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의 초점
복음 부담
주님의 보석 2011-10-22 , 조회 (353) , 추천 (0) , 스크랩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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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의 초점
 
나는 종종 복음 대집회를 갖기 전에 형제자매들이 밖에서 아주 힘들게 준비하는 것을 본다. 복음 조끼를 준비하는 사람, 광고를 준비하는 사람, 전단지를 준비하는 사람, 접대 준비를 하는 사람, 집회 장소에 대해 상담하거나 장식을 준비하는 사람, 또 다른 많은 일을 준비하는 사람이 있다. 우리는 확실히 이런 외적인 준비를 해야 한다. 그러나 더욱 해야 할 일은 바로 우리가 다 하나님 앞에서 참으로 영 안에서 준비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교통을 막는 죄를 처리해야 하며, 우리 발아래에 있도록 하고, 우리를 얽매이게 하는 세상을 처리해야 한다. 또한 우리가 부활 안에 있는 것을 가로막는 일들을 처리해야 하며, 승천의 문제 및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처리해야 한다.
외적인 준비가 두 번째로 할 일이지만 그것도 모두 필요한 것이다. 우리가 사람을 초대하여 집회에 참석하게 해야 하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는 집회에 참석하는 사람을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 이것 역시 필요한 것이다. 각 항목의 사무적인 일은 훨씬 더 필요한 것이다. 내가 이런 것들을 두 번째라고 말한다고 해서 ‘이 정도 하면 되겠지.’라고 생각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
모두가 다 준비하지 않고 사람도 초대하지 않고, 중보 기도도 하지 않고 각종 사무도 준비하지 않고 복음 조끼도 입지 않고 아무것도 상관하지 않는다고 하자. 만약 이렇다면, 그것은 너무나 극단적인 것이다. 일에는 중요한 일과 그렇지 않은 일이 있으며, 일 처리에는 빠르게 할 일과 천천히 할 일이 있다는 뜻이다. 아무튼 중요한 것을 보아야 하고 가서 신중하게 행해야 한다. 복음 집회 20일 전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중요하게 해야 할 일은 모든 사람이 복음의 부담을 갖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있는 우리의 죄 문제를 처리해야 하고, 우리에게 있는 세상 문제를 처리하며, 주님의 부활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처리하고, 주님의 하늘에 속한 것에 대한 우리의 체험을 처리해야 한다. 또한 하나님 앞에 있는 우리의 실지적인 생활을 처리해야 한다. 만약 우리 모두가 이 다섯 가지를 잘 처리한다면, 즉시 우리는 하나님과 연결되고 연합되어 하나가 될 것이다.
이때 우리가 사람을 초대하는 것은 살아 있는 것이며 남을 위해서 중보 기도하는 것도 살아 있는 것이다. 우리가 전단지를 뿌리는 것도 살아 있는 것이며 표어를 붙이는 것도 살아 있는 것이다. 접대하거나 말 상대를 해 주거나 집회가 끝날 때 사람과 이야기하거나 기도하는 것 모두가 살아 있는 것이며, 심지어 이름을 쓴 후 사람을 심방하는 것도 살아 있는 것이다. 우리가 두려워하고 걱정하는 것은 형제자매들이 복음에 대해 약간의 열심만 가질 뿐, 하나님 앞에서 죄들을 충분히 처리하지 않고 세상에 대해서도 분명하게 처리하지 않으며 부활 안에 살지 않는 것이다. 그럴 뿐 아니라 형제자매들은 승천의 위치도 만지지 못하고, 또 하나님 안에서 생활하지도 않으며 다만 마음이 약간 고무되고 시끌벅적함에 조금 전염되어, 복음 전하는 사람을 보면 전하고 싶어 하고 손님을 초대하는 사람을 보면 손님을 초대하고 싶어 하며, 자신을 접대하는 사람이 있으면 자신도 접대하고 싶어 한다. 만약 이것이 여러분과 나의 상태 태도 마음과 표현이라면 복음을 전하게 되었을 때, 우리의 모든 움직임은 모두 인위적일 것이다.
우리가 어떤 사람인가에 따라 어떤 아이가 태어난다. 우리가 주님 앞에서 이토록 가볍고 얕으며 어떤 분량과 권위도 없이 다만 흥분과 열심만으로 전단지를 뿌리고 손님을 초대하고 말 상대를 해 주고 주님을 믿도록 인도한다면, 그 믿는 사람들은 결국 우리와 같이 가볍고 얕은 사람이 될 것이고 이러한 일들은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가치도 없을 것이다. (복음의 능력 그리스도 45-48쪽)
 
