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추수 감사절 특별 집회
메시지 4.
유일한 하나와
진정한 한마음 한뜻에 대한 이상
성경은 하나님께서 취하신 네 가지 큰 움직이심을 계시한다. 이것은 하나님이 하신 위대하신 네 가지 역사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네 가지 역사하신 것으로부터 하나님이 하나 됨의 원칙 안에서 역사하신다는 것을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셨을 때 많은 사람을 창조하지 않으셨다. 단 한 사람을 창조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아를 창조하지 않으셨다. 하와는 아담의 갈빗대를 취해서 만들어졌다. 아담으로부터 갈빗대를 취하여 여자를 창조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온 땅이 사람으로 채워지기를 원하셨지만 그렇다고 많은 사람을 창조하지 않으셨다. 단 한 번에 많은 사람들을 창조하셔서 온 땅을 가득 채우게 하실 수도 있었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단 한 사람을 창조하셨던 것이다. 이 한 근원으로부터 온 인류가 나오게 하셨다. 불행하게도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사람이 타락했고, 창세기 11장에 이르렀을 때 사람들은 하나님을 향하여 바벨탑을 세움으로 거역을 행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고, 이 사람들은 더 타락해서 나뉘어져 많은 민족들을 이루었다. 사람들이 더 이상 함께 있는 것이 아니라 나눠지고 흩어져서 많은 민족들이 있게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의 원래의 의도를 포기하지 않으셨다. 이 모든 사람들 가운데서 한 사람을 부르셨다. 많은 사람을 부르신 것이 아니다. 다만 한 사람을 부르셨다. 그가 아브라함이다. 아브라함으로부터 수 많은 자손들이 나왔다. 아브라함 안에 이스라엘백성들이 있었다. 그런데 이 부르심 받은 이스라엘 족속들도 타락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감으로 결국은 바벨론과 앗시리아로 모두 흩어지게 되었다. 이방나라들로 흩어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전히 그분의 의도를 포기하지 않으셨다. 신약의 때가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그분의 아들 안에 이 땅에 오셔서 삼십 삼년 반 동안 사람의 아들로서 사시고, 십자가로 가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셨다. 그리고 오순절 날 예루살렘에서 이 땅의 첫 번째 교회, 즉 예루살렘 교회를 세우셨다. 부활안에 계신 공기같은 그리스도께서 몸의 머리로서 교회를 산출하셨다. 주님은 오순절날 많은 교회들을 산출하신 것이 아니라 단 한 교회를 세우셨다. 이 교회로부터 주님께서는 사람들을 내보내셔서 복음을 전하게 하시고 수많은 교회들을 일으키게 하셨다. 그래서 많은 교회가 세워졌다. 그러나 많은 교회가 세워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서로 교통을 가졌으며, 교통가운데 있었다. 신약에서 주님께서 교회를 세우셨을 때 한 교회를 세우셔서 확산되게 하셨다. 궁극적으로 이 교회도 하나님께 신실하게 남아있지 않았고 지난 2000년간 많은 믿는 이들이 다른 가르침과 철학에 의해 잘못 이끌려져서 여러 교파들을 세우게 되었다. 구약에는 많은 민족들로 나뉘어졌고, 신약에는 많은 교파들로 나뉘어졌다. 그리스도인들이 교파를 세우고 이름을 붙임으로 흩어지고 나눠지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회복을 필요로 하신다. 우리를 이 모든 혼란스럽고 나눠진 상황 안에서 이끌어 내시기 위한 것이다. 우리가 성경의 끝에서 보는 것은 다만 한 성, 한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을 본다. 많은 민족들과 교파들을 보는 것이 아니라 신성한 계시 안에서 성경 끝에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한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다. 오늘날 북미에 다만 한 도시, 중국에 한 도시, 남아프리카에 한 도시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새 하늘 새 땅에는 유일한 거룩한 한 성이 있을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모든 세대를 통하여 이 거룩한 성의 조성이 될 것이다. 그곳에는 한 보좌가 있고, 한 길이 있고 나선형으로 된 길을 따라서 생명수의 강이 흐르고, 한 나무가 강 좌우에 자란다. 이 성에서는 길을 잃을 염려가 없다. 하나님은 이렇게 간단하신 분이시다. 우리가 복잡한 것이다. 우리는 많은 다양한 것을 원하고 복잡하지만, 하나님은 다만 한분이시고 그분의 본성과, 존재와 행동이 모두 하나이시다. 그분의 창조와 부르심과 새 창조와 새 예루살렘에서 우리는 어떻게 그분의 일을 수행하시는 가를 보는데 그것은 모두 하나의 원칙 안에서 행하는 것이다. (주님의 회복에 대한 신선한 이상이 필요함-M4 J. L 교통 중에서)
