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겨울 훈련
하나님의 신약 경륜에 따른 네 단계 안에 계신
모든 것을 포함하신 그리스도(2)-
십자가에 못 박히심의 단계에서
그는 실로 우리의 병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감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의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 53:4-5)
이사야는 그리스도에 관해 많은 방식으로, 심지어 다양한 형식으로 말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우리가 그분의 아들에 관하여 발견하기를 원하시는 모든 항목을 제시했다. 이러한 발견 항목들은 하나님의 경륜 안에 계신 그리스도에 관련된다. 하나님은 그분의 신성한 경륜 안에서 자신의 목적을 완전히 성취하시기를 의도하신다. 삼일 하나님으로서 그분은 하늘들과 땅을 창조하셨다. 그런 다음 그분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육체가 되심으로 시간 안으로 들어오셨다. 육체가 되신 분으로서 그분은 십자가로 가셔서 못 박히셨다. 십자가에 못 막혀 죽으신 후 그분은 음부 안으로 내려가셨다가 부활하셨다. 부활 후에 그분은 하늘들로 올라가셨다. 그러나 그분의 승천도 끝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분은 생명 주시는 영으로서 다시 오셨기 때문이다. 그분은 부활 안에서 생명 주시는 영이 되셨고, 그 영으로 돌아오셔서 그분을 믿는 각 사람에게 생명이 되셨다. 이 모든 단계들은 하나님께서 우주 안에서 수행하고 계시는 경륜의 부분이다. 이것은 위대한 일이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심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신성한 경륜을 이 땅위에서 성취하시고 수행하시기 위한 움직임에 있어서 하나의 위대한 단계이다.
신언자들이 전하는 것과 여호와의 계시(사 53:1) 모두에서,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구속자로 계시된다. 신언자들이 말했고 여호와께서 계시하신 것은 바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구속자로서, 우리의 허물들, 곧 우리의 죄를 위해 그분 자신을 희생제물로 드리시어, 여호와의 영원한 구속을 성취하심으로써 그리스도 안의 믿는 이들이 구속받도록 하셨다는 것이다. 구속은 대가를 치르고 다시 소유하는 것과 연관된다. 원래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물과 소유였지만, 타락을 통해 사탄이 사람을 소유하게 되었다. 그 결과 우리는 사탄의 소유 아래 태어났다. 우리를 되찾으시기 위해 그리스도는 우리를 구속하셔야 했다. 즉 대가를 치르고 다시 소유하셔야 했다. 지불된 대가, 곧 우리의 구속에 대한 대가가 바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받으신 고난과 죽음이었다. 그분께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때,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구속이 적용되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다시 소유하시기 위해 극도로 고난받으셨다.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해 우리는 죄들의 용서를 받았다. 우리는 이제 그분의 소유물이며 의롭게 되었다. 의롭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 올바른 것이다. 우리는 죄들이 용서받았을 뿐 아니라, 하나님께 올바르게 되어 하나님의 유죄 판결로부터 해방되었다. 의롭다 하심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의의 표준에 따라 우리를 승인하시는 조치이다. 우리의 죄들이 용서받고 우리가 의롭게 된 것을 기반으로, 우리는 하나님과 완전히 화목되었다. 우리는 하나님의 원수들이었으므로 하나님과 화목되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하나님의 원수들이 아니다. 그보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참된 하나 안으로 이끌림을 받았고, 그 결과 그분의 부활 안에서, 곧 부활의 실재인 생명 주시는 영 안에서 그분과 생명의 연결을 갖게 되었다.
