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말씀을 청종하는 것과 이기는 것을 연결시키는 것은 아주 의미있는 것이다
아침
주님의 보석 2011-10-22 , 조회 (312) , 추천 (0) , 스크랩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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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계시록의 일곱 교회들에게 주어진 서신에서 성령의 말씀을 청종하는 것과 이기는 것을 연결시키는 것은 아주 의미있는 것이다. 성령의 말씀을 청종하고 사람들과 세상 혹은 첫째가는 사랑을 버린 교회를 청종하지 않는 것이 곧 이기는 것이다! 이 약속과 에베소의 상황은 얼마나 상합하는지! 인류의 조상에게는 원래 죄가 없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선악을 분별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명하셨다. 그들은 마땅히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어야 했다. 사탄은 와서 그들이 하나님을 거역하도록 미혹하고 금지한 열매를 먹게 했다. 이로 인해 그들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게 되었고, 영원한 생명을 주는 생명나무를 영원히 떠나게 되었으며, 처음의 위치를 잃어버렸다. 마찬가지로 처음의 교회는 얼마나 성결했는지! 그러나 교회는 점점 마귀의 미혹을 받아서 첫째가는 사랑을 버렸고, 교회가 일종의 조직적인 사회가 되게 함으로써 간증의 자격을 잃게 하였다. 그러나 지금의 약속은 예전과 다르다. 이제는 더이상 에덴동산이 보이지 않고, 하나님의 낙원이라고 말한다. 곧 주 예수님의 하나님, 주 예수님이 아시는 하나님의 낙원이다. 지금 동산 가운데에는 성도들의 시험이 되고 그로 하여금 책임지게 하는 선악 지식의 나무의 열매가 없다. 동산 가운데에는 오직 한 나무, 생명나무가 있어 이기는 자들로 하여금 영원히 누리게 한다. 이기는 성도가 얻는 것은 아담이 잃은 것보다 더 많고 더 아름답다. 그러나 이 생명나무를 얻는 자의 조건 역시 더욱 어렵다.
아담은 그의 처음 위치를 지키면 되었지만, 오늘날 성도들은 지금 이겨야 한다. 그들은 오직 이겨야만 첫째가는 사랑으로 회복될 수 있으며, 첫째가는 사랑의 행위를 회복해야 이길 수 있다. 또한 세상 사람들은 이미 그의 낙원을 잃었으며, 그가 영원히 살지 못하도록 이미 생명나무로부터 떠나도록 쫓겨났다(창 3:22). 그러나 가련하게도 사람들은 이 세상이 하나님께 정죄받은 것임을 잊고서 여기에 하나의 낙원을 세워 영원히 안주하려 한다! 세상을 사모함을 인하여 에베소 교회는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에서 냉담해진 것이다. 주님은 어떤 방법을 사용하여 그들을 치료하시는가? 주님은 믿는 이들에게 그들의 하늘에 속한 위치를 기억나게 하신다. 세상은 결코 그들이 안주할 곳이 아니다. 믿는 이들은 그들의 나그네의 성질을 잃어서는 안 된다. 낙원은 믿는 이들의 하늘의 집이다. 우리의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그곳에 감추어졌기 때문에, 우리는 마땅히 그곳을 그리워할 곳으로 생각해야 한다. 비록 우리가 장래에 반드시 실재적인 낙원이 있을 것을 알고 있고, 성경에서 말하는 그 안의 광경 또한 모두 실제이지만, 실제적인 것 외에 영적인 의미도 있다. (계 22:1-2). 영세에 있는 거룩한 성의 이 그림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것을 읽을 때 사람으로 하여금 집을 생각하게 한다!(이러한 광경들은 모두가 실지적인 것이다. 우리는 지금 영적인 의미를 대략 보기로 한다.) 길은 움직임과 역사를 나타낸다. 강은 성령이 사람에게 생명을 주는 흐름이 되었음을 나타낸다. 생명나무는 길과 강의 중앙에 있다. 그리스도는 거룩한 성의 모든 사물의 초점이시다. 모든 일의 움직임이 그분을 중심으로 하고, 그분은 모든 일의 맥박이시다. 그분은 또한 강 가운데 계신다! 성령이 세상에서 주 예수님을 그분의 제목으로 삼는 것처럼 하늘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분은 중앙에 계실 뿐 아니라 또한 이편과 저편에도 계신다. 당신이 어떤 쪽에서 본다 하더라도 생명나무와 그것의 실과를 볼 수 있다! 매달을 결코 공허하고 단조롭고 무료한 생활로 보내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그리스도의 아름다움과 만족을 맛봄으로 지낸다. 영적인 세월 가운데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각종 과실을 맛보아야 한다. 이기는 자의 상은 바로 이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중심 삼는 것을 잊어버린 에베소 사람들 중에서 만약 스스로 높아진 것을 바로잡을 수 있다면 이 상을 얻게 될 것이다. 장래에 이와 같을 뿐 아니라 오늘날에도 이기는 자는 이미 이것을 체험하고 기쁨으로 삼는다. 여기에 귀 있는 자가 한 사람도 없는가? 귀 있는 자는 듣고 이기기를 원한다! 또한 동산 중앙의 생명나무에는 또 하나의 의미, 곧 의지하는 생명의 의미가 있다.
아담은 마땅히 이것을 얻어야 했다. 비록 그 자신에게 죄가 없었을지라도, 생명나무의 공급을 얻지 못한다면 오래가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분의 피조물들이, 그들의 생명이 하나님께 의지하는 종속된 생명이며, 독립할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하기 원하셨다. 보혈로 구속함을 입고 영생을 얻은 사람의 생명이라 할지라도, 역시 하나님께 의지하는 종속된 것이다. 이러한 의지함으로 인하여 지속될 수 있다. 우리의 생명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 곧 생명 안에 있는 생명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곧 생명이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영원히 그분의 과실을 누릴 것이다. 에베소 성도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이 말씀을 받는 것이었다. 동등한 위치에 처해 있는 성도들, 그들의 마음이 어찌 이 약속으로 인하여 뜨거워지지 않겠는가? 사람의 생각, 감정, 의지가 만약 독립된다면, 이는 곧 사람의 실패이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이는 주님과 한 항목, 한 항목에서 서로 통하며 그분의 풍성을 받아들여 일상생활의 능력이 되게 할 수 없다. 지금 의지하는 복을 아는 자가 더욱 장래를 바라보며 좋은 환경에 더욱 큰 열매를 바라지 않겠는가? 훗날 영세 안에서 우리는 의지하는 기쁨을 더욱더 알게 될 것이다. 의지함을 통해서 우리가 그분의 영원한 사랑을 맛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주님이 우리의 마음을 얻으사 우리의 찬송을 받으시기 원한다. 아멘! (워치만 니 전집 1집 4권 - 기독도보 (2) 171-17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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