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시록 2-3장에 있는 교회의 길
목양 자료
주예수찬양 2011-08-09 , 조회 (420) , 추천 (0) , 스크랩 (0)
출처
원문

교회의 길

성경 : 계시록 2-3장

Ⅰ. 교회의 길에 대한 계시

계시록 2,3장에는 일곱 교회가 있다. 이 일곱 교회는 모두 요한이 계시록을 쓰던 당시 소아시아에 있었던 일곱 교회들이다. 그 때 소아시아에 많은 교회들이 있었지만 하나님은 이 많은 교회들 중에서 특별히 이 일곱 교회들을 택하셨다. 하나님의 목적은 이 일곱 교회를 예언의 교회로 삼으시려는 것이다. 1장 3절은 이 책이 예언임을 우리에게 알려 준다. 그러므로 삼일 하나님은 이 일곱 교회들을 택하사 이 땅에서 교회의 길이 대체 어떤 것인가를 예언하셨다.

계시록 2,3장은 교회의 길을 말하고 교회의 일을 어떻게 해야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지를 주의 깊게 말한다.

A. 첫번째 교회 - 에베소 교회

여기에 일곱 교회가 있다. 첫번째 교회는 일세기 말엽의 교회, 즉 계시록을 쓰던 당시의 교회를 가리킨다. 요한이 계시록을 쓰던 당시 교회의 상태는 첫번째 교회 - 에베소 교회와 같았다.

B. 두번째 교회 - 서머나 교회

두번째 교회는 서머나 교회로서 요한이 세상을 떠난 후, 2세기부터 4세기초까지 교회가 로마 제국이 열 차례의 대 핍박을 받은 상황을 말한다. 서머나 교회는 핍박받는 교회의 상황으로서 사도 이후부터 콘스탄틴 대제가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기까지의 기간이다. 이 기간에서 우리는 교회가 심한 핍박을 받는것을 본다. 서머나 교회는 그 기간의 교회 역사를 예언 했다.

C. 세번째 교회 - 버가모 교회

세번째 교회는 바로 버가모 교회이다. 4세기 초, 즉 A.D. 313년 콘스탄틴 대제가 기독교를 국교로 받아들이던 당시의 교회를 버가모 교회라고 부른다. 버가모(pergamos)에서「가모(gamos)」는 결혼이라는 뜻이다.「버가모」는「주의하라! 이제 결혼했다!」라는 뜻이다.

(1) 앞의 세 교회는 이미 지나갔다

이 일곱 교회 중 앞의 세 교회는 이미 지나갔고 네번째 교회부터는 계속 산출되고 있다. 현재 네번째 교회가 이미 산출되었고 다섯째, 여섯째. 일곱째 교회도 이미 산출되었다! 그 차이점은 이러하다. 첫번째 교회가 지나가고 두번째 교회가 왔고 두번째 교회가 지나가고서 세번째 교회가 왔다. 세번째 교회가 지나간 후에는 네번째 교회가 나왔다. 그러나 네번째 것이 지나가지 않은 채 다섯번째 것이 나와 네번째와 다섯번째 교회가 함께 존재한다. 네번째에서 다섯번째가 나왔지만 네번째도 여전히 존재한다. 다섯번째에서 여섯번째가 산출되었지만 네번째, 다섯번째가 여전히 존재한다. 여섯번째에서 일곱번째가 산출되었지만 네번째, 다섯번째, 여섯번째의 것도 여전히 존재한다.

(2) 마지막 네 교회는 주님의 재림시까지 존재한다.

계시록 2, 3장의 일곱 교회는 앞의 세 교회와 뒤의 네 교회의 두 조로 나뉜다. 앞의 셋은 이미 나갔고 뒤의 넷은 오늘날까지 존재하며 주 예수님의 재림시까지 계속된다.

그러기에 두아디라에 대해「내가 올 때까지」라고 말한 예언이 있다(2:25). 두아디라 교회는 주님이 다시 오실때까지 계속된다. 사데 교회도 주님이 오시기까지 계속된다(3:3).

