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의 16장에서 연보의 문제를 다루는 바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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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보석 2011-10-21 , 조회 (484) , 추천 (0) , 스크랩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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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의 마지막 장인 16장 1절부터 9절에서 바울은 연보의 문제를 다룬다.
1 절에서 바울은 “성도들을 위하여 헌금을 모으는 것에 관하여는, 내가 갈라디아의 교회들에게 지시한 대로 여러분도 그렇게 하십시오.”라고 말한다. 이것은 이 서신에서 사도에 의하여 다루어진 열한 번째 문제로서 돈과 재물과 물질적인 소유에 관한 문제이다. 모든 타락한 인류는 재물과 재산의 지배 아래 있다(마 6:19-21, 24-25, 30, 눅 12:13-19). 오순절 날 성령의 능력 아래서 모든 믿는 이들은 이 지배를 폐해 버렸으며 궁핍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기 위해 그들의 모든 재물
을 통용했다(행 2:44-45, 4:32, 34-37). 그러한 실행은 믿는 이들의 타락한 본성의 약함으로 인하여 오래가지 못했다(행 5:1-11, 6:1을 보라). 그것은 사도 바울의 시대에 이미 끝나버리고 말았다. 그러므로 믿는 이들에게는 주님의 목적을 성취하고자 주님께 드리기 위해 재물과 물질적인 것들의 능력을 이기고 사탄의 지배로부터 그것들을 해방하려면 은혜가 필요하다. 부활 생명은 믿는 이들이 그와 같은 생명을 살도록, 즉 물질적인 소유를 귀하게 여기지 않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삶과 오늘을 위한 삶이 아닌 장래를 위한 삶과 이 시대를 위한 것이 아닌 장차 오는 시대를 위한 삶과(눅 12:16-21, 딤전 6:17-19) 일시적이고 불확실한 부의 추구를 뒤집는 삶을 살도록 공급한다. 이것은 이러한 다룸이 부활 생명의 실재에 관한 것에 뒤이어 나오는 이유가 될 것이다. 어떠한 경우이든 이러한 다룸은 교회들 가운데에서 하나님의 행정과 관계가 있다.
이러한 다룸이 부활 생명의 실제에 관한 장에 뒤이어 나온다는 것은 중요한 문제이다. 부활은 단지 죄와 사망을 이기는 능력일 뿐만 아니라 재물과 물질적인 소유를 다스리는 능력이다. 그러므로 부활에 관한 장에 곧 이어서 바울은 물질적인 소유에 관한 문제로 전환한다.
우리는 고린도전서의 두 번째 부분인 11장부터 16장에서 바울이 거룩한 행정 안에 있는 문제들을 다룸을 거듭거듭 지적했다. 이 부분은 하나님의 머리되심으로부터 시작해서 별로 중요해 보이지 않는 문제인 성도들을 위한 물질적인 선물로 결론지어진다.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의 행정 안에, 또는 하나님의 행정을 위하여 있는가, 우리가 하나님의 행정을 수행하고 있는가는 우리가 얼마나 물질적인 것들과 관계되어 있으며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돈을 다루는가로 시험되어질 수 있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돈을 세상적인 방법으로 사용한다면 우리가 부활에 대하여 말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참으로 하나님의 행정 안에 있지 않은 것이다. 우리가 거룩한 행정 안에 있는 것과 거룩한 행정을 위하는 범위는 우리가 어떻게 돈과 물질적인 소유를 주의하는가에 의해 결정되어진다.
2 절에서 바울은 “매주 첫날에 여러분 각 사람은 하나님께서 번창하게 해 주신 것을 따라서 따로 저축해 두십시오. 그래서 내가 여러분에게 간 후에야 헌금을 모으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라고 계속한다. 주일의 일곱째 날, 안식일은 하나님의 창조를 기억하는 날이었다(창 2:1-3, 출 20:8, 11). 주일의 첫날은 부활의 상징으로서 주님이 죽음 가운데서 부활하신 날이다(요 20:1). 그것은 또한 주님의 날이라고 불리웠다(계 1:10). 신약의 성도들은 이 날에 모였고 그들의 소유를 드렸다(행 20:7). 이 날은 주님의 부활하심을 통하여(벧전 1:3) 그들이 주님과 함께 부활한 것을 상징하는 주님의 부활의 날이며(엡 2:6), 그들은 그들의 천연적인 생명에 의해서가 아닌 부활 생명에 의해서, 부활 안에서 그들의 연보와 함께 하나님을 경배하고 주님을 기념하기 위하여 이 날에 모였다.
