탕자의 회개
아침
주님의 보석 2011-10-23 , 조회 (251) , 추천 (0) , 스크랩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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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5장 23절은 “또 살진 송아지를 끌어내다 잡아라. 우리가 먹고 즐거워하자.”라고 말한다. 이 구절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기쁨, 즉 사람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기쁨을 말해 주고 있다. 우리는 한 죄인이 구원받을 때 그 죄인이 얼마나 기쁠까를 생각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죄인 한 명을 구원할 때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시는지를 보지 못했다. 만약 우리가 이것을 보았다면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될 것이다.
누가복음 15장 29절에서 큰아들의 마음은 아버지가 그에게 기쁨을 주셔야 한다는 것이었다. 작은아들은 모든 것을 소비했지만 아버지를 기쁘게 했다. 큰아들은 아버지의 집에서 자기 본분을 다했지만 그는 아버지에게 자신의 기쁨을 구했다. 아버지는 그가 들어가서 함께 누리기를 원하셨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과 함께 누리기를 원하신다. 우리는 그분의 마음을 알아야 한다. 큰아들은 자기의 즐거움을 위하여 염소 새끼를 요구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 혼자 누리라고 무엇을 주시지 않는다. 모든 것은 사람과 하나님이 함께 누리기 위한 것이다.
나는 ‘입맞춤’과 ‘잔치’를 비교하여 여러분에게 보여 주겠다. 아버지가 자기 아들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출 때 그러한 입맞춤은 아들의 마음을 즐겁게 하고 만족을 주었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입맞출 때 아들은 아버지께서 이미 그의 죄를 사하셨고 다시는 그의 죄를 기억하지 않음을 깨닫게 되어 죄 사함의 자유와 만족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아들이 잔치에 앉아 있는 것은 아버지의 마음을 즐겁게 하고 만족하게 했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그의 아들을 얻었기 때문이다. 사람이 구원받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 그들은 그들의 강렬한 요구 때문에 하나님이 그들을 구원하셨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구원하기를 기뻐하신다는 것을 모른다. 사람을 구원하는 일에서 하나님은 기쁨을 얻으신다. 만약 우리가 “네 죄를 사하였다”는 아버지의 말씀을 들었다면 우리에게 평강과 기쁨이 있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아직 죄 사함의 자유를 얻지 못했다면 가련한 것이다. 오늘 여기에 사람들이 모두 죄 사함을 받고 평강을 얻었다면 어떤 사람에게 묻거나 어떤 증거를 구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이 하신 말씀으로 족하다. 하나님이 용서하셨다고 말씀하셨으면 용서하신 것이다. 그러나 가련하게도 우리의 그 즐거움은 절반일 뿐이다. 우리는 아직 하나님의 즐거움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고, 그 즐거움을 누림으로써 하나님으로 하여금 기뻐하심을 얻게 하지 못했다. 하나님으로 인하여 얻은 기쁨만이 참된 경배이다. 경배는 감사하는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기쁨으로 기뻐해야 한다. 시편에 “하나님이여 당신은 나의 기쁨”이라는 구절이 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을 나의 기쁨으로 여겨야 한다.
누가복음 15장에 언급된 세 가지 비유, 즉 잃은 양과 잃은 동전과 잃은 아들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여기에서 그 세 가지는 누가 잃은 것인가? 우리는 그 잃어버린 바 된 양이 얼마나 가련한가를 말하고 그 양이 황폐한 산에서 험한 길을 만나거나 가시덤불이 있는 길로 갈까 걱정한다. 그러나 우리는 양을 잃고 손해 본 목자가 얼마나 가련한지는 생각하지 않았다. 우리는 잃은 동전만을 생각할 뿐 동전을 잃은 그 여인을 잊었다. 우리는 손해 본 사람이 그 여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마지막 비유에서도 우리는 모두 탕자가 고생하고 처할 곳을 잃고 배고픔을 채우기 위해 쥐엄나무 열매도 얻지 못한 것을 생각할 것이다. 우리는 돌아온 탕자가 얼마나 큰 축복을 받았는지를 생각하며 그로 인하여 즐거워할 것이다. 그러나 그 아들을 잃은 사람은 누구인가? 그것은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이다. 고통을 당하고 손해를 본 사람은 아버지이다. 우리가 한번 돌아섰다가 순종할 때 하나님의 마음을 즐겁게 한다는 것을 생각한 적이 있는가? 복음의 최고봉이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은 죄인이 무엇을 얻었는가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무엇을 얻으셨는가이다. 돈을 허비한 사람은 당신이지만 손실을 입은 분은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응당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완전히 드려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린 것이 얼마나 되는가? 당신은 자신이 냉담해져도 괜찮다고 생각하지 말라. 당신이 냉담해질 때 당신의 그 냉담함으로 인해 하나님이 손실을 입으시는 것을 알아야 한다. 당신은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과 연합하는 것을 괜찮다고 생각하지 말라. 당신은 그것이 하나님과 얼마나 큰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 알아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에게 손실을 준다. 당신이 하나님 앞에 나와서 한번 더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고 기꺼이 자신을 내려놓고 그분으로 하여금 얻게 한다면 당신은 하나님의 마음을 즐겁게 하는 것이다. 나 개인의 작은 득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얻으셔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어떤 길을 선택할 때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할 수 있고 하나님으로 하여금 얻으시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마다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 하나님은 우주를 창조하시고 사람에게 모든 것을 주실 수 있지만 오직 사람의 마음만은 잃을 수 있으시다!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을 강요하실 수 없다. 하나님같이 위대하시고 전능하시며 모든 것을 소유하시고 만물을 창조하신 조물주가 작은 벌레 같고 티끌 같은 나로부터 무엇인가를 얻을 수 있다니! 이것은 어떠한 즐거움인가! 주님은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라고 하신다. 이러한 탕자 한 사람의 돌이킴이 하나님을 즐겁게 했다. 당신의 매우 작은 순종으로 우주를 포함하는 하나님이 즐거움을 얻을 수 있다. 헌신은 당신을 강요하거나 위축시키는 것이 아니라 당신을 하나님의 즐거움 안으로 이끌고 당신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즐겁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얼마나 기묘한가!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즐거움으로 들어감으로써 하나님께 즐거움을 드리기 바란다. (열두 광주리 가득히 11권 14-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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