빌라델비아 교회도 주 예수님의 다시 오실때까지 계속된다(3:11). 마지막으로 언급된 라오디게아 교회는 땅에 있는 마지막 교회이다. 3장 21절:「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여기서 당신은 자연히 이 교회가 주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계속된 마지막 교회임을 볼 것이다. 처음 세 교회에게는 주님의 재림에 관한 약속이 없지만 뒤의 네 교회에게는 주 예수님의 재림에 관한 약속이 있기 때문에 분명 주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계속된다.

(3) 뒤의 네 교회 중에서 교회를 택하라

그러므로 오늘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이 네 교회를 상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렇게 해야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어떤 길을 가야 할지를 알게 된다. 만일 이 땅 위에서 네 종류의 다른 교회가 주 예수님의 재림 때까지 계속된다면, 하나님의 자녀와 교회와의 관계는 어떠해야 하는가? 당신은 신중하게 이 네 교회 중에서 하나를 택해야만 한다. 신중히 택하지 못하여 당신이 있는 교회가 주님이 기뻐하지 않고 정죄하는 교회라면 주님 앞에서 당신은 큰 손실을 입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뒤에 언급된 네 교회를 보아야 한다.

D. 네번째 교회 - 두아디라 교회

네번째 교회는 두아디라 교회이다. 로마 황제가 기독교를 국교로 받아 들였을 때, 그는 기독교를 높이며 정치적인 힘으로 기독교를 부축하였다. 과거 로마 제국은 정치적인 힘으로 기독교를 핍박했으나 이제는 정치적인 힘으로 기독교를 후원하고 부축했다. 그 결과 기독교는 세상과 연합했을 뿐 아니라 세상에서 높이 올려졌다. 두아디라는 높은 누락 혹은 높은 탑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현재 기독교는 세상 사람에게 보인 바되고 존경받고 숭배받는 높은 누락이 되어버렸다.

(1) 두아디라는 로마 천주교이다

성경을 읽는 모든 사람은 두아디라 교회가 로마 천주교라는 것을 시인한다. 천주교는 교회와 세상의 연합으로서 그 결과 세상에서 교회가 지위를 얻되 상당히 높은 지위를 얻게 되었다. 여기의 문제점은 어디에 있는가? 곧 여선지자 하나가 나온 것이다. 이세벨이라는 이 여자가 하나님의 종을 가르침으로 교회는 그녀의 통제와 지배를 받았다. 그러므로 천주교의 문제점은 바로 마태복음 13장에서 네번째로 말한 비유, 즉 한 여인이 가루 서말 속에 누룩을 넣는 것에 있다. 성경은 천주교를 이 여자로 나타냈다.

① 두 가지 기본적인 큰 죄 - 행음과 우상의 제물을 먹음(2:20-23)

두아디라 교회는 이세벨의 가르침을 좇아 두 가지의 큰 죄들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간음을 행하는 것이요, 하나는 우상을 숭배하는 것이다. 성경 안에서 간음은 혼란을 뜻한다. 사람이 혼란될 때 간음을 범한다. 여기서 당신은 로마 천주교와 세상이 혼란된 것을 볼 것이다.

② 마리아로 헬라 여신을 대치함

세상 모든 종교에는 그들의 특별한 여신이 있다 불교에는 관음이 있고 헬라인에게는 비너스(Venus)신이 있다. 로마인도 헬라인의 뒤를 이어서 여신을 믿었다. 그러나 그들은 기독교 안에서 여신을 찾지 못하여 동정녀 마리아를 여신으로 삼았다.

③ 태양절이 성탄절로 변함

로마인 중 많은 사람들이 태양을 숭배했었다. 그들은 매년 12월 25일을 태양의 생일로 삼았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믿은 후에, 불신자 친구들은 아주 열광하면서 절기를 지내고 있는 반면에 그리스도인들은 냉랭하게 아무 할 일이 없는 것을 보고는 주 예수가 참 태양이라는 설(設)을 말하면서 12월 25일을 주님의 생일로 삼아 이 날이 성탄절로 변했다. 이름으로 말하면 성탄절은 기독교의 것이지만, 사실로 말하면 이날은 태양교에 속한 것이다.

