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을 따르는 데 있어서 절대적이지 않은 사람
아침
주님의 보석 2011-10-23 , 조회 (288) , 추천 (0) , 스크랩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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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를 쓸 때 하나님의 영은 롯의 처의 이름을 언급하기를 원치 않았다. 아브라함의 아내인 사라의 이름은 여러 번 언급되었지만 롯의 아내의 이름은 언급되지 않는다. 그것은 언급할 가치가 없었다. 그 가련한 성도는 남편의 뒤에서 걸으며 소돔 성을 돌아보았다. 그녀는 아마 자기의 자녀와 집과 다른 소유들을 돌아보았을 것이다. 그녀의 모든 소유는 소돔에 남아 있었다. 그녀의 몸은 그 성에서 이끌려 나왔지만 그녀의 관심과 마음과 갈망과 혼은 여전히 거기에 있었다. 따라서 뒤를 돌아볼 때 주님은 그녀를 소금 기둥이 되게 하심으로써 우리 모두에게 경고의 본을 삼으셨다.
누가복음 17장에서 주님은 제자들에 대한 경고의 본으로서 롯의 처를 사용하셨다. 그러나 오늘날 이 경고 아래 사는 그리스도인은 많지 않다. 우리는 참되고 구원받은 사람도 주님이 나타나실 때에 부끄러움을 당할 가능성이 있다는 경고를 주의해야 한다. 진정으로 나는 소금 기둥이 되기를 원치 않는다. 당신은 원하는가? 소금 기둥이 되는 것은 영광이 아니라 부끄러움이다. 믿는 이가 노천(露天)에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고난을 당하며 서 있는, 생명 없는 소금 기둥이 되는 것은 어떠한 부끄러움인가!
 
주님을 따르는 데 있어서 절대적이지 않은 사람
 
누가복음 14장 25절부터 33절은 주님을 따르는 데 있어서 절대적인 것에 대해 말한다. 우리는 절대적으로 주님을 따라야 한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웃을 사랑하라고 가르치지만 주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거룩한 말씀은, “누구든지 나에게 오는 사람이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뿐만 아니라, 심지어 자기 혼 생명까지 미워하지 않는다면, 나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14:26)라고 말씀하신다. 어떤 사람이 절대적이지 않고 합당하게 주님을 따르기는 불가능하다. 우리의 부모, 처자, 자녀들, 형제, 자매, 우리 자신의 혼 생명(개역 성경에는「목숨」이라고 되어 있음 : 역자 주)은 둘째가 되어야 한다. 오직 주님 자신이 첫째가 되어야 하며 우리는 절대적으로 그분을 따라야 한다. 주님을 위해 우리의 친척을 미워해야 한다고 말씀하실 때 주님은 실지로 미워함이 아니라 사랑의 미워함을 의미하신 것이다.
주님의 입에서 나온 이 부분의 말씀에서 우리는 절대적인 방법으로 그분을 따라야 함을 본다. 이것은 주일에 하나님을 경배하는 문제도 아니고 우리의 즐거움에 따라 가정 성경 공부를 하는 문제도 아니다. 그러한 가정 성경 공부는 또 다른 형태의 취미와 오락이 될 수도 있다. 하나님의 눈에서 당신의 가정 성경 공부는 농구 시합과 별 차이가 없을지도 모른다. 당신은 자신의 거실을 운동장 삼아 성경 공부할 때 자신의 성경공으로 경기를 한다. 당신은 주님을 따르는 데 있어서 절대적이지 않다. 나는 농담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을 말하고 있다. 나는 이것을 다른 사람에게 말할 뿐 아니라 내 자신에게 말하고 있다. 내가 이 메시지를 준비할 때 주님은 내게, 『너는 어떠냐? 내가 이 메시지를 전하도록 너를 강권했지만 너는 나를 따르는 데 있어서 절대적이냐?』고 물으셨다. 주님이 나를 위해 이것을 간증하실 수 있다. 부디 주님께서 내게 긍휼을 베푸시어 남에게 전파한 후 버린바 되지 않게 하시기를! 부디 그분의 사랑스런 모든 성도들에게도 긍휼이 있기를! 우리를 더 이상 혼미하지 않게 하는 엄중한 말씀이 우리에게 얼마나 필요한지! 만일 우리가 요한복음 3장 16절을 믿는다면 누가복음 14장 26절부터 35절도 믿어야 한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 대한 많은 메시지가 전해졌고 소책자들이 출판되었다. 그러나 누가복음 14장 26절부터 35절까지에 관한 메시지와 소책자는 어디에 있는가? 주의 회복 안에서 우리는 그분의 백성들에게 어떤 진리도 숨겨서는 안 된다. 주님을 따르는 데 있어서 절대적이지 않은 사람은 쓸모없게 된다. 오늘날 하나님의 경륜을 위해 주님의 손 안에서 진정으로 유용한 그리스도인이 몇이나 되는가? 내게 말해 달라. 하나님의 경륜에 관한 한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쓸모없게 되었다. 그들은 맛을 잃은 소금과 같다(눅 14:34).
그러한 그리스도인들은 맛을 잃었을 뿐 아니라 누가복음 14장 35절에 의하면 “땅에도 거름더미에도 적합하지 않아서 밖에 내버려집니다.”여기의 땅은 하나님의 목적이 성취될 수 있도록 하나님을 위한 것들이 자라나는 밭이다. 우주 안의 거름더미는 불못이며 거기에 더러운 모든 것이 쌓이게 될 것이다. 누가복음 14장 35절은 주로 오는 왕국 시대를 가리킨다. 왕국 시대에는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땅이 있을 것이며 또한 거름더미인 불못이 있을 것이다. 성경 교사들은 항상 사람들에게 두 장소, 곧 천당과 지옥이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구절에서 주 예수님은 맛을 잃은 소금이 땅에도, 거름더미에도 쓸 데 없어 밖에 내버려진다고 말씀하심으로써 제삼의 장소를 언급하신다. 롯의 처가 변한 소금 기둥은 어디에 있었는가? 천당에 있었는가, 소돔에 있었는가? 그것은 두 장소에 있지 않았고 제삼의 장소에 있었다. 누가복음 전체를 읽을 때 당신은 세 장소가 있다고 말한 장(章)을 본적이 있는가? 당신은 어디에 있을 것인가? 땅인가, 거름인가, 아니면 제삼의 장소에 버려질 것인가?
마태복음 25장 30절에서 주님은, 무익한 종이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쫓길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바깥 어두운 데는 제삼의 장소임에 틀림없다. 이것이 무엇인지, 어느 곳인지를 성경은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게으른 종이라면 주님이 다시 오실 때 당신은 무익하므로 땅에도 쓸 데 없고, 구원받았으므로 거름더미에도 쓸 데 없을 것임을 성경은 말한다. 그렇다면 당신은 어디에 있을 것인가? 당신은 영광스런 왕국도 아니고 불못도 아닌 제삼의 장소에 있게 될 것이다. 성경에 구원받고 패배한 자들을 위한 제삼의 장소가 준비되어 있음을 본 그리스도인들은 많지 않다. 이것은 엄중한 말씀이다.(창세기 라이프 스타디 110-1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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