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주제 : 성경의 중심 노선
메시지 3
삼일 하나님을 체험함-그리스도를 통하여
한 영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
삼일 하나님을 체험한다는 것은 삼일 하나님이 생생하고 개인적이고 직접적이고 우리에게 주관적인 분이 되시는 것이다. 이것은 여러분의 지식이 있어야 하는 것이고, 여러분의 객관적인 계시를 넘어선 것이다. 이것은 참된 실지적인 것이다.
우리가 시 36편을 볼 때, 주의 집의 살진 것으로 만족할 것이라. 여기 살진 것은 그리스도의 풍성을 말한다. 그리고 그분의 복락의 강수를 마시우리라. 그 복락의 강수는 생명주는 영이다. 주님에게 생명의 원천이 있사오니. 이 말은 모두 체험의 말씀이다.
우리가 삼일 하나님을 체험하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과정을 통과하셔야 한다. 그렇지 않고는 디모데 전서 6장에서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가까이 할 수 없는 빛에 거하시는 하나님이실 뿐이다. 그분이 공기 같은 분으로 변형되시지 않았다면 어떻게 우리가 그러한 하나님을 누릴 수가 있고 체험할 수가 있겠는가? 하나님의 갈망은 우리 존재 안으로 그분 자신을 넣으시는 일을 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그분은 과정을 통과하셨다. 그래서 신성한 분배 안에서 우리가 그분을 체험하게 하신다. 우리는 신성한 전달을 통해서 삼일 하나님을 체험하고 있다. 우리는 이 사역의 풍성한 혈관을 통해서, 광맥을 통해서 풍성을 누리게 되었다. 삼일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지금 체험되고 계신다.
삼일 하나님을 체험하는 것은 신성한 생명의 문제이다. 우리가 참으로 그분을 체험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존재 안에 생명의 넘쳐흐르는 유출을 더욱더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또한 이것은 연합된 영의 문제이다. 삼일 하나님이신 그 영이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를 접촉하신다. 우리는 우리 영 안에 있어야 한다. 이것은 아주 초보적인 것이지만, 결코 여기에서 졸업할 수 없다. 삼일 하나님을 체험한다는 것은 몸의 문제이다. 에베소서는 삼일 하나님이 매 장마다 계시되어 있고, 삼일 하나님께서 몸 안에서 몸을 위해 몸과 함께 그분 자신을 분배하신다는 것을 계시한다.
서두의 말로서 좀 더 말한다면, 여기서 삼일 하나님을 체험하는 데는 특별히 네 가지로 중요한 신약의 부분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에베소서 2장 18절에 3장 16~17절을 더하면 에베소서 4장 4~6절이 된다. 먼저, 에베소서 2장 18에서 아들을 통해서 우리가 한 영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우리가 삼일 하나님 안으로 들어가는 문제이다. 그분은 우리가 들어갈 수 있는 하나님이시다.
에베소서 3장 16~17절에서 바울은 “아버지께서 그분의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분의 영을 통하여 능력으로 우리를 강하게 하셔서 우리를 속사람 안으로 이르게 하시고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마음에 거처를 정하시게 하시며,”라고 말하는데, 이것이 삼일 하나님이 우리 안에 들어오시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에베소서 4장 4~6절에서는 삼일 하나님과 몸이 연결, 연합, 합병되어 하나 안의 넷으로서 영광스런 실체가 되어 새 예루살렘으로 완결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요한복음 14장과 16장에 있는 계시와 일치한다. 아들이 아버지 안에 있고, 그분 안에서 우리가 아버지 안에 있고, 우리가 죽음과 부활을 거쳐서 거처를 얻게 된다. 이 거처는 참 포도나무이다. 우리는 체험적으로 그분 안에 거하게 되고, 그분은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이다. 이것의 절정은 요한복음17장에 주님의 기도에서 주님은 그들이 내가 있는 곳에 있고, 내 영광을 보게 하시라는 것이다. 결국 요한복음 14장 20절의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여러분이 내 안에 있으며 내가 여러분 안에 있는 것을 여러분이 알 것입니다.”라는 말씀으로 결론을 맺을 수 있다.