④ 이방의 신당이 하나님의 전으로 변함

교회는 하나님의 성전이다. 오늘 이 전은 무엇인가? 곧 주님을 믿은 모든 사람들이다. 우리 몸이 곧 성령의 전이다. 그러나 오늘 로마 천주교에서는 높고도 큰 건물을 짓고 있다. 헬라 사람은 예술적인 건축에 대하여 특출한 재능을 갖고 있다. 헬라 사람에 이어서 로마인들도 건축에 대해 상당한 연구를 하였으며 예술적인 건축물을 매우 잘 짓는다.

그들은 예배당을 하나님의 전이라 칭한다. 이런 사상은 이교(異敎)에서 온 것이고 이교의 신당이 기독교의 성전으로 변한 것이다. 말의 표현은 기독교적인 것이지만 사실상은 이교도의 것이다. 기독교가 이교도들을 따라 음란을 범하였다.

⑤ 유대교의 제사장이 신부로 변함

신약의 모든 하나님의 자녀는 다 제사장이다. 자녀라면 모두 제사장인 것이다. 무릇 주 예수를 믿은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이다. 그러나 로마 천주교는 유대교 안에 중간 계급으로서 제사장이 있는 것을 보고서 천주교의 교인들을 두 등급으로 나누어서 구약에서 유대인들의 제사장 제도를 신약의 교회 안으로 가져왔다. 그래서 어떤 등급의 사람들이 제사장의 옷을 입고 제사장의 모자를 쓰는 등 성경 안의 제사장의 모든 것을 신부의 몸에 걸쳐 놓았다. 이것은 간음을 범하는 것이다. 성경에서 간음은 혼란을 뜻한다.

⑥ 이교의 미신적인 것들을 추구함

뿐만 아니라 그들은 향초, 등대, 향단 등 구약의 것들을 가지고 들어 왔다. 그들은 이교적인 것들도 가지고 왔다.

⑦ 우상으로 충만함

그들은 혼란되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은 또한 그들의 우상숭배를 책망하셨다. 당신은 이것을 이상하게 느끼지 않는가? 하나님이 교회의 우상 숭배를 책망하셨다! 로마 천주교에서 사람들은 주 예수의 십자가를 숭배하면서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못 박혔던 십자가를 발견하였다고 말한다. 그들은 그 십자가의 나무로 수 많은 작은 십자가를 만들어서 사람들로 숭배하게 하였다. 주 예수님은 하나님으로서 아무런 형상이 없으시다. 그러나 그들은 숭배할 어떤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어 내었다. 그들은 마리아상, 베드로상, 마가상을 만들어 냄으로서 온 땅을 형상으로 가득하게 하였다!

⑧ 순교자의 해골을 숭배함

이뿐 아니라 많은 순교자의 해골 또한 그들의 경배하는 대상이다. 그들은 순교자의 한쪽 다리나 뼈 한 조각이라도 발견하면 그것에 무릎꿇고 숭배한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만일 천주교를 모른다면 천주교 안에 얼마나 많은 우상이 있는지 알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만일 여러분이 천주교를 안다면 천주교가 우상으로 충만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2) 두아디라 교회는 하나님께 정죄받은 교회이다.

그러므로 이 교회는 하나님이 정죄하신 교회이다. 따라서 주님은 로마 천주교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예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계시록 18:4) 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로마 천주교 안에 있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은 가능한 한 로마 천주교에 속한 것들을 만지지 말아야 한다. 결코 이 부정한 것들을 만지지 말라. 당신이 그것들을 만질 때 당신은 그것의 영향을 받게 된다.

E. 다섯번째 교회 - 사데 교회

다섯번째 교회는 사데 교회이다. 사데, 이 교회는 회복된 교회 혹은 남아있는 교회(that remains)라고 말할 수 있으며 또한 남은 교회라고 할 수도 있다. 이 교회는 두아디라 후에 이어진다. 그러나 두아디라는 중단되지 않았다. 사데는 두아디라 이후에 나왔지만 두아디라를 대치한 것이 아니다.

(1)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이다.

사데의 상태는 다음과 같다.「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너는 일깨워 그 남은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명이 네게 있어」. 사데의 특징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라는 것이다.

(2) 종교적 개혁과 정치적 개혁

로마 천주교의 뒤를 이은 것은 바로 개신교이다. 그러므로 사데는 모든 개신교를 대표한다.