특별교통 - 아침부흥
이 세상에 자본가(資本家)가 아닌 사람은 없다. 나이 든 사람이든 어린 사람이든, 빈곤한 사람이든 부한 사람이든 모든 사람이 자본가이다. 그렇지만 어떤 사람은 진짜 자본가이고 어떤 사람은 가짜 자본가이다. 어떤 사람은 실제적으로 매일 수표를 세고 어떤 사람은 밤낮으로 수표 세는 꿈을 꾸고 있다. 모든 사람이 돈을 세고 있기 때문에 자본가가 아닌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모든 사람이 돈을 사랑하고 있다. 그러므로 돈은 사람에게 큰 유혹이 되어버렸다. 우리 모두가 아는 바와 같이 성경에서 돈은 불의(不義)한 것이라 했고,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고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말했다. 이 재물은 바로 돈이다. 그러므로 돈은 하나님의 대적이고 하나님의 원수임을 분명히 보았을 것이다. 돈은 사탄의 화신이다. 당신의 정확한 이해를 위해 내가 이것을 말해 주겠다. 하나님 외의 것들이 당신의 사랑의 대상이 될 때 그것은 모두 사탄의 화신이다. 심지어 학문도 사탄의 화신이다. 하나님 쪽에서 볼 때 학문도 마귀이고, 돈도 마귀이고, 당신 자신도 마귀이며, 당신이 사랑하는 하나님 외의 것은 모두 마귀이다. 하나님 외의 것은 아무리 좋더라도 사탄의 도구이자 화신이다. 사탄은 당신이 사랑하는 것 속에 숨어 있으면서 당신을 탈취하고 차지한다. 당신의 사랑은 본래 하나님을 위해 창조되었다. 당신은 마땅히 하나님의 배필이 되어야 했다. 그러나 현재 당신은 하나님 외의 것을 사랑의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에 하나님 외의 것에 의해 탈취된 것이다. 하나님 외의 것이 당신을 차지했다는 것은 바로 사탄이 당신을 차지했다는 뜻이다. 그 중에 가장 심한 것은 첫째로 자기 자신이고, 둘째로 돈이다.
사람이 하나님 외에 세 번째로 사랑하는 것-쾌락
하나님 외에 사람이 세 번째로 사랑하는 것은 곧 쾌락이다. 여기에서 내가 한 가지 분명히 지적하고 싶은 것은 쾌락은 다만 연회(宴會)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쾌락 속에 연회도 포함되어 있지만 쾌락은 연회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쾌락이란 수영, 영화구경, 기타연주, 화장 등의 레크레이션과 같은 오락이다. 그러므로 쾌락을 사랑하는 것은 곧 오락과 즐거움을 사랑하는 것이다. 이십 세기의 사람들은 정말 오락과 쾌락을 좋아한다. 여름에는 수영을 즐기며 쾌락을 누린다. 영화를 봄으로써 쾌락을 맛보고 피아노를 치면서 즐거워한다. 화장을 하고 거울을 보면서 스스로 즐거워하기도 한다. 어떤 여인은 하루에 28번씩 거울을 본다. 내가 농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여인은 하루에 28번씩 거울을 보지 않으면 기뻐하지 않는다. 오늘날 시중에서 팔고 있는 물건들을 보라! 칠팔십 퍼센트가 레저용품이지 생활필수품이 아니다. 신문의 각 면을 보라. 거기에 실린 광고와, 기록된 이야기와, 사진들은 모두 오락을 위한 것이다. 우리 모두가 아는 바와 같이 매주(每週)의 첫날은 일요일이다. 이것은 기독교가 인류 사회와 문화 속으로 가져온 것이다. 칠 일 중의 하루는 쉬는 날이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첫째로 휴식을 취하라고 하셨고, 둘째는 하나님께 경배하여 하나님으로 하여금 기쁨과 즐거움을 얻게 하라고 하셨다. 그러나 오늘날 사람들은 일요일에 무슨 일을 하고 있는가? 대다수가 그날에 취미나 쾌락을 추구한다. 주말이 되면 사람들은 즐거워하기 시작한다. 말세가 가까울수록 사람들은 쾌락과 즐거움을 사랑한다. 그들은 하늘을 개의치 않고 땅도 개의치 않고 쾌락만을 구한다. 오! 오늘날 이 땅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목숨조차 돌보지 않고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고, 쾌락을 사랑하고 있다! 사람에게는 세 생명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첫째는 자신이고, 둘째는 돈이고, 셋째는 쾌락이다.