마태복음 8장 17절의 문맥에 따르면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서 사역하고 계셨을 때, 우리의 연약함을 없애시고 우리의 질병을 감당하셨던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당시에 그분께서 많은 병든 사람들을 고쳐주시고 많은 귀신들을 쫓아 내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병고를 감당하신 것은 바로, 그분께서 하나님께 심판받으실 때, 즉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악을 십자가에서 그분 위에 두셨을 때였다. 그분께서 우리 병고를 지고 슬픔을 감당하신 것은 그분께서 우리의 악행과 잘못과 실수와 허물과 범과와 죄악과 죄들을 십자가에서 감당하셨을 때였다. 우리가 그분의 치유를 현재 체험한다 하더라도, 우리의 모든 죄들과 병고와 슬픔과 죄악은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제해졌던 것이다.(이사야 결정-연구Ⅱ, M6 B.P 교통중에서)
특별 교통 - 아침부흥
이스라엘 백성의 위치
우상숭배
하나님의 선민이요, 하나님의 신부요, 하나님의 양떼요, 하나님의 보물이던 그처럼 놀라운 백성이 어떻게 배역자, 가시, 전갈, 음녀, 찌꺼기가 될 수 있었는가? 타락의 첫 이유는 그들의 우상 숭배이다. 우상이 항상 물질적인 형상을 갖고 있다고 생각지 말라. 우상이란 하나님을 대치하는 것들이다. 우리가 주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우상이다. 학식이 우상이 될 수 있다. 교육이 우상이 될 수 있다. 돈이 우상일 수 있다. 아내나 남편이나 자녀들이 우상일 수 있다. 특별한 스타일의 옷―그것이 느슨한 스타일이든지 정장 스타일이든지―이 우상일 수 있다. 우리에게 주님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무엇이든지 우상이다. 이스라엘의 타락과 퇴보는 무엇보다도 먼저 그들의 우상 숭배 때문이다. 신약에서 교회들의 타락은 주님을 향한 첫째가는 사랑을 상실한 데서 시작되었다(계 2:4). 만일 당신이 구원받았을 때 사랑한 것만큼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당신에게 우상이 있음을 가리킨다. 당신이 주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당신의 우상이다. 이같이 이스라엘의 타락 원인과 교회의 타락 원인은 정확히 동일하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대치하는 우상을 경배했다. 오늘날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첫째가는 사랑을 잃었다. 그들은 그들의 선교의 일, 회원 자격, 청년 선교, 성경 공부, 복음 사역을 주님 자신보다 더 사랑한다. 그리스도인 선교 연맹의 창시자 토우저 박사(Dr. A. W. Tozer)는 만일 예수님이 그리스도인 지도자들의 집회 가운데 오신다면, 그들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비록 그들이 예수님을 위한 일을 논의하고 있을지라도, 그분이 그곳에 오신다면 그들은 그분을 모를 것이라는 말이다. 그의 관찰은 기독교가 주 예수님 자신 외에 많은 것들을 사랑하고 있음을 가리킨다. 주 예수님은 에베소 교회가 많은 선한 일들을 했으나 책망할 것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그분을 향한 첫째가는 사랑을 잃었던 것이다(계 2:4). 이는 그들에게 어떤 우상들이 있었음을 가리킨다.
세상과의 연합
우상은 언제나 사람들을 세상과의 교제 안으로 이끈다. 이스라엘 백성은 우상들을 받아들였고, 그 우상들로 인해 모든 이교국들과 접촉을 갖게 되었다. 이는 우리 속에 주님을 대치하는 것이 있는 한, 우리가 세상과 짝하게 될 것임을 가리킨다. 우리가 주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무엇이든지―돈이든, 교육이든, 학위든, 좋은 직장이든, 좋은 자동차든, 좋은 집이든, 좋은 생활이든, 심지어 좋은 남편이든, 좋은 아내이든―우리를 세상적인 것 안으로 이끌 것이다. 우리가 주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은 어느 것이나 우리를 세상적인 데로 인도할 것이다.
이방인의 습관을 따라 행함
일단 이스라엘 백성이 이교국들과 교제한 다음 그들은 이방의 습관과 풍습을 따라 행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열방들을 뒤쫓았다. 이 세 가지 사항―주 예수님보다 그 무엇을 더 사랑함, 세상과 사귐, 이교도들의 습관을 좇아 행함―이 기독교의 타락과 퇴보의 주요 원인들이다. 나는 여러분이 오늘날 주의 회복 안에 있는 것을 볼 때 매우 기쁘다. 그러나 여러분 중 일부가 여전히 속에 우상을 갖고 있고, 여전히 세상과 사귀고, 매일의 행함에서, 생활 방식에서 여전히 이방인들의 습관을 따르고 있음을 우려한다. 당신은 느슨한 스타일도, 정장 스타일도 위하지 말아야 한다. 믿지 않는 이들을 생활의 본으로 삼지 말라. 당신은 오로지 속 생명만 주의하고, 외적 모습은 주의하지 않는다고 말하지 말라. 우리에게는 합당한 외양이 필요하다. 우리가 생활하는 방식, 돈을 쓰는 방식, 옷을 입는 방식 등은 이방인의 습관을 따르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거룩한 백성이기 때문에 반드시 달라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부패했던 것은 바로 이 세 가지에 의해서였다.(에스겔 라이프 스타디, 메시지 13, 162-164쪽)
헌신 - 기도집회 추구내용
복음 전파와 네 가지 회복의 관계
우리는 복음 전파에 아주 익숙하지만, 사실 그 일이 그렇게 간단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확실히 전쟁이 있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성령과 몸과 지방 교회를 회복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먼저 복음을 전파해야 한다. 왜냐하면 복음 전파가 이러한 것과 관계가 매우 크기 때문이다. 만일 합당하고도 충분하게 복음을 전할 수 없다고 생각해 보라.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를 표현할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를 표현하려면, 첫째로 해야 할 일이 그리스도를 전파하고, 어둠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공급하는 것이다. 우리가 만일 죄인들을 향해 입을 다물고 그리스도를 말하지 않는다면, 즉, 그리스도를 공급하지 않는다면, 허공을 향해 그리스도를 표현하겠다는 말인가? 우리는 마땅히 사람들을 향해 그리스도를 표현해야 한다. 수많은 죄인들이 그리스도를 보지 못했을 뿐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회복하고자 한다면, 또한 우리가 그리스도를 표현하고자 한다면 먼저 해야 할 일이 한 가지 있다. 그것은 바로 복음을 전파하고 그리스도를 사람들에게 전파하며 그리스도를 죄인들 안으로 넣는 것이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하는 것과 그리스도를 모든 것으로 회복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표현을 얻으시게 하는 것과 절대적인 관계가 있다.