여러분은 삼일 하나님 안에 있고, 삼일 하나님이 여러분 안에 있는 것이다. 여러분의 일생의 나머지를 나를 체험하고, 나를 누리고, 나로 적셔지고, 나로 침투되는 그러한 시간을 보내어서 나의 궁극적인 단체적인 표현을 위해 살라고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이다. (2011년 봄 장로들과 책임 형제들을 위한 국제 훈련 M3. R. K 교통 중에서)
특별 교통 - 아침부흥
그분과 그분의 말씀을 사랑함으로 율법을 지켜 그분과 하나 되는 것
아가서가 성경에 포함된 것은 주님의 주권이다. 소위 그리스도인이라 하는 몇몇 사람들은 아가서를 신성한 책으로 보지 않고 성경에 포함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실 아가서는 가장 신성한 책이다. 이 책에서 추구하는 자는, 『나는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고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다』(6:3)고 말한다. 만일 우리에게 아가서가 없었다면 주님과 우리의 관계에 관한 그러한 표현이 없었을 것이다.
『나는 그의 것 그는 나의 것』이라는 후렴이 있는 찬송가가 있다. 이것은 아가서에 대한 말이다. 『나는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고』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그분이 주인으로서 우리를 그분의 하인으로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가 그분의 사랑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관계는 주종 관계가 아니라 남편과 아내의 애정 관계이다. 아가서는 지금까지 쓰여진 책 중에서 가장 로맨틱한 책이다. 이 책은 하나님과 그분의 택하신 백성과의 사랑 관계에 관한 책이다. 이 책은 그리스도와 그분을 사랑하는 자들의 결혼 생활에 대한 묘사를 나타낸다.
하나님의 율법을 지킴은 아내가 남편을 사랑함과 같이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깊은 관계를 갖고 있다. 우리가 반복해서 지적했듯이, 율법을 주신 것은 하나님이 그분의 백성에게 구혼하시는 것이다. 율법은 약혼 계약으로 주어졌으므로 우리는 율법을 주님을 사랑하고 그분과 하나 되는 것과 분리해서 지키려고 해서는 안 된다.
몇몇 기독교 교사들은 신약에서 하나님이 율법을 포기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진리와는 거리가 먼 것이다. 구속과 함께 율법의 내용이 성경 전체의 알맹이로 여겨질 수 있다. 더욱이 하나님의 율법에 관하여, 신약은 십계명의 내용과 본질적으로 같다. 예를 들어, 성경 전체에서는 우리가 참 하나님 한 분 외에 다른 신을 가져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며 우리는 그분 외에 다른 신을 섬겨서는 안 된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11장 2절에서 하나님의 질투를 언급하면서, 우리가 그리스도에 대해 정결한 처녀여야 한다고 지적한다. 주님은 반드시 우리의 유일무이하신 애인이 되셔야 한다. 이것은 십계명뿐 아니라 전 성경을 통해서 가르치시는 것이다.
성경 전체가, 우리가 우상을 숭배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가르친다. 이것은 십계명에만 제한되는 것이 아니다. 나아가, 성경 전체가 주님의 이름을 합당하게 사용하는 것을 가르치며 망령되이 불러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가르친다. 반복하지만 이 십계명은 율법에만 제한되는 것이 아니다.
원칙적으로는 안식일을 지키는 것과 관련된 네 번째 계명까지도 율법에 제한되는 것이 아니다. 신구약에서 하나님의 백성은 그들이 그분께 속하는 표시로 기념일을 가졌다. 옛 창조에 있어서, 그 날은 안식일, 즉 주(週)의 일곱째 날이었다. 그러나 새 창조에 있어서, 그것은 여덟째 날, 즉 주(週)의 첫째 날인 그리스도의 부활의 날이다. 부활 안에 있는 새 창조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자들인 우리의 기념일은 여덟째 날이지 더 이상 일곱째 날이 아니다. 새 창조 안에 있는 우리에게 그 날은 변했지만, 원칙은 변하지 않았다. 천년왕국 동안 회복된 인류가 계속 일곱째 날을 준수할 것이다(사 66:23).
