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첫째가는 행위를 가지는 것”인가?
아침
주님의 보석 2011-10-22 , 조회 (204) , 추천 (0) , 스크랩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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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계시록 2장 4절과 5절에서 주님은 에베소 교회를 책망하시면서 “그러므로 너희가 어디에서 떨어졌는지를 기억하고 회개하여 첫째가는 행위를 하여라”고 말씀하신다. 무엇이 “첫째가는 행위를 가지는 것”인가? 주님은 왜 그로 하여금 첫째가는 행위를 가지라고 하시는가? 그들의 행위가 어찌 이미 열납을 받고 이미 칭찬을 얻은 것이 아닌가? 만약 이것이 주님이 칭찬하신 행위가 아니라면 “첫째가는 행위”는 무엇인가? 첫째가는 행위는 겉으로 볼 때, 에베소 사람들이 이미 행한 것과 아무 분별이 없다. 다만 내적으로 다른 원동력과 목적이 있을 따름이다. 행위는 여전히 이전과 같지만 이 행위를 발해 내는 힘은 결코 옛것에 따른 것이 아니다. 행위는 같으나 동기가 다른 이것이 바로 “첫째가는 사랑”이다. “첫째가는 행위”는 “첫째가는 사랑”으로 인하여 나타나는 행위이다. 한 성도가 첫째가는 사랑을 잃기 전과 후에 행한 일들이 비록 완전히 같을지라도 그 속의 다른 동기들은 하나님으로 하여금 그분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시게 할 것이다. 마음 안에 주님을 사랑하는 열정이 가득하여 한 일은 주님이 아주 귀하다고 여기신다. 이것에 대하여 그분은 책망하시는 것이 없다. 비록 겉으로 볼 때 과거부터 행하던 것을 계속하는 것이 별 차이가 없을지라도 사람의 마음을 감찰하시는 주님은 결코 기뻐하시지 않는다. 하나님의 눈은 우리의 속마음을 보시면서 심판을 집행하신다. 훗날 심판대 앞에서 많은 성도들이 그들의 많은 나무와 풀과 지푸라기에 놀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볼 때 이러한 일들은 모두가 대단히 중요하고 가치가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당신의 동기는 어떠한가? 이것이 하나님의 심판의 표준이다. 에베소 성도들이 행한 것처럼 무릇 주님을 사랑함으로 인하여 한 일이 아닌 것은 비록 많고 완전하고 중대할지라도 여전히 책망받는 것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 나머지는 더욱 말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에베소서를 읽고 “첫째가는 사랑”과 “첫째가는 행위”의 관계를 본다. “오직 우리는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붙잡고, 모든 일에서 그리스도, 곧 머리이신 분 안으로 자라야 합니다. 온몸은 그분에게서 나온 그 풍성한 공급을 해 주는 각 마디를 통하여, 그리고 각 지체가 분량에 따라 기능을 발휘하는 것을 통하여 함께 결합되고 함께 짜여집니다. 그래서 몸이 자람으로써 사랑 안에서 스스로 건축되는 것입니다.”(엡 4:15-16). 이것이 “첫째가는 사랑”과 병행되는 “첫째가는 행위”이다. “첫째가는 행위”는 결코 사람들이 칭찬한 것이 아니고 사람들이 늘 볼 수 있는 것도 아니며 “각 마디”가 하는 것과 같은 은밀한 일이다. 하나님이 귀하다고 보시는 행위는 결코 외면적인 위대함이나 중요함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그분의 “사랑 안에서”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하는 것이다. 이것이 영향력 있는 행위이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주님을 사랑하므로 인한 일이 없게 된다. 주 예수님의 사랑으로 하는 일들은 모두 교회를 건축하고, 서로 도우며, 연락하고 상합하는 것이며 결코 의견의 나뉨이 없다. 비록 교회가 이미 첫째가는 사랑을 버리고 첫째가는 행위를 가지지 않지만, 우리는 여전히 머리와 연결되어 범사에 그분을 향해 자라며 공급과 능력을 얻을 수 있다. 무릇 머리의 사랑의 능력을 받은 이는 모두 “첫째가는 행위”를 가질 수 있다. 지금 우리의 눈은 하나님의 교회가 황폐함과 혼란함, 첫째가는 사랑과 역사 모두가 없는 것을 본다. 그러므로 지금은 바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엎드려 스스로 낮추고 죄를 자복할 때이다. 주님은 우리가 회개하도록 부르시며(은혜의 문은 여전히 크게 열려 있음) 우리는 마땅히 속히 와야 한다. 그분이 우리로 하여금 많은 성도들이 일체의 조직을 떠나 첫째가는 사랑을 지킬 뿐 아니라 첫째가는 행위를 회복하기 원하는 것을 보게 하심을 주님께 감사드린다.
교회─안에 성도들이 있음─가 첫째가는 사랑을 버리고 결국 회개하는 데 이르는 것은 얼마나 가련한 일인가! (더욱 가련한 것은 타락한 후에 여전히 회개하지 않는 것이다!) 교회가 어떻게 이러한 지경에까지 이르렀는가? 바울은 처음에 에베소 사람들의 이러한 위험을 보게 되었다. 그러므로 에베소서 3장 14절부터 19절까지의 그의 기도가 있다. 그리스도인이 일시적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아주 쉬운 것이다. 교회(진실한) 안에서 강한 사람들에게는 다 첫째가는 사랑이 있다. 그러나 계속 끊임없이 날마다 불과 같이 불타는 사람은 도대체 몇 사람이나 있는가? 나는 몇 년 전에 뜨겁게 주님을 사랑하던 많은 사람들이 오늘날 이미 냉담하게 되었을까 두렵다. 이것은 무엇 때문인가? 바울의 기도의 말은 이 타락한 원인을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마음에 거처를 정하시게 하시며, 여러분이 사랑 안에서 뿌리를 내리고 터를 잡아서,”(엡 3:17). 무릇 터와 기둥이 없는 이들은 모두가 오래 갈 수 없다. 만일 우리의 사랑이 나무나 집에 뿌리가 있고 기초가 있다면 우리의 사랑은 날마다 모두 “첫째가는”의 것이다. 이것은 어디로부터 오는가?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마음에 거처를 정하시게 하시며,” 이것은 사랑에 뿌리가 있고 기초가 있는 근원이다. 우리의 가장 큰 위험은 비록 많은 영적인 지식은 가지고 있으나 그리스도가 우리 마음에 거하는 체험이 없는 것이다. 바울이 에베소의 성도를 위해 이렇게 기도한 데에서 그들에게 이러한 체험이 없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이미 하나님의 사랑(1:5-8)을 얻었지만, 아직 이 사랑이 그들의 마음 안에 뿌리가 있고 기초가 있는 것을 얻지 못했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들을 위해 구했다. 그리스도가 참으로 우리 마음 안에 거하시는가? 우리는 절대로 이 문제를 마음대로 대답해서는 안 된다. 절대로 이미 있다고 가정하고 억측해서는 안 된다. 이 문제에 있어서 우리는 골방에 들어가서 그분께 기도해야 한다.(워치만 니 전집 1집 4권 - 기독도보 (2) 148-15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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