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주제 : 성경의 중심 노선
메시지 4
에베소서에 계시된 하나님의 경륜
몇 년 전에 그랜드캐니언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보았다. 스페인 탐험가가 말을 타고 숲을 통과하다가 갑자기 그랜드캐니언을 발견하였다. 그 탐험 대장은 그것을 발견하는 순간 무릎을 꿇고 하나님을 경배하였다.
성도들이여! 우리는 하나님의 경륜의 그랜드캐니언을 보기 원한다. 하나님의 경륜의 조망이 에베소서에 있다. 이것이 우리에게 에베소서를 보는 새로운 조망을 보여 줄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경륜에 관한 파노라마 같은 장면을 에베소서에서 볼 것이다. 마치 헬리콥터를 타고 보는 것과 같이 볼 것이다. 파노라마와 같은 장면이라고 할 때 그 말이 뜻하는 것은 어떠한 장면이나 그림의 연속인데 그것이 계속적인 광경을 보여줌으로 그 전체 광경을 조망하면서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은 한 장면 혹은 일련의 장면으로서 우리는 우리의 영을 사용하여 이 조망을 보기 원한다.
에베소서는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의 관점에서 쓰여 졌다. 우리는 에베소서 3장 11절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정하신 영원한 목적”이 있다는 것을 안다. 에베소서는 영원에 따라서 영원한 목적에 의해서 쓰여 진 책이다. 우리는 영원의 이상을 가지고 영원의 생활을 하고 영원의 일을 해야 한다. 에베소서는 하늘에 속한 위치를 가지고 있다.
에베소서 1장은“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하늘들에 영역 안에 있는 모든 영적인 축복으로 우리를 축복하셨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늘들의 영역 안에 있다. 우리는 하늘들의 영역 안에 있는 모든 영적인 축복을 받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하늘들의 영역에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리스도 안에 있다. 우리는 유기적으로 그리스도와 연결 되었고, 그리스도와 함께 있다. 우리는 주님과 하나이다. 그분의 몸의 지체들이다.‘그리스도 안에 있는’이란 말씀이 에베소서에서 20번 언급된다. 우리가 하늘들의 영역 안에 있다는 사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사실은 바로 이 에베소서가 하늘들에 속한 서신서 라는 것이다.
에베소서 2장 6절에서 “또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그분과 함께 일으키시고 하늘들의 영역 안에 그분과 함께 앉히셨습니다.”라고 말한다. 우리가 어떻게 느끼든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아버지께서 일으키신 것이다. 우리는 지금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들의 영역에 서 있다. 이것은 사실이다. 우리는 이 사실들 위에 서 있다. 이것이 우리의 위치이다.
에베소서에‘사랑 안에서’라는 말이 6번 나온다. 우리의 위치는 하늘들에 있고, 그리스도 안에 있고, 우리의 상태는 사랑 안에 있어야 한다. 사랑이 아니면 우리를 그 어떤 것도 그리스도와의 합당한 관계 안에 지킬 수 없다. 에베소서의 끝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이들에게 은혜가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라고 말한다. 여러분이 사랑하는 것이 새 창조 안에 있는 것이고, 에베소서 안의 모든 것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새 사람, 그리스도가 우리의 마음에 거처를 정하심, 하나님의 충만인 교회, 은혜, 빛, 사랑, 하나님의 완전한 전투장비 등등 이런 것이 모두 새 창조의 요소들로서 에베소서에 제시되어 있고, 우리는 이와 같은 것들을 누리고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한다.
