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교회 소식지 (2011.04.17)
교회 주보
부산교회집사실 2011-06-15 , 조회 (358) , 추천 (0) , 스크랩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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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겨울 훈련


 메시지 12. 


그리스도의 두 번째 오심을 위해

은혜의 희년이신 그리스도를 살고 선포함

 

   이사야서 61장 1절부터 3절까지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으신 분이신 그리스도께서 두 번 오심과 관련된 그분의 사역을 언급한다. 이사야서 61장 1절과 2절 상반절은 그리스도의 첫 번째 오심에 대해 말하고, 2절 하반절과 3절은 그리스도의 두 번째 오심에 대해 말한다. 그리스도는 첫 번째 오셨을 때 은혜의 희년을 선포하셨고, 두 번째 오실 때 천년왕국을 가져오실 것이다. 이 천년왕국은 우리의 은혜의 희년이신 그리스도를 천 년 동안 누리는 것이다.
   이 세 구절에서 주님의 첫 번째 오심과 두 번째 오심은 하나의 단위로 언급된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첫 번째 오심에서 은혜의 희년을 사시고 선포하신 것이 그분의  두 번째 오심을 위한 것임을 보여 준다. 1절부터 3절까지는 그리스도께서 인류에게 한 번 유일하게 오신 것의 두 방면을 계시한다. 그분께서 두 번 오신 것은 멀리서 볼 때 한 봉우리로 보이는 산의 두 봉우리와 같다. 단체적인 한 하나님-사람으로서 우리가 은혜의 희년이신 그리스도를 살고 선포할 때, 우리는 그분을 다시 모셔올 것이다. 주님의 회복은 반드시 그리스도의 몸의 실재로서 사는 단체적인 하나님-사람으로 구성되어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두 번째 오심을 위해 그리스도의 몸의 실재 안에서 은혜의 희년이신 그리스도를 살고 선포해야 한다.
   이사야서 61장 1절과 2절 상반절은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를 … 선포하여”라고 말한다. 이 말씀은 주님께서 태어나시기 약 칠백 년 전에 쓰였다. 그리고 누가복음에 따르면 주 예수님은 나사렛의 한 회당에서 이 말씀을 읽으셨다(눅 4:18-19). 주님은 보냄을 받으셔서 ‘가난한 이들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셨고’,‘마음이 상한 사람을 고치셨다.’ 우리는 좋은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며, 주님은 우리의 상처를 싸매셨다. 우리가 사람을 달에 보낼 수는 있지만, 오직 주 예수님만이 마음이 상한 사람들의 상처를 싸매실 수 있다. 우리의 마음이 상할 때, 우리는 그분께 자신을 열고 우리의 마음에 거처를 정하시도록 간구할 수 있다. 오직 그분만이 우리의 상한 마음의 상처를 싸매실 수 있다.
   그분은 또한 보냄을 받으셔서 ‘포로 된 이들에게 자유를 선포하시고’죄와 질병과 어둠 가운데서 사탄의 포로 아래 있던 이들을 해방하셨다. 그분은 보냄을 받으시어 ‘여호와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시기 위해’,‘갇힌 이들에게 놓임을 선포하셨다.’ 이것은 주님께서 그분의 첫 번째 오심 안에서 선포하신 것이지만, 두 번째 오심 안에서는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실 것이다.”(사 61:2하) 주님은 다시 오실 때 이스라엘에 남아 있는 유대인들을 구원하시고 적그리스도와 그의 군대들을 멸하실 것이다. 그것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일 것이고 모든 슬픈 사람들에게 위로가 될 것이다.
   이사야서 61장 3절은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의 영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말한다. 신약의 믿는 이들로서 우리는 희년의 이 방면을 미리 맛볼 수 있다. 우리는 기쁨의 기름을 체험했다. 히브리서 1장 9절에 따르면 큰 기쁨의 기름이 우리에게 부어졌다. 우리는 또한 찬송의 옷을 입었다. 우리는 슬픔의 영을 받은 것이 아니다. 한 다른 성경 번역본은 ‘슬픔의 영’을 ‘풀이 죽은 영’으로 번역했다. 우리는 풀이 죽은 영을 받지 않았다. 우리는 “할렐루야! 주님을 찬양합니다!”라고 하는 찬양의 옷을 입었다. 이 구절로부터 우리는 그분께서 첫 번째 오심에서 은혜의 희년을 선포하신 것이 그분의 두 번째 오심을 이끌어 온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사야 결정-연구Ⅱ, M12  E. M 교통 중에서)


 

특별교통 - 아침부흥

 

