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교회 소식지 (2011.01.30)
교회 주보
부산교회집사실 2011-06-10 , 조회 (325) , 추천 (0) , 스크랩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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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겨울 훈련


 메시지 1.

 
모든 것을 포함하신 그리스도,
곧 여호와 구주를 기쁜 소식으로 전함

 

   이사야서 40장 1절로 2절은 “너희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너희는 예루살렘의 마음에 닿도록 말하며 그것에게 외치라.”고 말한다. 이것은 예루살렘의 마음에 말하는 말씀으로서 극도로 다정하고 주님의 내적인 느낌을 강화한 말씀이다. 여기에서 말씀하신 것은 의롭고 법리적인 심판의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마음과 마음의 말씀이다. 분명 우리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의 마음에 말씀하실 때 그분 자신의 마음으로 말씀하신다. 그러나 그분이 말씀하실 때는 반드시 육체 되심의 원칙에 의해서 인간 존재를 통해 말씀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마음에 있는 것을 전달하시기 위해서 예루살렘의 마음에 말씀하신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예루살렘이다. 하나님이 오늘날의 예루살렘인 우리의 마음에 말씀하시려면 그 말씀하시는 방식이 방해 받아서는 안 된다. 그 말씀이 우리의 영 안에 들어와서 우리 마음으로 퍼지고 우리의 마음에 거하시고 거처를 정하셔서 그분의 생각과 느낌을 알게 해서 그분 자신의 표현을 갖게 되셔야 한다.
   나는 오늘 아침에도 주님께 새롭게 계속 여쭈어 보았다. “주님, 주님의 마음에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주님의 회복에 대한 주님의 마음은 무엇입니까? 주님, 오늘날 주님에게 주님의 마음을 열어서 주님의 마음의 그 내용을 말할 수 있는 그런 길이 있다면, 주님의 회복의 마음 안에 말씀하실 수 있는 그 길이 있다면 그 내용은 무엇입니까? ”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이 전지전능하시고, 하나님의 영만이 하나님의 일들을 알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분명한 것은 그분의 마음에 있는 것이 모든 것을 포함한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그분이 우리에게 모든 것이며 실재로서 우리의 체험과 누림을 통해 우리의 실재가 되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오직 그리스도 밖에 없다. 우리가 여러분과 함께 나눌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뿐이다. 우리에게는 여러분의 문제를 대답할 해답이 없고, 우리 자신의 문제에 대답할 해답도 없다. 우리에게는 오직 놀라운 한 인격이 있을 뿐이다. 우리는 다만 결심해서 바울이 그분을 추구했던 것처럼 추구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에게 권유하지 않는다. 나는 여러분에게 권면하거나 호소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기도하기를 원한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모든 것을 포함하신 그리스도를 추구하는 마음을 허락하시도록 기도하기를 바란다. 우리가 더 이상 냉담하지 않고, 더 이상 미지근하지 않고, 더 이상 피동적이지 않고, 주님의 사랑의 구애로 이끌린 그러한 이상의 강권함을 받아서 매일 매일 최고의 추구, 놀라운 인격을 갈망하는 추구, 임마누엘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 추구, 놀라운 조언자, 전능하신 하나님, 그러한 모든 것을 포함하신 분을 갈망하는 추구를 갖기 원한다.  
   내가 이러한 것을 말할 때 우리 안에 확신이 있다. 주님의 마음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그분의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갈망은 그분의 아들을 모든 것을 포함하신 그리스도로 우리 안에 계시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마음 안에 있는 그 갈망은 그분 자신이 우리 속 존재의 내용과 조성 요소가 되시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그분 자신을 넣는 일을 하시고 우리 안에 건축하심으로 이루어진다. 주님이 하늘로부터 말씀하신다면 그분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시고자 할 것이다. ‘너희는 아직 모르느냐? 나의 중심적인 일이 아직 무엇인지 모르느냐? 너희는 아직 보지 못하였느냐? 나의 활동의 모든 중심이 바로 한 가지 일이라는 것을 아직 모르느냐? 나의 중심적인 일은 나 자신을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 존재 안으로 넣는 일을 하여, 내가 너희의 내용이 되고 조성 요소가 되어, 사실상 내가 너희가 되는 것이다.’ 나는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 속에 있다고 믿는다. 그분 자신을 우리와 하나 되게 하시고, 그분의 염원 안에서 그분 자신과 우리가 연결, 연합, 합병되어 우리가 그분과 하나 됨으로 우리의 염원 가운데서도 그분과 연결되고, 연합되고, 합병되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여러분 이러한 염원을 느낄수 있는가? 하나님의 마음속에 있는 이러한 열망, 갈망을 느낄수 있는가?(이사야 결정-연구Ⅲ, M1  R. K 교통 중에서)

