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기장의 손 아래서..
성도의간증
Antipas 2011-06-29 , 조회 (773) , 추천 (0) , 스크랩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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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기장이의 손 아래서

신부가 되길 원했던 섬 소년

 

나의 고향은 목포에서 배를 타고 서.남쪽으로 가다 보면 망망대해에 떠 있는 작은 섬인 흑산도입니다. 나는 대흑산도의 사리라는 마을에서 7남매 중에 장남으로 태어나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는 천주교 제단인 흑산 성모 중학교를 다녔습니다. .내가 다섯 살 때 어머니는 천주교 신자가 되셨고 저와 동생들 또한 어머니를 따라 천주교를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어렸을 때 주일학교 교사에게서 동정녀 마리아의 얘기를 듣고 깊은 인상을 받아 나중에 커서 신부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나는 고등학교와 대학시절에도 천주교에 다니면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대학 2학년 때 내가 가졌던 한 가지 의문은 왜,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가?라는 것이었습니다. 교육대학을 졸업하고 발령 대기 중에 상경하여 미아리에서 작은 학원을 경영하는 친구를 도와 학원 강사로 있었습니다. 3개월 후에는 학원생들이 늘어나 수입이 꽤 좋았습니다. 친구와 어울려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면서도 깊은 속에서는 주님을 등지고 사는 타락한 생활 때문에 괴로워하면서 늘 천주교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눈물로 기도하며 복음을 전한 총각 집사

 그러던 중 1975년도 초여름 순복음교회의 한 총각 집사가 월요일 아침만 되면 학원에 찾아와 예수를 믿으라고 전도하였습니다. 내 친구는 장로교의 배경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쉽게 순복음교회로 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천주교 배경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개신교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집사가 몇 번의 방문한 후에야 나는 그 사람과 대화를 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그 집사에게 당신은 지금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고 하는데, 나는 어려서부터 천주교 생활을 했지만 한번도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느껴본 적이 없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지금 내 손 위에 하나님을 내보여 주십시오. 그러면 내가 믿겠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그분은 하나님은 볼 수는 없지만 살아 계십니다고 대답하자 즉시 나는  볼 수 없는 하나님을 어떻게 믿습니까?라고 따지며 그를 쫓아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다음 주에 그는 또 찾아왔고 나는 그를 외면했습니다. 그는 무릎을 꿇고 주님께 나를 구원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 다음 주에 또 찾아온 그를 다시 돌려보냈습니다. 매주 찾아오는 그를 보면서 하나님이 살아 계신가?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자신과 상관도 없는 사람을 위해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는 사람에 대해 궁금하게 생각하였습니다. 그를 보면서 양심에 찔려서 그 다음 주에는 친구와 함께 미아리 순복음교회에 갔습니다.

 

하지만 처음 본 순복음교회에 대한 인상은 매우 큰 충격 이었습니다. 방석을 깔고 앉아 찬송을 한다던지 춤 추며 율동을 하는 것을 보면서, 경건한 천주교의 예배 방식과 너무 달라서  이단이라 생각하면서 예배당을 나왔습니다. 그리고 2주 동안 나가지 않자 그 집사가 또 찾아왔습니다. 할 수 없이 3주 만에 다시 순복음교회 예배당에 갔습니다.그 날 나는 맨 뒷자리에 앉아 끝나기를 기다렸는데 축도가 끝날 무렵 닫혔던 문이  열리듯 마음이 확 열리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예배당을 나올 때는 세상이 달라 보였습니다. 그 다음 주부터는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예배당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죄사함에 대한 확신

  1975년 10월 다른 교파의 한 목사님을 초대하여 복음집회를 했는데 설교가 아주 달콤했습니다. 그 목사님은 히브리서 9장12절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심에 관해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 때 나는 예수님의 피로 죄 사함을 받았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였습니다. 그날 후 내안에 기도해야겠다는 느낌이 들어서 학원 수업이 끝난 후 밤11시가 넘어 예배당에 올라가 강대상 앞에 꿇어 앉았으나 어떻게 기도 할 줄 몰라 다만 주님,주님이라고만 하면서 일주일 쯤 지났을 때 주님께서 나를 찾아와 내가 어떤 사람인지와 어려서부터 그 때까지 지은 나의  온갖 죄들을  주마 등처럼 비추어 낱낱이보게 하셨고 그날 밤 나는 펑펑 흐느껴 울면서 죄들을 하나하나 자백하였습니다. 다음날 아침 세상은 새로워 졌고 풀 한포기 돌조각 하나가 사랑 스럽게 여겨 졌습니다.그리고 새벽 집회에 참석하며 기도하는 생활을 계속하였습니다.

