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교회 소식지 (2011.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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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회집사실 2011-06-10 , 조회 (322) , 추천 (0) , 스크랩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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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겨울 훈련


 메시지 5. 


하나님의 신약 경륜에 따른 네 단계 안에 계신

모든 것을 포함하신 그리스도(1)-육체 되심의 단계에서

 

   이사야서 53장은 모든 것을 포함하신 그리스도를 그분의 네 단계, 곧 (인간 생활을 포함하는) 육체 되심, 십자가에 못 박히심, 부활, 승천으로 계시한다. 이 네 단계를 통해 그리스도는 과정을 거치시고 생명 주시는 영과 쏟아 부어지신 영이 되셨는데, 그것은 그분께서 세 부분으로 된 우리 존재 안으로 분배되시어, 우리가 그분의 단체적인 표현, 그리스도의 몸,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고 우주 안에서 그분의 완전한 영광을 위해 새 예루살렘으로 완결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시기 거의 칠백 년 전에 이사야서에 이러한 과정의 모든 단계가 예언되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육체 되심의 단계에서 움직이신 목적은 하나님을 사람 안으로 이끌고 풍성한 속성들 안에 계시는 풍성한 하나님을 그분의 향기로운 미덕을 통해 표현하시는 것이다.
   마태복음 1장 20절과 21절에서 천사는 요셉에게 “다윗의 자손 요셉이여, 두려워하지 마시고, 그대의 아내 마리아를 데려오십시오. 마리아 안에 나신 이는 성령으로 되신 것입니다. 아들을 낳을 것이니, 이름을 예수라 부르십시오. 왜냐하면 바로 그분께서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들에서 구원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했다. 예수님은 하나님, 여호와 구주, 위대한 ‘나는 …이다’이시다. 위대한 ‘나는 …이다’로서 그분은 백지 수표와 같으시다.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하든지 그분께서 그것이시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다만 공란에 적어 넣는 것이다. 주님은 의이시고, 거룩하게 함이시며, 구속이시다(고전 1:30). 그분은 또한 우리의 생명, 우리의 인격, 우리의 인내, 우리의 남편, 우리의 형, 우리의 친구, 우리의 첫째가는 사랑이시다. 그러므로 그분은 예수님, 여호와 구주, 위대한‘나는 …이다’이시다. 그분은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시다.
   마태복음 28장 20절에서 주님은 “보십시오, 나는 이 시대가 종결될 때까지 항상 여러분과 함께 있습니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분은 오늘을 포함하여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신다. 그러므로 그분은 오늘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시다. 주님은 예수님이시자 임마누엘이시다.
   어떤 의미에서 육체 되심은 우리가 어떤 사람에게 복음을 전파하여 그가 하나님을 영접하고 거듭날 때마다 다시 발생하는데, 그것은 거듭남 안에서 하나님께서 다시 한 번 사람 속으로 이끌리시기 때문이다. 나아가 우리가 반드시 깨달아야 할 것은, 육체 되심이 삼일 하나님 전체를 사람 안으로 이끈다는 것이다. 성경에 따르면, 아버지께서 우리 안에 계시고(엡 4:6), 아들께서 우리 안에 계시고(고후 13:5), 그 영께서 우리 안에 계신다(롬 8:9).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삼일 하나님, 셋-하나이신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계신다고 말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육체 되심은 하나님을 사람 안으로 이끌 뿐 아니라 그분의 신성한 속성들 안에 계시는 넘치는 하나님을 그분의 향기로운 미덕들을 통해 표현하셨다. 이사야서에 따르면 주 예수님께는 외적인 아름다움이 없었다. 이사야서 52장 14절은 “전에는 그의 모양이 타인보다 상하였고”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분께는 다른 사람들을 매혹하는 어떤 것이 있었다. 그것은 그분에게서 나오는 비교할 수 없고 매력적인 향기인 내적 아름다움이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풍성한 속성이 그분의 인간 미덕들을 통해 표현되어 그분의 인간 미덕들을 향기롭게 한 것이다. 향기란 묘사하기가 매우 어렵다. 고린도후서 2장 15절에서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께 드려지는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바울 자신도 그리스도의 향기라는 것을 함축한다. 다른 사람들은 바울과 함께 있을 때 그리스도의 향기를 맡았다. 그들은 그들이 맡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몰랐지만 이 사람이 다르다는 것을, 그리스도께서 이 사람 안에 계신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주 예수님은 하나님의 풍성한 속성들이 표현된 그분의 향기로운 미덕들을 통해 사람들을 매혹하시고 사로잡으셨다. 그분께서 사람들을 매혹하시고 사로잡으셨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그분께서 그들을 매료하셨다는 것이다. (이사야 결정-연구Ⅱ, M5  E. M 교통 중에서)