 

특별교통 - 아침부흥

 

  누가복음 15장 23절은 “또 살진 송아지를 끌어내다 잡아라. 우리가 먹고 즐거워하자.”라고 말한다. 이 구절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기쁨, 즉 사람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기쁨을 말해 주고 있다. 우리는 한 죄인이 구원받을 때 그 죄인이 얼마나 기쁠까를 생각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죄인 한 명을 구원할 때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시는지를 보지 못했다. 만약 우리가 이것을 보았다면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될 것이다.
   누가복음 15장 29절에서 큰아들의 마음은 아버지가 그에게 기쁨을 주셔야 한다는 것이었다. 작은아들은 모든 것을 소비했지만 아버지를 기쁘게 했다. 큰아들은 아버지의 집에서 자기 본분을 다했지만 그는 아버지에게 자신의 기쁨을 구했다. 아버지는 그가 들어가서 함께 누리기를 원하셨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과 함께 누리기를 원하신다. 우리는 그분의 마음을 알아야 한다. 큰아들은 자기의 즐거움을 위하여 염소 새끼를 요구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 혼자 누리라고 무엇을 주시지 않는다. 모든 것은 사람과 하나님이 함께 누리기 위한 것이다.
   나는 ‘입맞춤’과 ‘잔치’를 비교하여 여러분에게 보여 주겠다. 아버지가 자기 아들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출 때 그러한 입맞춤은 아들의 마음을 즐겁게 하고 만족을 주었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입맞출 때 아들은 아버지께서 이미 그의 죄를 사하셨고 다시는 그의 죄를 기억하지 않음을 깨닫게 되어 죄 사함의 자유와 만족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아들이 잔치에 앉아 있는 것은 아버지의 마음을 즐겁게 하고 만족하게 했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그의 아들을 얻었기 때문이다. 사람이 구원받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 그들은 그들의 강렬한 요구 때문에 하나님이 그들을 구원하셨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구원하기를 기뻐하신다는 것을 모른다. 사람을 구원하는 일에서 하나님은 기쁨을 얻으신다. 만약 우리가 “네 죄를 사하였다”는 아버지의 말씀을 들었다면 우리에게 평강과 기쁨이 있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아직 죄 사함의 자유를 얻지 못했다면 가련한 것이다. 오늘 여기에 사람들이 모두 죄 사함을 받고 평강을 얻었다면 어떤 사람에게 묻거나 어떤 증거를 구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이 하신 말씀으로 족하다. 하나님이 용서하셨다고 말씀하셨으면 용서하신 것이다. 그러나 가련하게도 우리의 그 즐거움은 절반일 뿐이다. 우리는 아직 하나님의 즐거움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고, 그 즐거움을 누림으로써 하나님으로 하여금 기뻐하심을 얻게 하지 못했다. 하나님으로 인하여 얻은 기쁨만이 참된 경배이다. 경배는 감사하는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기쁨으로 기뻐해야 한다. 시편에 “하나님이여 당신은 나의 기쁨”이라는 구절이 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을 나의 기쁨으로 여겨야 한다.
   누가복음 15장에 언급된 세 가지 비유, 즉 잃은 양과 잃은 동전과 잃은 아들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여기에서 그 세 가지는 누가 잃은 것인가? 우리는 그 잃어버린 바 된 양이 얼마나 가련한가를 말하고 그 양이 황폐한 산에서 험한 길을 만나거나 가시덤불이 있는 길로 갈까 걱정한다. 그러나 우리는 양을 잃고 손해 본 목자가 얼마나 가련한지는 생각하지 않았다. 우리는 잃은 동전만을 생각할 뿐 동전을 잃은 그 여인을 잊었다. 우리는 손해 본 사람이 그 여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마지막 비유에서도 우리는 모두 탕자가 고생하고 처할 곳을 잃고 배고픔을 채우기 위해 쥐엄나무 열매도 얻지 못한 것을 생각할 것이다. 우리는 돌아온 탕자가 얼마나 큰 축복을 받았는지를 생각하며 그로 인하여 즐거워할 것이다. 그러나 그 아들을 잃은 사람은 누구인가? 그것은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이다. 고통을 당하고 손해를 본 사람은 아버지이다. 우리가 한번 돌아섰다가 순종할 때 하나님의 마음을 즐겁게 한다는 것을 생각한 적이 있는가? 복음의 최고봉이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은 죄인이 무엇을 얻었는가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무엇을 얻으셨는가이다. 돈을 허비한 사람은 당신이지만 손실을 입은 분은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응당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완전히 드려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린 것이 얼마나 되는가? 당신은 자신이 냉담해져도 괜찮다고 생각하지 말라. 당신이 냉담해질 때 당신의 그 냉담함으로 인해 하나님이 손실을 입으시는 것을 알아야 한다. 당신은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과 연합하는 것을 괜찮다고 생각하지 말라. 당신은 그것이 하나님과 얼마나 큰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 알아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에게 손실을 준다. 당신이 하나님 앞에 나와서 한번 더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고 기꺼이 자신을 내려놓고 그분으로 하여금 얻게 한다면 당신은 하나님의 마음을 즐겁게 하는 것이다. 나 개인의 작은 득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얻으셔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어떤 길을 선택할 때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할 수 있고 하나님으로 하여금 얻으시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마다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 하나님은 우주를 창조하시고 사람에게 모든 것을 주실 수 있지만 오직 사람의 마음만은 잃을 수 있으시다!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을 강요하실 수 없다. 하나님같이 위대하시고 전능하시며 모든 것을 소유하시고 만물을 창조하신 조물주가 작은 벌레 같고 티끌 같은 나로부터 무엇인가를 얻을 수 있다니! 이것은 어떠한 즐거움인가! 주님은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라고 하신다. 이러한 탕자 한 사람의 돌이킴이 하나님을 즐겁게 했다. 당신의 매우 작은 순종으로 우주를 포함하는 하나님이 즐거움을 얻을 수 있다. 헌신은 당신을 강요하거나 위축시키는 것이 아니라 당신을 하나님의 즐거움 안으로 이끌고 당신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즐겁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얼마나 기묘한가!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즐거움으로 들어감으로써 하나님께 즐거움을 드리기 바란다. (열두 광주리 가득히 11권 14-19쪽) 

