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추수 감사절 특별 집회
메시지 5.
진정한 하나의 터-교회의 터
성경에는 우리가 물에 침례를 주는 것을 교회의 터로 취해야 한다는 말씀이 없다. 성경에는 우리가 어떤 실행을 근거로 모여야 한다는 말씀이 없다. 우리는 주님의 이름을 부르고 말씀을 기도로 읽는 실행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같이 모이고 같은 실행을 하는 사람들만 떡을 뗀다라고 말할 수 없다. 우리는 동일한 실행을 가졌다고 해서 동일한 떡을 떼는 것이 아니다. 사실상 같은 가르침을 근거로 모일 수도 없다. 우리가 다르게 가르칠 수도 있다. 물론 우리는 기본 신앙에 관한 것, 그리스도의 인격, 그리스도의 일에 대해서 동일한 것을 가르쳐야 한다. 우리는 기본 진리에서 벗어나서는 안 된다. 몰몬교, 여호와의 증인은 기본진리에서 벗어나 있다. 그러나 내가 떡을 떼는 것은 어떤 다른 가르침에 근거한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은 환난 전 휴거, 어떤 사람은 환난 후 휴거를 주장한다. 환난 후 휴거를 주장한다고 해서 우리가 같은 떡을 떼는 것이 아니다.
사실상 나의 아버지와 당신의 아버지가 같기 때문에 동일한 생명이기 때문에 우리는 같은 떡을 떼는 것이다. 동일한 가르침을 지지한다고 해서 같은 떡을 떼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 우리의 터는 무엇인가? 우리의 터는 성경에 있는 유일한 터, 즉 당신이 살고 있는 곳, 그 지방이 바로 우리의 터이다. 여러분이 미국 컬럼버스에 산다면 컬럼버스 교회로서 모이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터이다. 이 우주에서 가장 진보된 것은 가장 단순하다. 교회의 터는 아주 소중한 것이다. 왜 그렇게 소중한가? 아주 단순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중국에서 어떤 사람들을 도와 구원받게 하였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놀랍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놀랍고 성경은 놀랍습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왜 그렇게 복잡합니까?”라고 말한다. “장로교가 있고 남침례교가 있고 감리교가 있고, 왜 이렇게 교파가 많습니까?”라고 그들이 질문한다.
위트리스 리 형제님은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중국 대륙에 선교사들이 올 때 그들은 우리에게 네 가지를 주었다. 복음을 주었고, 성경을 주었고, 주 예수님을 주었고, 기독교를 주었다. 우리는 처음 세 가지는 받지만 네 번째 것은 거절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것이 옳다. 우리는 성경을 믿는 사람들이다. 여러 가지 다른 전통, 다른 이름, 다른 교파, 그런 것들은 기독교의 일부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요구하는 유일한 것은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는 형제냐, 우리 아버지의 생명이 있는 형제냐 하는 것이다. 아버지의 생명이 있다면 우리는 함께 같은 터에 서야 한다. 이것은 아주 단순하다. 이것은 대가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여러분이 신약 고린도 전서에서 나는 게바에게 속했다. 나는 바울에게 속했다. 나는 아볼로에게 속했다. 어떤 사람은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했다라고 말한다. 바울은 그들이 모두 육체에 속한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성경이 유죄 판결하는 것을 우리는 주의해야 한다. 신약에서 우리는 단순하게 모여야 한다. 믿는 이로서 다만 그 지방에서 모일 뿐이다. 나는 여기에서 그 어떤 것을 위해서 서지 않고, 내가 믿는 이로서 여러분이 믿는 이로서 모인다는 그것을 기뻐한다.
예루살렘 교회에서는 하루에 삼천 명이 구원을 받았다. 그러면 모이는 곳은 수백 곳이 될 수 있었다. 그 예루살렘에 북문도 있고 양문도 있고, 여러 구역이 있다. 그런 여러 곳에서 모일 수가 있었겠지만, 예루살렘에는 오직 하나의 교회가 있었다는 것을 성경에서 분명히 말한다. 대만의 수도 타이페이 시에 지금 11,000명이 주일날 모인다. 500 곳에서 모두 따로 모이지만 그러나 오직 하나의 대북 교회, 타이페이 교회가 있을 뿐이다.