에베소서 2장 6절의 그리스도 안의 각주를 보자. “하나님께서 우리를 한번 만에 영원히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들의 영역 안에 앉히신 것은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였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셨을 때 이루어졌고, 우리가 그분을 믿은 이후에 그리스도의 영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적용 되었다. 오늘날 우리는 이미 이루어진 이 사실을 믿음으로써 우리의 영 안에서 이 실재를 깨닫고 체험한다.” 우리는 하늘들의 영역 안으로 일으켜 져서 그분과 함께 앉아 있다. 이 각주에 있는 것처럼 우리는 이 실재를 영 안에서 깨닫고 체험해야 한다. 이미 이루어진 사실로 깨닫고 체험해야 한다. (2011년 봄 장로들과 책임 형제들을 위한 국제 훈련 M4. E. M 교통 중에서)
특별 교통 - 아침 부흥
그리스도의 인격을 체험하고 교회 안에서 삶
당신이 교회 생활을 살아내기 위해서는 에베소서 3장으로 전진해야 한다. 3장에서 우리의 영은 하나의 기관만이 아니다. 거듭난 후 우리의 혼은 속사람으로 변한다(16절). 구원받기 전에는 우리의 혼이 우리의 인격이었다. 왜냐하면 우리 사람의 생명이 혼 안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영과 우리의 몸은 모두 기관이었다. 우리의 존재는 바로 우리의 혼이다. 우리가 거듭난 후 주님은 우리의 영 안으로 들어오셔서 우리의 생명이 되셨다. 우리의 영 안에 이미 생명이 있으므로 우리의 영은 더 이상 기관이 아니라 하나의 인격이다.
이제 우리 속에는 두 사람이 있다. 혼이 한 사람이고 영이 또 한 사람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원받은 후 우리의 속은 복잡하게 변했는데, 속에서 두 사람이 늘 충돌하고 있다. 우리가 구원받는 길은 우리의 인격으로서의 그 혼을 십자가에 머물게 하는 것이다. 우리 옛사람, 곧 인격으로서의 그 혼을 반드시 십자가에 두며 십자가에서 끝내야 한다(롬 6:6). 지금 사는 것은 과거의 그 인격이 아니라 영인 그 인격이다. 안타까운 것은, 우리가 이미 구원받았고 영 또한 새사람이 되었지만 우리 안에 있는 새사람은 그다지 강하지 않고 오히려 혼 안에 있는 그 옛사람이 여전히 강력하다. 그러므로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영을 통하여 능력으로 여러분을 강하게 하셔서 속사람에 이르게 하시기를 기도한다고 말한다(엡 3:16).
논쟁하기 좋아하고 다투기를 좋아하는 모든 사람은 혼 안에 있는 그들의 옛사람이 아주 강하고 영 안에 있는 새사람이 아주 약하다는 것을 증명한다. 예를 들면 당신이 나를 비평하면서 나에 대하여 태도가 옳지 못하고, 말하는 것도 귀에 거슬린다고 말하면 나는 즉시 그에게 반박할 것이다. 만일 좀 더 예의 바르게 말한다면 나는 그 사람에게 “당신은 나의 태도가 이러이러했다는 것을 모릅니까!”라고 설명할 것이다. 좀 심하게 말한다면 나는 즉시 그에게 “설마 당신의 태도만 좋단 말이오? 당신만 옳다는 말이오?”라고 반격할 것이다. 이것은 나의 혼 안에 있는 옛사람은 매우 강하고 영 안에 있는 새사람은 아주 약하다는 것을 증명한다.
남편과 아내 두 사람이 늘 다툰다는 것은 이 두 사람의 혼이 모두 강하다는 것을 증명한다. 혼이 강하지 않으면 다툼이 일어나지 않는다. 두 사람의 영이 다 강하다면 다툴 일은 없을 것이다. 만일 나의 영이 강하다면 나의 혼은 십자가 위에 머물 것이고, 아내가 나에게 “당신의 태도는 옳지 않고 당신이 일하는 수준은 너무 낮아요.”라고 말한다 해도 나는 곧바로 “아멘, 할렐루야!”라고 말할 것이다. 우리의 영이 강하면 변론도 없고 다툼도 없다. 우리의 영이 일단 강하게 되면 우리 주님은 능력을 나타내실 뿐 아니라 우리 마음속에 거처를 정하실 것이다.