아직 로마 천주교의 세력이 존재하고 있을때 천주교는 극히 독재적이며 잔혹하였다. 그 결과 유럽의 각 국가들은 천주교의 압박에 견디다 못해 개교 운동을 발기하였다. 개교시에 두가지 세력, 즉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과 사람에게서 나온 것의 두 종류의 다른 세력이 있음을 볼 수 있다.

하나님에게서 나온 부분에 있어서 우리는, 굳게 서서 교회를 반대하고 신부와 모든 주교들 그리고 전체 천주교를 반대했던 마르틴 루터가 일어난 것을 볼 수 있다. 그들은 로마 천주교의 압박과 잔해를 받았지만 주님의 원하심이 회복임을 믿었다. 그때 성령이 크게 역사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충성됨을 주고 그분을 섬기게 하셨다. 또한 성경이 열림으로써 사람들이 빛을 보게 되었다. 또한 그 당시에 구원받은 사람들이 각처에서 늘어났다. 그들은 이것이 자신의 행위나 제사장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함으로써 된 것이라고 선포하였다. 이것은 실로 성령의 크신 역사이다!

그러나 루터의 개교 당시에 많은 정권들이 로마 천주교를 반대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개교를 이용하여 그들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였다. 그러므로 개교는 종교적 개혁일 뿐 아니라 또한 정치적 개혁으로 변하였다. 이것은 로마 천주교가 종교적인 세력을 가졌을 뿐 아니라 또한 정치적인 세력을 가졌기 때문이다. 당시 로마 천주교는 전 유럽을 통치하였다. 본래 개교는 종교적인 문제에 속하였으나 각국의 왕들과 대신들과 정치가들이 이런 기회를 틈타서 천주교의 통제에서 벗어나 독립된 국가로 변모하기를 바랬기 때문에 정치적인 개혁이 있게 된 것이다.

(3) 국교회의 산출

그러므로 개교는 교회와 세상이 연합하여 천주교를 넘어뜨리는 운동으로 변했다. 그 당시 교회가 두아디라를 반대하였을뿐 아니라 정치 또한 두아디라를 반대하여 이 기회를 틈타 개교를 일으켰다. 결국 여기에서 소위 국교회가 산출된 것을 볼 수 있다. 독일에 루터교가 생겼고 스웨덴에도 루터교가 생겼으며 영국에는 앵그리칸 교회, 네덜란드에는 네덜란드 개신교 등이 생겼는데, 이 모든 교회들은 국교회이다.

① 정치와 종교의 연합

당시 많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다만 순수하게 로마 천주교의 행음과 우상 숭배에서 나오기를 바랬을 따름이다. 그러나 그들을 돕는 정치적인 힘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더욱 쉽게 개혁을 하게 되었다. 당시 그들이 외부의 이러한 정치적 힘을 받아 들였던 것은 무지함으로 인한 것이었다. 결국 그들은 새로운 교회를 세울 때 천주교를 모방하게 되었다.

② 교회가 나라를 범위로 삼음

당시 천주교에서 벗어났던 믿는이들이 신약 성경으로 돌아갔다면 이 땅위에서 아무데도 의지할 것이 없는 단체적인 하나님의 백성을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을 믿은 사람만이 교회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나라에 속한 모든 국민들은 침례 받음으로써 능히 교회 안에 있을 수 있게 되었다.

③ 신자와 불신자가 섞임

개신교의 특징은 바로 세상과 교회가 혼합된 것이다. 본래는 보편적으로 함께 섞여져 있었으나 이제는 각 나라별로 섞여지게 되었다. 본래는 로마 천주교가 온 세상을 다스렸었으나 이제는 각 나라별로 독립된 국교회가 생겼다. 그러므로 각 나라마다 자기의 국교회가 있게 되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국교회 안에 하나님의 백성인 자와 아닌 자가 함께 섞여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④ 단독적인 영적 거인이 생김

이것은 개신교에서 영적 거인을 내는 것을 저지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개신교 안에도 확실히 하나님이 쓰시는 유명한 영적 인물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이 개신교의 역사이자 특징이다. 즉 한면으로는 살았다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었으며, 또 한면으로는 단체적이지 않고 단독적인, 위대한 영적인 사람들이 계속 나온다.「몇명이 네게 있어」라는 말은 끊임없이 몇명이 있다는 것을 가리키는데, 이것이 개신교의 특징이다.