우리의 드림은 부활 생명 안에서 하는 것이어야 하며 우리의 천연적인 생명 안에서 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드려지는 많은 것들은 그들의 천연적인 생명을 따라서 행해지는 것이다. 돈은 전적으로 옛 창조 안에 있는 방법으로 천연적인 생명에 의하여 생긴 것이다. 더욱이 많은 금액을 드리는 사람은 알아주지만 적은 액수를 드리는 사람은 무시된다. 우리의 드림은 이러한 것과는 완전히 달라야 한다. 우리의 드림은 부활 안에서 부활에 의해 드려져야 한다.
3 절에서 바울은 “내가 도착하면, 여러분이 인정한 사람들이 누구이든 그들에게 나의 편지와 함께 여러분의 선물을 가져가도록 예루살렘으로 보낼 것입니다.” 라고 말한다. 선물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또한 은혜라고도 번역할 수 있다. 이것은 사도의 지시 아래 이방인의 교회들과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 사이에 있는 하나의 교통이었다(고후 8:1-2, 롬 15:25-27).
여러 해 동안 우리는 주의 회복 안에서 주님의 말씀을 들었고 그리스도의 풍성함 안에서 건축되었다. 우리는 참으로 거룩한 말씀으로 영양공급을 받았다. 이제 만일 우리 모두가 돈과 물질적인 것들을 주의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행정을 위하여 사는 데 신실하다면 회복 안에 재정적인 궁핍이 없을 것이다. 예를 들어, 분명히 우리는 이 땅 위에서 주님의 움직이심을 위하여 아마 단지 2달러 50센트를 주님께 드리려고 매주일 소액의 돈을 저축하기 위하여 우리의 영과 우리의 의지를 훈련할 수 있다. 어느 날 음식점에서 점심 식사를 하는 대신에 우리는 집에서 준비한 간단한 음식을 먹을 수 있다. 그럴 때 주님께 드릴 수 있는 돈이 저축되어진다. 만일 우리 모두가 매주일 이렇게 하는 데 신실하다면 어떠한 상황이 있게 될지 상상해 보라!
영적이고 하늘에 속한 문제들을 다루는 그런 영적인 책에서 바울은 결국 매우 실제적인 재정의 문제로 전환한다. 머리되심에 대해 주님을 찬양합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머리되심 아래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나의 머리이십니다. 그의 머리되심에 관하여 나는 어떤 문제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라고 말하기는 아주 쉽다. 그러나 당신은 바울이 16장에서 제시한 것에 관해 어떤 문제도 없다고 말할 수 있는가? 우리는 죄와 사망을 이기는 부활의 승리에 대하여는 말할지
모르지만 당신의 돈과 물질적인 소유를 사용하는 것에 있어서 부활 안에서의 승리는 어떠한가? 우리의 말하는 것이 머리되심과 몸을 분변함과 은사들과 부활 등에 관한 추상적이고 비실재적인 것이 되기란 쉽다. 이러한 이유로 바울은 하나님의 지혜 안에서 부활의 문제를 다룬 직후에 드림의 문제를 다룬다. 만일 우리가 참으로 부활 안에 산다면 우리는 돈이나 또는 물질적인 것에서 문제를 갖지 않을 것이다.
2 절에서 바울은 명백하게 「매주의 첫날」을 언급한다. 우리는 이 날 곧 주님의 날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상징함을 보았다. 우리는 주일의 일곱째 날에 살고 행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날은 옛 창조를 기억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주일의 첫날에 부활 안에 살아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일곱째 날의 사람이어서는 안 되고 첫 번째 날의 사람이어야 함을 의미한다. 만일 우리가 주일의 첫날인 부활 안에 산다면 주님의 회복에는 재정적인 필요에 관한 문제가 없을 것이다.
