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땅으로 예표되신
모든 것을 포함하신 그리스도를 체험하고 누림
메시지 1(상)
시내와 샘과 원천의 땅
훈련은 우리가 어떤 일을 할 때 타고난 방식으로 하지 않는 것을 배우도록 돕는 좋은 길이다. 우리에게는 타고난 인간 생명이 있다. 그래서 이 생명으로 모든 일을 타고난 방식으로 행한다. 그러나 교회생활 안에서, 또 어떤 봉사 안에서 결코 우리의 타고난 방식으로 섬겨서는 안 된다. 어떻게 타고난 방식으로 하지 않는 법을 배울 수 있는가? 우리는 훈련이 필요하다. 훈련은 항상 우리의 타고난 존재를 만진다. 예를 들어, 골프를 배우고자 한다고 하자. 그런데 한 번도 쳐본 일이 없다. 골프 클럽을 가지고 골프채 가운데를 붙잡고 공을 치려고 한번 해 보라. 아마 그것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골프를 치는 법을 아는 사람은 “그런 식으로 골프채를 잡으면 안 됩니다.”라고 말할 것이다. 서 있는 방식도 옳아야 한다고 말할 것이다. 또 골프채를 잡는 법을 가르쳐 줄 것이다. 그것이 훈련이다. 그것은 골프에 관한 책을 읽는 것과는 다르다. 이것은 우리가 경기하는 방식으로 훈련을 받는 것이다. 내가 만약 한국어를 배우기로 결심했다고 가정해 보자. 어떤 형제에게 “나에게 한국어를 가르쳐 주십시오”라고 부탁한다고 해보자. 그 형제는 몇 마디를 해줄 것이다. “감사합니다.”이렇게 가르쳐 줄 것이다. 나는 “감사합니다.”이런 정도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항상 훈련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결코 한국어를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매우 감각이 예민한 사람이 있다. 그래서 그 사람에게 한국어를 말하는 것을 교정해주면, 마음을 상하는 그런 사람이 있다. 아마 어떤 자매는 그 소리를 듣고 울지도 모른다. “어떤 남자분이 저를 때리려고 했습니다.”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이것이 훈련이기 때문에 또한 주님의 영이 우리를 훈련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의 존재의 어느 부분을 만지시는 것을 기대해야 한다. 그것은 참된 축복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 앞에서 먼저 이것을 깨닫고 주님께서 우리의 교사시요, 우리의 주이심을 시인해야 한다. 우리는 배우는 이들이다. 그러므로 기꺼이 주님께 만져지기를 원해야 한다. 베드로도 훈련받을 필요가 없었겠는가? 베드로는 아버지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계시를 받았다. 또한 하늘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음성도 들었다. 그러나 그 얼마 되지 않아서 어떤 사람들이 와서 베드로에게 질문을 했다. “그대의 선생님은 성전세를 내지 않습니까?”라고 물었다. “내십니다.”이렇게 대답했다. 그때 주님께서 다시 베드로를 훈련시키기 시작했다. “시몬이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 땅의 왕들이 누구에게 관세나 인두세를 받습니까? 자기 아들들입니까, 남들에게서입니까?” 베드로는 말하기를 “남들에게서입니다.” 그럴 때 주님이 말씀하셨다. “그러면 아들들은 면제됩니다.”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아들이다. 나는 자유롭다. 나는 세를 바칠 필요가 없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렇게 마음 상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므로 너는 먼저 낚시를 하러가서 먼저 잡는 고기 입속에 동전이 들어 있을 것이다. 그 동전을 가져다가 너와 나를 위해 내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이 어떠한 훈련인지 보았는가? 주님은 다만 베드로에게 가르치실 수만 없었다. 베드로에게 “베드로야, 이 계시를 기억하라”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시고, “산에서 본 계시가 무엇인지를 기억해라.”이렇게 하지 않으시고, “내가 아들이기 때문에 나는 세를 낼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베드로야, 너는 대답을 잘못 했다.”그것은 가르침에 속한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교정이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를 낚시하러 보내셨을 때에는 그가 첫 고기를 잡을 때까지 얼마나 기다렸을지 아무도 모른다. 그것은 훈련이었다. 우리 모두에게 이와 같은 훈련이 필요하다. 우리가 주님을 섬길 때 우리 모두에게는 훈련이 필요하다.