⑤ 사립 교회의 일어남

개신교의 초기 역사는 바로 국교회이다. 그러나 개신교의 후기 역사는 사립 교회로 변하였다. 소위 이의자들(Dissenters)(국교회에 대하여 다른 의견을 가진 자들)은 국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들어 온 것이 아니라 침례로 말미암아 교회에 들어왔음을 보기 시작하였다. 국교회의 믿는이들은 믿음으로가 아니라 침례에 의해 산출되었다. 그러므로 그때 많은 사람들이 국교회가 틀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오직 믿음으로써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주장하였다.

⑥ 특별한 진리로 인하여 나누어짐

또한 그들은 진리를 봄으로써 어떤 진리를 특별히 주의하게 되었다. 그런 반면에 국교회는 나라가 세운 이 기관을 유지하려는 것 외에는 하나님을 섬길 뜻이 없었다. 그러므로 자연적으로 하나님은 한 두 사람, 한 무리를 일으켜서 그들에게 어떤 진리를 보여주시고 그들로 하여금 어떤 일을 죄로 판정하게 하셨다. 결국 그들은 소위 독립교회 혹은 사립교회(Dissenting churches -의견이 다른 교회)를 세웠다.

⑦ 합일은 죄를 심판하는 데 달려 있다

그들이 국교회와 나누어지기 시작할 때 이 나뉘어져 나간 사람들에게는 모두 분열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사실상 분열시킨 사람은 그들이 아니고, 국교회가 포함한 것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그들 가운데서 분별되어야만 했다.

⑧ 일대는 축복, 이대는 조직, 삼대는 타락

개신교의 역사 안에서 또 하나의 상황은, 어느 한 사람이 일으킴을 받고 은혜를 입고 보다 큰 축복을 받은 것이 첫 세대에서는 실로 영광스러운 나날이 된다. 그리고 이 첫 세대가 지나간 후에 제 이대에 와서도 그 상황은 그다지 나쁘지 않다. 그러나 제 이대의 말기에 가서는, 하나님의 많은 은혜를 받은 자로서 그런 은혜를 보유하고 지속되게 하기 위해서는 어떤 조직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므로 제 이대나 삼대에 와서는 조직이 들어오고 타락하게 되고 다시금 냉냉하고 무디어진다.

⑨ 생사의 분깃점에서 계속 머무름

본래 국교회를 떠났지만 이제 그들 자신도 다른 사람에 의해 버림받게 된다. 본래 그들은 죽은 단체를 떠나는 것이 합당하다고 말했었지만, 이제 그들도 죽어 있으므로 다른 사람들에게 버림을 당하게 된다.

두아디라, 사데는 모두 책망받은 교회이다. 그러면 믿는이들이 가야할 길은 대체 어디에 있는가?

F. 여섯번째 교회 - 빌라델비아 교회

여기의 여섯번째 교회는 빌라델비아라고 이름하고 있다.「빌라」의 의미는 사랑이고「델비아」의 의미는 형제로서「빌라델비아」는 형제 사랑을 의미한다.

(1) 형제 사랑으로 돌아감

일곱 교회 중에서 주님은 오직 한 교회를 책망하지 않으셨다. 로마 천주교가 책망받았고 개신교도 책망을 받았으나 오직 빌라델비아 교회만은 책망을 받지 않았다. 빌라델비아 교회에 대하여는 칭찬만 있었을 뿐 책망이 없었다.

그러면 빌라델비아 교회의 특징은 어디에 있는가? 3장 8절:「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 빌라델비아 교회의 특징은 바로 이것이다. 두아디라 교회의 특징은 여자의 가르침이다. 사데 교회의 특징은 교회와 세상의 결합으로서 끊임없이 벗어나야 하고 사망과 생명 가운데서 항상 발버둥쳐야 한다. 그러나 빌라델비아 교회는 형제 사랑의 교회이다. 여기에서는 형제 사랑의 단계로 돌아가는 것이다. 여기에는 형제만 있기 때문에 세상이 없다. 여기에는 발버둥치는 것이나 사망으로 돌아가는 것이 전혀 없고, 당초의 형제의 위치로 돌아가는 것 뿐이다. 여기에는 형제 사랑만이 있다.

