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주제 : 성경의 중심 노선
메시지 1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는 노선들
주님의 회복은 특별히 성경의 진리의 중심 노선을 회복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경륜과 관련된 것이며, 그분 자신의 경륜을 성취하기 위한 것이다.
주님은 그분의 회복 안에서 우리에게 위임하셨다. 우리에게 예수님의 증거를 지니는 아주 특별한 부담으로 위임을 주셨다. 이 증거는 하나님의 말씀에 있는 중심 노선과 관련되어 있다.
우리는 우리가 이것을 얼마나 알고 있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러한 것들이 우리 안에 얼마나 조성되었는가? 우리 안에 얼마나 주입되었는가? 우리의 존재 안에 주입되어 얼마나 우리의 이상이 되었는가? 자문해 보아야 한다. 이것들은 우리의 존재를 통제하는 이상이 되어야만 한다.
1983년도에 위트리스 리 형제님께서 장로들과의 실제적인 담화라는 메시지에서 언급하신 중요한 단락이 있다.
『이제 나는 워치만 니 형제님의 실행에 대해 교통을 나누고 싶다. 나는 그의 전기를 준비하면서 그가 어떻게 사역했는지를 보여주는 그의 저서를 많이 수집했다. 그는 그에 대한 주님의 위임이, 교회 생활의 사역이 외형적이 아니었음을 서너 번 언급했다. 그에게 주신 주님의 위임은 예수의 간증, 즉 죽음과 부활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생명을 사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외형적인 많은 일들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심지어 그는 교회의 업무를 다룬 많은 책들을 발행했다. 초신자들에게 주는 메시지까지도 주님이 위임하신 니 형제님의 사역의 부분으로 분류되지 않는다. 그는 주님께서 그러한 메시지들에 대해 그에게 위임하지 않으셨음을 특별히 말했다. 주님께서는 그리스도에 관하여, 그의 죽음과 부활에 관하여, 그분의 몸인 비밀한 몸에 관하여 메시지를 그에게 위임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초신자들을 위하여 많은 책들을 발행했다. 그 결과는 무엇인가? 회복 안에 있는 많은 교회들과 많은 성도들이 교회의 사무와 초신자들을 위한 집회들과 교회 입장을 포함한 외형적인 일들에 관한 니 형제님의 가르침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유감스런 말이지만 체험 안에서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가를 보는 사람이 정말 많지 않다. 이 「보는 것」이 부족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소홀히 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의 의미와 그분의 부활의 의미와 그분의 비밀한 몸의 의미를 소홀히 하고 있다. 교회 안에서 인도하는 자들이 어떻게 하면 성도들에게 그리스도를 알도록 도울까?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참된 체험을 갖도록 할까?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의 몸을 체험적으로 알도록 할까에 대해 참으로 생각하는가? 대부분의 인도자들이 매우 심사숙고하며 다른 일들을 하는 것 같다. 즉 어떻게 교회를 돌볼 것인가? 어떻게 집회를 돌볼 것인가? 어떻게 증가를 가져올 것인가? 어떻게 약한 자들을 도울 것인가? 어떻게 문제들을 풀 것인가? 어떻게 집회소를 지을 것인가? 하는 다른 것들이다. 우리는 자기도 모르게 중심 노선에서 떠나 갔었다. 우리는 초점 안에 있지 않다. 그러므로 우리는 형제회와 어느 정도 비슷하다. 우리는 성경에 따라 집회를 하고, 한층 나은 성경의 가르침들을 소유하고, 복음을 전파한다. 우리는 이 세 가지 일들을 다소 중시한다. 그러나 중심 노선에 대한 주의는 아주 적다.』
이 중심 노선이 우리의 생명과 생활과 일과 부담이 되어야 한다. 이 이상이 우리의 존재 안으로 침투해 들어와야만 하고, 우리의 입맛과 우리의 표현과 우리의 강조점이 되어야만 한다. 우리는 이 중심 노선에 의해서 통제를 받아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일종의 일반적인 그리스도인의 일을 할 뿐이다. 이것은 아주 진지한 문제이다.
