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땅으로 예표되신
모든 것을 포함하신 그리스도를 체험하고 누림
메시지 1(하)
시내와 샘과 원천의 땅
성경의 창세기에서 동산에는 생명나무가 있었다. 에덴동산에서 강이 흘러나와 네 방향으로 흘러 온 땅을 적셨다. 성경의 마지막, 요한 계시록에는 불 못과 물의 성이 있다. 물의 성, 새 예루살렘에는 생명수의 흐름이 있으며, 이 생명수의 강이 온 도시, 온 성을 적시며 흐른다. 출애굽기 17장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목이 말랐을 때 하나님께서는 지팡이로 반석을 치라고 말씀하셨다. 그 반석에서 생수가 흘러나왔다. 시편 46편 4절에서는 한 시내가 있어 하나님의 성, 곧 지존하신 하나님의 성소를 기뻐한다고 말한다. 여러분은 다른 사람과 함께 주님과 교회를 섬겨본 일이 있을 것이다. 마음이 매우 무거운 자매님과 함께 섬겨본 일이 있는가? 아주 슬퍼하는 한 분, 깊은 속에 좌절감이 가득한 한 분이 있다. 무엇이 그 자매님을 기쁘게 할 수 있는가? 만약 여러분이 강물 안에서, 그 흐름 안에서 섬긴다면, 이 강은 우리 안에 시내가 되어 흐를 것이다. 온 성을 기쁘게 할 것이다. 한 봉사자에게서 흐른 그 흐름이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참된 봉사가 아니겠는가?
우리가 봉사하기 위해 어떤 곳에 도착했을 때, 정말 마음이 무거운 상태로, 다만 의무감을 가지고 할 수 없이, 그것을 하지 않으면 양심의 가책이 있기 때문에 섬기기 위해 왔다고 가정해 보자. 그런데 그곳에 왔을 때, 한 자매님이 내가 어려운 상황에 있다는 것을 깨닫고, 다만 부드럽게 생수를 내게 흘러 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수개월이 지난 이후에 여러분이 봉사하러 왔을 때, 여러분 자신이 그 흐름을 누리고 있지만, 그 자매님은 아주 무거운 마음으로 오게 될 수도 있다. 그 때는 여러분이 그 자매님에게 흘러 보낼 차례이다. 어떤 때는 두 사람이 모두 흐름을 가지고 올 경우도 있다. 서로에게 흘러 보내는 것이다. 유리창을 닦으면서 흘러 보내는 것이다. 또 한편으로 닦으면서 찬양할 수도 있다. 이것이 봉사이다.
나는 화학이라든지 과학을 잘 알지 못한다. 나는 다만 우리에게 물이 필요하다는 것을 안다. 나는 여러 나라와 이곳저곳으로 여행을 많이 한다. 그 곳의 성도들은 나를 잘 돌보아 준다. 나는 항상 한 가지만 요구할 것이 있다고 말한다. 나에게 생수가 떨어지지 않게 해 달라는 것이다. 내가 금요일 저녁에 서울 전시간 훈련 센타 숙소에 들어갔을 때, 테이블 위에 많은 좋은 것들과 함께 물병들이 놓여 있었다. 그 물병들을 바라볼 때 나는 문제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쿠키가 없어도 괜찮지만, 커피나 차가 없어도 괜찮지만, 또한 과일 캔디를 안 먹어도 괜찮지만, 물은 없으면 안 된다. 그것은 깊은 필요이다. 생수의 필요가 우리에게 있다. 지난 이틀 동안 오후 시간에 중요한 교통을 했다. 내일 오후 시간에 많은 도시로 복음 확산의 부담을 갖게 될 것이다. 사실 교회가 없는 도시란 황무지와 같다. 생명나무가 없는 것이다. 우리가 생수를 흘러 보내기 위해 교회가 없는 도시들로 가야한다.