사데가 두아디라에서 나온 것이듯 빌라델비아는 사데에서 나온 것이다. 개신교는 천주교에서 나온 것이고 빌라델비아는 개신교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성령의 새로운 움직임인 것은 매우 분명하다. 이 새로운 움직임은 사람들을 사망에 속한 사데로부터 끌어내어 형제 사랑의 위치에 서게 한다. 바꿔 말하면 몸의 위치에 서게 하는 것이다. 다른 모든 관계를 부인하고 오직 형제 관계를 인정하며, 기타 다른 교통을 부인하고 오직 사랑의 교통만을 인정하는 이것이 바로 빌라델비아이다.

(2) 주님의 말씀을 지킴

빌라델비아 교회의 두가지 특징 중 하나는 그들이 주의 명령을 지킨 것이요, 또 하나는 주의 이름을 배반치 않은 것이다. 여기에 주의 말씀을 지키는 단계에까지 하나님에 의해 이끌려진 한 무리가 있다. 이들 가운데서 하나님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도록 말씀을 열어 주신다. 이들 가운데에는 신조가 없고 오직 말씀뿐이다. 이들 가운데에는 교리가 없고 오직 말씀 뿐이다. 또한 이들 가운데에는 유전이 없고 오직 말씀 뿐이다. 교회가 생긴 이래로 사도의 가르침 외에 오직 이 교회가 주님이 첫번째로 칭찬하신 교회이다. 왜냐하면 빌라델비아 교회에 와서야 당신은 주의 말씀으로 완전히 돌아오고 그들 가운데 어떠한 권위나 교리나 신조가 없는 한 무리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범위가 너무 협착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들어갈 수 있도록 그 문을 조금 넓히려고 한다. 그러나 빌라델비아 사람들은 어떠한 신조나 교리도 거절하고 오직 주의 말씀으로 돌아왔다. 주님은「네가...내 말을 지키며」라고 말씀하셨다. 교회 역사에서 빌라델비아 교회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은 시대가 없었다. 교회 역사에서 빌라델비아 교회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은 시대가 없었다. 교회 시대 가운데 오직 빌라델비아 안에서만 하나님의 말씀이 마땅히 지위를 얻었다. 우리는 다른 시대에서 사람들이 신조나 유전만을 받아들인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빌라델비아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 외에 다른 것이 없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서 길을 걸었다.

(3) 주의 이름을 배반치 않음

주님은「네가...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라고 말씀하셨다. 이것도 빌라델비아의 특징이다. 역대로 길고 긴 교회 역사 기간에 주 예수의 이름은 오히려 마지막 이름으로 변해 버렸다. 사람들이 주의하는 것은 많은 믿는이들의 이름뿐이었다. 사람들은 베드로의 이름, 사도들의 이름만을 주목하였다. 또한 사람들은 자기가 선택한 이름이나 교리의 명칭이나 나라의 이름을 특별히 주목했다. 많은 사람들은 교만하게도「나는 루터의 사람이다(Lutheran)」라고 말하고, 또 많은 사람들은「나는 웨슬레의 사람이다(Wesleyan)」라고 말한다. 아, 사람의 이름! 또 어떤 사람들은 교만하게도「나는 콮틱의 사람이다(Coptic)」라고 말한다. 이것은 지방 명칭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교만하게도「나는 앵그리칸이다(Anglican)」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곧 영국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는 나라 이름이다. 이 많은 이름들이 하나님의 자녀들을 완전히 나누어버렸다! 참으로 주 예수의 이름이 세상에서 우리를 분별시키는데 충분하지 않다는 말인가!

① 주의 이름으로 충분함

주님은 그분의 자녀들 가운데 그분의 이름만으로 충분하다고 느끼신다. 그러나 오직 빌라델비아에 와서야 사람들은 주의 이름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즉 우리를 나누이게 하는 많은 이름들이 필요치 않고, 오직 주의 이름으로 충분하다고 한 것이다! 여기서 주님이 주의하시는 한 가지 일은「네가 나의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임을 기억하라. 이것이 그분의 주의하는 바이다.

