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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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보석 2011-10-24 , 조회 (249) , 추천 (0) , 스크랩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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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
율법을 주심에 관하여 출애굽기 20장 1절은 큰 의미가 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일러 가라사대』(원문 참조). 여기서 접속사 그리고(and)는 20장을 19장과 연결시킨다. 출애굽기 19장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백성을 그분의 산으로 인도하여 그분과 교통하게 하셨음을 본다. 하나님은 백성을 애굽에서 불러내어 그분의 산에서 그분 자신께로 모으셨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과 교통하기 위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오셨음을 뜻한다. 물론 사람은 하나님이 계시는 하늘에 올라갈 수 없었다. 그러나 출애굽기 19장에서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을 만날 수 있는 어떤 산에 내려오셨다. 하나님이 백성을 만나고 그들이 교통 안에서 하나님을 접촉하는 바로 그곳에서 율법이 주어졌다.
출애굽기 19장과 20장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성육신 이전에 하나님이 그분의 백성을 만나기 위해 내려오셨음을 본다. 심지어 출애굽기 20장 전에도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다. 그러나 그 나타나심은 규모가 매우 작았다. 출애굽기 19장과 20장에서 하나님이 백성을 방문하여 율법을 주실 때 이백만 명 이상이 하나님의 산에 모였다.
백성을 애굽에서 불러내어 하나님의 산으로 인도하신 후에 하나님은 그들과 교통하며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출애굽기 31장 18절은 하나님이 그들과 친교(親交)하셨음을 나타낸다. 하나님의 산에서 하나님은 사람과 말씀하시며 대화하시며 친교하셨다. 19장 4절부터 6절에 의하면 하나님은 그들을 독수리 날개로 업어서 그분 자신에게로 인도했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또한 그들이 그분의 소유, 곧 특별한 보물이 되고 그분께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하나님과 백성 사이의 매우 적극적인 대화의 일부이다. 그런 대화는 어떤 율법의 반포가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분의 백성에게 말씀하시는 교통의 시간이었다.
모세가 산에서 하나님과 친교하며 사십 일을 보낸 체험을 이런 빛 안에서 상고해 보라. 산에서 내려올 때 그는 두 개의 돌판에 새겨진 십계명 이상의 어떤 것을 소유했다. 그는 하나님의 요소로 철저히 주입된 사람이었다. 산에서의 친교의 날 동안에 모세는 하나님의 성분이 자신 안에 주입되는 신성한 체험을 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에게 십계명을 주셨고 이스라엘 자손이 우상을 숭배하는 것을 보고 모세가 돌판을 던져 깨뜨렸다고 말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이 문제를 합당하게 취급하지 않는다. 성경은 모세가 두 돌판을 받았을 뿐 아니라 그의 안에 하나님의 요소가 주입됨으로써 그의 얼굴이 빛났음을 말한다. 모세가 돌판은 던져 깨뜨릴 수 있었지만 그가 산에서 하나님과 교통하는 동안 받았던 주입을 제거할 수는 없었다.
원칙적으로 이것은 주님에 대한 우리의 체험에 있어서도 사실이다. 우리는 율법을 지킬 수 없을지라도 그분과 친교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우리 안에 주입된 것을 제거할 수 없다.
요한복음 15장처럼 분명히 포도나무의 가지는 어떤 계명을 지키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다. 그들은 다만 포도나무 안에 거하며 포도나무의 생명을 살아낼 뿐이다. 그러나 나는 출애굽기 20장에 있는 계명과 매우 유사한 요한복음 14장 21절과 23절에 대해 의아해했다. 요한복음 14장 21절은, 『나의 계명들을 받아서 지키는 사람은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말하며, 23절은, 『나를 사랑하면 나의 말을 지킬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최소한 어느 정도 주 예수님의 이 말씀은 출애굽기 20장에 있는 말씀의 반복인 것 같다. 그 이유는 생명의 원칙에 관한 한 구약과 신약은 동일하기 때문이다. 우리 스스로는 구약에 있는 하나님의 계명이나 신약에 있는 주님의 말씀을 지킬 수 없다. 이것에 관하여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우리는 율법을 지킬 수 없다고 말했다. 특히 바울은 우리의 외적 행위일 뿐 아니라 내적 상태인 탐심에 관한 계명을 다룬다. 비록 우리가 스스로 모든 계명들을 지킬 수 없지만 그분으로 주입될 수 있도록 그분 안에 거할 수 있으며 그분이 우리 안에 거하심을 체험할 수 있다. 산에서의 모세의 체험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자. 하나님으로부터 놀라운 옮겨 부음을 받았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 안에 거할 수 있었고, 하나님은 그 안에 거하실 수 있었다. 그러한 주입과 상호 거함의 결과 모세는 자기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기 안에 옮겨 부어진 하나님의 본질에 의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수 있었다.
율법은 신성한 계명들의 열거일 뿐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스럽게 추구하는 자들 안에 그분의 본질을 주입하는,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이다. 만일 우리가 십계명을 다만 율법으로 간주하고 지키려고 노력한다면 그것은 율법에 대한 합당한 접근이 아니다. 우리는 십계명을 이렇게 적용해서는 안 된다. 반대로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을 추구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이 문제에 있어서 우리는 빌립보서 3장의 바울처럼 사랑함으로 그리스도를 추구하고 그분을 좇아가는 자가 되어야 한다. 주님을 사랑함으로 우리는 그분을 추구해야 하며 접촉해야 하며 그분의 임재 안에 거해야 하며 그분과 함께 거해야 한다. 만일 이렇게 한다면 우리는 매일매일 하나님으로 주입될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율법에 따라 행할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주님을 접촉함으로써 우리 안에 주입된 주님께 속한 것에 의해 율법의 요구를 지킬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본질로 철저히 주입되었다면 그분 자신이 우리 안에서 그분 자신의 율법을 지킬 것이다. 우리는 율법이 하나님의 산, 곧 그분의 백성이 그분의 본질로 주입되는 곳에서 주어졌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율법을 다만 계명으로 간주해서는 안 되며 그분을 표현할 뿐 아니라 사랑 안에서 그분을 추구하는 자들 안에 그분을 주입하는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증거로 간주해야 한다.(출애굽기 라이프 스타디 3권 165-17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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