나는 강조하면서 또 반복하겠다. 그 영은 좋은 땅이다. 좋은 땅은 물의 땅이다. 시내와 샘이 흐르는 땅이다. 샘이 흘러나오는 땅이다. 흘러 솟구치는 땅이다. 나는 저녁 먹기 전에 내 속에서 생수의 흘러넘치는 것을 체험했다. 나의 영 안에 흘러넘침이 있었다. 다만 샘만이 아니라 샘의 땅이 나에게 있었다. 우리는 무슨 일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모르지만, 우리의 영 안에 이러한 샘이 완전히 해방될 때, 하나님으로 충만하게 된다. 우리 안에 원천이 있다. 또한 이 영은 좋은 땅으로서 우리 안에 시내와 샘과 원천의 땅이 되신다.
나는 물의 기능, 특별히 생수의 영적인 기능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내가 이 생수의 다섯 가지 기능에 대해 말해보겠다.
첫 번째, 이 물은 우리를 공급한다. 계시록 22장에서 생명나무는 생명수가 흐르는 강 좌우에 자라는 걸 보게 된다. 사실 이 나무는 강가에 심겨진 것이다. 그래서 나무에 생명수가 공급된다.
두 번째, 이 물은 우리를 신선하게 한다. 우리가 신선케 되는 것은 너무나 좋은 것이다. 이 물이 신선케 한다. 바울은 서신서에서 몇 차례 여러분이 나의 영을 신선하게 했다고 언급했다. 아마 여러분이 피곤한 상태로 섬기러왔을지라도 생수를 체험하고 누릴 때 신선하게 된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모든 것이 새로워지고 신선해진다. 집으로 돌아갔을 때 남편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모르지만, “당신, 봉사하러 가지 않겠다고 하지 않았소? 이번 주는 너무 힘들다고 말하지 않았소? 나도 당신을 염려했었는데,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이오?”이제 여러분이 남편을 신선하게 할 차례이다. 메시지를 전할 필요는 없지만, 다만 “어떤 자매님과 제가 생수의 흐름을 함께 누렸답니다.”라고 말하면 된다. 그리고 “지금 함께 저하고 누리시겠어요? 함께 주님의 이름을 불러보시죠.” 하면서 생수를 함께 누리면 된다.
세 번째 기능은 만족하게 하는 것이다. 목마름이란 우리에게 이루어지지 않는 열망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결혼을 한 부부가 그들이 결혼한지 한 8년이 되었다고 하자. 부부는 함께 있으면서 아주 즐거워한다. 그러나 한 가지 예외가 있다. 이 자매가 참으로 아이를 갖고 싶어 한다. 한나와 같은 심정이다. 다른 모든 방면에서는 문제가 없다. 그러나 깊은 속에 만족이 없다. 그 자매는 엄마가 되고 싶어 한다. 나는 주님께서 그 자매에게 아이를 허락하시기 바란다. 그러나 주님이 허락하지 않으실 수도 있다. 주님은 참되게 우리를 만족케 하시기를 원한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목마름이 있다는 것은 무언가를 향한 열망을 의미한다. 젊은 형제님들이 중년의 나이가 되면, 이전에 느끼지 못했던 어떤 갈증을 느끼게 된다. 그들의 일생, 인생을 생각하면서, 젊은 날의 꿈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고, 어떤 꿈도 이루어지지 못했다라고 느낀다. 자신의 인생이 절반을 넘어섰다는 것에 대하여 깊은 속에 만족이 없다. 생수는 우리의 모든 목마름을 만족시킨다. 스포츠카를 산다고 목마름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머리를 노랗게 물들이고 젊은 사람처럼 꾸민다고 하더라도 만족이 없다. 여러분에게는 다만 물이 필요하다.
