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 교회는 한 지방에서 함께 모인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나온 사람들임
목양 자료
주예수찬양 2011-08-09 , 조회 (525) , 추천 (0) , 스크랩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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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 교회는 한 지방에서 함께 모인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나온 사람들임

우리가 지방교회 안에 있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가! 주님은 많은 지방 교회들을 얻기를 갈망하신다. 주님께서 어떤 도시에 등대를 얻으실 때 이것은 주님의 참된 승리이며 대적에게는 참된 수치이다. 그리고 서로 다른 도시에 있는 많은 교회들이 함께 모여 동심합의 안에 있을 때 이것이 주님께 영광이다.

지방 교회는 한 지방, 즉 시, 읍, 면에 함께 모인 하나님이 불러내신 사람들이다. 에베소서 4장 4절에 따르면 한 몸과 한 영이 있다. 그 몸과 그 영이 모두가 단 하나이므로 모든 도시에는 다만 하나의 지방 교회만 있어야 한다. 한 지방에 한 교회이다. 신약은 이 점에서 절대적으로 일관적이며 어떠한 변화도 없다(행 8:1, 13:1, 롬 16:1, 고전 1:2, 고후 8:1, 갈 1:2, 계 1;4, 11). 한 도시에는 오직 한 교회가 있어야 한다. 이것은 한 남편이 오직 한 아내만 있어야 하는 신성한 원칙과 유사하다.

그러나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상황은 전혀 다르다. 단지 오만의 인구밖에 안 되는 작은 도시에 백개 이상의 서로 다른 교회들, 즉 서로 다른 교파들이 있다. 이 모든 교파들은 분열이다. 하나님은 한 도시에 있는 모든 부르심을 받아 나온 사람들이 한 교회로서, 즉 그 지방에서 그리스도의 몸의 유일한 표현으로서 함께 모일 것을 정하셨다. 어떤 사람들은 수천 명의 믿는이가 있는 도시에서는 오직 한 교회만 있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예루살렘에 수만의 믿는이가 있었지만(행 21:20), 그러나 거기에는 오직 한 교회가 있었다(행 8:1).

로마서 16장 3절부터 5절에서 사도 바울은 브리스가와 아굴라와 그들의 집에 있던 교회에 문안했다. 로마에 있는 믿는이들이 브리스가와 아굴라 집에서 모였다는 사실은 그 수가 작았음을 가르킨다. 그러나 비록 수는 작았지만 로마에는 한 지방교회가 있었다. 한 도시에 한 교회라는 원칙은 우리가 아멘이라고 말해야 할 하나님의 길이다. 몸의 하나는 지방적으로 모든 도시에서 표현되어야 한다. 분열은 틀린 것이다(고전 1:10). 교파도 틀린 것이다. 한 도시에는 오직 한 교회만 있을 뿐이다.

뿐만 아니라 모든 지방교회들은 독립적이거나 고립되어서는 안된다. 그들은 지방적으로 지방 종파가 되어서는 안된다. 그들은 섞여야 한다. 그들은 함께 모여야 한다. 우리는 다만 우리가 있는 지방의 지방교회 안에 있는 것이 충분하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교회들 안에 즉 그 몸 안에 있을 필요가 있다.

모든 지방 교회는 지방적으로 나뉘어 있지만 개별적이 아닌

단체적으로 여전히 동일한 한 몸을 표현하는 그리스도의 한 몸임

우리는 모든 지방교회들이 그들이 존재하는 지방에 의해 분리되어진 그리스도의 한 몸이지만 여전히 개별적으로가 아니라 단체적으로 동일한 한 몸을 표현하고 있음을 볼 필요가 있다. 모든 지방 교회들은 그리스도의 한 몸이며 그들은 그들이 존재하는 지방에 의해서만 서로 분리가 되어 있다. 그렇지 않다면 그리스도의 몸 안에는 어떠한 분리도 없다. 우리의 사람의 몸 안에서 손과 발은 서로 다른 위치에 놓였다는 것 외에 결코 어떠한 분리도 없다. 마찬가지로 지방 교회는 단지 그들이 서로 다른 지리적인 위치에 있다는 이유로 서로 분리된다. 그러나 모든 교회들은 동일한 생명과 본성과 본질과 동일한 요소와 근원과 동일한 삼일 하나님을 소유한다. 마치 삼일 하나님이 나뉠 수 없듯이 그리스도의 몸인 지방교회들 또한 나뉠 수 없다.

