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추수 감사절 특별 집회
우리는 주의 회복에 대한 신선한 이상이 필요하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보았다. 하나님의 뜻은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다. 놀라운 모든 것을 포함하신 그리스도가 우리의 체험할 수 있는, 먹을 수 있는, 마실 수 있는, 숨 쉴 수 있는 사랑스러운 생명주시는 영이 되셨다. 하나님의 뜻은 바로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를 누리는 것이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뜻은 그리스도의 몸이다. 로마서 12장 2절에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십시오.”라고 말했다. 우리가 그분을 누림으로 우리는 그분 자신의 확대가 되는데 그것이 삼일 하나님의 확대된 하나, 즉 그리스도의 몸이다.
그러나 사탄은 하나님의 뜻을 싫어한다. 사탄의 계략은 그리스도의 대치물들을 가지고 와서 그리스도의 몸을 나누고, 나누고, 나누는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의 몸의 모든 지체들의 기능을 죽이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의 회복은 우리를 주님께로, 주님 자신께로 돌이키는 것이다.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되돌아가게 하는 것이 주의 회복이다. 성경의 내용은 오직 그리스도뿐이다. 또한 우리를 그리스도의 몸의 하나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다. 결국은 우리가 삼일하나님께서 확대되고, 확장되고, 증가된 그분의 증거가 되는 것이다.
주님의 회복은 우리가 정상적인 믿는 이들로 돌아가는 것이다. 하락된 시대에는 정상적인 믿는 이가 이기는 것이다. 하락된 시대에 정상적인 믿는 이는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기능을 발휘하는 믿는 이를 말한다. 그러므로 주님의 회복은 우리를 회복하여 정상적인, 건강한, 살아있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서 기능을 발휘하여, 예수님의 증거인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하게 한다. 그럴 때 이 시대의 끝이 올 것이다.
할렐루야 그리스도는 승리자이시다. 그분이 사탄을 이기셨다. 우리는 어린양의 피로 그를 이기고, 증언 하는 말로 이기고, 죽기 까지 혼 생명을 사랑하지 않음으로 사탄을 이긴다. 우리 안에는 살아계시는 이기는 이가 계신다. 그분은 우리를 그분자신께로 그분을 누리는 데로, 그분의 확대인 한 몸으로서 많은 지방에서 그분을 표현하는 데로 회복하기를 원하신다. 또한 정상적인 그리스도의 몸의 기능을 회복하기를 원하신다. 특별히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하기위해 기능을 발휘하기를 원하신다.
마태복음 16장 18절은 성경 전체에서 가장 위대한 예언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건축할 것이니, 음부의 문들이 교회를 이기지 못할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에 있는 가장 위대한 예언이다.
고린도전서 14장은 신언하여 교회를 건축 한다고 말한다. 주님께서는 내가 내 교회를 건축한다고 말씀하셨지만, 성경에서 아주 분명히 말하는 것은 에베소서에서 주님께서 직접 건축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지체들을 통해서 건축하신다는 것이다. 정상적으로 기능을 발휘하는 모든 지체들을 통해서 교회는 건축된다. 그러므로 가장 위대한 예언은 내가 내 교회를 건축할 것이다. 라는 것이다. 그리고 고린도전서 14장 4절에서 “신언하는 사람은 교회를 건축합니다.” 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신언은 회복해야 할 아주 커다란 기능이다. 신언하는 것은 이기는 이들의 기능이다. 왜냐하면, 신언함으로 교회를 건축하기 때문이다.
신언하는 것은 생활이다. 교회 집회에서 주님에게선 정상적이고 건강한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서 매일 매일 매주, 신언하는 생활을 하는 성도들이 필요하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몸의 건축을 위한 것이다. 신언하는 것은 간단히 말해서 그리스도를 말해내는 것이다.
신언하는 생활을 사는 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들을 위하여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리스도의 만족을 위하여 사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또한 우리가 하나님의 갈망을 이루기 위해 여기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증언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갈망을 위해 여기 있는 것이 아니다.