사랑하는 것 세 가지
만일 오늘의 인류 사회와 문화에서 자신과 돈과 쾌락을 전부 가져간다면 인간 사회가 여전히 존재하겠는가? 여전히 문화가 존재하겠는가? 존재하지 않는다. 오늘 인간 사회 속의 모든 것이 이 세 항목 속에 포함되어 있다. 그러기에 성경에서 사랑하는 것 세 가지를 언급하는 것만으로 족한 것이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마음과 사랑하는 기능을 모두 이 세 가지, 즉 자신과 돈과 쾌락에 사용하고 있다. 사람들이 다른 것들을 사랑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여전히 이 세 범주를 벗어날 수 없다. 어떤 사람은 학문을 사랑한다. 사실 학문을 사랑한다는 것은 거짓이다. 그 사람은 참으로 학문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해 학문을 사랑하고 돈을 위해 학문을 사랑하고, 오락을 위해, 더 많은 것을 누리기 위해 학문을 사랑하는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이 사랑하는 것은 세 가지, 곧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고, 쾌락을 사랑하는 것밖에 없다. 현대인들의 추세는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고, 쾌락을 사랑하는 것이다. 현대는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고, 쾌락을 사랑하는 세대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사랑하는 것을 세 가지 언급하였지만 세상은 오직 하나이다. 자신과 돈과 쾌락이 모두 세상이다.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고, 돈을 사랑하는 것도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며, 쾌락을 사랑하는 것도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다. 이 사랑하는 것 세 가지는 하나의 세상이지 세 개의 세상이 아니요, 그것들은 세상에서 중요한 세 가지이다. (열두 광주리 가득히 9권 38-41쪽)
헌신 - 기도집회 추구내용
복음서에서의 대가
복음서에서 주님은 여러 차례 사람들을 부르신 것을 언급하셨다. 솔직히 말한다면 주님이 사람을 부르신 중요한 목적은 사람들을 구원하는 데 있지 않고 그를 따르게 하는 데 있다. 예를 들어, “나를 따라 오십시오”(마 4:19),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눅 5:11), “그대가 가진 것을 다 팔아…나를 따르십시오.”(막 10:21),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이 없습니다.”(마 8:20), “죽은 사람이 자기네의 죽은 사람을 장사하도록 하십시오.”(마 8:22),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사람은 하나님의 왕국에 합당하지 않습니다.”(눅 9:62) 등의 구절 외에도 많은 곳에서 주님을 따르는 데 지불하는 대가가 얼마나 큰가를 보여 준다. 복음서에서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 하신 유일한 요구는 모든 것을 버리라는 것이었다. ‘모든 것’은 곧 ‘모든 소유’를 뜻한다. 오천 원을 가지고 있는 자는 오천 원을 내고 오만 원을 가지고 있는 자는 오만 원을 내는 것이다. 둘이 지불한 것이 모든 소유이기 때문에 주님 보시기에 그들이 지불한 대가는 동등한 것이다. 과부가 넣은 두 렙돈을 칭찬하시는 이유는 그것이 과부의 모든 소유인 생활비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돈을 가장 많이 넣은 사람만이 대가를 지불한 사람인 것은 아니다. 모든 소유를 넣는 사람만이 대가를 지불하는 사람이다. 주님은 우리가 얼마나 내는가는 전혀 계산하지 않고 우리가 낸 것이 우리의 모든 소유인가의 여부를 계산하신다. 복음서에서 요구하는 ‘모든 것’은 우리의 본래 있는 모든 것을 말한다. 우리의 부모나 처자나 자녀나 형제나 자매나 집이나 사업이나 학문이나 지위나 명예나 이익이나 애호(愛好)나 야망이나 습관이나 생명 등의 모든 것이 복음서에서 요구한 대가이다.