 1976년 9월에 용산에 계신 집안 아저씨를 만나 뵙고 돌아오는 길에 서울교회에 다니는 집안 형님과 대화를 하며 성령에 대해 교통하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나는 주님에 대해 뜨거웠지만 성령을 받는 것을 외적인 은사(방언과신유등)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성령을 한 인격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형님과의 대화가 별로 통하지 않았습니다.

하늘이 열리고

  그러나 형님을 통해 미아리 길음 시장에 서울 교회 집회소가 있다는 것을 알았고,성령은 주 예수님 자신으로 누구든지 그 이름을 부르기만 하면 즉시 우리 안으로 들어 온다고 말씀 하시면서 집에 돌아가 한번 불러 보라고 당부하셨습니다. 몇주가 지난 후 오후 휴식 시간에 나는 창문을 열고 담배 연기를 내 뿜으며 하늘을 쳐다보았습니다. 전형적인 푸른 가을 하늘에 뭉게 구름이 떠 있었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형님이 가르쳐 준대로 오, 주 예수여!라고 불렀습니다. 속이 시원해지면서 가슴이 뻥 뚫리며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그때 나는 주님의 임재를 느꼈습니다. 즉시 형님이 말한 서울교회를 가 봐야겠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 당시 나는 순복음교회에서 몇 가지 직책을 맡고 있었으므로 주일 낮을 피해 수요일 밤 형님이 알려준 길음시장 근처에 있는 서울 교회 집회소를 찾았습니다. 집회소에는 30여 명의 형제 자매님들이 모여서  행복한 백성이라는 찬송을 부르고 있었는데, 나는 그 순간 그들의 모습이 천사들 같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한 형제님이 마태복음 16장에서 주님께서 종교적인 예루살렘을 떠나 가이사랴 빌립보에 가셔서 제자들에게 그분 자신을 계시하시는 방면을 교통했고  다른 형제님이 강화하는 교통을 했습니다. 그 교통을 듣고 나는 신선한 충격을 받았으며 그날 밤 나는 너무 기뻐서 잠못 이루며 뒤척 거렸습니다.그러자 친구가 어디에 갔다 왔느냐고 물어서 상세하게 답변해 주었습니다. 친구는 좋은 곳에 왜 혼자 다녀 왔느냐면서 다음에 같이 가자고 했습니다. 3-4주 후 수요일 저녁에 친구와 같이 집회에 가서 나는 주님을 접촉하고 너무 기뻐했지만, 친구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나는 한 동안 순복음교회 머물러 있었고, 그곳에서 열심히 기도하던 청년에게 내가 주님을 어떻게 깊이 추구할 수 있는지에 관해 질문을 하자 그 청년은 워치만 니의 <혼의 잠재력>을 소개해 주었습니다. 나는 즉시 광화문에 있는 생명의 말씀사에 가서 <혼의 잠재력>을 사서 읽고 얼마 후에는 <주의 형상을 닮아>를 읽은 다음 그 말씀에 사로 잡혔습니다.그 책들을 읽고 난 후 목사님의 설교가 들리지 않았습니다. 목사님은 설교 때 워치만 니 형제님의 말씀을 곧잘 인용 하는 분으로 가끔 나를 데리고 심방을 다녔습니다. 한 번은 버스 정류소에서 나에게 우리가 다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서로 형제라 부르는 것이 옳아요.라고 하면서 나에게 조 형제!라고 불러 주었습니다. 그리고 나에게 조 형제는 신학을 해서 주님을 섬기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라고 하면서 신학은 장로교 신학을 하라고 조언해 주었습니다.

 

진도로 발령이 남

 순복음 교회에서는 나를 일꾼으로 여겨 서울로 교사 발령이 날 수 있도록, 그리고 신학교를 가도록 많이 기도했지만, 1977년도 5월에 나는 전남 진도로 발령이 났습니다.