 

특별교통 - 아침부흥

 

 2. 아내


   성경은 우리를 이 세상에서 과부라고 말했다. 그뿐 아니라 로마서 7장에서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아내와 같다고 했다. 과부와 아내의 차이를 아는가? 과부란 남편이 없고 의지할 데가 없는 사람을 말하고, 아내란 남편이 있고 의지할 데가 있는 사람을 말한다. 가정에서 경제적인 책임을 누가 지고 있는가? 그 책임은 아내에게 있지 않고 남편에게 있다. 만약 남편이 아내가 번 돈으로 가정을 꾸려 간다면 그것은 순서가 뒤바뀐 것이다. 과부는 이 땅에서 의지할 것을 잃은 자요, 아내는 남편으로부터 모든 공급을 받을 수 있는 자이다. 여러분은 우리와 그리스도와의 관계가 아내와 남편의 관계임을 아는가? 우리의 모든 필요를 그분에게서 공급받아야 한다. 당신은 어떻게 하면 이번 달의 필요를 채울 수 있는가를 마음속에서 계산할 것 없다. 우리는 그리스도에게서 우리가 필요한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다. 당신의 성질이 나쁘고, 교만하고, 사람을 용서하지 않고, 봉사할 때 힘이 없고, 기도하기 싫고, 성경을 읽는 맛을 잃었다 하더라도 당신의 이 모든 문제를 그리스도에게서 해결할 수 있다. 왜냐하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한 그분의 능력으로 우리가 열매를 맺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세상에서는 일반적으로 한 여인이 출가한 후에는 즉시 그의 남편의 이름을 사용할 수 있다. 여기에서 누가 장 형제의 이름을 사용할 수 있는가? 장 형제의 친 형제도 사용할 수 없고, 그의 자녀도 사용할 수도 없고, 심지어 그의 부모까지라도 장 형제의 이름을 쓸 수 없다. 오직 그의 아내만이 그와 같은 이름을 가질 수 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나의 이름으로’라는 말씀의 귀함을 보지 못했다. ‘나의 이름으로’라는 이 한 구절 속에 얼마나 많은 축복이 들어있는지 모른다.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면 얻을 것이요!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냄! 내 이름으로 병든 자에게 기름을 바름! 내 이름으로 죄를 사하고 내 이름으로 전도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누가 능히 주님의 이름을 사용할 수 있는가? 어떤 사람은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낸다는 말을 하였으므로 귀신이 그 말로 인하여 도망갔다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은 사람에게 침례를 줄 때 전례를 따라 “주님의 이름으로 당신에게 침례를 줍니다.”라고 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장 형제의 이름으로 은행에 가서 돈을 인출할 수 있겠는가? 그럴 수 없다. 나는 다만 내 이름을 사용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하자! 모든 그리스도인은 주님의 이름으로 행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분에게 속했기 때문이다. 그분의 모든 것은 모두 우리의 것이다. 그분은 그리스도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사람이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님의 이름으로 행할 권세가 있다. 우리는 주님을 믿는 그날 그분과 연합되었다. 그러므로 그분의 이름이 내 이름이 되었고, 나는 그분의 이름으로 기도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가 그분의 이름으로 행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이미 그분의 부활 안으로 연합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얻지 못할 것이 무엇이겠는가? 남편이 그의 아내를 아끼고 보살피고 공급하고 부축하는 것같이 그리스도가 우리를 대하신다. 그리스도의 풍성을 누리는 데 있어서는 우리 자신이 과부가 아니라 아내라는 것을 기억하기 바란다. 
  