 

헌신 - 기도집회 추구내용

 

  마리아의 행한 일

 

   마리아가 향유를 주님의 머리와 몸에 부은 것은 주님의 장사를 미리 준비한 것이다. 마리아의 생각은 이러했다.       
   “나의 동생을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시키시고 자주 베다니에 오셔서 우리 집에 거하신 그분은 참으로 사랑스러운 나의 구주시다. 그분은 네 번이나 제자들에게 그분이 죽으리라고 말씀하셨지만(마태복음에서 볼 수 있음), 제자들은 그분이 왜 죽어야 하는지를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분이 나를 위하여 죽으실 것을 알고 있다. 그분이 죽은 후에 향유와 유향과 몰약을 그분의 몸에 바르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일을 그분이 죽은 후에 하기를 원치 않는다. 나는 그분이 살아 계실 때 향유와 유향과 몰약을 그의 몸에 붓겠다. 나의 모든 것을 그분의 몸에 붓겠다. 그분이 죽은 후에 이것들을 그의 몸에 부은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가 살아 계실 때 향유를 그의 몸에 붓는 것이 훨씬 좋다!”    
   한 옥합의 향유와 삼백 데나리온의 향유는 지극히 비싼 것이다. 지금도 그렇게 비싼 향유는 없다. 그러므로 그 당시에는 지극히 귀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마리아는 어느 때 이러한 일을 행했는가? 주님이 식사하실 때였다. 마리아는 주님이 즐거워하고 느끼시지 않을 때 몰래 한 것이다. 그는 주님께 알게 하지 않았고 주님에게 말하지도 않았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이일을 하기 전에 남몰래 주님에게 행한 것이다. 이것은 무슨 의미인가?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원하나 구주를 원치 않고, 구원을 귀히 여기나 구주를 귀히 여기지 않고, 기독교를 귀히 여기나 그리스도를 귀히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구속(救贖)의 역사(役事)를 귀하게 여기지만 우리를 구속하신 주님을 귀하게 여기지 않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귀하게 여기나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귀하게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주 예수를 믿으면 무슨 유익이 있느냐고 묻는다. 이것이 그들의 첫마디이다. 그들은 주 예수를 믿으면 그와 어떠한 사랑을 갖게 되는가를 묻지 않는다. 오직 마리아만 그것을 알고 있었다. 이것이 차이점이다. 마리아는 알고 있었다.  
   “주님이 나를 위하여 죽고 나를 위하여 부활하실 것이므로 나의 감정과 모든 것을 그분께 드려야 한다. 나는 마땅히 나의 모든 것을 참 나드 향유로 삼아 주님께 부어야 한다.”마리아는 모든 것을 주님께 부었다. 오직 마리아만 주님의 죽음을 알았다. 안식 후 첫째 날에 몇 여인이 향유와 몰약을 주님의 몸에 바르려고 무덤에 가지고 갔었지만 너무 늦었다! 오직 이 여인만이 늦지 않았고 다른 여인들은 모두 늦었던 것이다. 그것은 오직 마리아만이 주님의 죽음을 알았고 오직 그녀만이 드리고 헌신했기 때문이다. 

