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분의 신부가 되도록 교회를 거듭나게 하심
아침
주님의 보석 2011-10-24 , 조회 (180) , 추천 (0) , 스크랩 (0)
출처
원문
그분의 신부가 되도록 교회를 거듭나게 하심
 
주 예수님께서는 그분의 신부가 되도록 교회를 거듭나게 하셨다(요 3:3, 5, 29-30). 주님은 신성한 생명과 신성한 본성을 가지신 신랑이시다. 만일 우리가 그분의 신부가 된다면 우리도 또한 신성한 생명과 신성한 본성을 가질 것임에 틀림없다. 이를 위해, 거듭남은 필수적이다. 신성한 생명과 본성을 떠나서는 결코 그리스도의 동반자가 될 수 없을 것이다. 요한복음 3장에서 우리는 거듭남이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신부가 될 자격을 부여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오직 신성한 생명으로 거듭나서 그분의 신성한 본성을 받은 후에라야 죄인인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을 수 있다. 신성한 생명과 본성을 소유하신 그분은 너무도 높고, 우리는 너무도 낮다. 우리가 어떻게 그분의 배필이 될 수 있는가? 이것은 오로지 거듭남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우리는 거듭남을 통해서 또 다른 생명, 즉 신성한 생명을 받을 수 있다. 이 생명 안에서, 이 생명에 의해 우리는 그리스도의 배필이 될 수 있고 그분과 짝지어질 수 있는 자격을 부여받는다.
이 시대의 마지막에, 그리스도는 그의 구속자들과 결혼하여 그들을 그분의 아내로 취하기 위해 오실 것이다(계 19:7). 현 시대는 「데이트하는」 구혼의 시대, 즉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간의 약혼 시대이다. 이 시대의 마지막 날에, 영광스러운 결혼식 날이 올 것이며, 그때에 그리스도는 그분의 구속된 자들과 결혼하실 것이다. 그리스도와 그분의 구속받은 자들과의 이러한 결혼에 대한 계시가 성경의 중요 계시이다.
성경의 마지막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영원 속에서 영원히 그분의 백성과 결혼 생활을 누리시리라는 것을 볼 수 있다. 영원히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새 예루살렘이 어린 양의 아내가 될 것이다. 이것이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로맨스의 완성이다.
 
성경 전체가 신성한 로맨스임
 
성경 전체가 하나의 신성한 로맨스이다. 이것은 성경이 매우 로맨틱한 책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특히 아가서에서 그러하다. 어떤 현대주의자들은 아가서가 성경에 포함되어야 하는지를 의심한다. 심지어 몇몇 온당한 그리스도인 교사조차도 이 책에 관해 의심을 가졌었다. 나는 젊었을 때 왜 성경에 한 남녀의 로맨스와 관련된 책이 있는가를 이상하게 여겼었다. 이 책은 우리와 그리스도의 사랑의 관계를 묘사한다.
아가서에 의하면, 주님에 대한 우리의 관계는 매우 로맨틱해야 한다. 만일 우리와 그리스도 사이에 로맨스가 없다면, 우리는 로맨틱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종교적인 그리스도인들이다. 내가 의미하는 로맨스가 무엇인지를 알기 원한다면, 아가서를 기도로 읽어 보라. 이 책을 기도로 읽을 때, 당신은 주님과 로맨틱하게 될 것이다. 당신은 그분에 대한 사랑에 미치게 될 것이다. 성경은 신성한 로맨스이다. 그러므로 주님과 우리의 관계는 더욱더 로맨틱하게 되어야만 한다.
신성한 로맨스인 성경은 하나님의 구애와 사람과의 데이트가 가득한 기록이다. 반복해서, 하나님은 이러한 방법으로 사람에게 나타나신다. 여기에 대한 두 가지 예가 있다. 첫 번째 예는 하나님이 벧엘에서 야곱에게 오신 것(창 28:10-22)이고, 두 번째 예는 호렙 산에서 모세에게 하나님이 오신 것이다.
성경은 또한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구혼으로 가득하다. 한 청년이 어느 여자에 대해 끊임없이 주의를 기울인다면 그는 구혼하게 되고, 그녀를 성가시게 할 지경으로 구혼한다. 마찬가지로 주님께서는 우리 사람에게 구혼하심으로 우리를 괴롭히신다. 성경은 하나님의 그분의 백성에 대한 구혼을 기록한다. 신약에서 우리는 주 예수님께서 그분의 제자들을 부를 때 그들에게 구혼하고 계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주 예수님은 반복해서 이러한 구혼의 방식으로 베드로를 괴롭히셨다. 베드로가 주님께 온 것이 아니라 베드로에게 주님이 오셨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요한복음 21장에서 주께서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것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셨다(15절). 주님께서는 두 번 더 그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셨다(16, 17절). 베드로에게 이 같은 질문을 하심으로 주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구혼을 하고 계셨다. 그분은 베드로가, 부모님을 존경하는 아이나 다른 친구를 관심하는 친구나 불쌍한 사람을 가엽게 여기는 부자처럼 그분을 사랑하기를 원하지 않으셨다. 주님께서는 베드로가 그분을 감동적인 사랑, 즉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를 위한 한 젊은 여자의 감동적인 사랑과 같은 사랑으로 사랑하기를 원하셨다. 우리는 요한복음 21장과 3장을 따로 떼어 읽어서는 안 된다. 만일 베드로가 그분을 사랑했다면, 그에게 물으신 그분은 신부를 취하기 위해 오신 바로 그 신랑이셨다. 요한복음 3장에서 신랑으로 오신 주 예수님에 대한 계시에 근거할 때, 21장에서 그분의 베드로와의 대화는 구혼의 방식으로 되었음을 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요한복음 14장 21절과 23절에서도 주님의 말씀은 동일하다. 23절에서 주님께서는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나의 말을 지킬 것입니다. 그러면 나의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서로 거처를 정할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셨다. 아버지와 아들이 주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와 함께 거처를 만드는 것은 결혼 생활에서 함께 살아가는 것에 대한 언급이다. 주 예수님과 거처를 같이하는 것은 그분의 배우자로서 그분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다.
주 예수님께서는 그분의 신부와 함께 친교를 나누는 신랑에 관한 것을 자주 언급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그분의 말씀의 이러한 측면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그러한 인식은 주님의 말씀을 아주 다른 의미로 받아들이게 해왔다. 그러므로 나는 그분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과 구혼에 관한 이 말이 우리의 관념을 변화시키기를 원한다. 주님이 우리에게 오신 것은 그분이 우리와 데이트하시고 구혼하신 것이다.(출애굽기 라이프 스타디 221-224쪽)

추천 스크랩 전체목록