                                                 3. 처녀

   성경은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데 있어서 우리가 처녀임을 말해 준다. 이것은 우리가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기 위하여 정결하게 자신을 지켜야 한다는 뜻이다. 바울은 “내가 하나님의 질투로 여러분에게 질투합니다.”라고 말한다. 여러분은 질투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아는가? 여기에서 바울이 말한 뜻은, 그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른 사람이 그들의 마음을 얻는 것을 질투한다는 것이다. 당신은 주님의 것이다. 누가 당신을 붙잡아 가거나 빼앗아 가는 것은 합당치 않다. 예를 들어 내 친구 중에 하나가 어떤 사람과 정혼했다 하자. 내 친구가 여기 있지 않을 때 그의 약혼녀가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면 나는 내 친구를 위하여 그녀에 대해 분노가 생길 것이다. 나는 내 친구를 위하여 그 약혼녀의 마음을 빼앗아 간 사람을 질투할 것이다. 바울은 뱀이 그 간계로 하와를 미혹한 것같이 고린도에 있는 성도들의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한다고 말했다.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사람에게 만진 바 되지 않고 아무런 티가 없는 사람이어야 한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하고 깨끗한 사랑에서 떠나지 않았는가를 살펴보기 바란다. 만일 성도의 생각하는 모든 것이 그리스도가 아니라 자신의 즐거움이라면 주님은 기뻐하시지 않을 것이다. 오늘 우리가 해야 할 한 가지 일은 주님께 “주여, 저는 당신의 것입니다. 저의 의복과 마음을 깨끗하게 지켜 주시고 나의 생각과 모든 것이 깨끗하도록 지켜 주소서.”라고 말하는 것이다. 아, 어느 누구도 나를 만질 수 없다! 아가서에서 말한 것과 같이 “나의 누이, 나의 신부는 잠근 동산이요 덮은 우물이요 봉한 샘이로구나”(아 4:12). 여기에서 무엇 때문에 계속 ‘잠근’이나 ‘덮은’이나 ‘봉한’이라는 말을 사용했는가? 나의 동산에는 어느 누구도 들어갈 수 없고 오직 사랑하는 자에게만 열려 있기 때문이다. 어느 누구도 자신의 마음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내게서 물을 얻을 수 없다. 어느 누구도 자신의 목마름을 그치게 하기 위하여 내게서 물을 얻을 수 없다. 나의 우물과 나의 샘은 모두 그분을 위하여 남겨 둔 것이다. 우리는 날이 갈수록 이러한 태도를 가져야 한다. 나는 주님을 위한 자이므로 그 누구도 나를 만질 수 없다. 바울은 “이제부터는 아무도 나를 괴롭히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내 몸에 예수님의 낙인이 짝혀 있기 때문입니다.”(갈 6:17)라고 말했다. 오! 내 몸에 십자가의 낙인이 있으니 누구도 나를 괴롭게 할 수 없다. (열두 광주리 가득히 11권 68-72쪽)

                       

헌신 - 기도집회 추구내용

 