거처를 정하는 것은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인격의 문제이다. 당신이 한 지방에 거처를 정할 때 당신의 인격이 그곳에서 살며 그곳에서 안식하는 것이다. 오늘 주 예수님께서 당신 안에서 거처를 정하셨는가? 아마 그분은 겨우 당신의 거실에만 앉으실 수 있을 뿐 당신의 마음 안에는 거처를 정하시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상태도 그다지 나쁘지 않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 안에서는 주 예수님이 한쪽 구석에서 박해당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가 구원받은 그날 주 예수님은 그의 거실에 계셨지만 다음날 주님은 한쪽 구석으로 쫓겨나셨다. 주님은 박해를 받으시며 그곳에 갇혀 계신다. 그가 무엇을 구입하려고 할 때, 주 예수님은 그에게 “너는 그것을 사려고 하느냐?”라고 물어보신다. 그러면 그는 “주님 상관마세요.”라고 말한다. 결국 주 예수님은 더 이상 그에게 참견하실 수 없다. 이것은 거처를 정하는 것이 아니다. 거처를 정한다는 의미는 당신의 방마다 그리고 구석구석마다 주님께서 참견하시는 것이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그대로 당신도 그렇게 하고 주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그대로 당신도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강화되어 속사람에게 이른다면 그리스도는 우리의 마음속에 거처를 정하실 것이다. 마음은 우리의 생각을 포함하며 우리의 의지와 감정과 양심을 포함한다. 이 네 개의 기관을 합치면 ‘마음’이 된다 한자어는 그 모양이 상당히 의미 깊게 만들어졌다. 생각을 의미하는 중국어인 ‘심사(心思)’는 모두 마음 ‘심(心)’을 부수로 하고 있으며, 의지(意志)와 감정(感情)도 마음 ‘심(心)을 부수로 한다. 왜냐하면 이들 모두가 마음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 예수님께서 우리의 마음에 거처를 정하신다는 것은 주 예수님께서 우리의 생각 안에 거처를 정하시고, 우리의 의지에 거처를 정하시며, 우리의 감정 속에 거처를 정하시며, 우리의 양심에 거처를 정하시는 것이다. 이 말은 모든 일에 주님께서 왕이 되시게 하며 그분이 우리의 의지와 생각과 감정과 양심을 주관하시도록 한다는 의미이다.
동시에 주 예수님께서 일단 우리 속에 거처를 정하시면 우리는 그분의 인격을 누린다. 무엇을 가리켜 그분의 인격을 누린다고 하는 것인가? 이것은 말로 설명하기 어렵고 이해하기도 쉽지 않다. 예를 들어 말하자면, 어떤 자매가 있는데 그녀가 결혼하기 전에는 자신이 그녀의 인격이었다. 짠 것을 먹고 싶으면 짠 것을 먹고, 싱거운 것을 먹고 싶으면 싱거운 것을 먹으며, 단 것을 먹고 싶으면 단 것을 먹었다. 저녁에 그녀가 창문을 열고 싶으며 창문을 열고 또 창문을 닫고 싶으면 창문을 닫는다. 그리고 등을 켜 놓고 싶으면 등을 켜놓고 등을 끄고 싶으면 등을 끈다. 자매의 생활은 완전히 그녀 자신을 인격으로 하여 산다. 그러나 어느 날 그녀가 결혼을 했다. 기억해야 할 것은 자매가 어떤 형제와 결혼을 한다는 말은 그 사람을 인격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결혼식에 가보면 두 사람이 나란히 서 있지만 하나의 머리만 드러나 있고 다른 하나는 덮여져 있음을 볼 것이다. 점 더 심하게 말하자면 머리 하나는 없어지는 것이다. 그녀가 결혼하는 그날부터 그녀의 머리는 없어지는 것이다.(교회생활을 위해 그리스도를 인격으로 취함 18-21쪽)
복음과 목양 - 기도집회 추구내용
봉사할 때 훈련해야 할 세 가지 일