네 번째, 물은 우리를 씻어준다. 이 씻음은 물두멍에서의 씻음으로서 땅에 속한 모든 접촉으로부터 우리를 씻어준다. 우리가 땅에 살고 있기 때문에 세상에 있어야만 한다. 그럴 때 우리가 비록 세상적이지 않을 지라도, 세상을 접촉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 물이 세상의 온갖 더러움을 우리에게서 씻어준다. 또한 우리는 서로의 발을 씻어줄 수 있다. 예를 들어서, 목요일 저녁에 형제님들이 봉사를 하러 온다. 형제님들은 아침 일찍 일어나서 교통난을 뚫고 직장으로 일하러 갔다가 일하는 동안 많은 압력을 받는다. 그 형제님은 어렵게 퇴근하여 집에 도착하면 많은 복잡한 일들이 기다리고 있다. 그래서 그것을 좀 해결하고 난후 봉사 교통 시간이 되어 집회소에 오면 누군가가 그의 발을 씻어주어야 되지 않겠는가? 우리는 서로의 발을 씻어주어야 한다. 에베소서 5장에 따르면, 이 발 씻음 아래 있는 물이 신진대사적으로 우리를 씻는다고 말한다. 먼저는 주름들을 제거해 준다. 자매님들은 더 이상 자신의 코를 고친다든지 하는 성형수술이 필요 없다. 생수가 우리의 모든 주름을 제거해 주기 때문이다. 또한 모든 상처를 치료해준다. 우리에게 상처의 흔적이 있을 때 그것을 제거해 준다.
다섯 번째 기능은 이 물은 우리를 다스린다. 새 예루살렘에는 어린양-하나님의 보좌가 있다. 그곳에서부터 생수의 흐름이 흘러나온다. 하나님은 흐름을 통해 다스리신다.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이 흐름을 통해 온 땅을 통치하실 것이다. 여러분은 이 물이 다스린다는 것을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생수의 강의 흐름이 하나님의 권위를 가져오는 것이다. 우리에게 ‘생수의 흐름, 보좌로부터 흘러, 그 권위를 온 땅에 가져온다.’는 좋은 찬송이 있다.
이 항목들이 물의 주된 기능들이다. 우리가 이렇게 모든 것을 포함하신 그리스도를 물이 가득한 땅으로 누릴 필요가 있다.
이 땅은 바로 삼일 하나님이 흐르시는 땅이다. 그러면 이 땅이 지금 어디에 있는가? 이 땅은 지금 우리의 영 안에 있다. 흐르시는 삼일 하나님이 생수로 흐르는 이 땅은 우리의 영 안에 있다. 우리는 우리가 영 안에서 살 때 이 물의 땅 안에서 사는 것이다. 그럴 때 우리를 통해서 이 복음이 흘러나갈 것이다. 기도는 우리를 통해 흘러나갈 것이며, 우리를 통해 목양이 흘러나갈 것이다. 찬양도 흐를 것이다. 찬미가 흐를 것이다. 할렐루야! 주님을 찬양한다. 우리는 시내와 샘과 원천이신 삼일 하나님이 흐르는 땅에 살고 있다. 결코 목마름이 없다. 물! 물! 물이다. 여기에 시내, 샘, 원천, 삼일 하나님이 흐르신다. 주님을 찬양한다. 아멘. 이것이 우리를 새롭게 한다. 우리를 공급한다. 우리는 물로 씻어진다.
사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생활 가운데 항상 산꼭대기에 머물기를 원한다. 우리는 항상 변화산에 그대로 머물기를 원한다. 우리는 ‘아! 나는 그곳에서 빛나는 하나님과 머물고 싶다. 아! 아버지께서 하시는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곳, 왜 내가 여기에 머물지 않겠는가?’라고 원할지 모르지만 산에서 내려와야만 한다. 우리는 이집트로 내려와야 한다. 그런데 낮은 곳에는 나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 계곡 안에는 마귀가 있다. 귀신들린 사람들이 있다. 그 계곡은 누구도 그 상황을 다룰 수 없는 수 많은 일들이 있다. 귀신의 원칙은 배역이다. 그 상황은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상황, 우리가 제어할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느 날은 변화산 꼭대기에 있다가 점차적으로 내려온다. 그리고 계속 내려가게 된다. 우리가 전에는 가장 높은 곳에 있었지만 어느 날 아주 깊은 골짜기에 있게 된다. ‘오, 너무나 깊다’라고 생각되는 아주 긴 골짜기, 어두운 골짜기에 있게 된다. ‘이것을 어떻게 건너갈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 좋은 땅에 이 물은 먼저는 산에서 골짜기로 흘러간다. 우리는 모두 오르락내리락, 내리락오르락 하는 생활을 살고 있다. 예를 들어, 20여년 결혼생활을 하신 분들, 오르막이 있지 않았는가? 또 내리막도 있지 않았는가? 오르락내리락! 하루는 남편이 올라갔다가 다음 날은 또 아내가 올라간다. 때로는 두 사람이 모두 올라가기도 하고 두 사람 모두 내려오기도 한다. 사실 많은 경우 우리는 산에서보다는 골짜기에 있을 때가 많다.