율법


   율법을 주심에 관하여 출애굽기 20장 1절은 큰 의미가 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일러 가라사대』(원문 참조). 여기서 접속사 그리고(and)는 20장을 19장과 연결시킨다. 출애굽기 19장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백성을 그분의 산으로 인도하여 그분과 교통하게 하셨음을 본다. 하나님은 백성을 애굽에서 불러내어 그분의 산에서 그분 자신께로 모으셨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과 교통하기 위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오셨음을 뜻한다. 물론 사람은 하나님이 계시는 하늘에 올라갈 수 없었다. 그러나 출애굽기 19장에서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을 만날 수 있는 어떤 산에 내려오셨다. 하나님이 백성을 만나고 그들이 교통 안에서 하나님을 접촉하는 바로 그곳에서 율법이 주어졌다.
   출애굽기 19장과 20장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성육신 이전에 하나님이 그분의 백성을 만나기 위해 내려오셨음을 본다. 심지어 출애굽기 20장 전에도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다. 그러나 그 나타나심은 규모가 매우 작았다. 출애굽기 19장과 20장에서 하나님이 백성을 방문하여 율법을 주실 때 이백만 명 이상이 하나님의 산에 모였다.
   백성을 애굽에서 불러내어 하나님의 산으로 인도하신 후에 하나님은 그들과 교통하며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출애굽기 31장 18절은 하나님이 그들과 친교(親交)하셨음을 나타낸다. 하나님의 산에서 하나님은 사람과 말씀하시며 대화하시며 친교하셨다. 19장 4절부터 6절에 의하면 하나님은 그들을 독수리 날개로 업어서 그분 자신에게로 인도했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또한 그들이 그분의 소유, 곧 특별한 보물이 되고 그분께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하나님과 백성 사이의 매우 적극적인 대화의 일부이다. 그런 대화는 어떤 율법의 반포가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분의 백성에게 말씀하시는 교통의 시간이었다.
   모세가 산에서 하나님과 친교하며 사십 일을 보낸 체험을 이런 빛 안에서 상고해 보라. 산에서 내려올 때 그는 두 개의 돌판에 새겨진 십계명 이상의 어떤 것을 소유했다. 그는 하나님의 요소로 철저히 주입된 사람이었다. 산에서의 친교의 날 동안에 모세는 하나님의 성분이 자신 안에 주입되는 신성한 체험을 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에게 십계명을 주셨고 이스라엘 자손이 우상을 숭배하는 것을 보고 모세가 돌판을 던져 깨뜨렸다고 말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이 문제를 합당하게 취급하지 않는다. 성경은 모세가 두 돌판을 받았을 뿐 아니라 그의 안에 하나님의 요소가 주입됨으로써 그의 얼굴이 빛났음을 말한다. 모세가 돌판은 던져 깨뜨릴 수 있었지만 그가 산에서 하나님과 교통하는 동안 받았던 주입을 제거할 수는 없었다.
   원칙적으로 이것은 주님에 대한 우리의 체험에 있어서도 사실이다. 우리는 율법을 지킬 수 없을지라도 그분과 친교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우리 안에 주입된 것을 제거할 수 없다.
   요한복음 15장처럼 분명히 포도나무의 가지는 어떤 계명을 지키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다. 그들은 다만 포도나무 안에 거하며 포도나무의 생명을 살아낼 뿐이다. 그러나 나는 출애굽기 20장에 있는 계명과 매우 유사한 요한복음 14장 21절과 23절에 대해 의아해했다. 요한복음 14장 21절은, 『나의 계명들을 받아서 지키는 사람은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말하며, 23절은, 『나를 사랑하면 나의 말을 지킬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최소한 어느 정도 주 예수님의 이 말씀은 출애굽기 20장에 있는 말씀의 반복인 것 같다. 그 이유는 생명의 원칙에 관한 한 구약과 신약은 동일하기 때문이다. 우리 스스로는 구약에 있는 하나님의 계명이나 신약에 있는 주님의 말씀을 지킬 수 없다. 이것에 관하여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우리는 율법을 지킬 수 없다고 말했다. 특히 바울은 우리의 외적 행위일 뿐 아니라 내적 상태인 탐심에 관한 계명을 다룬다. 비록 우리가 스스로 모든 계명들을 지킬 수 없지만 그분으로 주입될 수 있도록 그분 안에 거할 수 있으며 그분이 우리 안에 거하심을 체험할 수 있다. 산에서의 모세의 체험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자. 하나님으로부터 놀라운 옮겨 부음을 받았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 안에 거할 수 있었고, 하나님은 그 안에 거하실 수 있었다. 그러한 주입과 상호 거함의 결과 모세는 자기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기 안에 옮겨 부어진 하나님의 본질에 의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수 있었다.
   율법은 신성한 계명들의 열거일 뿐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스럽게 추구하는 자들 안에 그분의 본질을 주입하는,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이다. 만일 우리가 십계명을 다만 율법으로 간주하고 지키려고 노력한다면 그것은 율법에 대한 합당한 접근이 아니다. 우리는 십계명을 이렇게 적용해서는 안 된다. 반대로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을 추구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이 문제에 있어서 우리는 빌립보서 3장의 바울처럼 사랑함으로 그리스도를 추구하고 그분을 좇아가는 자가 되어야 한다. 주님을 사랑함으로 우리는 그분을 추구해야 하며 접촉해야 하며 그분의 임재 안에 거해야 하며 그분과 함께 거해야 한다. 만일 이렇게 한다면 우리는 매일매일 하나님으로 주입될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율법에 따라 행할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주님을 접촉함으로써 우리 안에 주입된 주님께 속한 것에 의해 율법의 요구를 지킬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본질로 철저히 주입되었다면 그분 자신이 우리 안에서 그분 자신의 율법을 지킬 것이다. 우리는 율법이 하나님의 산, 곧 그분의 백성이 그분의 본질로 주입되는 곳에서 주어졌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율법을 다만 계명으로 간주해서는 안 되며 그분을 표현할 뿐 아니라 사랑 안에서 그분을 추구하는 자들 안에 그분을 주입하는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증거로 간주해야 한다.(출애굽기 라이프 스타디 3권 165-170쪽)