이러한 사실에 근거하여, 안식교도들은 믿는 이들이 이 시대에도 계속 안식일을 준수해야 한다고 논쟁한다. 그러나 다가오는 천년왕국에서 안식일은 하나님의 거듭난 백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회복되고 보존된, 아직 거듭나지 못한 인류에 의해 지켜질 것이다. 비록 그들이 창조 때의 사람의 상태로 회복되더라도, 그들은 부활 안에 있는 신성한 생명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이 일곱째 날의 백성이 되는 반면에, 우리는 여덟째 날의 백성이 된다. 그러나 성경은 어떤 경우에나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주님께 분별되는 표시로 특별한 날이 있음을 가르친다.
율법을 버리지는 않더라도 율법을 남용하거나 오용하지 않도록 우리는 조심해야 한다. 부분적인 율법과 전체로서의 성경이 다 합당하게 사용되어야 한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의 접촉 없이 율법을 지키려고 노력한다면, 우리는 율법을 오용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주님과의 접촉 없이 성경에 접근한다면, 우리는 성경을 오용할 것이다. 유대교도들은 하나님과의 접촉 없이 율법을 이루려는 노력을 함으로써 오류를 범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과 하나 됨으로써 그분의 율법을 지키는 배필이 되지 못했다. 원칙적으로, 오늘날에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동일한 실수를 범하고 있다. 그들은 성경을 읽고 연구하지만 주님 자신과의 접촉 없이 그렇게 한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성경의 지식을 가르칠 때, 그들로 하여금 말씀 가운데서 그분을 접촉하라고 격려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남용하고 오용하는 오늘날의 유대교도들이 된다.
주의 회복 가운데 있는 우리는 기도로 말씀 읽는 것을 귀히 여긴다. 우리는 산 방식으로 그분을 접촉함 없이 성경을 읽기를 원치 않는다. 우리는 기도나 주님을 접촉하는 것을 떠나 성경을 읽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말씀 가운데서 주님을 접촉한다면, 우리의 체험 가운데서 실지적으로 그분과 하나 될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그분의 배필이 될 것이다. 우리의 사랑하는 주님을 사랑함으로, 그분과 하나 됨으로, 심지어는 우리가 그분의 사랑이 됨으로, 그분의 말씀이 우리에게 생명 공급이 될 것이다. 율법은 그분의 말씀의 압축이다. 우리가 직접적으로 친근하게 그분을 접촉할 때마다, 우리는 그분과 하나 되고, 그분의 말씀은 우리에게 생명으로 공급된다. 이런 생명으로 우리는 성장하고, 그분의 표현이 되고, 그분의 어떠하심과 일치되는 삶을 산다. 그러한 삶은 하나님의 율법과 그분의 말씀과 일치된다. 이것이 하나님의 율법과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하는 합당한 길이다.(출애굽기 라이프 스타디 221-224쪽)
복음과 목양 - 기도집회 추구내용
봉사에 있어서 온 존재를 드려야 함
로마서 12장은 교회 안에서의 우리의 봉사에 대하여 말한다. 당신이 이 장을 자세히 읽어본다면 바울이 성령 안에서 한 말이 매우 지혜롭다는 것을 볼 것이다. 첫 번째로 그는 먼저 몸을 드리는 것을 말하고, 그 다음은 생각이 새롭게 되고 변화를 받는 것을, 세 번째로 영 안에서 불타는 것을(1-2, 11절)말한다.