형제자매님들! 골짜기가 오기를 기도하지는 말라. 물을 위해 기도하라. 지금 나의 기도는 나로부터 정말 생수의 흐름이 흘러나가길 원하는 것이다. 여러분이 이 시간 이후 집에 가거나 또 직장에 가시게 되면, 그곳에 골짜기가 기다리고 있다. ‘주님, 왜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주님은 “생수를 원한다고 기도하지 않았느냐? 내가 너의 기도에 지금 응답하고 있다”라고 말씀하실 것이다. 사실 그 강의 근원은 산에 있지만, 강 자체는 계곡을 따라 흘러간다. 그러므로 “물을 얻기 원한다면, 물이 있는 곳에 너를 좀 넣어줘야 되지 않느냐?”라고 말씀하실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상황을 스스로 통제할 수 없다. 우리에게는 각양의 환경이 필요하다. 그러나 기억할 것은 우리가 좋은 땅 안에 있다는 것이다. 이 좋은 땅은 물의 땅이요, 이 좋은 땅의 시내와 샘과 원천을 이길 수 있는, 능가할 수 있는 환경은 없다. 웟치만 니 형제님이 20년 동안 골짜기에 계시지 않았는가? 그러나 그곳에 물이 있었다. 그 물이 그분에게 흘러갔다. 또한 그분을 통해 흘러나왔다. 형제님이 말하기를 “나는 나의 기쁨을 유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것이 우리의 생활이다. 나는 여러분이 좋은 땅에 오신 것을 환영한다. 좋은 땅에는 한국처럼 산이 많다. 또한 산이 있는 곳마다 골짜기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골짜기에도 있게 되고, 산에도 있게 될 것이다.
고린도 후서 6장을 읽어보면, 바울은 모든 종류의 상황에 처해있었다. 사도 바울은 적어도 네 차례 파선 중에 보냈다. 고린도 후서에서 그는 세 차례 파선했다고 말했다. 바울은 말하기를 밤낮을 깊음 가운데 보냈다고 말한다. 그가 수영을 잘 했는지 모르겠다. 그가 얼마나 많이 배웠는지 모르지만, 사도행전에 보면, 네 번째 파선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런데 바울은 그 배의 갑판에 서서 모든 사람들에게 “여러분, 기운을 내십시오.”라고 말한다. 여러분 그것을 생각해 보라. 2주가 지난 후에 이 죄수가 모든 사람에게 기운을 내라고 말하는 상황이다. “여러분 가운데 한 사람도 목숨을 잃지 않을 것이고, 배만 잃을 것입니다. 내가 속해 있고 또 내가 섬기는 하나님, 그분의 천사가 바로 이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였습니다. … 여러분은 오늘까지 십사 일째 기다리고 기다리며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굶어 왔습니다.” 죄수인 바울은 떡을 가져다가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 주었다. 모든 사람이 용기를 얻었다. 바닷물로 가득한 상황에서 그 배 안에 또 다른 생수의 흐름이 있었다. 그때 바울이 다스리고 있었다. 어떤 사람이 배를 내리고서 도망치려고 했을 때, 그는 “이 사람들이 배에 남아 있지 않으면, 여러분은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들은 순종했다. 이 물이 다스리고 있었고, 사람들에게 만족을 주고 있었고, 공급을 주고 있었다. 이것이 어떠한 봉사인가? 어떤 사람이 배에서 내려서 아팠을 때 바울이 고쳐주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왔을 때 고쳐주었다. 그곳에 물이 흘러가고 있었다. 아마 지금 우리 가운데는 실제 물질적인 배에서의 파선의 상황에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일생을 볼 때, 사실 많은 파선을 체험하게 된다. 때로는 우리의 교회가 어떤 어려운 상황에 빠지기도 한다. 그럴 때 갑판 위에 시내와 샘과 원천의 땅에 사는 한 사람이 우리 가운데 서서 말하는 것이 얼마나 좋은가?