마태복음 25장에 따르면 주님과 우리와의 관계에는 몇 가지 주된 방면이 있다. 첫 번째, 우리는 주님을 사랑하는 처녀들이다. 우리는 마리아와 같이 그분의 발 앞에 앉아서 그분의 말씀을 듣는다. 또한 우리는 그분을 섬기는 노예의 신분을 가지고 있다. 주님을 섬기는 마르다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이 점에 있어서 우리에게는 선택이 없다. 하나님은 주님과 우리의 관계를 이미 결정지어 놓으셨다. 주님께서 보배로운 피로 우리를 구속하셨을 때 그분은 우리를 이미 소유하셨다.
우리는 그분의 노예이다. 바울은 이것을 완전히 인식했다. 노예의 방면은 우리의 봉사를 위한 것이다. 우리 대부분 그의 봉사는 교회 안에서 이루어진다. 이것은 우주적인 교회의 방면이 아니라 지방교회의 방면에서 언급하는 것이다. 지방교회 안에서 모든 일은 매우 실재적인 것들이다. 심지어 대부분의 일들은 물질적인 영역의 일들이다. 이 모든 물질적이고 실재적인 일들은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이다. 우리는 모든 실재적인 것들을 배제하고 모임을 가질 수 없다. 이러한 것들이 없다면 합당한 교회생활을 가질 수 없다. 그런데 이 요점에서 인상을 받아야 할 한 가지 중요한 항목이 있다. 하나님의 목적에 있어서 지방교회는 목적이 아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하는 것이다.
지방교회는 필요한 절차라고 할 수 있다. 지방교회 안에서 우리에게는 실재적인 봉사가 있다. 대다수는 물질적인 봉사이다. 예를 들어서, 어린아이를 돌보는 봉사는 실재적이고도 물질적인 영역 안에서 이루어지는 봉사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러한 모든 것들로 섬기겠지만, 이 봉사 안에 봉사의 본질이 빠질 수 있다. 예를 들어, 두 자매님이 유리창을 닦는 봉사를 한다고 가정해 보자. 그들이 하는 것은 유리창을 닦는 일이다. 그 일을 모두 마치면 그냥 집으로 간다. 예를 들어, 다른 두 자매님이 동일한 일을 하기 위해 유리창을 닦기 위해 왔다고 생각해 보자. 외적으로 볼 때 동일한 일을 하고 있지만, 이 자매님들은 매일 그리스도를 체험하고 누리는 분들이다. 그 결과 그분들이 함께 섬기기 위해 모였을 때, 또한 그들이 섬기는 과정 중에 함께 그리스도를 누린다. 그들이 아마 찬송을 부를 수도 있고, 기도를 함께 할 수도 있고, 또한 교통을 나눌 수도 있다. 그들은 모두가 그리스도를 극도로 누리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 모든 실재적인 봉사들이 이 목적을 위해 이루어지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어떤 방식으로 유리창을 닦겠는가? 혹은 카펫에 진공청소기로 청소할 때 어떤 방식으로 하겠는가? 피아노를 치는 봉사, 의자를 놓는 봉사, 애찬을 준비하는 봉사 또한 마찬가지이다. 여러분에게 선택이 놓여있다.
