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백성을 마음을 덮는 너울B
아침
주님의 보석 2011-10-23 , 조회 (330) , 추천 (0) , 스크랩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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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 3장의 구절들을 잘 읽어본다면 거기에서 말한 너울은 특별히 구약 성경의 의문(儀文)임을 알게 될 것이다. 심지어 성경까지도 너울이 될 수 있다. 성경에 있는 글자까지도 살아 계신 주님을 보지 못하도록 우리를 덮는 너울이 될 수 있다. 만일 성경의 문자가 우리에게 너울이 될 수 있다면 모든 것-당신의 아내, 당신의 남편, 당신의 친구들, 당신의 아이들, 당신 자신, 당신의 형제 자매들, 당신의 선한 행동, 당신의 나쁜 행동, 당신의 열심, 당신의 하나님을 위한 봉사-이 너울이 될 수 있다. 모든 것들이, 그것이 주님 자신이 아니라면 모두 너울이 될 수 있다. 그것이 얼마나 거룩한 것인가, 얼마나 하늘에 속한 것인가, 얼마나 영적인 것인가, 혹은 얼마나 종교적인 것인가는 문제가 아니다. 그것이 주님 자신이 아닌 한, 그것들은 너울이 될 수 있다. 당신은 아직도 이러한 너울들에 가리워져 있을지 모른다. 그것이 바로 당신이 여기 앉아 있으면서도 주님을 보지 못하는 이유인 것이다.
고린도후서 3장 18절에서는 『우리 모두는 너울을 벗은 얼굴로 거울처럼 주님의 영광을 바라보고』라고 말한다. 우리는 거울이다. 우리는 거울을 보는 것같이 본다. 거울은 보는 것을 반영(反映)한다. 우리는 너울을 벗은 얼굴로 주의 영광을 보고, 사십 일 동안 하나님의 얼굴을 본 후 하나님의 영광이 그의 얼굴에서부터 뿜어 나왔던 모세처럼 주의 영광을 반영해야 한다. 그가 산에서 내려왔을 때 그는 하나님의 영광으로 빛나고 있었다. 우리는 모두 그러해야 한다. 우리는 모든 것-악한 것, 선한 것, 거룩한 것, 거룩하지 않은 것, 종교적인 것, 비종교적인 것, 신령한 것, 신령하지 않은 것-을 잊어버려야 한다.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이 주님 자신이 아닐 때 우리는 그것을 버려야 한다. 우리는 원수의 간교함을 알 필요가 있다. 사탄은 당신이 주님을 바라볼 때 그 시선을 돌리기 위하여 무엇이든 이용한다. 사탄이 이용할 수 없는 오직 한 가지는 주님 자신뿐이다.
특별히 주님을 바라보는 사람들을 방해하는 것들과 주님을 접촉하고 누리는 사람들을 가리는 것들에 관하여 쓰여진 책이 신약에는 적어도 네 권 있다. 갈라디아서에서는 율법과 종교와 전통을 다룬다. 이 모든 것들이 분리시키는 너울이다. 율법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고 거룩한 것이었다. 신약에서까지도 율법을 거룩한 것으로 말하고 있다(롬 7:12). 그러나 율법과 같이 거룩한 것들까지도 당신을 그리스도로부터 분리시킬 수 있고 그리스도를 누리는 것(갈 5:4)으로부터 당신을 단절시킬 수 있다. 단지 부도덕한 책들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율법도 그리스도로부터 분리시킬 수가 있는 것이다. 당신의 얼굴이 그리스도 대신 율법을 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럴 때 율법은 즉시로 너울이 된다. 율법은 항상 종교를 만들며 종교는 오랜 전통들을 가지고 있다. 그리하여 율법과 종교와 전통은 모두 절연체가 되어 당신을 하늘의 전류인 주님 자신으로부터 절연(絶緣)시키는 것이다.
골로새서에서는 철학이라는 단어가 사용된다. 골로새서에 있는 철학이라는 말은 실은 영지주의(靈知主義:Gnosticism)를 의미한다. 영지주의는 높은 철학으로서 희랍, 애굽, 바벨론의 철학을 혼합한 데에 유대 철학적인 기독교 철학을 더한 것이다. 그것은 혼합물이다. 인류 문화의 최고의 산물인 그 철학이 초대 교회에 들어와 심각한 방해 요인이 되었다. 철학이 인류 문화의 가장 좋은 산물일지 모르나 그것은 주님이 아니므로 너울이 된 것이다. 그것은 처리되어야 한다.
히브리서는 유대교의 모든 좋은 것들이 단지 그리스도의 예표, 모양, 그림자로 간주되어야 할 뿐임을 보여 준다. 가령 당신이 우리를 방문하기 전에 내게 당신의 사진을 보냈다 하자. 나는 당신을 사랑하므로 당신의 사진을 귀중히 여길 것이다. 이것은 옳은 것이다. 나는 당신의 사진을 사랑한다. 이제 당신이 직접 나를 방문했다. 내가 당신을 보지 않고 계속 당신의 사진만을 보고 그 사진만을 사랑한다면 당신의 사진까지도 내 눈에는 너울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에게 그리스도의 여러 면의 사진을 보여 주려고 구약을 사용하셨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사진에만, 네 방면의 사진만이 아닌 서른 두 방면의 사진들에 집착하고 있었다. 그것들이 그들을 둘러싸 그리스도를 보지 못하게 했다. 그리스도는 울타리 밖에 계셨다.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에 관한 많은 것들을 보았지만 그리스도 자신은 볼 수 없었다. 이렇게 히브리서는 유대교 신자들에게 사진, 즉 유대교의 모든 제도를 버리고 그리스도를 보아야 한다는 사실을 말하기 위하여 쓰여졌다.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은 심지어 영적 은사들, 즉 방언을 말하는 은사, 방언을 통역하는 은사, 병 고치는 은사, 이적들까지도 그리스도인들에게 너울이 될 수 있음을 경고했다. 율법, 철학, 성경적인 항목들과 교훈들이 있는 유대교, 영적 은사들-이 모든 것들이 좋은 것이지만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얼굴을 가리는 너울이 되었다. 우리는 모두 주 예수께 이렇게 말해야 한다. 『주 예수여,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나는 성경이 당신을 계시하기 때문에 성경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나는 성경으로 너울이 되게 하지는 않으렵니다. 주 예수여,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나는 당신 자신의 인격을 사랑하며, 당신을 직접 사랑하며, 더욱 친밀히 사랑합니다. 나는 당신을 더욱 가까이 사랑합니다. 나는 당신을 멀리서 보기를 원치 않습니다. 나는 당신과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보기를 원합니다. 주여, 나는 당신의 입을 맞추도록 가까이하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주님께 이렇게 말해야 한다. 『주 예수여, 내가 은사를 좋아함은 당신을 접촉하는 것을 돕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그 은사가 너울이 된다면 나는 그것을 던져 버리겠습니다. 나는 주님만을 사랑합니다. 나는 당신 자신만을 직접적으로 친밀히 사랑합니다. 나는 어느 때나 당신에게 입 맞출 수 있을 만큼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과 나 사이에는 거리가 없고, 나됨도 없고, 격리됨도 없습니다. 나는 직접, 친밀하게 당신 앞에 있습니다.』 만일 당신이 이러하다면 당신은 변화산상에 있게 될 것이다. 당신은 변화될 것이고 빛날 것이다.(창세기 라이프 스타디 171-17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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