특별히 우리가 확산을 할 때, 우리가 복음을 전파하는데 있어서, 교회를 세우는데 있어서 앞으로 전진할 때 주님께서 우리를 이 중심 노선 안에 지켜주시기를 원한다. 오직 이 중심 노선에 대한 이상만이 주님의 회복을 참된 하나 안에 지켜줄 수 있다. 우리의 하나는 전적으로 이 초점에 있다. 중심 노선에 우리의 하나가 있는 것이다. (2011년 봄 장로들과 책임 형제들을 위한 국제 훈련 M1 J. L 교통 중에서)
특별 교통 - 아침 부흥
그분의 신부가 되도록 교회를 거듭나게 하심
주 예수님께서는 그분의 신부가 되도록 교회를 거듭나게 하셨다(요 3:3, 5, 29-30). 주님은 신성한 생명과 신성한 본성을 가지신 신랑이시다. 만일 우리가 그분의 신부가 된다면 우리도 또한 신성한 생명과 신성한 본성을 가질 것임에 틀림없다. 이를 위해, 거듭남은 필수적이다. 신성한 생명과 본성을 떠나서는 결코 그리스도의 동반자가 될 수 없을 것이다. 요한복음 3장에서 우리는 거듭남이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신부가 될 자격을 부여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오직 신성한 생명으로 거듭나서 그분의 신성한 본성을 받은 후에라야 죄인인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을 수 있다. 신성한 생명과 본성을 소유하신 그분은 너무도 높고, 우리는 너무도 낮다. 우리가 어떻게 그분의 배필이 될 수 있는가? 이것은 오로지 거듭남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우리는 거듭남을 통해서 또 다른 생명, 즉 신성한 생명을 받을 수 있다. 이 생명 안에서, 이 생명에 의해 우리는 그리스도의 배필이 될 수 있고 그분과 짝지어질 수 있는 자격을 부여받는다.
이 시대의 마지막에, 그리스도는 그의 구속자들과 결혼하여 그들을 그분의 아내로 취하기 위해 오실 것이다(계 19:7). 현 시대는 「데이트하는」 구혼의 시대, 즉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간의 약혼 시대이다. 이 시대의 마지막 날에, 영광스러운 결혼식 날이 올 것이며, 그때에 그리스도는 그분의 구속된 자들과 결혼하실 것이다. 그리스도와 그분의 구속받은 자들과의 이러한 결혼에 대한 계시가 성경의 중요 계시이다.
성경의 마지막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영원 속에서 영원히 그분의 백성과 결혼 생활을 누리시리라는 것을 볼 수 있다. 영원히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새 예루살렘이 어린 양의 아내가 될 것이다. 이것이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로맨스의 완성이다.
성경 전체가 신성한 로맨스임
성경 전체가 하나의 신성한 로맨스이다. 이것은 성경이 매우 로맨틱한 책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특히 아가서에서 그러하다. 어떤 현대주의자들은 아가서가 성경에 포함되어야 하는지를 의심한다. 심지어 몇몇 온당한 그리스도인 교사조차도 이 책에 관해 의심을 가졌었다. 나는 젊었을 때 왜 성경에 한 남녀의 로맨스와 관련된 책이 있는가를 이상하게 여겼었다. 이 책은 우리와 그리스도의 사랑의 관계를 묘사한다.
아가서에 의하면, 주님에 대한 우리의 관계는 매우 로맨틱해야 한다. 만일 우리와 그리스도 사이에 로맨스가 없다면, 우리는 로맨틱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종교적인 그리스도인들이다. 내가 의미하는 로맨스가 무엇인지를 알기 원한다면, 아가서를 기도로 읽어 보라. 이 책을 기도로 읽을 때, 당신은 주님과 로맨틱하게 될 것이다. 당신은 그분에 대한 사랑에 미치게 될 것이다. 성경은 신성한 로맨스이다. 그러므로 주님과 우리의 관계는 더욱더 로맨틱하게 되어야만 한다.
