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교회가 한곳에 함께 모여
목양 부담
주님의 보석 2011-10-22 , 조회 (500) , 추천 (0) , 스크랩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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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라 불리우는 요한과 그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기도하고 있었다(행 12:12). 온 교회가 다 한곳에 모인 것이 아니다. 그들에게는 물질적인 집회소가 없었다. 그때 인수가 많았기 때문에 집회소를 지을 필요가 있었다면 사도들은 벌써 그들을 위하여 집회소를 지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이런 필요가 없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집에서 기도하고 어떤 사람들은 저 집에서 기도했기 때문에 베드로는 어떤 집으로 가는 것이 좋은가를 생각해 보고 마가의 어머니의 집으로 갔던 것이다. 이것이 당시의 교회 집회 장소의 하나였다. 그러므로 한 지방에서 교회 인수가 많지 않을 때 장소가 충분히 크다면 한 곳에 모일 수 있다. 만일 인수가 너무 많고 장소가 또 충분히 크지 않다면 가정에서 나누어 모일 수 있다. 때로는 공공장소를 빌려서 전체가 모일 수 있다. 이것이 성경에서 함께 모이고 나누어 모이는 방법이다.
사도행전 13장에서 14장에 왔을 때 안디옥에 또 다른 시작이 있었다(앞 부분은 예루살렘의 노선이다). 사도들은 어떻게 하였는가? 바울은 밖에서 안디옥으로 돌아올 때 어디에 가서 모였는가? 바울이 그곳에 『그들이 도착하자 교회를 모이게 하여,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행하신 일들과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열어 주신 것을 자세히 말하고,』(14:27). 여기서 중요시한 것은 집회소가 아니라 회중(교회)이다. 이 집회 장소는 아마 임대한 것이 아니면 형제의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바울이 드로아에 이르러 『그 주의 첫날에 우리는 떡을 떼려고 함께 모였다. 바울은… 모인 사람들과 이야기를 한밤중까지 계속하였다. 우리가 모인 다락방에는 등불이 많이 켜져 있었다. 유두고라는 청년이 창문에 걸터앉아 있었는데, 바울의 말이 더 오래 계속되자, 잠을 이기지 못하고 몹시 졸다가 삼 층에서 떨어졌고, 일으켜 보니 죽어 있었다. 바울이 내려가서 그 청년 위에 엎드려 그를 끌어안고 “소란을 피우지 마십시오. 그의 생명이 그 안에 있습니다.”… 사람들이 살아난 그 청년을 데리고 가서, 적지 않은 위로를 받았다』(행 20:7-12). 여기서 당신은 그들이 모인 장소가 삼 층 다락방이었음을 볼 수 있다. 또한 창에 걸터앉은 사람도 있었다. 드로아에서 그들의 집회는 매우 정식적이지 않은 것 같다! 오늘날 아름답고 휘황찬란한 모든 예배당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런 건물을 주의하게 한다. 그곳은 돈 있는 사람들이 거기에서 무슨 광고를 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드로아에서 믿는 이들이 모일 때 그들은 삼 층 다락방에서 모였고 또한 창에 걸터앉은 사람도 있었다! 사실 이것이 더 집회 장소답다. 오늘날 사람들이 집회 장소에서 한줄씩 한줄씩 질서 있게 앉아 하는 집회는 성경에 있는 것이 아니다. 성경에서 교회의 집회 장소는 매우 단순하다. 그 안에 사람들은 창에 걸터 앉을 수도 있고 마리아와 같이 땅에 앉을 수도 있다. 오늘날 기독교의 집회는 지나치게 정식적이다! 우리는 다락방의 제도를 회복해야 한다. 다락방 아래는 장사하는 곳이고 사람들이 왕래하는 곳이며 다락방 위는 비교적 가정적이다. 마지막 저녁의 만찬은 다락방 위에서 있었고 오순절 날 성령의 강림하심도 다락방 위에서였다. 여기서의 집회도 또한 다락방 위에서이다. 어느 때 사람들로 하여금 다락방 아래 앉게 하는가? 다락방 아래에서는 공경함이 좀 있지만 거리감이 있다. 다락방 위에서는 조금은 멋대로 이지만 친밀함이 있다. 원칙상 하나님은 우리가 다락방 위에 모이기를 원하시고 그렇게 정식적이지 않고 서로가 더욱더 가정의 분위기 안에 있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그분의 자녀들이 가정의 분위기가 있는 곳에 함께 모이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성경에는 정식적인 집회소에 대한 기록이 없다. 성경 안의 집회 장소는 어떠한가? 교회는 정식 집회 장소가 없이 늘 사람의 집에서 모였다. 성경은 여러 차례 교회가 사람의 집에 있다고 말했다. 예를 들어, 『그들(브리스가와 아굴라)의 집에 있는 교회에게 문안하여 주십시오.』(롬 16:5). 『아시아의 교회들이 여러분에게 문안합니다. 아굴라와 브리스가가 그들의 집에 있는 교회와 함께 주님 안에서 여러분에게 진심으로 문안합니다.』(고전 16:19). 『라오디게아에 있는 형제들과 눔바와 그의 집에 있는 교회에게 문안해 주십시오.』(골 4:15). 『… 우리가 사랑하는 동역자 빌레몬과… 그대의 집에 있는 교회』(몬 2). 그러므로 신약 성경에는 「집에 있는 교회」가 최소한 세 개 있다. 집에 있는 교회란 무슨 뜻인가? 이는 교회 인수가 많지 않고 형제의 집도 크지 않으므로 그의 집에서 모였기 때문에 이런 교회를 ○○집에 있는 교회라고 부르는 것이다. 당시 사도 시대의 집회 장소는 반드시 정식 규모의 큰 회당이 아니었다(사역 안에서 필요한 전도하는 장소는 또한 별개의 문제이다).