교회 가운데 빌라델비아처럼 다른 이름을 거절했던 시기가 없었다. 오직 빌라델비아로 돌아와서야만이 다른 모든 이름들이 비로소 버려진다! 빌라델비아는 다른 모든 이름들을 제하였고, 오직 그리스도의 이름을 높이 들어올렸다.

② 이기는 문제

빌라델비아의 이기는 자들은 대체 무엇을 이기는 것인가? 주님이 그들에게 주신 서신 전체에서 우리는 그들의 행한 모든 것을 주님이 기뻐하신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일곱 편지 중에서 오직 빌라델비아에게 보낸 편지만이 완전히 열납된 것이다. 만일 주님이 온전히 열납하셨다면 또 무엇을 이겨야 한단말인가? 다 열납된 것이 가장 좋은 것이다. 빌라델비아는 주님의 뜻에 합한 교회이다. 그러나 빌라델비아 교회에게도 이기는 자들에 대한 약속이 있으니, 그들은 대체 무엇을 이겨야 했는가? 내가 말하지만, 그 교회 안에는 어떠한 문제도 없기 때문에 특별히 이겨야할 것이 없다.

③ 가진 것을 굳게 잡음

그러나 여기서 주님은 경고를 하셨다. 11절:「내가 속히 임하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전체 서신에서 오직 이 한 군데만이 경고의 말씀이 있다. 여기에서는 빌라델비아 사람들에게 그들이 가진 것을 굳게 잡으라고 말씀하신다. 다시 말하면, 네가 가진 것은 다 좋으니 버리지 말라는 뜻이다. 네가 행한 것이 틀리지 않으니 여전히 그것을 행하고 네가 행한 것에 하나님의 축복이 있으니 계속 행하라는 것이다.

빌라델비아가 그의 가진 것을 굳게 잡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을 일으켜 그의 면류관을 빼앗아가게 하실 것이다. 즉 본래 면류관을 너에게 주었으나, 만일 네가 네 위치를 버린다면 다른 사람이 네 면류관을 빼앗으리라는 말이다. 이것이 빌라델비아에 대한 유일한 경고이다.

G. 일곱번째 교회 - 라오디게아 교회

(1) 라오디게아는 빌라델비아의 타락으로 형성된 것이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빌라델비아 교회의 타락으로 형성된 것이다. 사데는 두아디라에서 나온 것으로서 진보된 것이고 빌라델비아는 사데에서 나온 것으로서 진보된 것이지만, 라오디게아가 빌라델비아에서 나온 것은 퇴보한 것이다.

빌라델비아가 타락할 때 형제가 군중으로 변하고 형제 사랑이 군중의 의견으로 변한다. 즉 사랑이 의견으로 변하는 것이다. 형제 사랑은 살아 있는 것이고 군중의 의견은 죽은 것이다.

(2)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으나 영적인 교만을 가짐

3장 15절:「네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이것이 라오디게아 교회의 특징이다. 17절:「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며 부족한 것이 없다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이것이 바로 라오디게아의 특징이다. 라오디게아의 특징은 바로 차지도 않고 더웁지도 않으면서 주님 앞에서 영적인 교만을 가진 것이다.

① 과거의 생명이 이제는 없어졌다

오늘날 개신교 안에는 자신이 영적으로 부자라고 자랑할 만한 사람이 없다. 그러나 라오디게아는 자신이 부자요 부요하여 아무 것도 부족하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지만 이제 와서는 가난하고 눈먼 자가 되었다! 내가 여러분에게 말하지만, 오직 타락한 빌라델비아 즉 능력과 생명을 잃은 빌라델비아만이 그들의 부요함을 자랑한다.

(3)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기를 배워야 한다.

그러므로 형제 자매들이 빌라델비아 교회의 길에 계속 머무르려면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기를 배워야 한다. 때로 나는 어떤 형제가「하나님의 축복이 우리 가운데 있다.」라고 말하는 것을 듣는다. 나도 이 말을 인정하나 이런 말은 특별히 조심스럽게 해야 한다. 조심하지 않으면 그것은 라오디게아의 냄새를 풍기게 된다. 만일 어느 날 여러분이「우리는 부자라 부요하여 아무 것도 부족하지 않다」고 하는 위치에 서 있을 때, 여러분은 라오디게아에 가깝다는 것을 기억하라!

