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성경 안에서 집회 장소는 어떠한 것인가
목양 부담
주님의 보석 2011-10-22 , 조회 (367) , 추천 (0) , 스크랩 (0)
출처
원문
신약 성경 안에서 집회 장소는 어떠한 것인가
 
주님께서 이 땅에서 가지신 집회는 여러 번 산에서 있었다. 세 번의 가장 중요한 강론 중 두 번이 산에서였다. 한 번은 천국의 실재를 소위 말하는 팔복산(八福山)에서 말씀하셨다. 한 번은 예언에 관한 것을 감람산에서 말씀하셨다. 또 한 번은 천국의 외형을 먼저는 해변에서, 그것에 대한 해석의 시작을 배에서 하셨고, 후에는 집 안에 들어가셔서 말씀하셨다. 마지막 날 저녁에 주님은 사람의 집, 곧 큰 다락방에 가셨다. 교회는 첫번째로 모여서 만찬을 그 큰 다락방에서 가졌다. 주님이 부활하신 후 두 번 제자들에게 나타나 말씀하신 것은 집 안에서였다(요 20:19, 26). 이것이 그들의 집회 장소였다.
오순절 열흘 전에 제자들은 다락방에서 모였다. 그들은 만찬의 설립과 성령의 강림을 상관하지 않고 다만 다락방에서 모였다. 그 후 삼천여 명이 구원을 받았는데 그들은 어떤 때에는 사람들의 집에 분산되었고 때로는 성전을 빌려서 함께 모였다. 『그들이 날마다 한마음 한뜻으로 성전에 모이고, 이 집 저 집에서 떡을 떼기를 꾸준히 계속하고, 기쁨과 단순한 마음으로 함께 음식을 먹으며,』(행 2:46). 여기서 우리는 그들이 수가 많았기 때문에 평상시에는 이집 저집에서 모였고 함께 모일 필요가 있을 때에는 부근의 광장이나 성전에서 모였음을 볼 수 있다. 만일 우리가 어떤 지방에 갔을 때 믿는 사람이 많지 않다면 모일 수 있는 곳에서 모일 수 있다. 사람들이 많으면 여러 집으로 나누어 모일 수 있다. 이것은 교회가 한 곳에 모일 수 없다는 말이 아니다. 필요하다면 한 곳에 모일 수 있다. 사람들이 많고 또 특별히 모여야 한다면 성전을 빌리거나 다른 공공 장소를 빌릴 수 있다. 그러나 평상시에는 여러 가정에서 나누어 모일 수 있다.
오순절 후 사도들이 풀려난 후 「믿는 이」들이 있는 곳으로 갔다(행 4:33). 그들은 그 믿는 이들과 함께 있으면서 무엇을 했는가? 그들은 『그들이 간구하기를 마치자, 모여 있던 곳이 진동하였고, 그들 모두가 성령으로 충일되어,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기 시작하였다』(행 4:31). 그들이 모인 곳은 무슨 예배당이나 복음당이 아니라 믿는 이들이 있는 곳이었고 믿는 이들의 집이 곧 집회 장소였다. 어떤 정식 건물이 있어야만 집회소인 것이 아니라 신자들이 있는 장소가 곧 집회 장소이다.
사도 시대에 사람들이 많을 때 그들은 때때로 솔로몬의 행각에서 모였다(행 5:12). 이것은 그들 전체가 모이는 장소이다. 당시 성전 부근에 큰 광장이 있었는데 교회 인수가 많을 때 그들은 이런 장소에 모였다. 당시 높고 뾰족한 예배당은 없었다. 당시의 교회는 인수가 많을 때 솔로몬의 행각처럼 빈 장소를 찾아서 그들의 집회 장소로 삼을 수 있었다. 그들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파하기를 쉬지 않았다(행 5:42). 그들은 일반적인 집회를 믿는 이들의 집에서 가졌고 인수가 많을 때에는 공공장소를 빌렸다.
베드로가 옥에 갇혔을 때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빌었다(행 12:5). 여기서 당신은 예루살렘에 있는 전체 교회가 베드로를 위하여 기도한 것을 볼 수 있다. 우리는 예루살렘 교회의 인수가 적지 않음을 알고 있다. 한번은 삼천, 또 한 번은 오천 명이 구원 받았으므로 도합 만 명 이상이 될 것이다. 그들은 한 장소에 모인 것이 아니라 각 가정에서 나누어 모였다. 그러나 성경은 그들을 교회라고 말한다. 그들이 가정에서 나누어 모였다. 근거가 어디 있는가? 우리는 베드로가 감옥에서 나온 후 아마 생각해 보고 마가라 불리우는 요한과 그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으로 간 것을 본다. (교회에 대한 질문과 답변 15-16쪽)