 

복음과 목양 - 기도집회 추구내용

 

교회의 복음 전파

 

   교회의 합당한 터를 취하고 그리고 몸의 하나를 실행하여 함께 모인 후 우리는 더 전진된 균형이 필요하다. 이 균형은 복음 전파이다. 그리스도인의 생활과 교회 생활 모두에서 복음 전파라는 균형이 필요하다. 우리는 단지 합당한 터를 취하며 몸의 연합을 실행하기만 하고 복음 전파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 만일 이것이 우리의 상황이라면 주님은 우리를 바라보시면서 “너희는 뒤집지 않은 전병이다.”라고 말씀하실 것이다. 주님께서 반드시 우리를 뒤집으셔야 한다. 우리는 몸의 하나와 몸의 합당한 표현을 실행하면서 또한 반드시 복음을 전파해야 한다. 우리가 합당한 교회생활을 하고, 한 영 안에 굳건히 서며, 한 혼으로 함께 분투하는 가장 좋은 길은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다(빌 1:27).

   교회가 복음을 전하는 것은 믿는 이들 개개인이 복음을 전하는 것을 포함한다. 교회의 복음 전파가 강력하기를 우리가 원한다면 우리 각자는 반드시 교회의 복음 전파를 돕기 위하여 무언가를 해야 한다. 이 시점에서 나는 여러분과 함께 복음에 관하여 두세 요점을 함께 교통할 부담이 있다.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는 개인적으로 그리고 단체적으로 복음을 위하여 적절한 기도를 해야 한다. 지금과 같은 때에 우리는 교회에 의한 복음 전파와 한 사람 한 사람의 믿는 이들에 의한 복음 전파를 위하여 반드시 매우 많이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개인적으로 집에서 기도해야 하며, 교회로서 함께 모여 전적으로 이 문제를 위한 기도 집회를 가져야 한다. 우리는 때로 복음 전파에 관하여 금식하면서 기도해야 한다. 복음 전파에는 기도가 매우 많이 필요하다.
   우리는 또한 복음 전파의 활동에서 우리의 몫을 짊어져야 한다. 우리는 모든 친척, 이웃, 친구, 동료, 학교친구, 그리고 우리가 아는 사람들을 고려해 보아야 한다. 가장 좋은 것은 그들의 이름을 명단에 적고 그 이름들을 주님께 가져가 각 사람에 관하여 한 사람씩 기도하는 것이다. 이렇게 한다면 명단에 있는 사람 중에서 누가 구원을 받았으며 누가 구원을 받지 못했는지를 알게 될 것이다. 더 전진하여 우리는 인도를 받아 그들을 돕기 위해 그들에게 편지를 쓰거나, 전도지나 책을 보내거나, 그들을 방문하거나, 그들에게 우리를 방문하도록 할 것이다. 주님께서 어떤 것을 하도록 인도하시든지 우리는 반드시 그것을 해야 한다. 우리는 이렇게 우리가 아는 사람들의 이름을 돌볼 수 있다. 우리가 주님 앞에서 모든 이름을 고려할 때 주님께서 이 나라의 다른 곳에 있는 친구나 친척에 대하여 우리에게 느낌을 주실지 모른다.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그들에게 편지를 쓰거나 그들이 있는 도시의 책임 형제들에게 그들을 방문하도록 부탁할 수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친구와 친척을 도울 수 있다.
   가능하다면 우리는 주중의 하루 저녁에 우리 가정을 여는 것이 가장 좋다. 우리는 가정을 열어 한두 명의 친척이나 친구나 이웃이 우리를 방문하도록 초대해야 한다. 동시에 우리는 두세 명의 형제자매들을 초대하여 우리가 초대한 사람들과 함께 저녁을 먹도록 해야 한다. 그 시간에 우리는 복음에 관하여 자유롭고 격식이 없는 대화를 나눌 수 있다. 우리는 찬송을 부를 수 있으며 또는 한 형제가 간증을 할 수 있다. 다른 때에는 한 형제가 약 10분 정도의 짧은 메시지를 전할 수 있다. 이렇게 할 때 사람들은 복음을 받아들이도록 도움을 받을 것이며 마음이 준비될 것이다.
   교회가 복음 집회를 가질 때 우리는 우리가 접촉한 친구나 친척을 초청할 수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많은 새로운 사람들이 복음 집회로 인도될 것이고 그들은 쉽게 구원을 받을 것이다. 우리는 복음 집회에서 복음이 전해지고 있는 동안 사람들 옆에 앉아 기도함으로 그들을 도와야 한다. 우리는 집회가 끝난 후에는 10분에서 15분 정도 우리가 데리고 간 사람들을 돌보아야 한다. 그 후 며칠 내에 우리는 집회에 왔던 사람들 중 두세 명을 방문함으로 그들을 돌보아야 한다. 이러한 것들은 하기가 쉽다. 우리 모두가 이렇게 한다면 교회는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할 것이다.

