濾過)해야 한다. 수돗물은 반드시 여과를 거쳐야 해독되어 마실 수 있다. 내가 다시 말하지만 사랑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며 하나님께 드리기 위한 것이다. 사람 속에 있는 사랑의 작용(作用)과 기능은 완전히 하나님을 위한 것이다. 하나님이 처음에 사람에게 사랑을 창조하신 것은 사람에게 다른 것들을 사랑하라는 것이 아니라 오직 전적으로 그분 자신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언제든지 사람이 하나님 외의 어떤 것을 사랑하면 타락한 것이다. 당신은 사람의 최초의 타락을 기억하고 있는가?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보니 보암직하여 곧 그것을 좋아했고 그 열매와 직접적인 관계를 맺었다. 이것을 기억하라. 만일 하와가 그 열매를 가지고 주님 앞에 나아가 주님을 접촉했다면 그 열매를 먹게 되지 않았을 것이다. 아담과 하와의 타락은 그들이 하나님을 염두에 두지 않고 다른 것과 직접관계를 맺고 사랑했기 때문이다. 당신이 하나님을 거치지 않고 직접 사랑하는 모든 것들이 위험하며 독 있는 것임을 기억하라. 모든 사랑은 하나님을 거쳐야 하고 주 안으로 가져와야 한다. 주 안에서 돈을 사랑해야 하고, 주 안에서 학문을 사랑하고, 주 안에서 옷을 사랑해야 한다. 당신이 사랑하는 모든 것을 주 안으로 가져와야 한다. 당신은 주님을 거치지 않은 어떤 사람이나 일이나 물건과 관계를 맺을 수 없다. 주님 외의 것이 당신의 사랑의 대상이 될 때에는 독이 된다. 그렇게 되면 당신은 해를 입게 된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위험한 때가 이른다고 말한 것이다. 사람의 타락과 고통은 하나님 외의 것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오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 외에 첫째로 사랑하는 것-자아
사람이 하나님 외에 두 번째로 사랑하는 것-돈
자기를 사랑한 후에 이어 무엇을 사랑하는가? 사람은 자기를 사랑한 후 곧 돈을 사랑하게 된다. 이렇게 질문하는 것을 허락하기 바란다. 당신은 돈을 사랑하는가? 어떤 형제는 답변하기 어렵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답변하기 어렵다는 그 말은 거짓이다! 돈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나는 심지어 어린아이까지도 돈을 좋아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먼 곳에 살고 있는 한 자매가 내 아이와 친구가 되었다. 그 자매의 나이는 육십 세이고 내 아이는 칠팔 세였다. 그들은 노인과 소년이었다. 그들 사이에 자주 편지도 오고 가고 선물도 오갔다. 한번은 그 노 자매가 이 어린 친구에게 작은 저금통을 선물로 주었다. 여러분도 알겠지만 그 저금통에는 돈 넣는 구멍이 있었다. 돈을 넣을 수는 있지만 꺼낼 수는 없었다. 그 노 자매가 그 선물을 나보고 전해 달라고 했을 때 나는 인상을 찌푸리면서 이러한 선물은 좋지 않다고 말했다. 그녀는 왜 좋지 않으냐고 물었다. 나는 “자매님은 어린아이에게 돈을 사랑하는 마음을 키워 주려고 하십니까? 그 아이는 나보다 더 돈을 좋아하니 그러한 마음을 강하게 하거나 키워 줄 필요가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우리는 모두가 돈을 사랑함을 시인해야 한다. 참으로 많은 사람에게 있어서 돈이 무엇보다도 사랑스럽게 느껴진다. 우리는 제이(第二)의 생명이라는 용어를 많이 쓴다. 우리는 명예가 나의 제이(第二)의 생명이다. 라고 말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우리의 제이(第二)의 생명은 돈이다. 제일(第一)의 생명은 자기이고 제이(第二)의 생명은 바로 돈이다. 사람은 자기를 사랑하고, 또한 돈을 좋아한다. (열두 광주리 가득히 9권 35-38쪽)
헌신 - 기도집회 추구내용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사람이 지불하는 대가는 실로 무한한 것이다. 오늘날 자신이 지불한 대가로 이미 족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바울도 계속 뒤에 있는 것들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들을 향하여 상을 위하여 푯대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고 했다. 바울이 디모데후서 4장에서는 그의 대가를 모두 치루었다고 말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앞으로 전진했다. 우리 모든 사람에게는 주님의 권고가 있었다. 우리가 받은 권고는 똑같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의 손에서 쓰임받는 데 차이가 있는 이유는 우리가 지불한 대가에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대가를 지불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보다 더 크게 쓰임을 받았던 것이다. 주님은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롬 9:15)라는 말씀을 하셨지만 그 말은 아직 주님의 권고를 받지 못한 이방인에게 하신 말씀이다. 바로 왕 같은 경우가 그러하다. 은혜를 받은 우리들은 이미 주님의 권고를 받은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이제 문제는 주님의 권고를 받는가, 받지 않는가에 있지 않고 대가를 지불하는가, 지불하지 않는가에 있다. 주님의 손에서 우리의 용도는 우리가 지불한 대가를 보아야 한다. 지불한 대가가 크면 용도도 크고, 대가가 작으면 용도도 작은 것이다. 육천 년 이래 주님의 권고는 이미 족했다. 다만 우리가 지불한 대가가 너무 적기 때문에 주님을 탄식케 하는 것이다. 우리가 지불한 대가가 너무 적기 때문에 주님의 사역의 발전이 늦어지고 주님이 빨리 오시지 못하는 것이다. 성경에서 주님은 사람들이 대가를 지불하여 그에게 쓰이는 바 되기를 기다리고 계심을 우리에게 분명히 보여 준다. 이사야 6장 8절 말씀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너무나 얄팍하다. 이 구절에서 이 우주 가운데 주님의 큰 갈망은 사람들이 그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분은 모든 시대에 역사하고자 하시지만 그의 부르심에 응답하고 대가를 지불할 사람이 부족하다. 이 땅에서 대가를 지불하여 그의 쓰심에 응하는 사람이 있을 때마다 그분은 반드시 그 사람을 쓰신다. 하나님은 사람이 그분께 응답하는 만큼 그를 사용하신다.
