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 - 작은
아침
주님의 보석 2011-10-23 , 조회 (235) , 추천 (0) , 스크랩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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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 - 작은
 
사람의 관념과는 반대로, 만나는 작았다(출16:14下). 보통 사람들은 큰 것을 귀중하게 여기며, 우리는 종종 주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작음을 찬양한 찬송가를 찾아 볼 수 있는가? 많은 찬송가들을 보아왔지만 그리스도의 작음을 찬양한 찬송은 찾지 못했다.
건축 재료들은 매우 크지만, 음식은 우리 입 안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작아야 한다. 우리가 취하는 음식은 먹을 수 있도록 작아야 한다. 큰 고깃덩이를 먹으려면, 우리는 먼저 그것을 작은 조각들로 잘라야 한다.
역대로 주님을 믿은 이들 중에서 주님의 작음의 귀중함을 충분히 인식한 사람들은 거의 없다. 많은 이들이 사복음서를 위대한 사람의 생(生)의 기록으로 여긴다. 사실상 복음서들은 그리스도의 위대함을 강조하지 않는다. 물론 주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 즉 왕가의 자손이셨다. 그러나 그분은 구유에서 나셨고, 작고 비천한 마을의 목수의 집에서 자랐다. 이것은 주님이 그분의 위대함을 표명하려는 것이 아님을 가리킨다. 반대로 그분은 사람의 눈에 작은 것으로 보이기를 더 좋아하셨다.
요한복음 6장에 따르면, 군중은 주 예수님을 왕으로 추대하기를 원했으나, 그분은 이렇게 그분 자신을 높이는 것으로부터 피하셨다. 다음날 아침 그분은 돌아오셔서 그분 자신을 생명의 떡으로 나타내셨다(요 6:35). 그분은 왕이 되기를 원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그분의 백성이 그분을 그들의 생명과 생명 공급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음식이 되기를 원하셨다. 위대한 분이 되는 대신, 주님은 우리를 위한 음식이 되기 위해 작은 자가 되기를 원하셨다.
그리스도가 승천하신 때부터 지금까지, 기독교 교사들은 그리스도의 위대함과 높으심만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는 여전히 우리가 먹을 만큼 작게 되기를 원하신다. 교회 역사상 위대한 부흥들은 그리스도의 작음에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부흥들이 보통 그리 오래 지속되지 못했던 것이다. 그뿐 아니라 기독교의 부패는 항상 위대함의 문을 통해 들어온다. 만일 우리가 이 문을 닫고자 한다면, 부패의 어떤 성분도 교회 안으로 들어올 수 없을 것이다.
주님은 우리의 천연적인 관념과는 전혀 다른 분이시다. 주님의 회복 안에 있는 우리조차도 큰 것들을 보기를 갈망할 수 있다. 큰 것을 갈망하기 때문에, 오순절파나 은사주의 운동 안에 있는 사람들 중 많은 이들이 자랑하고 과시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오늘날의 오순절주의 운동에서 일어나는 병 고침과 기적들에 대한 많은 보고들을 그대로 다 인정하지 못한다. 어떤 이들은 참된 신유가 없는 특별한 집회에서 많은 병 고침이 일어났다고 자랑할지도 모른다.
몇 년 전의 보고서들은 티모르 섬에서 큰 부흥이 일어났다고 유포했다. 이 보고서들에 따르면, 기적이 너무도 흔했다는 것이다. 심지어 사람들이 죽음에서 부활했다는 주장도 있었다. 과거에 그곳에 선교사로 있었고 지금은 주의 회복 안에 있는 사람이 무엇이 일어나는가를 관찰하기 위해 이 부흥회에 참석했다. 한 집회에서 인도자는 집회하는 동안 물이 포도주로 변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 형제는 분명 그 인도자가 숨겨두었던 병을 꺼내서 그 안에 있는 포도주를 물이 담긴 통 안으로 붓는 것을 보았다. 얼마나 거짓된 것인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큰 것을 갈망하기 때문에, 이 같은 거짓들이 기어 들어오는 것이다.
기적들은 음식이 아니다. 심지어 진짜인 기적의 치료도 우리의 음식이 될 수 없다. 주 예수님은 우리의 음식이 되기를 원하신다. 그분을 음식으로 받아들이지 않고서도 주님의 치료를 받을 수 있다. 치료가 위대하고 기적적이어도 여전히 음식의 본질은 없을 수 있다. 그러나 주님이 우리의 생명 공급이 되심으로써 합당한 방법으로 신성한 치료를 받을 수 있다. 이와 같은 치료는 외적으로 큰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외관상 작은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에서, 생명 공급을 하지 않는 것들은 참되지도 않고 정상적이지도 않다. 그것들은 음식의 본질과는 반대된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사람들은 주 예수님을 높이려고 애썼으나, 그분은 항상 이런 높임을 피하셨다. 요한복음 2장에서 유대인들은 주 예수님에 의해 이루어진 기적을 보았다. 그러나 그분은 그들에게 그분자신을 의탁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기적들로 인해 감동받았던 자들을 신뢰하려 하지 않으셨다. 요한복음 3장에서, 니고데모는 밤에 주 예수님께 왔다. 어떤 기적도 없이, 주님은 아주 일상적인 방법으로, 조용하고 은밀하고 작고 고요하게 이 사람에게 생명이 되셨다. 이것이 신성한 방법이다.
주님의 회복 안에 있는 우리까지도 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기를 바랄 수 있다. 이런 갈망들은 가끔 고통을 야기시킨다. 큰 것을 갈망한 결과는 항상 고통이다. 그러나 이 고통은 큰 것을 갈망하는 것을 끝내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성경이 우리에게 만나의 크기에 대해 말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만나가 얼마나 작았는가를 모른다. 그리스도의 위대함도, 그분의 작음도 다 측량할 수 없다. 성경에 있는 만나에 대한 상세한 기술은 단지 만나의 작음에 대해 한 단어를 쓰고 있다. 만나는 양식으로 섭취할 만큼 작다. 참 만나이신 그리스도는 우리가 섭취하고 소화하고 흡수할 만큼 작은 분이다. (출애굽기 라이프 스타디 261-26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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