어떤 사람을 보면 영은 불타지만 생각이 구태의연하고 변화되지 않았다. 그래서 합당한 결과를 얻지 못한다. 또 어떤 사람은 영 안에서 불타고 생각 또한 변화되었지만 몸이 드려지지 않는다. 이렇게 되면 봉사집회에서 교통한 것들은 모두 공허한 이야기가 된다. 어떤 사람은 몸이 잘 드려져서 집회가 있으면 반드시 오고, 모든 봉사와 집회에 다 참석한다. 청소 봉사는 물론이고 접대 봉사와 심방에도 참여하고, 기도 집회, 성경 읽는 집회, 교통하는 집회 등에도 다 참석한다. 그러나 그는 생각이 변화되지 않아 낡은 관념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정말 심각하다. 사람들은 그가 오지 않는 것을 편안하게 느끼며, 일단 그가 오기만 하면 소란스러워져서 사람들이 불안해하고 교회에 손실을 끼친다. 실지적으로 말해서, 오늘 우리가 주님을 섬길 때 의견이 참으로 많다. 이렇게 의견이 많은 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생각이 새롭게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반드시 우리의 생각이 새롭게 되고 변화를 받아야만 우리의 봉사에 조화와 하나가 있을 수 있다.
몸은 시간 안에서 드려져야 함
우리의 존재는 몸 안에 있고 우리의 몸은 시간 안에 있다. 당신이 몸을 드리는 것은 바로 시간을 가져오는 것이다. 당신이 마음으로는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날마다, 곧 한 주의 칠 일 내내 바쁘다면 당신은 몸을 드릴 수 없다. 당신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고 말하지만 아무리 바빠도 일주일에 적어도 삼십 분은 따로 분별하여 주님을 섬겨야 한다. 그러므로 몸을 드리는 것은 시간을 분별하여 드리지 않으면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아야 한다.
오늘 교회 전체가 봉사해야 한다고 말하고, 성도들에게는 제사장이 되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전혀 구체적이지 않은 것이다. 구체적이 되려면 바울이 말한 것처럼 몸을 드리라고 말해야 한다. 몸을 드릴 때 반드시 일정한 시간을 분별해야 한다. 우리는 모두 주님의 말씀에 만져져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어 밖으로 나가서 고기를 잡아야 한다. 다만 집회 안에서 소리만 질러서는 안 된다. 고기 잡는 사람에게 가서 물어본다면, 고기를 잡는 일이 매우 고생스런 일이며 많은 시간을 소비해야 하는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께 “내년에는 반드시 한 사람을 인도하여 구원받게 하겠습니다.”라고 말씀드린 적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기억해야 할 것은 시간을 드리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물론 하루 이십사 시간과 한 주의 칠 일을 모두 주님을 섬기는 일에 쓸 수는 없다. 여전히 일을 하고, 밥을 먹으며, 청소나 집안일을 하거나, 기타 자질구레한 일들을 해야 한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이유를 막론하고 우리의 헌신은 구체적이어야 한다. 한 주에 적어도 두 시간을 분별하여 주님을 위하여 복음을 전해야 한다. 복음을 전하는 일에 효과가 있으려면 반드시 이렇게 해야 한다. 매주 두 시간을 분별하되 절대 자신에게 너그럽게 대하지 말고 굳은 마음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반드시 자신을 제한하여 시간을 구속하고 기회를 붙잡아야 한다. 혹시 어떤 형제는 근심하며 “한 주에 어떻게 두 시간을 따로 분별한다는 말인가?”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조금도 근심할 필요가 없다. 다만 결연하게 자신의 허리를 졸라매면 된다. 예를 들면 당신이 매일 한담하는데 얼마나 시간을 소비하는지 모를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참으로 주님을 사랑한다면 구체적이 되어야 하고, 시간을 따로 분별하여 매주 두 시간을 사용하여 복음을 전해야 한다.
이 외에 다른 두 시간을 사용하여 연약하고 어리며 당신보다 조금 못한 성도들을 찾아 돌보아야 한다. 매주 두 시간을 사용하여 불신자들을 관심하고, 다시 두 시간을 사용하여 어린 형제자매들을 돌보아야 한다. 바꾸어 말하자면 집회 시간 외에 한 주에 네 시간을 따로 분별하여 주님을 섬기라는 것이다. 만일 당신이 기꺼이 이렇게 한다면 많은 사람들이 여러분에게 이끌려 구원을 받고 또 세워질 것이다.