 

                                              제자들의 태도

 

   제자들은 마리아가 이렇게 행한 것을 낭비요 희생이라고 생각했다. 제자들은 이 삼백 데나리온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었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오늘날 교회 가운데에도 이러한 두 가지 큰 원칙이 있다. 한 무리의 사람들은 마리아와 같이 모든 것을 그리스도께 드리고, 그리스도를 모든 것을 얻기에 합당한 분으로 여기고, 그리스도와의 사랑을 인하여 모든 것을 그리스도께 드리는 사람들이다. 또 한 무리의 사람들은 실리적인 면을 고려하는 사람들이다. 마리아와 같이 마음을 중심 삼는 무리가 있고, 반면에 기능을 중심 삼는 사람들이 있다. 한 무리는 마음을 중심 삼는 사람들이고, 다른 무리는 일과 방법을 중심 삼는 사람들이다. 일의 면만을 본다면 나도 마리아가 행한 것을 허비나 희생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믿는 이들 가운데에는 주님의 사랑으로 인도받는 사람이 많지 않다. 사랑은 생명이요, 마지막이요, 모든 것이다. 삼백 데나리온이 아니라 삼만 삼천이 넘는 데나리온 일지라도 문제는 그 물건의 가치보다도 상대방의 가치가 얼마인가에 있다. 문제는 어떤 물건의 가치가 아닌 사람의 가치에 있다. 사람이 귀히 여기는 것은 그가 사랑하는 것이다. 그가 바친 귀한 물건의 값이 곧 그가 주 예수에 대해 알고 있는 가치이다. 많은 사람들이 헌금을 할 때 계산을 한다. 사실은 돈의 숫자를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가치를 계산하는 것이다. 당신이 주님께 드린 것은 당신이 그분에 대해 갖는 가치를 말해 준다. 당신이 그분에게 그만큼밖에 드릴 수 없다면 주님은 당신에게 그만큼밖에 가치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순전한 나드 향유 한 옥합이 그리스도의 가치를 말함을 기억하라. 이 한 옥합의 향유는 마리아의 드림보다도 그녀에게 있어서 하나님과 그리스도가 얼마만한 가치를 갖는가를 말해 주는 것이다. 사람이 주님을 위해 기꺼이 희생하는 것은 그 사람이 얼마를 지불했느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그에게 그만큼 가치 있다는 것을 말한다. 순교자들이 자신의 몸을 희생하는 것은 그들의 희생이 얼마나 가치 있는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의 생명만큼 가치 있는 분임을 보여 주는 것이다. 기꺼이 수고하고 헌신하는 모든 성도는 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가 그만큼 가치 있는 분임을 보여 준다. 모든 시간을 주를 위하여 기꺼이 드리는 사람에게는 그리스도가 그만큼 가치 있는 분이다. 그리스도인들이 모든 것을 기꺼이 바치는 이유는 그리스도가 그 모든 것만큼 가치 있는 분이기 때문이다.(열두 광주리 가득히 9권 52-5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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