 발령장을 받으러 전남 도 교육청에 가는 길목에 광주 순복음교회와 광주 교회 집회소가 있었는데, 인생의 갈림길에서 나의 발은 광주 교회 집회소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광주 교회 형제님이 나에게 완도에 한 형제님도 교사로 근무하고 있는데 교통이 불편하여 매주 올 수 없어서 방학 때에 올라와 교회 생활을 하고 있다고 알려 주었습니다. 도 교육청에 가서 발령장을 받고 임지에 내려가 부임 인사를 한 후 서울에 올라가 짐을 정리하고 오겠다고 말하고 3-4일 휴가를 얻었습니다. 밤 열차를 타고 새벽에 서울역에 도착하여 미아리를 가려고 버스를 기다리던 중에 피곤하여 그랜드 호텔 앞 벽에 기대어 기다리다 졸고 있었는데, 속에서 어서 피하라.라는 느낌이 들어 자리를 뜨자 곧 바로 내가 서 있던 자리에 5층 공사장에서 대형 페인트통이 떨어졌습니다. 나는 주님께서 나를 지켜주고 계심을 느꼈습니다. 나에게는 이런 비슷한 체험이 여러 번 있었는데, 그것은 아마 내가 도마와 같이 보여 주지 않으면 믿지 못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진도에 내려가 근무를 하면서 장로교회에서 열심히 기도하며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진도에서 직장 생활과 신앙 생활을 열심히 하던 중, 군대에서 불의의 사고로 하반신 마비가 되어 고향에 돌아와 생활하고 있는 형제회 출신의 한 형제를 만났는데, 그는 나에게 형제님도 곧 있으면 목마를 것입니다.라고 하며 같이 추구하자고 했습니다. 나는 건성으로 대답했었는데 한달 쯤 지나니 정말 목마름을 느꼈습니다.

광주에서의 교회 생활

  1977년 6월 광주 교회를 방문했을 때 여름 방학 초에 대전에서 전국 특별 집회가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나는 그 특별 집회에서 에베소서 1장 10절에 나오는 하늘들에 있는 것들이나 땅에 있는 것들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머리이신 그리스도 아래 통일됨에 관한 말씀을 듣고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시골 학교로 돌아와 저수지를 거닐며 기도하고 찬송하며 그리스도의 머리 아래 통일됨이라는 말씀을 되새김질 했습니다. 나는 그 잘 몰랐지만 말씀 자체에 매료되었습니다. 계속 기도 생활을 계속하면서 말씀이 열리고 말씀이 꿀보다 더 달다는 것을 체험하였습니다.

  그런데 나는 기묘하게도 영적으로 뜨겁고 눈물로 철야를 하는 중에도, 더러운 생각에 사로잡히기도 하는 형편없는 자신을 보게 되었습니다. 한 형제님께서 악한 생각이 들 때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을 선포하라고 교통하신 것이 생각이 나서 악한 자 사탄아, 나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 나는 끝났다.라고 항상 선포하였습니다. 3개월쯤 그런 실행을 지속 했을 때 속에서부터 해방되었다는 느낌을 받았고 말씀이 살아 역사한다는 것을 체험하였습니다.

 

  그 때 이후로 매주 토요일 수업이 끝나면 6-7시간 버스를 타고 광주에 올라가 교회생활을 하였습니다. 주님의 축복으로 발령받은 첫 해에 가족들 모두 구원을 받고 교회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들의 성격

  1978년초 나는 <워치만 니의 간증>과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들의 성격>이라는 책을 읽으면서 나라는 사람이 비 정상적인 종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책에서 나는 주님을 섬기는 사람은 사람을 사랑하고 근면하며 견고한 사람이어야 한다.라는 내용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사람을 사랑하지 못했고, 게으르며, 요동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런 미덕이 부족하면 주님을 섬길 수 없다는 글을 읽고서 나는 자신이 자격이 없는 사람임을 보았지만 주님의 긍휼을 구하라는 말씀을 붙들고 매일 주님 앞에 나아갔습니다.

