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서에서의 대가
목양 부담
주님의 보석 2011-10-23 , 조회 (302) , 추천 (0) , 스크랩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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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서에서의 대가
 
복음서에서 주님은 여러 차례 사람들을 부르신 것을 언급하셨다. 솔직히 말한다면 주님이 사람을 부르신 중요한 목적은 사람들을 구원하는 데 있지 않고 그를 따르게 하는 데 있다. 예를 들어, “나를 따라 오십시오”(마 4:19),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눅 5:11), “그대가 가진 것을 다 팔아…나를 따르십시오.”(막 10:21),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이 없습니다.”(마 8:20), “죽은 사람이 자기네의 죽은 사람을 장사하도록 하십시오.”(마 8:22),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사람은 하나님의 왕국에 합당하지 않습니다.”(눅 9:62) 등의 구절 외에도 많은 곳에서 주님을 따르는 데 지불하는 대가가 얼마나 큰가를 보여 준다. 복음서에서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 하신 유일한 요구는 모든 것을 버리라는 것이었다. ‘모든 것’은 곧 ‘모든 소유’를 뜻한다. 오천 원을 가지고 있는 자는 오천 원을 내고 오만 원을 가지고 있는 자는 오만 원을 내는 것이다. 둘이 지불한 것이 모든 소유이기 때문에 주님 보시기에 그들이 지불한 대가는 동등한 것이다. 과부가 넣은 두 렙돈을 칭찬하시는 이유는 그것이 과부의 모든 소유인 생활비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돈을 가장 많이 넣은 사람만이 대가를 지불한 사람인 것은 아니다. 모든 소유를 넣는 사람만이 대가를 지불하는 사람이다. 주님은 우리가 얼마나 내는가는 전혀 계산하지 않고 우리가 낸 것이 우리의 모든 소유인가의 여부를 계산하신다. 복음서에서 요구하는 ‘모든 것’은 우리의 본래 있는 모든 것을 말한다. 우리의 부모나 처자나 자녀나 형제나 자매나 집이나 사업이나 학문이나 지위나 명예나 이익이나 애호(愛好)나 야망이나 습관이나 생명 등의 모든 것이 복음서에서 요구한 대가이다.
예를 들어, 오늘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친척 관계를 끊지 못하고 있다. 내가 말하는 것은 사람과의 왕래를 끊으라는 것이 아니라 심정에서 관계를 끊으라는 말이다.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우리의 원래의 모든 것을 버려야 한다는 말이다. 이것은 주님의 가장 엄밀한 요구이다. 언제든지 당신이 주님을 만질 때에는 주님의 요구가 있는 법이다. 당신이 교통 가운데서 참으로 주님을 만질 때에는 주님의 요구가 없을 수 없다. 우리가 지불한 대가에 대해 주님은 만족하시지 않고, 우리를 만날 때마다 우리에게 요구하신다. 주님의 가장 현저한 임재는 바로 그가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때이다. 우리 편에서는 주님과의 교통을 잃을 때만이 주님의 요구를 느끼지 못하고, 주님 편에서는 오직 새 하늘과 새 땅에 가서야 우리에게 요구하시지 않는다. 오늘은 주님이 사람을 쓰실 때이고 그의 역사를 위해 사람을 얻을 때이므로 오늘날 우리에게 계속 요구하시는 것이다. 교통 가운데 주님의 요구는 언제나 아주 세밀하다. 그 후로 그 요구는 갈수록 더 커지고 깊어지며 강력하게 된다. 주님이 요구하시는 느낌을 억누르는 것은 가장 손해 보는 일이다. 그러한 느낌을 억누를 때 우리는 주님과의 교통을 잃게 된다. 또한 이러한 상태가 계속되면 주님은 우리에게서 나아갈 길이 없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로 방향을 돌리실 수밖에 없게 된다. 만일 우리가 주님의 요구에 응하고 순종을 배우고 기꺼이 대가를 지불한다면 갈수록 우리는 민감한 느낌을 갖게 될 것이다. 이러한 공과(工課)를 계속 배운다면 거의 온종일 주님이 계속 요구하고 계심을 느끼게 될 것이다.
만일 우리가 주님의 요구에 응하지 않고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다면 두 가지 결과를 갖게 된다. 첫째로 우리 편에서는 우울과 근심 속에서 지내게 된다. 둘째로 주님 편에서는 우리 몸에서 그분의 용도를 나타낼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의 순종이 잘못될지라도 불순종하지는 말아야 한다. 우리가 지나치게 순종하더라도 순종이 부족해서는 안 된다. 또한 우리가 주님의 요구에 응할 때에도 두 가지 결과를 갖게 된다. 첫째로는 기쁨이 충만하게 되고, 둘째로는 우리의 용도가 나타나게 된다.
우리는 주님을 위해 쓰임받는 기본적인 조건이 주님의 요구에 응하는 것임을 보아야 한다. 이러한 사람은 교리를 많이 알지 못하고 기도가 많지 않더라도 주님을 위해 쓰임받을 수 있다. 그 이유는 왕왕 주님의 요구에 응하여 대가를 지불하므로 얻은 능력이 우리가 많은 기도를 하여 얻은 능력보다 월등하고, 성령 충만함으로 얻은 능력보다 월등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성령 충만을 주의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오순절 날 성령 충만을 얻은 사람들이 지불한 대가가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를 보지 못했다. 오순절 날 그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루살렘의 한 다락방에 온 사람들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성령 충만을 얻으려고 하지만 대가를 지불하는 공과(工課)는 배우려고 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사람들이 많은 일을 하지만 그 일이 오래 유지될 수 없는 이유이다. 일의 열매가 계속 보존되려면 일하는 사람이 반드시 공과(工課)를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 사역의 열매가 얼마나 남아 있느냐는 사역하는 사람이 얼마나 공과를 배우는가에 달려 있다. 사역의 능력은 공과를 배우는 데 있다. 공과를 배우려면 반드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우리가 주님 앞에 쓰임받는 것은 주님 앞에서 지불한 대가에 근거를 둔다. 사람들은 주님 앞에서 바울과 베드로 같이 쓰임받기를 사모하지만 그들이 주님 앞에 지극히 큰 대가를 지불한 것은 소홀히 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가 주님 앞에서 별 쓸모가 없는 이유는 기꺼이 대가를 지불하려 하지 않고 주님의 요구에 응하지 않으려고 하여, 우리의 원래의 명예와 학문과 지위와 장래와 일생을 버리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주님의 임재가 부족하고 교통 가운데서 주님을 만나기가 어려운 것이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주님 앞에서 별로 쓸모가 없게 된다.(열두 광주리 가득히 9권 170-17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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