교회가 형제의 집에서 모이는 것이 교회의 정규적인 방법이다. 오늘날과 같은 웅장한 건물은 세상의 허영과 육체의 자랑에 속한 것이다. 집에 있는 모임을 가져야 한다. 집에 있는 모임에는 많은 유익이 있다. 만일 집에서 모인다면 모든 사람들이 더욱 자유스럽고 억압을 받지 않을 수 있고 모든 사람이 함께 영적인 일을 말할 수 있다. 만일 사람들을 집회소로 데려온다면 그들은 다 질서 있게 되어 버리고 감각 없는 사람같이 되어 버린다. 이럴 때 결국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말씀을 전하게 하는 경지에 이르고 수동적인 사람이 된다. 이것은 교회 집회가 아니다. 교회 집회에는 마땅히 가정의 분위기가 충만해야 한다. 모든 사람이 성령의 속박 외에 다른 속박을 받지 않는다. 그러므로 집회에서 자매들이 질문하는 것조차도 금지된 것이 아니다(고전 14:35).
그리고 가정에서의 이런 집회는 형제들로 하여금 교회의 일이 그들의 일이고 또한 그들과 매우 가까이 있음을 느끼게 한다. 얼마나 많은 믿는 이들이 교회 일은 높고 큰 것이며 그들과 얼마나 동떨어진 것이라는 느낌을 가지고 있는가! 그 이유는 웅장한 집회소가 있고 또 그 안의 사역자가 모든 책임을 맡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집회가 가정에 있다면 이런 느낌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믿는 이들은 교회의 친근함과 영적인 책임을 느끼게 될 것이다. 또한 가정에서의 집회는 이웃들로 하여금 그 가정이 주님을 믿는 가정임을 알게 한다. 또한 간증하고 복음을 전파하는 데 있어서도 큰 유익이 된다. 많은 사람들이 예배당에 가기를 꺼려하지만 집에 오는 것을 꺼려하지 않는다. 집에서의 집회는 기독교의 물질적인 손실을 피하게 할 수 있다. 처음 삼세기 동안 그리스도인들이 로마의 핍박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교회가 지하실에서 모이고 산굴에서 모였기 때문이다. 이런 집회 장소는 반대자가 찾을 수 없는 것이다. 누가 고발하지 않는다면 반대자들이 그들을 찾을 수 없다. 오늘날 높고 큰 예배당은 너무나 찾기 쉽다! 그리고 만일 이것이 파괴되면 믿는 이들은 즉시 흩어지고 교회도 즉시 파괴된다. 이것이 참으로 기독교이다. 과거에 그리스도
인들이 평상시에 모인 장소는 그렇게 크지 않고 사람들
 
로 하여금 주의하지 않게 하는 동시에 그렇게 비용이 많이 들어가지 않았다. 오늘날의 예배당은 사람이 만든 것이고 하나님의 당초의 뜻이 아니다(사역을 위한 집회 장소는 별개의 문제이다).
우리는 지방 교회가 집회 장소를 가질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님을 기억하기 바란다. 내 말은 가정의 모임을 교회의 본위적인 집회로 여겨야 한다는 것이다. 공공적인 장소는 계속적인 집회 장소가 아니다. 고린도 전서 14장 23절은 공공장소가 아닐 수도 있다. 가령 공공장소가 있다 하더라도 이것에 근거하여 가정 집회를 취소할 수 없다. 고린도 전서 14장 23절은 『온 교회가 한곳에 함께 모여』라고 말한다. 교회가 한 곳에 모일 때가 있다. 오순절 때에 제자들은 한 곳에 모였다(행 2:1). 후에 그들은 때때로 솔로몬의 행각에서도 모였다(행 5:12). 그러므로 믿는 이들이 한 곳에 모일 필요가 없다는 말이 아니다. 많은 때 교회는 어떤 장소를 찾아서 한 곳에 모일 수 있다. 그러나 결코 가정의 냄새를 잃어서는 안 된다. 항상 모여야 한다. 성경에는 오늘날 같은 정식 집회소가 없다. (교회에 대한 질문과 답변 17-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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