  그 후 주님의 주권으로11년 동안 학교에서는 나에게 많은 일을 맡겼습니다. 나는 그 일들을 처리 해야 했고 또한 교회생활에서 봉사를 하면서 근면한 성격을 훈련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해마다 바뀌는 어린이들과 교회 안의 성도들을 돌보며 어떻게 사람을 사랑 하는지에 대한 공과를 배우게 하셨습니다. 한동안 나는 너무 많은 일 때문에 눌리고 있었는데 대만에서 오신 한 형제님께서 일을 두려워 마십시요. 당신이란 사람이 없으면 그 일이 당신 앞에 있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당신 앞에 그 일을 두심은 당신으로 그 일을 처리 할 역량을 얻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다만 주께 나아가서 지혜를 구하십시오는 말씀을 해 주셔서 그 말씀을 붙잡고 일을 처리 하면서부터 학생들을 돌보고 교회를 돌보면서 사람을 품는 마음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교육청에서는 교사가 환경이 좋지 않은 곳에서 근무를 하게 되면 가산점을 주었습니다.  나는 흑산도에 가서 승진을 위한 좋은 발판을 마련 할 것인가, 아니면 광주 인근에 가서 교회생활을 할 것인지에 대해 고민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한 형제님에게서 교회생활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라는 말을 듣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한 학기쯤 기도를 하고 나서 광주 인근으로 옮겨지게 될 것이라는 느낌이 들어서 나는 매주 토요일 광주에 갈 때마다 짐을 하나씩 옮기기 시작하여 방학하는 마지막 날에는 작은 짐만 남기고 다 옮겨 놓았습니다.

  주님의 주권으로 도 교육청에 계신 집안 어르신에게서 2학기 발령에 관한 공문 마감일이 내일이라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날 바로 진도에 내려가서 공문을 확인하고 교장 선생님에게 부탁하여 공문을 작성한 후, 겨우 마감 직전에 서류를 접수하였습니다. 그 당시에 내가 근무하던 곳에 2년 밖에 안 된 사람이 광주나 그 인근으로 발령이 나는 것은 꿈에도 생각 못할 일이었습니다. 변두리에서 5년 정도 근무해야 겨우 발령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1979년 8월 나는 광주 근처인 화순으로 발령이 났고, 광주에서 출퇴근을 하였습니다. 매일 새벽 집회를 마치고 학교에 출근하여 근무하고, 퇴근 후에는 자매와 함께 자전거를 타고 심방을 하며 광주에서 교회생활을 누렸습니다.

나는 화순에 있는 한 초등학교에서 연구학교 운영 실무를 맡아 인정을 받고 상도 받았는데 씁쓸하고 공허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학교 앞으로 흐르는 시냇가에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곤 했습니다. 그때부터 월급을 받을 때마다 내 자신이 매우 처량하게 느껴졌습니다. 

직장을 내려놓고 전시간으로 섬김

  그 후 1987년에 화순읍으로 발령을 받아 1년간 근무한 후, 나는 마음이 무거워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자매와 어머니, 그리고 형제님들과의 교통을 통해 1988년부터 전시간으로 주님과 교회를 섬기기 시작했습니다.

 처음 3개월 동안 지체들을 심방하고 나자 동역하던 형제님과 동일하게 캠퍼스 사역을 해야 한다는 느낌을 가졌습니다. 3월부터 전남대에 갔는데 80년대 당시의 학생들은 공허함과 회의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인생의 비밀을 전하였습니다. 그때부터 3~ 4명이 모여서 청년들을 얻기 위해 계속 기도하였고, 동일한 때에 구원파 계통의 청년들이 자신들을 인도할 인도자를 보내 달라고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해 11월 위트니스 리 형제님의 특별 집회가 인터콘티넨탈 호텔에서 있었는데 그들 중 한 명이 대표로 그 집회를 참석하여 주님의 회복에 연결 된 후부터, 겨울방학 때 집회소에서 20명으로 시작하여 진리공과로 진리를 추구하고, 함께 영을 접촉하도록 주님의 이름을 부르고, 기도하고 죄를 자백하며, 말씀을 먹고 선포하게 도와 주님을 사랑하게 하고 진리를 추구하고 생명의 길을 갈 수 있게 하였습니다. 학생들이 날마다 친구들을 데려와 40일쯤 지나자 인수가 70-80명이 되어 집회소에 가득했습니다.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다는 느낌이 들 때까지 주님께서 청년들을 보내 주셨습니다. 그때 제가 배운 공과는 주님께서 일하실 때 충성을 다해야 하며 주님이 멈추시면 나도 멈춰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멈추셨는데 내가 일한다면 그것은 주제넘은 죄이기 때문입니다. 그때의 주님의 축복을 생각하면 지금도 내 안에는 깊은 감사가 있습니다.