북미주에 어떤 한 지방에 아주 귀한 한 부부가 있다. 그 남편은 적어도 공식적으로 장로직분 안에 있는 형제이다. 또한 그 아내는 봉사에 있어서 매우 신실하고 활동적인 자매님이다. 그분들은 모두 약 70세 정도 되셨다. 아마 적어도 두 분 모두 43년 이상 교회생활을 하셨을 것이다. 그런데 이 자매님의 봉사는 완전히 타고난 것이다. 그 자매님은 다른 자매님을 결코 참아내지 못한다. 그리고 그들과 동역하지도 못하고, 다른 자매들에게 자기가 일을 혼자 하도록 내버려 두라고 말을 한다. 그리스도 없이 40여년을 섬겨오셨다. 이러한 봉사는 종교적인 단체에서의 봉사와 다르지 않다. 세상에서의 봉사와 동일한 것이다. 이 자매님에게 주님께서 긍휼을 주시기 바란다. 나는 그 자매님을 크게 염려하고 있다. 하나님의 목표가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하는 것이기 때문에, 또한 그리스도의 몸이 우리가 그리스도의 풍성을 누리는 것을 통해 건축되기 때문에, 우리가 실재적인 봉사를 행할 때마다 우리의 존재의 본질이 되는 그리스도를 가지고 섬겨야 하는 것이다. 나는 이렇게 섬기는 많은 자매들을 알고 있다. 그들은 매우 실재적인 일, 아주 중요한 섬세한 일들 가운데 그리스도를 분배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청소년처럼 그렇게 날아다니는 분들은 아니다. 그들은 예수님 안에서 인간적인 분들이다. 그들의 실지적이고 물질적인 봉사는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분배하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예를 들어, 한 자매님이 점심식사를 준비한다고 하자. 그러한 과정 중에 자매님은 주님과 함께 그 일을 한다. 그럴 때 봉사 안에서 자매님은 주님과 함께 섬기시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의 실재적이고 물질적인 봉사는 의미가 없는 것이다. 왜 사람들을 고용해서 유리창을 닦게 하지 않는가? 우리는 사람들을 고용해서 청소하게 하면 된다. 또한 다른 가정부를 고용해서 아이들을 돌보게 하면 된다. 그러나 우리의 방식은 그런 일이 아니다. 우리는 노예로서 섬겨야만 한다. 그러나 우리는 무엇으로 섬기고 있는가? 어떤 형제님들은 함께 책임을 지는 형제들로서 동역하기 위해 모였다. 그런데 모일 때 육체 안에 모인다. 사실 육체 안에 그냥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항상 불협화음을 일으키고, 모든 사람에게 고통을 준다. 그들은 모일 때 그리스도 없이 모인다. 마치 육체 안에 있는 사람들과 같다. 부도덕하다는 그런 뜻에서 하는 말이 아니다. 다만 육체 안에서 머무는 것이다. 육체 안에서 생각하고, 사고하고, 다른 사람이 자기의 말에 동의하지 않으면 화를 낸다. 이것은 엄중한 문제이다. 사실 이러한 상황에서 화를 낸 형제님은 집에 가서 그냥 머무는 것이 낫다. 그러나 교회는 하나님의 가족이기 때문에 ‘집에 가서 머물라’ 이렇게 말을 할 수 없다. ‘아, 자매님, 그냥 집에 가시죠.’ 이런 말을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함께 가정 안에 교회생활을 하고 있다. 우리의 봉사의 특징이 무엇이었는지는 오직 주님만이 알고 계신다. 우리는 이제까지 우리의 실제적인 봉사가 다른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분배하는 기회라는 생각을 해보았는가? 주님께서는 “내가 너의 발을 씻기겠다고 말씀하셨다. 이와 마찬가지로 너희들도 서로의 발을 씻겨주십시오.”라고 말했다. 나는 여기서 발을 씻는 것의 영적인 의미를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서로를 신선하게 해야 한다. 서로를 돌봐주어야 한다. 서로를 목양해야 한다. 서로를 격려해주어야 한다. 서로를 강화시켜 주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모든 요소가 되는 그리스도를 가지고 섬기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봉사의 본질이다.
우리 가운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예표인 좋은 땅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을 갖고 있을 것이다. 나의 부담은 그 사역의 말씀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체험과 누림에 있다. 서로에게 그리스도를 분배하기 위해 체험하고 누리는 것이다. 다만 영적인 존재가 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체험하고 누린 그리스도가 우리를 봉사 안으로 인도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36년 전, 1974년 봄에 있었던 일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나의 막내아들이 아직 유아로서 애나하임 교회에서 생활하고 있을 때였다. 집회가 끝난 후에 그 아이를 데리러 갔다.
그 때 얼굴이 환하게 밝고 기뻐하는 한 자매님이 막내아들을 데리고 오셨다. 나는 지금도 그 자매님의 얼굴에 있던 은혜를 기억하고 있다. 그 자매님이 가졌던 그 기쁨의 얼굴을 바라볼 수 있었다. 그 자매님은 위트리스 리 형제님의 자매님이었다. 아마 오늘날 가장 체험 있고 가장 영적인 주님 앞에서의 한 자매님이실 것이다. 그런데 이 자매님이 어린아이를 섬기고 있었다. 그래서 이 젊은 아버지들에게 그리스도를 분배하고 계셨다. 주님께서 그것을 기억하실 것이다. 아마 주님은 우리가 아이를 위해 갈아주는 기저귀는 기억하지 않을지 몰라도, 아이들에게 몇 병의 우유를 주었는지 주님이 기억하지 않으실지 몰라도, 적어도 이러한 것들을 기억하실 것이다. 우리가 그러한 일을 하면서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분배한 것을 주님은 기억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분배하기 위해서 우리는 모든 것을 포함하신 그리스도를 체험해야 한다. 또한 모든 것을 포함하신 그리스도를 누려야 한다.