지방 교회들은 사무적인 일들에 있어서 자치적이나

그리스도를 위한 간증과 그 영의 교통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음

지방 교회들은 사무적인 일들에 있어서 자치적이다. 그러나 지방교회들은 사무적인 일들을 위한 것이 아니며 이것들은 지방 교회들이 그리스도의 간증이 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이다. 사무적인 일에 관하여 각 지방 교회가 그들 자신의 필요와 상황을 갖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어떤 교회에는 많은 청년들이 있을 수 있다. 이것은 특별한 필요를 산출한다. 교회들 사이에 서로 다른 상황은 그들이 사무적인 일을 행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친다. 많은 실제적인 문제에 있어서 그 결정은 지방의 한계에 있어서 이루어 질 수 있다. 그러므로 각 교회는 사무적인 일에 있어서 자치적이라고 간주될 수 있다.

그러나 지방 교회들이 사무적인 일에 있어서 자치적이라는 사실은 그들이 간증이나 교통에 있어서 독립적이 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지방 교회들이 사무적인 일에 있어서는 자치적이지만, 그러나 그리스도를 위한 간증이나 그 영의 교통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다. 만일 어떤 지방 교회가 다른 교회들과 격리되고 자신만이 특별한 간증과 교통을 갖기 위해 자치를 강조한다면 이것은 전적으로 틀린 것이다. 우리는 자치가 교회의 간증이나 교회의 교통에 적용되지 않음을 분명히 알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를 위한 교회의 간증과 그 영의 교통은 지방적일 뿐만 아니라 우주적이어야 한다. 이 점에 있어서 모든 지방 교회들은 일곱 금등대로 예시된 바와 같이 본성과 기능에 있어서 동일하다. 계시록 1장에서 사도 요한은 그에게 말한 음성을 보려고 돌이켰을 때 일곱 금등대를 보았다(12절). 이것은 계시록 2장과 3장에 언급된 그들의 특별한 상황과 관계없이, 또한 교회들의 소극적인 상황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각 지방 교회는 주님 앞에 동일한 급등대로 나타났음을 보여준다. 모든 등대는 금이었는데, 이는 본성에 있어서 모든 교회들이 신성함을 상징한다. 이것은 놀라운 사실이다. 각 지방에 있는 교회는 본성에 있어서 신성하며, 금등대로 표현된다.

그러므로 인근 지방 교회들은 가능한 한

많이 섞이는 방식으로 무리지어져야 함

그러므로 인근 지방교회들은 주 예수님께서 아시아에 있는 인근 일곱 교회들을 무리 지으신 것과 같이 그리스도의 몸의 상호 건축에 있어서 영적인 유익을 위해 가능한 한 많이 섞여지는 방식으로 무리지어져야 한다. 이 우주 안에는 오직 한 몸이 있다. 이 한 몸은 많은 지방 교회들로서 많은 지방에 나타난 하나님의 한 교회이다. 비록 많은 지방 교회들이 존재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요소에 있어서 우주적으로 하나이며 그들 모두는 그 하나의 요소로 표현된다.

만일 모든 지방 교회들이 하나이며 각 지방교회가 동심합의 안에 있다면 우리는 축복을 얻을 것이다. 우리 모두는 주님을 사랑하며 주의 회복 안에서 진리를 지키고 가르치지만 우리 가운데 증가율은 너무 낮다. 거의 모든 것이 동일하다. 증가율은 우리가 어디에 있는가를 가늠한다. 우리의 길을 재고하며 우리 자신을 주 앞에 겸비하게 할 필요가 얼마나 많은지! 교회들 사이에 무리를 지음으로써 섞이는 것과 교회들 사이의 교통은 도시나 지방이나 국경을 초월하여 상황이 허락하는 한 많이 실행되어져야 한다.