신성한 로맨스인 성경은 하나님의 구애와 사람과의 데이트가 가득한 기록이다. 반복해서, 하나님은 이러한 방법으로 사람에게 나타나신다. 여기에 대한 두 가지 예가 있다. 첫 번째 예는 하나님이 벧엘에서 야곱에게 오신 것(창 28:10-22)이고, 두 번째 예는 호렙 산에서 모세에게 하나님이 오신 것이다.
성경은 또한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구혼으로 가득하다. 한 청년이 어느 여자에 대해 끊임없이 주의를 기울인다면 그는 구혼하게 되고, 그녀를 성가시게 할 지경으로 구혼한다. 마찬가지로 주님께서는 우리 사람에게 구혼하심으로 우리를 괴롭히신다. 성경은 하나님의 그분의 백성에 대한 구혼을 기록한다. 신약에서 우리는 주 예수님께서 그분의 제자들을 부를 때 그들에게 구혼하고 계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주 예수님은 반복해서 이러한 구혼의 방식으로 베드로를 괴롭히셨다. 베드로가 주님께 온 것이 아니라 베드로에게 주님이 오셨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요한복음 21장에서 주께서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것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셨다(15절). 주님께서는 두 번 더 그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셨다(16, 17절). 베드로에게 이 같은 질문을 하심으로 주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구혼을 하고 계셨다. 그분은 베드로가, 부모님을 존경하는 아이나 다른 친구를 관심하는 친구나 불쌍한 사람을 가엽게 여기는 부자처럼 그분을 사랑하기를 원하지 않으셨다. 주님께서는 베드로가 그분을 감동적인 사랑, 즉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를 위한 한 젊은 여자의 감동적인 사랑과 같은 사랑으로 사랑하기를 원하셨다. 우리는 요한복음 21장과 3장을 따로 떼어 읽어서는 안 된다. 만일 베드로가 그분을 사랑했다면, 그에게 물으신 그분은 신부를 취하기 위해 오신 바로 그 신랑이셨다. 요한복음 3장에서 신랑으로 오신 주 예수님에 대한 계시에 근거할 때, 21장에서 그분의 베드로와의 대화는 구혼의 방식으로 되었음을 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요한복음 14장 21절과 23절에서도 주님의 말씀은 동일하다. 23절에서 주님께서는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나의 말을 지킬 것입니다. 그러면 나의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서로 거처를 정할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셨다. 아버지와 아들이 주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와 함께 거처를 만드는 것은 결혼 생활에서 함께 살아가는 것에 대한 언급이다. 주 예수님과 거처를 같이하는 것은 그분의 배우자로서 그분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다.
주 예수님께서는 그분의 신부와 함께 친교를 나누는 신랑에 관한 것을 자주 언급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그분의 말씀의 이러한 측면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그러한 인식은 주님의 말씀을 아주 다른 의미로 받아들이게 해왔다. 그러므로 나는 그분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과 구혼에 관한 이 말이 우리의 관념을 변화시키기를 원한다. 주님이 우리에게 오신 것은 그분이 우리와 데이트하시고 구혼하신 것이다.(출애굽기 라이프 스타디 221-224쪽)
복음과 목양 - 기도집회 추구내용
주님의 회복 안에서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이 되는 길
주님의 회복 안에서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하여 반드시 복음을 전하여야 한다. 우리는 이 문제를 매우 소홀히 해왔다. 둘째로 우리는 반드시 생명이신 주님을 생명의 방식으로 체험하기를 항상 배워야 한다. 우리는 자신이 주님을 체험해야 할 뿐 아니라 다른 이들을 도와 주님을 생명으로 체험하게 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교회 생활을 실행하는 것, 즉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성도들과 건축되는 것을 훈련해야 한다. 우리는 자신이 이것을 실행할 뿐 아니라 다른 이들을 도와 우리가 실행하는 것 안으로 들어가게 해야 한다. 우리는 이 세 가지에서 균형이 잡혀야 한다.