우리는 우리 하나님이 삼일(아버지, 아들, 영)이신 것을 알고 있다. 이 셋은 동시에 존재하며 상호 내주하신다. 아버지는 감추어 계신 분이시오, 아들은 하나님의 나타나심 곧 하나님의 표현이시다. 또한 아들은 이 땅에서 하나님의 사역을 수행하는 분이시다. 이제 그분은 하늘에서의 사역을 수행하고 계신다. 그런데 이 영은 우리의 체험을 위한 것이다. 그리스도에 대한 모든 체험은 사실 그 영에 대한 체험이다. 이 영은 바로 삼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적용되신 것이다. 우리는 그 가나안 땅의 예표를 알고 있을 것이다. ‘아, 여기에 좋은 땅이 있다. 이것
은 밀의 땅이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다. 보리의 땅이다. 역시 그리스도다. 이러한 무화과와 포도의 땅이다. 모두 그리스도다. 그리스도는 모든 것을 포함한 분이시다. 오, 얼마나 놀라운 그리스도가 계시는가?’그러나 이러한 모든 것들은 여전히 객관적인 항목들이다. 우리 존재의 일부가 되지 못했다. 마치 식탁 위에 놓인 음식과도 같다. 이 영, 모든 것을 포함하신 영이 그리스도를 우리의 체험이 되시게 하는 것이다. 갈라디아서 3:13~14절의 그 영에 관한 각주가 있다. 그것은 아브라함의 복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이방인들에게 이르게 하고, 그 약속하신 그 영을 우리가 믿음을 통해 받을 수 있도록 하려는 것이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복은 좋은 땅이었다. 좋은 땅은 모든 것을 포함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예표이다. 이제 부활 안에서 그리스도는 그 영이시다. 이 말은 그리스도 곧 우리에게 실재화된 바로 좋은 땅이라는 뜻이다.
여기 가나안 좋은 땅이 있다. 여기에 풍성이 있다. 그것은 모든 것을 포함하신 그리스도의 예표이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육체가 되심으로 오셨다. 그분은 이 예표의 성취이시다. 그분은 모든 것을 포함한 그리스도이시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그분을 체험하는가? 그분은 죽음과 부활을 통과하셨고, 이제 모든 것을 포함하신 복합되신 생명주시는 영이 되셨다. 이 땅이 그리스도요, 그리스도가 이제 그 영이시오, 그러므로 그 영이 이 좋은 땅의 실재인 것이다. 이 말은 우리에게 그 영에 대한 이상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신명기 8장에서 좋은 땅에서는 우리에게 부족함이 조금도 없다고 말한다. 이 땅에 있는 모든 것들이 모두 예표이다. 이제 그리스도께서 오시고, 이 예표를 성취하셨다. 바로 하나님-사람 그리스도가 좋은 땅이시다. 그러나 우리는 다만 그분을 그 영으로서만 체험할 수 있는 것이다. 부활 안에서 그리스도는 그 영이시다. 이제 그 영이 우리의 영 안에 오셨다. 그 영은 좋은 땅으로서 그리스도의 실재이시며, 이제 그 영은 우리의 영과 연합되셨다. 이것은 좋은 땅이 지금 우리의 영 안에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열쇠이다. 이 모든 체험은 영 안에서, 영을 통해, 영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 영은 실재의 영이시오, 이 영은 또한 그리스도의 영이시오, 그리스도는 모든 것을 포함한 분이시며, 그분은 바로 좋은 땅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 좋은 땅을 체험할 때, 그 영을 체험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모든 어떠함과 그분이 소유하신 모든 것, 그리스도께서 도달하시고, 성취하신 모든 것이 지금 그 영 안에 있다. 갈라디아서 3장 14절의 2번 각주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복의 물질적인 방면은 좋은 땅이었으며, 그 땅은 모든 것을 포함하신 그리스도의 예표였다. 그리스도는 결국 모든 것을 포함하신 생명주시는 영으로 실재화되셨으므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 영의 복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땅의 복과 일치한다. 사실상 그 영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체험 가운데 실재화되신 분으로서 좋은 땅이시다.”