예를 들어, 오늘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친척 관계를 끊지 못하고 있다. 내가 말하는 것은 사람과의 왕래를 끊으라는 것이 아니라 심정에서 관계를 끊으라는 말이다.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우리의 원래의 모든 것을 버려야 한다는 말이다. 이것은 주님의 가장 엄밀한 요구이다. 언제든지 당신이 주님을 만질 때에는 주님의 요구가 있는 법이다. 당신이 교통 가운데서 참으로 주님을 만질 때에는 주님의 요구가 없을 수 없다. 우리가 지불한 대가에 대해 주님은 만족하시지 않고, 우리를 만날 때마다 우리에게 요구하신다. 주님의 가장 현저한 임재는 바로 그가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때이다. 우리 편에서는 주님과의 교통을 잃을 때만이 주님의 요구를 느끼지 못하고, 주님 편에서는 오직 새 하늘과 새 땅에 가서야 우리에게 요구하시지 않는다. 오늘은 주님이 사람을 쓰실 때이고 그의 역사를 위해 사람을 얻을 때이므로 오늘날 우리에게 계속 요구하시는 것이다. 교통 가운데 주님의 요구는 언제나 아주 세밀하다. 그 후로 그 요구는 갈수록 더 커지고 깊어지며 강력하게 된다. 주님이 요구하시는 느낌을 억누르는 것은 가장 손해 보는 일이다. 그러한 느낌을 억누를 때 우리는 주님과의 교통을 잃게 된다. 또한 이러한 상태가 계속되면 주님은 우리에게서 나아갈 길이 없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로 방향을 돌리실 수밖에 없게 된다. 만일 우리가 주님의 요구에 응하고 순종을 배우고 기꺼이 대가를 지불한다면 갈수록 우리는 민감한 느낌을 갖게 될 것이다. 이러한 공과(工課)를 계속 배운다면 거의 온종일 주님이 계속 요구하고 계심을 느끼게 될 것이다.
만일 우리가 주님의 요구에 응하지 않고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다면 두 가지 결과를 갖게 된다. 첫째로 우리 편에서는 우울과 근심 속에서 지내게 된다. 둘째로 주님 편에서는 우리 몸에서 그분의 용도를 나타낼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의 순종이 잘못될지라도 불순종하지는 말아야 한다. 우리가 지나치게 순종하더라도 순종이 부족해서는 안 된다. 또한 우리가 주님의 요구에 응할 때에도 두 가지 결과를 갖게 된다. 첫째로는 기쁨이 충만하게 되고, 둘째로는 우리의 용도가 나타나게 된다.
우리는 주님을 위해 쓰임받는 기본적인 조건이 주님의 요구에 응하는 것임을 보아야 한다. 이러한 사람은 교리를 많이 알지 못하고 기도가 많지 않더라도 주님을 위해 쓰임받을 수 있다. 그 이유는 왕왕 주님의 요구에 응하여 대가를 지불하므로 얻은 능력이 우리가 많은 기도를 하여 얻은 능력보다 월등하고, 성령 충만함으로 얻은 능력보다 월등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성령 충만을 주의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오순절 날 성령 충만을 얻은 사람들이 지불한 대가가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를 보지 못했다. 오순절 날 그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루살렘의 한 다락방에 온 사람들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성령 충만을 얻으려고 하지만 대가를 지불하는 공과(工課)는 배우려고 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사람들이 많은 일을 하지만 그 일이 오래 유지될 수 없는 이유이다. 일의 열매가 계속 보존되려면 일하는 사람이 반드시 공과(工課)를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 사역의 열매가 얼마나 남아 있느냐는 사역하는 사람이 얼마나 공과를 배우는가에 달려 있다. 사역의 능력은 공과를 배우는 데 있다. 공과를 배우려면 반드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우리가 주님 앞에 쓰임받는 것은 주님 앞에서 지불한 대가에 근거를 둔다. 사람들은 주님 앞에서 바울과 베드로 같이 쓰임받기를 사모하지만 그들이 주님 앞에 지극히 큰 대가를 지불한 것은 소홀히 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가 주님 앞에서 별 쓸모가 없는 이유는 기꺼이 대가를 지불하려 하지 않고 주님의 요구에 응하지 않으려고 하여, 우리의 원래의 명예와 학문과 지위와 장래와 일생을 버리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주님의 임재가 부족하고 교통 가운데서 주님을 만나기가 어려운 것이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주님 앞에서 별로 쓸모가 없게 된다.(열두 광주리 가득히 9권 170-17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