신언하는 생활은 나 자신을 잊어버리는 생활이다. 나는 그리스도와 하나 되기 위해 여기 있다. 나는 그리스도를 분배하기 위해 여기 있다. 그것은 교회의 건축을 위한 것, 즉 그리스도의 몸을 위한 것, 예수님의 증거를 위한 것이다. 아멘. (주님의 회복에 대한 신선한 이상이 필요함-M6 D. T 교통 중에서)
특별 교통 - 아침부흥
1. 로마서 8장-고난 받는 사람을 위한 그리스도의 사랑
이 세상에서 모든 믿는 이들에게는 각자 특별한 체험과 고난과 환경이 있다. 어떠한 문제를 가지고 있든지 그 답변은 오직 그리스도의 사랑이다. 이것이 바울이 로마서 8장에서 말한 것이다. 당신에게 백 가지 어려움이 있다 하더라도 그 어려움을 해결하는 길은 그리스도의 사랑이다. 어떤 성도에게는 환난이 닥치고, 어떤 성도에게는 곤고가 심하고, 어떤 성도는 핍박을 만나고 또 어떤 성도는 굶주림을 체험한다. 이외에도 적신(赤身)과 위험과 칼 등이 우리에게 닥쳐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사랑은 능히 이 많은 일들을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에 붙잡힌 바 되어 다른 사람이 통과할 수 없는 일들을 통과했음을 여러분은 알고 있는가? 남편의 죽음으로 생활이 매우 어려운 한 과부가 있었다. 그녀는 모든 소유를 전당 잡혔지만 빚진 방세를 지불할 길이 없었다. 이러한 환경 중에서도 그녀는 여전히 웃는 얼굴을 가졌다. 그녀가 언제 웃었는지 아는가? 한 살밖에 안 된 그녀의 아기를 대하면서 웃었다. 그녀가 웃을 수 있었던 것은 사랑 때문이었다. 나는 로마서 8장 37절의 말씀을 매우 좋아한다. “이 모든 일에서 … 넉넉히 이깁니다.” 여기에서의 ‘모든 일에서’는 헬라어 원문으로 번역한다면 ‘모든 일 가운데’이다. 우리는 이 모든 일 가운데서 넉넉히 이길 수 있다. 만일 이 모든 일이 임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이길 필요가 없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에게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 없으면 승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이 모든 일에 넉넉히 이긴다고 했다. 당신을 모든 환난과 곤고와 핍박과 굶주림과 위험에서 승리하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당신으로 하여금 이 모든 것을 이기게 하는 힘이다. 이 모든 일은 다 고통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사랑을 맛봄으로 그것들이 고통스럽게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2. 고린도후서 5장-일꾼을 위한 그리스도의 사랑
고린도후서 5장에 언급된 그리스도의 사랑은 노예를 위한 것이고 주님을 섬기는 사람을 위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합니다.”의 원문에서 ‘강권’이라는 단어는 물속에 있는 어떤 것이 물에 의해 밀어내어지는 것을 뜻한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물의 힘과 같이 당신을 밀어낸다. 리빙스턴(Livingstone)은 “노예 매매를 위해 아프리카에 가는 사람도 있는데 그리스도의 사랑이 한 사람을 강권하여 아프리카로 가게 하지 못하겠는가”라고 말하고 아프리카로 갔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강권하므로 그는 자기의 생명을 버렸다. 이것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생명을 얻게 했는지 모른다. 오직 그리스도의 사랑만이 사람을 강권할 수 있다. 사랑은 사람들에게 보여 줄 수 없다. 그러나 이 사랑을 맛본 사람은 이 사랑에 의해 밀려 나가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는 이유는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는 것이다. 이것이 목적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를 강권할 때 나는 자기 위치에 설 수 없고 그분을 위하여 살 수밖에 없다. 많은 경우, 전도하기가 참으로 쉽지 않다. 배고픔과 핍박을 받을 때도 많다. 어떤 사람이 총으로 나를 위협하면서 더 이상 예수를 전파하지 말라고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나의 몸에 총구멍을 낼지언정 그리스도를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를 밀어냈기 때문이다. 나는 늘 청년 성도에게 그들 자신을 주님께 드리라고 권면한다. 그 이유는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많은 형제들이 이렇게 질문한다. “어떻게 하여야 전도 일을 전적으로 할 수 있습니까?” 만일 당신이 전도 일을 할 때 부득불 하는 것이 아니라면 하지 않는 것보다 못하다. 만일 당신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내게 화가 있으리라”는 상태가 없다면 전도를 안하는 것보다 못하다. 왜냐하면 당신이 복음을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야 다른 사람도 듣고 불타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의 복음 전파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의해 밀어내진 것이어야 한다. 나는 모든 사람에게 전적으로 전도하라고 권하지 않겠다. 그러나 모든 성도는 마땅히 간증을 해야 한다. 형제자매여, 당신은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해 말한 적이 있는가? 당신은 하나님의 사랑이 당신으로 하여금 그분의 사랑을 말하지 않으면 안 되도록 당신 안에서 불같이 타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는가? 그리스도의 사랑이 오늘 우리에게 충만하고 강권하기를 원한다.