여러분은 이미 주님을 섬기고자 하는 마음을 가졌으므로, 여러분은 이 시점부터 세 가지를 훈련하기 바란다. 첫 번째는 집회를 훈련해야 한다. 집회에 오는 것을 훈련하는 것이 아니라 집회하는 것을 훈련하는 것이며, 집회 중에 있는 활동들을 훈련하는 것이다. 찬송하는 것을 배우고 성경 읽는 것과 말씀을 기도로 읽는 것, 간증하는 것, 간단하게 감상을 말하는 것, 서로 간에 교통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두 번째는 복음 전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이 복음 전파는 주님께서 요한복음 15장에서 말씀하신 열매를 맺는 것이다(2,16절). 한 가지 매우 놀라운 것은 네 권의 복음서 중에 마태복음의 마지막에서, 주 예수님은 “여러분은 가서, 모든 민족을 나의 제자로 삼아”(28:19)라고 말씀하셨고, 마가복음에서도 “온 세상에 가서 모든 창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십시오.”(16:15)라고 말씀하셨으며, 누가복음에서도 역시 죄들이 용서받을 수 있는 회개가 모든 민족에게 선포될 것이라고 (24:47) 말씀하셨지만, 요한복음에서는 이렇게 명령하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설마 요한복음에서는 주님께서 제자들이 복음을 전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다는 말인가? 그렇지 않다. 요한복음은 생명을 중요시했기 때문에 복음 전파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고 ‘생명의 번성’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요한복음은 우리가 포도나무의 가지라고 말하면서, 가서 열매를 맺으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15장의 열매 맺는 것이 바로 복음 전파이며 생명을 공급하는 것이다. 원래 그리스도의 생명은 포도나무의 생명으로서 당신 안에 있다. 당신이 이 생명을 친구에게 가져간다면 점차 그들도 포도나무의 일부분이 될 것이데, 이 일부분이 바로 포도나무의 열매이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열매 맺는 것을 훈련하여 항상 남아 있는 열매를 맺어야 한다.
만일 모든 형제자매들이 매주 두 시간의 시간을 따로 분별하여 복음 전파의 일을 하려한다면, 여러분이 함께 모였을 때 이 시간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를 알게 될 것이다. 어떤 시간은 친구에게 편지를 쓰는데 사용하고, 어떤 시간은 그들에게 전화를 하는데 사용할 수 있으며, 또 어떤 시간은 그들을 방문하거나 책자를 보내 주거나 그들을 초대하여 함께 음식을 먹을 수도 있고, 어떤 시간은 그들을 초대할 뿐 아니라 그들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을 초대하여 함께 식사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실행할 수 있는 것들은 너무나 많은데, 이것은 결국 여러분이 그들에게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는 것으로 귀결된다. 그러나 한 가지 절대 빠뜨려서는 안 되고 이 모든 실행들보다 더 중요하며 이 모든 것들 뒤에 반드시 있어야만 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은혜의 보좌 앞에서 그들의 이름을 거명하며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다.
세 번째로 훈련해야 할 것은 반드시 주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21장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그분의 어린양을 목양하는 것이다. 15장의 열매 맺는 것은 복음을 전하는 것이고, 21장은 어린양을 목양하는 것이다. 이것은 어린 성도들을 돌보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의 복음 전파에 대하여 말하자면, 그렇게 나쁜 상황이 아니다. 매년 천 명 이상이 침례를 받는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침례를 받은 후 그들에게는 목양이 결핍되어 있다. 우리에게는 요한복음 15장만 있고 21장은 없는 것 같다. 열매를 맺는 것만 있을 뿐 목양이 없는데, 이 때문에 지속적으로 남아 있는 어린양이 매우 적다. 지금부터 우리 모두는 복음을 전파하는 것을 배워야 하며, 어린양을 돌보는 것도 배워야 한다.