우리는 고린도전서의 두 번째 부분이 하나님의 행정과 관계된 다섯 가지 문제들, 즉 머리되심과 몸과 은사들과 부활과 물질적인 소유의 문제와 관련된 문제들을 언급함을 보았다. 하나님의 행정은 머리되심을 요구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머리되심 아래서 거룩한 행정을 수행해 나가기 위해서는 몸이 필요하다. 만일 몸이 하나님의 행정을 수행해 나
가려면 몸의 모든 지체들에게는 기능을 발휘할 은사들이 필요하다. 따라서 우리는 머리되심과 몸과 은사들과 능력들을 갖는다. 더욱이 능력과 힘이 필요하다. 이것이 부활 생명이다. 부활 생명이 지체들로 하여금
그들의 은사로 기능을 발휘케 하여 몸으로 하나님의 머리되심 아래서 하나님의 행정을 수행해 나가도록 역사할 것이다. 이 부분에서 마지막으로 다루어진 항목은 돈과 물질적인 소유로서 우리가 부활 생명 안에서 얼마나 사는가를 입증하기 위한 시험이다.
물질적인 소유에 대한 매우 실재적인 시험은 매주일의 첫날에 관계된 문제이다. 날(日)은 우리의 생활과 관계된다. 우리가 어떤 종류의 삶을 갖느냐는 우리가 어떤 종류의 날을 갖느냐에 달려 있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생활에 실패한다면 이것은 우리가 실패한 날을 가졌음을 의미한다. 더욱이 만일 우리가 옛 창조 안에 산다면 우리는 일곱째 날 안에 사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부활 생명 안에 산다면 우리는 주일의 첫날에 사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부활 안에 있지 않다면 우리는 은사들과 몸과 하나님의 머리되심에서 끝난 것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주일의 첫날에 산다면 그것은 부활 생명 안에 사는 것이며 그럴 때 우리는 참으로 하나님의 머리되심 아래 있고 몸 안에 있으며, 유익한 방법으로 은사들을 훈련할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우리가 절대적으로 부활 안에서의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임을 우주에 선포할 수 있는 매일의 생활을 할 것이다.
그리스도에게 있어서 마지막 원수는 사망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있어서 마지막 원수는 재물과 물질적인 소유이다. 부활 생명은 우리로 죄의 능력을 이기게 한다. 부활은 또
한 그리스도께서 배역한 것들을 다스리고 그의 모든 원수들을 복종케 하는 능력이다. 주님에 의해 정복될 마지막 원수는 사망이다. 15장의 계속으로서 16장은 우리 안에 있는 부활 생명이 우리의 마지막 원수인 물질적인 소유를 이기는 것을 지적한다.
관찰과 체험으로부터 나는 많은 영적인 사람들에게 있어서 마지막으로 정복되어야 할 문제는 돈의 문제임을 증거 할 수 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성질과 그들의 약함과 그들의 죄를 이기는 데는 승리하지만 물질적인 소유의 영역에 있어서는 승리하지 못한다.
내가 젊은 그리스도인이었을 때부터 주님은 돈과 물질적인 소유의 문제에 있어서 나를 훈련하기 시작하셨다. 주님은 그분을 위하여 돈을 쓰는 것을 훈련하셨다. 젊은 사람이었지만 나는 내가 쓴 복음 전도지를 인쇄하기 위하여 얼마든지 돈을 사용하였다. 얼마의 체험으로 나는 물질적인 소유가 마지막 원수라는 것을 참으로 간증할 수 있다. 그러므로 체험에서 나는 16장에 있는 물질적인 소유를 이기는 것이 15장에서 다루어진 부활의 문제의 계속이요 또한 결론임을 깨달았다.
우리가 머리되심과 몸과 은사들과 부활과 또한 물질적인 소유를 이기는 승리를 가지고 있음을 인해 주님께 찬양하자! 승리는 우리가 주일의 첫날에 살고 있음을 증명한다. 우리는 안식일, 즉 옛 창조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아니다. 우리는 부활 안에 살고 있는 주님의 날의 백성이다. 부활 생명에 의하여 우리는 만물을 이겼으며 만물은 우리의 발아래 있다.(고린도전서 라이프 스타디 메시지 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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