부산에서의 교회생활

  1989년 여름 훈련 집회 후 미국의 몇몇 도시를 거쳐 귀국하던 길에 오스틴에서 새벽에 비행기를 탔었는데 록키산맥 근처에서 비행기가 난기류를 만나 크게 출렁거렸습니다. 그때 충격을 받아 속이 좋지 않았습니다. 잠시 LA공항에서 쉴 때는 진정이 되었지만 일본 토쿄까지 오는 동안 계속 속이 울렁거리고 너무 거북해 무척 힘들었습니다. 공항에 도착하여 두 시간가량 계류 중일 때 꼼짝도 못한 채 의자에 기대어 쉬고 있는데, 이러다 죽는 것은 아닌가?는 느낌이 들 정도로 힘들었습니다. 그 때 한 형제님이 힘들어서 의자에 누워 있는 나를 보고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많지만 회복을 위해서 순교할 사람은 얼마나 되겠습니까? 조 형제님, 회복을 위하는 사람은 많지만 순교의 길을 가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라고 말씀하시며 격려하셨습니다. 그 말씀은 나를 새롭게 전진하도록 격려했습니다. 미국에서 돌아와 얼마 지나지 않아 부산으로 이주하는 것에 대한 교통이 있었습니다. 광주에서는 자매가 일을 해서 내가 전시간으로 봉사해도 생활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기 때문에 광주를 떠나 낯선 부산에서 전시간 봉사를 할 엄두가 나지 않았지만, 비행기에서 주님의 다루심을 체험했기 때문에 나는 형제님들의 교통에 아멘하여 1989년 7월 부산으로 이주했습니다.

  나는 부산 교회에서 20년이 넘도록 생활을 해 오면서 주님의 신실하심을 체험하였습니다. 주님은 내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축복해 주셨습니다. 최근 젊은 형제님들과 함께 일하면서, 나는 과거의 체험들 때문에 일들을 내려놓거나 할 수 있는 일들을 젊은 형제들에게 내어 맡기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일들도 주님 자신과는 비교 할 수 없기에 나는 다만 주님을 얻기 위해 앞장서서 달릴 필요가 있다고 느낍니다. 새로운 부흥을 가져오기 위하여 신성한 계시를 따라 목양을 실행하는 하나님-사람의 생활을 살아 냄으로써 몸을 위해 새롭게 자신을 헌신하려고 합니다. 위트니스 리 형제님이 대만에 계셨던 1985년 1월에 나는 일주일 동안 대만을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거기서 동역자들이 한마음 한뜻이 되어 일사분란하게 주님을 섬기고 몸을 위해 봉사하는 것을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1990년 봄 학기 애너하임 전시간 훈련 기간 중에 그곳에서 동역자들의 아름다운 동역을 보았습니다. 대만과 미국의 동역자들의 이러한 본을 따라 나도 주님께서 주위에 안배해 주신 형제님들과 조화 가운데 동역하여 주님의 다시 오심을 재촉하는데 자신을 드리려 합니다. 한국에서 교회 생활의 초창기에 금식을 장려하지 않았지만, 나는 이상하게도 연말연시가 되면 금식하고픈 부담에 사로잡혀 금식을 하곤 했습니다. 주님은 그때마다 십자가와 생명의 노선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주관적으로 십자가의 빛을 받아들여 자신을 끝냄으로 변명하거나 싸우지 않고 시간이 주님을 위해 역사하여 모든 것을 해결하도록 주님께 맡기는 것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내가 주님의 회복 안에서 보게 된 것은 우리가 진리 안에서 문제가 없다면 작은 일 때문에 나누어지거나 분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나는 일을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 형제들과 하나 되는 것이 중요하며 몸의 하나를 지키는 것이 축복의 비결임을 배우고 있습니다.

 간증인 : 조일남

 

 

 

 

토기장, 조일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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