우리는 부지런히 복음을 전해야 한다. 즉 우리는 부지런히 사람을 주님께 드려야 한다(롬 15:16). 복음을 전하는 것은 균형 잡힌 그리스도인의 ‘식단’을 지키는 길이다. 게으른 사람들은 결코 사람들을 주님께 인도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부지런해야 한다. 우리가 느슨하다면 한 사람도 주님께 드릴 수 없을 것이다. 복음을 전하는 것에서 우리는 반드시 엄격해야 한다.
우리는 교리를 전하기 위하여 여기에 있지 않다. 이 세 가지 이외에 다른 것을 하지 말라. 주로 교리를 해석하기 위하여 진리를 연구하지 말라. 심지어 교리를 전하거나 가르치려고 하지 말라. 오히려 모든 것을 포함한 그리스도를 전하고 가르치라. 우리는 우리의 관심을 반드시 복음 전파, 생명이신 그리스도, 교회 생활에 집중해야 한다.
복음의 분위기를 조성함
1949년 우리가 대만에 처음 왔을 때, 우리 중 많은 사람이 가난했다. 우리는 이삼 개월 후에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지 못했다. 우리는 가진 것이 많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성도들에게 우리가 계속 우리의 돈의 일부를 복음지와 포스터를 준비하는 데 사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우리는 많은 포스터를 준비했고, 불과 한 달 만에 인구수에 해당하는 약 70만장의 복음지를 배포했다. 우리는 그것들을 모든 골목과 도로, 거리 그리고 모든 집에 배포했다. 우리는 모든 집에 체계적으로 가기 위해 지도를 사용했다. 우리는 또한 거리에 있는 전봇대에 포스터를 붙였다. 거기에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예수님은 구원하신다.” 그리고 다른 구절들이 큼지막하게 쓰여 있었다. 단 한 집의 예외도 없이 모든 집의 우편함에 주 예수님께서 그들의 구주이심을 사람들에게 말하는 최소한 한 장의 복음지가 있었고 거의 모든 거리의 벽에 포스터가 있었다. 우리는 또한 성도들에게 대문 앞에 많은 포스터들을 부착할 것을 요청했다. 우리가 길을 걸을 때면 포스터가 붙어 있는 숫자를 보고 어떤 집에 형제들이 사는지를 알 수 있었다.
이 모든 것이 첫 해인 1949년에 일어났다. 우리는 많은 일을 했다. 우리는 복음 팀을 만들고 형제들은 중국어가 크게 쓰인 하얀색 ‘복음 가운’을 입었다. 우리는 또한 북을 치며 행진했는데, 한번은 거의 매주 행진을 했다. 많은 성도들이 거리들을 따라 행진했고 때로는 길 위에서 기도했다. 거리에서 행진하는 동안 때로는 “친구들이여, 여러분은 죄인이며 예수님을 믿어야만 합니다.”라고 외쳤다. 우리는 도시 중앙에 있는 공원에서 복음을 전파했는데, 수천 명이 앉을 수 있는 큰 운동장이 있었고, 우리는 복음 행진을 통해 사람들을 공원으로 오게 했다. 모든 성도들이 매 주일 오후에 이런 식으로 함께 모여 복음을 전했다.
일 년 만에 교회는 삼십 배로 증가했고 우리는 온 도시를 뒤흔들었다. 의사, 간호사, 교수들이 긴 옷을 입고 함께 행진했다. 모든 사람이 우리를‘미친’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거의 모든 사람이 집에서 우리에 대해 말했다. 이후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매우 쉬웠는데 왜냐하면 우리가 복음의 분위기를 일으켰기 때문이다. 우리가 한 일들이 땅을 갈아엎었다. 원칙적으로, 우리는 이런 일들을 해야 한다. 최근 나는 한 교회에서 형제들에게“왜 여기에는 복음을 위한 어떤 움직임도 없습니까? 비록 30명 혹은 40명밖에 없더라도 여러분 모두는 복음지를 배포하기 위해 거리로 나가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1948년 상하이에서 우리에게는 가장 큰 복음팀이 있었고 주일에는 거리로 행진했다. 거리에서 경찰들은 우리를 위해 질서를 유지시겼다. 그들은 버스와 차와 기차들을 정지시켰다. 우리는 손에 깃발을 들고 크게 외쳤다. 그런 다음 공원으로 사람들을 이끌었는데, 그들 중 많은 사람이 무릎을 꿇고 기도했으며 몇 명은 주님께 부르짖기도 했다. 우리 중 몇 명이 메시지를 전했고 몇 명은 찬송을 부르고 몇 명은 질서를 유지시켰고 다른 이들은 복음지와 소책자를 뿌렸다. 확실히 이 방법은 주님께 사람을 이끌 것이며 이렇게 할 때 주님은 우리를 존중하실 것이다. 우리는 또한 1935년 북중국에서 이렇게 행했다. 우리는 밤에 자주 무리지어 나갔고 소리높여 외치고 찬양하며 사람들을 이끌었다. 그런 다음 우리는 원을 만들어 사람들을 둘러싼 다음 무릎을 꿇었고 몇 명이 메시지를 전했다.