오늘날 주님의 사역은 큰 회중을 건축하는 것이 아니다. 새 길 안에서 성도들을 건축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것들을 포함한다. 1) 어떻게 문을 두드리고, 짧은 시간 안에 높은 복음을 가지고 사람들을 접촉하며, 그들을 물 안에만 아니라 삼일 하나님 안으로 침례를 주고, 그들의 가정에 가정 집회를 세우는가를 배움 2) 어떻게 사람들을 삼일 하나님과 생명과 그리스도와 교회에 관한 진리들로 양육하는가를 배움. 이것은 우리가 가정들 안에서 진리들을 가르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3) 어떻게 모든 새사람을 생명 안에서 자라도록 돕는가를 배움 4) 어떻게 그들을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대한 온전한 지식과 실행 안으로 들어가게 하는지를 배움. 이것은 나 또는 여러분 몇몇에 의해 행해질 뿐 아니라, 모든 사람에 의해 행해질 것이다. 문 두드리는 사람들은 모두 이것을 배우게 될 것이다.
이삼 년 후에 성도들은 다른 입맛을 갖게 될 것이다. 그들은 여러분에게 대집회들을 갖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할 것이다. 그들은 그들 자신이 복음을 전파하고 진리를 가르칠 수 있는 가정 집회들을 갖기를 좋아한다. 그들에게는 어떤 종류의 조직도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지난 15년 동안 중국 대륙에 무슨 장로들이 있었는가? 여러분은 그것이 혼란이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나는 그런 ‘혼란’때문에 기쁘다.
나는 이런 종류의 ‘혼란’을 보는 것을 좋아한다. 만일 그러한 ‘혼란’이 있을 수 있다면, 15년 후에 또 다른 오천만 명이 주님께 인도될 것이다. 이것은 놀라운 일일 것이다. 감리교와 장로교와 루터교와 성공회와 같은 큰 교파들이 모두 인수가 감소해 왔고, 최근의 신문 기사에 따르면 지금도 감소하고 있다. 우리는 이런 하락하는 상황에 머무는 것이 기쁜가? 우리는 이러한 하락에서 깨어나야 하지 않는가? 우리는 다른 사람에 대해 말하지 말고, 우리 자신에 대해 심사숙고하고 우리의 옛 길을 떨쳐 버려야 한다. 나는 옛 길 안에 있는 일을 돌보는 데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나는 옛 길이 죽이는 길임을 깨닫는다. 우리는 이런 종류의 일에 머무는 것이
기쁜가? 나는 가정들을 보고 싶다. 나는 이 ‘가정’이
라는 말, 곧 가정, 달콤한 가정을 좋아한다. 나의 꿈은 가정 집회들이다. 지방 교회들의 건축을 위한 기초는 가
 
정들이지, 큰 회중이 모이는 집회소들이 아니다. 성도들이 문 두드리러 나가기 위해 일어날 때, 그들은 문 두드리는 것에, 사람들을 욕조에 침례 주는 것에, 가정 집회들을 갖는 것에, 가정 집회들에서 사람들을 가르치는 것에 매혹될 것이다. 그들은 집회소에서 대집회들을 갖는 것에 주의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여러 해 동안 옛 길 안에서 집회를 해 왔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옛 길의 집회를 지루해 한다. 모든 장로들은 문 두드리는 장로들이 되어야 하고, 문 두드리러 나가는 데 앞장서야 한다. 주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긍휼을 허락하셔서 옛 길을 철저히 떨쳐 버리고 주님의 새 길을 완전히 취하게 하시기를 원한다. (필사적이고 유일하게 복음을 위해 삶 23-25쪽)

추천 스크랩 전체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