우리는 이 영의 적셔짐 아래 있다. 여러분은 모르겠지만 나는 지금 메마름이 없다. 여러분은 지금 적셔져 있는가? 아니면 지금 메마른가? 우리는 이 물로 여러분을 섬긴다. 이것이 주님을 섬기는 방식이다. 우리는 서로를 씻어주고, 서로를 공급하고, 서로를 주님의 다스림 안으로 이끌어 간다.
이 시내와 샘과 원천을 어떻게 누리는지 세 항목을 말하겠다. 처음 두 가지는 매우 단순한 것이다. 그러나 세 번째 항목은 어느 정도 진보된 항목이다.
첫 번째, 우리는 다만 그 영을 마셔야 한다. ‘주 예수님’이라고 부르라. 주님은 우리 모두를 한 영 안에서 마시게 하셨다. 우리는 다만 그 영으로 조금 적셔질 수 있다. 다만 조금 마시는 것이다. 우리가 이렇게 마실 때 우리 속에 들어온다.
두 번째, 우리는 그 영을 마신 후에는 말해야 한다. 이제 우리가 몇 분 동안 말할 기회가 있다. 우리가 말할 때 우리로부터 생수가 흘러나간다. 우리에게 흘러나가는 것과 흘러들어오는 것이 서로 맞아야 한다. 호스가 수도꼭지에서 물을 흘려보내는데, 마지막 끝에서 잠궈 버리면 호스에 물이 들어가다가 흘러 나가지 못하게 된다. 그럴 때 압력이 가득 차게 된다. 흘러보내지 않으면 우리 속에는 압력이 차게 된다. 왜 그런지 모르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압력이 우리 안에 있다. 그런데 집회에서 신언을 하고 보니까 ‘어, 이제 해방되었다.’ 그런 느낌이 있다. 그래서 물을 흘러보내야 하는 것이다. 이 물을 흘러보내라.
세 번째, 참된 사역과 관련된 항목이다. 모든 온전케 된 지체들의 온전케 함이다. 광야에 반석이 있었다. 이 반석은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그때 모세는 이 반석을 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럴 때 이 반석에서 물이 흘러나오게 되었다. 이것은 생명을 해방하는 그리스도의 죽음의 방면이다. 주님의 회복 안에서 우리에게는 이렇게 매 맞은 반석이신 그리스도와 하나된 체험을 가진 성도들이 필요하다. 주님의 옆구리가 찔렸을 때,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 우리는 구속을 위한 주님의 고통에 참여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생명을 해방하기 위한 주님의 고통에 참여할 수는 있다. 어느 곳에서든지 주님의 회복이 세력을 얻으려면, 적어도 몇몇의 성도들, 자매님들일지 형제님들일지 모르지만 깨어진 반석이신 그리스도와 하나된 성도들이 필요하다. 그들은 계속해서 침을 당하지만, 더 많이 침을 당할수록 더 많은 흐름을 흘러보내게 된다. 그것에 대해 더 많이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 흐름을 갖기 위해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2011년 6월 전국 봉사자 온전케하는 훈련 메시지 1 R. K 교통 중에서)
이진 형제의 근황
지난 1월 24일 전국 중고등부 온전케 하는 훈련을 마치고 귀가하던 중 불의의 사고로 부상을 당하여 입원하였던 3명의 진주교회 중고등부 형제들과 이진 형제의 근황을 알려드립니다.
당시 부상을 입었던 중고등부 형제들은 모두 치료가 잘 진행되어 거의 완쾌되었거나 남은 치료를 받고 있으며, 모두들 다시 예전의 활달함을 되찾고 교회생활과 학교생활도 잘하고 있습니다.