우리는 다만 영적인 교리만을 전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를 표현하는지, 어떻게 그리스도를 의지하여 사는지, 어떻게 그리스도를 우리의 모든 것이 되시게 하는지를 말할 때, 모든 것을 분명하고 일리가 있게 말한다 할지라도 그리스도를 전하지 못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알고 있고, 그리스도의 풍성을 가지고 있으며, 그리스도의 분량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면서도 이삼 년이 지나도 단 한 사람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지 못할 수 있다. 이것은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다음으로 성령의 권위를 회복하고, 성령의 지위를 회복하고자 할 때, 이것 또한 복음 전파와 뗄 수 없는 관계이다. 복음 전파는 교리로서 사람을 감동시키는 것이 아니고 사람들에게 교회에 가입하라고 권하거나 말씀을 믿으라고 권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람들의 영을 살아나게 하고, 사람들을 거듭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복음 전파는 절대적으로 성령의 회복이 필요하다. 우리 자신이 영 안에 살고, 영 안에서 불타며, 영으로 점유된 사람이라야 우리의 복음 전파에 능력과 실재가 있게 될 것이다. 이것은 일반적인 그리스도인들이 말하는 성령의 부어짐, 즉 위에서부터 오는 능력을 말하는 것만이 아니다. 요즘 일이 년 동안 어떤 지방에서는 소위 성령 운동의 바람이 불고, 방언을 말하는 바람이 불어 성령의 침례를 받는 것과 방언을 말하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사도행전에서는 오순절날에 그곳에 모인 사람들이 방언을 하자 즉시 3,000명이 구원을 받았다. 그러나 오늘날 방언을 강조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오래도록 방언을 말해 왔지만, 그들이 구원받게 한 사람은 얼마나 되는가? 미국에서 방언을 말하는 사람들은 갈수록 형편없어졌고, 방언을 아무리 많이 해도 사람들을 구원받게 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방언을 얼마나 잘하는가는 상관이 없다. 만약 복음의 열매가 없다면 그러한 방언은 필요가 없는 것이다. 주 예수님은 “여러분은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게 될 것입니다.”(마 7:16)라고 말씀하셨다. 열매로 나무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좋은 나무라고 말하지만, 열매는 어디에 있는가? 성령 운동이 옳다고 말하지만, 그 열매는 어디에서 찾아볼 수 있단 말인가? 방언을 말하는 것이 옳은 것이라고 말하지만, 그들의 능력은 어디에 있는가? 성령의 참된 능력은 죄인들이 구원받는 데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그러므로 복음 전파는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확실히 영 안에서의 회복이 필요하다. 복음 전파가 다만 교리만을 전하는 것이라면, 능력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복음 전파는 영혼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고, 사람의 영을 만질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그것은 사람의 영을 격동시킬 수 있어야 하고, 사람의 마음의 상상들을 정복시킬 수 있어야 하며, 생각의 견고한 진을 깨뜨릴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능력이 필요하다. 어떤 지방 교회가 만일 복음 전파에서 약하다면, 그것은 그들의 영이 약해졌기 때문이다. 교회가 복음에서 약해지며, 영은 하락할 수밖에 없다. 구호(口號)만 외쳐서는 사람을 구원할 수 없으며 성령의 능력이 있어야 사람을 구원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만일 어떤 지방의 교회가 복음을 전하고자 한다면, 모든 성도들은 돌이켜 주님 앞에 나아와 복종하고 죄를 처리해야 한다. 