3. 에베소서 3장-제자 된 자를 위한 그리스도의 사랑
그리스도의 사랑은 제자 된 자를 위한 것이다. 바울은 학문이 있는 사람이다. 그는 이 구절을 문법적으로 잘못 쓴 것인가? 신약 원문을 읽어 본 사람이라면 바울이 쓴 서신의 문법이 매우 깊고 높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에베소서 3장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해 언급할 때 바울이 쓴 것은 헬라어 문법에 맞지 않다. 바울은 “모든 성도와 함께 … 그리스도의 사랑”이라는 말을 쓰고 잠시 멈추었다(원문에서는 ‘어떠함’이라는 단어가 없다). 그리고는 갑자기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라는 말을 썼다. 여기에서 윗 문장과 아랫 문장이 조금도 연결되지 않는 것 같다. 형제자매여, 이것이 그리스도의 사랑의 참된 상황을 말한 것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이라는 말을 쓸 때 어떻게 표현할지를 몰라 다만 “넓이! 길이! 높이! 깊이!”라고 크게 외쳐 말한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어떻게 형용할 수가 없었다. 수사학(修辭學)에 따라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해 쓴다면 바울의 표현과 다른 글을 쓸지 모르지만,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하여 생각할 때 우리의 머리는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 같고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안다’는 말은 ‘측량’과 같은 의미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알 수 없는 것이요, 또한 알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 땅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에 대하여 매일매일 얼마큼씩 배워야 한다. (열두 광주리 가득히 11권 4-8쪽)
헌신 - 기도집회 추구내용
누가복음에서 어떤 주인이 큰 잔치를 배설하여 노예를 보내어 절름발이와 신체장애자들을 모두 청하였다(눅 14:16
-24). 이 복음 잔치에는 많은 사람이 참석하였다. 주님은 복음 잔치에 어떤 사람이든지 모두 와서 먹게 하였다. 성경에는 그 잔치에 허다한 무리가 예수와 동행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사람들은 복음이 하나님의 아들의 입에서 나온 은혜의 말씀이므로 참 듣기 좋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기묘한 것은 그 뒤에 주님이 이어서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는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나보다 부모를 더 사랑하면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며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버리지 않는 자는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한다라고 말씀하신다. 주님께서는 복음을 전파하자마자 즉시 우리와 주님과의 관계를 언급하셨다. 많은 사람이 구원을 그리스도로 생각하지 않고 지옥에 안 가는 것으로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 자신을 믿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구원받는 방법으로 믿는다.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고 천당에 들어갈 수 있다고 알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지, 그리스도를 목적으로 알고 믿지 않는다. 주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실재요, 생명이니”(요 14:6)라고 말씀하셨다.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가 길이자 방법임을 믿지만 그리스도가 곧 생명임을 보지 못했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구원받을 수 있는 좋은 방법이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의뢰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고 천당에 올라가며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도가 생명이자 목적임을 보지 못했다. 많은 사람들이 천당에 올라가야 하고 형벌을 면하고 구원받아야 하지만 자기 힘으로 할 수 없기 때문에 그리스도에게 도움을 청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그들의 수단일 뿐 그들의 목적이 아니다. 바꿔 말하면, 그리스도는 그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구원받게 하는 수단이지 그분 자신은 그들의 목적이 아니다. 주님을 믿고 구원받은 사람 중에 그리스도가 그들의 수단일 뿐 그들의 목적이 되지 않는 사람이 많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셔야 할 일에 대하여 깨닫지 못한다. 복음이 우리 가운데 있을 때 이러한 위험이 있다. 그러므로 마리아의 행한 일을 반드시 전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복음만 듣고 믿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우리는 반드시 향유의 향기를 맡아야 한다. 구원은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다. 복음은 우리의 모든 것이 그리스도를 위해야 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바로 마리아의 행한 일이다.