다만 경추부 및 척추부에 심각한 손상을 받아 가슴이하 전신이 마비된 이진 형제는 아직 이렇다 할 호전은 없는 상황입니다. 4월경 실시한 근전도 검사에서 왼쪽 다리는 뇌에서 신경신호를 보내면 신경신호가 미세하지만 되돌아와서 실낱같은 희망을 가지고 있으며, 이제는 재활로 인한 근육 강화 운동을 통해 혈액 순환이 잘되고 근육이 조금씩이나마 다시 형성되고 있습니다. 식사도 잘하고 다른 부분은 현재로서는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끊어진 신경으로 마비가 지속되고 있어 기도가 절실히 필요한 상황입니다. 담당의료진의 소견으로는 일반적으로 신경을 다친 경우에는 3 ~ 6개월 사이는 쇼크 상태이며, 6개월 ~1 년, 길게는 2년 정도가 회복이 된다면 회복 가능성이 나타나는 시기라고 합니다.
그래서 현재는 6개월이 접어드는 시점에 재활훈련을 전문적으로 받을 수 있는 경기도 광주 소재 삼육 재활원에서 재활치료를 받기위해 7월 15일쯤 갈 예정입니다. 그러나 재활만을 고려한다면 가야 하지만, 현재 전신이 마비되어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빈혈 또는 장기 등 신체의 다른 부분이 혹 문제가 생길 경우 종합병원에 있어야 바로 협진을 통해 치료할 수 있어 삼육 재활원에서 재활치료를 받는 기간 동안 만일의 상황이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가 필요합니다. 현대 의학에서 척수분야는 암치료나 다른 부분에 비해 치료가 많이 개척되지 않은 미개척분야여서 담당교수님의 말로는 신의 영역이라고도 합니다. 그래서 다만 소망을 주님께 두고 주님을 신뢰하고 앙망하며 열심히 재활 훈련을 받으며 좀 더 나아지고 치료될 수 있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가족들과 진주교회는 몸 안에서 각지교회 성도들이 주님께 드리는 기도와 사랑어린 방문, 또 헌금으로 보여준 사랑에 깊은 감사를 드리며 이를 각지 교회들에게 꼭 표현해 줄 것과 앞으로도 이진 형제를 위해 지속적으로 기도해 주실 것을 부탁하였습니다.
주님께서 은혜와 긍휼을 넘치게 더하사, 이진 형제가 속히 일어날 수 있도록 계속하여 관심하시고 기도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진 형제의 간증
“아침마다 어머니와 저의 마음과 생각이 지켜지기를 기도 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지체들이나 지체들의 기도, 그리고 보이는 것이나 보이지 않는 것들을 통해서 몸 안에서 치료받게 하고 계신다는 것을 봅니다. 또한 이를 통해서 내가 있는 위치가 주님과 몸 안에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하십니다. 그러한 감사의 인사를 꼭 전해 주십시오. 너무나 감사합니다. 형제 자매님들 사랑합니다. 저는 사랑을 많이 받는 형제인 것 같습니다.”
“주님을 사랑합니다. 주님께 감사를 드리고, 몸 안에서 몸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보잘 것 없고, 가치 없고, 주님을 멀리하던 자였지만 주님 안에 부르시고, 세상으로부터 분별하시고, 몸 안에 두시고 하늘에 속한 모든 풍성을 우리에게 주심을 감사합니다. 그 안에서 자격이 없고 분량이 작지만 당신의 어떠함을 체험케 하시고, 주님의 그 풍성을 누리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몸의 그 풍성함을 따라 돌보아 주시고 보살피시고 위로하시고 격려하심을 감사합니다. 우리가 어디에 있든 무엇을 하든 주님 안에 있고 주님과 하나 되고 주님과 더 연합되는 것이 우리의 중심이 되기 원합니다. 주님, 우리가 골짜기에 있을지라도 주님이 함께 하시고 그 골짜기에도 물이 흐릅니다. 주님의 임재를 누리게 하시고, 그 흐르는 물을 누리게 하소서. 늘 주님께 나아가게 하시고 주님과 더 시간을 보내기 원합니다. 주님 안에 있기 원합니다. 몸 안에 있기 원합니다. 주님 시시때때로 많은 시간 지체들을 보내주시고 몸으로 돌이키게 하시고 주님께 나아가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주님을 더 사랑하며 늘 주님께 돌이키며 주의 임재 안에 살기 원합니다. 주님을 사랑합니다.”
-이진 형제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