요한복음 21장 15절부터 17절까지는 “그들이 아침을 먹고 나자,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이여, 이 사람들보다 그대가 나를 더 사랑하십니까?’ 그가 예수님께 ‘주님, 그렇습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라고 하니,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어린양들을 먹이십시오.’ 예수님께서 다시 두 번째 그에게 말씀하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이여, 그대가 나를 사랑하십니까?’ 그가 예수님께 ‘주님, 그렇습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라고 하니,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양들을 목양하십시오.’ 예수님께서 세 번째 그에게 말씀하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이여, 그대가 나를 사랑하십니까?’ 예수님께서 세 번째로 ‘그대가 나를 사랑하십니까?’라고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며 예수님께 ‘주님, 주님께서 모든 것을 아십니다.’라고 하니,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양들을 먹이십시오.’이 세 구절의 성경에서 주님께서 세 차례에 걸쳐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은 각각 다르다. 첫 번째는 먹이라고 하셨고, 두 번째는 목양하라고 하셨으며, 세 번째는 다시 먹이라고 하셨다. 첫 번째는 어린양이라고 하셨고, 두 번째는 양이라고 하셨으며, 세 번째는 다시 양이라고 말씀하셨다. 어린양은 먹여야 하고, 양은 비교적 더 큰 양이므로 목양이 필요하며 먹이는 것도 필요하다.
목양과 먹이는 것은 약간 차이가 있다. 어머니들은 모두 알 것이다. 어린 아이가 아주 어릴 때에는 먹여 주기만 하면 된다. 점차로 아이가 자라 세 살, 다섯 살이 되면 아이에게 한 가지 한 가지를 일깨워 주어야 하며 약간의 교육도 시켜야 한다. 이것이 바로 목양이다. 어떤 형제자매들이 갓 구원받았을 때 성도들은 그들을 먹이기 시작한다. 무엇을 가지고 먹이는가? 성경의 말씀으로 먹이고 생명의 양식으로 먹이는 것이다. 그가 자랐을 때 당신은 이제 그를 목양해야 한다. 목양은 인도와 일깨워 주는 것과 가르침을 포함한다. 그러나 당신이 그를 인도하여 전진하려고 한다면 목양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주 예수님은 세 번째 말씀하실 때 “내 양들을 먹이십시오.”라고 말씀하셨다. 목양에는 먹이는 것도 포함된다. 이렇게 해야 그들을 정상적인 궤도 위에 올려놓을 수 있다.(교회생활을 위해 그리스도를 인격으로 취함 194-198쪽)
교회 소식
몽골 울란바토르에서 온 소식
주 안에서 성도들에게 문안드립니다. 작년 겨울과 올해 전반기에 우리는 수도 울란바토르와 주요 3개 도시에서 매주 복음 전파를 통해 총 110여명이 침례를 받았습니다. 이들 중 20여명은 남아 있는 열매로 주 안에서 자라고 있습니다.
올해 초에 출판하기로 한 찬송가 작업이 지연되어 6월 혹은 7월에 450여 곡으로 된 찬송가를 발행하려고 합니다. 현재 로마서 라이프 스타디가 번역 중에 있고, 번역이 완료된 생명의 체험, 마태복음과 요한복음 라이프 스타디는 교정 작업을 거쳐 올해 안에 출판될 예정입니다.
현재 이곳 성도들은 매주 토요일 오후에 1년 7차 절기의 비디오 집회를 하고 있으며, 매일 번역된 회복역 성경 한권 한권을 누리고 있는데, 지금까지 요한복음, 마태복음을 마치고 현재 로마서 회복역을 번역하여 누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2년 안에 전 신약 회복역을 번역하면서 추구하고자 합니다. 작년 말에 중국에서 3 커플의 전시간 봉사자들이 더해져서 매주 이곳 성도들과 함께 복음 전파와 목양이 강화되었습니다. 그들은 현재 몽골어로 기도하며 신언을 훈련하고 있습니다. 지난 주부터 울란바토르에는 4개 지역으로 나뉘어 주중 집회를 갖고 있습니다. 평균 30여명의 성도들이 있기 때문에 심방과 목양을 더 강화해야 할 큰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번 여름 3개의 지방(동부 초이발상, 중부 바잉홍고르, 서부 호브드)에 두 달 동안 복음전파와 목양을 위해 중국에서 온 전시간 가정과 몽골 청년 학생 봉사자들을 보낼 계획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고, 그분의 간증을 강화시키시도록 형제자매님들의 기도와 간구를 부탁드리며, 우리 사랑하는 주님의 은혜가 한국에 계신, 주님을 변함없이 사랑하는 모든 성도들께 항상 넘치시길 기도합니다. 아멘 (울란바토르 교회 S형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