우리는 늘 시간을 낭비하기 때문에 성경에는 “시간을 아끼십시오.”(엡 5:16)라는 구절이 있다. 여기서 ‘시간’은 헬라어로 ‘기회’라는 뜻이다. 기회는 얻기 어렵지만 당신이 시간을 붙잡는다면 기회를 얻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몸을 드리라고 할 때 첫 번째 의미는 시간을 따로 분별하여 드리라는 것이다.
몸을 드려 봉사하는 것의 두 번째 의미는 구체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존재의 가장 구체적인 부분은 바로 우리의 몸이다. 영은 속에서 활력적이지만 구체적이지 않고, 생각도 속에 있고 만질 수 없어서 구체적이지 않으며, 가장 구체적인 것은 바로 몸이다. 어떤 형제들은 그들의 몸이 우리와 함께 집회를 하지 않으면서 위로하는 말로 나에게 “정말 미안합니다. 제가 오늘 당신과 함께 집회에서 책임을 다할 수 없군요. 형제님, 형제님께서 가시면 저는 영 안에서 전적으로 형제님을 부축하겠습니다.”라고 말한다. 처음에는 그나마 그의 정을 느낄 수 있었지만, 나중에 다시 이런 일을 대하게 되자 나는 이렇게 말했다. “형제님, 형제님께서 저를 부축하시려면 저와 함께 가셔야 합니다. 형제님께서 저와 함께 가시지 않으려면 그만 두십시오.” 그러므로 몸을 드리는 것이 구체적인 봉사이다. 한 주는 칠 일이며 이 칠 일 가운데 반드시 네 시간을 따로 분별하여, 두 시간은 복음 전파를 두 시간은 다른 형제자매들을 돕기 위하여 사용해야 한다. (교회생활을 위해 그리스도를 인격으로 취함 194-198쪽)
교회 소식
2구역(하단)복음애찬 집회
3월 27~28일 가지산 아젤란 리조트에서 총 26명(회복대상자 1명, 새로 오신분 2명, 최근에 교회 생활 시작하신 분 1명 포함)이 1박 2일로 복음 여행을 하였습니다. 첫 날(토)은 다함께 찬양을 불렀습니다. 모든 분들이 함께 주님을 찬양하면서 한마음이 되었습니다. 둘째 날(주일)에는 복음집회를 가졌습니다. 모든 지체들이 기능을 발휘하여 인생의 비밀을 초대되신 분들께 교통하였습니다. 청년 형제 자매님들은 특별 찬양을 통하여 복음의 길을 평탄케 하고, 형제님들의 간증과 초대되신 분들의 간증을 통하여 복음집회는 무르익게 되었습니다. 어느 형제님께서는 찬양을 들을 때 마음이 너무 감동된다고 하시면서 개인 상황이 정리되면 교회생활을 시작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청년 자매님들의 장소 준비, 음식, 지체들의 동역, 사랑의 수고에 대하여 주님께 감사드립니다.(K 자매)
6구역(기장1,반송)복음애찬 집회
5월 28일 토요일 오후 6시부터 이춘수 형제님댁에서 초청한 분들을 모시고 사랑스런 분위기 안에서 즐겁게 식사를 하였습니다. 식사 후에 기타 반주에 맞춰 때론 지체들의 얼굴을 보며, 죄인들을 위하여 주님 찾아 오셨네. 주의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나는 목말라 찾아 헤멨네. 아주 먼 옛날 등 찬송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A 형제님이 먼저 "사람은 그릇, 하나님 담는 그릇"이란 제목으로 복음 교통을 하였고, 뒤를 이어 몇 몇 형제님의 동역하는 교통이 있었습니다. 또한 초대되어 오신 분들이 간단한 느낌을 이야기 하였습니다. 총 22명이 참석하였으며 사랑스런 분위기 속에 초대되어 오신 6명은 주님의 이름을 불러 구원받았답니다. 할렐루야!
주님의 축복가운데 사랑의 수고와 기도하여 주신 모든 지체들께 감사드립니다.(K 형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