산상(山上)의 의미
성경에서 처음으로 산에 올라간 사람은 노아로 기록되어 있다. 노아는 방주 안에서 홍수를 거쳐 아라랏 산에 이르렀다. 홍수의 심판의 중점은 죄에 있지 않고 하나님을 대적한 세상을 심판하는 데 있다. 노아가 산 위에 올라간 것은 심판에서 나와 하나님을 배반하는 모든 상황에서 벗어난 것을 상징한다. 노아가 산 위에 올라갔을 때 하나님을 배역했던 모든 상황은 과거가 되어 버렸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산 위에 올라가는 것의 첫째 의미는 바로 배역에서 떠나는 것이다. 온 세상이 모두 하나님에 대한 배역 안에 있다. 오직 산 위에 있는 사람만이 배역에서 나온 사람이다. 둘째로 산은 죽음 가운데서 부활하여 하늘로 높이 승천한 것을 의미한다. 노아는 산에 오른 후에 배역에서 벗어나 죽음으로부터 부활했기 때문에 그 결과 새 시대에 이 땅에서 하나님의 권위를 대표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노아가 산에 올라간 의미는 노아 이후의 사람들이 산에 올라간 의미를 대표한다. 언제든지 하나님이 사람에게 산으로 올라오라고 하실 때에는 사람에게 배역에서 떠나 죽음을 거쳐 부활하라는 것과 땅에서 하나님의 권위를 대표하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노아 이후 성경에서 산상(山上)은 또 하나의 의미, 즉 계시를 얻는다는 것을 뜻한다. 아브라함이 산에 오른 것은 물론 이삭을 바치기 위한 것이었지만 최종적인 목적은 계시를 받기 위한 것이었다. 하나님은 한 면으로는 그로 하여금 하나님이 여호와 이레이심을 알게 하고 또 한 면으로는 하나님의 이 땅에서의 일을 알게 하셨다. 하나님이 산에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들은 모두 하나님이 이 땅에서 역사하고자 하는 일들이다. 그 후의 모세나 엘리야가 산에 올라간 것도 계시를 받기 위한 것이었다. 신약에서 주님이 제자들을 산으로 이끄신 것은 계시를 주기 위한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요한이 밧모 섬의 산에 올라간 것도 역시 계시를 얻기 위한 것이었다. 요한이 산에 올라간 것은 모든 사람이 산에 오르는 의미를 완전히 포함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배역에서 떠나, 죽음에서 부활하여, 이 땅에서 하나님의 권위를 완전히 대표하고, 또한 비밀의 계시를 얻는 것이다. 산 위에 올라가 계시를 얻는 것은, 계시를 얻으려면 반드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뜻이다. 산 위에 올라가는 것을 바꿔 말한다면 바로 대가를 지불하는 것이다. 마태복음 5장에서 7장까지의 산상보훈(山上寶訓)은 회당의 가르침 후에 계속된 것이고, 또한 회당 밖의 가르침이었다. 회당의 가르침은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것으로서 많은 사람들이 들어왔던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회당에서 가르치신 후에 곧 산으로 올라가셨다. 천국의 가르침은 높고 전적인 것이다. 오직 주님을 따라 산 위에 가서 주님 앞에 온 소수의 사람만이 그 가르침을 들을 수 있었다. 산 위에 오른다는 것은 곧 대가를 지불하고 주님 앞에 나와 주님을 가까이하는 것을 의미한다. 역대로 마태복음 5장부터 7장까지의 가르침을 깨달은 사람이 적은 이유는 이러한 대가를 기꺼이 지불하는 사람이 매우 적기 때문이다. 우리가 계시를 얻으려면 반드시 대가를 지불하리라는 결심을 하고 속에서는 주님을 가까이해야 한다. 이것이 산 위에서 교훈을 받을 수 있는 기본 조건이다. 아브라함과 모세와 주님의 제자들도 모두 이렇게 대가를 지불하고 주님을 가까이하여 계시를 얻었던 사람들이다. 특히 요한은 밧모라하는 섬에서 대가를 지불하고 주님과 가까이하여 계시를 얻은 사람이다. 오늘 우리는 모두 이 공과(工課)를 배워야 한다.(열두 광주리 가득히 9권 170-17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