방언을 말하든지 말하지 않든지 모두 중요하지 않다. 성령의 옮겨 부어짐이 있든지 없든지 그것도 중요하지 않다. 오직 한 가지 일만이 사람을 복종시킬 수 있는데, 그것은 금식하고 자백하며 회개하는 것이다. 주님께서 우리의 죄들을 용서해 주시기를 구하고 자신을 제단 위에 올려놓고 영으로 돌이켜 우리의 영을 사용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사람들을 구원받게 할 수 있을 것이다. 방언을 말하지 않아도 되고, 성령의 부어짐을 구하지 않아도 된다. 다만 안에서부터, 양심에서부터, 영의 깊은 곳에서부터 자신의 죄들을 자백하며 주님을 항하여 열고, 자신을 제단 위에서 주님께 드리고 주님과 교통하며 접촉한다면, 반드시 사람들이 구원받게 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참된 능력이다. 여러분은 수많은 사람들이 여러분을 통해 주님 앞에 나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교리를 듣거나 교회에 가입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 참되게 영 안에서 주님을 만지고, 영 안에서 회개하며, 영 안에서 주님을 만지게 될 것이다. 이렇게 할 때 교회는 비로소 살아 있고 고양될 것이다. 그러므로 복음 전파는 필수이다. 복음을 전해야 그리스도께서 회복되시고 성령께서 회복되실 수 있다. (위트리스 리 전집 1966년 1집 267-270쪽)
부산 교회 청년 직장인 소개
부산 교회는 학교 졸업이후 직장인 청년들(40세 이하)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2009년 9월부터 청년 직장인부 모임을 별도로 가져왔습니다. 주님은 목양과 온전케 함을 통해 이들이 직장(일터)과 가정에서 합당한 간증을 지니며, 몸 안에서 지체로써 기능을 발휘하며 봉사를 배우기를 원하십니다.
이를 위해 청년 직장인부는 올 한해 매월 각 구역의 가정을 돌며 갖는 섞임, 청사포 1박 2일 섞임(2월), 야외섞임(4월), 부산 교회 전체 청년직장인 집회(10월), 외지 교회 방문(11월), 전국 청년직장인 집회(4,9월)을 계획하였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주님 앞에서 청년 직장인들에 대한 부담을 취하여 이들을 목양하고, 기도와 물질로 지원함이 필요합니다. 다음은 지난 2월 26~27일 37명의 청년 직장인들이 청사포 교육관에서 갖었던 섞임의 간증들입니다.
1) 이번 모임을 통해 오랫동안 못 보던 지체들, 또 처음 알게 된 지체들과 주님 안에서 섞일 수 있어서 기뻤다.(1구역 J자매)
2) 우리가 주님의 이름 안에서 모일 때 마다 그 영의 기름부음이 있음을 이번 섞임을 통해서 또 한 번 느낄 수 있었다. 함께 찬송 부르며 주님을 누리며 섞일 때 우리는 주 안에서 하나이고 더 하나 되고 있음을 인해 주님께 감사드렸다.(2구역 N형제)
3) 집회를 권유받았을 때, 적극적이지 못한 마음이 있었다. 하지만 헌신에 대한 조망이 내안에 새겨졌고, 그 의미가 밝아졌다. 이런 모임에 우리의 몸을 적극적으로 드림이 필요하다는 주님의 말씀이 직접적으로 느껴졌다. 헌신의 결과가 우리의 장래를 포기하게 되고, 심지어 영적인 장래도 포기한다는 것은 충격적이었다. 온전한 헌신에 대한 이상이 없었기에 여전히 교회를 다니고 봉사한다고 했지만, 헌신의 결과에 도달하지 못하였다. 다시한번 나의 욕심과 포기 하지 못하는 장래 일들을 내려놓는 순간을 체험하며 날마다 새롭게 드려지길 원한다.(2구역 H형제)
4) 금번 집회를 통해 습관을 내려놓음에 대해 인상이 깊었다. 예전의 습관적인 생활을 버리고, 시간을 구속하지 않는다면 주님이 우리를 사용하실 수 없다.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값으로 헤아릴 수 없는, 귀한 홍수 같은 그분의 사랑에 강권됨으로, "기꺼이" 내 자신을 하나님께 헌신하기 원한다.(3구역 H자매)
5) 올해에는 각 구역별로 청년 직장인 모임이 강화되고 특히, 어려움이 있는 청년 직장인들을 심방하고 접촉함으로 친밀한 교회 생활이 있기를 원한다.(3구역 C형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