라고 말한다. 이 좋은 땅은 다만 객관적인 그리스도가 아니다. 물론 그리스도 그분 자신은 모든 것을 포함하신 분이시다. 우리가 살고 움직이는 영역이 바로 그리스도이시다. 그분은 분명히 좋은 땅이시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밖에 있는 어떤 것을 체험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 물이 컵 안에 있다면 체험할 길이 없다. 우리의 체험은 주관적인 것이다. 물을 마실 때 이 물이 주관적이 된다. 그리스도는 바로 이 좋은 땅이시다. 그러나 그분은 우리에게 객관적이시다. 우리가 이분을 우리의 땅으로 어떻게 누릴 수 있는가? 어떻게 우리의 체험이 되게 할 수 있는가? 그것을 위해 주님은 모든 것을 포함한 영이 되셔야만 한다. 이 좋은 땅은 우리가 누리기 위한 하나님의 풍성의 공급이시다. 이제 여러분 모두에게 한 가지 질문을 하겠다. “이제 좋은 땅이 어디에 있는가?” 좋은 땅은 우리 안에 들어오신 우리의 영이 되신 그리스도이시다. 우리가 이것을 인식할 때에만 그것을 이상으로 계시를 가질 수 있고, 이상으로 체험을 가질 수 있다. 1954년 8월에 그리스도는 내 안에 들어오셨다. 그러나 나의 인식은 너무 부족했다. 그리고 11년이 지난 후에야 나에게 영이 있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주님의 영이 나의 영과 함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바로 그때 나의 관점은 여전히 좁았다. 이제 우리는 갈라디아서 3:14에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그 복이 하나의 예표인 것을 보게 되었다. 그리스도는 그 예표의 성취이시다. 또한 그 영은 그리스도의 실재화요 실재이시다. 이제 그리스도의 실재화이신 그 영이 우리의 체험에서 볼 때 그 좋은 땅이 되시는 것이다. 우리가 이 한 가지를 볼 수 있다면, 우리의 봉사, 우리의 생활이 바뀌기 시작할 것이다. 신명기에서 좋은 땅에서는 여러분에게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고 말한다. 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부족함이 조금도 없다. 그 영 안에서 우리에겐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 우리는 우리의 영 안에 머물러야 하고, 우리의 영을 훈련해야 한다. 그러한 인식을 가지고서 그 영께서 우리의 영과 연합되셔서 그리스도의 실재화가 되심으로 우리의 체험 안에서 좋은 땅이시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우리가 이것을 보기 시작한다면, 우리는 매우 단순해질 것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체험 안에서 좋은 땅, 그 영이시다.
신명기에서 ‘여기 시내가 있다, 이 땅에는 그냥 샘이 몇 개 있다. 여기에 원천이 좀 있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이 땅은 바로 시내의 땅이다’라고 말한다. ‘이 땅은 샘의 땅이다. 원천의 땅이다.’ 라고 말한다. 어디에 가나 물이 있다고 말한다. 여러분에게 생수가 필요한가? 여기에 원천이 있다.
샘이 여기 있다. 여기에 강이 있다고 말을 한다. 삼일 하나님이 있다. 우리는 이 놀라운 시내와 샘과 원천의 체험 안에서 섬겨야만 한다. 이 자매님이 막내아들을 돌려주셨을 때, 그 자매님은 흘러넘치고 계셨다. 생수의 샘이 흘러넘치고 있었고, 자매님의 영을 통해 내가 마실 수 있었고, 그 자매님은 그때 시내와 샘과 원천으로 섬기고 계셨다. 그때 함께 섬겼던 모든 자매님들이 축복을 받고 있었고, 공급을 받고 있었고, 만족하고, 기뻐하고 있었다. 그러나 자매님은 거기서 어떤 모양새를 갖추는 것이 아니라 “아, 나를 보시오. 내게 원천이 있다. 내게 샘이 있다.” 이렇게 말하지 않으시고, 다만 그곳에서 아이를 돌보고 계셨다. 다만 그분 안에서 계속해서 생수가 흘러넘치고 있었다. 왜냐하면 자매님이 좋은 땅 안에 계셨기 때문이다. 이제 좋은 땅은 우리의 영 안에 오신 그 영이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이 그 영 안에 있다. (2011년 6월 전국 봉사자 온전케하는 훈련 메시지 1 R. K 교통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