우리가 하나의 터를 취할 때 모든 믿는 이들과 함께 그곳에서 취하는 것이다. 그것은 다섯 가지를 의미한다. ① 특별한 이름이 없어야 한다. ② 특별한 가르침이나 실행이 없어야 한다. ③ 특별한 교통이 없어야 한다. ④ 특별한 행정이 없어야 한다. 다른 말로 하자면 우리는 여기에 행정이 따로 있고, 저기에 행정이 따로 있고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주님의 회복에 대한 신선한 이상이 필요함-M5 A. Y 교통 중에서)
특별 교통 - 아침부흥
에녹의 일생
에녹의 환경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한 것은 그의 환경이 다른 사람보다 특별히 좋아서였는가? 그렇지 않다. 먼저 에녹의 가정환경을 보자. 창세기 5장 22절은 에녹이 “므두셀라를 낳은 후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라고 말하고 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당신네 전도인들은 밤낮으로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지만 가정 살림이 많은 우리들은 어떻게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습니까?” 맨 처음으로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의 상황에 대해 성경은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에녹은 …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라고 말하고 있다. 또 어떤 사람은 “온종일 시끄러운 기계 소리만 들을 수 있는 공장 안에서 어떻게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습니까?”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에녹은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다. 에녹은 가정적인 부담이 없는 사람이 아니었다. 우리가 받은 생명은 좋은 환경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이 생명은 어떠한 환경에서나 나타날 수 있다. 좋은 환경만이 아닌 어떤 환경에서나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다. 귀찮은 집안 일(가사)이나 자녀의 부담은 결코 주님과의 동행을 막을 수 없다. 내 말은, 믿는 이에게는 가정의 짐이 무겁지 않고 가사의 책임이 적다는 뜻이 아니라 믿는 이는 주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처럼 이러한 일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주님을 믿는 사람은 그러한 환경에서도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다. 에녹이 그러한 환경 가운데에서도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었듯이 우리도 할 수 있다.
에녹이 처한 가정의 상황이 이러했을 뿐 아니라 그가 처한 그 시대의 환경도 아주 어두웠다. 에녹 당시에, 아담도 아직 살아 있었다. 창세기 4장에서 가인에게서 낳은 그 지파가 모두 살아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들은 어떠한가? “라멕이 두 아내를 취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며”(19). 라멕은 하나님이 정하신 일부일처(一夫一妻)의 규칙을 첫째로 깨뜨린 사람이다. 그때 이후로 일부다처(一夫多妻)의 풍습이 일어났다. ‘아다’라는 이름은 ‘아름다움’이라는 뜻이다. 그 여자들은 전적으로 치장을 주의했다. 이때 옛 풍습은 깨뜨려지고 부녀들은 사치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하여 육축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20). 이 사람은 처음으로 육축을 방목(放牧)하여 이익을 도모한 사람이다. “그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21). 그때에 사람들은 이미 음악과 오락에 관심을 두었다.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동철로 각양 날카로운 기계를 만드는 자요”(22). 동철로 만든 각양 날카로운 기계는 바로 무기이다. 그때 이미 전쟁이 시작됐다. 그러나 에녹은 이러한 시대에 하나님과 동행했다. 정욕을 방종하고, 돈 벌 기회를 만들고, 음악을 즐기며, 무기를 만드는 것, 이것이 오늘날의 상황이 아닌가? 하나님은 에녹이 이러한 시대에 하나님과 300년간 동행한 사실을 우리에게 말씀해 주신다.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는가? 영국의 펨버(G. H. Pember)는 주님 안에서 매우 깊은 사람 중의 한 분이다. 그는 수십여 년 전에 이러한 예언을 한 적이 있다. “앞으로 세상 사람들은 음악에 더욱 관심을 가질 것이고, 더욱 높은 지식을 주목하고, 무기를 만드는 데 더욱 관심을 둘 것이며, 부녀들은 여권(女權)을 신장하는 데 전보다 더 관심을 가질 것이다.” 오늘날 상황은 어떤가? 우리는 이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모두 알고 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상황에서 에녹과 같이 하나님과 동행해야 한다. (열두광주리가득히9권 181-184쪽)
헌신 - 기도집회 추구내용
성경 말씀 : 마태복음 26:6-13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있는 나병 환자 시몬의 집에 계실 때에 한 여인이 매우 값진 향유가 든 옥합을 가지고 나아와서, 상에 앉으신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것을 보고 분개하여 “왜 이렇게 허비하는가? 이 향유를 많은 돈을 받고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라고 말하니 예수님께서 아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왜 여러분은 이 여인을 괴롭힙니까? 이 여인이 나에게 아름다운 일을 하였습니다. 여러분과 항상 함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여인이 내 몸에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사를 위하여 한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온 세상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선포되는 곳마다 이 여인이 행한 것도 전해져서, 사람들이 이 여인을 기억하게 될 것입니다.