어떤 주일 학교에서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나사로와 부자 중 어떤 사람이 되기를 원하느냐고 물었다. 어느 아이는 장래에 복락을 누릴 수 있는 나사로가 되기 원한다고 말하고, 어떤 아이는 장래에 어떻게 될지를 아직 모르기 때문에 부자가 되기 원한다고 말했다. 그중 어떤 아이는 이 세상에서는 부자가 되기를 원하고, 죽은 후에는 나사로가 되고 싶다고 했다.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도 이와 같이 생각하는가! 그들은 이 세상에서 복락을 누리기를 바라고 죽은 후에도 복락을 누렸으면 좋겠다고 한다. 그들은 두 세계에서 다 좋은 것을 취하기 원한다. 이것이 오늘 많은 그리스도인이 걷고 있는 길이다. 오늘의 마리아는 곧 살아 있을 때에도 나사로이고 죽은 후에도 나사로인 사람이다. 그녀는 죽은 후에 하나님을 친근히 할 뿐 아니라 살아 있을 동안에도 하나님을 친근히 한다. 그는 죽을 때 세상을 버릴 뿐 아니라 살아 있을 동안에도 세상을 버린다. 그는 죽은 후에 나사로일 뿐 아니라 살아 있을 동안에도 나사로이다. 이것이 마리아가 행한 일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복음을 중요시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복음을 중요시한다. 주 예수님은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그곳에는 마리아의 행한 일도 전파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였다. 우리가 복음만 전파한다면 곧 위험이 따른다. 그러므로 반드시 마리아의 행한 일을 전파해야 한다. 당신은 한 면으로는 반드시 복음을 전해야 하고, 또 한 면으로는 반드시 모든 것을 주께 드려야 한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그분께서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신 것”. 이것은 복음이다. 그러나 바울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고 아래에서 또 말했다. “살아 있는 사람들이 더 이상 자신을 향하여 살지 않고, 자기들을 대신하여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분을 향하여 살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마리아의 행한 일을 하는 것이다. 주님은 나를 대신하여 죽으신 분이다. 그가 내 대신 죽으신 목적은 나로 하여금 그를 위하여 살게 하기 위함이다. 여기에서 우리에게 분명히 말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구원만 받고 고난 받지 않는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주 예수를 믿도록 예정되었을 뿐 아니라 주를 위하여 고난 받도록 예정되었다. 이것은 바울이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땅히 우리가 주 예수를 믿도록 예정되었을 뿐 아니라 주를 위하여 고난 받도록 예정되었음을 알아야 한다.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을 때 다만 주 예수로 인하여 즐겁게 될 뿐, 주 예수로 인하여 고통받는 경지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많은 사람들이 주 예수로 인하여 고통받는 정도까지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 감사하자. 이 고통은 귀한 것이다! 많은 사람이 주 예수를 믿는 것을 다만 장래에 천당에 들어가는 것으로만 봤을 뿐 오늘 세상에서 분별되는 것으로 알지 못했다. 그들이 주 예수를 믿는 것은 하나님의 열납을 받는 정도일 뿐 사람의 미움을 받는 정도는 아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 완전히 속한 완전한 믿는 이는 주님을 믿음으로 하나님께 열납될 뿐 아니라 사람에게 미움 받는 경지에 이르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복음이 전파된 후에는 반드시 마리아의 행한 일이 전파되어야 한다. 오늘날 복음을 믿는 사람은 많지만 마리아와 같은 사람은 많지 않다. 이제 우리는 복음을 전할 뿐 아니라 복음을 마리아 같이 믿는 사람이 되기 바란다. (열두 광주리 가득히 9권 49-5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