Ⅱ. 자신을 위하여 교회의 길을 택해야 한다.

오늘 나는 여러분 앞에 이 네 가지 교회를 제시했다. 로마 천주교 이 후에 주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계속될 세 교회가 산출되었다. 오늘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은 스스로 교회의 길을 택해야 한다. 당신은 로마 천주교의 사람이 될 것인가, 아니면 개신교의 사람이 될 것인가? 당신은 로마 천주교의 하나를 따를 것인가? 혹 당신은 빌라델비아의 길을 갈 것인가? 아니면 한동안 빌라델비아였다가 오늘 과거 역사 안에 살면서 과거의 영광을 자랑하는 라오디게아 사람이 될 것인가? 하나님 앞에서 교만하고 생명에서 떠나 있으며 실제를 중요시하지 않는 반면에 오직 과거 역사만을 기억하고 자신의 부요함을 바라보는 사람들 속에는 군중의 의견, 즉 모든 사람이 범사에 함께 상의하는 것만이 남게 됨을 기억하라. 이것은 민주적인 것 같으나 몸의 어떠함이 없다. 만일 당신이 몸의 제한과 권위와 몸의 생명을 알지 못한다면 결코 형제 사랑을 알 수 없다.

이 네 교회가 계속되기 때문에 우리는 빌라델비아 안에 충성스럽게 머물러야 한다. 결코 호기심으로 로마 천주교는 어떤 것인가 묻지 말라. 호기심이 많은 사람은 항상 해를 입는다. 개신교의 각 종파를 만지지 말라. 그것은 하나님의 길이 아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전체 개신교의 운동 안에 하나님의 축복이 있는 반면에 하나님이 정죄하고 책망하시는 많은 것들이 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우리는 이것에 대해 조사하거나 물어볼 필요가 없다. 우리는 빌라델비아 교회의 위치에 서서 항상 주의 말씀을 지키며 주의 이름을 배반치 않기를 배워야 한다. 다만 형제의 위치에 서 있고 교만하지 말라! 결단코 로마 천주교 앞에서나 개신교 앞에서나 각 종파 앞에서 교만하지 말라. 일단 교만하면 당신은 더 이상 빌라델비아 교회가 아니라 라오다게아 교회이다! 언제든지 당신이 그들 앞에서 교만할 때, 당신은 더 이상 빌라델비아가 아니라 라오디게아인 것이다. 여러분은 어떤 길을 갈 것인가? 교회의 길에 있어서 형제들이 곧은 길을 갈 수 있도록 하나님이 그분의 자녀들을 축복하시기를 구한다.

주님이 정하신 교회의 길은 바로 빌라델비아 교회이다. 내가 천만가지의 근거를 다 댈 수는 없지만 많은 하나님의 좋은 자녀들이 백 가지, 천가지 증거로 이와 같은 말을 하고 있고, 이러한 길을 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개신교 전체의 문제에 대해 해결 되었다면 자세한 것은 묻지 말라. 이와같이 개신교 전체의 문제가 해결 되었다면 천 오백여개의 종파도 지나간 것이다.

주님의 길은 오직 하나, 즉 빌라델비아 교회이다. 이 길을 걸어야만 한다! 그러나 교만하지 않도록 조심하라. 빌라델비아 교회의 길을 가는 사람의 가장 큰 시험은 바로 교만이다. 즉「내가 당신보다 낫다. 내 진리가 당신보다 분명하고 내가 당신보다 더 많이 깨달았다! 우리에게는 당신네들과 달리 분명하고 내가 당신보다 더 많이 깨달았다! 우리에게는 당신네들과 달리 주님의 이름 밖에는 없다!」고 하면서 교만할 때 즉시 라오디게아로 떨어진다. 주님을 따르는 자에게는 교만이 없다. 주님은 교만한 자를 토해 내신다. 내가 여러분에게 경고하거니와 교만한 말을 하지 말라. 사람이 교만한 말을 하지 않으려면 계속 하나님 면전에서 살아야 한다. 또한 계속 하나님 면전에 사는 사람만이 자신의 부요함을 보지 않게 되고 교만하지도 않다.


추천 스크랩 전체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