   복음 전파에 있어서 우리에게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기도이다. 그런 다음 우리 각자는 복음을 전할 책임을 져야 한다. 교회는 복음 전도지, 복음 포스터, 복음 소책자를 준비하여 우리가 이러한 자료들을 친구, 친척, 이웃에게 나누어 줄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런 다음 우리는 준비한 사람들을 복음 집회에 데려올 수 있다. 그 집회에서 어떤 형제들은 찬송을 인도할 수 있으며, 어떤 이들은 기도할 수 있으며, 어떤 이는 짧은 간증을 할 수 있으며, 한두 명이 복음 메시지를 전할 수 있다. 집회 후에 모든 성도들은 방문자들과 개인적으로 대화함으로 그들을 도울 수 있다. 우리가 이러한 것들을 한다면 우리는 온 교회가 활발하게 움직이는 것을 볼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복음 전파는 매우 힘이 있을 것이다. 이것이 성도들의 영을 분발시켜 기도하고 주님을 더 사랑하고 사람들을 더 사랑하게 할 것이다. 결과적으로 교회는 더 살아 있게 될 것이다. 오늘날 우리 모두 이것을 위하여 기도하기 바란다. (위트리스 리 전집 1963년 3권  839-842쪽)

 

부산 교회 대입 수험생 집회

 

   지난 4월 10일(주일) 부산 교회 대입 수험생들이 1구역 이향숙 자매님 댁에서 모였습니다. 대입 수험생들과 대학생 선배들, 대학부 봉사자들과 청소년부 봉사자들 총 35명이 참석하였고 그중에 수험생이 14명 참석하였습니다.
   학생들과 봉사자들은 짧은 시간이지만 많은 교통을 가졌습니다. 교통 가운데 적극적인 항목은 아래와 같습니다.
   1) 수험생들이 지금부터 대학생들과 잘 연결될 때 대학 입학 후에도 교회 생활에 잘 적응하여 생활하게 된다.
   2) 우리가 대입 수험생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 수험생들의 좋은 성적을 위해 기도해야 하지만 그들이 대학 입학 후에도 교회 생활에 남아있게 되고 주의 회복을 위해 유용한 성도가 되도록 구체적으로 기도할 필요가 있다.
  3) 이번 수험생 봉사부터는 부산 교회 2011년 방향을 따라서 수험생 기간 동안 주님께로 인도할 2-3명의 복음 친구 명단을 정하고 기도하며 2011년 말에는 수확한다.
   4) 다가오는 5월에는 야외 섞임을 통해서 수험생들 간에 섞이고 복음 친구를 동반하여 야외에서 좋은 시간을 갖도록 한다.

부산 교회 형제 자매님들은 교회의 후대들을 위하여 지속적으로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특히 고3, 수험생들이 합당한 대학에 들어가고, 지속적으로 교회 생활 안에서 목양되고, 온전케 되어서 교회의 장래를 짊어지고 나갈 수 있는 좋은 젊은이들로 자라날 수 있도록 끊임없는 기도와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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