이 성경 구절들은 마리아의 일을 언급하고 있지만 마리아의 이름은 언급하지 않았다. 다른 복음서에서 마리아의 이름을 말했으므로 여기에 기록된 여인은 마리아를 가리킴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왜 여기에서는 한 여인이라고만 말했는가? 이것은 이 여인의 행한 것이 마리아만이 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보통 여인도 할 수 있는 것임을 말해 주는 것이다. 여기에서 여인이라는 용어를 쓴 것은 이 일을 행한 사람이 어떤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는 뜻이다. 또한 여기에서 이름을 감추고 한 여인이라고만 말한 것은 이 일을 행한 사람은 그리 중요하지 않고, 오히려 주님이 사람들의 주목을 받기에 합당한 분인 것을 뜻한다. 우리는 모두 마리아의 집에 하인이 없음을 알고 있다. 마리아의 집에는 그의 언니 마르다와 동생 나사로 외에 다른 사람이 없었으므로 마리아 자신이 주님을 섬겼던 것이다. 우리는 또 그들의 가정 형편이 부요하지 않았음을 알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기묘한 것은 마리아가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샀다는 점이다(이것은 다른 복음서에서 우리에게 알려 주고 있다). 이 향유는 순전한 나드 향유이기 때문에 매우 값진 것이다(지금도 그렇게 값진 향유는 없다). 마리아는 이 옥합을 주님의 머리 위에 부음으로써 많은 사람의 비평을 받았다. 그들은 마리아가 예수님의 머리 위에 기름을 바르는 데 쓴 삼백 데나리온의 돈으로 가난한 자들을 구제했다면 많은 사람에게 나누어 줄 수 있었으리라고 말했다. 그러나 주님은 온 천하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인의 행한 일도 전하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나는 복음이 전파되는 모든 곳에서 이 여인의 행한 일을 말해야 한다고 믿는다.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 마리아가 행한 이 일을 말하지 않는 것은 합당하지 못한 것이다. 복음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마리아의 행한 일이 있어야 한다. 바꾸어 말해서, 복음을 깨달은 사람에게는 반드시 마리아의 행한 일을 알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한 가지 안타까운 것은 많은 곳에 복음이 전파되었지만 마리아의 행한 일은 전파되지 않았다. 어떤 사람은 이것을 깨닫지 못하고 삼백 데나리온이 왜 그렇게 큰 효력이 있는가를 질문할 것이다. 그렇다. 주 예수님께서 사람에게 팔리셨을 때의 값도 삼백 데나리온이었기 때문에 이 삼백 데나리온에는 큰 효력이 있는 것이다. 내 말을 오해하지 말라. 복음의 가치가 삼백 데나리온이라는 말이 아니다. 대적의 주 예수님에 대한 평가도 삼백 데나리온이었다. 바로 말해서 두 번째로 말한 삼백 데나리온은 단순한 삼백 데나리온이 아니라 대적이 보기에 삼백 데나리온의 가치밖에 안 된다는 것을 뜻한다. 또한 한 옥합의 향유 값이 삼백 데나리온이라는 것은 마리아 자신이 옥합 안에 담긴 향유로서 주께 팔렸다는 것이다.