                매년 남아 있는 열매를 맺기 위해 교정되고 조정되며 부서짐

   우리는 매년 정상적으로 한 명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 일년 동안 열매를 맺지 않는 것은 어떤 면에서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우리가 어떤 문제에 있어서도 잘못된 것이 없다면, 다음 해에는 한 명의 열매를 맺을 것이고 이 열매는 남아 있게 될 것이다(요 15:16). 예를 들면,  문서를 나누어 주며 의도적으로 복음을 전할 필요가 있을 때가 종종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의 열매 맺음은 남아있지 않을 수 있다. 반면, 우리가 생명을 분배함으로 산출하는 열매는 남아 있을 것이다. 우리 모두가 매년 한 명의 열매를 맺는다면 다음해 이맘때까지 우리의 숫자가 두 배로 늘어날 것이고, 그다음 해에 또다시 배로 증가할 것이다. 더욱이 우리가 맺는 모든 열매는 살아 있고 적극적이며 우리의 어떠함과 같을 것인데, 왜냐하면 원칙적으로 부모들이 같은 부류의 자녀들을 낳기 때문이다. 우리 가운데 해가 거듭하면서도 같은 숫자를 유지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이것에 대해 어떤 변명도 있을 수 없다. 그렇지만 우리는 복음 전도나 봉사의 일을 하려고 애를 써서는 안 된다. 그보다도 다만 열매를 맺어야 한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생명을 분배하여 그 사람을 얻기 위해 부서짐의 공과를 배워야 한다. 그것은 바로 교정되고 조정되며 부서짐으로 우리의 소유물을 소비하고 우리 자신까지도 소비하는 것이다(고후 12:15). 우리가 이러한 것을 실행한다면 매년 한 사람을 주님께로 데려오는 것에 대해 확신을 가질 수 있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가 어떤 특정한 방식으로 복음을 전하러 나가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도 열매 맺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열매를 맺으려면 우리는 주님과 교통하고, 그분을 접촉하며, 그분을 누리고, 그분에 의해 빛 비춤 받고 폭로되며 정결하게 되고 다룸을 받아야 한다. 우리의 죄들과 실패와 약함을 자백해야 하고, 다른 이들을 돌보는 방식에 관하여 주님의 인도를 구하는 많은 기도가 있어야 한다. 그런 다음 우리는 어떤 사람들을 접촉하러 갈 수 있다. 이러한 것은 활동이나 운동이 아니라 내적인 생명을 흘려보내는 것이다.
   우리가 열매 맺는 것에 관해 주님 앞에 진지하다면 우리의 친척들과 친구들과 이웃들과 급우들과 학우들과 동료들을 포함하여 우리가 아는 사람들의 이름을 적어 두고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그들 중 두세 사람에 대해 부담을 주실 것을 주님께 구하고, 한 명 한 명을 위해 구체적으로 기도해야 하며, 어떻게 접촉해야 하는 지에 관해 주님의 인도를 구해야 한다. 우리는 그들과 함께하는 터를 세우기 위해 주말을 함께 보내거나 그들을 집으로 초대하여 함께 머물 필요가 있을 수 있다. 우리는 적극적으로 기도하고 일해야 하지만 성급한 방식으로 해서는 안 된다. 한동안 그들과 함께하는 터를 얻은 후에는 결국 우리가 생명을 분배하고 그리스도를 공급하여 그들을 얻을 때가 무르익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취하는 길은 생명의 길과 교회의 길이며, 많은 활동들과 운동들과 캠페인들이 있는 기독교의 길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우리의 생명으로 취하고, 그분에 의해 살며, 우리 안의 생명을 표현하고, 이 생명을 다른 사람들에게 분배해야 한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 부서지고 낮아지는 공과들을 배워야만 한다. 사람들을 접촉하기 위해 낮아져야 한다. 그렇게 될 때 교회는 견고해질 것이고 생명과 건축과 기능 발휘와 열매 맺음이라는 네 개의 다리 위에 설 것이다. 우리는 균형 잡힌 방식으로 자랄 것이고 교회는 많은 자녀가 있는 한 가족이 될 것이다. 자녀들이 없는 가족은 합당하고 균형 잡힌 가족이 될 수 없다. 예를 들면, 어떤 아파트들은 어린 아이나 심지어 십대들이 있는 가족들에게 집을 빌려 주지 않는다. 그러한 사람들은 오직 한 세대만을 관심하는 것 같아 보인다. 우리는 모든 구성원이 영적인 성인인 ‘한 세대’교회를 갖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오늘 우리는 성인들일지 모르지만 다음 세대가 없다면, 우리는 어느 날 죽는 날이 가까운 ‘노인네들’이 될 것이며 교회는 없어질 것이다. 다음 세대가 없이는 결코 합당하고 참된 교회생활을 할 수 없다. 우리에게는 많은 영적인 자녀가 필요하다. 따라서 우리는 모두 균형 잡힘으로 열매를 맺는 책임과 부담을 져야만 한다.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누리는 것에 대해 교통하는 것을 열매 맺음에 관한 교통보다 더 높게 평가할지 모른다. 그렇지만 사실상 이 두 방면은 함께 가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은 누림이다. 가지들인 우리가 포도나무 안에 거할 때 포도나무의 풍성들, 곧 포도나무의 모든 어떠함과 포도나무가 가진 모든 것을 흡수한다. 거하는 누림은 열매를 맺기 위한 것이다. 먼저 그리스도를 누리는 것을 배워야 하고, 열매를 맺음으로 그분을 표현하는 것을 훈련해야 한다. 이것은 합당한 성장을 가져올 것이다. 더욱이 열매 맺고자하는 가지들은 손질됨으로 다루어져야 한다. 만일 우리가 손질되었다면 열매 맺을 것이고 합당하게 균형 잡힐 것이다. 우리에게 교리적인 가르침에 불과한 것들은 필요하지 않다. 우리에게는 다만 생명과 건축과 기능 발휘와 열매 맺음의 실행이 필요하다. 그럴 때 그리스도인 생활은 강하고 적극적이며 살아 있을 것이고, 교회는 강하고 적극적이며 살아 있는 증거가 될 것이다. 교회는 이 네 가지 요인 위에 견고하게 서게 될 것이다. 교회가 생명과 그리스도에 대한 누림으로 충만하게 될 때 그리스도를 누리는 모든 사람이 함께 건축되고, 기능을 발휘할 것이며, 열매 맺는 가지들이 될 것이다. 우리는 교회와 가르침들에 관한 공허한 논쟁들에서 구원받을 것이고, 생명과 건축과 기능 발휘와 열매 맺는 것에 모든 주의를 기울이게 될 것이다. (위트리스 리 전집 1966년 1집  267-27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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