대만에서는 많은 성도들이 일주일에 한 번씩 교회 집회가 없는 저녁에 가정을 열었다. 그들은 셋에서 여덟 명의 사람을 초청하고 형제자매들을 초청하여 비공식적인 간증이나 개인적인 이야기로 그들을 돕게 했다. 이런 식으로 많은 사람들이 주님께 인도되었다. 성도들은 항상 복음 전파에 적극적이었다. 때로는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복음을 전파하지 않은 것이 수개월인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교회가 침례를 줄 것이라는 광고를 하자 삼백 명의 사람들이 침례를 받았다. 이 새로운 믿는 이들은 바로 개인적인 간증들을 통해 교회 안으로 들어 왔다.(위트리스 리 전집 1963년 3권 875-876쪽, 374-376쪽)
교회 소식 - 캄보디아
캄보디아에서의 최근의 움직임
캄보디아에서는 지난 5월 1일부터 8일까지 복음전파를 실행하였습니다. 홍콩과 태국에서 온 훈련생들(각 12명씩 총 24명)과 캄보디아의 5개지방 교회 성도들이 함께 6개의 그룹으로 편성하여 미개척지 6곳(반티 미엔쩌이, 뽀삿, 캄폿, 캄풍짬, 캄풍톰, 따케오)에 함께 나가 수천 장의 복음지를 뿌렸고, 수백 명이 주님의 이름을 불렀으며, 지금까지 216명이 침례를 받았습니다.
이번 움직임에 참여한 형제 자매님들의 간증을 통하여 알수 있는 것은 캄보디아 사람들, 특히 대학생들과 청소년들이 주님께 열려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캄풍짬이라는 도시는 미개척 도시인데 우리 형제 자매님들이 그 도시의 여관에 숙소를 정한 후 인근 고등학교와 대학교에 찾아가서 복음지를 나눠주며 저녁 복음집회에 초대하자, 한 대학생은 우리들을 그의 교실로 안내하여 복음지를 나눠 주는 것을 도왔고, 그 다음날 저녁 복음집회에 와서 주님을 영접하고 침례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프놈펜으로 돌아오는 길에 이전에 주 예수님에 대하여 들어보았느냐고 묻자, 그는 라디오 방송을 통해 들었을뿐 그리스도인을 직접 만나기는 우리가 처음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간증들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이번 복음의 움직임을 통하여 주님이 우리를 일깨워 주시는 것은 지금 캄보디아에 복음을 위한 황금의 기회가 열렸다는 것이며, 우릴 다시 한번 이런 움직임에 헌신하도록 부르신다는 것입니다.
신성하고 인간적이며 유기체인 그리스도의 포도나무 가지가 처음에 한국 형제들에 의해 담장을 넘어 이곳 캄보디아 땅으로 뻗어 나온 이래 이제 동남아의 여러 교회들이 함께 동참하면서 우주적인 몸의 공급과 부축, 그리고 기도를 통하여 신속하게 전진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이곳 캄보디아 땅을 위해서 더욱 중보기도 해주시고 공급해주시며 함께 수고하여 그리스도의 몸이 건축되기를 갈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