왜 복음을 전파할 때 마리아의 행한 일도 말해야 하는가? 그것은 복음이 전파될 때마다 마리아의 행한 일을 전함으로써 진리의 양면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이다. 만일 어느 지방에서 복음만을 전파하고 마리아의 행한 일을 전파하지 않는다면 전파한 그 진리는 극단으로 치우친 것이다. 사람들은 복음만 전파하고 마리아의 행한 일을 전하지 않기가 매우 쉽다. 복음만 지나치게 전파하면 진리의 균형을 잃게 할 수 있다. 오늘날의 복음 전파는 매우 쉽다. 세상 사람들은 복음을 다만 자신을 충족시키는 복음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자신의 유익과 즐거움과 문제 해결과 획득을 위해 주님을 믿는다. 복음이 자신에게 유익이 있고, 즐거움을 주고, 문제가 해결되고, 무엇인가를 얻게 한다면 그 복음으로 인해 기뻐한다.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되 다만 죽음을 면하고 구원받고 지옥에 내려가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어 천당에 올라가는 경지에만 이르렀을 뿐 자기 자신을 주님께 바치는 경지까지는 믿지 않았다. 복음 전파하는 사람이 사망에서 나와 생명에 이르게 하고, 형벌을 면하고 영원한 생명을 얻고 구원받는다는 복음을 전하면 사람들은 좋아한다. 그러나 만일 그들에게 주님을 믿은 후에 자기 자신을 주께 드리고 순종하고 주의 포로와 노예가 된다고 말하면 그들은 복음을 원하지 않을 것이다. 많은 사람이 구원을 다만 형벌에서 벗어나는 것으로만 보았을 뿐 자기 자신에서도 벗어나는 것임을 보지 못했다. 많은 사람이 알고 있는 구원은 지옥에서 벗어나는 것에 불과하다. 그들은 구원이 그들을 세상에서도 벗어나게 하는 것임을 보지 못했다. 많은 사람들이 구원받는 것을 영원한 생명을 얻고 복락을 누리는 것으로만 보고 주님께 자신을 드리는 것임을 보지 못했다. 만일 구원받는 것은 모든 것을 주님의 손길에 맡기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이 길에서 도태될 사람이 많을 것이다. (열두 광주리 가득히 9권 46-48쪽)
2010년 겨울 실시간 훈련간증
2010년 12월 29일(수)부터 2011년 1월 3일(월)까지 부산교회 교육관에서 이사야서 40장부터 66장까지의 말씀으로 미국 애너하임 집회소에서 열렸던 겨울 훈련을 실시간으로 영남의 교회들이 함께 누렸습니다. 오전 10시까지 도착한 추구하는 성도들은 오전과 오후 한 메시지씩을 시청하고 PSRP를 통하여 개요의 중점안으로 들어가는 훈련을 받았습니다.
숙박하셨던 각 지방의 성도들과 봉사자 분들께서도 쾌적하고 좋은 시설에서 성도들의 애찬을 누리며 집회를 참석할 수 있었던 것에 대하여 감사를 표하였습니다.
이번 겨울 실시간 훈련은 부산교회 성도들이 73명 참석하셨고, 타 지방 교회들에서 86명이 참석하셨습니다. 비록 참석하시지 못한 성도들께서는 금년 여름을 기약하시고, 곧 시작될 각 구역의 비디오 훈련에 등록하셔서 사역의 말씀 안으로 함께 들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실시간 훈련에 참석하신 분들의 간증은
1) 시간면에서 여유가 많아 봉사하는 형제님들과 섞임을 많이 가졌다. 좋은 산책코스가 있어서 주님과 달콤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으며, 말씀 안에 들어가도록 PSRP로 도와주셔서 감사했다. 지체들의 사랑이 가득한 음식도 많이 누렸다.(경주 J 형제)
2) 숙박시설이 넓고, 부속시설이 충분하여 편안하게 훈련을 받았다. 홍보를 통하여 더 많은 성도들이 참석하여 함께 훈련을 받았으면 한다.(대구 L 형제)
3) 우리 지방의 성도들은 최고의 훈련이었다고 생각한다. 훈련을 봉사하는 형제님들이 미리 추구하고 수고하여 인도할 때 너무 도움을 받았다. 추구의 영들이 감동적이었다.(진주 H 형제)
4) 내년에는 우리 지방의 성도들을 격려하여 실시간 훈련에 더 많은 인원이 등록하도록 하겠다. 우리 지방 성도들이 더 많이 참석하지 못한 것이 아쉽다.(창원 K 형제)
5) 출퇴근하면서 실시간 훈련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너무 좋았다. 내용 면에서도 시작하는 첫날부터 말씀 안으로 들어가는데 어려움이 없었다. 또한 실시간 집회를 보고난 후 개요를 정리하는 PSRP시간은 더욱 유익이 많았다. 대가를 지불할 때 주님의 부어주심이 있었다.(부산 L 자매)
6) 부산 교회 교육관 시설에서 사역의 집회를 하게된 것에 대하여 감사가 있다. 그리고 PSRP를 준비하고 봉사하는 형제님들의 수고를 누렸다. 모든 봉사자들이 동역하여 영남 여러 지방에서 오신 성도들을 섬길 수 있었다는 것에도 감사한다. 실시간 훈련을 처음 실행하면서, 여러 가지 부족한 것과 방송에서 미비한 것이 많았지만 큰 분량으로 이해해주시고, 격려해주신 각 지방의 성도님들과 봉사하는 분들에게도 감사한다.(부산 N 형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