섞이는 원칙은 구약에서도 세워졌다. 하나님은 열 두 지파를 한 지파처럼 섞으셨으며 일 년 삼차 예루살렘에 있는 시온 산에 함께 모일 것을 명하셨다(신 16:16).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은 좋은 땅의 풍성한 소산을 가져와서 하나님께 드리고 서로 나눔으로써 서로 격려하고 함께 누렸다. 분명히 이러한 절기가 올 때마다 모든 백성은 기쁨이 충만했다. 심지어 시온 산에 오기 전에 노중에서 그들은 시편 133편을 노래했다. 이렇게 섞임으로서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는 보존되고 표현되었다.

계시록에서 주 예수님은 일곱 교회들을 한 교회처럼 무리짓고 섞으셨다. 주님은 일곱 교회들에게 각각 하나씩 일곱 서신을 쓰셨지만 그분은 일곱 서신 모두를 함께 묶어 하나의 전체적인 서신으로서 일곱 교회들에게 모두 보내어 그들로 하여금 동일한 갖게 하셨다(계1:4, 11, 2:1-3:22). 주님의 눈에는 모든 일곱 지방 교회들은 다만 한 교회일 뿐이었는데, 이는 그분께는 오직 한 몸이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사도 바울도 역시 라오디게아와 골로새에 있는 두 교회를 함께 섞었다. 그는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편지를 썼고 그리고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골로새도 그것을 읽게 하라고 요청했다(골4:16)

그렇게 무리짓는 것은 인근 교회들이 서로 사랑하고 서로 돌보며

서로 중보기도하고 서로 목양하는데 있어서 분발하게 함

로마서 16장과 고린도 전서 16장 후반부에는 서로 다른 지방에 있는 성도들에 대한 안부를 포함한다. 이 안부를 살펴볼 때 우리는 교회들 안에 있는 성도 사이에 서로 사랑을 표현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사도행전 11장 27절부터 30절과 고린도 전서 16장 1절부터 3절과 고린도 후서 8장 1절부터 4절과 로마서 15장 25절부터 27절에서 우리는 교회들 사이의 서로 돌봄의 예를 볼 수 있다. 이러한 서로 돌봄은 물질을 주고받는 교통 안에서 보여진다. 교회들이 함께 무리지을 때 교회들 사이의 이러한 참된 서로 돌봄이 일어난다.

교회들이 함께 무리지을 때 그들은 서로 사랑하며 서로 돌보며 서로 중보기도하며 서로 목양하는 것을 체험한다. 교회 생활 안에서 주님이 교회들의 섞임을 위해 무리짓는 일을 회복하고 계신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이것은 이러한 네 가지 일들을 통해 그리스도의 몸의 실제적인 건축을 가져온다.

지방 교회는 장로의 인도직분 아래에 있어야 하며

성도들을 온전케 하기 위해 모든 은사 있는

사람들의 공급을 받을 필요가 있음

지방 교회들은 장로들의 인도 직분 아래에 있어야 하며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몸의 건축에 참여할 수 있도록 온전케 되기 위해 사도와 선지자와 복음 전하는 자와 목자와 교사와 같은 모든 은사 있는 성도들에 의해 공급을 받아야 한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모든 지체들이 그분의 몸의 건축에 유익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집안에서와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한 지체도 거절당하거나 쓸모 없게 되지 않을 수 있다.

지방 교회들이 전진하기 위하여 그들은 장로의 인도직분이 필요로 한다. 신약은 장로들이 회중에 의해 산출되지 않고 각 도시, 즉 각 교회마다 그들의 생명의 성장의 정도에 따라 사도들에 의해 임명됨을 계시한다(행 14:23, 딛 1:5). 감독으로서 장로들은 성도와 교회들의 실제적이고도 영적인 상황을 살피기 위해 근면하게 교회를 돌보아야 한다. 감독으로서 장로들의 주된 임무는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 필 사신 그분의 교회인 양 무리를 만유를 포함한 부드러운 돌봄으로 목양하는 것이다(행 20:28, 벧전 5:2). 하나님의 양 무리인 교회는 장로들의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의 소유로서 하나님에 의해 그들의 돌봄 아래 맡겨진 그들의 분깃이다. 장로들은 또한 복음 전파와 성도들을 목양하고 온전케 함과 생명 안에서 성장함과 말씀에 수고함과 교회를 봉사하고 돌보는데 있어서 본이 됨으로써 교회를 인도하고 모든 성도들로 하여금 따르게 해야 한다(벧전 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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