교회 전체가 복음을 전하는 것임
 
복음 집회를 위해서 기도를 강화하는 것 이외에도, 형제자매들은 모두 하나의 관념, 즉 전통적인 기독교 안에서 부흥회나 전도 집회를 할 때마다 모든 움직임과 성패는 모두 전도하는 사람이나 설교하는 사람에게 달려 있다고 생각하는 관념을 바꾸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복음 집회가 한 사람이 거기에서 전도하거나 부흥회를 열거나 무슨 모임을 이끄는 것이 아니라, 교회 전체가 주님 앞에서 영적인 움직임을 갖는 몸의 움직임이며 개인의 움직임이 아님을 보아야 한다.
우리 모두가 이것은 교회 전체의 움직임이며 몸의 움직임이라는 것을 보기를 바란다. 1000명이나 되는 사람이 와서 복음을 듣지만 그날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몰라도 그것에 주의하지 않기를 참으로 갈망한다. 그것은 모든 사람에게 교회 전체가 여기에서 복음을 전한다고 알리는 것과 같은 것이다. 주님은 교회를 통하여 사람에게 은혜의 말씀을 하시기를 바라신다. 주님은 결코 사람이 타고난 관념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전도자나 설교자를 통해서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다. 우리 가운데에는 설교자도 없고 전도자도 없다. 우리 가운데에는 오직 함께 지체들이 된 사람과 오직 몸의 움직임만 있다. 형제들이 눈길을 계속해서 한 사람에게만 두지 말고,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보기를 진정으로 바란다. 우리는 주님께서 오늘날 한 사람을 사용하시기보다 교회를 사용하시려고 한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성도는 복음집회를 통하여 온전하게 됨
 
마지막으로 형제자매들이 주님 앞에서 이러한 복음의 일과 복음의 움직임은 기독교에서 일반적으로 하는 전도 집회나 부흥회와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깨닫기 바란다. 어쩌면 어떤 성도들은 또 거기에서 약간의 선동하는 일을 할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형제자매들에게 이러한 선동은 영적인 가치가 조금도 없다고 말하고 싶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받은 부담은 그분께서 안배하신 때를 붙잡아서 주님 앞에서, 복음 집회를 통하여 많은 죄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임을 반드시 깨달아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죄인이 구원받을 뿐 아니라 복음을 전하고 섬기는 우리들이 먼저 함양되고 온전하게 된다. 주님 앞에서의 나의 한 가지 갈망은 사람을 얼마나 구원받게 했는지에 있지 않고 형제자매들이 복음의 움직임 안에서 주님께 깊이 얻어지고 주님으로 말미암아 더욱더 온전하게 되는 데에 있다.
그것이 바로 축복 받는 일이다. 만약 우리가 주님 앞에서 움직임과 흥분만 있고 참되게 다룸 받거나 주님께 얻어진 것이 없다면, 설령 1000명이나 되는 사람이 우리 가운데에서 구원받았을지라도 그 결과는 여전히 낙관적이라고 볼 수 없다.
도리어 대단히 힘든 상황에 떨어질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우리의 상태가 정상적이지 않을 때는 그렇게 새로 구원받은 많은 영혼을 짊어지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주님 앞에서 다룸을 잘 받고 주님으로 온전하게 되며 우리의 상태가 정상적이라면 사람이 구원받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사람이 구원받고 구원받은 그들을 여전히 짊어지고 붙들어 줄 수 있는 능력과 분량이 우리에게 있을 것이다. 이런 결과야말로 영광스러운 것이며,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서 칭송을 받으실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원래 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장소를 얻어 삼천 명의 그리스도인과 육칠천 명의 믿지 않는 이들이 복음을 듣기를 바랐다. 이것은 한 성도가 두 사람씩 데리고 온다면 일만 명에 이를 수 있다는 뜻이다. (복음의 능력 그리스도 18-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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